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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몸과 말
- 서화성, 최동문의 신작시론
1. 분열의 징후 - 서화성의 시
자기표현의 가장 대표적인 문학양식이 시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때 자기표현이란 시인의 내면의 정황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데, 시인이 화자(persona)의 입을 빌어 어떤 식으로 그것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시의 형식과 분위기는 달라진다. 물론 형식 자체가 일차적으로 시를 규정짓는, 달리 말해 밖으로 돌출된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시를 짓는 과정에서 내적인 정조를 조직․배열하는 어떤 잠재된 원리가 존재한다면, 드러난 형식은 이런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은폐하는 바로미터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주관의 동기가 앞서 존재(preference)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방법의 문제를 야기한다. 전통 서정시의 경우처럼 동일화를 주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과 그 극단으로서 무의미시처럼 몰개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가 자리한다.
서화성 시인의 경우는 어떠할까.
나를 복제한 얼굴들이 거리를 도배한다. -「공익광고」
10년 전에 샀던 캘럭시 양복은 자라지 못한 채 장롱 속에 갇혀 있었다. -「미로찾기」
사실 진술로 운을 떼는 위의 두 시는 독자로 하여금 시인이 목격하고 발견한 것들을 알려주는 형식을 띤다. 그 보고의 진술형태는 「공익광고」의 “도배한다”처럼 진행태인 경우와 「미로찾기」의 “갇혀 있었다”처럼 완료태의 경우로 구분된다. 물론 시적 진술에 서 현재형이든 과거형이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사안에 따라 시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주제를 전면에 부각시키려는 쪽이나 반대로 내면적인 함의보다 절제와 형식미를 우선하는 쪽이나 공히 시를 ‘영원한 현재’로서의 표현미학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같은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어떤 시의 경우에는 대개 그 보다 좀 더 확연한 형식적 요소(이미지, 비유, 사회․역사적 소재 및 배경 등)와 비교하여 단순한 구성원리이거나 종속적인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부분들이 시 해석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인용한 시의 구절들이 그러하다.
우선 화자의 진술은 필연적으로 청자의 질문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나를......도배한다”에서 “복제한 얼굴들”이 시인이나 독자 모두 이 표현이 관습적인 시적 장치(비유)라는 사실을 공표하고(시인), 자동적으로 승인․합의된(독자)영역이기 때문에 일단 논외로 한다면, 두 가지의 의문이 발생한다. 왜 그러한지(왜 도배를 하는지)와 무엇이 그러한지(그 얼굴들이 과연 무엇인지)가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다행히 시를 보면 쉽게 해답을 알 수 있다. 시의 화자는 그것들이 “시인 서화성”과 이름이 똑같은 길거리의 상호임을 명시한다.(그러니까 실생활에서 그런 이름의 간판을 보면 ‘시인 서화성’을 떠올리면 될 듯 싶다) 다음으로 전자의 구절을 분석하기 전에 「미로찾기」를 살펴보자.
10년 전에 얼마를 지불하고 양복을 구입했는지나 어떤 모양새로 장롱 속에 갇혀 있었는지 보다 우리는 앞의 경우처럼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마련이다. 즉 양복이 어떤 연유로 장롱 속에 갇혀 있었는가와 또한 “갇혀 있었다”에 뒤따라오는 추측(갇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대체 어떤 연유로 해서 화자가 10년 간 잠자고 있던 양복을 꺼내었는가이다. 「미로찾기」의 이 같은 길 찾기의 실마리는 적어도 이 물음에 한정시킨다면 제목과는 달리 의외로 간단하다. 각각의 연유는 “유행에 떠밀”렸기 때문이고 “세상구경”을 시켜주기 위해서이다.
앞서 잠시 분석을 미뤘던 부분으로 돌아가보자. 예리한 독자라면 필자가 제기한 ‘왜 도배를 하는지’라는 의문이 번지수를 잘못 짚은 우문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가득 넘쳐난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일상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도배’라는 낱말을 썼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쓰자면, 물 컵에 담긴 물을 보고 왜 물이 담겨 있는지 묻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만 물 컵 안에 물이 존재할 따름이고, 또한 다만 거리에 복제얼굴들이 넘쳐날 따름이다. 거리를 도배하는 얼굴이란 어째서 한 때 거리를 도배‘했던’ 얼굴이나 앞으로 거리를 도배‘할’ 얼굴이 아님에 분명한 모습인가. 이 발화가 싸르트르의 용법을 빌어 현실의 독자층이 아니라 잠재된 독자층을 겨냥하고 있다면 아주 특별한 시적 효과를 자아낸다. 그것은 화자가 이미 손 쓸 도리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사유의 동결 상태를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일련의 공동사색을 주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진지한 한 남자가 진지한 한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고 치자. 그 말이 가령, ‘널 사랑했다’이거나 ‘앞으로 널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널 사랑하고 있어(널 사랑해)’보다 여자의 처지에서 보자면 한결 사고의 여유를 제공한다. 즉 과거형의 발화에 대해서는 사태의 한복판에 홀가분하게 벗어났다는 데서 비롯하는 거리확보로서의 응대가, 예정형의 경우에는 비록 마음의 준비를 어떤 식으로든 해야된다는 강박심리가 발동하더라도 언제가 될 지 모르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사건인 점에서 야기하는 이완된 심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널 사랑해’의 경우 발화자든 수화자든 긴장이 수반된 침묵만이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데, 그 이유는 남자쪽에서는 현재의 내밀한 감정을 폭로하게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흥분적인 사태관망이, 여자쪽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남자가 던진 애정의 포승줄에 체포되었다는 망연자실을 어쨌던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시생활자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의 내면풍경은 어떠한가. 이 말은 도시인이자 시인인 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인의 범주로써 모범적인 시민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갈망과 예술가로서의 시인의 업을 충실히 해내야겠다는 욕구가 서로 상충하고 마찰하는 자리에 서화성의 신작시가 놓인다. 행복한 합일이 아니라 분열증의 초입에서 머뭇거리는 표정이 그러하고(「몰랐다」에서 자기 정화인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난 이후에도 “몸을 씻기 전” 때보다 오히려 증폭된 자기회의가 그렇다), 총체적인 인격체로서의 문화인이 아니라 세속과 예술의 경계에서 찢기고 휘청거리는 모습이 그러하다.(「공익광고」) 「공익광고」에서 “수입은 언제나 빈깡통이다”라는 구절이 정확히 “나를 복제한 얼굴들이 거리를 도배한다”는 꼼짝없이 소여된 끔찍한 현실의 표정에 상응하는 화자의 자기냉소․자기풍자에 지나지 않다면, “시인 서화성을 이렇게 만든” 세속적인 일상이란 시인의 말대로 영락없는 요지경 세상인 것이다.
「미로찾기」에서 10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던 양복의 처지를 이제는 화자 자신에게 “세상에 맞붙어”버린 송장처럼 고착화된 완료형으로 전이시켰을 때, 시의 화자가 확보할 수 있는 심리적 거리는 ‘그리움’이라는 애상의 정조만큼이나 객관화가 가능한 공간이다. 즉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논평’할 수 있게 된 것이다.(냉소의 완화, 혹은 자기환멸의 희석화 과정)
그렇게 시간이 자랐고 지금은 자라나는 나이를 잘랐다. -「자르다」
이는 단순하게 언어유희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는, ‘자라다’와 ‘자르다’의 “자라나는 나이”라는 숫자로써 구획이 가능해지는 “시간”에 대한 표면적인 양가표명과도 관련되는 지점이다. 명백한 비문임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술어자격에 “자랐고”과 “잘랐다”를 병기한 이유는 자라는 나이(시간)라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적․인간적 순리를 향해 비로소 대항할 공격기제가 작동한 까닭이다.(“잘랐다”라는 화자의 적극적 실천행위를 위한 “자라나는” 시간적 질서에 부과된 복속의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전통적인 장인으로서의 예술가가 지녔던 ‘아우라’(Aura)의 상실을 현대 예술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목했다. 원본의 권위가 훼손되고 그 복제품들이 난무하거나 문화상품이 되는 현실이, 예술이 담당하고 성취해야 하는 여러 양상들 중의 하나인지 아니면 새로운 미학의 패러다임을 예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화성 시인이 신작시를 통해 분열과 냉소의 포즈로 내면의 정체성을 탐색하고자 했을 때 그는 분명 예술가만이 지닐 수 있는 지극한 아우라를 열망했는지 모른다. 나머지 시편들에 비해 다소 이질적인 「봄의 속도」가 서정성이 물씬 풍기면서도 경쾌하고 속도감 있게 읽히는 이유도 이러한 내밀한 풍경에 조응한 흔적이라고 짐작한다.(이 시와 함께, 서양의 7음계로 마치 삼행시처럼 날렵하게 읊조리는 「피아노 치는 여자」, 『시와 현장, 2003년 가을호 ; 빵과 동화적 상상력이 결합된 「빵 굽는 집」, 『시와 사람』, 2002년 겨울호 : 화자의 정감을 보름달에 이입시켜 황폐해진 내면을 형상화한 「보름, 달」, 『다층』, 2002년 봄호 등과 같은 전작들도 한데 묶을 수 있다)
유독 ‘얼굴’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얼굴’은 하나의 뜻으로 이루어진 홑말이 아니라 ‘얼’(혼)과 ‘굴’(통로)이 뭉쳐진 합성어이다. 즉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라는 말인데, 시인이 시를 통해 다듬고, 어루만지고, 창조하는 얼굴의 표정이 과연 어떠할 지 후속작을 기대해 본다. 아름다운 얼굴이기를 바란다.
2. 말더듬이 산책자 - 최동문의 시
최동문의 시인의 신작시가 초대하는 오솔길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방향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시어들의 행렬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이 경우 분석에의 욕구나 시 세계의 지형도를 가늠하는 일은 일단 접어두고 그저 시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일차적인 시 독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필자는 솔직히 말해 이 방법이 상당히 곤혹스러웠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뒤척이다 잠든, 아파트
추녀가 된 비둘기 꼬리 깃, 깃
하늘이 더 위태로운 균형이었다.
하양, 까만 공기가 휘저은 깃털이
싸늘한 자동차 지붕으로 떨어져,
그것은 반짝이는 회색 운명. -「작은 풍경소리」
군살을 거부한 배우가 스스로에게
거울 없이 그린 눈물자국처럼
숨쉬는 시간은 꼬집어도 비명없는
하얀 발톱 같은 것. -「지하철, 그 종점에서」
「작은 풍경소리」처럼 쉼표와 마침표의 잦은 사용으로 매끄러운 독법이 어려운 경우(이 밖에도 「21세기의 이십일氏」의 “이십일씨가 연출한 시상식에는,/강렬한 인내를 지낸, 가벼운 두 손이,/낮은 미소로 도금된 패를 주고, 받는다.”와 같은 부분이 해당된다)와, 「지하철, 그 종점에서」의 인용한 대목처럼 기호의 지시대상과 수식․관계어의 연결고리를 헤아리기가 벅찬 경우이다.(「작은 풍경소리」의 “모여 앉은 젖은 낙엽이/소원없이 바람에게/주저리 평화를 맡겼다”라는 대목도 포함된다) 시의 자연스런 읽기를 방해하는 이런 요소들이 시편들 곳곳에 돌부리처럼 산재한다.
다음으로 기본적인 시 읽기에다 행간의 표정과 시가 자아내는 이미지 및 주제적 함의 등을 찬찬히 음미해 보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앞서의 경우보다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를 감상하는 독자라면 으레 경험하기 마련이지만 이 두 가지 방법이 의식적으로 따로 취해지지 않고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시어의 연쇄만 좇는다고 해서 시가 발산하는 정조가 한 발짝 뒤로 빠져서 양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나 메시지를 주축으로 읽는다고 해서 기표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긴 나무 의자에 앉은 가면들. -「지하철, 그 종점에서」
파운드(E. Pound)의 2행시(“군중 속의 얼굴들의 모습/촉촉히 젖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잎들”)을 연상시키는 부분인데, 이 시를 처음부터 신중한 자세로 읽지 않은 독자라도 “가면들”이 선행한 진술들에 의하자면 지상에서부터 지하로 유입된 승객들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연극이나 문학, 특히 시․소설에서 인물의 개성 또는 화자를 나타내는 용어인 퍼소나(persona)와는 별도로, 익명의 군중이나 사람들을 가리킬 때 흔히 비유하는 말이 ‘가면’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제목을 미리 알고 시의 첫 행부터 순차적으로 읽어나가는 독자라면 시인이 그냥 ‘승객들이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거나 ‘긴 나무 의자에 익명의 무리들이 앉아 있다’, 혹은 ‘긴 나무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가면들’이라는 시어를 선택한 이유가 딴 데 있음을, 즉 곧바로 이어지는 행의 “차가운 공기”라는 스산한 이미지와 관계 있는 시 전체의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란 느낌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마지막 경우의 독해 방법이자 필자가 주안점을 두면서 시도해 나갈 분석 방향은 보다 적극적인 읽기이다. 작품 해석에서 과연 어디까지 닿는 곳이 적극적인 독해인지 스스로 반문해 보기도 했지만, 시인이 시를 쓸 때의 문제의식과 정황이 얼마나 한 편의 완성된 시를 통해 스스로 알맞게 드러났으며, 또한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었는 지 냉철하게 감정(鑑定)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때 시의 해석의 공간을 다양하게 적극 활용하면서 생산적인 수용미학에 연관되는 창조적 독법을 문제 삼을 수 있는 데, 시인이 제작한 작품의 성과를 그 허물과 함께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창조적 독법의 전제가 되고 그 역도 성립하리라고 본다. 그러니까 진정한 창조와 생산미학은 기본적으로 작품에 담긴 미세한 표정까지 포착해내는 독해력을 바탕으로 할 때만이 그 이름에 값할 것이다.
먼저 그의 5편의 신작시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말은 아릿한 풍경이다. 맨 풍경이 아니라 ‘아릿한’ 풍경인 것은 시의 화자가 대상으로서 설정한 시적 소재들이 화자에게 정서적으로 분명하게 다가오거나 미적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한 채로 그것들이 화자의 내면에 스며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깜박거리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점멸로 다가오는 것, 이는 여하한의 몰입이나 무관심으로부터도 갈라지는 표현적 개성임에는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뚜렷한 정조의 생성이 더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것은 별다른 말을 손쉽게 찾지 못해 ‘아릿한’이라는 수식어를 달수밖에 없는 필자의 무딘 언어적 상상력과는 상관없이 시가 스스로 보여주면서 얼른 감춰버리는 속엣 것의 실재성에 의문부호를 매단다.
단자화된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듯한 「21세기의 이십일氏」는 제목에서도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점점 개인화(이 말 자체로는 부정적인 함의를 전혀 갖고 있지는 않다)되어 가고 속화(俗化)에 ‘올인’하는 최첨단 자본주의 시대의 일상인에 대한, 혹은 시대에 대한 그 어떠한 풍자나 적절한 반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신 2연의 “가장”과 4연의 “더욱”이라는 정도부사가 붙은 용언들의 열거를 통해, 모니터를 경계로 한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세계를 ‘음미’하는 “이십일씨”의 매개화된 진술만이 전면에 놓여 있다. 즉 현대인의 문제적 양상이 은폐되고 “현미경과 천문대에서 살균된 눈동자”라는 ‘극미’와 ‘극대’의 양 극단적 가상공간의 ‘알리바이’가 (가상)체험공간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기대와는 다르게 마지막 구절처럼 “이십일씨가 결고운 새벽 먼지를/안개비 지나간 골목길에서 쓸어 담는다”라는 아름다운 풍경마저 “긴장을 풀어헤친” 사이버공간으로부터 일상공간으로의 평상심의 회복이 아니라, 일종의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한 시적 진술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 시가 주된 의미양상으로 기획되었을 지도 모르는 ‘현대인의 건조한 일상성’이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시적 긴장을 획득하지 못한 채 풀어져 버렸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가령, 폐가의 이미지를 담벽에 박혀버린 “박쥐”와 “송아지”로 형상화한 기발한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마지막 연에서 눈에 익을 대로 익은 계절(봄)의 정경 속에 흡수시켜 버린 것이나(「남은 폐가」), 순간적인 사랑의 열정의 단면을 바다를 통해 보다 분명한 정감․이미지로 자아내지 못하고 시어 “사랑”의 잦은 사용으로 인해 그 효과가 반감된 것도(「영혼의 카사노바」) 비슷한 경우에 해당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이버공간이든 실제현실의 공간이든, 상상의 영역이든 체험이 영역이든 풍경과 조우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섞여들기와 바라보기가 그것이다. 물론 아주 근사한 방법은 섞여들면서 바라보는 방식이 되겠으나 종국엔 주관적인 시의 화자의 미적 태도와 관점에로 응결될 수밖에 없는 시 장르의 특징을 떠올린다면 이 두 가지 형태로 양분되는 것이다. 실상 풍경이 온전한 풍경으로만 보이는 경우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자가 산책자이거나 방외인일 때만 가능한 법이다. 최동문의 신작시들의 ‘완성된 형식’이 보듬고 있는 서정의 파편들은 시의 화자가 애써 몰두하지 않거나 다만 건드리고 지나갈 뿐인 눈앞의 장면들에 불과하다. 혹은 상상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다. 그가, 그러므로 완전한 산책자가 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애써 풍경의 사태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 행복한 일체를 노렸으나 여지없이 실패해 버리고 만다.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의 딱딱하면서도 금속성이 깃든 음산함 속에 시의 화자의 초점이 확실하게 머물지 못하고 “레일”과 “계단”과 “지상의 어린애들”과 “이정표” 등으로 초조하게 이동할 때(「지하철, 그 종점에서」), “질긴 내 고무구두”의 신산했을 이력의 표정이 거세되고 실종되었을 때(「작은 풍경소리」) 그의 숨겨진 눈동자가 닿고자 했던 세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시인의 실존에 성가시도록 메스를 가하는 오염된 현실에 지친 내면의 표지가 아닐까. 뚜벅뚜벅 걸어가는 튼튼한 두 다리의 산책자가 아니라 복화술의 확연치 않은 음성으로 말을 더듬거릴 수밖에 없는 한 방랑자의 표정을 이번 신작시를 통해 엿보았다면 시건방진 소리일까.
<보유>
두 시인들의 작품론 말미에 느닷없이 ‘보유’라는 항목으로 글을 맺는 까닭은, 본문에 집어넣자니 나름대로 구상한 작품론의 ‘구성’에 티를 남기는 것 같고 빼자니 뭔가 아쉬운 점이 있어서이다. 말하자면 두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체험적 현실에 대한 시적 언어로의 추상화 작업에서 ‘새어나오는’ 틈새의 단면이다. 이는 날 것의 문학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요소인 미학적 봉합의 수순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결과인지 아니면 그것까지 포함한 시인의 상상세계를 여과없이 표명하겠다는 전략의 결과인지는 가늠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서화성의 「봄의 속도」에서 시속 70km로 북상하는 벚꽃의 속도와 마지막 구절의 “봄이 온다”라는 표현이 봄의 도래라는 정조의 매끄러운 효과를 빚어내지 못하고 있다. “북상”은 화자의 지점에서 공간적으로 점차 멀어지는 것이고, “온다”는 반대로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시끄럽다”가 사이에 끼어서 새 생명의 움틈을 역동적으로 반영하려 한 의도는 수긍이 되지만, 자칫 이 시의 전체적인 풍경인 봄의 이미지에 난데없는 부산스러움만 보태진 건 아닌지 생각한다.
최동문의 경우에는 “별빛은 여명 속으로 사라지고”(「작은 풍경소리」)라는 구절이 문제된다. 시에서 가장 치명적인 결점이라 할 수 있는 상투적인 어법의 사용은 제쳐 두더라도, 과연 ‘별빛’이 ‘여명’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일인지 묻고 싶다. 밤새 빛나던 별이 새벽을 맞이하여 화자의 가시권에서 멀어지고 ‘여명’(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별과 태양을 포함한 지구 상층권의 모든 빛이 대기 중으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가시현상이다)이 이를 잠식한다는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굳이 이런 식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 구절의 바로 앞의 연의 “일어난 새벽까지”를 통해 시간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두 시인의 시편들에서 묻어나는 진정성(眞情性)의 결락이다. 진정성의 유무로 시적 성취도를 판가름하는 것은 분명 어리석다. 그러나 진실되고 절박한 심정이 배어들지 않은 시가 결코 미덕일 수만은 없다. 아무리 현대로 접어들면서 가치 상실과 중심 찾기의 혼미양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시인이라는 존재는 그러한 물결 속에 떠밀리는 사람이 아니라 과감하게 한 발짝 비켜서서 차갑게 응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다소 초점이 다르지만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시인, 사제와 군인을 제외하고 인간들 중에 위인은 없다. 노래하는 사람, 축복하는 사람, 남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도 희생하는 사람 말이다.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 단상집『벌거벗은 내 마음』중에서
‘나머지’의 시샘 어린 비판으로 받아들여지길./[시와 사상] 2005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