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의 비, 대빈왕후를 찾아서.....
문화재 분류 : 사적 제198호
능주 : 숙종의 3번째 중전 대빈왕후
능역 : 서로릉역 대빈릉
방문일 : 2021년10월20일
누구와 : 처현과 처남 그리고 우리부부
조선19대 왕 숙종의 비였고, 20대 경종의 생모가 되는 장옥정
많은 사람들과 역사의 기록은 왕비라 부르지 않고 희빈으로 부르고 있다.
희빈은 정1품에 속하는 여자로서는 최고의 품계에 속하는데 정2품의 품계인 소의를 받았다가 왕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고 희빈이라는 품계를 받았는데 희빈이라는 품계를 받은 궁궐의 후궁은 숙종의 비였던 희빈 장씨와 중종의 후궁이었던 희빈 홍씨가 전부다.
한 때 희빈이었던 장옥정은 숙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왕의 대를 이을 경종을 낳으면서 생의 최고의 날을 이어갔었다.
그러나 말로가 좋지 않아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나 폐서인이 되고 나중에는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안고 살아간 사람이다.
장옥정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아버지는 역관 출신으로 이름은 장형(張炯), 어머니는 파평 윤씨로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아주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뽑혀 입궁한 것 같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가 명성왕후가 죽은 뒤 3년이 지난 1683년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된 후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숙종은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 했고 서인은 이를 반대하다가 숙종에게 미움을 사게 되니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인은 퇴출되었고 남인이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당파싸움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가 폐비되어 궁궐에서 쫓겨 났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면서, 중전이었던 장옥정이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으니 이를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집권세력이 국정을 좌우했다고 볼 수 있는데 옛날에는 왕비까지 폐서인을 시켰다는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숙종은 정이 있어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궁궐에 남아있도록 배려를 했는데 반성을 해야할 입장이었는데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놓고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결국사약을 받게 된다.
희빈 장씨가 죽은 뒤에 경기도 광주 지금 오포읍(당시 지명은 진해촌眞海村), 문형산 자락에 숙종이 후이 장사를 치러주었는데,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묘호의 대빈은 희빈 장씨가 죽은 후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조선 제20대 왕 경종으로 경종은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다.
숙종의 비 장씨에 대한 필자의 견해
조선의 왕이나 왕비들의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가 훗날 복위가 되기도 했다.
필자는 먼저 숙종의 비였던 장옥정의 호칭부터 달리 부르고 싶다.
묘호도 대빈묘가 아닌 대빈릉으로 바꾸고, 호칭도 대빈왕후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모든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승자의 기록이며 죄인에게는 과중한 죄를 가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빈왕후도 역사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당시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에서 이러한 비극이 비롯되고 끝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대빈왕후가 죄인이라면 숙종은 죄인이 아닐 수 없다.
지금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을 숙종은 행한 것인데 당시 질투는 칠거지악의 하나이기는하지만 그것이 사약을 받을만한 죄였는지?, 그것도 원자의 생모를 죽일 수 있는 대죄인지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묻는다면 사약을 받아야할 대죄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빈왕후의 잘못보다는 여색을 즐긴 숙종의 잘못이 더 많고 크다.
숙종은 대동법이나 국방을 위한 일에 정치를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여성관에 대해서는 실컷 가지고 놀다가 버려도 된다는 이기적이고 잘 못된 생각이 있었을 것인데 당시 왕이라는 직책으로 그 죄를 물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왕을 지내고도 왕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왕이 2명이있으니 연산왕과 광해왕이요, 중전을 지내고도 왕비로서의 대접을 받지못하는 왕비가 4명이 있으니 연산왕후와 광해왕후, 그리고 숙종의 비인 대빈왕후와 성종의 비이자 연산왕의 생모 정헌왕후이다.
필자의 바람은 지금이라도 대동이씨 종약원에서 연산왕과 연산왕후, 광해왕과 광해왕후, 숙종의비인 대빈왕후, 성종의 비인 정헌왕후를 복위시켰으면 한다.
현세가 이를 받아들이던지, 받아들이지 않던지는 접어두더라도..... 세월이 100년, 200년 지나면 이것도 역사가 될 것이니까........................
대빈릉으로 가는 길.....
대빈릉으로 가는 길은 관람로를 따라 약1.3~4km 걸어야 한다.
서오릉 출입문으로 들어서서 조금지나면 우측으로 능이 보인다.
필자도 오랜만에 서오릉을 찾았는데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는데 예전에는 출입문으로 들어서서 우측으로 조금 가야 숙종릉인 명릉이 있었는데 지금은 출입문에서 직진방향으로 조금 지나면 명릉이 나온다.
능이 이동성이라서 수시로 움직이는 것도 아닐텐데...............
그렇다.
서오릉 출입문을 우측으로 새로 조성했고 예전 정문격으로 이용하던 곳은 소방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출입문으로 들어서서 명릉을 보고,
다시 관람로를 따라 조금 지나면 재실이 나오는데 예전에는 비공개 지역이었는데 현재는 공개지역이다.
이어서 원을 2곳을 지나게 되는데 그 중 한 곳인 수경원은 1970년9월8일 연세대학교에서 현 위치로 이장한 것이다.
당시 경희대학교에 있었던 회릉(연산왕의 생모인 폐비윤씨-정헌왕후)은 서삼릉으로 이장했는데 지금의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과 대동이씨종약원은 이장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연세대학교 교정안에 있으므로 학생들과 외부사람들의 빈번한 출입으로 관리가 불가능하다.
둘째 주위의 주택의 난립으로 전망과 시계가 흐려져 풍수지리설상 좋지 않다.
셋째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후궁과 왕자의 묘소를 한 곳으로 집장하는 계획의 일환이다.
그 예로서는 1969년도에 경희대학에 소재해 있던 회묘(연산군 친어머니의 묘)를 역시 경기도 고양군 서삼능으로 이장해 갔으며 일정시에도 각 제왕의 후궁 및 왕자의 묘를 150기나 현재의 서삼능에 집장한 적이 있다.
넷째 석물 (양석과 비석, 그리고 무관석)과 건조물 등이 퇴락을 들었다.
그러나 이같은 이유는 억지로 면피하려는 핑계일 수밖에 없다.
서울에 있는 것은 시끄럽기때문에 안좋다는 이유와 각지에 흩어져있는 궁중 묘를 한곳으로 이장한다는 명목이었지만 필자는 이를 믿을 수 없으며 추측컨대 아마도 경희대학교나 연세대학교에서 캠퍼스내에 능(원)이 있으면 개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로비를 엄청나게 했을 것이다.
추정컨대 어마어마한 돈으로 앞세워서......
추정이 사실이라면 그 큰 돈은 어디에 쓰였을까?
어느 개인의 주머니로 가지는않았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원묘천장사업심의와 심의가결내용을 보자.
원묘천장사업심의
심의가결내용
1) 영휘원은 홍유능(금곡)지구로 천장
2) 영회원, 수경원은 서오능지구로 천장
3) 영빈묘, 성묘, 안빈묘, 명빈묘, 대빈묘는 서삼능 집장지로 천장
위의 내용을 보면 해당 원묘는 심의한 대로 모두 옮겨져야 했는데 영휘원, 영회원, 영빈묘, 성묘, 안빈묘, 명빈묘는 옮기지 않고 대빈묘와 수경원만 옮겼는데 수경원만 옮기면 지탄을 받을 수 있으므로 대빈묘까지만 옮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다른 원묘는 현재도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만 보더라도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장 심의만하고 천장하지 않은 원묘의 현황이다.
사적 제361호 영휘원(숭인원포함), 고종의 비 순헌귀비 엄씨(純獻憲貴妃 嚴氏),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외
사적 제357호 영회원(永懷園), 소현세자의 비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
사적 제367호 영빈묘(寧嬪墓), 숙종의 비 영빈김씨(寧嬪金氏),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
사적 제365호 성묘(成墓), 선조의 비 공빈김씨(恭嬪金氏),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5
사적 제366호 안빈묘(安嬪墓), 효종의 비 안빈이씨(安嬪李씨),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66
사적 제364호 명빈묘(明嬪墓), 태종의 비 명빈김씨(明嬪金氏), 경기 구리시 아천동 산14
수경원과 순창원을 지나 경릉을 지나 작은 언덕배기를 오르는 길 좌측으로 초라한 능침이 있으니 나만이 부르는 대빈릉이 있다.
안내판에는 능이라 기록하지 않고 대빈묘라고 되어 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보는 대빈릉이다.
함께한 가족들의 서오릉 관란도 여기까지로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되돌아 갔는데 태욱이 처남이 말하기를 대빈릉 뒤에 있는 바위가 방송에도 나왔다는데 대빈릉 터가 기가세기 때문에 나무도 바위를 뚫고 자랐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일이....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프로에 나왔다고 하는데 인터넷을 두둘겨봐도 자세한 내용은 없다.
산을 다니다 보면 이런 바위는 종종 볼 수 있다.
나무 뿌리가 바위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바위는 나무뿌리의 힘을 이기지못하고 갈라지는것은 자연의 이치다.
대빈왕후의 기가세서도 아닌 자연현상인데 말 만들기 좋아하는사람들이 지어낸말이다.
조선왕조실옥은 승자의 기록으로 대빈왕후가 인현왕후를 죽으라고 신방을 차리고 굿을 했다는기록도 믿을 수 없고....
연속극에서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인기를 더 누리기 위해, 인현왕후를 착한 왕비로 대빈왕후를 악독하고 비열하게 연출했을 뿐으로 장옥정은 비운의 왕비로 생각된다.
빨리 복위되었으면 좋겠다는 필자의 생각.................
첫댓글
회장님
한참을 머물다 갑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