고리원자력발전소 바로 옆에 야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봉우리의 이름이 바로 <미친년 밑바닥>이었다. 어때요 ? 재미있는 지명이 아닙니까 ?
그 산에는 소나무들이 빼곡한데 유독 정상부근에는 소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싯뻘건 황토를 드러낸 모습이 마치 미친년궁둥짝 같다고 해서 주민들은 그렇게 부른단다.
그 곳은 예비군 훈련장이나 유치원, 국민학교, 교회 등에서 소풍 장소로도 아주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었는데 내가 미친년밑바닥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곳으로 놀러가서 정말로 미친사람처럼 웃으면서 너무 즐겁게 놀았던 때문이다.
때는 무더운 여름 어느 토요일 오후에 우리 과직원들은 발야구를 하러 미친년밑바닥에 올라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구름이 오락가락 하더니 소낙비가 세차게 쏟아졌으나 그곳에는 비를 피할 곳도 없었고 내기 시합이 한창인데 비를 피할 의사도 없었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날씨가 더워 비지땀을 흘리던 터에 소나기가 쏟어지니 시원하였기 때문이었다.
- 야 ! 내 볼 나간다 ! 받아라 !
하고는 배구공을 힘있게 차고는 투수가 일루로 뛰어가다가는 그만 개구리 뻗듯이 미끄러졌다.
- 하하하하 ! 김형 화잇팅 !!
다음에는 능글맞은 신장X 씨가 일부러 공을 미스 최가 있는 외야로 날린다.
- 슛 !
외야수를 맡고있던 거구 미스 최가 날아가는 공을 잡으려고 달려 가다가 역시 쭈루루 미끄러지면서 치마가 팬티위까지 걷어올라버렸다.
- 우하하하 ! 호호호 ! ㅋㅋㅋㅋ !
우리들은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빗물에 젖은 황토가 어찌나 미끄럽던지 도저히 제대로 서서 걸을 수가 없었는데 그 곳에서 뛰어다니며 경기를 해야 했으니...
점잖하기로 유명한 미세스 리가 넘어지자
- 아이구 ! 저를 어쩌나 !! 어서 일어나시죠 ?
짖궂은 마흥X 씨가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는 척 하다가는 되레 끌어안고 두번 세번 미끄러져 버린다.
- ㅎㅎㅎ ㅋㅋㅋ
미세스 리의 바지는 온통 황토물이 들고 마흥X 씨는 자꾸 놀려댄다.
- 아이구 ! 지금 바지 벗어요 ! 내가 빗물에 빨아 드릴께 !
- ㅋㅋㅋ ㅎㅎㅎ
도무지 황토는 연세가 많고 점잖은 이 선생님이나 젊고 팔팔한 박 기사나 말광량이 미스 박이나를 구분을 하지 않고 미끄러지게 하였다.
- 어이구 ! 우리 박 과장님 미친년밑바닥에 키스를 하네 ! ㅎㅎㅎ ㅋㅋㅋ
내가 넘어지자 직원들은 더욱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 했다.
우리들 30 여명은 흠뻑 비에 젖고 몸과 옷에 황토물이 들고 또다시 그황토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일행은 그렇게 두세시간을 신바람나게 놀고는 굴뚝집(높은 굴뚝이 남아있는 공장을 개조한 식당)에 가서 미리 주문한 염소고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소주잔을 주고 받았다.
- 아 ! 나는 오늘 미스 정이 무슨 색 팬티를 입었는지 맞출 수 있다...! ㅎㅎㅎ ㅋㅋㅋ
미스 정은 쑥스러워 하지도 않고 재빠르게 한마디 하고는 염소고기를 먹기에 바쁘다.
- 오늘 내 팬티는 빨간색 ! 왜 ! 못 본 사람 있어요 !
ㅎㅎㅎ ㅋㅋㅋ ㅎㅎㅎ
10년 묵은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하루였다.
잠실 베레모
알콩달콩 (32) <昔有桓國>을 아십니까?
내가 군대시절에 잠시 종로서적에 들렸다가 <보병궁복음서>라는 꽤 두툼한 책을 사고 싶었으나 솔직하게 말하여 그 당시에 호주머니에 책값 8,000원이 없어서 사지 못했다.
내용은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신비스런 영감에 의한 자동기술로 예수님의 전생애를 기술한 것이란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린시절 및 성장과정이 베일에 가리워져 있다. 태어나기 전후와 소년시절의 지극히 단편적인 이야기만이 기술되어 있고 예수님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유아시절을 보냈다는 것인데 과연 그후 예수님이 어디에서 어떠한 교육을 받으며 어떻게 상장하였는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나는 고리원자력본부 근무시에 동료들에게 그 책에 100,000원을 주겠다고 현상금까지 내건 적이 있었으나 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날 나는 부산 서면에 있는 영광서적에 가서 <성약성서>로 재출간 된 것을 알고 비로소 그책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내가 관심이 있었던 책 두권, <한민족의 뿌리사상(송호수 박사 저)>과 그 유명한 <환단고기>였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먼저 <성약성서>를 읽다가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데 그이유는 "이스라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고향이 <수메르>인데 이 <수메르>의 주해에 <수메르>는 우리조상이 고대에 세운 12桓國 중의 하나다."라는 설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 .....아니 대체...? ... 예수님의 생애가 궁금하여 읽으려고 산 책에 우리의 고대 12桓國이 연관되어 나올 줄이야 !!!!
대체 나는 桓國이라는 국가 이름을 처음 듣는데 그 환국의 크기가 <환단고기>에 의하면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 되는 대제국으로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었고 "12환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나는 <한민족의 뿌리사상>과 <환단고기>를 읽었고 서점에 가서는 민족사관이 담긴 역사책을 닥치는대로 사서 읽었다.
그 결과 나는 韓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조상들의 발자취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머리속에 박혀있던 식민사관과 춘추사관에서 말끔하게 벗어날수 있었으니 인생을 두번 사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제목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이란 무슨 의미냐고요?
일제는 우리의 역사를 수없이 왜곡 날조하면서 삼국유사를 조선사 재구성을 위한 주요 사료로 활용하였다.
이유는 삼국유사는 단군을 신화로 각색하여 일제가 우리의 고조선을 싹뚝 잘라내기에 아주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제에게 있어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는 昔有桓國이라는 말이 눈에 가시같았다.
풀이하면 -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인데 고조선도 잘라내 없애버리려고 작심한 일제에게 있어서 그보다도 더 가마득한 역사인 환국을 그냥 놔둘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치졸한 일제의 무리들은 <昔有桓國>을 <昔有桓仁>으로 날조하여 버렸으니
-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가 변하여
- 엣적에 환인이 있었다. 로 둔갑하여 결국은 고대에 있었던 <桓國>이 <桓仁>이라는 사람으로 되어버린것이다.
이런 사유로 일본 동경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삼국유사 영인본에는 지금도 <昔有桓仁>으로 남아있단다.
일제하에서 민족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말했다.
<모든 교육의 기초는 국사교육으로부터 출발한다.>
국사교육이 바로 되어야 인생관 및 가치관이 바로 설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제시대의 조선사편수위원회가 편집한 국사를 거의 그대로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데...
식민사관의 제조기 역할을 한 조선사편수위원회의 편수방침이...
벗님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
잠실 베레모
알콩달콩(33) 조선청년들은 조선역사를 읽을 수록 조상을 혐오하게 가르치라 !
<조선청년들은 조상의 역사를 모르게 하라. 역사를 읽을수록 조상들을 혐오하도록 가르쳐라.>
이는 잠실베레모가 지어낸 말도 아니요 1980년대 조선일보의 서희건 기자의 역사 연재기사를 읽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것이 일제의 <조선사 편수위원회 편수방침> 이었단다.
이 얼마나 가공할 노릇인가 !
일제는 이러한 방침하에 우리의 역사를 낱낱히 날조하여 참으로 기가 막힌 조선사를 편수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잠실 베레모와, 여러 벗님들과 모든 한국인이 조상의 역사라고 배운 국사 내용인것이다.
한번 생각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역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라고 하면서도 단군의 신화로부터 출발하여 약 1500년이 얼렁뚝딱 지나가버리고 위만조선 기자조선이 튀어나왔다가 한사군이 시작하여 도대체 우리국사의 시발점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기막힌 역사의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후 삼국의 분쟁과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시대의 무인 정변, 지긋지긋한 외세의 침략, 조선시대의 사색당쟁과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로 결국 망할 수밖에 없고 일본의 지배를 받지않을 수없는 지지리 못나고 바보탱이같이 조상들....
이것이 나의 머리속에 남아있는 국사의 부정적 관념들입니다.
그러나, 민족사관에 의한 국사는 완전히 그 발상과 역사의 무대가 판이합니다.
간략하게 요약을 해보면....
우리민족의 역사는 태초 인류의 시원부터 시작을 합니다.
중국의 북방과 해안지역은 東夷족의 주요활동무대였습니다.
최근 산동반도와 발해만부근에서 발굴되는 홍산문명, 대문구문명 등은 은허문명보다 훨씬 앞선 문명들로서 중국의 역사로는 해석이 어려우며 이는 바로 우리 조상들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환인들의 환국시대로부터 시작하여 환웅들의 배달국시대와 단군들의 고조선시대로 이어저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시대로 그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출발은 중국의 요순임금보다 앞서고 있으니 고대 동아시아의 역사는 북방계인 우리 東夷민족이 주인공이었으며 아니, 최근의 청나라도 우리와 형제인 여진족의 나라이지 漢族의 나라는 아닌것입니다.
삼국시대의 일본은 백제의 지방정권에 불과하여 백제의 왕자와 공주가 일본으로 건너가 왜국왕이 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나는 고리원자력본부 근무시절에 인근 마을에 있는 월래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에 <환단고기>의 열풍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단군성전 건립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환단고기>는 구한말에 계연수 선생이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던 민족사서들을 하나로 편찬한 책인데 사본이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다가 1980년대에 국내에 알려지면서 고대사의 붐을 가져온 사서로서 그 내용에 우리가 잃어버린 엄청난 상고사를 포함하고 있다.
인류의 시원에 관한 이야기며 환인시대와 환웅시대가 기술되어있고 진한을 중심으로 한 번한 마한 등 삼한관경의 역사와 47대 단군들의 역사가 고스란이 들어있어(물론 규원사화에도 47대 단군의 역사가 전해오고 있었음) 실로 일만년의 우리 역사를 담고 있었으니....
물론 <환단고기>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나는 다만, 그 엄청난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환단고기>가 모조리 위서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그러한 의심이 있다면 <환단고기>를 철저히 연구하여 어느 부분이 위서이며 어느 부분이 史實인지를 가려내고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리라고 믿는다.
아무튼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에 의하면 단군은 엄연한 우리의 역사요 實史이다. 단군은 한사람을 호칭하는 이름이 아니고 무려 47대의 통치자로서의 일반칭호 즉 천제와 같은 일반명사에 불과하니 그의미는 檀君 그대로 <배달나라의 임금>이란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에서는 47대 단군들의 치적을 일일이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이 일제가 만든 조선사, 우리가 지금도 배우고 있는 국사에서는 단군 한사람의 신화로 기술하고 있으니 어찌 어이없는 일이 아니랴 !!
아무튼 우리는 지금 47대 단군조선의 실체를 다시 찾게되었으니 다행이며 이러한 단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1980년대에 단군성전을 건립하자는 운동이 세차게 일어났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이를 우상숭배라 하여 엄청난 반대를 하고 나섰다.
지금 우리민족 최고 조상인 단군성전이 서울 사직공원 한쪽의 언덕바지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기독교 교인으로서 단군(한사람이든지 환단고기에서 보는 것처럼 47대 통치자의 칭호이든지)을 神으로 섬기지는 아니할 것이로되 단군성전을 커다랗게 잘 짓고 전 민족이 그를 숭배하고 이 개국이념을 기리는것에 대해서는 적극 찬성을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우리 민족이 힘겹게 찾아온 상고사와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치부하고 무조건 부정하고 설명과 이해와 양보와 타협이 없는 막무가내식의 반대를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큰 일로다....!!
아무리 외래종교를 믿더라도 얼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데....
국조 단군의 동상을 도끼로 내리찍는 만행을 저질러도 이를 책망하려고 하지 아니하니....
이렇게 단군성전 건립에 대한 극심한 교회의 반대운동은 나로 하여금 교회에 회의를 느끼게 하였고 나는 점점 교회에 출석도 하기싫었고 자꾸 예배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갈등에 대하여 아내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차에 드디어 어느날 커다란 부부싸움으로 번져나갔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순간적으로 감정을 폭발하였고 나는 아내를 심하게 때리고 하룻밤 집을 뛰쳐나가는 소동까지 벌렸다.
하루가 지나고 집에 들어와 서로의 감정을 누그려트리고 화해를 했지만 그때의 부부싸움의 상처는 오래 지속되었고 또 반면에 그 싸움을 교훈으로 좀처럼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으니 전화위복이련가.
....나의 아내여 ! 어찌되었던지 그때 내가 너무 화를 내고 또 당신에게 폭력을 휘둘렸음을 미안하게 생각하오.... 20년이 지난 지금....
잠실 베레모
알콩달콩(35) 나에게는 형님 한분이 있었소.
나에게는 형님이 한분 있었다. 맏형님이니까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났다.
그 형님에 대한 추억은 어릴적에 군대에 간 형님을 면회가던 기억과 휴가를 나온 형님이 따블백 속에서 C레이션을 꺼내주던 기억으로 부터 출발한다.
나는 형님을 자꾸 졸라대자 형님은 나에게 멋진 스케이트 하나를 만들어 주었고 나는 동네에서 제일 폼나게 만든 스케이트를 애지중지하면서 몇년을 사용하였다.
한번은 형님과 가재골에 가재를 잡으러갔다가 가재는 한마리도 구경을 못하고 빈 깡통만 두드리며 골짜기를 내려온적도 있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형님은 기울어가는 집안의 기둥이 되어 가족들을 먹여살리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중학교도 못다니고 있던 나는 함께 살자고 붙잡는 형님 몰래 집을 뛰쳐나와 대전의 어느 영아원에 급사로 들어가서 독학과 고학으로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전매청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했을 때 형님은 우리동생이 취업을 했다고 너무 좋아서 동네 어저씨들에게 먹걸리 한말을 사셨단다.
뒤늦게 배운 술을 좋아하시고 한참 새마을운동을 벌릴때는 마을 이장을 맡아 골목길을 모조리 넓혀 경운기가 들어가게 하였고 전기를 끌어오고 마을회관을 짓고....동네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도 받으셨다.
그 형님이 50세가 넘어 시름시름 앓기시작하였는데
내가 고리원자력본부에 근무하던 어느 겨울날, 뜻하지 아니한 형님의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참으로 처음 받아보는 형님의 편지요, 그 내용이 또한 너무 간절하였다.
- 동생, 내가 그동안 술을 많이 마시고 집안 살림도 돌보지 못해 동생에게 미안하네.
동생도 어머니 모시고 고생이 많겠으나 내가 그동안 밀린 막걸리 값이 20만원인데 좀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게나. 그러면 내가 이제부터는 마음을 잡고 바르게 살겠네....
사실 한동안 형님은 가정불화가 심했었는데 아 ... ! 우리형님이 마음을 잡으신단다 !
나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뛸 것만 같았다. 그 때가 음력설 보름 전쯤이었으니 설날 고향에 가서 밀린 20만원 막걸리 값도 갚아 드려야지..! 하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산이었다. 편지를 받고서는 불과 며칠이 안 된 어느 일요일 오후 한가한 시간에 따르릉 ! 따르릉 ! 요란스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 여보세요 ! 네? 아니, 뭐라고요 !!??
전화소리에 예민하신 어머님이 먼저 눈치를 채시고는..
- 얘 ! 무슨 전화니 ? 엉 ! 무슨 전화냐 ??
전화에서는 어머님께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으나 상황이 어떻게 숨길 처지가 아니었다.
- 형님이...
어머님께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아니하였다.
- 뭐라고 ! 얘야 ! 빨리 가자 !
오히려 앞장을 서시는 어머님을 떼어둘 방안도 없어서 급히 동네 약국에 가서는 현금 70만원을 빌려 가지고는 택시를 불렀다.
경상도 끝 고리에서 충남 연무읍까지 나, 어머니, 아내, 아들 둘을 모두 태우고서 밤 택시는 고속도로의 공기를 갈랐다.
나는 어떻게 형님의 장례를 치렀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형님의 돌아가신 얼굴 모습이 무척 평안해 보였다는 것과 마지막 가시는 상여를 붙잡고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일곱 살 때 형님에게 스케이트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가 처음에는 거절을 당하고 엉엉 울었듯이,
- 엉 엉 엉 ! 엉 엉 엉 !
내가 너무 슬프게 우는 바람에 다른 가족들은 미처 울지도 못했단다. 나는 부친 산소 앞에 형님을 모시고 그 위에 차가운 흙을 덮을 때 다시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는 울어댔다.
- 엉 엉 엉 ! 엉 엉 엉 !
이 미련한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형님이 마음을 잡는다고 좋아하다가 살아생전 단 한번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다니...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고, 지금도 형님께 한없이 미안하다.
장례를 마치고 나는 동네에 있는 구멍가게 세 곳의 외상값을 모두 정리하였다.
형님 ! 먼 길을 편안히 가소 !
미련한 동생/잠실 베레모
알콩달콩(36) 대통령 순방코스
고리원자력 5&6호기(현재 3&4호기)가 오랫동안의 건설공사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이런 경우 발빠른 직원들은 제일 먼저 다른 사업소로 전출을 가는 것이 상책이다.
왜냐하면 건설현장은 초기에는 업무의 기초를 닦느라고 힘이들고 마지막에는 수년간의 공사를 정리하려면 역시 힘이 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자료관리 업무를 맡은 나는 어쩔수 없이 고리원자력 5&6호기 준공시까지 남아있어야 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인원의 정리에 많은 고민이 있었은 특히 벡텔사 소속 한국인 종업원을 차례로 해고해야 했는데 당사자들은 한달이라도 더 잔류를 하려고 안간힘을 다 썼고 모두가 연줄이 있어서 더욱 애를 먹어야 했었다.
또 한가지 어이없던 일은 우리 품질검사부에서는 시멘트 관련 작업의 품질관리를 위한 토목시험실을 운영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품질검사부에서 과장은 나혼자 남게 되었고 그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토목시험실 장비의 부족분을 나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은 나는 부서의 비품과 문서철과 한전 소속 인원의 전출까지 모두 마무리하였다.
오직 한명 - 어느부서에서도 받겠다는 곳이 없어 전출을 시키지 못한 후배.... 한XX 씨를 제외하고는....
1986년 5월, 이제 기획단계에서부터 10년, 현장 공사기간만 6년을 끌어온 공사비 4조원, 시설용량 200만 kw의 고리원자력 5&6호기가 시운전을 모두 마치고 준공을 하게되었다.
고리원자려본부에서는 준공식에 대비하여 건설사무소 건물을 대대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우선 출입구를 기존의 3배는 되도록 넓히고 화장실을 완전히 개조하고 건설소장실을 뜯어고쳐 발전소 소장실로 개조한다고 했다.
마침 우리 자료관리실은 2층에서 1층으로 이전을 하여 발전소 직원들이 인수를 하였고 새로 이전한 자료관리실 바로 윗층에 소장실이 위치하였다.
그런데 소장실 개조공사를 하면서 별도의 화장실을 설치한다고 우리 자료관리실 천정을 뜯고 배관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본래 자료관리실 내부에는 그런 배관이나 전선을 가설 해서는 아니된다. 침수와 화재로부터 기록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원칙을 내세워 자료관리실내에 배관공사의 부당함을 항의하였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또 사무실 옆주차장 한편에 콘테이너 한개를 설치해놓고 그곳에서 각종 기록 및 도면의 마이크로필름 촬영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아 글쎄 그 콘테이너를 영광원자력본부로 옮기라고 지시가 떨어졌다.
이제 한달쯤이면 마이크로필름작업이 완료예정인데 세상에.... 그 콘테이너를 저 멀리 전라도 영광으로 옮기라니...
나는 펄펄 뛰며 반대르 하였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고 어느날 크레인이 와서 콘테이너를 트럭에 싣고 영광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대통령 순방코스와 관계됨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대통령이 오시는데 출입구 통로가 좁고 답답해서는 안되므로 3배는 확장을 했다는 것이며 만약 소장실에 들렸다가 화장실을 찾으실까봐 별도의 화장실을 소장실에 설치를 하였고 주차장의 콘테이너 따위는 보기에 흉하므로 무조건 치우라는 대통령 순방코스 사전답사팀의 지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내가 어린시절 연무대 역전에 있는 형님집에 살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논산 훈련소를 다녀가시는데 역전 마을의 우리집 장독대가 보기 안좋다고 시멘트 블록으로 담장을 쌓아 가리우던 기억이 났다.
그때 박 대통령이 탄 열차는 한번 획 지나가버리고 말 것을....
본래 장독대는 햇볕을 받아야 하므로 다시 시멘트 블록을 뜨어내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사무실을 개조하여 시원스럽게 만들어 놓았으니 나쁠거야 없지만 윗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가식이 있는것같아 조금은 씁쓸하였다.
그런데 고리원자력 5&6호기 준공식에 대통령께서는 참석하지도 아니하셨고 준공식 행사는 대폭 축소되었다.
이렇게 부서를 모두 정리하고는 이제 나도 가야할 곳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나를 끌어 준담....
이렇게 허탈해하고 있는데 본사 품질보증실에서 전화가 왔다.
- 나, 박부장인데 어이 이제 현장정리도 다 끝났을 텐데 본사에 와서 일좀 해야지 ?
잘 아는 나이가 많은 부장님이신데 전혀 부탁을 하지 아니하였는데 적시에 나를 찾아 주신 것이었다. 나는 너문 반가워서
- 부장님, 네, 가야지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다시 나는 서울 한전 본사로 오게 되었고 전에 살던 부천의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하였다.
잠실 베레모
알콩달콩(37) 역시 고스톱은 재미있어 !
내가 다시 고리원자력본부를 떠나면서 고스톱 이야기만은 꼭 해야겠다.
고리에서의 생활은 무료하였고 출근을 한후 별로 소일거리가 없었으며 그래서 흔이 고스톱을 많이 쳤다.
돈 놓고 돈먹기....!
이 고스톱에 우리사회에 널리 확산된 까닭은 아무래도 고스톱과 우리사람들의 생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리본부에서 2년 반을 살면서 너무도 고스톱을 많이 쳤고 또 나는 경제적으로도 적지 아니한 손실을 보았다.
나는 부천의 연립주택을 같은 교회에 다니던 맹 집사님한테 전세를 주고 받은 돈 200만원도 사실은 모두 까먹어버리고 다시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났을때는 그 전세돈 200만원도 마련을 못해 쩔쩔 맸을 정도이니....
고리에서 2년 반을 사는 동안은 마치 무릉도원에라도 들어온 양 회사에서 매월 주는 봉급을 물쓰듯 아무런 계획도 없이 허비하고 말았다.
사실은 현장봉급은 본사에 비하여 수당이 더주어 훨씬 많았음에도 이를 목돈으로 저축을 하지 못했으니 지금 내가 부자가 못된 것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료관리과는 단솔식당으로 길천갈비집을 많이 이용하였다.
돼지갈비 전문식당인데 가격이 저렴하고 또 밤을 새워 고스톱을 치며 눌러앉아 있어도 주인은 싫은 기색을 하지 아니 하였다.
- 박 과장님 오늘도 갑시다. 어제 광을 팔아 모은 돈을 풀으셔야지요.
항상 고스톱을 얄밉게 치며 그 실력이 프로급인 한항규가 퇴근 시간에 바람을 잡는다.
- 한 형 ! 고스톱 실력 좀 있다고 너무 그러지 마이소. 이러다가 우리들 살림이 거덜이 나겠오.
덩치가 크고 우직하며 고리5&6호기 기자재 인수검사팀을 이끌고 현장에 입고되는 기자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친 하순태가 제지를 하였다.
- 무얼.... 언제 우리가 봉급을 가지고 살았어.......
숫총각 마흥렬이가 엉뚱한 소리를 뱉았다.
- 그럼, 봉급이 아니면 무엇으로 생활을 했다는 거요 ?
머리 회전이 한사이클 늦은 하순태는 인수검사를 하면서 자칫 뇌물을 받아 생활을 한것이 아니냐는 말로 새겨듣고는 발끈했다.
- 봉급가지고 어떻게 살아요 ? 빚을 내어서 살아가는 것이지 ..... 우헤헤헤....
총각이 봉급이 모자라서 빚으로 살아간다면 가정이 있는 직원들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냐.
키가 크고 실리적으로 고스톱을 치는 김철호가 결정타를 쳤다.
- 오늘도 봉급 재분배를 합시다 !
그래서는 다시 길천 갈비집으로 몰려갔고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 아저씨 여기, 기계 한대 !
하고는 제일먼저 기계를 주문하였으니 곧 화투를 의미하였다.
곧 이어 담요가 펼처지고 밤일낮장으로 한항규를 선으로 지정하자 그는 능숙한 솜씨로 잽싸게 화투를 정리하여 패를 돌리고는 모두들 오늘의 운세를 점친다.
- 나는 들어간다.
- 아니 초장부터 과장님이 몸을 사리면 안되는데....
- 나도 죽을 란다.
역시 김철호도 고스톱을 약삭빠르게 친다.
성질이 급한 마흥렬이 결정을 했다.
- 고우 ! 모두 다 광 팔아 !
성격이 차분한 박덕렬이가 초판부터 치겠다고 했고 기독교 신자인 이광수는,
- 에이참, 광도 없다...
하면서 패를 놓았다.
이렇게 초판은 무광으로 광값도 없이 판이 돌아갔다.
갈비와 소주는 돈을 잃은 사람이나 짬짬이 먹는 것이고 고스톱에 정신이 팔린 친구들은 식사에는 관심도 없었다.
한참 열이 붙으면,
- 야 ! 한 형 두번 설사다 !
- 우하하하 그설사는 내 밥이다...! 어휴 맛있다...!
- 휴 .... 그럼 판이 제법 커지는데....
- 헤헤헤 내가 먼저 초단이다. 천원씩만....
- 한 형 ! 초장에 딴 돈은 아까 호주머니에 넣었잖아....
- 허허허 그것은 우리 막내 딸 분유값이야....
- 쳇 ! 고스톱으로 돈 따서 어제는 자동차 타이어 바꾸고 오늘은 딸래미 분유 사고.... 잘 한다. 잘 해 !
- 내일은 한 형 마누라 브라자 사다주겠네...!
- 네끼 ! 형수님을 놀리면 안돼 !!
이렇게 왁자지껄 신발을 신으면서 또 하루가 지나갔다.
잠실 베레모
알콩달콩(38) 다시 본사로 올라와 보니...
사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는 사업소에서 근무를 하다보면 생활에 대한 정보의 입수도 늦고 경제적으로도 느긋하여 절약하는 정신이 해이하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의식도 느슨해지게 마련이다.
나는 고리에서 두번 근무를 하고나서 그러한 생활패턴을 확실하게 느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고리의 원주민들은 한전직원들은 천국에 살고 있다면서 시골마을과 한전직원 아파트 촌과의 생할수준 차이를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지옥에 살고 있는 셈이고...
그런데 무얼 그렇게 아둥바둥 거리며 궁색하게 살랴 싶은 생각에서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에 푹 취해서 살다가 다시 본사로 발령이 나서 부천으로 올라와 보니 정신이 확들었다.
당장에 봉급은 줄어 드는데 생활비는 더 들어가고 나의 연립주택 가격은 주변의 주택과 서울의 아파트 가격에 비교하여 형편없이 뒤처져있었다.
내가 2년 반전에 고리로 내려갈때는 나도 서울에서 웬만한 아파트 한채는 살수 있겠다 싶었었는데 다시 와 보니 어림도 없는 일었다.
그 사이에 연립주택가격은 그대로 인데 아파트가격은 두배로 올랐던 것이다.
연립주택은 재테크로서는 전혀 불리함을 이제서야 확시하게 깨달았다.
누가 무어라 해도 우리같은 서민들은 그저 버젓한 집한채라도 마련했으면 하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 아니던가 ?
- 안되겠다. 우리 허리띠를 동여 맵시다. !
고리라는 무릉도원에서 살던 우리 부부는 그런 말이 필요없이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한푼의 돈도 아까웠고 고리에서처럼 고스톱을 치자고 할 직장동료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위기에 내몰린 듯 한 2년을 살고서는 이제 한숨을 좀 돌리면서 수도권의 주택가격의 동향을 살펴보고 있었다.
- 아들들도 자라는데 어떻게 해야지요?
- 더 늦기전에 우리도 서울로 입성할 준비를 합시다.
우리 가정의 제일 목표가 서울에 가서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직장도 서울인데 이곳 먼 부천에서 출퇴근하느라고 고생할 이유도 없고 또 아들들 진학하는데도
서울이 휠씬더 유리 하니까....
우리 부부는 그렇게 호시탐탐 서울 입성의 꿈을 꾸고 있었다.
잠실 베레모
알콩달콩(39) 구심점을 잃어버린 교회
내가 본사로 발령이 난 후 미처 이사를 하기 전에 부천에 있는 내가 다니던 장은교회에 들렸을 때 목사님께서는 너무나 반가워하며 예배가 끝나고 제직회를 하는 자리에서,
- 이제 박 집사님이 다시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니 제직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집사임명을 합시다.
라고 제안을 하였다.
그러자 대뜸 어느 여 집사님이,
- 지금이 집사를 임명할 때도 아닌데 몇 달 기다렸다가 연말에 제직을 임명할 때까지 미루자. 원칙을 지켜야 한다.
라고 발언을 하여 나에게는 의외이었으나 사실 그 무렵의 내 신앙상태는 한없이 바닥을 헤매고 있었으니 할말도 없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나는 단군성전 건립운동에 대한 기독교계의 심한 반대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 없었고 그러다가 아내와 한바탕 큰 부부싸움까지 하고나서부터는 일요일에도 예배에 참석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었다.
그런 신앙상태에서 다시 부천에 왔고 또 집사 임명도 보류되었으니 나는 속으로 잘되었다 싶었고 뒷전에서 교회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장은교회의 형편은 마치 붕괴직전의 벽돌집 같았다.
교인은 내가 고리로 내려갈 때보다 양적으로는 부흥을 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목사님과 성도들은 서로 신뢰를 하지 못하고 일삼고 있었다.
그 반목의 중심에는 내가 없는 동안에 주일학교를 맡아 열심히 봉사를 해온 X 집사가 서 있었다.
X 집사는 다른 성도들이 듣는 자리에서,
- 교회는 어려운데 목사님의 사례비가 너무 많다. 나 같으면 사례비의 절반을 받고도 생활을 할 수 있겠다.
- 생활도 어려운데 사모님은 왜 피아노학원에 다니느냐.
- 목사님 장인 장모가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는 등의 내가 보기에는 교회에서 핵심이 되는 집사로서 도무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때 목사님 사례비를 겨우 40만원 드렸는데 그 금액이 너무 많다고 하니....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퇴근을 하였는데 우리 집으로 전화가 왔다.
- 이XX 집사님 댁에 모여서 커피나 한잔 나누자.
나는 할 이야기가 있으려보다 짐작을 하고는 이XX 집사 댁으로 갔더니 이미 5~6명의 남자집사들이 모여 의견이 모아진 상태에서 나를 부른 것이었다.
내용은, 목사님 장인 장모가 교회에 덕이 되지 아니함으로 성도들 대표를 목사님에게 보내서 그 두 분이 교회를 떠나주도록 건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장인 이 집사님은 담배를 피우고 장모 허 집사님은 심방을 다니면서 성도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으니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아니하므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대로라면 목사님께서 가장 신임하는 장인 장모를 내 쫒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요구가 있을 것은 너무도 훤한 반목과 갈등의 시작일 뿐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였다.
83년도에 내가 교회에서 몇 가지의 직분을 맡아 동분서주할 때 나의 사명은 그런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교회의 구심점이 되어 목사님(당시 전도사님)이 편안히 목회를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임을 깨달았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핵심이 되는 집사들이 오히려 목사님을 흔든다면 교회는 분열되고 자중지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나는 신중하게 의견을 말했다.
-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떼들이다. 그런데 양 무리들이 스스로 갈라져서 다른 양들을 보고 목장을 떠나라고 말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이번 제안은 없었던 일로 돌리고 다시는 이런 모임을 갖지 말자.
다른 집사들이 머쓱하여 결국은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그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갈등의 씨앗은 몇몇 집사들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었으니 뒤에서 계속 불만을 이야기하고 교회는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봉사하였고 많이 정들은 교인들이 하나 둘 장은교회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83년도에 교회의 일을 맡아 하면서 흘린 많은 눈물을 생각하였다. 그때 나는 교회에 홀로 앉아서 울었고,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면서 울었고 출근버스 안에서도 안내양이 달랠 정도로 훌쩍거리며 울곤 하였었다.
또 다시 나는 어려운 교회를 위하여 순수한 눈물을 흘릴 수가 있을 것인가 ?
교인들의 흩어진 마음을 한데 모으고 교회를 반석위에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답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어느 금요일 저녁 기도회시간에 교회 문을 두드렸다.
잠실 베레모
알콩달콩(40) 나 주의 도 움받고자...
나는 금요 기도회 시간에 맞추어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다되었는데도 다른 성도들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고 오직 목사님 모친 김복녀 집사님 혼자서 기도회에 나오셨다.
목사님은 목요일저녁부터 기도원에 가서 기도와 설교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교회가 속해있는 교단의 관례였으니 당연히 목사님은 계시지 않았고....
- 요즘 이렇게 기도회에 성도들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지요?
내 물음에 김 집사님은 쓸쓸하게 대답을 하였다.
- 네. 왜 그런지 참석을 하지 않네요.
나도 머쓱하였다.
대체 이 교회를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 둘이서 기도회를 할 가요?
김 집사님께서 확인을 하셨다.
- 그러시지요....
그래서 첫날의 기도회는 70대의 할머님이신 김 집사님과 나 이렇게 단 두 명이 무릎을 꿇고 시작을 했다.
김 집사님께서 찬송가를 폈다.
- 349장입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내 주님 서신 발 앞에 나 꿇어 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아멘
이 찬송을 부르면서 둘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렇게 울면서 이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불렀다.
이 싸늘해진 교회에 어떻게 하면 훈풍이 불어올 수 있게 할 것인가?
이어 김 집사님은 교회와 나를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해주셨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또 울었다.
- 집사님, 앞으로 제가 금요기도회를 인도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나의 결심을 말했다.
어찌보면 제직회에 참석하는 집사도 아니면서 퍽 주제넘은 일이었으나 이런 나의 행동을 탓할 교인은 없었다.
그 후부터 교회주보에 금요기도회를 시작한다는 광고를 싣고 나는 주일 예배의 광고시간에 내가 꼭 일어나서 광고를 했다.
- 이번 주부터 금요기도회를 제가 인도하겠습니다. 같이 모여 기도하실 분들은 저녁 10:00에 교회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짤막한 광고를 절대 목사님한테 맡기지를 아니하고 내가 직접 간절한 말로 광고를 하곤 했다. 그리고는 첫날 금요일에 퇴근한 후 식사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는 교회에 나갔다.
그리하여 내가 인도하는 금요 기도회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퇴근 후 그렇게 꼭 샤워를 하고 다음해 봄까지 7~8개월 지속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셨다.
처음에는 3명, 다음에 5명, 다음에 7명, 10명...... 15명.....20명....30명....
조그만 우리교회의 입장에서 그것도 목사님 모친 혼자 기도를 하던 금요일 저녁에 이만한 인원이 모인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였다.
그리고 그 기도회는 냉냉한 그런 기도회가 아니었고 참으로 훈훈하고 뜨겁고 순수한 기도회였고 또 누가 시키지 아니하였어도 서로가 음료와 다과를 준비하여 기도회가 끝나고 나서 나누어먹으면서 대화와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시작된 금요기도회는 나중에 성전을 건축할 때 장장 100일간의 연속 기도회로 발전하여 주일예배 출석교인의 절반이 참석하는 교회의 구심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