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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9]
삼보 귀의(三寶歸衣)하옵시고!!!!!,
장모님!!!
이제 신묘년 한해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올 늦은 봄날 장모님께서 극락으로 왕생 하신지 어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저희들은 소식 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이 불효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회사 일로 예의 장모님께서 평생 살아 오셨던 정든 마을 앞을 고속도로로 지나 오면서 문득 장모님의 그리움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새삼 장모님의 살아 생전 모습이 가슴 속 깊이 아려옴에 이렇게 용기를 내어 펜을 들어 봅니다.
저희 내외는 장모님의 항상 염려 덕분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장모님께서 아끼시던 은정이 어미는 아시다시피 건강이 조금 좋지 못하여 생활에 약간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꾸준한 복약과 그런대로 수영장이며 등산으로 재활 노력하여 이제는 거의 불편함 없으며, 이곳으로 이주해 온지 벌써 5년여 되다 보니 주변에 하나 둘 친구도 생겨나 즐거이 노년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저희 큰 딸에는 우리 내외의 도움으로 공직생활을 계속 영위할 수 있고, 다행히 큰 사위도 동물병원을 잘 꾸려가고 주변의 신망도 두터워 사회생활을 착실히 쌓아 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점 든든합니다. 또한, 외손녀 지윤이, 지후 이놈들도 키울 때 힘이 좀 부쳤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요즘 저희 내외는 외손녀의 재롱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지곤 한담이다.
그리고, 작은 딸애 내외는 모두 요새 말로 직장 맞벌이 하다 보니 얼굴 보기도 가끔이고, 둘 다 회계사로써 바쁜 직업이다 보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자위하고 전화로만 내통하며 그냥 지냅니다.
참 장모님!!! 작은 딸 "아라"가 결혼 한지 1년여 지나서 애기를 가졌답니다.
우리를 닮아서인지 뱃 속 애기도 딸 애 라더군요...큰 사위, 작은 사위 모두 딸만 내리 낳을까 약간 두렵기도 합니다만 요즘 아들 딸 구별 하나요??? 해서 애써 모른 척 하고 지냅니다.
장모님!! 솔직히 작은 딸 "아라"가 애기를 가졌다는 처음 소식을 접하고 전혀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항상 작은 애는 막내이다 보니 저희 머리 속에는 항상 어린애로 보였거던요. 나를 닮아서인지 임진년 용띠 해 즉, 다가오는 새해 5월쯤이면 출산 한답니다.
저와는 60년의 세월 차이가 있겠군요.
이렇게 저희 내외는 장모님의 은혜와 음덕으로 오늘의 삶이 저의 인생 중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행복한 시기라 생각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라는 말 밖에 생각나질 않습니다.
저희 내외는 지난 12월초 장모님 계시던 처가를 모처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처제로 부터 동서가 직접 낚시로 잡은 갈치랑 소고기를 갖다 놓았다는 전화가 왔더군요, 그 걸 가져가려 구요.
오랜만에 처가를 방문해 보았으나 장모님께서도 계시질 않고.. 반겨 주는 이도 없어 빈집은 정말 썰렁하였답니다.
장모님께서 늘 반질반질 하게 잘 닦아 놓으시던 장독대에는 흙먼지가 내려 않았고.... 다행히 장독대 담장 위에는 약탕기 3개가 나란히 얹어 있어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넓은 마당과 텅 빈 닭장이며, 장모님의 평소 손때 묻은 호미, 낫, 괭이,고압분무기 등 눈에 익은 농기구들...... 그리고, 창고엔 내년을 위한 비료며 농약들이 켜켜이 정돈되어 쌓여 있고 ......아래채며 곡물 창고 문 열어 보니 장모님께서 한해 농사지어 담아 두셨던 그릇들 만이 가지런히 쌓여 있어 마당의 수도전 주변의 썰렁함과는 달리 그 나마 장모님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마당 주변만 둘러 보고 초겨울 바람의 황량함으로 해서 장모님의 평소 거처하셨던 큰방엔 사위로써 불쑥 들어 가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살아 계실 적의 사위에 대한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길이 길이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잠시나마 감정이 벅차 올라 가슴이 미어 지더군요.
그래서 바로 은정이 어미와 함께 장모님이 영면하고 계신 차가운 초겨울의 가족 묘지로 한 달음에 올라 갔답니다.
그 때 잘 보셨지요?
장모님!!
저는 어딜 가나 엄마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늘 장모님의 대단함과 인생 역경을 주위에 자랑하곤 했습니다.
오늘 내친 김에 장모님에 대한 저의 마음 속 이야기 틀어 놓을까 하네요,
저도 처자식 거느리고 여태 살아 오면서 느껴온 점과 장모님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오늘 만큼은 장모님께 풀어 놓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지나온 과거 행적을 이야기 해서 무슨 득이 있을까 만 그래도 꼭 한번 장모님께 심정을 털어 놓고 싶은 마음이니깐 너그러이 해량하여 주세요.
처음 제가 장가 오던 날부터 시작 합니다.
사실 저는 장가오기가 싫었습니다, 이 점 잘 아시지요?
처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고, 처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고......솔직히 결혼은 저희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 나이 26세 총각으로서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답니다.
올바른 직업도 아니고....모아 둔 돈도 없고......해서 저의 입장에서 가족을 거느릴 형편이 더더욱 못되었지요.
또한, 저의 어머니가 위중한 병중이라 시집오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야 하고......결혼 후 바로 분가할 입장도 못되고 어머니의 병 수발을 기약 없이 해야 하는 등등......
그러나, 여러 가지 집안 사정상 연로하신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과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살아 생전의 자식 장가는 보내야 한다는 강한 일념 등으로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 점 양가가 알고 이해하는 상황이라 해도 저의 도의상 결혼식 몇 일전 까지만 해도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답니다.
솔직히 그 때 처한 상황과 주변에 이끌려 무책임하게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장모님~~~
큰 딸을 키워서 개혼례 때에는 그 의미가 남 달랐겠지요? 아니 큰 사위에 대한 기대가 더 컸지요?
어떤 연유로 보잘것없는 저에게 그렇게 쉽게 큰 딸을 저에게 시집 보낼 결정을 하셨나요? 이 점은 아직도 의문이랍니다.
그리고, 결혼식 폐백 때에는 예사로이 보았지마는 신혼 여행 후 처음 장가가던 날 장모님께서 차려 주신 밥상 머리에서 장모님을 자세히 뵙고, 그 때 다른 이모님들 보다 얼굴의 많은 주름살...... 기대 반 실망반의 이해 못 할 미소를 띄우신 모습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습니다만 장모님의 살아오신 과정과 자식 키워내신 고초를 알게 되고,,저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의미를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크게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함을 이 자리에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대에 어긋남 없이 잘 살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수연” 여사~~아니 “사랑목”댁 택호가 더 잘 알려진 장모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신은 정말 열녀, 여장부였습니다.
함안 군북 사촌 사랑목 마을에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어려움 없는 가정에서 1남 4녀중 셋째로 태어나셨다지요?
성장하여 군북 유현리 “재령 이”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2남 2녀를 출산하고 당시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장인 어른과 다복한 삶을 꾸려 나가야 하는데 장인 어른의 젊었을 적 불의의 순직으로 남편과 사별하게 되고, 이 후 기구한 운명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네 남매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당시 농촌의 궁핍한 생활 속에 자식 키워 내시려고 얼마나 고초가 많으셧습니까?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 남편 없이 홀홀 단신으로 어린 자식들의 옷가지며 입 치레, 학비는 어떻게 마련하였으며, 일손도 없는 시절에 여자 혼자의 몸으로 그 많은 농사일은 어떻게 하셨나요? 삶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의논할 상대가 있었나요?
삶이 고달파 다 닳은 손 끝으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훔쳐 셨나요?
이 불효한 사위가 어찌 그 시절의 장모님 혼자 그 많은 삶의 고초와 겪은 일을 알기나 하겠습니까만 오늘 저희들 삶과 비교하여 보면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불굴의 대단한 삶을 헤쳐 나왔습니다.
다행히도 장모님의 말 못할 고행과 희생이 헛되지 않아 처남들은 다 사회에 나와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장모님의 인격과 가풍을 이어 받은 딸들은 시집가서 부유하지 않지만 손가락질 받지 않은 사람으로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삶은 조건 없는 희생으로 일생을 훌륭히 가꾸신 분입니다.
이 점 진정으로 존경 스럽습니다.
여기서, 장모님~~~
큰 딸 영숙이 이야기 아니할 수 없네요.
앞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저의 처 영숙이는 얼굴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결혼 당시엔 눈이 아주 순박한 처녀였답니다.
살아오면서 조금은 이기적이고 고집이 있는 약간 냉정한 성격이지만 이 점 오히려 저에게는 딱 이었습니다. 제가 오늘이 있기 까지는 따님 영숙이의 도움이 실로 컷 습니다.
시집와서 초년에 정말 고생 많이 시켰습니다.
직장암으로 고생하던 시어머니의 병간호와 임종맞이, 남색 치마 저고리 시절에의 상주, 남편 없는 시가의 시부와 시동생 모시기, 주말 부부로서의 농촌 신접 살이, 첫 애기 임신과 분만의 고초 등등 그 시절의 분위기와 처한 현실을 어찌 글로써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점 내 인생에 지울 수 없는 마음의 빚입니다..
아마 그 고통을 묵묵히 인내하고 먼 길을 준비해온 내조는 장모님의 훌륭한 인품을 닮은 것이라 생각되며, 저에게는 결과적으로 좋은 배필이 되었습니다. 결혼 초년에 고생시킨 게 항상 마음이 아파 이를 두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보며, 일편 단심 옆 길도 보지 아니하고 살아 왔고, 앞으로도 어떠한 삶의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항상 함께 생을 마무리 할 각오입니다.
물론 여태 살아 오면서 의견이 충돌하여 티격태격 한 일도 간혹 있었지만, 부부 간의 다툼은 칼로 물 베기라 하고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고 하잖아요.
저도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은정이 어미가 그 시절 인고의 세월을 어떻게 참아 왔는지~~ 하는 생각에 고마움이 더해 진답니다.
장모님 ~~~
지나온 삶을 되새겨 보면, 어려운 농가 살림에서 자녀들의 육아, 교육, 결혼, 분가 이후의 뒷받침, 새로운 주택과 창고 신축, 항상 집안 일에서의 중심에 스스로 나서는 소임 등등...... 그 간 장모님의 살아오신 과정이 어렴풋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네요..
특히, 집안 벌초나 시재 시 사람들 접대, 어려운 시절에 이웃과의 나눔, 마을 길을 내는데 선뜻 땅을 내 주는가 하면 집안과 마을 대소사도 직접 나서 챙겨주는 마음 넉넉하고 느긋함이 결과적으로 설, 추석 시 마다 집안 조카나 이웃들도 하나 같이 장모님을 들여다 보고 인사 드리는 것을 보고 장모님은 훌륭한 사람으로 이미 오래 전에 느꼈답니다.
그러한 장모님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꿋꿋한 기상, 절제된 모습으로 저는 오래 동안 우리들과 함께 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허리가 굽고 피골은 상접하였지만 늙고 추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려고 집안 구석구석 정리정돈 잘하시었고 목소리와 기골은 예전과 다름 없었지요.
암으로 수술한 이 후도 어려운 항암치료도 견디어 내고 해서, 곧 일어 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운명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옛 말에 고생 끝에 복이 와야 할 터인데...박복하다고 할까요.....
저희들 곁을 그렇게 쉽게 떠나실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장모님~~~
영면하시던 날 저는 빈소에서 크게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어머니~~~~~그 간 고마웠습니다!!, 죄송합니다,!! 훌륭하셨습니다!!! 라고요.........사위가 한 이 말 이해하셨나요?
첫째, "고마웠습니다~~~"라는 말은,
저에게 재산 물려주지 않았지만 어렵게 키운 따님을 보잘것없는 저에게 시집 보내고 저를 맏사위로 맞이하여 주신 것이 그 첫째이며, 장모님의 일생 일구신 가훈과 가풍이 저에게 그대로 접목되어 평안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 ...... 한 없는 고마움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저의 집안에 대한 고마움의 반증이었습니다..
두 번째 "죄송합니다~~~~"라고 한 것은,
큰 사위로서 올바른 처신에 부족했습니다. 지나온 날 저의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장모님의 경제적 어려움에 본의 아니게 외면하게 되었고, 처남 처제에게도 기대 만큼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바쁜 농번기에 일손 도움도 되지 못하고 마음마저 더해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큰 사위로써 집안 대소사나 처가 일에도 전혀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 함이 그저 죄송할 따름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컨데 평소에 저희들 사는 집에 모셔서 따뜻한 식사 한끼라도 대접다운 대접을 못한 것도 한스럽고 미안하기 이를 때가 없습니다. 그리고, 장모님께서 영면하시기 전 형제 간들 끼리 모여 병원에서 차후 간호 당번을 정하던 그 장면을 눈 앞에 보여 드린 점....이 점 참으로 부끄럽고 불효하기 이를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모님께 항상 큰 사위로써 미안하고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훌륭하셨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대 세상 부모가 다 그러하다고 하겠지만 장모님의 일생은 젊디 젊은 나이에 네 자녀를 혼자서 육아, 교육시켜 분가시키기가 말처럼 그렇게 쉽나요. 일생 여장부로써 기구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남이 흉내도 못 낼 크나 큰 사업이었습니다.
장모님~~
미운 정 고운정~~ 그간의 쌓인 정도 떼기 전에 쉽게 우리 곁을 떠나시게 되어 그리울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마는 그 후엔 울지 않았습니다. . 당시 저는 마지막 양가 부모를 다 잃어버린 불효자로써 고아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외로운 허허 들판에 나 혼자 서있는 기분이랄까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자꾸 눈물이 앞서니 저의 나이 탓 일까요??
살아 생전의 조그마한 체구의 그 당찬 모습이 자꾸 떠 올라 사실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은 처남 결혼 시킨 후 노년 시절에는 저와 격의 없는 생활도 세 삼 그리움으로 다가옴이다. 내의 바람으로 함께 한방에서 재워 주시고 생활할 수 있어 속으로 친자식처럼 받아 주시구나 하고요.....사실 저의 친부모님을 일찍이 여의고 장모님을 나의 친어머니로 생각하고 살아 왔거던요..저희가 간혹 부산에서 올라오면 큰 딸, 큰 사위라고 밤을 세워 소근소근.... 그 동안의 집안 이야기랑 동생들 이야기랑...동내 사람 이야기 등 모두 주저 없이 온갓 주변 이야기 다 하셨지요....또 평소 잡수시던 음식을 그대로 내어 놓으시던 격의 없는 그 시절이 저는 오히려 즐거웠답니다.
장모님~~~~~~~~기억하시나요?
장가 오든 날 마을 사람이 사랑목댁 큰사위 봤다고 좁은 집안에 온 동네 사람들로 와글와글 거리고...3일간 큰 잔치를 했다지요?.
외숙부, 이모님이랑 고모님이랑 그리고 먼 친가 인척까지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더하면 외갓집 식구들이 저를 더 반가이 맞이 해 주었음을 기억합니다. 저는 압니다~~어려운 고행 속에 첫딸 결혼은 큰 의미가 있고 장모님의 그 간의 고생을 덜어 주고 축하해 주려고요,,,
장모님~~ 그 시절 저를 기꺼이 맞이 해주셨던 주위 분들도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네요, 마을은 크게 변한 것은 없는데 30여 년의 세월은 많이도 변하게 하였습니다. 세월의 무상함도 함께 느낌니다.
이제 년 말이면 남해고속도로가 왕복 8차선으로 확장하여 개통합니다. 장지 나들목도 개선되었고 ...처가 방문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교통이 수월해 졌습니다만 그러나, 장모님이 계시질 않아 저의 마음이 더욱 더 아려 옵니다.
잘 지어 놓으신 주택과 가꾸어 오신 문전의 전답들이며 앞으로 농사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저희는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아마 처남들이 잘 가꾸리라 믿습니다. 장모님의 흔적을 쉽게 지우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은 믿습니다.
장모님~~~
해가 바뀌려니 장모님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저 세상으로 가시는 순간까지도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시려 던 그 꼿꼿함과 마지막 치부를 보이지 않으시려는 자존심을 깊이 깊이 느끼고 존경합니다.
부디 좋은 세상 극락에서 고통 없이 영면하세요,
장인 어른께도 당신 할 일까지 다하고 왔노라고,,,, 큰 소리 치세요.
저희들은 장모님의 닦아 놓은 길을 따라 가렵니다.
해가 바뀌려 하니 더욱 더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부디... 남은 형제들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함이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면서.....살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장모님!!
앞으로도 생각나면 자주 편지 올리겠습니다. 이 편지 하늘나라 극락 세계에 꼬~옥 전달되리라 믿습니다.
처음 올리는 편지이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인지 두서 없는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처님은 장모님의 이승에서 갈고 닦으신 덕목과 업보로 극락으로 잘 인도 하였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심은 만큼 거둔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 만큼 성불하셨을 것입니다!!
삼가 엎드려 비옵니다!!! 관세음 보살~~~나무 아미타불!!!!
여불비례(餘不備禮)!!!
신묘년 동지 스무다셋날
큰사위 (大華) 조필제 합장
첫댓글 외할머니가 이 글 보면 많이 감동하셨을거야..
한편 아빠의 과거사이기도 하제~~~
슬프다~~
한번도 뵙지 못한 분이지만, 소장님의 애절한 마음의 글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고 갑니다
하루 남은 임진년의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