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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람 글 스크랩 나는 왜 개신교를 떠났는가(1) 황석환(재미 사업가)
예지 추천 0 조회 23 08.02.21 01:3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나는 왜 개신교를 떠났는가(1) 황석환(재미 사업가)



머리말

1999년 4월 나는 오랜 동안 망설이던 것을 실행하고 말았다.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이다. 개신교는 내 평생의 종교의 전부이었다. 우리 집안은 외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교인이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감리교의 장로가 되신 분이다. 일요일마다 혹은 어떤 때는 매일 가정예배를 보며 자란 내가 이제 인생의 황혼기를 바라보는 이 나이에 개종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에는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다. 부모 형제에게 미안한 마음은 물론 자녀들에게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양 관행에 젖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신앙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또 그로 인한 갈등을 계속 겪으면서 그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는 것 또한 이 못지 않은 고통이기에 개신교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 개신교는 교리적으로는 믿음과 자신의 구원문제에만 초점이 모아져 있는 듯하다. 믿음과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함으로써 마치 천국의 입장권을 파는 데만 열중했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니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 대한 배려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나라 개신교의 형태란 마치 천국이라는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꼴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교회는 전도라는 명분으로 오직 교세확장에만 몰두하고 있다. 전도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되다 보니 복음은 실종된 상태이다. (중략) 나는 개신교에서 지금이라도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의 순수한 기운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어떤 신학적 이론이나 교리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신학이든, 교리든, 교회든, 목사든, 제도든, 무엇이든지 현실 기성교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실질적으로 평신도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왜곡된 믿음이나 신앙생활을 유도한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흔히 경험하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특정 교회나 목사를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1. 믿음

L씨는 내가 전에 근무했던 회사의 상사이었다. L씨는 기독교 재단인 연세대를 졸업하였으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라는 말을 꺼내는 것도 싫어한다. 그렇다고 특히 다른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왜 교회라는 말을 싫어하느냐고 물으면 자기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위선이 아주 싫다는 것이다. 자기의 친구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너는 남들과 똑같이 못된 짓을 다 하면서 어떻게 교회는 다니느냐"고 물으면 그 친구는 "나는 늘 교회에 가서 용서를 받으니 그 죄가 쌓이지 않지만. 너는 그 죄가 더 쌓인다"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이 되는 얘기냐는 것이다.

문민정부 시절에 비리로 구속된 많은 고위공직자와 장성의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요즈음 떠들썩한 고급 옷 로비 의혹사건에 연루된 여인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스스로 내세우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같은 이중적 경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서 못된 짓을 하라고 가르칠 리 만무하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우다보니 현실적으로 자신의 행실과 구원은 별개의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일부 개신교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대비시켜 상대적으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행위는 부수적인 개념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믿음과 행위를 독립된 개념으로 취급하며 상대적으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믿음과 행위의 일체성을 간과하고 있다.

제자화 성서공부에서 믿음에 대해 가르치기를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며,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표현도 중요한 것이라는 점에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이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이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거듭났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개신교 교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을 의심하거나 비방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이것이 그들의 중요한 신앙체험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이 같은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온 교회가 다 알도록 소문을 내며 다니는 거듭난 사람이 실상 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술을 안 먹는 정도, 또 목사님 부부를 자주 대접하는 정도가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이다. 오히려 전에는 인간적으로 건방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신앙적으로도 교만해졌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나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듭나는 것도 이렇게 중계방송을 해야하는 것인지,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신앙적으로 교만해 질 수 있는지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런 것이 과연 바람직한 신앙인지 의문스럽다. 행실은 제쳐놓고 지나치게 믿음만을 강조하다 보니 결국 믿음의 구두 표현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낳고 마는 것이다. 나는 신앙이란 전 인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으로만 시인하고 행실은 그와 동떨어진 것은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가장 경계하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는 로마서에 근거하여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말(롬 3:10)은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구원에 이를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나는 본다. (중략)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행위란 어떤 관계인가?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말한 행위란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바울의 결론은 믿음으로 율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믿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세워야 한다(롬 3:31)고 결론짓고 있다. 야고보서에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약 3:14)고까지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믿음을 행위와 따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시었고, 독생자 예수는 그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사랑이다. 기독교에 있어 사랑은 믿음보다 더 원천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것이 곧 예수께서 기독교인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이다(요 13:34).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있어 행위란 이 계명의 실천 즉 사랑의 실천이다.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바울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행위와 대비하여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점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하면 행위 없이 믿음이 완성될 수 있는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교회에서 의도적으로 잘못된 신앙을 가르칠 리는 없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결과적으로라도 예수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교회의 가르침이 신도들의 신앙에 미치는 결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바른 믿음이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 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 배타적 교리

얼마 전에 이곳 북가주에서 실제 있었던 일로 방송에 나간 일이다. 어떤 노방전도자가 식품점 앞에서 전도용 전단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나는 불교도입니다" 하면서 전단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전단을 나누어주던 사람이 말하기를 "할머니는 불교 믿고 지옥에 가시더라도 자녀분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전단을 거듭 주더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실상 타종교인에게 모욕감을 주고 트집을 잡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노방전도를 한다고 나선 사람이면 신앙심이 깊고 매우 적극적인 교인임에 틀림없다. 이런 분들이 이렇게 말하게 되는 데에는 사실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에 그 책임이 있다. 개신교에서는 기독교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가르치니 이와 같은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수년 전에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이던 변선환목사는 기독교 이외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가 소위 종교재판을 받고 출교되었다. 이것이 교단의 지도자들에게는 옳은 일인지 어떤지 나는 모르겠으나 이 같은 자세가 평신도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문제이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나쁠 것이야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른 종교에 대해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하고 또 이를 강요한다면 결코 옳은 일이라 할 수 없다.

S교회의 B목사 역시 종교적으로는 매우 배타적이어서 항상 기독교 이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강조하는 분이다. 이에 대해 어떤 교인이 성서공부에서 질문하기를 그럼 예수를 믿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은 모두 지옥에 갔느냐고 묻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유치한 얘기지만 개신교 목사 치고 이 같은 질문을 한두 번 받아보지 않은 분이 없을 것 같다. B목사는 이 같은 질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이니 우리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른다고 말해야 옳지, 모른다면서도 계속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은 잘못 아닌가? 만약 하나님이 이같이 편협하시다면 나는 하나님 믿기를 포기하겠다.

개신교의 이 배타적 교리는 소위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를 해석하는 데도 그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할 줄 안다. 예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던 그 시대에는 그들이 알던 세계가 미신과 다신교 등 여러 가지 하등종교로 만연했던 시대였으며, 예수는 사실상 새로운 종교를 선포하고 있는 입장이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섣부른 신학이론을 전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2000년 전 당시와 지구촌이 되어버린 현대와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하기야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지옥 갈(개신교에서는 연옥이 없으니 천국에 못 가면 지옥뿐이다) 충분조건이라면 문제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굳이 우리 조상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기독교인이었는가? 만약 기독교 이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면 모세는 기독교인이거나 아니면 구원받지 못했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으니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천국 가기는 틀린 것이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신구약을 통해 동일한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비록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유태교의 하나님은 분명 같은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으나 유태교인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어도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모두 구원받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성서의 특정 문구를 근거로 해서 이렇게 다른 종파나 종교의 진실성을 함부로 판정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역사는 이 같은 독선적 신앙이 잘못이었음을 여러 가지로 증명해주고 있다. 원천적으로 예수 자신이 이 같은 독선적 신앙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이같이 기독교인으로서 어찌 보면 쓸데없는 말을 길게 논한 것은 현재 우리는 과거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 각양각색의 인종이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섞여 살고 있는 지구촌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기독교와 불교가 양립하는 상태이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사찰의 불상에 밤새 붉은 십자가가 그려지는 사건이 많다는 신문의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같이 각자가 자신의 종교를 중심으로 배타적인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가르치고 계신다. 이웃과 화해 할 줄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명쾌히 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이 말씀은 기독교인끼리만 해당되고 이교도에게는 교회에 모여 송사를 준비해도 좋다는 얘기가 결코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언필칭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웃을 배척하고 단죄한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가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가르치신 그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이다.



3. 평신도의 신앙생활과 규범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이란 천국 가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 많은 목회자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의 목표가 천국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에서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목회자들이 천국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의 나의 삶과 관계가 없다면 신앙생활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이승에서의 삶에 있어서 가치관이나 지표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란 마땅히 신도가 현실생활에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등 가져야 할 가치관과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카톨릭에서 생명의 존엄성이란 가치관을 가지고 낙태를 엄금하는 것은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개신교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규범을 제시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개신교에서 교인에게 "해야 할 일"로 요구하는 것은 "믿음 생활"이고, "해서는 안 될 일"로 요구하는 것은 술, 담배, 제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술, 담배, 제사 등에 대한 목회자들의 태도는 매우 모호하고 이중적이다.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하고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사석이나 속회 같은 작은 모임에서는 "술 좀 하는 거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고, 같은 목회자가 강단에 서면 타락한 사람의 생활로 술과 담배를 지적하곤 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태도가 이렇게 모호하니 교인들의 태도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술, 담배는 교회에서 금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먹지 않는 개신교인을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개신교가 말하는 이런 규범 몇 가지를 가지고 생각해 본다.



1) 믿음 생활

교회가 평신도들에게 요구하는 규범이란 "믿음 생활"이다. 그런데 믿음생활의 실천규범으로 구체적으로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교회 봉사와 헌금에만 집중되어 있다. 집안 일을 제쳐놓다 시피하고 교회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신앙이 매우 좋은 성도라고 목회자들이 칭찬하는 것을 나는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하나님의 사업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논리로.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목회자의 사모도 그렇게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지는 않는다. 속세에 사는 우리 평신도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교회 봉사에만 전념하는 것이 과연 건전한 믿음 생활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오히려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나아가 이웃에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자 평신도의 덕목이라고 나는 믿는다.

B목사는 개신교가 제시하는 규범으로 "성화"가 있지 않느냐고 내게 반문했다. 나는 작년 B목사가 시작한 "제자화 성서공부"를 통해 "성화"라는 개념을 배웠다. 나는 신학적으로 성화가 어떻게 설명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이 제자화 성서공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화의 개념이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거룩하게 성별된 삶"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지지 말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



요컨대 비신자와는 사회생활을 하지말고, 부정한 것은 만지지도 상대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대로라면 필연적으로 속세와 단절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생활은 수도승이나 아미쉬(Amish)의 생활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된다. 19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아미쉬 마을을 관광하고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21세기를 바라보는 현대에 TV조차 보지 않고 오직 신앙에만 정진하는 그들의 삶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생활이란 신앙생활을 위해 속세의 욕심을 뛰어넘은 고결한 생활이다.

그러나 이 같은 종류의 성화의 개념을 우리같이 속세에 사는 평신도들에게 규범으로 제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 이 같은 생활은 우리 같은 평신도는 고사하고 목회자들도 지키지 못하는 기준인 것이다. 목회자들이 이러한 성화의 기준을 지키고자 한다면 자신과 그 가족부터 세속에서 분리시켜야 할 것이다. 왜 자신도 지키지 않는 기준을 평신도에게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제시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성별된 삶이 고결하다고 해서 속세에 사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일반인 즉 평신도 역시 모두 나름대로의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속세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업, 예술, 학문, 정치 등 어떤 가치건 이 사회와 어우러져 사회의 한 부분을 형성하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와 역할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하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것은 이것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 것이다.

나아가서 기성교단은 평신도가 속세에 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신도란 속세에 살기 때문에 바로 평신도인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속세를 떠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한 가운데 살면서 이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평신도의 삶이요, 신앙이요, 복음인 것이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예수께서 우리의 이웃이라고 가르치시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요즈음의 말로 바꾸면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교도, 비신자 혹은 죄인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사마리아인이, 즉 이교도가 우리의 이웃이며, 이들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속세에 살면서 성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비신자와 물리적으로 구분 짓고, 이런 것으로 우리를 성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바리새인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예수께서 오시고, 사시고, 또 죽음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신 곳이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 속의 인간들과 함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함께하고 가난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에 나눠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기독교인만이 모여 자신의 구원에만 몰두하는 곳은 수도원이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성화의 개념은 감리교나 장로교와 같은 기성교단에는 적절치 않는 개념이라고 본다.



2) 제사

제사에 대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1998년 2월에 아버님의 상을 당하여 서울에 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우리나라의 통상의 장례절차란 고인의 빈소를 설치하고 문상을 받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문상 방법은 이 문상 기간에 고인의 빈소를 개별적으로 찾아뵈옵고 인사(절)를 하고 또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아버님이 장로님이셨고 또 평생을 교인으로 사셨으니 문상객 중 상당히 많은 분이 개신교인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의 문상이란 것이 매우 복잡하다. 어떤 사람은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빈소 앞에서 묵념이나 목례를 올리고, 어떤 사람은 꿇어앉아 기도를 하는 등 가지각색이었다. 더욱이 거북한 것은 상당수의 문상객(아마도 목사나 전도사등 교역자들이 아니겠나 생각된다)이 빈소 앞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간단한 예배를 보는 것이다. 예배를 봐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뒤에는 많은 문상객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기도와 찬송 등으로 오랜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매우 민망한 일이었다.

교회에서는 제사를 금하고 있다. 특히 절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으로 이는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살아 계신 부모에게 절하는 것은 괜찮으나 돌아가신 시신이나 영정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제사가 왜 우상숭배인지 나는 동감할 수 없다. 우리가 절하는 것은 비록 부모가 살아 계실 때라도 그 부모의 물질적 육체에 절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그 인격체에 절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돌아가신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이나 영정 그 자체에 절하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신 부모의 인격체에 대한 예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만약 돌아가신 분은 인격체가 아니라면 기독교가 부활을 믿는 종교라고 할 수 있는가? 육신의 죽음은 형식적일 뿐 영혼의 불멸을 믿는 것이 기독교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돌아가신 분은 마치 돌이나 나무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개신교에서도 시신이나 영정 앞에서 예배는 본다. 시신이나 영정을 모시고 예배를 보는 것은 시신이나 영정이 살아 있는 생명체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부모를 모시고 예배를 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 시신이나 영정을 모시고 예배를 보는 것은 괜찮고 절하는 것은 안 된다는 논리를 나는 납득할 수 없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제사를 지내는 분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그러나 이 분들은 마치 죄인처럼 숨어서 제사를 지낸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제사를 금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에 동감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제사문제로 인해 많은 순교자까지 냈던 카톨릭이 오히려 오랜 검토 끝에 제사를 받아들인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제사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전통문화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제사를 금하는 것이 단순히 제사의 중단으로만 결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마치 술, 담배 정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만약 제사가 교리적으로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제사를 금하는 대신 그에 대응하는 규범을 제시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제례나 상례에 관한 한 개신교는 반대만 했지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예배를 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아버님의 장례에서 본 혼선은 그 모든 기독교인들이 모두 교육을 잘못 받아 그런 것인가? 또 만약 그들이 모두 교육을 잘못 받았다면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나 역시 조부님의 기일이면 추모예배를 보고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라도 개종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4. 목사의 의식구조

목사란 매우 어려운 직업이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니 우리는 이들을 존경하여 마지 않는다. 그러니 목사에게는 일반인의 윤리적 기준보다 차원이 높은 윤리적 기준이 더 요구된다는 점은, 일반인은 물론 목사 자신도 모두 이의가 없을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목사에 대한 존경은 목사 스스로가 약속한 십자가의 길을 오롯이 걸을 때 합당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이 과연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지, 교인들에게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서 자신은 교인들이 진 십자가에 걸터앉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목사는 교회의 지도자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어떻게 목회를 하는가에 따라 평신도의 신앙생활은 물론 교회의 진실성마저도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의 의식구조를 몇 가지 면에서 검토해 본다.

1). 목사의 직업윤리

S교회의 담임목사였던 A목사는 80년대 초에 C장로에게서 $100,000를 무이자로 빌어 집을 샀다. 그 집의 은행 융자금은 주택수당으로 교회가 지급했다. 곧 그 집이 A목사의 재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일에 죄의식을 갖는 목사는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오히려 목사에 대한 이와 같은 "대접"은 일반적으로 목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종에 대한 극진한 대접"으로 칭찬받을 사례로 불리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약 학교 교사가 학부형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어 집을 사거나 투자를 한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수년 전 자민련의 이건개 의원은 정덕진 씨에게서 무이자로 수억을 빌어쓴 것이 뇌물로 인정되어 실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사실이 있다. 공직자에게는 뇌물이 될 수 있는 일이, 즉 일반인들에게 지탄받을 일이 어떻게 목사에게는 극히 칭찬받을 일이 되는지 아무리 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목사들의 윤리의식을 잘 드러내 주는 예가 있다. 문민정부가 집권한 지 얼마 후에 신문에 난 일이다. 개신교 목사들이 모여 소득세를 내는 것이 옳은지 안 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세금을 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법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한다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우리나라 개신교의 목사들이 대부분 갑근세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일부 양심있는 목회자들에 의해 이런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얼마 후에 다시 비슷한 일로 가톨릭 사제들의 회의가 있었고 여기서는 이론없이 세금을 낼 것을 결의했다는 기사가 났었다. 또 다시 얼마 후 비슷한 일에 대해 기자들이 조계종 총무원에 문의를 한 바 불교 측의 대답은 승려란 소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승려에게는 재산도 없고 소득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금 낼 일이 있겠는가 하는 대답이었다. 불교에 일부 돈 많은 주지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교단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총무원의 답변은 그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그러나 목사의 경우는 다르다. 신문에 난 것을 보면 그날 목사들은 갑론을박 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세금을 안 내도 된다는 측의 주장은 교회의 돈은 하나님의 것인데 왜 세속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논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설령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여 헌금이 하나님의 돈이라고 해도 그것이 한국은행의 발행권이고, 또 그들이 아무리 성직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에 주소를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아무리 목사들의 양심상 세금을 안 내는 것이 정당하다 해도 일단 실정법에 대한 의무로라도 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라 하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같이 갑론을박 하다 만 것은 왜일까? 솔직히 말해 지금껏 안 내던 세금을 이제 와서 내자니 돈이 아까웠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목사들의 경우, 실제로 일반 직장의 봉급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봉급을 받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현재 성직자라고 하는 우리나라 목사님들의 윤리의식의 현주소다.

우리 주위에 목사의 자제로서 유학을 간 사람들을 많이 본다. 목사의 자제라고 유학하지 말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70년대, 혹은 80년대 초까지 유학을 시도해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듯이 당시 유학이란 것이 어지간한 경제력을 가지더라도 어려운 일이라 일반인은 도무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의 봉급으로 유학을 시킬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한다면 잘못된 일인가? 우리는 공직자들이 많은 재산이 있을 경우, 그들이 어떻게 박봉이라는 공무원 월급으로 그와 같은 재산을 모았는가 하고 의심의 눈으로 보게 마련이다.

지방에서 감독까지 하셨다는 K목사님은 아들이 이곳 북가주에서 사업을 하기 때문에 자주 오신다. 이분은 아들을 유학시켰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의 사업자금을 대 주셨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하신 적이 있는데 설교에서 자기 아들의 사업자금을 충분히 대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는 목회자에 대해 더 좋은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분은 그렇기 때문에 실일조는 최소의 의무이고 그 이상 소득의 20%, 혹은 30% 정도는 헌금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 이분은 골프도 보기 플레이 이상의 수준이다. 아들을 유학시키고, 미국에서 사업을 하도록 아들에게 자금까지 대 주고, 또 한국에서는 아직도 상류층의 운동인 골프를 즐기기 위해 평신도로부터 소득의 20-30%를 헌금으로 거두어들인다고 한다면 좀 지나친 일이 아닌가?

2) 목사의 교만

1996년 A목사는 예배시간에 광고하기를 "담임목사가 매우 바빠 교인을 일일이 심방할 수 없으니 목사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교회 입구에 비치한 목사 면담신청서를 기록하여 면담을 신청해 달라"고 강조했다. A목사는 같은 광고를 그 다음 주, 또 그 다음 주에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교회는 교인이 약 300명 정도였다. 300명 정도의 신도를 가진 교회의 목사는 면담신청서를 작성하여 면담을 요청해야 할 만큼 바쁘고 대단한 분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중략)

일반적으로 목사들은 자신이 교인들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자처하며 상당히 교만한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은 자신이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신도는 목사들의 교육이나 지적 수준이 높아서 목사를 존중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는 자신보다 조금은 더 예수를 닮은 모습을 목사에게서 기대하는 것이다. 목사들은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존경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겸손을 몸소 실천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이 남보다 겸손하지는 못할 망정 교만하다면 이는 예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처사가 되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겸손은 미덕일지 모르나 목사에게 겸손은 사명이다.

목사의 교만은 우리 평신도에게 실망을 넘어 신앙 그 자체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목사 같은 성직이 아닌 초등학교 교사라도 제자들의 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실족케 하려거든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까지 강경히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목사는 교만하게 처신하느니 차라리 목회를 그만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3) 목사들의 세자랑, 줄서기

1994년으로 기억한다. 샌프란시스코 공항 근처에 있는 한 호텔에서 한국의 모교단의 선교대회가 열렸던 적이 있다. A목사는 수 개월 전부터 이 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인들에게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목사가 워낙 중요하게 강조하고 참여를 독려하므로 성가대원은 몇 달 전부터 연습하고, 일부 교직자는 아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이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하루 시간을 내어 여기에 참석했었다. 목사님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한 번쯤 참석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생각해서였다.

대회 내용은 한국의 그 교단에서 세계에 파견된 많은 선교사들과 또 그 교단의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선교사들의 여러 가지 사례나 문제점 등을 발표하고 또 지원을 다짐하는 대회로 일종의 워크샵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 남미의 오지 등으로부터 온 많은 선교사들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교회의 목사들과 교회의 대표들도 많은 교직자와 성도들을 대동하고 대규모로 참석했다.

아무튼 목요일 저녁 이 대회에 참석했던 나는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회는 그 호텔 일층에 있는 연회실 여러 개를 터서 족히 일천여 명 이상이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연회장에서 일 주일 동안 진행되는 것이었다. 한국의 재벌그룹에 간부로서 여러 해 근무했던 나는 회사의 경영관계로 간부직원을 교육하거나 경영지침을 준비하는 대회에 여러 번 참석했던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의 규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관계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같은 대회의 경우 수십만 달러가 소요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대회를 보는 나의 마음은 착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성격의 대회라면 선교 추진의 본거지인 한국에서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 소규모로도 효과적인 대회를 얼마든지 치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 있는 교단이 그들의 대회를 굳이 이곳 미국에 와서 해야 하는가, 또 왜 그 같이 대규모로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대회는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의 세자랑, 돈자랑이었다. 한국의 목사님은 모두 성도들이 정성껏 바치는 헌금으로 부부가 여행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교회의 헌금이 하나님의 돈이라 소득세도 낼 수 없다는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돈을 이렇게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가?

또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곳 미국 현지의 목사들의 태도였다. 엄격히 말하면 한국의 교단과 미국의 교단은 같은 교파라도 별개의 교단이며, 직접적 관계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곳의 여러 목사님들은 헌신적으로 이 대회를 도와주고 특히 A목사 같은 분은 거의 온 교회를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협조를 한 것이다. 돕고, 협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이곳 미국의 이민생활이란 대부분 부부가 맞벌이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 많은 교포가 소규모 소매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시간을 낸다는 일이 쉽지 않다. 왜 생업에 바쁜 교포들을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이같이 많은 사람을 참석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미국의 한인 목사들은 이 "능력 있는" 한국의 목사님들과 교분을 두터이 할 좋을 기회이니 교인들을 동원하여 그들 앞에서 능력발휘를 하는, 말하자면 일종의 줄서기인 것이다. 물론 목사도 직업이니 더러 줄서기가 필요할 수 있겠다고 인간적으로 이해해 주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은 개인적으로 할 일이지 왜 무고한 교인들을 동원하여 들러리를 세우는가?

4) 목사들의 사회적 지위

A목사는 96년 서울에 전통 있는 S교회이 담임목사로 "영전"했다. 그 후 A목사의 부인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는 목사에 대한 대우는 미국보다 나은 것 같으나 목사의 사회적 지위는 미국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한다. A목사의 의식구조가 충분히 짐작가는 대목이다.

목사들 중에 설교를 통해 정치인을 한두 번 비난한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감리교나 장로교나 할 것 없이 개신교의 선거를 보면 세속의 국회의원 선거보다 더한 것 같다. 몇 년 전 서울에서는 교단장의 자리를 놓고 형제 목사가 혈전을 벌인 적이 있다. 이 선거가 돈 선거였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최소한 선거자금에 대한 법이라도 있어 더러 통제라도 되지만 목사는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니까 16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1982년으로 기억) 나의 상관이었던 B전무는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는 지방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B전무가 한탄하는 것은 대 그룹의 전무로서 아버지를 노회장 한번 시켜드릴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내용인 즉 그 아버지가 노회장을 한 번 해보고 싶어하시는데 선거에 당시로 1억 5천만 원 정도의 경비가 드는데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수원에서 1,600만 원으로 25평 아파트를 샀으니까 대략 이 아파트 9채 값이 있어야 노회장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목사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장이 된 후에야 비로소 노회장이 될 수 있었다. 이 B전무의 아버지는 그래도 잘난 아들 덕분에 노회장이 되었지만 다른 노회장이나 감독들도 모두 잘난 아들의 덕택으로 출세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5. 왜곡된 교회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왜곡되어 가고 있다. 기복신앙은 아주 일반화되어 가고 있고, 교회의 기업화는 이미 그 한계를 넘었다는 느낌이다. 교세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마치 제동장치가 고장난 자동차같이 달리기만 한다. 전도나 선교, 혹은 하나님 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는 어떤 행위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일반 사회의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도 나을 것이 없으며 솔직히 말해서 어떤 경우는 교회의 운영이 기업보다 훨씬 비리를 많이 갖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단의 감투에 수억의 돈을 척척 쓰질 않나, 공공연히 교회를 매매하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목사들은 이것도 모두 전도를 위한 것이니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교회가 앞장서서 이렇게 타락하니 교인들이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사님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몸과 같이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윤리적 기준은 그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설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조그만 구멍이 댐을 허물 듯이 교회가 작은 것에 스스로 엄격하지 못하면 결국 교회의 매매와 같은 엄청난 일에도 무감각해지고 마는 것이다. 왜곡된 교회의 모습을 몇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본다.

1) 아전인수격 성경해석

목사들이 곧잘 인용하는 성서 말씀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구절이 있다. 목사들은 이것을 흔히 교회에서는 순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한다. 이 말은 사울이 아말렉족과 그 재산을 다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귀중한 것을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남긴 것에 대해 사무엘이 꾸짖은 말로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제사보다 더 원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즘말로 바꾸자면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예배보다 더 좋아하신다는 말이 되겠다. 복음(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이 교회에서 예배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도 되겠다. 그러나 이 말이 목사들에게는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 생활의 요체라는 의미로 둔갑해 버린다.

B목사는 성경공부시간에 말하기를 "기독교인이 임의로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일 뿐이다. 교인은 마땅히 그럴 돈이 있으면 교회에 바쳐 교회가 구제사업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S교회는 교인이 현재 500명 정도인데 교인이 1500명이 넘는 이곳의 가톨릭 성당보다 2배 이상의 헌금을 거둬들인다. 그런데 실제 구제 사업에 대한 노력은 성당에 훨씬 못 미친다. 이 목사는 다른 자리에서 어떤 교인이 왜 교회가 구제사업에 소극적이냐고 묻자 교회는 복음 전도가 그 주임무이지 구제사업이 주임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복음의 본질에 있고자 노력해도 쉬운 일이 아닐 턴데, 성경 말씀이나 복음을 이렇게 목사들 편한 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 붙이니 교회와 평신도의 신앙이 왜곡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2) 헌금과 기복신앙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교인의 신앙의 의무 내지는 미덕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전서 어디를 보아도 십일조를 하라는 말은 찾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십일조에 대한 신약의 근거로 유일하게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제시하고 있다. 옹색한 설명이다. 이 구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십일조를 지킨 것으로 율법을 모두 지킨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율법에 더 중요한 바 의와 인을 잊어 버린 것을 예수께서 경계하여 꾸짖은 부분이다.

십일조란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요구되던 율법이다. 구약의 율법이라도 성경에 있으니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구약에 있는 그 많은 율법사항 중에 왜 하필 십일조만 지켜야 하는 것일까? 안식일도 지켜야 하고, 돼지고기도 먹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도대체 이런 식으로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복음은 어디 갔는가?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교파는 아니지 않는가?

사실 교회에서는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이 동원되고 있다. 나는 목사님들이 "십일조를 한 번 해 봐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하며 십일조를 권장하는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나는 십일조 잘 해서 재벌이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많은 목사들이 자신은 헌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헌금을 많이 하는 교인을 그만큼 대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편다. 실제 헌금이 권사, 장로 등의 "진급" 심사의 중요한 기준인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에서는 추수감사절 행사가 대단히 크다. 일반적으로 목사님들은 추수감사절을 기독교의 큰 절기로 강조한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단지 미국의 명절일 뿐, 2000년의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유럽 개신교 국가에는 이 행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기야 한국의 개신교가 주로 미국에서 전도되었으니 그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겠지만 왜 하필 미국의 명절을 그토록 지키려고 노력할까? 그 이유는 검사헌금을 걷기 위한 것과 얼마나 무관한 일일까? 본래적 신앙의 의미를 지키고 있는가?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목사님들이 많을 줄 안다. 비록 미국의 명절이더라도 좋은 것을 따른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하고... 그러면 맥추감사절은 왜 있는가? 나는 현재 15년째 미국에 살지만 미국에 맥추감사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맥추감사절이란 것도 있어서 어려운 보릿고개에 또 한번 감사헌금을 거둬들인다. 그러니 감사절이란 감사헌금을 위해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말해도 변명할 말은 없을 것이다. 감사절에 일년 예산의 반이 들어와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목사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없는 자와 나누기를 원하신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논리는 하나님 장사다. 개신교는 가톨릭이 면죄부를 판 것이 빌미가 되어 개혁했다고 하지만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하나님을 통째로 팔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3) 직분

나는 직업상 서울 출장이 잦다. 내가 서울에 갔다오면 목사에게 무슨 선물을 사다 주었느냐고 묻는 교인이 많았다. 얼마 전 C장로님은 나에게 좀더 목사와 좋은 관계를 갖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하신 적이 있다. 그래야 권사로 진급도 되고 교회생활이 원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솔직한 충고였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감리교회에도 소위 집사, 권사, 장로라는 직분이 있다. 그런데 감리교의 원류인 미국 연합감리교회에는 이런 직분이 없다. 왜 본 고장 미국에도 없는 이 같은 제도가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일까? 이는 신분의식이 강한 한국사람의 정서와 교인들을 직분제도를 통해 장악하려는 목사들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대표적인 예라고 본다.

한국사람들은 신분의식이 매우 강하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도 명함만은 커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람이다. 월급보다도 직급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한국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이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도 집사니, 권사니, 장로니 하는 계급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집사가 권사가 되고, 권사가 장로가 되는 것을 진급으로 받아들인다. 기독교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적 뿌리가 짧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교회에서까지 사회적 정서가 연장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목사들은 이런 정서에 적당히 편승하여 교인들의 진급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통해 교인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진급을 원하는 사람은 자연히 목사에게 충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교인들의 경쟁을 유도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목사는 이를 반갑게 이용하는 것이다.

직분의 난맥상은 교포 교회가 더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포들은 별달리 사회적 지위가 없다 보니 교회의 직분에 더 집착하는 것 같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K집사는 부목사가 잘 봤다고 소문이 나더니 이듬해 젊은 나이에 권사가 되고, 또 다른 K집사는 사모가 거듭났다고 몇 달 소문을 내더니 권사가 됐다. S권사는 S교회에 온 지 1년만에 집사도 거치지 않고 바로 권사가 되었다. 이분은 전에 미국감리교회에 계셨기 때문에 집사, 권사가 뭔지도 몰라 내게 그게 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 몇 달 후 권사가 된 것이다. 이분은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다.

돈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한 L씨는 S교회로 온 지 1년만에 부부가 다 한꺼번에 권사로 진급하셨다. K장로는 S교회에 온 지 일 년만에 다른 사람은 20년을 다녀도 되기 힘든 장로가 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K장로는 한 달에 $4,000 정도의 헌금을 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고, 또한 S교회가 특별히 잘못된 것도 아니다. 내가 S교회에 다녔으니 이 교회의 예를 들은 것뿐이다. 다른 교회도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급을 시키니 권사나 장로의 수준도 문제가 된다. K권사는 1992년에 권사가 된 사람인데 1998년 성경공부시간에 말하기를 자기는 기독교의교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솔직한 것은 좋으나 나는 그가 어떤 기준에 의해 권사가 됐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떤 장로님은 하박국을 신약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교회 안에 이와 같은 계급을 만들어 놓고 교인들 상호간에 경쟁을 유도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목사들은 성경이 어떻고 초대교회가 어떻고 하며 이런 직분제도를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려 한다. 그러나 무슨 말로 변명을 하더라도 교인간에 경쟁을 유도하는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교회란 반구조적이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노력을 해야 할 사명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는 신분이나 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소한 교회에서는 이런 사회의 구조 내지는 계급을 부정하고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무릎에 안길 수 있는 곳이 천국임을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도 이 땅에 건물을 짓고 운영되고 있는 세속의 조직 중의 하나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최소한 그 기준이라도 공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인간에 경쟁을 유발하지 않도록 개선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교회 직분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이 엄격히 적용된다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4) 교회의 기업화

오늘날 교회는 도대체 기업인지 교회인지 도저히 구분이 안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곳 북가주에서 발행되는 한국계 신문이나 잡지 등을 보면 교회광고가 큼지막하게 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는 술집 광고와 나란히 있는 교회의 광고를 보면서 착찹한 기분을 아니 느낄 수 없다.

B목사는 S교회에 부임하자 팜플렛을 만들었다. 여기에 보면 인사말 초대합니다와 함께 교회의 사진, 목사의 사진과 약력, 각종 예배시간 안내, 교회 각종 행사의 사진, 약도 등이 총 천연색으로 멋지게 인쇄되어 있다. 일반 기업체의 선전 브로셔와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러니 B목사가 부임하자 왜 로고를 현상 모집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개신교라도 미국교회는 좀 다르다. 나는 1973년 처음으로 미국에 출장 온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교회를 빌어 예배보는 한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미국교회에도 이런 브로셔가 있어 유심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달라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교를 못 간다든가, 가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라든가, 미혼모가 되었다든가 하는 사람에 대한 위로와 찾아달라는 목사의 전화와 주소 등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왜 이런 것은 배우지 못하는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목사들은 이렇게 교회가 기업화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계속 기업화마다 보니 심지어 교회의 매매에도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 K라는 목사가 있는데 80년대 말에 이곳 북가주에 와서 개척교회를 하여 유학을 하다 돌아간 적이 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어 준비를 하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분당에서 교회를 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 교회를 8.000만원에 팔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교회목사는 늦게 목사가 되어 분당에 개척교회를 세워 현재 교인이 70명 정도 되는데, 강단과 의자, 전세금 등 들어간 돈이 약 8,000만원이 되니 이 가격에 넘기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목사는 이 돈으로 유학을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말로 변명을 해도 명백한 교회 매매이다. 한국에서 공공연히 교회가 매매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같은 교회 매매에 대해 교단차원에서 어떤 제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비록 모양새는 좋지 않지만 전도와 선교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자세이다. 살인자도 용서하라는 예수께서 성전 안의 장사꾼을 채찍을 들어 내어쫓지 않으셨던가? 그 당시의 성전의 장사꾼들도 다 제사드리는 성도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교회가 경계해야 할 바에 대한 명백한 교훈이 아니겠는가?

맺는말

개신교는 오늘날 한국의 복음화에 기여한 바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골목골목에 세워진 십자가를 볼 때마다 착찹한 기분을 느낀다. 교회란 올바른 복음 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개신교가 진정 올바른 복음 위에 기초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평신도에게는 신학적 이론이나 교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훌륭한 이론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천국에 대해 설교한다고 하더라도 목사와 교회가 스스로 복음의 원칙적 자세로 돌아가지 않으면, 평신도에게는 오히려 더 큰 실망만을 주게 될 뿐이다. 교회가 말만 예수를 앞세우고 자신은 예수의 길에 서 있지 않다면 사이비 종교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는 중병에 걸린 환자와 같다. 너무 병이 깊어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는 정도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교회가 기업화되고 타락했다면 모든 교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싫든 좋든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잘못되었다면 그 주된 책임은 어차피 목사들의 몫이다. 또 교회를 바로 잡아야 할 책임 역시 목사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그 때로 돌아가서 마음을 비우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오늘 이 순간에도 교회가 바로 복음의 원칙에 충실했는가를 항상 반성하고 돌이켜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나 교회가 하나님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바로 목사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못 가고 남들까지 못가게 천국문을 막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목사가 되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다. 자신의 말대로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일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아닌가?

내가 너무 목사와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교회에는 이재철 목사님과 같이 훌륭한 목회자들도 많다고 나도 믿는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개신교는 큰 흐름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의 수가 감옥 안에 있는 죄수의 수보다 많다고 하여 그 사회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재철 목사님을 나 역시 존경하지마는, 사실 이재철 목사님은 목사라면 당연히 걸어야 할 성직자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즉 이와 같은 분이 특별한 목사가 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며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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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8.17 23:44

    첫댓글 ㅎㅎㅎ 이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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