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皇 조용필을 드디어 보다
1970년대는 라디오 대중화 시대였지요.
그렇게 되기 이전엔 시골 마을 이장님 댁 추녀 끝에 매어달린 스피커 통에서 12시 5분 전에 ‘김삿갓 북한 방랑기’가 흘러나오고 그것이 끝나면 ‘띠.띠.띠. 띠잉~“ 하는 정오 시보와 함께 라디오 뉴스가 나오는 것이 방송의 전부였습니다.(어떤 곳에서는 사이렌으로 시보를 알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네 극장의 옥외 스피커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나 국내 가수들의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습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보급되면서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그 조그마한 소리통 앞에 아이들부터 부모에 이르기까지 앉거나 누워 라디오 연속극에 몰입했습니다.
물론 진공관 라디오나 전축을 가진 집에선, 저녁 무렵에 베이스음이 쿵~ 쿵~ 울리도록 음악을 틀었고
극히 일부이지만 월남전 파병 용사의 집에 흑백텔레비전이 설치되면서 ‘김 일’ 아저씨의 박치기~가 있는 프로레슬링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그 집 마루나 마당에 모여들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옥외 방송들은 사라졌습니다.
70년대 중반까지를 청소년기로 보낸 나를 포함한 또래들은 청바지와 통기타로 상징하는 포크 송과 팝송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 가수들(그 분들은 이미 작고했거나 원로 가수 이지만)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일은 없었고,
건방지게도 전통 가요는 ‘뽕짝’으로 부르며 애써 무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라에서도 ‘왜색(倭色)가요’ 리스트를 만들어 방송을 금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다방 출입을 할 무렵에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라는 일본 가요가 대유행을 했습니다. 가사내용은 알 수 없지만 따라 부르기 쉬운 곡에 노래를 부른 여가수가 예뻤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는 가수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가 ‘정’이라는 노래와 함께 다방 DJ들에게 내미는 신청곡 1위였습니다.
그 가수의 이름은 조용필이고, 그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노래를 부르기 위해 폭포 아래서 목 트임 훈련을 한 가수라는 설명을 DJ를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77년에 시작한 군 생활 33개월 내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습니다.
신병 때는 고참들이 군가 보다 더 많이 떼창으로 부르게 했고, 고참이 되고서는 아는 사제(私製)노래가 그것밖에 없어 저도 역시 그렇게 부르게 했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만 알고 있던 가수 조용필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제대 후 버스 안에서 였습니다. 노래를 들으며 번안곡이겠거니 했던 그 곡을 라디오 DJ는 조용필의 ‘단말머리’였다고 소개를 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노래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자나라고, 직장 생활의 최고 절정기를 거쳐 은퇴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회식 자리나 야유회,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는 한 번도 빠짐없이 누군가에 의해 불리어지고, 또 불리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즈음에는 스마트 폰에 저장된 그의 음악 파일들을 듣다가 그 노랫말에 깜짝깜짝 놀라 가사를 곱씹기도 합니다.
지난 토요일에 조용필 50주년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부모의 노년의 삶에 가끔 자극(?)을 주는 이벤트를 즐기는 아들 녀석이 내민 티켓은 아내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못난 남편 덕에 감동을 잘 하는 편이지요.)
공연장의 반쯤을 먹구름이 덮고 있어 오늘도 ‘비용필 공연’이 될까 내심 걱정했지만 오히려 별이 보일 정도였고 바람도 적당히 선선했습니다.
후배 가수들과 각계의 인사들의 50주년 헌정 축하 영상이 끝나고, 조명이 꺼져 깜깜해진 공연장에 불이 들어오며 절제된 불꽃 퍼포먼스와 함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나타났습니다.
머리털이 쭈뼛해짐을 느끼는 찰나, ‘여행을 떠나요’로 그의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수 만 명의 관객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성과 함께 그 유명한 ‘떼창’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일흔 살이라는 그는 장장 두 시간여를 앉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일도 없이 그의 노래들을 때로는 흥겹게, 때로는 정적으로 불렀습니다. 그 많은 노래는 연결고리 없이도 우리들의 지난 시간들을 연결시켰고, 관객들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옆 자리의 부부(저 보다 열 살 쯤은 적은 듯한)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스마트폰이 흔들릴 새라 꼭 붙잡고 끝날 때까지 녹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 경력이고, 歌皇의 칭호와 후배의 존경, 팬들의 사랑을 받을 정도면, 노래에 기교나 약간의 객기를 부릴 만도 하지만, 그는 음악파일로 듣던 것과 다를 바 없이 노래했습니다.
특히 들을 때 마다 괜히 쑥스러운 느낌을 가졌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그렇게 정성들여, 마치 새로 앨범을 취입하는 신인가수처럼 열심히, 정말 열심히 부르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누구처럼 느끼하기는커녕, 말과 행동에 겸손함이 배어있는 듯한 그는 무대를 이동시켜 스탠드 관중석 앞까지 다가가 30분 정도를 노래 몇 곡으로 함께 하며 그들에게도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가이드라인 너머로 손을 내민 팬들의 손길을 가능한 한 빠지지 않고 터치 했습니다.
미처 다 부르지 못한 곡들은 한 소절씩 관객들과 함께 불러 아쉬움을 달래고, 앙코르 곡 까지 마친 그는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다’는 사랑(Love)의 메시지를 남기고 공연을 마무리 했습니다.
추신 1: 모르는 노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하나여서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추신 2: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팬클럽 중 한 모임을 식당에서 마주했는데, 누군가 그들에게 자기도 팬 클럽이라고 하자 회원이 ‘몇 기세요?’ 물으니 그는 ‘방위 17기’라고 얼버무렸다.
추신 3: 팬클럽 회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니 ‘오빠가 오늘은 고향에 와서 그런지 컨디션이 아주 좋으셨어. 여기까지만 부를게요 라고 할 정도로 더 부르셨어.’
추신 4: 팬클럽은 주로 여성으로, 40대 이상인 듯 보이고 오륙십 대의 남자들도 보였는데 왠지 피곤해 보이는 그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 조용필 - 킬리만자로의 표범 / 작사:양인자, 작곡:김희갑 >
(대사)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노래)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처럼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대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그것을 위안해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사랑 때문이라고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노래)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대사)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한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꺾이지 않는 한그루 나무 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노래)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라.. 라.. 라..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