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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죽음과도 같다
이응노
이응노_죽엽무의 시필_한지에 채색_45×35cm_1979
작가의 독창적 회화 언어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 80여점 전시 ● 이응노는 70년이 넘는 화업의 여정 속에서 전통적인 묵죽화, 구상회화부터 전위적인 문자추상, 구성, 군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회화작업을 했을 뿐 아니라 세라믹, 조각, 태피스트리 등 회화 이외의 재료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작업의 스펙트럼을 넓힌 작가다. ●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작업들 가운데 70, 80년대 작품을 위주로 하여, 구상회화, 문자추상, 구성연작, 군상 연작 등 작가의 다양한 작품경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회화 70여 점과 세라믹 10여점을 선보인다. 특히,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바로 전날까지 작업한 89년도 마지막 작품들도 함께 출품되어 죽는 날까지 작업에 매진하였던 집념 어린 작가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20세기 한국사를 함축하고 있는 예술가 이응노 ●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나 10대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이후, 당시 전통 서화계의 거목이었던 김규진(1868-1933) 문하에서 작업을 시작한 작가는, 50년대에 예술의 메카인 파리로 건너간 이후 재불작가로서 꾸준히 독자적인 회화 언어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날까지도 끊임없이 작업에 몰두하는 등 한평생을 작품에 쏟았다. ● 이응노는 국제무대에 데뷔한 이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고, 백건우 윤정희 납치사건 등에 휘말리면서 국내에서는 금기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으며, 해금된 이후 8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1월 10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등, 유난히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 그 가운데에서도 시대상황과 민족의식을 창작세계의 원천으로 담아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응노의 인생은 그 자체가 격동의 한국근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어떠한 예술도 작가를 존재하도록 한 역사와 사회적 배경에 대한 논의 없이 그 가치를 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았을 때, 이응노는 그의 작업 속에서 시대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시대와 교감하며 치열하게 작업한 작가다. “나의 창작생활은 50여 년을 통하여 똑같은 수법의 되풀이를 싫어하며 항상 자신이 하던 일을 깨뜨리는 습성이 불만, 불만에서 현재도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으리라 여겨진다.”
도전의 자세와 실험정신으로 동양화의 지평을 넓힌 한국의 현대미술가 이응노 ● 작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70년 화업은 크게 여섯 번 변모하였다. 20대는 사군자를 습득하면서, 한국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시기라면, 30대는 자연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시대, 40대는 반추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사실에 대한 사의적(寫意的) 표현, 50대는 유럽으로 이주한 뒤 추상화가 시작된다. 그 이후 10년은 서예적 추상을, 말년까지는 민족의 통일무인 군상의 시대이다. 화풍이 변화한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예술적 변모가 20세기 현대미술의 조류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는 지필묵을 기본으로 하는 동양화에서 출발하였으나, 동시대의 시대의식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도전과 탐구의 여정을 거침으로써, 동양화라고 불러왔던 전통회화를 보편적 현대미술로 끌어올리고 국제화시킨 당대의 인물이다. ● 역사의식만으로 예술작업이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고, 작품자체의 미적 가치도 의식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작가이기에, 그는 세계화단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회화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종이, 천, 펠트 등의 재료를 사용한 콜라주 작업과, 도자, 조각, 태피스트리, 판화 등의 장르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창작할 수 있었다.
거장의 삶을 통해 우리의 오늘을 되돌아본다. ● 시대의 시선, 상투적 경계로부터 자유로웠던 작가 이응노는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세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흔들림 없이 삶과 예술을 한 방향으로 밀고 나간 작가의 강인한 정신과, 그에 걸맞는 예술세계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된다. ● 특히, 그의 작업과 인생은 의식의 형태가 매우 약한 오늘날 미술계와 사회전반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한, 방향성을 잃고 행해지는 전통의 재해석과 재현의 유행 속에서 동양화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란 과연 무엇이며, 동양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 이응노는 현재 프랑스가 낳은 유명한 예술가들의 안식처로 알려져 있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나, ‘영원한 현재’로서 오늘의 우리를 반성하도록 하는 지표인 것이다. “화가의 무기는 바로 그림이다. 예부터 예술가들은 권력자에게 봉사하고, 권력의 노예가 되어왔다. 그러나 현대의 진정한 예술가라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굳게 지키며 민중들 편에 서야 한다.” ● 대전시립 이응노미술관 개관과 함께 하는 이응노 전 ● 5월 3일 대전에 개관하는 이응노미술관은 대전시가 운영하는 시립미술관이다. 한 개인 화가의 미술관을 국가차원에서 건립, 운영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가나아트센터는 이응노미술관 개관기념전과 함께 이응노 전을 열어, 그의 작품세계를 다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 가나아트센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죽음과도 같다. 옥중에서도 작업을 계속했다. 형무소 뜰에서 녹슨 못을 주워다가 알루미늄 세면기와 식기에 있는 대로 구멍을 뚫기도 하고, 가슴 밑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 그림이란 벽에 거는 장식품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사회의 모순, 순수한 인간에 대한 애정 …. 이런 피 끓는 발언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에 생명이 깃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투옥의 경험은 내 그림이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자신을 깨어나게 했다. 그런 자각이야말로 진정한 정열과 용기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 이조 최후기의 화가란 나라가 쇠퇴함과 더불어 국가 흥망은 향상을 잊어 버리고 다만 생활을 구하기 위한 행동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소위 일제 치하의 회화란, 더욱 우리의 개성이란 가질 수도 없게 되고 일본 화풍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몇몇 지조를 고수한 화가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 일본 화풍의 잔재는 오늘날에도 아주 씻은 듯이 가시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상고를 통하여 예술문화란 항상 민족정신을 반영시키는 것이라고 보겠는데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들은 한층 노력하여 세계 호흡에 통하는 새로운 동양화의 길을 개척해야 하겠다는 정신으로 새 출발을 해야 되리라고 믿는다. ● 나는 주장하고 싶다. (어떤 이론 이전에 자신이 실천과 체험에서) 올바로 볼 줄 알고, 올바로 들을 줄 알고, 올바로 생각할 줄 알아야 좋은 창작생활도 이룰 수 있다. 용단 있게 처리하는 데서 무엇인가 반드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으며 또 이 사실에 대하여 정당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는 것은 조만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장기간의 숙련을 거듭하는 데서만이 오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나의 창작생활은 50여 년을 통하여 똑같은 수법의 되풀이를 싫어하며 항상 자신이 하던 일을 깨뜨리는 습성이 불만, 불만에서 현재도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면서 어느 작가에게서나 잊어서는 안 될 중요 사실들이 있다. 즉 민족예술의 진의(眞義)에 대한 탐구는 현재의 불가결한 과제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창작생활과 작품은 항상 동양예술의 고유한 전통을 토대로 삼아 무궁한 애착심에서 번져나가고 있고, 이것을 통하여 나온 작품들이 나아가 국제화단에 지금의 나의 위치를 마련하여 준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참다운 작가로서의 일가(一家)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언제나 숭고한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기법이나 내용이나 위대한 작품을 창작하려면 첫째로 인격수양이 필요하다. 인격이 작품이며 작품이 곧 인격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니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고귀한 인격수양과 진실속에서 미를 추구하여 새로운 곳에 인식을 가지고 표현하기에 심신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백 있는 국민성을 발휘하고 좋은 전통을 존중하며 대자연에서 오는 심미에서 기교를 연마하고 시대사조를 참고하여 이 시대 민중이 호흡할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현대예술이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반복하는 생활 형태에서 변화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에 청신(淸新)한 맛을 가지게 하며 단조로운 생활에서 동경의 생활로 이끄는 것이랴. 도회의 잡음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을 얻어 새로운 풍경과 그 인식 등은 모두가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고민을 잊게 하고 대자연에서 오는 경이(驚異)에서 속된 탈을 벗고 무한한 유열(愉悅)과 감격에 잠긴다는 것…. 그러기에 우리는 여행을 즐기고 새로운 풍경을 접한다. ● 다만 일월(日月)과 풍우(風雨)를 벗하는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층층(層層)한데를 송송(松松) 백백(栢栢) 암암(岩岩) 회(廻)하고 거기 머루 다래 넝쿨이 엉클어진 사이로 물소리의 풍경…. 혹은 앵앵 우는 모기소리와 찌르르찌르르 들리는 지렁이 소리에 상청을 찌르는 매미소리 푸른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버섯대가리와 깉이 저릅 끝에 뾰족뾰족 보이는 아동들이 거미줄 늘여 고추잠자리를 잡으려고 가만가만 걷는, 뒤를 보는 풍경…. 또는 질그릇 동이에 청계수를 담뿍 길어 머리에 이고 푸른 잎 스치며 오솔길을 돌아 박덩굴 서린 오막살이로 들어가는 풍경 등등… 또는 바다 멀리 작은 도서(島嶼)가 모두 운치 있는 풍경이 왜 아니 좋으리오마는 맑고 푸른 강물에 저리로 수루(水樓)가 보임직한 작은 섬을 끼고 어선이 왕래하며 돛 주고 노 젓는 소리에 강기슭에서는 표모(漂母)들이 방망이 소리도 구성지게 들려오는 태고적(太古寂)한 시간의 강, 그것은 저녁놀이 하늘도 땅도 물도 일체 되게 물들인 새빨갛게 화염같이 미묘하게 도색된 황혼의 강 풍경에서 나는 항상 나의 인생과 예술과 자연에의 정열로 가득하다. ● 동양화의 한문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서예적 추상은 그 자원(문자의 근원)이 자연 사물의 형(태)를 빌린 것과, 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니 한자 자체가 바로 동양의 추상화적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형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때 ‘무형이 유형’이라는 동양의 철학적인 언어가 발생되며, 그것이 바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이다. 글씨가 아닌 획과 점이 무형의 공간에서 자유자재하게 구성해 나가는 무형의 발언이다. 자연물질과의 융화야말로 나의 예술의 원동력이다. ● 서예에는 조형의 기본이 있다. 선의 움직임과 공간의 설정, 새하얀 평면에 쓴 먹의 형태와 여백과의 관계, 그것은 현대회화가 추구하고 있는 조형의 기본이다. 한자는 원래 자연물의 모양을 따서 만든 상형문자와 소리와 의미를 형태로서 표현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자 그 자체가 동양의 추상적인 패턴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나의 그림은 추상적인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은 뒤로 좀더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호의 화면에 수천명의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 데모라고 했다. 유럽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는데,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준 것이다. ● 나는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구태의연한 사고에서 일탈하여 입체와 평면작업을 병행한다. 나이가 들수록 예술이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예술가의 자부심이란 바로 자기가 자기의 창작 속에서 노력해서 새로 발견하는 그 경지를 두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남과 비슷하거나 남의 기교를 인용한다거나 남의 것을 엿보고 가장하는 것을 가지고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예술가의 사명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 있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것은 생에 대한 진실의 창조며 따라서 이는 독창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술가 자신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경지며 세계에 그 새로운 가치를 그만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가가 이와 같은 독창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상실인 것이며 따라서 하나의 아류일 수밖에 없다. ● 진실함이 없다면 예술도 종교도 있을 수 없다. 진실함은 예술과 종교를 이어주는 것으로, 동양에서는 이것을 예술혼이라고 부른다. 나는 만일 사람들이 이 예술혼과 조화를 이루고 산다면 세계가 좀더 평화스러워질 것이라 믿는다. 나는 학교에서 동양화의 기법과 주제, 양식을 가르친다. 내가 개인적으로 동서양의 미술에서 깨달은 바에 따라, 내 학생들이 이 두 가지 사고를 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어떤 긴장이나 경계심 없이 작품을 하라고 이야기한다. ● 예술이란 뿌리찾기와 같은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만든 제약일 뿐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다보면 끝내는 한계에 부닥치고 만다. ● 화가의 무기는 바로 그림이다. 예부터 예술가들은 권력자에게 봉사하고, 권력의 노예가 되어왔다. 그러나 현대의 진정한 예술가라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굳게 지키며 민중들 편에 서야 한다. ● 나는 특히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동양화에서의 선, 한자나 한글에서의 선의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 공간구성과 조화로 나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한국의 민족성은 특이하다. 즉 소박, 깨끗, 고상하면서 세련된 율동과 기백 - 이같은 나의 민족관에서 특히 유럽을 제압하는 기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그림이다. ● 나이가 드니 동심의 세계가 그리워진다. 순박하고 순진한 것의 표현… 내 그림에는 글과 그림 사이로 부유하는 형체로 메워져 있다. 그것은 ‘말’이전의 동심의 세계이다. 원색에 가까운 단색 그리고 꽉 메운 면으로 순박함을 나타내고 싶다. ●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가장 즐겨하던 일이 미술이었다. 누구도 이 일에 참견할 수는 없었으며, 내 자신도 여기에 장애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깨끗이 단념하였고, 초지일관 60고개를 넘어선 지금에도 어떤 권태와 싫증을 느껴보지 못한 채 그저 충실히 종사하고 있다. ■ 이응노
첫댓글 잘 봤습니다. ^^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