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 계 사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 서기 722년에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중국에 가서 중국 선종(禪宗)의 제 6대 조사(祖師)인 혜능(慧能)의 정상(頂相 머리)을 모시고 와서 꿈의 계시에 따라 이곳에 봉안하고 이 절을 창건하였다.
혜능(慧能)이 입적(入寂)을 앞두고 어느 날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입적한 뒤 5,6년이 되면 마땅히 한 사람이 와서 내 머리를 가져가리니 내 예언을 들어 둬라.”
두상(頭上)을 친히 공양하려 함이요
입 속에 밥을 구하네
만(滿)의 난(難)을 만날 때
양류(楊柳)가 관(官)이 되더라
頭上養親 口裏須 遇滿之難 楊柳爲官
하고 다시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후 70년이 지나면 두 보살(菩薩)이 東方에서 올 것이니 하나는 出家人이고 다른 하나는 在家人이다
동시에 교화하여 나의 宗을 세우고 가람을 일으키며 법사(法嗣)를 흥왕케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開元 원년 계축년(癸丑年) 서기 713년 8월 3일에 국은사(國恩寺)에서 입적하였다. 이때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흰 무지개가 땅에 서리고 나무 숲이 흰 빛으로 변하고 새와 짐승들이 슬피 울었다.
또한 문도들이 '머리를 취해 간다'는 예언을 생각하여 양철과 검은 천으로 조사의 목을 단단히 싸서 탑에 모시니 탑 속에서 홀연 흰 광명이 곧 바로 하늘로 뻗쳐 올라간지 3일만에 비로소 흩어졌다.
「法寶壇經」
후에 조사 생존시의 제자인 영도(令韜)스님이 지은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조사를 탑에 모신후 개원(開元) 10년 임술년(壬戌年) 서기 722년 8월 3일에 이르러 밤중에 별안간 탑 속에서 쇠줄을 끄는 듯한 소리가 남으로 대중이 놀라 나가보니 상주 차림을 한 사람이 탑에서 나와 달아 났다.
곧 탑 속을 살펴보니 조사의 목에 상처가 있었다. 이에 이 일을 고을에 알리니 통보를 받고 현령 양간(楊侃)과 자사 유무첨(柳無添)이 세밀히 수사하기를 5일만에 석각촌(石角村)에서 도적을 잡았다.
소주(韶州)로 보내어 심문하니 도적의 성은 장(張)이요 이름은 정만(淨滿)인데 여주(汝州) 양현(梁縣)사람으로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신라 승(僧) 김대비(金大悲)에게서 돈 이만량을 받고 육조대사의 머리를 취하고자 한 것이며 김대비는 해동에 가지고 돌아가 공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유자사는 이 사실을 알고 가형(加刑)은 보류하고 곧 몸소 조계(曺溪)에 이르러서 조사의 상족(上足)인 영도(令韜)에게 어떻게 처단할 것인가를 물었다 영도가 말하기를 "만약 국법으로 말한다면 마땅히 베어야 옳지만 불교는 자비라 원수나 친한이나 모두가 평등한 것인데 하물며 그가 공양하고자 범한 것이라 하니 죄는 용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자사는 찬탄하기를 "이제 내가 비로소 佛門이 광대한 것을 알았다"하고 드디어 용서하였다.
「法寶壇經 附錄」
또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 저자인 고려 각훈(覺訓)스님이 서기 1103년에 지은 문집에는 육조의 정상(頂相)이 해동에 모셔지고 쌍계사가 창건된 내력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라국 성덕왕 당시(702∼737) 호남지방의 낭주군(현 전남 영암군) 운암사(雲岩寺)의 사문인 삼법(三法)스님은 속성이 김씨이며 옛 가락국 포촌(浦村, 현 사천군 곤양면)사람이다. 그는 자못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경전과 율장을 잘 알고, 담력과 지략을 갖추고 있었다.
일찍이 중국의 조계 육조 혜능대사의 도(道)에 대해 듣고 선망하여, 매양 한 번 가서 참문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당나라 개원2년(714) 육조스님이 입적했음을 듣고 깊이 애통하고 한스러워했다. 스스로 "후생(後生)으로써 변방에 살아 당대의 진불(眞佛)을 찾아 뵙지 못하게 되었다"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그 때에 금마국(金馬國, 현 전라도 익산) 미륵사의 규정(圭晶)스님이 당나라에서 돌아왔다. 그에게서 육조스님이 설하신 바「법보단경초본(法寶壇經抄本」1권을 얻어보게 되었다. 향을 사르고 공경히 읽어 나가자니, 마치 친히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구구절절이 감격스럽게 깨우쳐 지는 것이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함이 지극했다.
육조대사가 가로대,
"내가 멸한 5,6년 후에 마땅히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취해 가리라, 나의 예언을 들으라."
두상(頭上)을 친히 공양하려 함이요
입 속에 밥을 구하네
만(滿)의 난(難)을 만날 때
양(陽)과 류(柳)가 관리로 있으리라
頭上養親 口裏須 遇滿之難 楊柳爲官
하는 곳까지 읽기에 이르러, 삼법스님은 묵묵히 계교해 말했다.
"육조스님께서 이미 머리를 취해가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손에 떨어지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의 힘으로 이일을 도모함으로써 우리나라 만대의 복전을 짓는 것이 나으리라" 또 말했다. "내가 이 일을 거행함에, 첫째는 곧 도둑질을 행함이며, 둘째는 곧 부처님 몸에 피를 내게 될 것이다. 이는 오역죄를 범하는 것이니, 응당 지옥에 떨어지리라. 그렇지만 진실로 능히 중생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면, 지옥의 고통쯤이야 내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
이에 영묘사(靈妙寺)의 비구니 법정(法淨)스님(곧 김유신의 부인)에게 말하였다.
"당나라의 육조스님이야 말로 참으로 한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입멸 하셨습니다. 그 설하신 바「단경壇經」에는 머리를 취해 가리라는 예언이 있는 즉, 만약 두상(頭上)을 모셔 우리 나라에 돌아와 두어 향화로써 공양한다면 국가에 크나큰 복이 될 것입니다."
법정 비구니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곧 집재산 이만금(二萬金)을 주면서 말했다.
"이 변변치 못한 재물을 빌어서, 큰 일을 성취하면 다행이겠습니다."
삼법스님은 기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 돈을 받아 돌아왔다. 얼마 안있어 상선에 의탁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니, 곧 성덕왕 21년(722) 임술년(壬戌年) 5월이었다.
3개월이 지나서야 소주 보림사(寶林寺)에 다다르게 되었다. 곧장 육조탑 아래로 나아가 무수히 정례하고 은밀히 원하는 뜻을 빌었다. 7일간 밤낮으로 정진하니, 제 7일째 되는 날 밤에 빛이 탑 꼭대기에 머무르더니 동쪽 하늘로 가로 질러 뻗쳐 나갔다. 삼법선사는 광명이 상서로움을 보고 예배드리며, 소원이 이루어질 것같은 신통감응에 홀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두루 형세를 살펴보니, 남몰래 정상을 빼낸다는 것이 실로 쉽지가 않았다. 백가지 계교를 다 궁리해 보아도 더불어 가히 의논할 말한 이가 없어서, 울적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본국 백율사(栢栗寺)스님인 대비(大悲) 선백(禪伯)이 홍주 개원사 보현원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또한 도를 갖춘 이로 일찍이 법의 계보에 들었으나 공을 숨기고 있었다. 삼법선사는 바로 가서 서로 인사하고는 손을 맞잡고 심히 기뻐하며, 마침내 소박한 뜻을 은밀히 고하게 되었다.
대비스님은 뒤집도록 기뻐하며 말하였다. "저의 뜻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에 감탑(龕塔)을 고쳐 봉할 때에 나 또한 참여해 유심히 관찰해보니, 특히 예언의 훈계로 인하여 평평한 철판에다가 면포를 더하여 치밀하게 묶었으며, 탑문도 견고하게 봉함하였습니다. 게다가 근엄히 감시하고 지키고 있으므로, 힘이 여간 뛰어난 자가 아니고는 감히 손을 대어 볼수도 없습니다. 또한 강철로 된 무기를 쓰지 않고는 재빠르게 쪼개어 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크게 탄식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에 장정만(張淨滿)이라고 불리는 자가 있었다. 그는 본래 여주 운량현 육암포(汝州 雲梁縣 育岩浦)사람인데, 절 가운데 부쳐 머무르고 있었다.
김대비는 그가 용력이 있음을 알았으나, 아직 경솔하게 말을 열수가 없어, 생각으로만 데려다 쓰고자 하고 있었다.
하루는 장정만이 홀연 그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심히 괴로워서 가슴치며 슬퍼하고 있었다. 김대비는 삼법스님과 더불어 은밀히 상의하여서 일만금(一萬金)을 보내어 도와주었다. 그런 즉 장정만은 감격하며 돈을 받아 그양친 장례에 갔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대비스님은 은밀히 육조스님의 정상을 빼내오는 일을 부탁하면서,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서……"말하고, 귀에 대고 거듭거듭 조심시켰다.
장정만은 말했다. "소자가 비록 끓는 물에 들어가고, 타는 불을 밟을지언정 원래 가히 사양할 수 없겠습니다. 하물며 이까짓 일이겠습니까? 원컨대 스님은 염려하지 마십시오."그러고는 곧 소주 보림사를 향하여 떠나 갔으니, 이는 같은 해 8월 1일 이었다.
다음날 장정만은 보림사 육조탑에 도착하였다. 한 밤중 인적이 고요함에 탑문을 떼쳐 열고는, 비밀히 육조정상을 빼내어 큰 걸음으로 질주해 개원사로 돌아와서는 대비스님에게 드렸다. 이에 삼법과 대비스님은 그날 밤으로 이를 짊어지고 달음질쳐서, 낮으로는 숨고 밤에 움직여 항주(杭州)에 다달아 배에 올랐으니, 때는 11월이었던 것이다.
당포(唐浦)로부터 마침내 운암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비밀히 이를 발설치 않고, 대비스님과 더불어 함께 영묘사로 가서 법정 비구니 스님을 만났다. 법정스님은 환희하며 절하고 맞아들였다. 삼가 육조 정상을 받들어 몰래 단상에 모시고 공양하고 예배하였다.
삼법선사는 꿈에서 오색구름이 은은히 비추는 가운데 어떤 한 노스님을 보았다. 수염과 눈썹은 눈(雪)과 같았으며, 안광은 별과 같았다. 몸에는 금란가사를 입고 엄연히 사자좌에 가부좌하고서 낭랑하게 읊어 말씀하셨다.
나의 머리가 이 땅에 돌아오니
불국과 인연이 있음이라.
강주 지리산 아래
칡꽃핀 눈 속의 천국
사람과 경계가 함께 환상과 같고
산수는 묘하기가 연꽃 같구나
나의 법은 본래 무심하니
유택에서 만년을 살리라
吾首歸此土 佛國有因緣 康州智山下 葛花雪裡天
人境同如幻 山水妙如蓮 我法本無心 幽宅卜萬年
기지개를 켜면서 잠에서 깨어나니, 정신이 상쾌하고 맑았다. 이윽고 대비와 법정스님에게 그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 이튿날(삼법스님은) 대비스님과 함께 동쪽 강주(康州, 현 晋州)지리산으로 갔다. 이때가 12월 이었다. 눈이 봉우리마다 쌓여 있었으며, 계곡은 길이 막혀 있었다.
그때 한 쌍의 새파란 새끼 사슴이 홀연 찬 바위로 좇아 나와, 멀찌감치 두 스님이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마중나와 길을 인도하려는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마음에 기이하게 여겨 더욱 자취를 좇아가니 골짜기에 석문(石門)이 있었다. 문 안으로 몇 걸음 가량 들어가니 눈이 쌓인 골짜기에 샘물이 솟고 기운이 따뜻하기가 마치 봄과 같아서 칡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삼법스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뛰며 좋아하였다. 곧바로 그 땅으로 나아가 정상을 봉안하고, 장차 탑을 세워 견고하게 간직하고자 하되, 잠시 임시로 봉(奉)하여 두었다.
그날 밤에 또 꿈에 나타나 말씀하였다.
"탑으로 밖에 드러내지 말라. 비문(碑)으로 기록해 적지도 말라.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음이 첫째가는 뜻(第一義)이니, 사람들에게 설하지도 말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지도 말라."
삼법스님은 이와 같이 깊이 미묘한 취지를 살펴서, 마침내 돌을 쪼개서 함(函)을 삼고 깊숙이 묻어 안치 하였다. 그리고 한자리 난야(蘭若, 절)를 지어 그 아래에서 나날이 오로지 선정을 닦았다.
김대비 선백도 몇 달 뒤에 백율사로 돌아가 또한 온전히 선학(禪學)을 닦다가 그해에 입적하였다.
그후 17년, 신라 효성왕 2년 기묘(己卯)가을 7월 12일에 삼법스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운암사에서 출가의 발을 내디뎠다. 또한 선사(先師, 스승)의 탑과 영상도 모두 거기에 있다. 내가 입적한 뒤에 본사(本寺)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라. 운운(云云)"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壇經」몇 쪽을 독송하고는 고요히 입적하였다.
문인(門人)인 인혜(仁惠)·의정(義定)등이 몸 전체를 받들어 운암사로 돌아가 장례지내고, 아울러 그 유물과 법기도 이전하여 그 문중에서 보관하였다.
화개난야는 마침내 초목이 무성해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그 터에 가람을 창건하고 육조스님의 진전(眞殿)을 건립하니, 정상을 받들어 매장한 그 위였던 것이다.
오호라! 부처님의 두골(頭骨)은 오대산에 봉장(奉藏)하였고, 조사스님의 두골은 지리산에 받들어 모시게 되었도다! 우리나라 남북 천리의 땅에 부처님과 조사의 정상이 하나는 인도(身毒) 10만리에서 왔고 하나는 중국(震旦) 2만리에서 와서 길이 우리나라를 지키게 되었도다. 이것으로 우리나라는 참으로 불법의 본원(本元)인 보배로운 장소임을 분명히 알수 있다.
이에 삼법화상의 옛 초안(舊稿)에 의거하여 간략히 이 글을 엮는다. 육조스님의 정상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일저!
고려국(高麗國) 오관산(五冠山) 대화엄영통사(大華嚴靈通寺),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한 일국도대선사(一國都大禪師)인 석각훈(釋覺訓)이 삼가 쓰다. 때는 대송(大宋) 숭녕(崇寧) 2년(1103년) 계미(癸未)2월 일이다.
육조가 입적한 70년 후인 신라 선덕왕(宣德王) 13년 784년에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당에 들어가 육조의 법을 계승한 마조(馬祖)의 제자인 서당(西堂) 지장화상(智藏和尙)에게서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 신라 헌덕왕(憲德王) 13년 821년에 귀국하여 계림에 선종(禪宗)을 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처소를 옮겨 825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와 금강산에서 교화하였으니 이것이 육조로부터 계승된 해동 남선종(南禪宗)의 시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선종(禪宗)의 제1祖인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한 이래로 제 28祖인 달마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면면히 계승되었고 달마는 선종의 제28祖이며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다.
달마로부터 혜능에 이르기까지 6조사가 중국에서 법맥을 이었는데 혜능은 선종의 제33祖이며 중국 선종의 제 6祖가 된다.
후에 신라 흥덕왕 때에 진감선사(眞鑑禪師)가 당에서 귀국하여 쌍계사를 중창하고 도의선사와 함께 해동에 선종을 크게 일으켰다.
진감선사(眞鑑禪師)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 속성은 최(崔)씨 전북 익산 사람이다.
하루는 어머니 고씨(顧氏)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범승(梵僧)이 와서 이르기를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유리 항아리로써 표적을 삼더니 얼마 안되어 선사를 임신하였다.
드디어 정원(貞元) 20년 서기 804년에 속인(俗人)의 몸으로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의 문하에 들어가 출가하였다.
이때 그곳의 대중들이 서로 이르기를 "東方의 聖人을 여기서 다시 보겠다"고 하였다.
선사의 얼굴빛이 검으므로 모두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 하였는데 혹은 東晋의 고승 道安의 後身이라 한다.
元和 5년 서기 810년 숭산(嵩山) 少林寺 유리단(琉璃壇) 곁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어머니의 전일의 꿈이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의 중 道義가 먼저 중국에 道를 물으러 왔었는데 뜻밖에 서로 만나 친구가 되어 사방으로 멀리 선지식을 찾아 두루 참례(參禮)하고 佛道를 닦았다.
도의선사는 먼저 귀국하고 선사는 몇 년을 더 머물다가 드디어 태화(太和)4년 서기 830년에 귀국하니 흥덕왕(興德王)이 친히 수레를 타고 와서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선사가 전일에 돌아왔더니 上人이 잇달아 이르렀으매 두 보살(菩薩)이 되었도다.
옛날에 검은 옷입은 호걸이 있었다. 들었더니 지금에 누더기 입은 영웅을 보겠도다"하였다. 선사는 처음 상주 노악산(露岳山)에 머물렀는데 찾아오는 이가 너무 많아 거처를 옮기려고 걸어서 지리산에 이르렀는데 몇마리 호랑이가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함이 유순한 말(馬)과 다르지 않았으며 따르는 사람들도 두려워 함이 없어 마치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화개 골짜기 옛 삼법화상의 절 터를 중수하여 비로소 옥천사(玉泉寺)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머물러 살면서 후학들을 교화하였으니 역대 국왕으로부터 존숭(尊崇)함이 두텁다가 문성왕 12년 서기 850년에 쌍계사에서 입적하시니 그때 나이 77세였으며 중이 된지 41년이었다. 이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었는데 바람과 우뢰소리가 홀연히 일어나며 호랑이는 슬피 울부짖고 삼나무 잣나무는 변하여 시들더니 이윽고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 자욱하고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사(葬事)에 모인 자는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선사가 귀국할 때에 흥덕왕이 말한 '두 보살'이란 육조의 예언에 내가 간 후 70년이 지나면 두 보살이 東方에서 올 것이니 하나는 출가인이고 다른 하나는 재가인이다.
동시에 교화하여 나의 종(宗)을 세우고 가람을 일으키며 법사(法嗣)를 흥왕케 하리라는 말을 두고 한 것이다.
여기에 동방이란 우리 나라를 지목한 것이요 육조는 서기 713년에 입적하였다.
그로부터 70년 후인 서기 784년에 승려의 몸으로 당에 들어간 도의선사를 두고 출가인이라 한것이요. 그후 서기 804년에 속인의 몸으로 당에 들어가 37세 되던해에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귀국한 진감선사를 재가인이라 하여 동방에서 온 두 보살이란 도의선사와 진감선사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예언 중에 만(滿)의 난(難)이란 중국의 정만(淨滿)이 신라의 중 김대비에게서 이만냥을 받고 육조의 정상을 취하였던 일이며 "양류(楊柳)가 관(官)이 되더라"는 말은 그 당시 관리였던 양간(楊侃)과 유무첨(柳無添)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쌍계사에는 육조의 정상을 봉안한 탑전(塔殿)과 고운 최치원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진감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쌍계사의 원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다.
후에 정강왕 때에 진감선사의 비를 세울 때 근처의 산에 옥천(玉泉)이라는 절이 또 있어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에 절의 주위를 둘러보니 두 갈래의 계곡이 있어 쌍계(雙溪)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매년 4월 중순경 쌍계사 10리 벚꽃이 만발하면 수려한 지리산 자락과 계곡이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루는데 이 때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절 입구에 들어서면 길 양옆의 바위에 오른쪽에는 쌍계(雙溪) 왼쪽에는 석문(石門)이라는 글귀가 굵직하게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磎寺) 중창기(重創記)
휴 정 (休靜, 서산대사) 지음
유교와 불교를 밝게 알고 안팎을 두루 통달한 옛 사람들은 공명(功名)을 헌신짝처럼 벗어 버리고 한 개의 표주박으로 가난을 잊고 천지와 더불어 나란히 서고, 신명(神明)과 더불어 같이 가고, 혹은 무위진인(無位眞人)과 놀고, 혹은 시종(始終)이 없는 자와 더불어 벗하며 부득이 응할 때에는 만물을 기르고 천하(天下)를 고르게 해서 한 손으로 능히 그 임금을 요순(堯舜)의 위에 이르게 함을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같이 보고 그 걱정을 스스로 걱정하고 그 즐거움을 스스로 즐기니 어느 겨를에 유교가 그르다 불교가 그르다 하고, 불교가 그르다 유교가 그르다 하여 서로 다투며 서로 그르다 하겠는가
우리 나라의 최 고운(崔孤雲)과 진감(眞鑑)이 그런 사람이다.
고운은 유교요, 진감은 불교이다. 진감이 절을 세워 처음으로 인천(人天)의 눈을 열고 고운이 비를 세워 널리 유석(儒釋)의 골수에서 나왔나니 아아, 두사람의 마음은 일종의 줄이 없는 거문고로서그 곡조는 봄바람에 제비가 춤추는 것 같고 그 가락은 푸른 버들에 꾀꼬리가 노래하는 것 같아서 한 사람이 날(經)이면 한 사람은 씨(緯)요, 한 사람이 겉이면 한 사람은 속으로서 서로 도왔다. 한(漢) 당(唐) 송(宋)으로부터 이어오면서 유석(儒釋)의 빈 이름을 부수고 천지의 대전(大全)을 즐기면서 크고 씩씩하여 홀로 뛰어나 돌아보지 않은 이는 오직 이 두 대인(大人)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멀고 사람은 없어졌으며 이름은 남았으나 일은 가버렸으니 빛나던 별은 탱자가지 숲 속에 쓸쓸히 쇠잔해 있고 구비(龜碑)는 나무하는 사람들의 손길에 벗기고 허물어져서 고개의 원숭이가 민망스레 읊조리고 골짜기의 새가 구슬프게 울 뿐이다.
가정(嘉靖) 경자년(庚子年, 1540) 봄에 그 산의 도사(道士) 중섬(仲暹)이 그 사이를 거닐다가 옛 비석을 어루만지면서 크게 한숨 쉬고 말하기를 "옛날의 우(禹)임금의 구정(九鼎)과 주(周)나라의 석고(石鼓)와 한(漢)나라 뜰의 선인(仙人)과 진(晋)나라 동타(銅駝)가 다 같은 물건으로서 혹 한때의 보배가 되고 안되는 것은 반드시 물건이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데 있었다. 지금 고운(孤雲)의 비(碑)가 비록 지극한 보배라 하지마는 도리어 보배가 아닌 물건이 되어버린 것을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하고 그 중수(重修)할 일을 조정에 아뢰었더니,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옳다 하였다.
그 뒤에 예조(禮曹)가 달려가 사방(四方) 오리(五里)에 금표(禁標)를 세워 그 안에서 불을 놓거나 나무 치는 것을 금하였더니 3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거기 사는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되고 나쁜 새들도 우는 소리를 그쳤으니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이 완전히 옛날과 같아졌다. 이에 팔영루(八詠樓) 삼간(三間)의 지붕을 다시 이고 비석 앞뒤에는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물을 끌어 못을 만들고 달뜨는 저녁과 바람 이는 아침에 연꽃과 대나무를 구경하면서 혼자 소요(逍遙)하였다.
그 산의 운수승(雲水僧) 혜수(慧修)는 또한 바른 법을 깊이 믿고 삼보(三寶)를 반드는 것으로 자기 임무를 삼았다. 계묘년(癸卯年, 1543) 여름에 진감의 옛 절을 보고 개탄하여 중창(重創)할 뜻을 세우고, 널리 시주(施主)를 모은 지 몇 해가 안되어, 먼저 대전(大殿)을 세우고 다음에 금당(金堂)과 동서의 방장(方丈)을 짓고는 낙성(落成)의 모임을 열었다. 이듬해에 또 양당(兩堂)의 모임을 베풀었으니 아아 우뚝한 전각(殿閣)은 그 모양이 마치 천궁(天宮)과 같았다. 이에 팔영루(八詠樓)의 맑은 바람은 고운(孤雲)의 선골(仙骨)을 다시 깨우치고 쌍계수(雙溪水)의 밝은 달은 진감의 선등(禪燈)을 다시 밝혔다. 그리하여 혹 마음을 쉬는 사람들은 만리 밖에서 바람처럼 달려왔고 기운을 기르는 선비들은 육합(六合)에서 구름처럼 돌아왔다. 떨어지는 노을이 창망(蒼茫)한 밖에는 호수 위의 외로운 봉우리가 반은 드러나고 반은 가리웠으며 흰구름과 붉은 나무 가에는 한 쌍의 푸른 학이 한가히 가고 한가히 오니 이 또한 쌍계사의 훌륭한 경치이다.
슬프다. 이미 숨은 달을 한 손으로 받든 이는 중섬(仲暹)이요. 이미 장님된 눈을 금빗살로 긁는 사람은 혜수다. 왜 그런가, 부처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감과 같이 된 뒤에라야 유(儒)의 유인 까닭을 알게하고 유학을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운과 같이된 뒤에라야 부처의 부처인 까닭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감을 아는 이로는 고운 같은 이가 없고, 고운을 아는 이로는 진감과 같은 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고운이 없다 하지만는 중섬이 바로 그 사람이요, 진감이 없다 하지마는 혜수가 바로 그사람이다. 그렇다면 위의 두 선비는 앞에서 이름을 낸 사람이요 아래 두 사람은 뒤에서 전한 사람이다. 너무도 앞뒤가 서로 응하고 멀고 가까움이 서로 비추니 이는 천년이 지난 뒤에 양 자운(楊子雲)을 아침 저녁으로 만났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란 실상의 손이라 고운이나 진감이 취하는 바가 아니다. 유를 잘 말하는 사람도 그르고 석(釋)을 잘 말하는 사람도 그르며, 유와 석을 잘 말함이 그르다고 하는 것도 또한 그르니 왜 그런가 하면 그 실상을 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己酉年 1549) 봄에 적는다.
「淸虛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