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테러(5회)

수아는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신문들을 뒤적거렸다. 신문 모니터가 수아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수아의 부재중에 배달된 신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상아 기사가 줄을 잇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상아와 지민의 사랑을 21세기 최고의 순애보라고 극찬하고 있었다. 지민이 덕분에 상아는 스캔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지민이 대통령 아들을 한방에 때려눕히는 권투 장면이 카툰으로 실리기도 했다.
수아는 혼자 웃었다. 수아는 책상 정리를 시작했다. 수아는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책상 정리를 한다.
책상 서랍을 열었을 때 낯선 봉투가 눈에 띄었다. 봉투에 이름은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그것이 지민의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민의 낯익은 글씨체가 안부를 묻는 듯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바로 문장이 시작되었다.
―베란다에 앉아서 아직 덜 여문 달을 보고 있다.
구름이 흐르는 것이겠지만 내게는 달이 흐르는 것으로 보인다.
완성되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더 커질 여백이 있어서 미더운 달을 보고 있다.
저 달이 흐르듯 이 지상의 모든 것은 흐르는 것일까.
물이 흐르고 바람이 흐르고
그렇듯 나무가 흐르고 풀이 흐르고 우리가 흐르는 것일까.
내 안에 흐름을 느껴. 그 흐름 속에 내가 있음을 느껴.
미구에 다가올 미래의 강을 향하여 때론 느린 바람으로
때론 태풍 같은 바람으로 내가 흐르고 있음을.
어느새 달이 플라타너스 꼭대기에 걸려 있다.
플라타너스 잎이 나부낀다. 달도 덩달아 나부낀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 둘 흔들린다.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는 것인가 보다.
흐름 속에서 흔들리는 것, 아마 나도 그렇게 흘러가면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겠지.
달과 나무가 한 곳에서 흔들리다 또 따로따로 떨어지고
달은 달의 길을, 나무는 나무의 길을 흐르고 있다.
하지만 내일의 달은 또다시 플라타너스를 찾을 것이고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은 그 달빛을 받아 반짝일 것이다.
아니, 플라타너스 이파리 속에서 달빛이 여물 것이고
그 여문 달빛으로 아름답게 나부낄 것이다.
흐름 속에서 흔들리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이야.
지민은 편지 끝에도 자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수아 입에서 바보라는 말이 주문처럼 새어나왔다.
수아는 한 구절 한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지민의 숨은 마음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충분히 알면서도 좀 더 확실히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거라고 말해 주었으면 답답함이 덜할 것 같았다.
상아 결혼식 준비로 경황이 없었다. 신랑 신부를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촉박한 탓도 있지만 될 수 있는대로 지민을 집에 들이지 않으려 했다. 지민도 상아를 문밖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갔다.
수아도 될 수 있으면 늦게 들어오려고 일부러 술자리를 만들었다. 수아는 상아 결혼 준비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것이 서로를 위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저 들려오는 소리를 주워 듣는 정도였다.
“확실히 선생님이라 다르셔. 이미 다 결정이 난 일인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고 오빠 내조나 잘해 주라고 하시지 뭐야.”
“그래, 나두 보고 놀랬어. 참 교양있게 생기셨더라.”
아마 지민이 엄마로서는 지민이 수아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장애인 며느리보다는 연예인 며느리가 백 번 천 번 나으니 말이다.
“근데 강 교수님은 너무 웃겨. 주례 부탁드리러 갔더니 오빠한테 노골적으로 자네한테 실망했다고 하면서 야단을 치시는 거 있지.”
“원래 교수들이 그렇잖니. 총리께서 주례 봐주신다고 했어. 더 잘됐지 뭐.”
수아는 강 교수가 왜 지민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강 교수가 더욱 존경스러웠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다.
장원도 휴가를 맡아왔고 인숙언니도 대구에서 올라왔다. 수아는 결혼식 참여를 놓고 혼자 많이 고민을 했다. 아무도 수아에게 참석과 불참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지만 수아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 전날 올라온 인숙언니 때문에 수아는 참석을 굳혔다. 수아 친구들도 오겠다고 해서 결혼식장은 동문회장이 될 것 같았다.
최고의 스타 결혼식답게 최고 호텔 그랜드 볼륨에서 결혼식이 치러졌다.
축하객들에 섞여 있는 지민의 옆모습이 수아 눈에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가슴이 뛰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 난희가 뛰어왔다.
앞 무리의 축하객들이 지나가자 지민의 전체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지민이 와서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수아한테 하는 말인지 난희한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민은 그렇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어머, 지민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당장 물려요. 내가 납치할지도 몰라요.”
난희는 수아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해댔다.
수아는 결혼식장에 와서 지민을 만나면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고 장난스럽게 ‘선배 축하해. 우리 인생이 이렇게만 흘러갈 수 있다면 성공 아냐?’라고 지민의 편지에 대한 화답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또 다른 축하객들이 몰려와 수아와 지민 사이를 차단해버렸다.
수아는 신부 대기실로 갔다. 상아가 왕비처럼 앉아 있었다. 상아가 먼저 ‘언니’ 하며 반겨주었다.
“언니하고 사진 찍어야지.”
상아가 수아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수아를 소개했다.
“우리 언니예요. 앞으론 언니랑 더 가깝게 지내세요. 시민운동가이거든요.”
이상하게 수아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아한테 뭐라고 축하의 말을 전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아는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신부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가족석이 아닌 뒷좌석에 친구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결혼식 장면이 멀티비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주례는 총리였고 사회자는 최고의 남자 MC였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멀티비전을 통해 신랑 신부 비디오가 마치 영화처럼 상영되었다.
두 사람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민의 모습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사회자가 신랑 입장을 알렸다. 지민이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다. 홀이 넓어서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수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저 남자가 과연 내가 사랑했던 남자일까. 지민, 서지민 그는 과연 나를 사랑했을까. 내가 사랑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나를 사랑했다면 그는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적어도 저런 여유 있고 행복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그래,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제 나도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
신랑 신부가 행진을 할 때까지 계속 수아는 마음속으로 지민의 사랑을 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버려야지. 사랑도 버리고 지민도 버리고 추억도 버려야지. 다 버리자. 깨끗이.
다음회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