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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그 종말론적 구조
최영식 목사(언약나무교회)
거의 모든 이단들은 잘못된 “구원론”에서 파생된다. 우리는 그간의 신앙강좌에서 “종말”, “구원”,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언약”에 관한 주제들을 살펴보았다. 이젠 이런 주제들을 “구원론”의 관점에서 총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신앙강좌의 목표를 구원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언어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잡았다.
하나님의 작정(作定,Decree) 작정(作定)이란 하나님의 뜻의 경륜에 따른 영원한 목적인데,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어날 모든 것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1]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그 작정은 하나님의 신적 지혜를 기초로 하고, 영원하며, 효과적이며, 불변하다. 또 작정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외부의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전포괄적(全包括的)이고, 죄에 대해서는 허용적이다[2].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작정하셨는가? 또는 무엇을 작정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인 성경에서, 종말에 하나님의 작정이 완전히 성취된 때를 서술하는 부분을 묵상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살후2:1)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 이니라 (고후3:18)
이 구절들을 참조하면, 하나님의 작정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 앞에 그의 백성들 또는 자녀들로 삼고, 모으셔서 당신의 영광을 보이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종말에 당신의 ‘카할(קהל)[3], 즉 ‘교회’라는 ‘총회’로 소집하시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당신과 교제를 나눌 대상을 창조하시는 것이 작정의 핵심이다.
창조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을 집행하시는 첫 번째 활동은 창조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지으셨다(창1:1). 그런데 이 창조의 정점에 사람을 지으심이 있다. 다른 만물에 비해 사람 창조에 있어서의 특이점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창1:26-27). 고대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토론이 있어왔다. 지금까지도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은 형상은 바로 이것이다’고 명확하게 결론짓고, 모든 학파가 그 견해에 조금도 이의를 달지 않고 수긍하는 견해는 없다. 학파마다, 교파마다 나름대로 다양한 의견을 제출할 뿐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소집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 보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에게만 부여하신 어떠한-그것이 영적, 이성적, 도덕적,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특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교제할 대상으로, 사람을 사이보그(cyborg)나 로봇(robot)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신 자유와 방불한 자유를 가진 “인격체”로 만드셨다는 것일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마16:26).
타락 전 언약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 만물을 통치할 권세를 부여하셨다. 아담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에서 이 직분을 수행하며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었다. 이러한 삶을 “생명”이라는 단어 외에 무슨 언어로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이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을 축하하고(celebration) 상징하는 수단이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언약이 그러하듯이 이 언약[4]에도 일종의 규정이 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2:17)”는 것이었다. 이 명령[5]에 순종한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믿고, 아담 자신은 그를 의지하고 순종해야 할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부정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창3:5), 자신의 힘으로 삶을 영위하겠다는 반역적 행위가 될 것이다.
타락 안타깝게도 아담이 이 첫 언약을 어겨 불의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어져버렸다. 아담의 죄는 언약의 규정대로 죽음으로 열매 맺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옵션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아담이 지은 죄를 못 본체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그의 후손인 인간 모두를 죄에 대한 적법한 처리 없이 무조건 영생으로 인도한다. 만약 이렇게 문제를 처리한다면 하나님의 속성, 곧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그의 의로운 속성과 배치된다. 하나님은 결코 그의 속성과 배치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만인구원론(萬人救援論)은 성립 자체가 안 된다. 둘째, 언약에 규정된 대로 아담과 그의 후손 모두를 죽음에 던져 넣으신다. 이렇게 하셔도 그는 백퍼센트 정당하시다. 그러나, 이렇게 하실 경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당신의 백성을 불러 모아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던 그의 작정이 좌절된다. 셋째, 아담 안에서 죄를 지은 모든 이들 가운데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일부를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대속(代贖) 받게 하셔서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심으로 처리하시고, 대속 받은 그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신다. 이 경우에는 그의 공의(公儀)로운 속성도 만족시키고, 그의 사랑의 속성도 크게 드러나며, 당신의 백성을 만드셔서 교제하시려 하던 그의 작정도 이루어진다.
평화의 의논[6](The Council of Peace) –예정과 선택
많은 사람들은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죄를 범하자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처리하실 방안을 강구하시고, 역사 가운데 집행하셨다고 오해한다. 즉,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아담이 죄를 짓고 난 후에, 역사 가운데 일어났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계셨다. 홀로 계시고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아담이 범죄할 것을 아셨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선택하셨고, 그렇게 하시지 않을 자들은 유기하셨다(롬9:21~23;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자를 예정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택자들에게 중생의 영을 주셔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구속의 행위를 믿게 하시도록 삼위 하나님은 논의하시고 결정하셨다. 이렇게 만세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간에 당신의 작정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부의 예정과 선택, 성자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 성령께서 택자들에게 성자의 구속사역을 효력있게 적용하시겠다고 협의 하신 것을 “평화의 의논”이라고 조직신학에서 명명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창조하셔서 당신과 교제하게 하시려는 작정, 그 과정에 반역한 인간의 죄를 처리하고 구원하시기 위한 예정과 선택, 구속사역, 구원의 적용을 만세 전에 평화의 의논에서 결정하셨다. 그 결정이 역사가운데 집행되는 것이 창조요 하나님의 구속역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정과 선택에 기초한 택자들의 구원을 “언약”이라는 틀을 사용하여 이루어 나가셨다. 그리고 그의 구원하시는 행위를 사람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래서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역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겠다.
타락 후 역사가운데 진행된 하나님의 구원역사[7]-은혜언약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은 모든 인류 가운데 얼마를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셨다. 그래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시고 구원해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며, 그 구원이 “언약”의 틀로 약속되고 집행되기 때문에 “은혜언약”이라고 조직신학에서 명명한다. 하나님은 그 일을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8]으로 불려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실 것이다. 그래서 은혜 언약은 성령을 통해 예수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죄 용서와 영생이라는 구원의 약속을 유효하게 한다. 그런데. 이 은혜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의 그림자 계시인 옛 언약들과,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의 새 언약으로 나뉜다.
옛 언약들
아담 언약 (Adamic Covenant)- 원시복음(原始福音)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하나님은 아담을 유혹하여 첫 언약을 파기하게 한 뱀 곧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겠고 선언하셨다. 이 선언을 원복음(原福音, original gospel, protoevangelium)이라 한다. 이제 역사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궁극적인 성취는 셋-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다윗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사탄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게 함으로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로 그의 머리를 깨뜨렸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언약을 파기한 후에 아담과 그 아내 하와는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 ‘벗은 줄을 알고 수치를 느낀 것은 지은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일 것이다. 죄인임이 드러나자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죄를 가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무화과나무 잎은 죄를 온전히 가리고,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할 수 없는 일을 친히 하셨다. 그는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아담의 수치를 완전히 가려 주셨다. 가죽 옷은 아담 대신에 다른 짐승이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것은 택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그림자로 계시한 것이다.
노아 언약 (Noahic Covenant): 보존의 언약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창6:17~19)
여자의 후손 계열인 셋 계열의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타락해서 뱀의 후손인 가인의 계열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구원의 길이 심각하게 위협 받게 되었다. 노아 마저 타락하게 되면 구원의 길은 상실되게 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보호하시기 위해 비상조치를 실행하셨다.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두 물로 심판하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심판의 물은 노아에게는 구원의 물이다. 베드로는 노아 홍수의 물을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3:21)”고 해석한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체결하셨다. 언약체결식에서 노아에게 선포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9:1)는 축복은 아담에게 주신 축복(창1:22)의 반복이다. 노아의 세계는 세상의 심판을 통해 열린 새 창조의 세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창조의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 땅을 보존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의 표로 무지개를 제시하셨다. 이후로 무지개는 에스겔의 환상(겔1;26-28)과 요한이 본 환상(계4:3) 속에서계속 발견된다.
3). 아브라함 언약 (Abrahamic Covenant)- 약속의 언약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실 통로를 위해 한 민족을 만드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는 셋과 노아의 후예인 아브람을 부르시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그가 보여 줄 땅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약속하시기를,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고 하셨다. 말씀을 좇아간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창12:7)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땅과 자손의 약속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줄 “내가 무엇으로 알리이까?”(창15:8)라고 질문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와서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을 것을 지시하셨다. 그런 후에 불타는 횃불과 연기 나는 화로가 잘라놓은 짐승들 사이로 통과하였다. 하나님께서 잘려진 짐승들 사이로 홀로 통과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 사건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다”고 말씀한다(창15:18)”.
하나님께서는 고대근동의 언약 체결절차 풍습을 이용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주신다는 분명한 확신을 주셨다. 짐승을 자르고, 그 자른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엄숙한 맹세로 묶어두시는 행위였다. 그 당시의 언약 체결식은 언약 당사자가 “내가 만일 내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동물의 사지가 잘린 것처럼 나도 잘릴 것이다”는 선언으로 맺어졌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맹세로 보증하셨다. 하나님께서 홀로 잘려진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신 것은, ‘구원’은 “내가 홀로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3장16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후손의 실체가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증거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릴 것을 명령하셨다. 모리아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잡으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수풀에 걸린 숫양을 지시하셨다(창22:13).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당신의 “독생하신 아들을 내어 놓으실 것”과, 그 아들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계시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것은 최종 계시였다. 아브라함은 그 계시를 붙들고 남은 여생을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고 말씀하셨다.
모세언약 (Mosaic Covenant)-시내산 언약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 땅에서 종으로 신음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여” 그들을 구출해 내셨다(출2:24).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이 모세 언약의 기초가 되었다. 종살이 했던 애굽 땅에서 구출하는 것 자체가 구원인데, 이 구원의 사건은 유월절에 시작되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인 장자를 죽이는 심판 가운데 이스라엘사람들은 어린 양의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건너가게(逾越, Passover)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구원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셨다. 시내산 언약의 체결로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과 성막 제도를 수여 받았다. 그 중심에는 성막의 제단에서 어린 양과 같은 희생제물이 번제로 드려지는 것이었다. 죽음의 천사를 넘어가게 한 유월절 어린 양[9]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예표하고, 율법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10], 성막의 모든 식양과 희생 제사들[11]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 계시이다. 따라서 모세 언약의 실체도 여자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세의 율법에서 반복되는 언약 형식구인,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출6:7; 레26:12)는 약속은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되었다.
다윗 언약 (Davidic Covenant)-왕국언약 이제 옛 언약은 다윗 왕국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은 왕의 후손으로 밝혀졌다. 다윗 언약은 사무엘하 7장 나단의 신탁(神託)에서 발견된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1~16)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우시고, 다윗에게 씨를 주어 그 왕국과 왕위를 영원히 세우겠다고 선언하셨다. 다윗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 이후의 왕들이 악으로 치달아도 그 집을 멸하기를 즐겨 하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대하21:7)
그렇지만 다윗의 후예들의 지속적인 범죄는 왕국의 멸망을 초래하였고, 다윗의 언약은 실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참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워, 영원한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새로운 세상인 교회와 온 세상을 왕으로 통치하고 계신다.
새 언약 (New Testament)
옛 언약들은 그림자 계시이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 실체인 새 언약을 소망해야 했다. 구약에서 새 언약의 도래를 가장 명시적으로 밝힌 선지자는 에스겔과 예레미야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11:19-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이다…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1-33)
하나님께서는 구약 언약에서 가장 명시적이라 할 수 있는 모세의 시내산 언약과는 확연히 다른 새 언약을 세우실 것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법을 십계명 같이 돌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하며, 새 영을 그들 속에 주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면 이 언약은 언제 성취되었는가? 히브리서8장은 예레미아 31장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한다. 옛 언약을 폐하고 새 언약을 세우시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히9:15;12:24).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실제로 새 언약을 제정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새 언약은 역사의 진행을 통해 나타난 다양한 옛 언약들을 성취하기 때문에 완성의 언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새 언약에는 엄청난 축복이 들어 있다. 그것은 그림자로 계시되던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실제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셨고, 죽으셔서 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살아나셨다(히9:24~2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구원계획을 완전히 성취하셨고(요1:14;히1:1~3), 성령을 그의 백성들에게 부어주셨다(행1:8; 고전12:13; 고후3:4-18).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저주와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번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죄값을 말끔히 씻어 주셨다.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셨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택하신 백성들을 자기의 보혈로 맺은 새 언약으로 초대하시며,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임마누엘) 돌보고 계신다.
신약의 종말론적 구조
유대인의 종말론적 이해 구약은 죄와 사탄이 통치하는 시대를 끝내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새 시대를 여시는 날을 ‘주의 날’ 또는 ‘마지막 날’로 서술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오시면 죄가 지배하는 이 시대를 끝내시고 새 시대를 여실 것이다. 그 메시아가 오는 날을 ‘주의 날’, ‘마지막 날’, 곧 ‘종말’로 부른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메시아 관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는 영적인 측면 보다는, 다윗과 같은 왕이 도래해서 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로 이어지는 지긋 지긋한 이방민족의 통치를 끝내고, 다윗과 같은 왕국을 세워 열방을 지배하는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는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경제적인 메시아 관을 가졌다. 이 요구를 만족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믿지 않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렸다. 유대인의 종말관은 직선적이다(표1). 죄와 사탄이 통치하는 ‘이 시대’가 끝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오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표1) 유대교의 종말론적 이원론[12]
신약성경의 종말론 구조
용어 정의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심을 종말이 왔다고 선언한다. 곧 ‘이 세대’가 끝나고 ‘오는 세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의 오심으로 죄와 사탄의 통치가 끝나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곧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 임했다고 한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또는 ‘오는 세대’에 들어가서 사는 구원의 삶을 ‘영생’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구원: 죄와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를 받는 삶, 아담적 숙명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힘입어 사는 삶. 종말: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대를 끝내고, 하나님께서 의로 통치하시는 새 세대를 여시는 때, 즉 구원의 때를 말한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세대를 ‘이 세대’또는 ‘이 세상’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의로 통치하는 세대를 ‘오는 세대(the age to come)’ 라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마가, 누가복음에 주로) 또는 ‘천국 (하늘 나라)’ (마태복음에 주로): 하나님의 통치(rule, reign)와 통치하시는 영역(realm)을 의미한다. ‘영생’(요한복음에 주로): ‘오는 세대’에서의 삶 (the life in the age to come)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의 내용인 ‘구원’을 여러 다양한 용어로 서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용어에 대한 개별적 이해와 총합적인 이해를 동시에 해야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오는 세대’,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도래했고 ‘영생’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옛 세대’, 곧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대’가 지속된다고 말씀한다. 마귀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사역으로 치명상을 입었고 결박되었다(마12:29). 그러나, 사탄과 귀신들은 아직도 불신세계를 지배하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이며(엡2:2),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이미 구원 받은 성도들을 삼키려고 두루 찾아 다닌다(벧전 5:8). 말하자면, 신약성경은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공존하고 있다고 말씀한다(표2 참조). 이러한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의 구도(표2 참조)는 하나님의 온전한 작정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종말(the last day of the last days)인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parousia)하실 때에 이 공존은 완전히 종결된다. 그가 재림하셔서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때에 마귀와 귀신들, 불신자들은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되는 불 못에 영원히 처하게 될 것이다(계20:10-14) 그의 의로운 최후 심판이 끝나면, 그리스도는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것이다(고전 15:24).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 것이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와 비참에 빠진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계 21:4)”.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된 ‘새 하늘과 새 땅’이 그 때에 충만히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당신의 형상을 지닌 당신의 백성들을 카할(קהל), 즉 ‘교회’로 모으시는 그의 작정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살전2:1). 그 때에 영광 받기로 택함 받은 성도들은 부활한 몸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생명의 교제를 세세 무궁토록 나눌 것이다.
적용 –종말의 종말에 완성될 구원을 미리 누리면서, 종말의 종말을 소망함 신약의 종말론 구조를 구속사적으로 잘 이해하고 숙지해야 한다. 이 구조가 내 영혼의 영원에 대한 운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약속은 누리고 소망하며, 경고는 피하는 지혜를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 분이시다. 계시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그 말씀 의존적인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
1)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충만히 받을 것이다. 2) 거룩해 졌고(聖徒), 충만히 거룩해질 것이다(榮華, 神化). 3)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ator) 4) 그래서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5) 예수 안에 최후 승리를 확신하며, 죄와 피 흘리기 까지 싸운다. 6) 옛 성품을 버리고 신(神)의 성품에 참여하는데 진력한다(聖化).
교회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행위는 교회의 생성으로 나타난다. 곧,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산물은 교회이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의 작정이 완성될 때의 교회(קהל,카할)의 모습을 자주 소망해야 한다.
7). 하나님의 작정의 완성인 하늘나라에서의 ‘카할’(하나님 백성의 총회)로서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축복을 현재적으로 누리는 것이 ‘주일 예배’이다. ‘카할’의 일원으로 주일 공(公)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준비하고, 기대하고,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서 그의 영광에 참여하길 사모해야 한다
8) 교회는 ‘세상 나라’의 원리를 힘써 배격하고 ‘하늘 나라’의 원리- 거룩과 사랑과 겸손과 섬김 과 신실함 등- 를 반영해야 한다.
9) 교회는 주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마라나타’(Μαράνἀθά maranathah, 주님, 오소서!)라고 간구해야 한다. 교회가 모여 금식하며, 철야하며 기도해야 할 제목은 ‘마라나타’이지, 나의 탐욕을 이루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10) 하나님의 작정이 완성될 종말의 날에 누릴 하나님과의 교제를 현재적으로 누리는 것이 ‘성령의 임재’이다[13].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 공동체적으로 예배 중에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소망 해야 한다.
1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중심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요, 죄인을 찾아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이요, ‘아버지 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그는 동시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1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끊임없이 제공하신다. 동시에 그는 그 사랑과 은혜를 거절하는 자를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 넣으신다. ‘사랑’의 약속은 받아 누리고, ‘심판’의 경고는 새겨 들어야 한다.
12) 새 언약 백성은 새 언약의 의무에 신실해야 한다. 모든 언약에서 발생하는 의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다. 이 의무를 다할 때 의롭다고 인정 받으며, 축복 즉 ‘샬롬’을 누리게 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15]. ‘영생’의 삶, ‘오는 세상’의 삶, ‘구원’의 삶의 방식은 ‘성령으로 사는 것’이다.
결어: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러한 모든 구원의 과정(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집행, 언약의 성취)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홀로 행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끝)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Maranatha 주님! 오십시오!
Sound Doctrine, Holy Life 바른 교리, 거룩한 삶
[1]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7문답
[2] Louis Berkhof, Manual of Christian Doctrine, trans by 신복윤, 기독교신학 개론(서울: 성광문화사,1985),79-80. [3] 이 단어(qâhâl)는 한글 성경에 ‘총회’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회중’으로 번역되는 עדה‛(êdâh)와 함께 신약에서 ‘교회(εκκλησία,ekklēsia)’를 의미의 단어이다.
[4] 이것이 ‘언약’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다. 하지만 호6:7절(이 구절의 해석도 다양하지만)과 문맥을 살펴볼 때 언약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언약은 관계를 창출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는 전형적인 언약형식구(言約形式句)는 첫 사람 아담에게도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 언약을 전통적 개혁주의는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이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언약을 타락 전 언약인 행위언약과 타락 후의 언약인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20세기 신학자 중 칼 바르트(karl Barth), 스킬더(Klass Schilder), 죤 머레이(John Murray)는 두 언약으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인식을 떠나, 모든 성경 언약의 초점을 은혜와 믿음에 맞추어 하나의 은혜언약 아래에 모든 것을 포괄시키는 한 언약 체계(monocovenantal scheme)를 개발하였다. “행위언약”이라는 용어가 마치 인간이 그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니 이 용어를 쓰지 말자는 것이다. 반면,이 용어를 고수하려는 쪽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義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라는 ‘칭의(稱義)’교리가 “행위언약”이란 용어를 포기하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노만 쉐퍼드(Norman Shepherd)교수는 전임자인 머레이의 주장보다 훨씬 더 나가버렸다. 그는 행위나 공로의 어떤 사상도 거부했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신자에게 전가되는 개념(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을 부인하는 지경까지 가버렸다. 그는 그리스도의 義가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과 순종에 기인하기 때문에, 신자들도 자신의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의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이 명령을 최초의 ‘율법’이라고 한다면, 율법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그가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창조주의 권위로서 명령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원래 목적은 언약으로 진입(getting in)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물러 있게(staying in)하기 위한 규례라고 하겠다. ‘구원’의 용어로 말한다면, 율법은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지키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구원을(출20:2) 감사하며 즐기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양식, 곧 율법을 지킬 때 언약이 창출한 ‘관계 안에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되며, 이 관계적 의무를 다할 때를 “의(義)”롭다 하며, 이 “의(義)”는 언약 당사자 간에 샬롬(שׁלם), 곧 평강(平康)을 가져오게 한다.
[6] 이것을 구속언약(pactum saluti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간의 관계를 계시하는 수단이므로, 굳이 삼위 하나님간의 의논을 ‘언약’이라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서, 확연히 다른 두 차원의 일을 혼동할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겠다. [8] 이 말은 “종말에 구원을 가져올 아담”이라는 뜻이다. [10] 모세의 글이 자기에 관한 기록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11] 성막의 성소안에 있는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촛대는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를, 향단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지성소 안의 법궤 안의 돌비는 말씀이신 예수를, 속죄소는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를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모든 제사의 기본인 양과 소와 염소의 희생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 [13] Gordon D. Fee,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 (Peabody:Hendrickson, 1996), 15-23. [15] 이것을 내 힘으로 하려고 시도하려고 하는 한 극단은 ‘율법주의’ 또는 ‘신율주의(theonomy)’이다. 반면 언약에 신실해야 할 의무를 등한시 하는 다른 극단은 ‘반(反)율법주의’, ‘율법폐기론’ 또는 ‘방임주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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