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둔덕리(屯德里) |
주민 단합 잘되는 한우물 마을
면적은 2.13㎢, 인구는 52가구 165명이 거주하고 있다. 창원 황씨(昌原黃氏)가 둔덕리에 크게 세를 떨쳤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현재는 전무하고 경주 김씨와 한우물에는 광주 안씨가 각기 10여호 거주하고 있다.
면 소재지로부터 서북쪽 8㎞ 지점인 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과 북은 보은읍(報恩邑), 서는 수한면(水汗面), 남은 선곡리(仙谷里)와 송죽리(松竹里)에 접하고 있다.
본래 보은군(報恩郡) 서니면(西尼面) 지역으로서 마을이 둔덕에 형성되여 있다하여 둔덕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지리(陽旨里), 한천리(寒泉里)를 병합하여 둔덕리(屯德里)라 하고 삼승면(三升面)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인 둔덕(屯德)은 둔덕리의 중심 마을이고 양짓 말은 둔덕의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며 웃 골은 한우물의 위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점촌(店村)은 둔덕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옹기점이 있었으며 큰 말은 둔덕 북쪽에 있는 큰마을. 한 우물(寒泉)은 점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참샘이 있다.
기타 갓골은 둔덕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며 골안 소금 절이골은 한우물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고 농 바우(籠岩)는 둔덕 서쪽 농바우산 꼭대기에 있는 바위로 농처럼 생겼다. 농바우 산(籠岩山 : 353m)은 둔덕 서쪽 보은읍과 수한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돌다리 들은 한우물 동쪽에 있는 들. 현재의 송죽교가 돌다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붙여진 이름이고 동문지는 큰말 동쪽에 있는 연못을 말하며 망두면 골은 큰말 동쪽에 있는 들로 토질이 매우 메마르다. 매봉재는 한우물 서쪽에 있는 271m의 산으로 매와 흡사하다고 하고 분무 골은 큰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비성 골은 한우물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고 소금절이 골은 한우물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소금절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소금절이 들은 둔덕 남쪽에 있는 들을 말하고 숙 고개는 큰 말에서 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 숲이 우거져 '숲 고개'라 부르던 것이 '숙고개'로 변하였다고 한다. 신 들은 한우물 동쪽에 있는 들로 신을 발에 동여맨 것처럼 생겼다고 하며 웃 골은 음지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농바위산 동남쪽이 된다. 유경지 골은 한우물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며 장사리 들은 한우물 남쪽 산넘어에 있는 들이다. 장판 골은 음지말 서쪽 웃골 위에 있는 골짜기. 갓골 북쪽이다.
잿 골은 큰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재넘어에 있는 골이며 질 구탱이는 점촌에 있는 들로 진흙이 많고 찬 골은 한우물 서·북쪽에 있는 들로 찬샘 들과는 도로로 구분된다. 찬샘은 찬골 막바지에 있는 샘이고 찬샘 들은 한우물 북쪽에 있는 들로 찬 골과 연결되고 찬샘이 있다. 황 골은 한우물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토질이 붉으며 황골 고개는 한우물에서 선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며 효자 못(孝子池)은 음지말 동쪽 마을 앞에 있는 못을 말한다.
문화유산으로는 고원재(高原齋)가 있는데 둔덕리 172-1번지에 소재한 고원군수(高原郡守) 화순인(和順人) 최동제(崔東劑)의 재실로 뒤에 그의 묘소가 있다. 둔덕단사(屯德壇祠)는 한우물 마을 앞 산에 있는 가정대부항해도관찰사(嘉靖大夫黃海道觀察使) 경주인(慶州人) 김을돈(金乙敦)과 그의 자손 3대의 단사이다. 둔덕 1리 마을 뒷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산신하강일(택일)에 산제를 지내고 있다.
둔덕리에는 효자못(孝子池)과 관계된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옛날 삼승면 둔덕리에 백씨 성을 가진 젊은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젊은이는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한 지 그 마을은 물론 이웃 마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를 온갖 정성을 다하여 잘 모셨다. 그러던 어느 해 어머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젊은이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의 병시중을 들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병환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용하다는 의원이 있다면 백리 밖에까지 가서 모셔다 어머니를 치료하였고, 좋다는 약은 모조리 구하여 복용토록 하였지만 어머니의 병환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어느 날, 그 날은 새벽부터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귀가 떨어져나가는 듯이 몹시 추운 날이었다. 병중에 어머니가 생선이 먹고 싶다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가난한 젊은이는 생선을 돈을 주고 살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 연못이나 냇가에 나가 잡을래야 모두 꽁꽁 얼어 붙었으므로 잡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청산 강가에 가서 잡든지 누구에게 사정을 하든지 구하고자 집을 나섰다. 눈보라는 그쳤지만 바람은 몹시도 세차게 불어 쌓인 눈이 하얗게 먼지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젊은이는 옷깃을 여미고 옷속으로 고개를 웅크리고 걸었지만 후들후들 떨렸다. 정말로 칼날같이 추운 날이었다. 젊은이가 동구밖에 있는 큰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연못에서 "우지직, 우지직"소리가 들려왔다. 젊은이는 발길을 멈추고 연못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꽁꽁 얼어 붙었던 연못 한 쪽의 얼음이 갈라지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갈라진 얼음 사이로 팔뚝만한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왔다. 한 마리 두 마리 잉어는 계속하여 10여마리나 뛰어 올라와서는 얼음 위에서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젊은이는 너무나 기뻤다. 정신없이 잉어를 잡아 가지고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젊은이는 정성을 다하여 잉어를 삶아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 날부터 위중하던 병이 차차 낫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소문이 나자 듣는 사람마다 젊은이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로 이와 같은 기적이 나타났다고 말하였다. 그 후부터 둔덕못은 "효자못"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