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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ONE
The Problem
Introduction
교회의 일차적인 목표는 복음전파이다. 이러한 복음전파와 아울러 교회는 사람들의 전인적인 구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전인적인 구원에는 사람들의
치유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치유사역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님의 지상활동이 말씀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치유하시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데 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연구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도시교회의 목회사역에 적용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도시지역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질병의 문제를 보면서 이들을 성경적인 방법으로 치유해서 프로그램화한 다음 본 연구자가 속해 있는 예수교 대한 성결교회의 소속된 목회자들에게는 치유사역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고, 연구자가 사역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성경적인 방법의 치유사역이 개개인들에게 영적인 힘이 되어 주었음을 알게 하며. 동시에 연구자가 사역하고 있는 지역과 상황이 비슷한 도시교회들의 성도들에게 빈번히 일고 있는 각종 질환들이 치유되어서 예수님을 평안 가운데 섬기도록 돕는데 이 논문을 쓰는 데 목적이 있다.
Setting
본 논문이 연구되어질 지역과 교회는 인천광역시 부평 산곡 지역에 있는
신흥재개발 단지에 속해 있는 예수교대한 성결교회 백마장 제일 교회이다.
이 지역은 원래 전형적인 도시 근교였으나 인천광역시의 시계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주거지로 부상되면서 새로운 아파트가 속속 새로이 세워지고 기존에 있던 재래식 주거단지가 재개발로 인해 신흥주택지로 바뀌어가고 있는 지역이다.
인근 수도 서울에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속해있는 관계로 주민들의 의식수준은 대도시의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서울이나 인천의 비싼 주택을 피해 내 집 마련 차원에서 모여든 중산층 주민이 대 다수이다.
인천광역시는 2000년대 인구 증가는 약 3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여지는데 본 교회가 위치한 부평구는 현재 약 498,415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도시이다. 그 중에서 산곡1동은 전형적인 자연 부락으로 인구 비율을 보면 원주민이 30%, 외부에서 유임한 주민이 70%정도로 추산된다. 부평구의 교육시설은 유치원이 약54개, 초등학교가 28개, 중학교가 16개, 인문계고등학교가 7개, 실업계고등학교가
3개 있으며 종교현황은 기독교가 약 307개에 성직자가 615명, 성도수 약 73,263명 카톨릭교가 10개 교회에 성직자 24명, 교인 수는 약 43,340명이다. 또한 불교도수는 약 116,170명으로 조사되고 있다.1)
연구자가 사역하고 있는 백마장 제일교회는 15년전 1982년에 세 식구로 개척하여 지금은 대지 180평에 연건평 310평의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현재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담임목사1인, 전도사 3인 장로2인, 권사 16인, 집사 70인, 권찰 26인, 사무원 1인, 기사 1인, 유치원교사 4인이며, 각 부서로서는 남전도회 2개, 여전도회 6개, 유치부 1개, 유년부 1개, 어린이부 1개, 학생회 1개, 청년회 1개, 성가대 1개, 중창단 3개, 장학회 1개, 선교회 2개이며 구역은 30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거환경은 일반 주택 50%, 아파트 40%정도이며 상가와 공장이 10%로 되어 있다. 백마장 제일교회의 교인 연령 별 분포는 20대가 10%, 30대가 40%, 40대가 30%, 50대 이상이 20%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주거 환경 역시 주변의 환경과 같이 점차 아파트화 되어가고 있다.2)
Statement of Problem
오늘날 치유 사역에 대한 관심들이 매우 높아져 가고 있는데 그와 반대로 기독교 목회에서의 치유의 영역과 목표, 그리고 치유의 방법에 있어서 안수나 안찰 또는 상담을 통한 치유 등에 있어서 한계와 규정들이 애매해져 가는 경향이 있다. 또한 치유에 대한 정확한 성경지식이 없이 ‘꿩 잡는게 매’라는 식으로 주술적인 방법, 심리적 최면적인 방법, 그리고 한국교회 상황에서 빈번히 제기되고 있는 신비주의적 방법들이 교회 내외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연구의 시급성을 느끼는 것이다.
연구자가 사역하고 있는 백마장 제일교회를 개척하여 현재로 15년이 되었다. 그 목회 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문제 역시 사람들의 질병 문제와 그에 대한 치유문제였다. 이를테면, 교회 내에서 환자가 발생하였을 때, 목회자는 신자인 환자를 위해 기도해주고 또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신속하게 병원의 앰블런스카를 불러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었다. 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치유는 어떤 종류의 질병이나 질환이냐는 문제이다. 내과, 외과 등을 포함해서 정신과에 이르기까지 병명조차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증후군들과 에이즈나 암과 같은 불치병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목회자가 치유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부분은 어다까지 인지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문제를 제기 하고자 하는 것은 치유에 있어서 은사나 직분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믿는 자라면 누구나 기도 할 수 있고 또 기도해 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와 아울러 질병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이냐는 문제도 중요하다. 질병은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거나, 신자를 성화 시키는 도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인간은 질병으로 인해 더 고통받도록 방치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중세의 수도자들처럼 자신의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을 장려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믿음의 치유는 우스운 것이 되고 만다.
주변환경에서 느끼게 되는 문제도 본 연구의 문제 제기의 계기가 되었다. 본 교회가 위치한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1동 87-927번지는 1983년도만 해도 전형적인 자연 부락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개의 환자들이 낙후된 주거 환경과 변변치 않은 직업에서 오는 경제적인 열악한 조건 때문에 가정불화, 자녀의 가출
심리적인 불안, 교육부족에서 오는 열등감, 식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나 그로 인해 나타나는 질환이었다. 그런데 인천시가 직할시가 되고 곧이어 광역시가 되면서 시의 성장과 확장으로 말미암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부터 인근의 아파트단지와 함께 인구밀집 지역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인천중심지에서 보면 상당히 변두리이지만 지방 정부의 주택정책에 의해 택지가 인근에 조성되면서 인구밀집 지역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자 발생하게 되는 질병이나 질환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통게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40대 사망자가 가장 높은 나라이며, 또한 40대 환자의 질병 중 발생빈도가 가장 높은 것이 간질 환이었다는 것이다. 과로로 사망하는 자와 소화기 질환의 질병도 빈도가 높은 질환들 중의 하나였다3). 즉 도시화되면서 시간과 일에 쫓기는 날이 많아지고,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되면서 간 기능이 저하되고, 기타 여러 요인으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만성적인 질병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건강에 있어서 치료의학 보다는 예방 의학이 중요하므로 기독교
목회에서의 치유는 예방과 심리적 안정에 더 강조 점을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성경이 직접적인 치유보다 예방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Lawrrence J. Crabb. 과 같은 이는 ‘Effective Biblical Counseling' 에서 현대에 와서는 전인적(全人的)인 인격과 인간의 가능성, 그리고 자아의 자유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열망은 사라지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조차도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인간적인 관심사에 더욱 마음을 쏟고 있다고 하면서4), 모든 성도들이 더욱 주님과 같이 되도록 도움으로써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도록 권면 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성숙이 기독교 치유상담의 책임이며 목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의 목적 및 한계, 그리고 방법에 대한 정의는 결국 우리는 어떤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냐는 문제와 상관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론에 있어서 어떤 한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질병을 보게되고 또 그에 따른 해결책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인간관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전인적(全人的) 존재로 보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서 4장12절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을 근거로 하여 인간을 영, 혼, 육의 분리될 수 있는 세 격분으로 구분해 왔지만, 최근에는 영, 육, 혼과 같은 술어들이 인간의 분리될 수 있는 여러 영역들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보는 여러 방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5)
따라서 이러한 단어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분리될 수 있는 부분들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 다는 것이다.6)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전인(全人)개념이 오늘날의 성경적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구분될 수 없는 전인 (全人)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치유와 치유상담의 영역은 훨씬 확대될 수밖에 없다. 실제에 있어서도 선진교계에서는 복음을 치료에 활용하고 있어서 의사가 목회를 하는 것인지 목사가 치료를 하는 것인지를 분별하기 어렵게 되고 있는 실정이다.7)
그뿐만 아니라, 일부 신학교- 특히 풀러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의 전인적 치유를 주장하는 이른바 치유목회(Healing Ministry)가 강조되고 있는데, 아직도 신유(Divine Healing)에 대한 성경적 근거에 대한 논쟁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교계에서는 무분별하게 치유와 축사 사역이 오용되어 소위 가정 제단운동이니, 귀신파니 하는 잘못된 운동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분명히 하여 교우들에 대한 기독교적 치유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고 이를 프로그램화하여 개 교회 사역에 적용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치유사역은 본 교회의 목회 갱신 차원에서 볼 때 중요하다. 교회안에 치유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침체된 교회에 활력소가 불어 넣어 질 뿐 아니라 불건전하게 진행 되던 음성적인 사이비 치유활동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치유사역은 결과적으로 복음전파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초대교회 때와 같이 복음증거와 함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더러운 귀신들이 쫒겨 나간 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더욱 잘 전파될 것이다.
Hypothesis
본 연구자는 성경적인 치유사역에 대한 인식과 그 이해가 부족한 백마장 제일교회 교우들에게 1주일간 총 20시간동안 성경적 치유와, 전인치유 사역에 대하여 교육하고 또 영성훈련을 시키게 된다면 다음의 결과가 올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첫째로 적어도 20시간의 세미나를 통하여 치유사역과 믿음의 훈련을 받은 교우들은 그렇지 않은 교우들보다 치유사역과 전인치유에 대한 이해가 증대될 것이다. 둘째로는 성경적인 치유사역을 교육받은 교우들에게서는 그렇지 않은 교우들보다 실제적인 치유의 역사가 더 일어나며 이에 대한 확신도 더 깊어질 것이며 아울러 평신도들이라 할 지라고 이에 대한 실제적인 치유사역을 행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로 치유사역이 어떤 특정한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모두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믿게 되고 실제로 나가서 치유사역을 실습하면서 병든 사람이 치유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는 백마장 제일교회가 성장하며 나아가서는 본 교단 교우들에게 도전을 주어 모든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본다.
Definitons of Terms
연구자는 본 논문 연구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몇가지 용어들에 대하여 먼저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그것을 “치유” 그리고 “치유사역”, “전인치유” “도시목회” 등이다
치유(Healing)
Healing이라고 이야기 할 때 그것을 신유(Divine Healing)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치유라고 이야기 할 때 그것이 꼭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치유(물리적, 화학적, 외과적, 혹은 동양의학적)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사에 의한 것이지만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질병(정신병까지 포함한)이 하나님을 떠나고 범 죄한 결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병든 영, 혼, 육을 치유하고 구원케 되는 것을 말한다. Paul Tournier의 말처럼 “진정한 치유란 몸, 정신, 영혼의 합일로 이루어지며 치유와 구원은 연합된 상태8)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진정한 치유란 구원을 전제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 형상으로의 온전한 회복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치유사역(Healing Ministry)
Healing Ministry는 1881년 A. J. Gorden목사가 치유사역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하였다. 광의의 의미에서 목회자의 모든 목회사역이 다 치유사역이겠지만 여기 이 논문에서는 영적으로 병들고, 상한 마음을 가진 자, 그리고 귀신에 들려 고통 당하는 자와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을 성경 적, 믿음의 방법으로 치유하는 것을 목회적 차원에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전인치유(Whole Healing Ministry)
사람의 구성요소가 어떠한가는 세 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는 일 원설 둘째는 이 원설, 셋째는 삼 원설 인데 이 원설 과 삼 원설 이 기독교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즉 이원설은 인간을 몸과 영혼이라는 두 가지 구성으로 보는 견해이고, 삼원설은 영, 혼, 몸의 세 가지로 구성을 보는 것이다. 성경은 이원설과 삼원설을 다 지지하고 있으며, 기독교계에서도 존재론적으로는 이원설을, 인식론적으로는 삼원설을 다 인정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 논문에서는 치유에 대하여 보다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삼원설의 개념을 취하여 사용할 것이다.
도시목회(Urban Ministry)
주님의 사역을 실천함에 있어 도시와 농촌이 나누어질 수는 없겠지만 실천목회에 있어서는 그 상황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세계 상황의 뚜렷한 변화는 주거환경이 점차로 도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도시는 의외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많은 인구의 밀집으로 인하여 주거, 교통, 환경의 문제는 말 할 것도 없고 이에 따른 빈부의 격차와 개인주의 그리고 질병의 문제 등도 끝임 없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바울 사도의 사역의 모범을 따라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도시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특별한 연구와 실행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시목회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성경적인 모범을 따라 목회사역을 수행하는 것을 도시목회라고 한다.
Limitations of Study
본 논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연구자는 논문 연구의 한계와 범위를 다음과 같이 정한다. 첫째 본 연구는 도시목회에서의 치유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그것이 교회성장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 대상자는 백마장 제일교회에 속해 있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그 범위를 한정한다. 하지만 논문의 연구 결과는 본 교단의 다른 교회에도 적용되며 동역자들에게도 확대해서 적용해 나갈 것이다. 둘째로 본 연구는 본 교회 교우들에게 성경적 치유와 전인치유에 대한 이해을 증진 시켜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나아가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치유사역을 행하며 이로 인해 복음이 잘 전파되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백마장 제일교회의 교우들이 자신들의 믿음과 은사를 발견하고 실제적 치유사역을 행할 수 있도록 치유사역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며 시도하도록 하는 데에 교육의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으로는 치유역사가 기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으므로 그것이 항상 과학적인 데이터로 신출될 수는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Assumptions
본 교회의 교우들은 치유사역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치유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에게 이러한 믿음과 은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세미나 중의 교육을 20시간 받게 된다면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치유의 능력을 이해하게 되고 관심이 증폭되어 실제로 치유사역을 행하고자하는 믿음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본다. 또한 교육을 받은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를 비교했을 때에 교육을 받은 성도들이 질병에 고통을 받을 경우 더 많은 치유를 경험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을 하나의 프로그램화 시켜서 다른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해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면 적절한 치유프로그램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Chapter Two
The Biblical- Theological Base.
Introduction
치유문제를 다룸에 있어서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인간관을 가지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만약 인간의 구원의 길과 믿음의 길에 있어서 고행(苦行)이 중요하다는 중세적 인간관에서 보면 질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질병을 통하여 성도들을 성화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인구원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면, 인간은 구분될 수 없는 단일 신체인 전인(全人)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영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육체적 질병으로 부터의 구원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영적 문제나 정신적 질환 뿐만 아니라 육체적 질병까지 치유할 수 있다고 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에 근거하게 될 때, 육체의 치유는 의사에게, 영의 치유는 목회자에게 속하며. 정신의 치유는 정신의학자의 영역이라고 하는 엄격한 구분은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적 질병과 정신질환 등이 상호 연관성이 있다면 확실하게 구분되는 독립된 치유영역은 제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인적 인간관과 전인구원의 측면에서 본다면 목회자의 치유사역과 교회의 치유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목회자의 목회영역은 확대될 수밖에 없으므로 교회성장은 더 가속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학적인 관점에서 전인구원(전인치유)문제를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치유에 대한 어원적 고찰
히브리어 - 구약에서 명사로 치료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두개가 있는데 아룩하(arukhah)와 말페(marpe) 이다. 아룩하는 예레미야 8장 22절, 30장 17절, 33장 6절에 사용되고 있는데9) 이런단어의 뜻은 ‘건강을 회복하다’는 의미에서 치료, 고침, 회복, 원상복구, 완쾌, 간척, 권리회복, 승소, 병이 차차 나아감, 회복기의 뜻이 있으며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인 의미로 ‘온전함’의 뜻이 있다.9)
말페는 예례미아 14:19, 역대하21:18에서 ‘치료, 고침’으로 사용되고 있고 원기회복이라는 뜻이 있는데 잠언4:22에는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와 12장 18절의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가 바로 그런 예이다.9) 말페 (marpe)의 본래 의미는 ‘치료(법), 즉 문자적으로 ‘약’,혹은 (추상명사)‘치료’, 상징적으로 ‘구출, 평온, 치유, 완쾌, 치료, 구제법, 교정법, 건강, 건전, 건강상태, 위생, 평정, 부드러움, 온화함, 냉정, 침착’ 등의 의미가 있다.9)
또 구약성서에서 동사로서의 치유하는 의미의 단어는 할람(halram), 라파(rapha) 그리고 명사 아룩하(arukhah)와 함께 삼마(samah)가 사용되고 있다. 할람은 ‘회복케 하다’9)로 이사야 38장16절에 사용되고 있는 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견고하게 묶다’, 함축적 의미로 ‘뚱뚱하게 되다’. 또 상징적으로 ‘꿈꾸다, 꿈에 생각하다, 몽상하다, 강하게 되다’라는 의미가 있다. 때에 따라서 ‘강하게 만들다, 힘세게 하다, 치료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9)
삼마는 이사야58:8에 ‘치료하다’로 사용되는데 이 단어의 문자적, 상징적 의미는 ‘싹이 트다,(열매를)맺다, 산출하다, 자라다, 나오다, 솟아나다, 솟아나오게 하다, 자식이 생기다’ 등의 의미가 있다.9)동사 단어중 라파가 가장 많이 성서에서 사용되어지는데 이것을 세분해 보면 ‘상처를 고치다, 치료하다(창22:17, 욥5:18), 하나님이 치료하다,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다(대하7:15, 시30:3), 수선되다(렘19:1), 위로하다(렘8:11, 겔34:4), 치료받다(레13:37, 사54:5), 자신이 고침받게 하다’(왕하8:29) 등이다.9)
헬라어 - 신약 성경에서는 병고침이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가르키는 일반적인 단어에 특수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이 단어들은 ιαομαι(이아오마이), θεραπευω(데라퓨우오), υγιαινω(휘기아이노), σωζω(소조), 복합어인 διασωζω(디아소조)등이 있는데 이 단어들이 기본적인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동사형으로 제시된 네 단어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9)
ιαομαι(이아오마이) : 병을 고치다를 의미하는 단어로 희랍어 용법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의학적인 용어로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언어에서 그러한 단어들 처럼, 그 단어는 도덕적인 상처나 질병의 치료에까지 그 용법이 확장될 수 있었다. 실제로 희랍어만을 생각할 경우에 이 단어는 이고적인 용법에서 특수하게 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죄 그 자체는 질병으로 알려진 또하나의 별개의 독특한 조건(육체적 또는 정신적)을 유발시키는 하나의 분리된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질병으로 파악된다.9)
θεραπευω(데라퓨오) : 영어 단어의 Therapy의 어원이 되는 단어로 의료적 처치나 치유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흔한 단어이다. 원래의 의미는 신들을 섬기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종류의 돌봄이나 섬김을 제공하는 것이다. 차용에 의해서 이 단어는 치료하다, 회복시키다, 병을 고치다를 의미 한다.10)
υγιαινω(휘기아이노) : 좋은 건강상태에 있다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건강의 여러 히게이아의 이름에서 기원하였으며, 영어 단어 hygiene는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어는 몸이나 정치적 또는 종교적인 일들의 건강한 또는 건전한 상태를 언급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희랍의 의료용어에서 기본적인 단어이다.11)
σωζω(소조) : 보존하다, 상하지 않게 지키다, 구제하다,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다는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고전 희랍어에서 의료적인 의미를 비롯하여 다양한 의미들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치료의 의미를, 한 사람을 질병이나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전달해 주었다. 희랍의 개념 가운데서는 몸을 구원하는 것이 중도에 전 존재의 구원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단어는 의미상으로 완전한 구원의 개념과 연결된다. 이 단어로부터 신학적인 용어인 구원론(Soteriology)이라는 말이 유래한다.12)
복합어인 διασωζω(디아소조) : 위험을 뚫고 안전하게 가져오다, 또는 위험을 헤치고 보존하다를 의미하며, 그 의미나 용법에 있어서 유사하다. 이러한 단어들은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와 후대의 다른 사람들의 사역에서 치료가 발생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 사용된다.13)
구약성서에서의 치유
구약성서에는 치유사역이 많지는 않으나 그 내용을 살펴 구분하여 보면 하나님이 직접 하신 경우도 있고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하여 치유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곧 예방의 가르침과 또 하나는 질병을 낫게하는 방법이다.
예방적 측면
질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가 택하신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셨다. 모세를 통하여 장티프스, 이질, 콜레라 등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배설물 처리를 그의 백성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신23:12-13). 제사장들을 통하여 문둥병, 매독, 흑사병을 살피고 그러한 환자를 격리 수용하여 개인적인 접촉을 금지하게 하는 일을 종사하게 하였는데(레13:4) 이것은 병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된 표시로서 남아가 출산하면 반드시 할례의식을 하였다(창17:10). 이것이 부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본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술에 관하여 경고하며 술취함이 많은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잠23:19-21). 오늘날도 술은 정신질환과 내장의 손상은 말할 것 없고, 많은 사고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모세와 같은 지도자나 특정한 사람들을 통하여 건강을 위한 예방법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질병을 예방하는 조건에 두가지의 말씀을 하시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출20:8; 레25장). 즉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면 ......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며”(신7:12-16), “나의 모든 명령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할찐대 ......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레26:14-16)라고 말씀하시므로 말씀순종의 전체성을 강조하신다. 또 하나는 말씀을 지키면서 자기를 관리(self-care)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생에 관한 법(출29:14), 청결에 관한 법(출15장), 격리에 관한 법(민5:1-14), 식이요법에 관한법(레11장), 절제에 관한 법(민6장)등을 통해 자신을 잘 관리하므로 질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모든 질병을 미리 예방케 하는 말씀순종과 자기관리를 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치유적 측면
성서적으로 볼때 최초의 치유라는 낱말이 사용되기는 창세기 20장 17-18절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치유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하시든가 아니면 택하신 지도자들이나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을 통하여 진행되어 졌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되어 숲속에 숨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신한 인간을 그 숨은 곳으로 부터 잡아 낸 것이 아니고 그를 찾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게 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사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여실히 볼 수가 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 되었던 관계를 하나님이 다시 찾아옴으로서 해결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치유이며 치유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창2-3장).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셔서 질병을 치유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여종이 치유받았고(창20:17-18), 모세의 기도로 미리암의 문둥병이 치료되었고(민12:1-15), 아론의 기도로 이스라엘의 염병이 그쳤다(민16:41-50). 엘리야의 기도로 죽은아이가 살아났으며(왕상17:17-24), 욥의 기도로 악창이 치료되었으며(욥42:10), 히스기야의 기도로 그의 생명이 연장되었다(왕하20:5).
그 외에도 치료된 몇가지 사실이 있다. 제사장인 비느하스가 간음한 자의 배를 꿰뚫어서 죽이니 이스라엘 자손의 염병이 치유되었고(민25:6-9), 사울왕이 악신에 시달리며 괴로워 할 때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연주하였을 때 치유케 된 것이다(삼상16:14-23).
구약성서의 치유사건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다. 치유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구약성서에서의 치유는 하나님의 궁휼과 사랑과 용서하심이 나타나 있는 뚜렷한 징표였던 것이다. 이것은 성서의 역사를 통하여 면면이 흐르는 있는 사랑인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치유하시기를 원하시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반드시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을 통하여 기적과 치유의 사역을 했고 여기에서 치유이적들은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표적들이요 부르심에 대한 신임장이었다.13)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과 제사장이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아울러 치유목회에도 깊은 관여를 하였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지금도 목회자들이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병자들을 돌보며 위로해야 하는 근거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이상 구약성경을 통해서 볼 때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과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여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 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6, 관련성구 23:25)고 되어있다.
또 시편 103편 3절에서도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읖 로치시며”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약속의 하나님이 오늘날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또한 병을 고치신다. 특히 이사야서의 기록에 보면 “그(그리스도)는 실로 우리의 질고(Kholee)를 지고, 우리의 슬픔(Makab)을 당하였거늘 ......”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Kholee는 Chalah에서 온 말인데 약하다, 병들다, 아프다 라는 뜻이다. 신명기 7장 15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Kholee)을 네게서 멀리하사”라고 할 때 쓰인 질병이라는 단어사 신명기 28장 11절, 열왕기상17장 17절, 열왕기하 1장 2절, 열왕기하 8장 8절 그 외 여러 곳에서 질고로 번역 되었다. 슬픔이라는 단어는 욥기 33장 19절에서는 병상의 고통으로 번역되었고, 예레미야 51장 8절에서는 창상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질고를 지셨다”는 말은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짊어지고 고통을 대신 겪었다”는 말이다.14)
신약성서에서의 치유
신약성서에서는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하여 많은 치유의 이적이 나타났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예수의 치유사역
켈시(Morton T. Kelsey)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복음서 내용의 5분의 1정도의 분량이 예수의 치유사역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15)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네 복음서의 3,781절중 468절을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기술하는데 사용하였다. 16) 여기에 추가해서 165절이 영원한 생명을 다루고 31개의 일반적인 언급이 치유를 포함한 이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비중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서 기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예수의 치유사역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에서 뚜렷하게 두드러진 부분이다. 17)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단지 치유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보여주어 그들의 영혼까지 구원하는 복음전파 사역을 하였다(눅11:20).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본을 이어받아 당연히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 사단이 연약하게 하고, 질병에 걸리게 한 것을 고치되 안식일에도 그렇게 하심으로 자신의 구원사역이 전인(全人)에 걸친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① 예수님께서는 회당안에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내어쫓으시자 그 권세를 보고 사람들이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막1:21-31, 눅4:31하반절-37, 참고 눅4;32.36)
②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 주셨다.(마8;14, 막1:29-31, 눅4:38-39)
③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내어쫓았다. (마8:16-17, 막1:32-34, 눅4:40-41)
④ 또 첫 번째 전도 여행 후에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자 그들을 고치셨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않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다,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4:24)
“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하여 모여오되”(눅5:15)
⑤ 특히 4명의 친구들이 데려와 지붕을 뚫고 침상을 달아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그를 고치신 뒤에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마9:2상, 5-6, 말2:9-11,
눅5:23-24) 하심으로 죄 사함과 치유의 상관관계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 당시 잘못된 신앙관과 치유관을 가지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⑥ 구약에서 치유의 일을 해야하는 장소는 성전이었고, 또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성전 밖에서 치유를 행하심으로 당신이 “메시야” 이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분명히 선포하신 것이다.(요5:13-15)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었다.(사43:1-4, 마12:18-21)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러한 치유의 능력과 권세를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고 시행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인데, 이러한 성경적인 증거들이 우리의 치유사역의 정당함을 뒷받침하는 성경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후, 이러한 치유의 능력은 복음의 선포와 함께 그 표징으로 계속 나타났으며, 특히 베드로의 경우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으로(행3:1-10), 또 바울 사도가 여러 도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났던 치유의 여러 사건들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종말론적 구원의 사건임을 증명하는 성경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인간이해
예수는 인간을 단순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첫째로 예수는 인간을 피조물 중에 가장 소중한 존재로 보았다(창1:26).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 얼마나 인간을 중요시하셨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의 지상사역의 촛점은 사람이었다. 마가복음 5:1-13의 일화를 보면 거라사 지방에서 고랑과 쇠사슬에 묶인체로 공동묘지에 버려져 스스로 제 몸을 상케하던 한 귀신들린 청년의 야기가 있다. 예수께서는 이 청년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거의 2,000마리의 돼지를 희생시키면서 한 인간의 인격성을 회복시켜 주셨다. 또 안식일이지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심으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종교적 계율보다는 지체의 기능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 훨씬 더 소중하고 값진 일임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는 선한 목자(요10:10)로서 한마리의 양을 찾기위해 해매는 모습과 그 양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귀히 여기시어 개인의 가치를 온 천하와 비교하시면서 생명의 귀중함을 강조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이다. 이들 모두를 천하보다 더 값진 생명의 존엄성(막8:36)을 지닌 인격의 주체로 보셨던 것이다.18)
둘째로 예수님은 인간을 ‘전인’으로 보았다.19) 체와 영혼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격체로 인간을 이해하였던 것이다(마9:2, 마9:22, 막8:2). 예수님은 치유사역에서도 육체에 국한시키거나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치유하신 사실을 볼 수 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고 말씀하심으로 병의 근원을 죄에 기원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세째로 예수님은 인간을 고통당하는 존재로 이해하셨다(마11:28-29). 인간이야말로 죄와 질병, 죽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존재이며 이 짐때문에 어쩔수 없이 괴로와 하고 고통당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생각하셨다. 예수의 긍극적인 목표는 바로 인간이 짊어진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를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대속자로(사53:5-6, 마8:16-17)예언하였고 주님도 마태복음 11장 28-29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 하신 것을 볼때 예수님의 선포의 내용속에서 인간을 고통당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증거이다. 박봉랑도 “인간은 죄의 포로속에 있는 인간” 이라는 말로 기독교의 인간관을 소개하면서 “인간은 계속 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적 존재이고 그 죄속에서 질병과 죽움과 공포가 온다”라고 말하고 있다.20)
이와같이 예수의 인간이해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귀중히 여기셨고, 전인적인 치유에 관심을 두어 인간들의 죄와 질병과 고통의 짐에서 구원하여 참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결국 이런 인간 이해가 밑바탕이 된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치유동기
예수께서는 인간을 귀한 존재로 뿐만 아니라 전인적이며 고통당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인간들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인 각가지의 질병으로 허덕이고 있는 인간에 대하여 “왜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셨는가?”에 대하여 몇가지 치유동기를 알아 보자.
첫째, 메시야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야 대망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구절에 따르면, 그가 병자를 치유하실 것이라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아마 가장 중요하게 가장 잘 알려진 메시야에 관한 구절은 이사야 53장 4-5절일 것이다. 그 본문은 메시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누가에 따르면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친히 인용하셨고(눅4:18-19), 그 날 “이루어졌다고”고 그가 말씀하신 이사야 61장 1-2절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께서 오셨다는 표적으로 치유의 기적을 제시하였다.21)
둘째, 율법의 올바른 적용을 한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줌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심한 반감을 사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 안식일은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로 지켜지고 있으므로 올바른 안식의 개념을 실천키 위하여 치유의 사역을 하셨던 것이다.22)
세째,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해서 행하셨다.23)
나면서 소경된 자에 대한 기사(요9:1-41)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소경을 치유해 주셨다. 예수는 이 일을 통해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보여주므로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하셨다.
네째,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셨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었다. 복음서는 이것을 마태복음9장 36절과 14장 14절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낫게 하셨다”라는 말씀을 알고 있다. 어거스틴(Augusiane)은 능력의 요소를 동정심과 나란히 두었다.24)
다섯째,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복음서의 전승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치유는 예수께서 단순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서의 산적된 증거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요5:19, 21) 병자를 치유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25)
여섯째,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과 악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그 결박을 풀어서 그의 백성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시기 원하기에 이런 치유사역을 하셨다. 이런 치유사역이 악에 대한 승리라고 본다면 이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는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였다(마12:28, 눅11:20).
치유방법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치유방법을 사용하였는가 살펴 보자.
첫째, 손을 내밀어 안수하거나 만지심으로 치유하셨다.
마태복음 8장 1-4절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데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13장 13절에 보면 귀신들려 18년간이나 꼬부라져 펴지 못한 여인에게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고 하였다. 접촉의 방법은 그 반대의 입장도 있었는데 그도 동일한 능력으로 치유가 나타났다. 즉 마태복음 14장 36절에 “무리들이 예수의 옷가에 라도 손을 대개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사람은 다 나음을 얻었다”고 하였다. 또한 열두해의 혈루증 여인(마5:25-34)의 치유의 사건이 대표적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직접 접촉하고나 환자편에서 접촉하는 것을 시도하거나 같은 기적이 일어났고 사도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행3:1-11).
둘째, 말씀과 명령으로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환자와의 전혀 접촉이 없었어도 그의 말씀으로 모든 병이 깨끗하여지기도 하였다. 마태복음 8장 13절에 보면 백부장의 하인이 심한 중풍병으로 고생할 때 환자를 접촉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만 치유케 하신 사실이다. 또한 말씀과 명령은 악령 추방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나사로를 살릴 때(요11:43)와 열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셨을 때(눅17:14),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을 때(막5:8), 신하의 아들을 멀리서 치유할 때(요4:50) 사용하셨다.26) 이와같이 예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고 권능이 있음을 보여준다.
세째, 침과 진흙을 사용한 방법이다.
예수의 치유 기사중에서 침을 사용하거나 진흙을 섞어서 사용하였던 것에 관한 세가지 기사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있어서 침은 치유의 수단으로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을 직접적인 치유의 기능을 지닌 것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자신의 인격과 권능의 매개체로 사용하셨다.27) 마가복음에서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에 대한 치유의 기사가 있는데 예수는 그 사람의 양 귀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으시고 에바다 - 열리라 - 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8:23절에 에서 예수는 소경을 치유해 주실 때 이와 동일한 행동을 취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9장 6-7절에 침을 진흙에 섞어서 소경의 눈에 문지르고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셨다. 이러한 치료방법이 과연 과학적인 효능이 있는지 논할바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의학적인 치료의 방법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이다. 신유는 의학적인 방법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치유의 원천은 하나님이지만, 그 치유는 다양한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28)
네째, 기도로서 고치셨다.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요11:41-44).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딸에 대한 치유는 그 여인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통한 것이었다(마15:25). 많은 사람들은 예수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때마다 자유롭게 치유받았으며 이 여인의 경우에는 그녀 자신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다. 예수께서 귀신 축출에서 “기도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마9:29)고 하셨다.
다섯째, 당사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다.
예수의 치유에 있어 당사자의 믿음이 유력한 요소로 작용하였던 것들의 여러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옷에 손을 댐으로 혈루병을 치유받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막5:34). 그리고 그는 두 명의 소경들을 치유해 주실때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9:29). 또한 간질병에 걸린 소년의 아버지에게 질병치유에 있어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어 그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어 치유받았다(막9:23-24).
여섯째, 대화를 통해 고치셨다.
예수는 대화하실 때 그 사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파헤치시고 근접하여 치유하기도 하셨다. 요한복음 4장 3-30절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가장 평범한 대화로 시작하여 그 여자의 심층에 깊은 갈등의 문제에 접하고 결국은 심한 혼돈의 감정을 정돈하여 주면서 자애로운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발견케 하여 주셨고 삶의 새로운 진로를 열어 치유케 하신 사실을 볼 수 있다.29)
여기에서 살펴 보면 예수의 치유방법은 어떤때는 초월적인 방법과 의학적인 양면성을 곁들여 치유한 사실을 본다. 영적인 병과 현대 의학이 해결할 수 없는 불치의 질환이나 만성적인 병도 말씀, 안수, 기도, 믿음, 침과 흙, 그리고 대화를 통한 다양한 방법으로 치유하셨다.
사도들의 치유사역
예수님은 그에게 오는 병자들을 치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 같은 일을 하도록 위임하셨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이길 수 있는 권능과 병고치는 특권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게 하려고 그들을 보내며 ...... 제자들은 나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병을 고쳐 주었다”(눅9:1-2, 6). 치유사역은 열두 제자들이 병을 고치는 권세를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시행하였다.30) 이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해주는 바가 큰데 우리역시 믿은으로 나가 기도하면 얼마든지 벼을 낫게할 수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펼쳐지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치유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기사와 표적이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특징이었고 사도들은 병자를 고치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병의 치유는 처음부터 교회의 특징중 하나였다.31)
Historical and Cultural Base
교회사에 나타난 치유
표적과 기사는 신약성경의 정경화가 완료함과 다우러 끝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통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표적과 기사는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끝임 없이 일어나고 있다.32)
교부시대
져스틴 마터 (Justin Martyr)는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자가 된 신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지헤의 영을 어떤 이들은 지식의 영을, 어떤 이들은 능력의 영을, 어떤 이들은 치유의 영을 은사로 받느다고 말하고 있다. 또 ”대화“ 76장 6절에서는 ”그리고 이제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우리의 주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모든 귀신들과 악령들을 망하게하여 내 쫒을 수 있고 또 우리에게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증거하고 있다.33)
이레니우스는 (Irenaesus)34) 그의 “반 이단론” 제2권 32장 4절에서 당대의 어떤 이들은 귀신을 몰아내었고, 어떤 이들은 안수하여 병을 고쳤다고 나타내고 있다.
오리겐(Origen)35)은 “반 셀수스(Selus)론” 제1권 2장에서 셀수스에게 표적과 기사가 과거처럼 지금도 여전히 참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행해지고 있다고 변증하고 있다. 또 오리겐은 같은 책 3권 24장에서 증언하기를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치유를 베푸는 경이로운 능력을 믿음을 통해서 받았는데 이들은 “만유의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을 불러”행한 치유활동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재난과 정신적 질환 미친상내 그리고 인간과 귀신들을 통해 치료받지 못한 셀 수 없는 다른 질병들에서 해방받는 것을 우리는 보아 왔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테틀리안(Tertulian)은 “To Scapula” 제 5장에서 악령 추방과 치유에 관하여 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비록 법정에서는 충실한 변호사들이지만 또한 우리들에게 복종하는 그들에 의해 땅에 거꾸러 지기를 잘하였는데 그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세 살짜리 아이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고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안토니의 아비인 세베루스는 신실한 기독교인인데 기름부음으로 자기의 병을 치료해준 프로쿨루스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를 자기의 궁전에 불러다가 죽는 날까지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암브로스(Ambros)는 "The Holy Spirit"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어 주시는 예언과 치유에 대하여 말했다. “보라 성부께서 예언의 은사를 주시듯이 아들도 또한 주신다”
어거스틴(Augustine)은 “하나님의 도성” 제22권 8장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수 많은 신유의 사건들을 자세하게 하나씩 들려 주고 있다. 어거스틴이 칼타고에 있을 때 일어난 이노센티누스(Innoctius)라는 사람의 치유사건을 아주 길게 그리고 생생한 어조로 소개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또 유방암을 앓던 한 경건한 귀부인 이노센티아(Innocentia)가 간절히 기도하자 꿈에 새로 세례받은 여인중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사람에게 자기 환부위에 십자가 표지를 그려 달라고 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하니 즉각 나았다는 실례를 들려준다. 계속하여 어거스틴은 또 발에 통증을 앓던 한 의사의 몸에 마비가 오고 비뇨기과 질병을 앓던 전에 배우였었던 한 사람이 세례 받을 때 각기 완전히 치유된 이야기 등을 전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우리 시대에도 기적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에서 읽었던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의 뜻을 따라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신다36)”고 말한다.
치유 목회는 예수와 사도들이 육신적으로 이미 그들과 함께 살고 있지 않은 교부시대에도 역시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교부 시대에도 역시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이다.
중세시대
성 프란시스(ST. France of Assisi)37)는 활발한 치유의 사역을 행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하나님께서는 프란시스를 통하여 토스카넬라(Toscanella)에서 어떤 절름발이를 고쳤으며 나르니(Narni)에서는 중풍병자를 고쳤다. 프란시스는 악령에 시달려 아파 죽어가는 한 형제를 자유케 했다. 어떤 귀신들린 여자가 프란시스를 통하여 고침을 받았다. 안코나(Ancona)로 가던 도중 싼 쎄베리노(San Severino)에서 악토(Acto)라고 불리우는 어떤 젊은이가 문둥병에 걸려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는데 프란시스를 통하여 고침을 받았다. 씻타 델라 피예베(Citte Bella Pieve)에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날 때부터 귀머거리요 벙어리 였다. 그런데 믿음으로 고침을 받은 것이다. 헤르맨(Hermann)은 성프란시스의 기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퀴나스(Aguinas)는 아리스토텔렉스를 기반으로 한 신학자이다. 그의 견해는 카톨릭교회의 규범이 되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의술적인 치유는 언급하였지만 종교적 치유는 취급하지 않았다. 이것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신학 대전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성사에 대하여 설명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고해와 관련하여 잠깐 언급했을 뿐이다. 그의 신학대전에서 영적인 실체들 안에서 행해진 기적(귀신추방)과 사람들에게 행해진 기적(육체적 치유)을 인정하기는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그리스도는 특별히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오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그가 추방한 귀신들이 인간에게 인간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즉 인간의 파멸을 위해 인간의 육체 내에나 또는 그의 재산에 해를 가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가 악마 및 그의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 오셔서 그의 전투에서 악마를 쳐 부수고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38)
아퀴나스는 “영혼이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죄와 용서는 육체의 치유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역이다”라고 함으로 육체의 치유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작아지게 되었다.
치유사역은 암흑기라고 불리우던 중세 시대에도 영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치유사역은 교회사 밖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바고 교회사의 흐름속에 계속되어온 성령의 역사이다. 그것은 교회사를 통해 흐로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치유사역을 통한 구원의 사역은 약해 지긴 했지만 계속되어 왔다.
종교개혁시대 이후
종교개혁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다른 시대에 비해서 개혁자들에 의한 강조는 덜 된 것 뿐이지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초기에 치유의 여사를 부인했다. 자기 시대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치유의 체험을 함으로써 비로소 치유의 기적을 인정하게 되었다. 루터의 친구였던 멜랑흐톤(Melanchthon)이 여행중에 병으로 쓰러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루터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루터는 친구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멜랑흐톤은 곧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친구들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썻다. “내가 그에게 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지 그러나 명백한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가 살았다오”39)
루터는 초대교회에는 치유와 같은 위대한 기적들이 단순히 주어졌으나 후대의 교인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개종시키고 영적으로 구원함으로 이러한 기적들 보다 더 위대한 사역을 행할 수 있었다고 분명하게 믿었다. 즉 진정한 기적들이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40)
칼빈(John Calvin)에 있어서 치유사역은 그 첫 걸음을 회개하는 것에 둔 것으로 보아 단순히 병고침의 은사 활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를 시사하는 목회활동의 범주로 여겼다고 본다. 그가 특별히 치유목회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설교나 주석들을 모면 영적치유들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다른 모든 기적적인 은사와 더불어 병고침의 은사도 일시적인 것이지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믿음으로 간구할 뿐이며 낫고 안 낫고는 치로자이신 하나님의 절대덕인 뜻에 의존되는 것이다.
칼빈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것도 비록 육체의 여러 질병들을 고치시는 하셨어도 그것이 주된 일이 아니라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오신 것을 강조하였다.
즉 칼빈은 치유사역을 복음선포로 말미암아 구원의 자리로 이글는 것이 온전한 치유로 보았다. 이러한 모든 기적적인 고침들은 능력이 사도들에서 나오는 것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며 그결과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즉 기적적인 치유자체가 단순히 의료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약함을 짊어 지신 예수를 믿게 하는데 큰 목적이 있다는 것.41)이다.
칼빈은 영혼의 구원을 강조하였다. 그가 영혼의 구원에 강조점을 둔 것은 중세 로마 카톨릭의 부패한 여러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로마 카톨릭은 중태한 영혼구원에 대한 진리를 거의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강조하였다. 칼빈은 기적적인 은사들은 복음전파을 놀랍도록 만들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에 시작을 위한 일시적인 일미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예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체험이나 증거를 요청하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42) 웨슬레(John Wesley)는 무수히 많은 하나님의 치유 기적들을 증거했다. 그는 직접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웨슬레는 자신의 일기43)에서 말한다. 전도를 다니는 동안 너무 무리를 해서 머리가 아팠다. 또한 그의 발이 너무 오랫동안 걸어서 절게 되었다.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짐승을 어떤 방법으로라고, 아니 아무것도 없이라고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그의 두통은 사라졌고 발은 절지않고 걷게 되었다. 웨슬레는 교우들과 불필요한 차 마시는 것을 끊기로 했다. 그러나 수십년간 계속된 습관이었기 때문에 며칠동안 계속 두통이 심했고 잠든 상태와 같았다. 그는 이 문제를 위해 기도했들 때 조금도 불편함 없이 깨끗해 졌다는 경험들을 말한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치유를 현실적으로 믿고 이 일을 적용했고 기르친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의 치료적 가치를 믿었다. 또 동생 찰스를 위해 기도하여 회복케 했다.
폴리필드44)는 그의 저서 가운데서 찰스 췌슬레가 치유문제를 매우 강조하였으며 그 자신이 늑막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친구를 방문하여 기도하고 유화고약을 환부에 붙이도록 처방해서 치유한 기록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보면 웨슬레는 기도와 약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기초의술이라는 책을 저술한 정도였다.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bardt)는 초기 교회이후 기적의 역사가 악화되 주요한 이유가 ‘인격적 성령(The Personal Hdy Spirit)’라고 불리던 분이 부재하였기 때문45)이라고 믿었다. 블륨하르트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마치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사도들에 의해서 전해진 사건들과 같은 일들이 블룸하르트 주변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바트볼(Bad Ball)에서 영적 신체적 치유를 경험46) 했다.
블룸하르트가 찾고 구하고 증언한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神)이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다시 성서에 있어서 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새로운 행위와 능력과 계시를 기대할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이해했다. 그들이 그 하나님 나라로 단순히 개개의 인간의 영혼 속이나 먼 하늘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생활속에서 찾고 또 기대하려고 했다는 사실, 이중적 의미로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이었다.
그의 표어는 “예수는 승리자 (Jesus ist Sieger)"47) 였다. 그가 이러한 목회를 하게된 배경이 있다. 블룸하르트는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성서가 증언하는 일을 그리고 우리들의 구원의 문제를 단순히 마음의 문제로 만이 아니라 힘의 문제로 파악하여 싸움의 문제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 싸움은 블룸하르트의 싸움은 영적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싸움이며 능력의 대결이었다.
사실 개혁자들은 치유에 대하여 크게 강조하지는 않았었다. 그 이유는 그 시대의 신학적 최대 이슈은 성경적인 믿음과 교회론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이 주제가 그렇게 심각하게 수면위로 부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혹 정죄하지는 아니 하였고, 오히려 그러한 능력의 치유가 나타나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목회현장에 적용하였다.
근세사의 치유 전통들
역사적으로 또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보면 근세에 이르러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신유운동들이 일어났다.48) 치유에는 질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귀신 축출’까지도 포함되는데 존 윔버는 신유와 관련하여 근세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여러교파들의 활동내용과 그 대표적인 지도자들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49)
그러나 근세사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나타난 신유의 모델들이 범주화되는 데에는 한 가지 주의 할 점이 있는데, 이 범주들은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분명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한가지 운동 이상의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순절 모델-오순절 주의자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신유사역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에 전개된 신유사역에 있어서 가장 성공적인 집단으로 치유는 주로 부흥사나 복음전도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대부분의 치유는 대중집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전례적-성례전적 모델-이 모델은 역사적으로 몰 때 가장 오래 되었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주로 로마 카톨릭 교회와 영국 성공회교회에 의해 시행되는 모델이다. 주로 치유 사역을 성례적- 특히 성만찬,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는의식, 회해의 의식등-을 통해 사제들에 의해 시행되는 치유모델이다.
이 모델의 특징은 교회내의 공식적인 집회시간 중에 치유사역이 행해지므로 교회 밖에서 대규모로, 혹은 음성적으로 시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표적인 지도자들로서는 영국 셀비의 성공회 주교인 매독스(Morris Maddocks)와 메사추세스주(州) 록스베리의 로마 카톨릭 신부인 맥도나우(Edward Mcdonough)를 손꼽을 수 있다.
신 오순절 모델
현대에 일어난 모델로서 흔히 ‘제3듸 물결’ 이라고 일컬어 지고 있다. 이 모델에 속한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치유사역자인 동시에 치유훈련자로 생각하고 있으며, 치유전도자 한 사람 한 사람 보다는 치유팀을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있고, 치유는 모통 치유수련회, 특별집회, 교회나 가정에서의 집회 등 목회적인 환경에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 때 기도는 치유를 위한 일차적인 수단이므로 효과적인 기도방법을 습득하는 일을 중요시하고, 마음의 치유가 육체적인 치유에 선행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음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지도자로는 맥니트(Francis Mscnutt), 디오리오(Ralph A. Diorio), 스캔란(Michael Scanlan), 그리고 페인(Leamne Payne) 등을 들 수 있다.
마귀축출-오순절 모델
복음전도와 귀신축출 사역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치유전도 집회를 통하여 복음전도자들을 중심으로하여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귀신 축출 사역을 위하여 사람들을 훈련 시키는 일은 별로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들로서는 50년대와 60년대에 활동했던 오순절 계통의 복음전도자인 린제이(Gordon Lindsey), 오스본(T. L. Osbon), 섬랄(Lester Sumrall), 해긴(Kenneth Hagin), 프린스(Dreak Prince) 등을 들수 있다.
심리학적- 영적인 모델 혹은 내적 치유 모델
이 모델은 고거에 입은 마름의 상처치유, 또는 원한이나 죄책감으로 부터의 치유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믿음을 통한 상상, 역할연습 등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지도자들로서는 린형제(Dannis and Matthew Linn), 스테이 플튼(Ruth Carter Stapleton), 시먼즈(Seamands), 퍼시(Barbara Pursey), 햄프쉬(John Hampsch), 그리고 샌포드 부부(John and Paula Sandford)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상에 나타난 이러한 각 다양한 모델들은 장점이 있는 반면에 약점들도 있고, 복음주의적인 개신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비성경적인 심리학에 기초되어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모델들을 실제적 활용하기 전에 그 이론적 기초에 대한 성경적인 검증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앞으로 치유학 분야에서 다루어 져야 할 과제인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의 치유 운동들
한국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분명 이러한 치유운동이 있었다. 성령운동과 함께 전개되어온 이러한 사역들은 한국의 국가, 민족적, 사회적 상황과 함께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이해되고 변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대략 20년 간격의 연대 차이를 두고 네 시대에 걸친 한국교회의 성령운동과 치유사역을 살펴 볼 수 있게 된다.50)
1907년대의 성령운동과 치유
1907년은 한국 선교가 시작된지 20년만에 일어난 운동으로서 이 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는 완전히 이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교회가 질적, 양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51)
이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일단의 선교사들의 성경연구회에서 시작되어 원산지역의 교회에 퍼지더니 1907년 1월에 평양에서 그 절정을 이루어 전국적인 현상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이 운동을 시작했던 하디(Rev. R. A. Hardie)는 원래가 의지적인 의사였고, 그의 사람됨은 감정적 이었거나 부흥사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강원도 지역에서 선교를 했으나 실패한 원인을 찾기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던 중 성령의 체험을 한 것이다. 이 때 수많은 사람이 구원 받았고 변화되었으며 또 치유되었다.52) 이 운동의 특징은 회개와 죄의 고백이었다.
1930년대의 성령운동과 치유
1920년대 중반네 들면서 3.1운동 직후의 교회의 급성장 속도에 제동이 걸리면서 1930년대에 들어서는 교회가 1907년대의 그 뜨거움과 생명력을 상실하고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교회는 경제적 도전, 사회주의의 도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억압, 선교사에 대한 적대감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용도 목사가 시작했고, 김익두 목사가 불을 붙인 이 운동은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이때의 부흥운동은 대체로 신유를 통해 일어났는데, 성령께서 절재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사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집회에는 항상 여러 가지 병으로 교생하는 병자와 그 가족들로 가득찼고 기적도 일어났다. 이 때에는 성령을 병고치은 능력, 귀신을 쫓아내는 신령한 힘으로 믿고 이해하였다.53)
1950년대의 성령이해와 치유
이 시대에는 해방직후의 혼란과 교단의 분열, 또 그 다음으로 이어온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성령운동이 진행되어 왔다. 이 시기에는 전쟁터에서 또는 피난처에서 죽음을 날마다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오던 극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처해 있었던 극한 상황에서의 기적과 같은 구원을 체험하고 간증하게 되었고, 또는 능력도 받게 되어 전후 많은 곤란과 질병의 고통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 때 신유의 체험을 한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듸 길을 가서 현재, 대형교회의 목사들 중에서 이때의 신앙과 신유체험으로 단단한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54)
1970년대의 성령의 이해와 치유
5.16 군사혁명이 일어 나면서 혁명정부가 조국의 근대화를 기치로 이 사회가 급속한 산업사회가 되었다. 1975년을 전후하여 각 교단마다 선교 100주년 사업으로 물량적인 교회성장에 박차를 가함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 되었고, 특히 맘모스 집회를 통한 성령운동을 조직하고 집행하였다. 1970년대는 한 마디로 부흥사들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볼 수 있다. 수 많은 부흥집회가 무명, 유명 부흥사들에 의하여 날마다 주간마다 거행되었다. 이들의 특징은 성령을 불의 세례와 물의 세례로 나누는 특징이 있었다. 즉 물의 세례는 우리가 믿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들일 때 받는 세례로 이 물의 세례는 구원과 직결된다. 그러나 이 물의 세례만으로는 부족한데 능력을 받으려면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불의 세례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지만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려면 이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러한 불의 세례의 강조는 교회를 더욱 성장하게 했고,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면을 나타내는데 크게 일조하였으며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 부흥회로 말미암아 치유받는 사례가 늘어 갔다.55)
1990년대의 성령의 이해와 치유
은사운동이라는 말은 현대 교회역사를 논하는 관점에서 보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본래 금세기 초에 미국을 중심으로 오순절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대개 중생과 구별되는 성령세례를 강조 하였으며, 그 표적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방언을 비롯하여 병고침과 예언과 기타 기적적인 은사들을 회복시키신다고 주장하였다.
그 운동은 여러개의 새로운 교파들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운동이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교단들 안에까지 영향을 미티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교단을 떠나지 않은채 오순절 운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것을 신오순절운동 혹은 카리스마(은사) 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는 오순절 운동에 회의적이던 보수적 기성교단에 속한이들 가운데서도 개방적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는데 그들은 중생과 구별죄는 성령세례 교리는 받아 들이지 않았지만, 성령의 은사들을 새롭게 수용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흔히 제3의 물결 이라고 한다.56)
이런 흐름이 1990녀대 한국교회에 유입되면서 ‘능력전도’ 혹은 ‘능력목회’라는 말로 소개되었다.57) 제 3의 물결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죤 윔버(John Wimber)이다. 그는 그의 저술이나 글들 속에서 여러차례 자신의 신학과 신앙이 개혁주의 신학 신앙노선과 별차이가 없음을 강조해 왔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능력전도의 신학적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58) 예수의 하나님나라 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묵시주의적 시간관에 따르면 창조때부터 재림 때 까지 ‘이 세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실존 상황의 고통, 즉 죄악과 죽음과약함,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온전히 실현될 ‘오는 세대’ 에서는 하나의 의로운 통치에 참여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마 19:28). 다만 예수의 하나님나라 사상이 묵시주의 사상과 현저하게 다른 점은 예수의 오심으로 오는 세대의 축복들이 이미 이 세대 중에서도 부분적으로 실현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마12:28).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확립하고 그 속에서 주인노릇하는 사단과 악의 세력들을 분쇄하고 무너뜨려야만 되었다(cf. 막 1:24; 5:7). 따라서 제3의 물결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예수의 사역은 근본적으로 악의 세력들과의 ‘능력대결’(power rncounter)의 특징을 띨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마12:22-37).59)
둘째로 읨버는 예수시대와 초대교회 시대에 행해졌던 능력치유와 능력전도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적 근거
전인치유의 신학적 근거
한국에서 오랫동안 구원이란 개념은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영혼구원의 차원에서 머물러 왔다. 이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교회 안에서조차 신유가 경시되어 오기도 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단순히 영혼 구원으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여 생각하지만 고대 히브리인들은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과 그 분의 말을 들은 청중들은 ‘구원’이라고 할 때 그것을 영혼구원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연관시켜 생각했다. 전인(全人)을 구원한다는 것은 죄와 사단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총체적 존재-즉 구분될 수 없는 단일한 실체로 보고 있다. 예를들어 구약성경에는 ‘마음’과 ‘영혼’과 구별되는 ‘육체’라는 어휘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에는 육체의 각 부분들을 지칭하는 여덟 개 이상의 용어들(손, 발, 등등이 있지만) 이러한 부분들을 총괄해서 표현하는 용어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육체라고 칭하는 용어와 가장 밀접한 용어 『마사르』(ד שׁ ב)는 원래 인간의 전 생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육체상의 질병’을 의미하는 개념은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구약성겨의 히브리어와는 대조적으로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육체적인 몸에 해당하는 용어인 ‘소마’ (σωμα)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원론적인 헬라철학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신약성경은 육체를 마음과 영혼에서 구분된 하잖고 악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인간은 통합된 하나의 실체로서 인간의치유를 포괄적인 것으로 본다.60) 따라서 질병들이 육체적 차원에서 상호 관련되는 것처럼 그것들은 인간본성의 여러차원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치유 및 치유상담사역에 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마이클그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성과 속, 즉 영과 육이라는 거짓된 구분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때때로 기독교회는 인간의 영적 요소만이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항목인 것처럼 행동했다. 복음서들이 기록한 예수님의 사역은 기독교회의 이러한 태도가 거짓이었음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구원이 전인구원임을 보여준다(막3:4). 실제로 구원이라는 용어는 복음서에서 질병의 치유에 대한 언급으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61)
이와 같이 성경에서 죄 사함과 영생, 영적속박으로 부터의 구원, 그리고 치유는 하나의 광범위한 구원을 형성한다. 마가복음 5장 23절과 34절, 그리고 10장 52절에 나오는 ‘구원하소서’라는 단어(개역 한글성경에는 모두 ‘구원하소서’라는 말로 번역되었으나 영어 성경에는 ‘to heal' 또는 'make whole’라는 말로 번역되었다)는 헬라어 ‘소조’(σωξω)를 번역한 단어로서 ‘구원하다’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질병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죄를 다스리시는 그분의 권능과 동일시 하고 있다. 이것이 마가복음 2장 1-2절에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로 내리워진 중풍병자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선언하신 권세였다. 이 논리대로 라면 질병에서의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권위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행하시는 그분의 권위와 동일하다62)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몇 가지 형태의 치유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영적인 치유 (오랜 동안의 알콜 중독에서 즉시 해방 받는 등), 정신적 치유(정신 분열증이나 깊은 정신적 우울증), 그리고 육체적 치유(가령, 종양이 몇 분만에 사라지는 등)63) 로 분류할 수 있다.
성경속에 나타나는 치유
많은 사람들은 신(信), 불신(不信)을 막론하고 죄와 병과 죽음의 권인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성경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마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후(요5:14) “네가 이제 병에서 해방되었으니 더 심하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보면, 병과 죄와는 상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누가복음 4장 35절에서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자 안에서 역사하는 그 귀신을 꾸짖으면서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신 것을 보아 질병중의 어떤 것은 귀신들림과 관계 있으며, 요한복음 11장 4에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를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하려 함이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주신 병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인치유는 구원과 구속의 중요한 표징이며, 구원은 온전한 치유를 포함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요소간의 심신상관학적 상호작용
치유나 치유상담, 혹은 심리치료를 통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있어서 실제적으로는 그 영역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그 질병 혹은 문제의 원인들이 복합적이고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극적으로는 어떤 형태의 사역을 하고 있든지, 다음과 같은 인간의 본질적 요소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대한 기본이해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① 마음 - 영혼(Mind-Spirot)
엄밀하게 말해서 마음은 영적인 것도 육체적인 것도 아니지만 병든 마음은 영혼과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데, 마음에 쓴 뿌리를 가진 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조만간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질병에 걸리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하나님에 관해 왜곡된 개념을 강하게 갖고 있을 경우에도 마음의 질병이 생기며,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게시며 우리를 보살피지 아니하고 관심도 없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의 많은 부분들로부터 배제되고, 병든 마음은 영혼의 가능에 장애를 이르킨다.64)
② 마음 - 육체 (Mind- Body)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육체에 확실한 영향을 미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또 관절염과 궤양과 암,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질병들은 종종 독한 마음 자세까지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 갈 수도 있다. 따라서 마음속에 있는 죄와 질병이 치유되지 않는 한 육체적인 질병을 효과적으로 치유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회개함이 없이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65)
③ 영혼-마음(Spirit-Mind)
병든 영혼은 건강한 마음을 손상시킬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영혼의 상태와 그런 상태의 특성인 분명한 죄의식은 마음속에 염려와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
또한 사람의 영혼은 자신의 죄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영들에 의해서도 질병에 걸릴 수 있다. 다른 영들과 교제하는 기관인 인간의 영혼은 불결한 영에 의해 침범 당할수 있다. · 우리의 영혼이 악한 영들과 접촉할 때 악한 영들은 우리의 생각을 왜곡시키고 감정상의 고통을 준다. 마음의 질병이 악한 영들에 의해서 억압받는 영혼에서 비롯될 경우에, 훌륭한 정보와 숙련되 면담만으로 병든 마음을 충분히 치유할 수 없다.
④ 영혼- 육체 (Spirit-Body)
영적인 죄로 인한 질병은 인간의 육체를 손상시킬 수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멀어지면 그 마음에 종종 염려가 생길 수 있고, 그 염려로 인하여 육체가 손상을 입는다. 다윗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그가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 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믐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32:3,4)
⑤ 육체-영혼(Body-Spiriy)
우리의 육체는 영혼에도 영향을 끼친다. 아드레날린의 부족으로 무기력하게 될 경우, 우리는 영적으로 힘이 빠지고 기도하기가 귀찮아지며,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믿는 것도 어렵게 느껴지게 되는데, 이처럼 영적인 문제처럼 느껴지는 질병이 사실상 신체조직의 불균형에서 비롯되기도 한다.66)
이상과 같이 인간요소 상호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신학의 인간론 중심으로 서술해 보았으나, 그들 중의 몇 가지는 어떤 상황에서 동시에 작용할 수 잇다. 그 예로, 마가복음 9장 14-29절에는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들린’(9:25)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타나는데, 이 소년의 증세를 다양하게 진단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손년이 귀신들린 것으로 보아서 영적으로 병들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하고, 육체적 질병의 증상(간질)도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의 의학으로 이 소년을 진단하고 치료한다면 아마도 육체적인 발작을 제어할 수 있는 약물을 투여할 것이다. 또 심리학적인 검진과 상담을 받게 될 것이지만, 이 소년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의 정체와, 또 그 귀신을 쫓아내지 않고서는 결코 이 소년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67)
그러므로 우리는 치유에 있어서의 증세와 이에 따른 심신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만약 치유를 하려는 자가 이러한 상관 관계를 모르고 환자를 상대한다면 여러 가지 중대한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음과 육체와 영혼의 상관관계를 알고 있음으로 이러한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이야기한 증세의 근본원인이 심신상관학적 상호작용의 유형 중에 어떤 유형에 속하는
것인지를 먼저 알아 낸 뒤에 기도와 상담, 그리고 약물치료를 적적하게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세 가지의 주요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일을 하셨는데, 그 분은 가르치셨고, 설교을 하셨으며, 병자를 고치셨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 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그러므로 가르치심, 설교, 그리고 치유(teaching, preaching, healing), 이 세 가지를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예수님은 여전히 이적 적인 치유를 행하시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역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도시대에 종결되었는가? 만일 오늘날에도 이적 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사역을 실행하는 가운데서도 치유 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이유가 무엇이며, 만일 종결되었다면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치유현상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그에 대해서 가장 부정적이었던 사람중의 한 사람은 결혼 생활을 해오면서 아내의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B.B Warfield 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언제나 초자연적으로 치료하신다는 것을 증험적으로(testily) 부인했다68) 그러나 James Packer는 이러한 B.B Warfield의 견해가 틀린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경우에 따라서” 이적적으로 치유하신다고 말했다.69)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많은 속임수와 착각의 가능성을 감안하더라고, 지금도 현실적으로 많은 치유의 이적이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이다. 내과 의사이면서도 기독교와 심리학,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과 심리학적 원인과의 관계규명을 통하여 완전한 치유를 시도했던 스위스의 아마추어 심리학자 폴 터니에(Paul Tournier) 박사도, 신유의 기적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며, 심리요법에 있어서도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효과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더욱이 신유는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70)
따라서 치유의 가능성 그 자체를 길게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실제로 치유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치유가 특별한 은사 소유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될 뿐이다.
1) 치유는 기도의 응답인가? 은사자의 능력인가?
이에 대해서 John F. Walvoord 는 그의 ‘The Holy Sprity'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직도 그가 원하신다면 병자를 치유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 실 수 있으나 이러한 기적들은 인간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은사로서 수여되는 것도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고 하며71) 총신대학의 박아론 교수는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적과 신유는 조재하지만 그것은 은사로서가 아니라 기도의 응답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72) 그렇다면 오늘날 현상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에 의해 장기간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신유의 능력은 기도응답의 연속, 혹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개별적인 사역의 연속으로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특정한 사람에게만 소위 신유에 대한 기도의 응답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둘 다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는 기도 응답에 의해서, 때로는 은사의 결과로서 치유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신유의 원인을 오직 특정인의 신유능력으로 혹은 기도의 응답으로만 돌리는 것은 모두 극단론일 뿐이다.
치유의 영적 배경
그러나 이적 적인 치유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치유의 이적을 이방종교에서도 볼 수 있고, 공공연히 악령의 힘을 빌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사실상 전혀 관계없는 치유도 많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 제자들과 사역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혀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 영적 배경을 가진 기적적인 병 고침은 성령이나 악령 적 배경을 가진 것 중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73) 따라서 이러한 치유의 영적 배경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의 치유
치유(Healing)는 흔히 신유(Divine healing), 또는 믿음의 치유(Faith healing) 등의 용어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유는 치유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성이 강조되는 반면에, 믿음의 치유라는 말은 인간의 믿음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방법론에 있어 많은 차이가 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Stephen Hill은 치유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다섯 가지 단계를 소개하는데, 그 중의 마지막 단계가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A.B. Simpson도 치유를 위한 일곱 가지 실제적 방안을 제시하면서 믿음 안에서의 행동을 강조했다. 환자는 믿음으로 일어나 마치 건강한 사람이 된 것처럼 믿음으로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74)
흔히 ‘믿음의 치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몇 가지의 충족되어야 할 요건과 공식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75) 이러한 ‘신앙 공식적’ 사고는 신앙과 치유 사이에 엄밀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이론에 기초하는데, 이 이론은 건강과 부요 함과 같은 모든 하나님의 복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이고도 충분하게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믿음의 능력’은 하나님의 보물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신앙 공식적’ 사고의 특성은 인간 중심적이라는데 있으며, 이런 부류의 사고는 스스로를 알미니안 주의자(Arminians)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견된다.76) 이러한 사고의 근원은 19세기 복음주의자인 찰스 피니에게 까지 소급되는데, 오늘날에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형편이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이자 카리스마적 부흥의 대변자인 토마스 스마일(Thomas Smail)은 알마니우스와 찰스 피니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성결’에 대한 감리교의 가르침에서 시작하여 현대 오순절파에 까지 철저하게 파고 들어와 있다. 그리하여 성령의 세례와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건들은 우리가 성취하는 데에 달려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고 충분히 회개하며 충분히 기도한다면, 성령세례를 받고 온갖 은사들을 소유할 것이지만,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 할 수 없게 될 것이다.77)
이러한 인간 중심적 신학이 치유에 적용도리 경우, 결국 “당신이 충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조건들을 성취한다면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치유하시지 않을 것이다. 라는 공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에서 치유의 실패는 항상 신앙의 결핍으로 귀결된다.78)
‘믿음의 치유’를 주창자들은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 이어야 한다.
둘째로, 필요한 경우 그 사람은 죄를 고백해야 한다.
셋째로, 기름을 발라야 한다.
넷째로, 다소간 생활이 거룩해야 한다.
다섯째로, 그 사람은 일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 치유 자이신 그리스도께 그의 믿음을 두어야 한다.
여섯째로, 치유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유 받은 것처럼 행동하면 치유된다는 것을 믿고 치유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만일 치유를 위하여 실제로 이러한 모든 조건들이 요구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므로 분명히 치유는 소수 인에게 제한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되며, 혹시 병이 낫지 못하더라도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들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치유를 위해서 어떤 사람이 제자여야 함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마4:24, 14:35,36: 막 1:32-34: 눅17:11-19).
· 또 주님 자신이 어떤 사람이 치유 받기 전에 죄를 고백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결코 기름을 바르지 않고도 치유해 주셨고, 사람들이 생활에 거룩함에 이를 때까지 치유를 미루지도 않으셨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어느 정도으 믿음이 이르기 전에도 가장 어리석고 무지한 요청들에 자주 응답 하셨다(막9:25-27).
이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행적을 보면 기적적인 치유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시한 치유를 위한 필요조건들을 찾아볼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거룩함이 있든지 없든지, 특별한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주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 은혜와 목적에 따라 치유를 베푸셨다. 치유는 공식이나 요건,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은혜에 기초한 주권적인 역사인 것이다.
소위 ‘믿음의 치유’(Faith healing)는 이처럼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신학적인 논쟁의 여지들을 많이 남겨 두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신유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복잡한 공식, 방법, 요건, 혹은 인간의 의지적인 방법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주권 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믿음의 치유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치유, 또는 신유라는 용어만을 동일한 의미로 교차 사용하게 될 것이다.
CHAPTER 3
Review of Related Literature
Introduction(서론)
이미 앞장에서 본 연구자는 성결교단의 목회자가 교회성장의 측면에서 문제시 되고 있는 신유의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성서적 및 역사적면에서 연구해 보았다. 그러므로 이제 본장 에서는 성결교단의 신유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시켜 이를 통한 신유목회의 재인식과 실제로 개교회에서 신유로 사역하는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또한 유사 연구 및 신유사역에 대한 이론적인 면과 실제적인 신유사례들을 실제를 중심으로 연구해 보고자 한다. 또한 개교회에서 신유에 대한 연구나 사역 혹은 교육을 프로그램화 하여 성공한 사례들을 언급해 보고자 한다.
Similar Research(유사 연구 조사)
Hong Suk Choi는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다. 그는 귀신들림과 관련하여 치유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목적으로 신학지남에 교수연구논문을 발표 하였다. Hong Suk Choi는 질병이란,
하나의 관점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러 지평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교 윤리적인 측면, 생리 심리학적인 측면, 유전적 측면, 사회 문화적 측면, 의료 기술내지 의학적 측면, 하나님의 경륜적 측면, 혹은 생태윤리학적 측면등 다양한 국면과 연결되어 있다.79)
이말은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계가 질병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지 않은 나머지 질병의 치유를 단지 의학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깊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주고 있다. 이로인해 귀신들림이나 치유의 문제를 둘러싸고 교회나 혹은 믿는 자들이 양극으로 태도가 나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현대사조의 결과가 교회안에 깊숙히 침투해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현대 사조라는 것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학 즉 폐쇄적 세계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르트를 거쳐 18세기 영국의 자연신론(Deism)으로 발전하게 되어 우리에게 이르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현대 사조의 영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성경적 세계관을 견지할 때 올바른 이해와 치유에 대한 기독교적 실천이 나올 수있다는 것이다.80) Hong Suk Choi는 개신교 안에서 이적적인 칭를 반대하는 4가지 입장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신체는 의료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으며 종교적인 도움은 피상적일 뿐이라는 유물론적인 견해, 둘째, 질병을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훈계적인 선물로 보는 섭리론적 관점, 셋째, 하나님이 원래 교회를 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치유와 같은 사역들을 잠시 동안만 행하셨다는 특별시대 경륜론, 넷째, 자염법을 깨뜨릴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존주의 신학의 입장 때문이라고 했다.81) 이에 대해 Hong Suk Choi는 개혁신학의 전통을 이적과 관련하여 특별시대 경륜론을 일반적인 입장으로 받아 들이지만 그러나 조심스럽게 치유에 대한 문을 열어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절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날 수있다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Kwang Suk Joo는 1996년 오랄 로버츠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 한국 침례교단 소속 목사로서 새소망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그는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델은 예수님의 목회방법인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치유사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치유사역의 모범을 따르지 못하고 또 그가 속해 있는 한국 침례교회 목회자들도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치유사역의 이해를 증진 시키기 위하여 연구를 하게 되었다.82) 그는 치유사역에 대한 능력과 인식이 부족한 목회자들에게 7주간 21시간에 걸쳐서 치유사역에 대한 교육과 영성훈련을 하였다.83) 그랬더니 21시간동안 치유사역에 대한 교육과 영성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은 그렇지 않은 목회자들에 비해 몇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첫째 Control Group 보다 Treatment Group이 치유사역에 대한 이해가 더욱 증진됨으로 입증되었다. 얘를 들면 교육을 받기전에는 9명(50 %)만 훈련을 받으면 치유사역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였으나 교육을 받은 후에는 17명(94.4 %)이 신유은사 없어도 훈련받으면 치유사역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이해가 증진된 것이다. 둘째는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은 치유사역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향상되어서 치유사역을 하지 않았던 목회자들은 치유사역을 하게 되고 소극적으로 치유사역을 하던 목회자들은 적극적으로 치유사역을 하게된다는 가설을 세웠었는데 연구결과 교육을 받기전에는 8명(44.5 %)만 치유사역을 하겠다고 했으나 교육을 받은 후 17명(94.4 %)이 치유사역을 하겠다고 의사를 나타내었단 것이다. 셋째는 이 논문에 참여하게 되면 중지주의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은사주의 신학사상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는데 연구결과 18명의 Treament Group중 치유사역을 하지않은 사람들은 있으나 극단적인 중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Pretest 와 Posttest에서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는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지역교회에서 치유사역을 실습하는 중에 실지로 병든자를 치유하는 경험을 하게된다는 가설을 세웠었는데 연구결과 교육기간중에 5명이 병든자를 치유한 경험을 한 것으로 나타나서 가설이 맞았음을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다섯째는 지금까지는 안수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여 치유역사를 하였었는데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치유사역을 시도하게 되는 것으로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지역교회에서 치유사역을 적용하므로 장기적으로 볼 때 시무하는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었는데 그것만은 시간적으로 측정하기에 너무나 어려웠음을 밝히고 있다.84)
Kwang Suk Joo는 결론부분에서 예수님이 중점적으로 하셨던 제자훈련과 설교, 성경교육 그리고 신유사역들은 주의 종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신학대학에서부터 필수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있는 신학대학에서는 제자훈련과 설교학 그리고 교육학과 같은 과목은 가르치고 있지만 치유나 신유를 가르치는 신학대학은 전무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대학에서부터 치유학을 배우고 치유사역자로 훈련을 받고 졸업한다면 목회현장에서 병든자를 만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치유사역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Kwang Suk Joo는 말하길
치유사역은 어느 특정한 카리스마적인 부흥사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어느 목사만 할 수있도록 한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할 수있도록 주님이 허락한 것이며 또한 교회성장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고 결론적으로 말했다.
Sang Kil Bae는 기독교한국감리회 서울목양교회의 담임목사이다. 그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자 한 것은 한국내의 지역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신유에 대한 편견 문제였다. 그래서 한국내의 지역교회 목회자들을 치유나 신유에 대해 편견을 깨고 이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이해증진을 시킬 목적으로 연구하여 논문을 썻다85)고 했다. 목회에 있어서 실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중에 질병이나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유가 필요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방법이나 치유의 실제적인 모습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교회 목사들은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또 섣불리 이를 목회 현장에서 정요함에 있어 장애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에 대한 이유를 알고자 성경을 새롭게 연구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러한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시한번 신학적으로 점검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86) 그는 신구약 성경연구를 토하여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또 모든 사람들이 병으로부터 자유케 되어 온전해 지는 것을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케되고 온전케 되는 것으로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예수님께서 확증하신 것이다. 그것이 표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Sang Kil Bae는 그의 이러한 성경적 확증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 이민 교회중에서 감리교회 두개와 장로교회 한군데서 치유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다. 그리고 세미나 전후에 설문지를 통하여 반응을 조사하였는데 총20개의 문항들로 구성된 설문지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설문평가를 통하여 그가 세웠던 세가지의 가설이 증명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첫째,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른 나라의 교회들보다 치유사역에 대한 이해나 ㄱ실천이 부족함으로 이를 실천하는 사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치유사역은 교육수준이 낮은 남자나 여자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수정되어야 한다. 셋째로 치유란 특정한 교파뿐만 아니라 본래의 전통적인 교파들도 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가설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대부분 증명해 보임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한국교회에 반항을 불러 일으킬 연구를 하였다.87)
Dal-Ung Song은 경기도 하남시의 풍성교회를 1992년에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는 현직 목사이다. 그는 작은 교회 운동을 통한 가정치유 목회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교회는 가정과 유기적 생명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교회를 만들고,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가정을 육성한다고 했다.88)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형화 되어 가면서 맘모스 예배당과 거대한 구조로 성장해 가고 있는듯 하지만 실상 그 안에서 소외된 교인들과 병든 가정의 초라한 모습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작은 교회 운동과 함께 가정회복을 위한 치유사역을 실행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89) 그는 현재 갈등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사례별로 분석 연구 하였다. 정신적 심한 갈등과 불신으로 별거하고 있는 부부의 가정, 날카로운 신경질황으로 자녀를 학대하며 폭행을 일삼고, 심한 중노동을 시키며, 자녀의 행동 하나 하나를 감시하는 아버지가 있는 가정. 늙은 어머니가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데 전혀 돌보지 않고 죽을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정. 사업에 실패하여 엄청난 빚을 지고 거의 날마다 채권자에게 시달리고 있는 가정들의 현실 속에서 이들 가정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병든 가정의 치유를 위해 가정의 본질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에 노력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전 교우가 성경의 말씀 아래에서 가정 치유사역을 함께 감당하기 위해 같은 철학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전체교인들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쳤다. 그런다음 생겨진 평신도 가정사역자들과 함께 이들 문제 있는 가정들을 섬기며 치유 하는 쪽으로 사역을 진행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다.90) 그리고 풍성교회 안에도 짝믿음 가정이 있는데 이들 가정의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가족 즉 아내들을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영성훈련을 시켜 소귀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91) Chi-Jun No는 이러한 가정치유 목회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치료할 대상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고안되지 않고서는 쉽게 성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도울 수 있는 잘 훈련된 가정치유 사역자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때 유능한 가정 치유사역자의 조건은 상처가 있는 자라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였다.92)
Gary L. Harber는 Oklahoma 주 Tulsa에 있는 Trinity Unnited Methodist Church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그는 1990년 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목회학 박사논문으로 연구하였는데, 그의 관심은 그 자신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의 부족한 부분 곧 하나님의 치유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과 믿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Gary L. Harber는 왠지 모르게 하나님의 치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관심이 적은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심으로 새로이 가르치면 그들이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가설을 세웠다. 그래서 예수님의 삼대 사역인 설교 가르침 그리고 치유 중에서 치유를 비중있게 가르친 것이다. 그 동안 소흘하게 다루었던 치유에 대한 성경 본문이나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나아가 그것들의 중요성을 꾸준하게 강조했을 때 현저한 변화들을 감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Gary L. Harber는 실제적인 치유사역을 위해서 첫째, 주일학교 시간에는 관심있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치유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가르쳤고 둘째는 치유에 대한 설교를 연속적으로 곗곡하게 되었다. 그리고 셋째, 치유전도운동과 수련회 그리고 치유를 목적으로하는 성찬식을 거행했다고 한다.93) 결과 세미나 전후에 두 번의 설문을 실시하였는데 결과는 의외로 많은 교인들이 신유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고 치유사역에 대하여 목회자를 돕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15명으로 구성된 교회내의 교육과정 평가위원들은 치유사역을 교회내에서 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치유사역은 가급적이면 주일예배가 아닌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교회내에서 사역을 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론적인 연구(Theoretical Constructs)
본 논문의 목적은 성결교회가 네가지 교리중의 하나로 내외에 천명하고 있는 신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데에 있다. 왜냐하면 성결교단내 에서는 목회자나 교인들이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실제적으로 교회의 사역에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성결교단 목회자들에게 이러한 치유 사역의 중요성을 설득 시키기 위한 근거로 본 연구자가 섬기고 있는 백마장 제일교회를 통한 임상 실험의 결과를 가지고 그들에게 발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자의 논문의 목적에 부합되고 또 이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할 문헌들을 살펴 보았다. 질병의 원인과 대책
왜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고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가?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아는 것은 결국 치료하는 것과도 관계된다. 이것을 알게될 때 신유사역의 장애물도 제거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속에 존재하는 장애물이란 결국 신학의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죄
Sung Chung-Oh는 장로회 신학대학 교수이다. 그는 특히 치유와 영성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실천신학전공 박사이다. Sung Chung-Oh는 질병을 영의 질병, 정서적인 질병, 육체적인 질병, 귀신에 의한 질병으로 분류한다. 영의 질병은 개인적인 죄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 주님께서 침상에 눞혀 나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하신 말씀은 그 병이 죄에 기원하고 있음을 암시함이 분명하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하여)가 파괴된 인간은 흔히 정서적인 질병을 앓게되며 때때로 신체적인 질병까지도 일으킨다. 감정의 질병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서 입게도니 마음의 상처가 원인이 되는 병인 것이다. 그 다음 육체적 질병은 사고나 심리적 스트레스 등의 신체적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신이 일으키는 질병이 있다. 성경은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라고 했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선포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병들었거 신체적으로는 잠재적인 환자이며 결국 그 병으로 죽어갈 것이란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죄의 삵은 사망”(로마서 6:23)이기 때문이다.94)
불순종
Stephen Hill은 “불순종은 질병을 가져오고 순종은 치유를 발생시킨다” 고 하였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 위에 머물러 있게 되고 그로 인하여 인간의 영혼과 심령은 약하게 되고 점점 하나님과 거리가 생겨나서 결국은 그 틈을 타고 병균이 침투하게 되어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라 했다.95) 결국 질병은 죄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온다. 이 점은 T. L. Osborn 도 강조한다. T. L. Osborn은 말하길 "교인들 75%가 병들어 있다“96)고 했다. rm 이유는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병들어 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이 죄를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와 지지하는 손길이 떠나버린 결과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치유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앞에서 의를 행하며 그의 계명과 유례를 지키면 재앙들과 질병들을 멀리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출15:25-26; 레26:14-16; 신7:12-16; 28:22,27) 주님께서도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라는 말씀(사53:4)이 성취 되었음을 선포 하셨다.{마8:17) 그러므로 모든 치유는 영적 치유 즉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도록 하는 것이 항상 우선되어 져야 한다.97) 그리하여 죽은 영을 다시 살리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롬8:10) 구원의 완성
그러나 그러면서도 Hyung Ryl-Park같은이는 전인과 전환경 치유하는 Total Healing을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신유나 치유에서 한걸은 더 나아간 것으로 전인(Wholeness)과 전환경(Environment)의 질병을 치유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를 건설하는 Total Healing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Hyung Ryl-Park은 이것이야 말로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치유하셨던 주님의 목회를 온전히 계승하는 것이라고 한다.98) 그러므로 Hyung Ryl-Park은 그의 연구에서 특히 교회 신학교, 병원,의 연합적인 사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효과적인 치유사역구조는 포괄적이고 동시적인 네트워크 구조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연구자가 속해있는 성결교단은 그 설립이념중의 하나가 신유리다. 그러나 신학에서 그것을 제대로 배우거나 강조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중요한 교리를 잃어버리고 살아 온 것이다.
선교의 창
그러므로 신유 사역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의 창(Mission Home)이 되도록 하는 사역이다. 그 사역의 중심은 교회의 본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개개인이 복음으로 회복되고 건강한 육신이 될때만 가정이 가정다울 수 있고 이런 가정을 통해서 교회의 교회다움의 갱신이 있기 때문이다. 신유의 축복을 교회에 허락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천국 이전의 천국을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의 현장(Mission Home)을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궁극적 목적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있어 신유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목회와 신유, 신앙생활과 신유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 하도다”(요일 4:11) 하신 것처럼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사랑으로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다. 교회의 교육적 책임은 교인들로 하여금 신유에 대한 많은 통찰력과 이해를 경험하도록 돕는것이다.
오늘날에도 신유는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세가지의 주요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일을 하셨는데, 그 분은 가르치셨고, 설교를 사셨으며, 병자를 고치셨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가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그러므로 가르치심, 설교, 그리고 치유(teaching, preaching, healing), 이 세가지를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예수님은 여전히 이적적인 치유를 행하시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역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도시대에 종결 되었는가? 만일 오늘날에도 이적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사역을 실행하는 가운데서도 치유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만일 종결 되었다면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치유현상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그네 대해서 가장 부정적이었던 사람중의 한 사람은 결혼생활을 해오면서 아내의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워필드 (B.B Warfield)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언제나 초자연적으로 치료하신다는 것을 증험적으로(testily)부인했다.99)
그러나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이러한 워필드의 견해가 틀린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이적적으로 치유를 하신다고 말했다.100)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많은 속임수와 착각의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지금도 현실적으로 많은 치유의 이적이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이다.
내과 의사이면서도 기독교와 심리학,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과 심리학적 원인과의 관계규명을 통하여 완전한 치유를 시도했던 스위스의 아마추어 심리학자 폴 터니에(Paul Tournier)박사도 신유의 기적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며, 심리요법에 있어서도 기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효과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더욱이 신유는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101)
따라서 치유의 가능성 그 차체를 길게 논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 그것은 실제로 치유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치유가 특별한 은사 소유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가? 하는점이 문제가 될 뿐이다.
치유는 기도의 응답인가? 은사자의 능력인가?
이에 대해서 월부어드는 하나님이 아직도 그가 원하신다면 병자를 치유하시고 눅은자를 살리실 수 있으나, 이러한 기적들은 인간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은사로서 수여되는 것도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고 하며102) 총신대학의 박아론 교수는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적와 신유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은사로서가 아니라 기도의 응답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103)
그렇다면 오늘날 현상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에 의해 장기간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신유의 능력은 기도응답의 연속, 혹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개별적인 사역의 연속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가? 그렇다면 특종한 사람에게만 소위 신유에 대한 기도이 응답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둘 다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는 기도의 응답에 의해서, 때로는 은사의 결과로서 치유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신유의 원인을 오직 특정인의 신유능력만으로 혹은 기도의 응답으로만 들리는 것은 모두 극단론일 뿐이다.
치유의 영적 배경
그러나 이적적인 치유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응력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치유의 이적을 이방종교에서도 볼 수 있고, 공공연히 악령의 힘을 빌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사실상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치유도 많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 제자들과 사역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우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혀 말하되 내가 녀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영적 배경을 가진 기적적인 병고침은 성령이나 악령적 배경을 가진 것 중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104) 따라서 아러한 치유의 영적 배경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의 치유-신유
치유(healing)는 흔히 신유(Divine healing), 또는 믿음의 치유(Faith healing) 등의 용어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유는 치유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성이 강조되는 반면에 믿음의 치유라는 말은 인간의 맏음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방법론에 있어 많은 차이가 나는 경향이 있다.
예를들어 스티픈 힐(Stephen Hill)은 치유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다섯가지 단계를 소개하는데, 그 중의 마지막 단계가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심슨(A.B.Simpson)도 치유를 위한 일곱가지 실쩍 방안을 제시하면서 믿음안에서의 행동을 강조했다. 환자는 믿음으로 일어나 마치 건강한 사람이 된 것처럼 믿음으로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105)
흔히 ‘믿음의 치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몇가지의 충족되어야 할 요건과 공식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106) 이러한 ‘신앙공식적’사고는 신앙과 치유사이에 엄밀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이론에 기초하는데, 이 이론은 건강과 부요함과 같은 모든 하나님의 복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이고도 충분하게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믿음의 능력’음 하나님의 보물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신앙공식적’사고의 특성은 인간중심적이라는데 있으며, 이런 부류의 사고는 스스로를 알미니안 주의자(Arminians)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견된다.107) 이러한 사고의 근원은 19세기 복음주의자인 칠스 피니에게 까지 소급되는데 오늘날에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 널이 확산되어 있는 형편이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이자 카리스마적 부흥의 대변자인 토마스 스마일(Thomas Smail)은 알미니우스와 찰스 피니의 인간 중심주의에 대해 개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성결’에 대한 감리교의 가르침에서 시적하여 현대 오순절파에 까지 철저하게 파고들어와 있다. 그리하여 성령의 세례와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건들을 우리가 성취하는데에 달려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일고 충분히 회개하며 충분히 기도 한다면, 성령세례를 받고 온갖 은사들을 소유할 것이지만,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게 될 것이다.108)
이러한 인간중심적 신학이 치유에 적용될 경우, 결국 “당신이 충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조건들을 성취한다면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치유하시지 않을 것이다 라는 공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에서 치유의 실패는 항상 신앙의 결핌으로 귀결된다.109)
'믿음의 치유‘ 주창자들은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둘째로, 필요한 경우 그 사람은 죄를 고백해야 한다.
셋째로, 기름을 발라야 한다.
넷째로, 다소간 생활이 거룩해야 한다.
다섯째로, 그 사람은 일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 치유자이신 그리스도께 그의 믿음을 두어야 한다.
여섯째로, 치유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로 마지막으로, 치유받은 것처럼 행동하면 치유된다는 것을 믿고 치유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만일 치유를 위하여 실제로 이러한 모든 조건들이 요구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므로 분명히 치유는 소수인에게 제한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되며, 혹시 병이 낫지 못하더라도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들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치유를 위해서 어떤 사람이 제자여야함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의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마 4:24, 14:35, 막 1:32-34, 눅 17:11-19)
또 주님 자신이 어떤 사람이 치유 받기 전에 죄를 고백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결코 기름을 바르지 않고도 치유해 주셨고, 사람들이 생활에 거룩함에 이를 때까지 치유를 미루지도 않으셨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어느정도의 맏음이 이르기 전에도 가장 어리석고 무지한 요청들에 자주 응답하셨다.(막 9:25-27)
이와같이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행적을 보면 기적적인 신유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시한 신유를 위한 필요조건들을 찾아볼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거룩함이 있든지 없든지, 특별한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간에, 주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 은혜와 목적에 따라 신유를 베푸셨다. 신유는 공식이나 요건,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은혜에 기초한 주권적인 역사인 것이다.
신유와 영적 싸움
신유란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으로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그것은 우리에게 처음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져다준 사탄의 세력에 대한 것이다. 이 악한 영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몸이 의의 병기가 되지 못하도록 전신에 공격을 가하고 함정을 놓으며 그리고 우리를 질병과 신체장애로 고생하도록 획책한다. 그러므로 신유사역을 영적인 싸움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형태의 병은 사탄의 거짓 왕국의 특성이다. Ken Blue 는 Michael Green의 말을 인용하면서
병과 죽음은 모두 첫 번째 사람이 사탄의 유혹에“예”한 대가로 사탄이 준 거짖된 거래의 일부분이요 꾸러미읻. 신비하게도, 죄와 죽음과 병은 모두 불순종의 유산의 일부이다.110)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과 피조세계가 언제나까지 그렇게 허무한 것에 굴복하도록 내버려 두실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다. 그 분은 파괴되고 악한 권세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나라에 하나님나라의 권세로 침투해 들어오신다. 우리 주님의 사여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선포는 신유에 의해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귀신을 쫒아내는 일에 의해 특징 지워졌다. 그 분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 하셨다. 그리고 그 분은 사람들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건져내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명해 보이셨다. 마태복음 12:28에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으므로 이미 사탄의 세력과 하나님나라의 권세가 긴장 가운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유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권세적 측면에서 이해 해야 한다.
신유사역의 장애들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사역이 개교회에서 적용되는데에는 몇가지의 이유로 장애물이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의 온전한 교회적용을 위해서는 목회자가 상황을 잘 인식하고 이에대한 사전 정지작업을 설교 혹은 말씀공부를 통하여 해 놓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병을 통하여 성화시킨다? -Ken Blue는 하나님이 만약 병을 통하여 사람을 성화 시키시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인간의 가족관계에서 어린이를 학대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라고 말한ㄴ 것과 같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했다.111)어떤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기들의 딸의 교만을 고치기 위해 그 딸에게 암을 주겠는가? 병든자들에게 그들의 병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축복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방인의 신과 같이 보는 것일 뿐이다.
신적 운명론-우리가 흔히 칼빈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오해중의 하나이다. 병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낫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기도하든 기도하지 않든 치유가 일어 날 것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처음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병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근거에서 끔찍한 천연두 예방접종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천연두를 막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12)이러한 신적 운명론은 우리의 목회에서 문제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 적극적으로 의사를 부르고 나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려야 한다. 신적운명론은 낙심과 신유에 대한 수동적인 자세를 불어 넣어주기 때문에 기도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치유에 대한 세미나를 실시하려면 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잡아주기 위하여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딤전 2:2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또 베드후로서 3:9에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위험- “할 수있다”라는 식의 미국식 낙관주의가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합하여 승리주의적인 신학적 잡종을 낳았다고 Ken Blue는 통렬하게 지적한다. 예컨데 아이가 갑자기 위급하거 호흡 곤란을 일으킬 때 적절한 의학적 조치를 취하기 보다 그저 붙들고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된다는 식의 사고는 극단적 신유 반대주으ㅟ자들 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13)
세속적인 세계관-신약성경에 나오는 제1세기와 같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비서구적인 문화는 초자연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들의 세계관은 기적을 허용한다. ㄱ러나 서구세계는 세소적인 세계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신세대 혹은 젊은 세대들은 신유사역이 일어나는데에 장애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기적은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들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그 분의 말씀으로 지어진 세계과 역시 그 분의 말씀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신유는 1세기 신약시대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확장과 성숙의 표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이 신유의 사역을 진행하려면 무엇보다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해야 할 것인을 다시 한번 확증하게 된다.
신유의 방법
치유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신유사역을 목회의 한 측면으로서 교회에 시행하고자 할 때 그 방벙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를 살펴보자.
예수님의 치유 방법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의 방법으로 나누어 진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말씀을 통한 치유이며. 둘째는 기도를 통한 치유이다. 말씀을 통한 치유라 함은 눅5:12-13에 나와 있듯이 “예수가 한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하노니 깪스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중병이 떠나니라...” 또 문둥병즐린 친구를 지붕을 뜯어 달아내린 이야기에서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면서 말씀으로 저를 깨끗게 하셨다. 또 오병이어의 기적을 들판에서 베푸실 때에는 아이가 가지고온 작은 음식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눅9:16)
그 외에도 만져 주셨다든지 아니면 진흙을 발라 주셨다든지 하는 것은 이러한 큰 두 맥락속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에서 나온 행동임을 John Tuner는 말하고 있다.114)
Practical Applications(실제적 적용)
이제 이러한 신유에 대한 이론적인 면들을 어떻게 목회현장에 적용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한국의 경우는 이에대한 이해나 실제적인 사례의 모범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세권의 책을 참고하여 그들이 밝히고 있는 신유사역의 사역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Moo Nam-Cho는 한국의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L. A. University에서 신학석사를 마친 목사이다. 그는 서울 창조교회와 분당제일기도원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는 개척후 오랜 기간의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신유사역을 발견하고부터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어 교회부흥의 획기적인 전환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분당제일기도원 뿐 아니라 전국의 교회와 기도원에서 신유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내의 현직 목사들을 대상으로 신유에 대한 세미나를 실시하면서 이의 보급과 확산에 노력하고 있다.
Moo Nam-Cho는 밝히길 모든 목회자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그도 신유은사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은사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히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은사를 구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40일을 금식하며 다시 하나님께 은사를 달라고 간구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가운데 신유에 대한 특별한 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권세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함에 있어 모든 은사는 자신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교인들을 붙들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서뉴ㅗ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한 두사람이 낫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고 이제는 목회자들까지도 모여들어 일약 한국에서 가장 신유에 대한 확신있는 목사가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115)
Moo Nam-Cho은 그의 책에서 대략적으로 밝히길 치유사역에 있어 예비적 단계가 중요하다고 했다. 즉 교인이든 목회자이든 하나님의 신유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이므로 이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적 신학적 토대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늉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치유에 대한 집회나 모임도 중요하지만 성경공부를 통하여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볼 수있다. 이것을 Moo Nam-Cho은 신유를 위한 영성 운동이라고 했다.116) 그의 사역은 철저한 성령을 의지하는 사역으로 요약될 수있다. 즉 신유사역은 어디까지나 신유의 근원되시는 성령의 나타남과 도움이 없이는 ㅇ안되는데 우리는 성령의 역사해 주시기만을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흐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우리자신의 모든 장애 요소를 제거하고 성령의 나타남에 민감하도록 우리의 영성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117)
Sung Ho-Cho는 육군7557부대 내에 있는 ‘천마군인교회’에서 시무하는 군목이다. 그는 사역 짬짬이 아세아 연합신학연구원에서 전인적인 치유사역에 대하여 연구하였는데 이는 대부분 그의 군목회현장에서 경험되어지고 행하였던 사역의 결과들 이었다. 그는 군목회의 경험을 살려 신유사역에 있어 팀사역의 중요성을 역설항다. 즉 현대의학은 인간의 전인성을 망각하고 있다. 이느 현대의학이 과학적인 방법에 지나치게 의존한 대가이며 인간의 전인성을 무시한데서 기인되었다.따라서 예수님은 전인적 치유를 혼자서 감당 하셨지만, 인간에게는 주어진 은사가 다양하므로 효과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전인치유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으로 전문인들이 모여 팀을 조직하여 사역함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의료인, 목회자, 심리상담자, 사회사업가,경제인 그리고 자원봉사들이이 연합으로 사역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근거로서 눅 9:1-2, 마 10:5-8, 막 6:7은 이러한 치유사역의 팀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118)
Francis S MacNutt는 하바드 대학에서 학사를 미국의 카톨릭대학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아퀴나스 신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원래 카톨릭에서 설교학 교수로 지냈짐만 하나님은 그를 성공회 평신도 사역자로 부르셔서 지금은 치유사역자로 봉사하고 있다. Francis S MacNutt의 치유사역은 초교파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큰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1992년 7월 자신들이 운영하는 기독교치유봉사회(Christian Healing Ministries)의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한달 내내 영국과 아일랜드의 성공회 및 여러 교파의 교회에서 치유집회를 인도했다. Francis S MacNutt는 원래 의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신부가 되었던 그는 1956년 7월 한 친구가 자기 아들의 부분적인 실명상태를 치유해 달라고 왔을 때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가기를 거절하는 자신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구를 실망 시킬까 두려웠기 때문에 가기를 두려워 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1966년 미국연설협회에서 소개 받은 Jo Kimmel을 소개 받고 그와의 대화 계속된 만남 가운데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 못하였던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기적적인 신유로 우리를 치유하실 수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를 따라서 참석해본 신유 집회에서 실제로 그녀의 기도와 믿음 가운데에 일어서는 수 많은 병자를보고 그는 하나님의 신유를 믿게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다.119) Francis S MacNutt는 지금까지 본 신유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4분의 3정도가 치료되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되고 그리고 그 자신도 신유사역자가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1977년 “치유기도의 능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있는 성 빈센트 병원에서 찍은 것이다. 이 영화는 팀의 의료진의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24명의 환자를 두고 이틀동안 기도한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의료진의 수석 전문의인 스티프 박사가 20명의 환자들이 자신의 상태가 호전되었음을 느낀다고 보고하는 것으로 결과를 요약하고 있다. rmef 20명중 15명은 그 변화가 의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청각 자료들이 그들의 신유사역을 확산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유 사역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대개의 신유자들은 처음부터 은사가 나타나서 이를 행하는 가운데 신유사역자가 되었다기 보다 현장을 보는 가운데 아니면 신유 사역자들과의 대화 가움데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부터 이레 대한 새로운 눔이 열리게 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신유사역을 교회내에서 시작하려면 무엇보다 실제적인 사역의 현장을 보여 주면서 해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을 보여준다. 실제 사역의 현장으로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세미나중에 아픈자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기회를 가지든지 하는 것이 필요하다. 믿음은 들음과 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이 나타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신유가 나타나는 곳에는 성령의 재와 함께 감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