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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ㅣ 방송인 송해] |
전국노래자랑 18년 영원한 ‘젊은 오빠’ |
매주 일요일 KBS에서 방영하는 ‘전국 노래자랑’에 18년을 하루같이 나와 구수한 입담으로 콩쿠르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있다. 자그마한 키에 작업장에서 금방 나온 사람처럼 검붉게 그을린 얼굴, 바로 방송인 송해다. |
막이 오르면 방송인 송해가 무대에 나와 한 손을 높이 들어 “전국 노래자랑!” 하고 외친다. 이때 야외든 실내든 자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이 그의 선창에 따라 잘 훈련된 아이들처럼 “전국 노래자랑” 하고 복창한다. 이 무대를 이끄는 송해는 관객들에게 능청을 떨며 애교를 부린다. 흔히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까분다고 할 만큼 그는 나이로 상대에게 거리감을 주는 법이 없다. 누구든 그를 편하게 생각하고 쉽게 접근한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출연자가 그의 얼굴을 진흙 범벅으로 만들고 향토음식이라고 고춧가루가 잔뜩 묻은 김장김치를 얼굴에 문질러대도 “앗 따가워.” 이 한 마디로 받아 넘긴다. 그런 그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가 따뜻한 서민의 웃음 한 자락이다.
능청과 애교 넘치는 75세 노인
송해는 올해로 만 75세의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능청과 애교를 고희가 넘은 노인이 노는 모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그는 젊고 매력있다. 어찌 보면 주책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75세라는 나이가 어울려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권위와 관록을 내세우고 더러는 옹고집을 부리며 나이 대접을 받으려는 게 ‘칠십노인’들의 대체적인 정서라면 그의 모습은 철저한 ‘반동’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는 게 매력이다. TV에는 도무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이목구비, 거무스름한 피부에 작은 키, 어눌한 표정. 일견 TV방송과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국노래자랑을 변함없이 진행해왔다.
서민의 애환과 꿈이 실린 이 프로그램은 ‘송해’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벌써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2001년 12월 말까지의 방영 횟수가 1105회에 이르고, MBC TV의 ‘전원일기’와 함께 우리나라 TV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꼽히게 된 밑바탕에는 그의 수더분한 진행솜씨가 가장 큰 자원이 됐다는 데 누구나 동의한다.
이 프로그램이 비결은 무엇일까. 시청자나 관객이 식상하지 않고 변함없이 방송인 송해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답을 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낙원동 골목에 자리잡은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낙원동 136번지 보광빌딩 305호. 유명한 부산초밥집을 옆에 끼고 3층으로 오르자 ‘원로연예인 상록회’라고 쓰인 간판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출입문을 여니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실내를 왔다갔다 부산하게 움직이고, 구석에 있는 테이블 앞에선 TV에서 낯익은 송해가 케이크 조각을 뜯어먹다가 접시를 집어든다. 오후 1시 무렵이니 아마도 점심인 것 같았다.
“주전부리를 좀 했소.”
손으로 입을 쓱 훔쳐내며 “커피 할라우?” 하고 묻는 그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난다. 구김살이 없다는 점뿐만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그의 이미지가 연상되자 웃음부터 나오는 것이다. 자칫 실수를 할까 싶어 필자는 입 가장자리에 힘을 주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천연덕스럽다. 당신의 위엄은 별게 아니라는 듯, 그 방면에는 달통한 경지에 있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필자가 우물거리는 사이 벌써 커피가 왔다.
그와 대화를 나눈 지 얼마나 되었을까. 사무실은 장바닥처럼 바글거렸다. 회원들이 하나 둘씩 오기 시작하더니 오후 2시쯤 되자 왕년의 코미디언 가수 연출자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들었다. 남자 회원들은 익살과 농담을 질퍽하게 풀어놓더니 일상처럼 두 개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마작 패를 돌리기 시작한다. 여성 회원들은 한켠에서 고스톱 판을 벌이고, 다른 한쪽 소파에서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자식들 손자들 얘기로 꽃을 피운다.
남자회원들의 마작판엔 100원짜리 동전이 오고간다. 때로는 1000원짜리 판을 벌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소일거리로 하는 게 대부분. 돈을 딴 사람은 도망갈 생각을 아예 버리고 저녁에 술 살 걱정을 해야 한다. 돈을 딴 사람이 1만~2만원은 수입 잡게 되어 있어서 소주 몇 잔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사진기자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우리도 공직자나 다름 없는데 이런 모양이 나가면 좋지 않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며 정중히 거절한다.
연예인상록회의 회원자격은 60세 이상의 연예활동을 한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다. 회원 중에는 배우 윤인자씨, 가수 이남순 김선영씨가 있고 코미디언으로는 구봉서 배삼룡씨 등이 있다. 이날도 전 MBC 연출자 진필호씨를 비롯해 낯익은 사람들이 꽤 사무실을 찾았다.
“나이가 들수록 옛 친구들이 그리워요. 그래서 그들을 만나고 좋은 일도 해보자고 이런 자리를 만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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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따라오려면 코피 좀 쏟을 걸”
-우선 어떻게 해서 송선생님이 ‘전국 노래자랑’을 18년 동안이나 이끌게 됐는지,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왜 국민 프로그램이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나름대로 진단해주시겠습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빤하죠. 시청자들이 방송을 통해 자기 얼굴, 그러니까 자화상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무대에, 또는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것이죠. 자기가 나와서 까불고 웃고 장난치는 프로그램으로 인식을 하니까 거부감이 전혀 없지요. 전국 노래자랑이 세계에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프로가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본에도 이런 유사한 프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프로그램 따라오려면 코피 좀 쏟을 거요. 하하하.”
‘전국 노래자랑’은 고향소식을 묻혀오는 프로그램이다. 향토적이고, 신토불이 정신이 녹아 있어 한국적 정서의 박람회장이라고도 일컬을 만하다. 또한 한국의 풍속사이며, 서민들의 애환이 서리고 눈물이 젖은 사교장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겐 향수를 달래주는 곳이다. 그 중심에 송해라는 능청스럽고 구수하고, 수더분한 캐릭터가 우뚝 서있는 것이다.
-‘전국 노래자랑’을 언제 시작했죠.
“전국 노래자랑이 처음 방송된 때가 1980년 4월 개편부터일 겁니다. 초기엔 저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984년 4월 프로그램 개편 때부터 참여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만 18년을 진행한 셈이지요. 그동안 PD들은 아마 40여 명이 바뀌었을 거예요. 제가 맡기 전에는 위키리씨와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진행을 맡았는데 모두 중도하차 했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는 데 어떤 기준을 세워서 가십니까.
“처음에는 전국 시·군을 모두 돈다는 단순한 기준으로 출발했지요. 전국 400여 개 시와 군을 한바퀴 도는 데 어림잡아 3년2개월이 걸립니다. 그러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지방자치단체가 많아지고 또 이들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자기네 고장을 홍보하고 싶어하니 최근엔 지자체로부터 요청이 오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그래도 특별한 기준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물론 있죠. 요즘에는 지자체마다 축제를 열어요. 양파축제다, 고구마축제다, 연꽃축제, 나비축제, 반딧불축제 등 지방행사마다 쫓아가죠. 남원 춘향제라든가, 밀양 아랑제, 영월 단오제, 지리산 철쭉제 등 이미 알려진 지방축제도 많지만 요즘들어 새롭게 군마다 자기 고장의 특색을 살린 축제를 열어서 고장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 축제기간에 ‘전국 노래자랑’까지 열리면 금상첨화 아니겠습니까.”
-프로그램의 진행과정을 설명해주십시오.
“일요일 정오뉴스가 끝나고 12시10분부터 시작해 1시10분까지 방송됩니다. 하지만 녹화시간은 두 시간이 넘어요. 예선에 적게는 200명 많게는 2000명이 참가합니다. 인천에서 20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신청했는데, 예선 참가자만으로 강당이 꽉 찰 정도였어요. 예선 참가자 중 본선에 오르는 사람은 겨우 18명입니다. 본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죠. 실력도 갖춘 셈이고요. 본선 진출이 서울법대 합격한 것보다 더 영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선 진출자가 반드시 노래를 잘 불러서 뽑히는 것만은 아니다. 장기가 있다거나 희한한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 무대를 재미있게 끌어가는 사람도 ‘양념거리’로 뽑히는 영광을 얻는다.
“예선은 방송팀만 참가하고 저는 본선에만 나서죠. 하지만 미리 출연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합니다. 어떤 사람이 웃기는 재주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하며, 어떤 사람이 춤 솜씨가 좋은지 미리 공부하지 않고는 진행을 매끄럽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한때는 예선에도 참여했는데 지금은 시간도 없고, 또 예선에서부터 나가면 주가가 떨어질 수도 있지 않나요. 대신 본선 진출자 면면을 미리 입수해서 각자의 장단점, 특출한 점을 철저하게 공부합니다. 그 공부가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선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많겠지요? 이런 것들도 웃음의 소재가 될 것이고요.
“물론 많지요. 그런 재미로 사회를 보고 있는지도 몰라요. 한번 나와서 떨어진 사람이 몰래 변장을 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감쪽같이 수염을 달고 모자를 쓰고 나오면 잘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통과한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일수록 재미가 있거든요. 전국 노래자랑은 노래 잘하는 사람만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사람을 웃기는 재주도 있어야 맛이 우러나고 프로그램이 풍성해지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경우도 있다. 한 노인은 ‘땡’ 하고 종을 울려도 무대에서 나가기를 거부하고 계속 사회자를 물고 늘어졌다. 도리없이 한 번 더 시키게 된다. 그래도 노래의 함량이 떨어져 또 종을 친다. 노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한 번 더 시켜달라고 거듭 생떼를 부린다. 그래서 다시 노래를 시키지만 역시 땡이다. 세 번 땡이니까 딩동댕 합격이 됐다고 위로를 해주고 나서야 노인은 무대에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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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 오빠 사랑해요”
-결례의 말씀 같지만 송선생님도 가끔 과잉액션을 하는 걸 보게 됩니다.
“본의 아니게 ‘오버’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절대로 억지나 과장은 아닙니다. 그들과 어울리면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 그런 연기가 나와요.”
그는 장난기 어린 질문에 이처럼 해명했지만 사실 그가 오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과잉액션조차도 그에겐 자연스럽다.
“여성 출연자들이 ‘송해 오빠 사랑해요’ 하면 나도 깜빡 죽죠. 중학생 출연자가 ‘형’하고 부를 땐 귀싸대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넘어갑니다. 지금까지 최고령 출연자가 95세고, 최연소자는 만 4세입니다. 1세기가 공존하는, 말하자면 한 세기가 한 무대에서 노는 프로가 바로 ‘전국 노래자랑’이올시다. 이런 무대를 끌어간다는 자부심만으로도 이런 농담, 저런 악담을 다 비 맞듯이 맞고 넘어가고 있어요. 그 자체가 재미있고, 이때가 아니면 그런 재미도 맛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화가 나는 일이라든지 참을 수 없는 일도 있을텐데요. 조금 심하다 싶은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참습니까. 아니면 한바탕 벌입니까.
“꾹 참고 넘어가야지 다른 수가 있습니까. 풀어주어야 마음대로 노는데 이렇다고 화를 내고, 저렇다고 시큰둥하면 참가자가 편안치 않죠. 출연자들이 지역 특산물을 갖고 나와서 억지로 먹일 때가 있습니다. 사실 먹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고, 여름철에 비브리오균이 득시글거리는데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다니는 생선을 날것으로 먹이는 경우도 있어요. 이것을 살짝 한 입 먹으라고 하면 될 것을 꾸역꾸역 한 마리를 통째로 입에 쑤셔박듯 넣기도 하고요. 그래도 참고 먹어야죠. 물론 정성을 들이지 않은 음식은 아니지만 출연하느라 정신이 없다보면 생선이 여기저기 방치돼 시들해지고, 그 사이 나쁜 균이 침투해 들어올 수가 있죠.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도리없이 먹어주는 겁니다. 그러나 도가 지나치게 먹는 것으로 장난할 때는 이 사람들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그러나 싶어 솔직히 화가 납니다.”
-그래도 먹는 특산품이 나오면 가장 즐거워하시는 것 같던데요. 악단장이 달라고 사정을 해도 혼자 다 잡수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맛으로 진행한다니까요. 한번은 전라도 김치로 얼굴이 범벅이 된 적이 있어요. 전라도 김치에 고추가 좀 많이 들어갑니까. 금방 담갔다면서 여성 출연자가 먹여주는데 이건 먹이는 게 아니라 제 얼굴에 고추범벅을 하는 거예요. 입에서는 김치를 오물거리고 눈에서는 고춧물이 들어가 눈물이 쏟아지지만 그래도 맛이 있으니까 ‘앗 따가워!’ 하면서도 시원하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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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정서가 담긴 프로그램
송해씨는 대담 도중 ‘전국 노래자랑’은 노래를 부르는 프로만이 아니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우리의 생활과 풍속 습관이 녹아 있어 어느 프로그램보다 한국적 정서가 짙은 프로라고 역설한다.
“이 프로를 진행하면서 고치기 힘든 우리 국민의 습관 하나를 발견했어요. 바로 특정직업에 대한 경시풍조입니다. 그중에 강화도에서의 일이 기억나는군요. 한 출연자가 노래를 구수하게 잘하는데 노래가 끝나고도 무대를 내려가지 않아요. 할 말이 있다는 겁니다. 무슨 할 말이냐니까, 자기 장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장인은 3대가 대장간에서 일을 해온 이 시대 마지막 대장장이인데 마을의 젊은 애들까지 장인을 하대한다는 겁니다.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법에서도 평등주의를 내세운 게 벌써 한 세기가 다 되는데 70대 노인을 대장장이라고 반말로 무시한다는 거예요. 장인이 만든 삽과 호미를 강화도 사람이면 안 쓴 사람이 없는데, 그런 고마움은 모르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멸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서 그 장인어르신 직업을 ‘농기구공장장’으로 이름 지어드렸어요. 아마도 제가 100번은 더 농기구공장장이라고 연호를 받아냈을 겁니다. 방송이 나가고 얼마 후에 그 사위 분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동네 사람들의 대접이 확 달라졌다는 거예요.”
장님이 부른 ‘나그네 설움’
전북 남원에서의 일이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며느리가 노래를 하자 시어머니가 춤을 추었다. 이 광경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저 죽일 년” 하면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망신시켰다고 야단났다. 또 보수적인 지방에선 방송을 보고 송해를 비난하는 항의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그날 일은 미담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무대에 이처럼 같이 나와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고부간의 틈이 메워지는 것을 보면서 방송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 비난하던 것도 아름답게 비치는 것입니다. 세태 변화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너무도 고루한 인식 속에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했다는 반성을 해야 해요. 이제는 고부가 같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출연자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걸로 보아 고부갈등은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일화들도 많겠지만 감동적인 장면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몇 년 전 천하장사대회 때의 일로 기억합니다. 천하장사대회는 신정, 설이나 추석 명절 때 열죠. 그날은 새해 대회였는데 장님이 출연했어요. 63세 먹은 노인이었는데 모두들 정초부터 꺼림칙하다는 표정이에요. 하긴 아직도 택시기사들이 아침에 개를 안은 여자를 안태운다든지, 첫새벽부터 여자를 보면 재수가 없다든지 하는 못된 속설 때문에 여성은 이유 없이 차별받고, 이를 지키는 사람도 터무니없이 고민에 빠지는 일이 많은 세상이죠. 어쨌든 스태프들이나 대회 주최측도 꺼림칙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런 그릇된 고정관념을 깰 마음으로 억지로 출연시켰어요. 체육관 무대는 계단을 20개쯤 올라와야 하는데 딸의 부축을 받고 올라오더군요. 그날 장님 노인이 부른 노래는 ‘나그네 설움’이었어요. 그 노래가 어찌나 감동적이었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군요. 장님 노인이 살아온 생애가 온통 이런 설움이었구나, 그 설움을 이 노래 속에 녹여놓았구나, 하는 마음에 객석도 감동했습니다. 노래를 잘해서 뿐만 아니라 잘못된 속설에 갇혀서 안그래도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는 자괴감이랄까, 안쓰러움이랄까, 그런 반성들을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노인더러 노래 한 곡을 더 부르도록 했습니다. 두번째 노래가 끝나자 1만여 관객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요. 저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요.”
그 노인은 17세 때 사고로 실명을 했는데 처음부터 보지 못한 경우보다 더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노래로 자신의 운명을 달래며 살아왔다는 얘기도 했다. 이런 얘기를 끌어내주면서 정월 초하룻날 장님 출연자가 출연해도 재수없는 일 하나 없다는 걸 증명했다. 그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아마 지금 그 노인은 일흔이 넘었겠지만 그후부터는 장애인이 스스럼없이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휠체어를 탄 사람, 팔이 없는 장애인이 출연해 몸 성한 사람들과 당당히 겨루지요.”
-사회를 맡으면서 힘들고 어려운 때도 있을 법한데요.
“뭐니뭐니해도 장거리 차를 탈 때죠. 물론 지금 전국적으로 5시간이면 안 닿는 데가 없지만 오지에서 열 때는 10시간도 넘게 차를 타는 경우도 있지요. 방송사 버스로 가는데 강원도 속초에서 경남 남해로 떠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러다보면 몸이 지치게 마련이죠.”
-전국 어디든지 현지에 가면 그 고장 특유의 볼거리와 풍성한 먹을거리가 있지요.
“물론 있지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특산품 때문에 무대에서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먹을거리를 준답시고 양쪽에서 입을 벌리고…. 어거지로 먹는 수난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여성용 스타킹을 얼굴에 뒤집어씌워서 숨도 못 쉬고 헐떡거린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 자체를 즐기는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미리 콘티를 짜 가지고 하는 ‘3분 무대’랄까, 그런 것은 아닙니까.
“절대로 미리 짜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즐겁다보니 그런 기찬 장면들이 연출되지요. 그래서 즐거운 겁니다. 출연자와 관객들이 한 덩어리가 돼야 하니까 제 자신이 먼저 그것을 즐기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무대를 신명나게 이끌어가는 비결이 따로 있습니까.
“다른 게 없어요. 우선 내가 편하게 비쳐져야죠. 사회자가 까불지 않으면 절대로 출연자가 마음 놓고 놀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녹화 전에 반드시 그 고장 시장을 찾아갑니다. 말하자면 서민들이 번잡하게 모여드는 시장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양말도 사고, 국밥도 사먹고 막걸리도 마시면서 미리 사람들에게 예고를 하지요. ‘몇시 어느 장소에서 전국 노래자랑이 있으니 그리로 오세요’하고요. 그리고 그런 곳에서 숨은 인재를 찾아내 무대에 끌어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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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 해안지방이 가장 화끈”
이런 적도 있었다. 시장통에서 만난 채소장사 아주머니의 노래 솜씨가 보통을 넘었다. 다만 전국 노래자랑 무대를 이용할 방법을 몰랐거나, 먹고사는 데 바빠서 출연 생각을 못한 경우인데 그는 그 아주머니를 본선 녹화 때 사회자 눈에 잘 비치는 곳에 서있도록 했다. 그리고 객석에서 그 아주머니를 찾아내 즉석에서 노래를 시켰다. 그러나 긴장한 탓으로 자기 실력의 10분의 1도 발휘하지 못하고 불합격 판정을 받고 말았다. 그는 이처럼 예선을 거치지 않고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막강한 ‘권력’도 갖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다닌 곳 중에서 무대가 가장 멋있고 화끈했던 곳은 어딥니까.
“그야 영호남이죠. 특히 남쪽 바닷가 쪽이 화끈합니다. 신바람 나죠. 시켜서도 아닌데 저절로 춤추고 구성지게 노랫가락을 뽑고, 정말 맛있게 놉니다. 맛깔스럽게 놀아요. 뒤로 빼는 법도 없고, 마당만 제공하면 우리를 더 웃겨요. 내가 사람을 웃기는 직업으로 평생 먹고 살아왔는데 그들이 바로 내 스승 같아요. 이러다 내 밥줄 끊을 거냐고 항의할 정도로 잘 놉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 지방의 특산품도 많이 선물 받으셨겠지요? 그걸로 사설박물관을 차리면 어떨까요.
“물론 많이 받지요. 목포 세발낙지, 진영 단감… 이런 걸로는 박물관을 차릴 수 없으니까 당장 먹어야죠. 기억에 남는 토산품으로 토종닭을 들 수 있습니다. 전남 함평에서 노래자랑을 하는데 한 출연자가 수탉을 갖고 올라왔어요. 한번 들어보니 묵직해요. 조금 과장하면 송아지 한 마리 무게는 될 거예요. 이놈이 얼마나 힘이 세던지 내가 끌려 다녔다니까요. 강원도 정선에서는 백사슴을 선물로 받았어요. 잡아먹을 수도 없고…. 백사슴은 영물이라고 하는데 몸 보신한다고 잡아먹었다가 혼나면 어쩌나 해서 주인장에게 억지로 돌려주고 온 적도 있습니다. 새끼까지 쳐서 가져가겠다고 했으니까 지금 그놈이 새끼를 쳤다면 나는 상당한 부자가 되어 있을 겁니다.”
두 발, 네 발 달린 짐승 중 무대에 올라오지 않은 것이 없다. 크게는 타조에서 새끼 호랑이, 노루, 참새, 뻐꾸기, 염소, 수달, 달팽이까지 올라온다. 이런 짐승들도 전국 노래자랑의 재미를 아는지 간드러지게 울부짖고 뛰논다. 말하자면 짐승이든 사람이든 이 프로에는 누구나 출연자격이 있는 셈인데, 짐승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출연자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뭐니뭐니해도 김수희의 ‘남행열차’지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한 현철의 ‘내 마음 별과 같이’도 국민적 애창곡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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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가 최고다”
-‘전국 노래자랑’을 보면 대체로 전통가요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제작방향에 따른 겁니까. 아니면 출연자나 관객들과 호흡을 맞춰서 그런 제작 멘탈(mental)을 유지하는 것인지요.
“트로트는 우리 것이지요. 전국 노래자랑은 가장 한국적인 프로그램입니다. 나이가 젊거나 늙었거나 트로트에 다들 젖어 있어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랩이다 뭐다 해서 흥얼거리지만 세 곡만 부르고 나면 질리기 시작해요. 다시 트로트로 돌아오고 말아요. 트로트는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국민가요 하면 트로트를 연상하게끔 돼 있어요. 누구나 쉽게 부르고 또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으니까요. 트로트를 음악 중에서도 뒤처진 것으로 폄하하는 경우를 더러 보는데 음악에 천한 것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음악이란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 괜히 서구음악에 젖어서 세련된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트로트는 왜풍이고 낡았다고 하는데 우리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음악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입상자 중에서 생각나는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을 소개해주시죠.
“인기상 장려상 우수상 최우수상을 주고, 월 최우수상, 상반기 최우수상 하반기 최우수상, 연말 최우수상, 이런 식으로 입상자를 선발합니다. 입상자 중에는 장미화가 있어요. 아마 장미화가 노래자랑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또 가수 오은정 오세근도 있습니다. 이중 오세근은 인간승리감이었죠. 부천에서 출연을 했는데 가수가 되기 전에 아내가 도망을 가고 비참한 밑바닥 인생을 살았어요. 그런데 전국노래자랑에서 입상한 뒤부터 사정이 좋아졌습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의 현진우, 개그활동으로 전업한 조영구도 알고보면 노래자랑 출신이죠. 김미성도 있는데 ‘울렁증’이 있어서 코미디로 전업을 시켰죠”
-노래자랑의 심사기준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물론 심사기준은 엄격합니다. 그리고 나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내 심사 기준도 있다는 겁니다.”
그는 노래의 가창력 음정 박자 등을 따지는 것은 기본이지만 재미가 있어야 하고 특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되풀이 강조한다.
-‘전국 노래자랑’을 통해서도 우리의 가요사를 읽을 수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트로트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현미 김지애 등의 노래가 많이 불렸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이른바 숨가쁜 신세대 노래가 나오는데 나 역시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신세대들도 이런 노래를 세 곡 이상 부르지 못해요. 결국 트로트로 돌아와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그들 역시 가장 편한 트로트로 돌아오고 말죠.”
시청자들은 때때로 송해씨가 악단원의 색소폰을 빌려 멋드러지게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해 ‘전국 노래자랑’ 특집 프로에서도 그는 색소폰으로 ‘오 대니보이’를 완벽하게 연주, 언제 저런 실력을 길렀나 하고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는 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기악을 전공한 음악학도다.
송해씨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8·15 해방 이후 해주 음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도립악단에 취업했고, 얼마 뒤에는 국립극단 단원으로 발탁된다. 4개 이동 예술대에 편입돼 북한 전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이때 무대를 진행하는 방식을 배운 셈이다. 이 경험이 큰 자산이 되어 오늘날까지 무대에 서는 동력이 된 것이다.
그는 이남으로 피란오면서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3년8개월 동안 군예대에 편성돼 전후방 사병을 위한 위문공연을 다녔다. 사회를 보고 노래도 하고 악기도 다루면서 자신의 끼를 맘껏 펼친 것이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창공악극단에 입단한다. 주로 지방공연을 다니는 극단이었는데 여기서도 역시 사회자와 가수, 악단원으로 활약했다. 방송 입문은 1960년대 초 동아방송에 출연하면서부터. 라디오의 전성시대였던 1960년대, 그는 동아방송의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스무고개’와 ‘재치문답’에 출연, 동료 박시명씨와 콤비를 이뤄 코미디를 한 꼭지씩 했다.
“스무고개에는 저명한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 등이 나왔어요. 이분들의 재치와 지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우리는 막간을 이용해 코미디 한 꼭지를 했죠.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동아방송 교통프로인 ‘나는 모범운전사’를 17년 동안 진행했습니다.”
이 프로를 진행하면서 방송의 위력을 새삼 느낀 때가 있다. ‘나는 모범운전사’ 시그널 뮤직을 불루벨스가 불렀는데 방송이 나간 이틀 후 무교동 낙지집에 갔더니 젊은 손님들이 술을 마시며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파의 위력밖에는 생각이 안납디다. 라디오가 국민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던 때의 일입니다만, 그래서 우리도 자부심이 대단했죠.”
텔레비전으로 넘어간 것은 1960년대 후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면서 동시에 KBS TV의 광일쇼에 나가면서다. 당시에는 일동제약의 ‘일동 스포츠’ 광일제약 제공의 ‘광일쇼’ 등 광고를 내는 회사의 이름을 따서 프로그램 이름으로 붙였는데 그는 광일쇼에서 콩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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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장 큰 재산
송씨는 첫 프로그램과 출연인연이 많다. MBC TV의 ‘웃겨보세요’의 첫 공개녹화 방영 때도 출연해 한몫 단단히 했다.
1970년대 들어서 TBC가 개국을 하고, 그는 전매특허랄 수 있는 ‘가로수를 누비며’ 등 교통 관련 방송을 시작했다. 그는 평생을 한번도 쉬지 않고 야외공개무대나 전파 영상매체에 출연해왔다. 일을 쉬겠다고 하면 또 요청이 오고, 거절할 수 없어 진행을 맡다보면 어느새 프로는 안정권에 들어서고, 시민의 다정한 이웃으로서 인기 프로가 되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
“흔히들 그러지요. 나이 50만 되어도 은퇴를 하는데 송선생님은 그 나이 들어서까지 현역에서 맹활약중이니 무슨 비결이 있냐고 물어요. 그럴 때마다 ‘나의 총재산은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대답하죠. 사실 사람을 많이 아는 것만큼부자가 따로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과 친하다는 게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윗사람과 친하기보다는 현역의 젊은이들과 더 가까이 지내왔어요. 그러다보니 잊지 않고 찾아줍디다.”
생김새 대로 누구든지 좋아하고, 또 누구에게든 편안하게 대하다보니 저절로 사람이 모이더라는 것이다.
“현대그룹 창업자이신 아산 정주영 회장과 각별히 지냈어요. 그분이 어느 날 그래요. 자동차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 차 못쓰겠더라’고 몇몇 사람이 나쁘게 말하면 회사가 멍들고, 그런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르면 회사가 망하게 된다고요.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오해가 생긴다는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사귀면 이쪽의 사정도 알리게 되고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한국사회는 특히 인연의 사회고, 관계의 사회 아닙니까.”
송씨는 사람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사람을 사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가 먼저 상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지요. 그런 자세와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는 유명한 사람만 찾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실무자와 가까이 지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이 인간적으로든 비즈니스든 좋은 투자가 된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인연을 맺은 MBC TV PD 출신 진필호씨와 평생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만,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가 진행하는 프로 중에 ‘그리운 노래대전’이 있었어요. 그런데 단역까지 위에서 관여를 하는 거예요. 담당 PD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뭐 이런 경우가 있냐는 생각이 들어 프로의 한 코너물인 주택복권 추첨 생방송 시간에 ‘사정상 이 프로를 더 이상 맡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버렸습니다. 회사가 시끌벅적했죠. 프로그램 개편 때도 아닌데, 또 그런 멘트를 할 시간도 아닌데 왜 저러나 하고 요란법석이 났죠.”
그같은 항의 멘트로 본의 아니게 송씨는 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막상 잘리고나서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친구를 응원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가슴 뿌듯하게 생각한단다. 남자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영광의 훈장이지 밑지는 투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을 아는 것이 좋은 장사라는 뜻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거기에는 여성도 포함됩니까. 전국을 돌면서 여성과도 가깝게 사귈 기회가 많았을텐데요.
“하하하. 단 한 건도 없습니다. 너무 친하면 그런 것 없어요. 시골 오라버니 삼촌 형님으로 통하는데 그런 염문이 있겠습니까.”
그는 ‘전국 노래자랑’ 녹화가 끝나면 동료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피로를 푼다. 이렇게 동료들과 함께 즐기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염문 운운하는 일은 절대로 생길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즐겨 부르는 노래는 ‘망향가’ ‘아주까리 등불’ ‘내 마음 별과 같이’라고 한다.
-노래방이나 술집에 가다보면 짓궂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을텐데요. 그런 경우 어떻게 처신합니까.
“같이 어울리죠. 하지만 정도가 지나친 경우가 있어요. 자기들 자리에 와서 한잔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한잔 받아먹고 한바탕 즐기는데 또 술을 주는 거예요. 그들은 반갑다고 주지만 받아먹는 입장에서는 고역이죠. 나는 한 사람이지만 그들은 너댓 명이 돼서 각자 한잔씩 건네는 술을 마시다보면 소주 한 병이 거뜬히 비워져요. 그래서 사양을 하면 ‘언제부터 컸냐’는 식으로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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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돌며 공연할 터”
-그런 때 어떻게 하십니까. 싸워본 적이 있습니까.
“싸우기는요.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고 말죠. 나를 안다는 표현을 그렇게도 하는구나 생각하고 더 곰살맞게 굴고 말죠. 그렇게 해서 내 열렬한 팬을 하나 더 확보하는 것이지요. 순간적으로 화가 불쑥 치밀 때가 있지만 애써 참아요. ‘저런 분들 때문에 내가 컸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달랩니다.”
명사회자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코미디언 출신이다. 남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생계를 꾸리는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남보다 편안하고 웃음이 많기 때문에 웃음을 더 많이 제조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도 뼈까지 파고드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때가 있었다. 1987년 22세 청년으로 자란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을 때다.
“그때 내가 ‘가로수를 누비며’ 교통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내 아들이 교통사고로 저세상으로 가버렸어요. 그길로 ‘가로수를 누비며’를 중단했지요. 교통사고 줄이자고 그토록 호소했는데 아들이 교통사고의 희생자가 돼버리니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는 생각 등 만감이 교차해서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었어요.”
한동안 집안에서도 웃음을 잃었지만 아내 석옥이(70)씨와 두 딸이 먼저 슬픔을 딛고 일어서 자신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 면에서 가족이 고맙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이 따로 있습니까.
“건강을 유지한다고 헬스클럽을 다니고 골프치는 사람들 마음을 모르겠어요. 나는 지하철을 8년 동안 타고 다니는데 지하철역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운동이 되는 것이 없어요. 이 좋은 운동기구를 내팽개치고 비싼 돈 들여서 운동을 하는 세태를 이해할 수 없다니까요. 그리고 음식을 잘 먹는 거예요. 나는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면 먼저 주방에 들러요. 주방에다 대고 왁자하게 인사하면 나오는 음식이 달라져요. 비싼 음식이 아니라도 맛있는 것이 나오죠. 이게 내 건강 비법이오.”
종교는 없지만 사무실 한쪽 벽면에 ‘佛心’이라는 편액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와 인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아시다시피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북한 전역을 돌며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젊어서 북한 전역을 돌며 공연하면서 사회 솜씨가 늘었고, 그것이 재산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 일로 먹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듯이 결 부분에 도달한 만큼 고향땅을 돌면서 인생을 마무리해야지요. 그동안 거둔 성과들을 고향에 보고하고 한없이 우리 노래를 부르면서 생을 정리하는 것이 내 마지막 소망이고 꿈입니다. 그것이 또 나를 평생 밥 벌어먹게 한 고향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송해씨는 경기 파주시에 있는 정원요양원과 결연해 그곳에 있는 치매노인들을 돕는다. 정원요양원에는 작고한 원로배우 출신 복혜숙씨의 동생 복원규씨가 있고, 만담가 출신의 김윤심씨 등이 돌봄을 받고 있다. 이들은 주변에 가족 하나 없는 무연고자들. 그래서 노년이 더욱 쓸쓸해 자신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약관의 나이에 시작한 직업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계속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 그 자체로서 성공한 사람이다. 거기에 서민의 따뜻한 캐릭터로 만인의 가슴에 살아 있다면 ‘작은 신화’의 주인공으로 평가해도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땅딸막하고 함부로 퍼져버린 얼굴의 주인공 송해씨는 그래서 더 위대해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