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친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그렇게 고된 나날이 지나면서 벼는 건강하게 자라 이삭이 패면서 나락이 점차 익어가기 시작했죠. 그러나 어느 날 벌레가 나타나더니 잎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잎은 점차 하얗게 변해갔습니다. 당연히 마을 농민들은 너도나도 서둘러 농약을 쳐댔습니다. 벌레 먹기 전까지는 우리 논을 보고 ‘허허, 농약 안 쳐도 농사 잘 되는구먼’하며 신기해 하던 동네 사람들의 입에서 ‘역시 농약 안 치면 농사가 안 된다니까. 에이 이 사람아, 빨리 농약 사다 치소. 굶어 죽으려고 그러는가? 뼈 빠지게 농사 잘 지어 놓고 벌레 좋은 일 하려고 그러는가?’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래도 농약을 안 치니, ‘저 친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비웃는 말까지 들려왔습니다.
아내와 나는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알고 있는 벌레 퇴치 방법은 막걸리, 효소, 식초, 그리고 생선 곤 물을 섞어 나락에 뿌려 주는 게 전부였죠. 아주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는 그렇게 많은 벌레가 죽을 리 없습니다.
저는 농약을 절대 안 치겠다는 신념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정신은 나락에만 가 있었고 쓰러져 가는 나락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벌레도 잡아서 만져 보았죠. 아무리 해충이라지만 벌레도 하나의 생명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벌레들이 내 몸을 갉아 먹는 것 같아 그냥 볼 수도 없었습니다.
벌레가 나타난 지 5일째 되던 날, 그 동안 침묵하며 나만 보고 있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태영이 아빠! 딱 한 번만 농약 치면 안 될까?’하며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먹고 살 문제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져 하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었던 겁니다. 그 동안 하루 두 끼를 밀가루와 죽으로 연명하며 아무말 없이 나를 따라 준 아내와 앙상하게 마른 자식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가자.가서 농약 한 병 사오자.’ 그 길로 나는 단숨에 십리 정도 되는 길을 뛰어 농약방으로 갔습니다. 얼른 집으로 다시 뛰어와서는 농약을 물에 섞어 분무기에 넣고 다시 단숨에 논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습니다. 10리나 되는 길을 어떻게 뛰어 갔다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농약을 짊어지고 논둑으로 올라갔는지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농약으로 중무장한 채 논둑으로 올라섰을 때가 마침 해가 막 질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붉은 노을 빛을 받으며 유난히도 붉게 빛나는 나락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나락은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나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게 비쳤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나락에 어떻게 벌레가 있을 수 있을까? 하얗게 변한 나락 잎이지만 저에게는 깨끗하게만 보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아무리 병들어 있지만 이 나락들이 바로 살아 있는 생명인데 어찌 독을 뿌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야!’라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순간 내가 미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놀라운 자연의 치유력
나는 농약 통을 걸머진 채 논둑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는 논에서 내려와 농약을 산기슭 한쪽 구석에 땅을 파고 묻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온갖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벌레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죠. 단지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나의 욕심으로 생명에 독약을 뿌릴 수는 없다는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체험을 통해 마음에 큰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 나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병이 번지지 않는 게 아닙니까. 병충해의 주기가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극적인 피해는 잠깐이었습니다. 나락이 스스로 자연 치유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연순환의 법칙은 이처럼 스스로 치유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농약이 벌레를 이기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치유력은 농약보다 훨씬 강합니다. 자연 순환의 법칙은 벌레와 작물이 공생 관계를 이루게 하여 벌레가 먹는 시기를 거치면 또한 먹지 않는 시기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큰 진통을 겪고 나서야 이런 자연의 법칙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딛고 일어난 후 수확은 해마다 조금씩 늘어났고 맛과 영양도 두드러지게 향상됐습니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3년여 지나서 저희는 관행농법 못지 않은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됐습니다.”
정경식씨는 그런 고생을 철저한 신념과 의지 하나로 하나씩 극복해 갔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으로 부안에 내려온 지 2년 만에 지금의 땅 2000평을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었고 그 후 8년이 지나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모은 3000만원으로 30평이 넘는 어엿한 양옥도 지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하여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나중에 군수를 통해 상을 전해받기는 했지만, 자신보다 훌륭한 스승들과 선배들이 많은데 자신이 선정된 것이 송구스러워 상 받으러 청와대에 가지도 않았다.
“나는 무농약 농사와 자급자족하는 삶 속에 농업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아버지는 농부가 되지 말라고 그렇게 절규하셨지만 나는 농업을 통해 희망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꿈이라 해도 좋고 이상이라 해도 좋고 오기라 해도 좋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세상을 향해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습니다. ‘땅을 살리는 자는 땅과 함께 살 것이며 땅을 죽이는 자는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수십 번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통하는 때가 반드시 오리라, 굳은 신념을 가지고 땅을 가꾸는 일에 내 생명을 다 바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86년쯤이었을 겁니다. 그 해에는 유난히 고추밭에 진딧물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모두들 사흘이 멀다하고 농약을 뿌렸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우리 밭에는 정작 진딧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이상하다. 왜 그럴까?’ 의문을 갖게 됐죠.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농약을 치지 않으니 쐐기와 무당벌레가 와서 진딧물을 잡아먹었던 겁니다. 곧 자연에서는 해충이니 익충이니 구별없이 서로 공생하여 어느 것이든 스스로 자연 치유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농약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을에 유기농법이 퍼져서 지금은 8가구가 유기농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이 마을에서 농민운동을 이끌던 분들이라 한번 마음 먹은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지가 강한 분들이었습니다. 또한 서로에 대한 신뢰와 단합이 돈독하여 제가 겪은 것 이상으로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 왔습니다.”
동지를 만나다
“우리는 유기농사를 우리만 할 것이 아니라 전라북도에 보급하자는 계획으로 ‘전북 자연 농실천농민회’라는 모임까지 만들었습니다. 또한 전북 각 지역에서 유기농업을 하고 있는 공동체나 농민들과 함께 ‘전북 자연농실천협의회’를 만들어 농한기에 외부 강사를 초빙해 교육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변산 유기농 영농법인과 부안 정농지회까지 결성하게 되어 유기농을 함께 하는 동지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공해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주에까지 전해져 유기농산물을 구하려는 소비자들이 생산자와 함께 이른바 한울공동체라는 도농공동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울공동체의 조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선 무농약 농산물의 가치를 알아주는 소비자를 만난 일 자체가 큰 기쁨이었고, 또한 판매처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어 경제적인 의미도 매우 컸습니다. 아마 농부에게 가장 큰 기쁨이란 자신이 재배한 물건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정당한 대가를 서슴없이 지불해 주는 소비자를 만나는 일일 겁니다.”
요즘 정씨는 너무나 바쁘다. 농사도 농사지만 농사 외의 일로 지역과 전국을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정경식씨가 농사말고 하는 일은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와 각 지역의 귀농학교에서 강의하는 것과 지금 살고 있는 변산에 지역학교를 설립하는 것 등이다. 농사 관련 일만 해도 정농회 부안 지회장 일, 지역 유기농 작목반 일, 한울 공동체 일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저러한 일로 정경식씨 집을 찾아 오는 손님만 해도 일년에 400~500명은 쉽게 넘는다고 한다.
농사 관련 일이야 농사 때문에라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귀농학교 강의나 지역학교 만드는 일은 조금 거리가 있는 일이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 짓고 있는 농사 이상으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교육이다. 정씨가 교육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농부가 되겠다는 아이들 때문이다. 자녀에게 농부가 되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일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우고 도우며 자란지라 애들은 자연스럽게 농부의 꿈을 갖게 됐다. 그런데 언젠가 담임교사가 장래 희망을 농부라고 한 아이들을 말리면서 농부가 되려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저는 원래부터 제도교육을 반대했습니다. 제도교육이 뭡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편안히 책상머리에서 펜대 굴리며 돈 많이 버는 게 목표 아닙니까. 그게 성공이고 출세이죠. 그래서 현 제도 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농부를 우습게 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농부가 희망인 아이들
그런데 그런 교육이 내 자식들마저 농촌을 떠나게 만들려 한다 이겁니다. 그럼 내가 왜, 무슨 희망으로 농사를 짓겠습니까? 이렇게 힘들게 농사 지어도 우리 자식들은 다 농촌을 떠날 텐데, 그럼 농업에 희망이 없는 겁니다. 이는 당장 내 농사만 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일지 모릅니다.”
큰애를 대안학교인 경남 산청의 ‘간디학교’로 보낸 것도 그런 제도학교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는데, 막상 보내고 보니까 학생이나 선생님 대부분이 도시출신들인데다 학교가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또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이른바 ‘지역학교’다. 지역학교는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며 지역의 자녀들만 다닐 수 있고 나아가 학교 기능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위한 교육과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타지역 사람이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고 싶으면 이 지역으로 이사를 와야 한다. 이런 생각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터에 마침 마을에 있는 마포초등학교가 폐교 조치됐다.
그래서 정씨는 유기생산농가를 비롯한 지역 사람들, 그리고 이 지역에 내려와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 교수와 함께 지역학교 10인 운영위원회를 꾸리고 마포초등학교 건물 임대 허가를 받았다.
정씨는 지역 교육일과 도시인을 위한 귀농 교육일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농촌을 살리려면 안으로는 교육을 통해 농촌의 활기를 되찾도록 해야 하고 밖으로는 많은 도시인들이 농촌으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경식씨는 귀농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면 정말 ‘열심히’ 한다. 작은 키에 햇빛에 까맣게 타버린 전형적인 우리 농부의 얼굴을 하고서 강단에 올라와 경상도 말씨와 전라도 말씨가 뒤섞인 아주 투박한 말투로 입을 열기 시작하면 강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함이 전혀 없다.
신동아 99.9
첫댓글 귀한글 지금에야읽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