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 손재형과 추사, 그리고 추사체
서예는 노봉법에서 장봉법으로 발전해온 역사다.
우리나라가 노봉법에서 남방서체인 장봉법으로 이동하게 된 계기는
연암 박지원에 의해 중국문물을 수용하던 실학파와 관련이 있다 할 것인데
그것이 박제가로 이어져 안진경체를 공부하게 되면서부터 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앞서 동국진체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글씨의 習으로 인해
해방 전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필법은 노봉법의 소위 말하는 글방서체였다.
日政 때 일본인들 대개가 남방서체인 장봉법을 썼으나 우리는 倭色이라 하여
이를 배타시하였고, 현재까지도 노봉과 장봉이 혼합된 글씨를 쓰고 있는
추세다.
그러다가 소전 손재형 선생에 의해 남방서체가 전국에 퍼지게 되지만
소전 선생 사후부터 중국과의 개방 이후, 즉 1981년 이후부터 1995년까지는
서예계가 혼란기였다고 할 수 있으며 현재는 중국과의 문호 개방으로 장봉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추사체는 장봉법이다. 제대로 된 장봉법이 아니면 묘사되지 않으며 노봉법으로는
추사체가 추사체답게 나오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추사체라고 이름 짓고 글씨를
쓰지만 모양내기에 급급한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전통필법으로 추사체를 쓰기
때문이다.
소전 손 재형 선생께서 중국 유학을 선택한 이유는
추사 필법을 올바르게 되살린 다음에라야 제대로 제자 육성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하여 1929년부터 중국 나진옥 선생 작고할 때까지
10년 가까이 사제의 연을 맺어 그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며 角지지 않고
뭉글뭉글한 소위 주먹글씨라고 하는 남방서체의 장봉글씨인 ‘소전체’가
탄생한 것이다.
추사와 소전 두 사람은 많은 제자를 길러내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추사는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과거로 벼슬길에 올랐지만 집안의 풍파가 많았고
자신도 오랜 귀양생활로 세월을 보냈으며 귀양에서 풀려나 고작 4년을 살다가
그것도 山寺 등지를 떠돌다가 돌아가셨다. 때문에 후진양성에 몰두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제자 가운데 가장 추사체를 근접하게 쓴 소치 허련은 화가로 더 알려져 있고
소치 이외의 제자 대개가 화가요, 순수하게 글씨 쓴 제자는 신통치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산청, 진주, 고흥, 목포 등에서 간간이 배운 사람들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제자로서는 희박하다 하겠으며, 고흥에서 관리로 있던 사람 가운데 글씨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배운 기간이 5,6년 미만의 과정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10년 이상 곁에서 수련 과정을 거쳐야만 제자로 이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여러 정황들을 따져볼 때 추사체의 書脈을 나열하는 것이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강 김 규진, 석재 서 병오, 연파 최 정수선생 등이 추사체 풍의 글씨를 쓴
근현대 서가들이다. 해강 선생 글씨를 추사체로 오인하는 예가 많지만
세 사람 중에서는 그래도 석재 선생 글씨가 추사체에 좀 더 가깝다고 하겠다.
추사 유묵과 추사체를 구분지어 볼 때 현존하는 추사체 작품은 그리
많지 않으며 유묵 대부분은 귀양살이 중에 쓴 편지글들이다.
예술성까지 생각하면서 쓴 편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많이 알려져 있는 <이위정기>는 31세 때 글씨요, <반야심경> 또한 40대 초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추사 유묵에는 포함될지언정 55세 이후
개화기를 거쳐 서거 때까지의 완숙하면서도 임서 가치가 있는 추사체라고는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예술작품으로서 논할 가치가 있는 유묵을 가지고 추사체가 평가되어야
할 터이나 추사체 작품 수가 많지 않을뿐더러 일반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소전 선생의 추사에 대한, 추사체에 대한 존숭은 그의 중국 유학만큼이나
세한도 송환에서도 엿볼 수 있다. 自費로 일본까지 가서 세한도를 찾아온 것은
추사 학파인 그 분한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각에서 소전선생이 세한도를 담보로 하여 정치자금을 끌어 쓴 것처럼
매도하는 듯한 언사는 지나치다 아니할 수 없음인데, 선거에 낙마한 뒤 집안에
돈이 될 만한 것 모두 빚쟁이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세한도가 남의 수중에
들어가는 불운을 겪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세한도를 감상할 수 있게 한 그분의
공은 후세에 오래도록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많은 서예가들이 소전선생 제자라고 이름 올린다.
그러나 소전 선생께서는 손에 꼽을 만한 제자들에게 주된 특기 한 가지씩을
심어주셨다. 예전서에 장전 하남호, 해서에 우죽 양진니, 행초서에 경암 김상필,
한글에 서경보, 해서와 추사체에 정동영, 이렇게 다섯 분이며 현재
우죽 선생님 한 분만이 생존해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