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1장-2> 기름부으신 예수님, 메시야, 그리스도의 향기, 게달의 장막, 솔로몬의 휘장, 검으나 아름다우니, 속사람 (2)
지난번 주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
3절,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실제 솔로몬은 왕으로 기름부으심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지혜와 명철도 한이 없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의 명성이 아름답게 온 천하에 쏟은 향기름처럼 퍼졌습니다.
물론 평소에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하여 그 머리에 기름도 발랐을 것입니다. 좋은 향유를 발랐을 것이므로 그에게는 실제 향기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쏟은 향기름과 같이 향기를 뿜어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깨서 쏟아부었을 때 향기가 그 집 안에 진동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의 왕으로서 기름부으심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 곧 명성으로 인하여 드러나는 향기인 것입니다.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beautiful” 차원보다는 원어적으로 “토브” 인데 좋다, 선하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의 선하심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 천하에 퍼진 것입니다. 실제 솔로몬의 향기와 같은 명성을 듣고 각나라에서 예물을 가지고 몰려왔습니다.
스바여왕이 대표적입니다. 금 백이십 달란트와 매우 많은 향품과 보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대하 9:1)
이런 모습이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곧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받은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기름부으심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부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과도 같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 받은 예수님은 향기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쏟은 향기름처럼 온 사방으로 퍼져갑니다. 주님의 그 향기가 갈릴리 지역 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예루살렘, 이방지역까지 퍼져 나간 것입니다. 결국에는 온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온 열방에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의 사랑이 알려지고 성품이 알려지고, 그래서 그 모습이 향기롭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가, 처녀들이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과 인격, 사역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향기 그 자체입니다. 선한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가서 뒷 부분 4장을 보면, 나중에는 솔로몬을 신랑 삼은 술람미 여인에게서 이런 아름다움과 향기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 4:10-16)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따르면 이런 향기가 나게 됩니다. 이런 향기는 기름부으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오늘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실 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인격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여러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 성령으로 기름부으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보면 웬지 끌리는 영적인 향기가 납니다. 보기에도 아름답고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탄의 영이 들어간 사람은 더러운 냄새가 납니다. 실제 나기고 합니다.
대체로 더러운 모습입니다.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키며 구린내를 풍깁니다.
주변 환경도 지저분하고 정리가 되지 않고 혼란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정결하게 합니다. 육신적으로도 더러운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까? 더러운 구린내를 풍기고 있습니까?
4절, ③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 ① 너는 나를 인도하라 / ②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 ④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 4절 전반부는 개역개정 한글성경은 원어와 다르게 순서를 배열하여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4절 전반부 원어를 보면, 너는 나를 인도하라 (명령형, 단수),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칼,미완료, 복수), 왕이 나를 그의 방(침궁)으로 이끌어 들였다 (완료, 재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의역을 위하여 원어의 순서를 바꾸거나 번역에서 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서도 일점 일획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라고 말씀하셨고, 계 22:18-19절에서는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제하여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는 단어를 빼거나 순서를 바꾼다면 하나님의 뜻,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한글성경에서 4절의 말씀을 원문과 다르게 이렇게 순서를 바꾼 이유는 아마 같은 화자라고 생각되는 것끼리 묶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를, 우리).
화자가 다르다고 생각한 것부터 오류일 수 있습니다.
4절 전반부 말씀을 순서를 바꾸어 해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술람미 여인이 주인공으로서 화자가 되어 술람미 여인을 포함하여 예루살렘 딸들까지 아울러 ”우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라고 해도 침방에 들어가는 자는 주인공 한명입니다. 다른 예루살렘 딸들도 술람미 여인처럼 침방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부가 되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침방, 지성소에 들어가고자 사랑의 노래로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4절 전체를 영어성경 NIV 성경 해석처럼 화자가 술람미 여인으로 보아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또 ”왕이 나를 이끌어 들이시니” 가 완료형로 되어 이미 솔로몬과 침방에 들어간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많은데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내용 흐름상 침궁에서의 합방은 4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의 단계가 점점 익어져가고 성숙해져 가고 있는데 1장 초반부터 침방에 들어갔다고 하면 내용 흐름이 안맞습니다.
이렇게 완료, 명령형 등으로 말한 것은 솔로몬과의 친밀한 교제 (합방)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이루어진 것과 같이 강한 열망, 소망을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는데 강한 응답을 기대하고 “응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될 줄 믿습니다”와 같이 완료와 미완료를 함께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할 때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완료와 미완료를 함께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욘 2:2-6).
그러므로 완료, 명령형 등은 술람미 여인의 강한 사랑의 열망을 위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 증거가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부분이 미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용적으로도 이미 침방에 들어간 것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라고 표현된 예루살렘 딸들이 또 단체로 솔로몬의 방에 들어가고자 하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완료형으로 기록한 것은 술람미 여인과 다른 예루살렘 딸들 모두의 앞으로 있을 강한 사랑의 갈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의 신앙 목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성소에 들어가고자 하는 우리들의 신앙 목표와 같습니다.
오늘날 신부들인 우리들도 모여서 함께 주님의 사랑, 깊은 지성소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는 단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부가 된 자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지성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침방에 들어가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지성소에도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4절 말씀 전반부를 쉽게 다시 원어 순서대로 쉽게 의역을 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로 나를 나를 이끄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겠습니다. 왕이시여 나를 침궁으로 데려가소서”가 됩니다.
아 1:4절은 앞으로 솔로몬과 이루어질 사랑의 절정인 침궁, 오늘날로 본다면 지성소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술람미 여인과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의 노래인 것입니다.
▶ 4절 후반부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우리가”로 시작하여 화자를 “예루살렘 딸들”로 보면 안됩니다.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안에는 술람미 여인이 포함된 우리이므로, 술람미 여자가 화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술람미 여인과 예루살렘 딸들 모두의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들은 솔로몬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단어로 표현한 강조 기법입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는 모습, 즐거워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미완료로 되어 있어 계속되는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이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 처녀들이 마땅히 솔로몬을 사랑하는 이유가 2절과 같이 솔로몬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세상이 주는 어떤 포도주보더 더 진합니다. 지반번 드린 말씀과 같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드리는 사랑이요, 영원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맛본 자는 세상의 포도주를 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술을 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맛보지 못한 자는 여전히 세상의 포도주를 찾을 것입니다. 세상의 열락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 것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분명히 주님의 사랑을 깊게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최소한 사랑이 충만히 채워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부족한 공간을 세상의 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이 모자라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험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를 기도해야 합니다.
5절,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술람미 여인이 검게 된 이유는 6절에 나와 있습니다. 어머니의 아들들이 노하여 그녀를 포도원지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햇빛에 검게 그을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는 검게 되어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아름다워 솔로몬의 휘장 같다는 것입니다.
게달의 장막은 검은 염소털로 만든 장막입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들로 그런 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입니다(창 25:13, 대상 1:29). 그들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 120:5-6). 솔로몬의 휘장은 솔로몬이 야외에 머물 때에 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휘장 장막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검다는 것과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 여인의 모습은 죄로 물든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가꾸지 못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들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검은 자들이었습니다. 게달의 장막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으로 인하여 더렵혀진 죄인의 검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이런 외형적인 모습에 좌절하지 않고, 내면의 자기의 정체성을 아름답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휘장 같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는 시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을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아름다워진 것입니다. 휘장같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연약하여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도 계시지만, 우리 중심에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 다시 정결하게 되고자 하는 마음, 죄와 싸우고 잇는 마음을 보시고 아름답게, 솔로몬의 휘장 같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우리들의 속사람을 보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에베소서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우리가 검게 된 것은 우리들에게 육신(헬, 사르크스)이 있어 그를 통하여 죄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런 모습을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사르크스를 통하여 죄를 지을 때마다 “내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술람미 여인처럼 나는 검지만 아릅답다고, 나는 게달의 장막 같지만 솔로몬의 휘장 같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에 눌려서는 안됩니다. 정죄감에 눌려서는 안됩니다. 죄인의식에 계속 잡혀 있으면 안됩니다.
물론 고의로 반복적인 죄를 짓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단계가 되면 죄와 연합된 단계, 사탄이 점령한 단계로 영, 속사람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죄를 지었을 때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늘에서는 정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후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송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으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정죄는 이제 이 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계 12:10-12).
그러므로 더 이상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죄는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탄이 우리들 마음속에 속삭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됩니다.
술람미 여인이 마음속에 자기는 검다고, 게달의 장막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솔로몬과 깊은 사랑의 단계로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는 거절감, 실패감,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걸린 여인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하나님께서 보는 시각으로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딸들에게 담대하게, 검지만 아름답다, 게달의 장막 같지만 솔로몬의 휘장같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책까지도 다 해결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또 넘어지면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