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운하는 파나마의 지협을 가로질러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길이 82킬로미터의 운하이며, 1999년 미국 정부에서 파나마 정부로 소유권이 반환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거대한 난공사였으며, 과거 남아메리카 끝 드레이크 해협과 혼 곶으로 가는 긴 우회로를 대체하여 두 대양 사이의
해상 무역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파나마운하는 중앙 아메리카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카리브해와 태평양 연결하는 운하로 1914년
8월 완공되었습니다. 카리브해 크리스토발 항구에서 태평양의 발보아 항구에 이르는 전체 길이
약 82㎞의 수로로서 카리브해로 흘러드는 차그레스강을 막아서 만든 카툰호 및 파나마만 쪽의
인공호인 미라 플로레스호를 이용하는 수로와 두 호수 사이에 판 굴레브라 수로 15km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파나마운하는 갑문식 운하이며 가툰의 3단식 갑문, 페드로 미겔의 1단식 갑문, 미라플로레스의
2단식 갑문을 운영하고 있으며, 크리스토발에서 운하를 11㎞ 항행하면 인조호인 가툰호에 이르고, 가툰 갑문에서 가툰호와 동일한 해발고도 27m까지 선박을 들어 올리고, 가툰호를 40㎞ 항행하면 파나마 지협의 등뼈인 구릉지대를 굴착한 쿨레브라 굴착수로로 연결되며, 페드로 미겔 갑문에서 선박은 해발고도 17m까지 내려지고 다시 미라플로레스 갑문에서 바다 수면까지 내려지고
운행하여 태평양 연안 발보아로 이어집니다.
파나마 운하 굴착계획은 1529년 코르테스의 건의를 받은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5세로 의해서
구상되었으나, 실제로 공사가 착수된 시기가 1880년대입니다.
수에즈 운하를 완성시킨 프랑스의 외교관 레셉스(Lesseps, 1805~1894)는 7년 만에 파나마운하를 완공시킨다고 장담했다. 1881년 본격적으로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복잡한 지형과 황열, 말라리아 등 만연하였습니다. 그래서 9년 만에 공사를 중단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운하를 마저
건설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당시 파나마를 다스리던 콜롬비아가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파나마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도와 결국 파나마는 1903년에 독립되었습니다.
이듬해 5월 4일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운하 건설 공사를 정식으로 인계 받았습니다. 처음 2년 동안은 군의고거스 중심으로 방역대책을,
8년 동안은 절벽붕괴를 막는 한편 증기삽, 준설선 등 새로운 공학의 진수를 모두 동원시켜 유럽에서 1만 2000여명, 서인도 제도에서
3만 1000여명 정도의 방대한 노동력을 투입한 가운데 1914년 8월 15일 마침내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