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 최초의 팜 파탈
창세기 인물 열전의 첫 주인공은 최초의 팜 파탈(fe-mme fatale)이라 할 수 있는 ‘하와’다. 팜 파탈은 남성을 유혹해 치명적 상황으로 몰아가는 운명의 여인을 가리킨다. 아담은 금지된 열매로 유혹하는 아내의 손길에 무기력하게 굴복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2-3장은 태초에 남편을 주도했던 하와가 어떻게 남편에게 종속되는 운명이 되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남자의 창조
하느님이 창조하신 첫 피조물은 아담이었다(2,7). 피조물들 가운데 아담에게만 숨을 직접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는데, 이는 아담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표시다. 1장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피조물들 가운데 인간만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다(1,26-27). 게다가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라는 축복도 받으니(1,28), 아담이 임금의 직분으로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담의 육신이 한낱 흙에서 나왔음을 또한 밝혀 겸손을 배우게 한다(2,7). 따라서 아담은 하느님이 주신 임금의 위치를 남용하지 않고, 공정과 정의로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한다. 공정과 정의는 ‘타인의 몫을 빼앗지 않는 것’, ‘약자의 몫을 보호하고 착취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곧, 아담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주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
여자의 탄생
2장에서 눈여겨볼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자의 탄생과 별도로 여자의 탄생을 언급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가 맨 마지막에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성경에서 마지막은 대개 절정을 상징한다. 1장에서도 인간이 마지막 날 창조되어 짐승보다 우월함을 알렸다. 2장에서는 여자의 탄생이 창조의 절정을 이룬다.
하느님이 여인을 창조하신 건 아담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주시기 위해서였다(2,20). 히브리어 ‘알맞다’를 직역하면 ‘동등하게 마주하다’이다. ‘협력자’ 곧 ‘돕는 자’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열등하다는 의미로 비칠 수 있지만, 하느님도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분이시니(시편 121,2 참조) 열등함의 표현이 아니다.
아담은 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 자신이 지배자임을 알리지만, 아내에게는 “여자라 불리리라”고 말한다(2,23). 물론 하와라고 다시 이름을 붙여 주지만(3,20), 그때는 여자가 벌을 받아 남자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다. 더구나 하느님은 아담의 머리도 발도 아닌, 가운데 뼈로 여인을 만드셨으니(2,22) 태초부터 둘은 동등했다.
유혹자 뱀
태초의 평화를 깬 것은 간교한 뱀이었다. 히브리어 ‘간교하다’는 기본적으로는 ‘영리하다’, ‘슬기롭다’는 뜻이다. 영리한 뱀이 말을 건넨 이는 하와였다. 아담을 유혹하면 하와도 설득해야 하지만, 하와를 유혹하면 아담은 절로 따라온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에 품은 호기심도 짐작한 듯하다. 하느님은 열매를 ‘먹지 말라’고만 하셨는데(2,17), 하와는 한마디를 더 보태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며 궁금해 죽겠다는 속내를 드러낸다(3,3).
그리고 결국에는 하느님처럼 ‘지혜’로워지리라는 뱀의 말에 마음이 동한다. 아담은 뱀의 예상대로 아내가 내민 열매를 한 마디 반박도 없이 받아먹는다. 뱀은 공격 대상을 제대로 파악했던 것이다. 혹자는 하느님이 왜 선악과를 두어서 원조들을 죄짓게 하셨느냐고 의문을 표하지만, 이는 인간이 스스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허락하시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주입된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유혹도 견딜 줄 아는 존재로 키우려 하셨을 것이다.
원죄와 문명의 지혜
선악과를 먹은 뒤, 원조들은 난생처음 죄책감과 수치심을 경험한다. 그전에는 나체여도 부끄러운 줄 몰랐는데, 이제는 옷이 필요해졌다. 곧, 인간 문명을 상징하는 옷은 본디 원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조들은 하느님 앞에 있을 권리를 잃고, 생명나무와도 멀어진다.
다시 말해, 원조들은 선악과의 대가로 옷과 농경이라는 문명의 ‘지혜’를 얻지만 노동과 고통, 죽음도 더불어 받아야 했다. 또한 여자는 평생 남편을 갈망하고 남편이 여자의 주인이 되는 운명에 처한다(3,16). 여자의 갈망이 무엇인지 조금 모호하지만, 보통 지배 욕구로 풀이한다. 곧, 태초처럼 ‘여자가 남편을 지배하려 들지만 남편이 주인이 되리라’는 뜻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불완전한 세상에 내던져진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었다.
새 하와
인류는 원죄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멀어졌지만,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갈 기회를 다시 얻는다. 예수님은 새 아담이고, 교회는 새 하와와 같다(에페 5,22-23 참조).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듯,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서 교회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초대 교부들은 특히 성모님을 하와에 비유하고 또 대조했는데, 성모님은 교회의 보호자로서 첫 팜 파탈의 불충을 당신의 순종과 헌신으로 채우셨기 때문이다.
* 김명숙 님은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 구약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이며, 문화영성대학원에서 구약학 강의 중이다.
성서와함께, 2017년 1월호, 김명숙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