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스코 다 가마(Gama, Vasco da / 1469 ~1524)의 인도 항로 개척
취한 코스는 디아스의 건의로 디아스가 택한 해안을 따라 간 것이 아니라 북상(北上)하는 조류(潮流)를 피해 반원형을 그리며 우회해서 우선 희망봉까지 간다는계산을 세웠다.
그래서 시에라레온 앞 바다에서 대서양의 서쪽으로 나아가 다시 북상을 하였는데, 막상 3개월 동안 육지는 고사하고 섬 하나도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반란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들 일행은 11월 22일 희망봉을 돌아서 아프리카 동해안의 여러 어촌을 거치면서 모잠비크·몸바사를 통과, 98년 4월 마린디에 도착, 도중에 이슬람교도들의 적대적 방해로 시달림을 받았으나, 우호적인 마린디에서는 이슬람의 수로(水路) 안내인 이분 마지드의 도움으로 드디어 인도양을 횡단, 5월22일 캘리컷에 도착,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의 대사업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위협을 느낀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와, 무력(武力)에 대한 지방 영주(領主)들의 경계심 때문에 정식 통상교섭은 난항을 거듭, 3개월만에 겨우 약간의 향료를 입수하고,10월 다시 인도양을 횡단하여 올 때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항해를 계속하였으나, 괴혈병(壞血病)·열병(熱病)등으로 선원의 반 이상을 잃고, 1499년 9월 9일 가까스로 리스본에 귀환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캘리컷까지 왕복하는데 꼭 2년 2개월의 소요되었으며,2/3 이상의 선원을 잃게 되어 도중에 배 한 척은 불에 태우지 않을 수 없었으나, 가져온 향료의 수입이 엄청나서 비용을 탕감하고도 많은 이익을 남겼다.
이렇게 인도 항로가 열리자 포르투갈에서는 거의 매년 탐험대를 인도에 보냈는데,1500년 13척으로 구성된 제 2회 탐험대를 인솔한 카브랄(Cabral, Pedro Alvars /1467/68~1520)은1500년 3월 9일 리스본을 출범하여 희망봉을 향해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서쪽으로 표류하던 중, 4월 22일 우연히 브라질 서해안에 도착, 그곳을 포르투갈 국왕인 마누엘1세의 영토로 하고, 다시 동진하여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였고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1502년 바스코 다 가마가 다시 15척의 대함대(大艦隊)를 인솔하고 인도에 건너갔을 때에는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반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파하고 코친·카나놀 등 각지에 상관(商館)을 설치, 인도무역 독점의 기초를 다졌고, 그 뒤 백작에 봉해지고, 국왕의 인도정책 고문이 되었다가, 1524년 국왕을 대신하여 현지 공관(公館)의 부패숙정을 위해 인도에 갔으나, 과로가 겹쳐 병을 얻고 코친에서 죽었다.
인도의 왕래가 자자지면서 향료의 값도 많이 떨어졌으나 무역으로 얻는 수입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유럽의 군주들은 너도나도 인도에 관심을가졌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은 그들의 식민지로 추락하는 순서를 기다리게 되었다.
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파괴
(1) 또 다른 서방항로의 개척자 콜럼버스(Columbus,Christopher / Cristoforo Colombo / 1451 ~ 1506.5.21)
이웃 나라 에스파냐는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그라나다를 함락하고(1492) 역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 때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을 찾아가 희망봉을 돌지 않고도 훨씬 가깝고 비용도 적게 드는 신 항로의 개척이 가능하다고 열심히 여왕을 설득하는 사람이 바로 콜럼버스였다.
그러면 왜 별 것도 아닌 후추와 계피 따위의 향신료를 얻기 위해 유럽인 들이 죽음을 무릅쓴 항해를 하면서 까지 인도를 찾아나섰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조금은 지루하고 복잡하다.
그 첫 번째 대답은 유럽에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서 고가의 귀중품으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고 둘째 귀중품으로 대접받은 이유는 육식을 주로 하는 유럽인 들이 식사 후 혹은 변질된 육류를 먹고 나서 입에서 나는 냄새를 제거하는데 필수적이 였다는 것, 셋째 육식을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척박한 토지에서 유치한 농업기술로는 식량을 충당할수 없었다는 것, 넷째, 변질된 육류라는 것은 겨울이 되면 목초가 없기 때문에 종자용을 제외하고 모두 도축해서 보관하는데 냉장시설이 없었다는 것, 다섯째, 생산지가 아시아쪽이고 직수입이 불가했다는 것, 여섯째 직수입이 불가한 이유는 오스만 투르크가서아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어서 육로 통행이 불가했다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있다.
이런 향신료 외에 또하나 유럽인 들의 입맛을 당기게 한 것은 황금, 마르코 폴로가 섰다는 동방견문록에는 동쪽 끝 어느 땅에는 황금의 나라가 있어서, 온통 황금으로 뒤 덮여 있다고 과장해서 이야기하였다. 이 황금의 나라가 치팡고(Cipango), 즉 일본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 때 일본의 무역상인들이 금화를 가진 것을 보고 이 벽안의 사나이가 잘못 판단하였거나, 아니면 당장 들통날 일도 아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서 사람들의 흥미를유발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일본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금이 많이 나는 나라가 아니다.
콜럼버스가 제시한 서방항로의 내용은 지구의 구체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는 피렌체의 의사이면서 지리학자였던 토스카넬리(Toscanellidal Pozzo, Paolo / 1397~1482)와 편지를 통해서 지구구체설과 서방항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다는 치팡고가 이베리아반도의 서남 단에 있는 비센테 곶과의 거리는 약 2천 4백 해리, 평균 3 노트의 시속으로 간다면 1 개월 정도의 항정(航程), 이런 것들이 그의 생각인 동시에 이사벨 여왕에게 보고 한 내용들이였다.
콜럼버스가 처음부터 후원을 바랐던 것은 포르투갈 국왕, 1484년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獻策)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은 실효성에 의문이 많은 콜럼버스의 계획에 선 듯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콜럼버스는 영국왕 헨리 7세에게도 자기의 포부를 편지로 알리고, 에스파냐로 찾아가 이사벨 여왕을 찾았는데, 이 여왕은 재빠르게 콜럼버스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내용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섬과 육지의 부왕(副王)겸 총독으로 부임하고, 이익의 9/10을 왕실에, 나머지 1/10은 콜럼버스 개인의 이익으로 하며, 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는 것 등 이었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을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免罪)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으며,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이래서 콜럼버스의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 세척의 배와 선원 120 명을인솔하고 팔로스 항을 떠났다.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의 와틀링 섬(추정)을 발견, 이어,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키고, 아메리카토인들이 장식용으로 몸에 두르고 있던 약간의 금과 견본용 노예를 대리고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가져온 약간의 금제품으로 황금의 나라 치팡고를 목전에 두고 돌아왔고, 치팡고의 서쪽에 있는 향료 섬까지는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선전하자, 전 유럽에 큰 소동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이때 생겨났으나, 문제는 향료. 한 톨도 구하지 못하고 돌아온 그로서는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변명도 여러가지로 구구했을 것이다.
이래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게되었는데, 1493년 제 2회 항해 때는 그의 선전에 따라, 17척의 선박에 1,500 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금과 향료를 찾아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가르게 되었다. 그러나 금의 산출이 보잘 것 없고 향료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살육하거나, 노예로 만들어 에스파냐로 대리고 온 것이 고작 이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부를 찾아 항진(航進)하려는 축적된 에너지는 이후에도 제3회항해(1498∼1500), 제4회항해(1502∼1504)까지 계속되었으나,허탕만 뒤풀이하였고, 1504년에 그의 후원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하락 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는 가운데 이미 과거의 인물이되어 죽었다(1506)
그러나 자신은 자기가 발견한 곳을 인도라고 믿었고, 그 후 이곳이 베스푸치(Vespucci, Amerigo /1454~1512)라는 사람에 의해서 인도가 아니고 신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스푸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출신으로 1479년 메디치가(家)와 관계를 맺고 일하다가, 91년부터 세비야의 메디치계(系) 상관(商館)에 파견되어 일한 것을 인연으로, 콜럼버스의 2·3차 항해에 쓰일 배의 건조일 을 도왔고, 1497∼1503년에 걸쳐 자신이 신대륙에 여러 번 항해하였다.
카리브해를 지나 멕시코 일대를 둘러보고,이곳이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인도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고,1503년 알베리쿠스 베스푸시우스(베스푸치의 라틴명)의 이름으로 발행된 작은 책자"신세계"를 발간, 이런 사실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1507년 독일의 지리학자 M . 발트제뮐러가 그의 저서 세계지 입문(世界誌入門)에서(1507) 신세계임을 발견한 아메리고의 이름을 기념하여 그것을 아메리카라고 부르기를 제창하였고, 이것이 뒤에 널리 승인되어 오늘날까지이르고 있다.
콜럼버스는 자기가 본 대륙이 인도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알고 죽었기 때문에 대륙의 명칭까지 다른 사람에게 내주었으나, 그의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의 단서를 제공한 것은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서 대량의 은이 유입되어 유럽의 가격혁명을 유발하였고, 담배와 매독, 감자와 옥수수 등이 전래되어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크게 변화 시켰다.
(2) 마젤란(Magellan, Ferdinand, Fernando de Magalhaes/ 1480~1521.4.27)의 세계 일주
콜럼버스가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으로 에스파냐에서 항해가로 일했다면, 마젤란은 포르투갈 태생으로 역시 에스파냐에서 항해하여 인류최초의 지구일주항해의 지휘자로서의 후세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포르투갈어로는 마갈랴잉시라고 부르며 마젤란은 영어식 이름이다.
그는 포르투갈의 하급귀족출신으로, 마누엘 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의 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아프리카·인도 항로에 근무하였고(1504∼11). 이어서 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모로코에서 현지무어 인과의 거래가 왕의 의심을 사게 되어 불신을 받자 포르투갈과의 인연을 끊고에스파냐로 건너갔다.
그가 말라카에서 근무할 때 우수한 향료의 산지가 몰루카제도(Moluccas 諸島)라는 것을 알았고, 이미 아메리카대륙 서쪽에 또 다른바다(태평양)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희망봉을 돌아가듯이 신대륙에서 남쪽끝을 돌아가면 쉽게 몰루카제도에 도착할 수 있고, 항정도 희망봉을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고 판단, 이에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를 설득, 드디어 특허를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航路)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하에 선박 5척과 승무원 237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가 국왕과 맺은 계약은 대개 콜럼버스의 경우와 유사한 것으로 새로이 얻은 땅에 부왕과 총독자리와 수입의 1/20은 마젤란이 나머지는왕실이 차지한다는 등의 것이었는데, 선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행선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 이곳이 마젤란이 예상한 해협이 아니고 강어귀라는 것을 알았고, 다시 남하를 계속, 남위(南緯)49도 20분의 율라안 항에 이른 것이 3월 31일.
여기서 포르투갈 출신 마젤란에 대한 에스파냐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 위기를 넘겼으나 해안을 탐험하던 배 한 척이 침몰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마젤란과 그 일행의 배 4척은 8월 24일 율리안을 출발, 남하를 계속, 10월 21일 남위 52도 50분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깊은 강 어귀(마젤란해협)에 진입, 600 킬로미터의 길고 험한 해협을 38일간 항해, 이 때 뒤따르던 배한 척이 도주하여 단독으로 귀국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3척의 배로 해협을 빠져나간 마젤란은 해협의 출구를 "대망(大望)의 갑(岬)"이라고 불렀는데 이 때가1520년 11월 28일, 희망봉 발견에 버금 가는 일대 쾌거라 할 수 있었다.
대망의 갑에서 대양으로 나선 마젤란은 처음에 물결이 잔잔한 것만을 보고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몇 일을 가도 섬 하나 볼 수 없었고, 식량마저 떨어져 배 안에 있는 쥐를 잡아먹고, 마스트의 쇠가죽까지 씹어먹는 절망과 고난의 항해를 계속,
마젤란 해협을 떠난 지 110 일 만에 마리아나 제도(諸島)의 한 섬 괌(Guam)에 상륙하여 오래간만에 음식과 신선한 물을 마신 것이 1521년 3월6일.
마젤란은 앞서 말래카에서 근무할 때 산 수마트라출신 노예를 이 세계일주 항해에 데리고 다녔는데, 그에 의해 이 괌에서 목적지 몰루카제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은 목적지 몰루카제도를 보기 전막탄섬(Mactan Island)에서 토인들과 전투 중 목숨을 잃었고(1521. 4. 27), 나머지선원들은 겨우 배 2척으로 몰루카에 갔다가 여기서 또 한 척을 버리고 85톤 급 빅토리아호 1척만으로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동방항로를 따라희망봉을 돌아서, 1522년 9월 8일, 3년만에 세비야에 귀항, 이때까지 생존자는 엘카노등 18명 뿐, 필리핀·마리아나 제도 등의 이름이 지어진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일주가 이루어졌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마젤란이 처음부터 세계일주를 목적한 것은 아니고, 가까운 길로 몰루카제도에 간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세계일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 국왕은 싣고 온 향료만으로도 많은 이득을 얻었지만 마젤란 자신은 매우불행했었다.
물론 그가 일부변경선을 이미 넘고 죽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는 이 때이루어 졌다고는 하나, 그 자신이 목숨을 잃은 것은 고사하고, 그 동안 에스파냐에 남아 있던 처와 두 아들이 사망했으며, 막탄섬에서 죽은 마젤란은 반역자 취급을 당했고, 새로이 발견된 향료 섬 몰루카는 포르투갈에 팔렸으며, 마젤란 해협의 발견자라는 명예와 귀족의 칭호를 획득한 것은 항해 중 마젤란에게 반항했던 빅토리아호의 선장 엘카노에게 돌아갔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로 이들 국가와 항해 가들은 영광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지만, 유럽이라는 지역이 이를 계기로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것을 인정해야 되는 우리들로서는, 당시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의 사정을 밝혀서 이와 비교해 보면
중국은 명나라 초기 홍무제는 해금정책을 취했으나, 정난의 변으로 정권을 잡은 성조 영락제는 적극적인 해외 진출 정책을 추진, 정화의 남해원정을달성시켰고,
일본도 이 당시 무역선이 중국, 필리핀, 동남아시아까지 내왕하였다고하는데, 조선왕조는 해금(海禁)정책을 고수, 태종 때 이른바 호패 법을 만들고, 섬에 있던 사람들까지 육지로 강제 이주 시키고, 바다를 봉쇄해 버렸다. 아마도 왜구의 침입이 두려웠거나, 철저하게 주민을 지배해야 된다는 논리가 동시에 작용한 것 같다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이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