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을 버리는 것이 불교의 시작이며 끝- -상을 갖고 있으면 나를 바로볼수 없어- -자신을 겸손하게 내려놓는 것이 하심-
난 평생 내 몸 안 돌보고 살았어. 여기 대둔산 태고사에 와서 50년 가까이 불사만 하고 살았거든. 밤이 오면 밤인가 보다, 또 낮이 되면 낮인가 보다 하며 그저 일만 하고 산거지. 올해로 88세 미수라. 낫살 먹어 노스님이라고 찾아 오는 불자들이 궁금한가 봐. 왜 내가 일만 하는지. 뭐라더라, 나보고 ‘일하는 태고스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더라구.
사실 50년 불사라고 생각해 봐. 그리고 아직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사라. 원래 이렇게 크게 계속된다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 하나 하나 하다보니 또 하나를 하게 되고 다시 또 할 것이 생기는 거야. 그렇게 해온게 반세기를 끌고 온거지.
그리고 불사를 하면서 설계도니 그런 것 없이 해 왔어.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곧 설계도고 공사 진행표니까. 내 머리 속에서 불사가 훤해. 가만히 있어도 쉴 새 없이 무엇이 필요하겠구나, 나무를 또 기와를 얼만큼 사 두어야겠구나 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쏟아내거든. 그러니까 마음으로 절을 짓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게야. 그리고 시줏돈이 모아지면 그 길로 자재를 구입해 두고 결국 그것이 이 어려운 경제난리 속에서도 그나마 어렵지 않게 공사를 진척시킬 수 있었던 게지.
내가 이렇게 불사라는 이름으로 일을 화두삼아 사는 것은 한마디로 도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라구. 즉, 도인의 인연불사를 하는 것이야. 이 가파른 산자락에 방사를 짓고 불사를 일으키는 것은 후대 사람이 편히 공부하고 수행하도록 터를 닦아두는 것이거든. 도인이 나오려면 여건이 성숙되는 인연이 기본인게지.
생각해 보라구. 땅을 물려주면 땅은 뺏기기도 하고 팔아 없어지기도 하지. 그러나 공부하는 도량을 세워놓으면 절대 없어지진 않거든. 설사 스님이건 재가자건, 수행하는 이가 적고 또 없어진다 하더라도 도량만큼은 길이 보전된다고 보는 거지. 그리고 우리절 주위로 뺑 둘러 잣나무를 심었어. 6.25전쟁직후 마땅히 부처님께 마지올릴 것도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구. 그래 생각한 것이 잣나무를 심어 쌀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
1년에 평균 1백주씩 30년 넘게 심었으니 전체로는 5천주 이상 될 것이야. 절 뒤로 저 산자락을 뺑 둘러쌌으니…시주 들어오면 어떻게 해서든지 잣나무를 사서 재빠르게 심고 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산짐승들에게 먹이로 시주하고 있지. 열매가 익기도 전에 어느새 찾아와 다 따먹어 버리거든. 단 한 번도 수확을 해보지 못했어. 어쨌든 그렇게 나무를 열심히 심었던 것도 좋은 도량에 먹을 것이 끊임없이 대줄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
나는 반드시 우리 세기에 도인이 나와야 한다고 믿고 있고 또 기대하고 있어. 내가 출가해 참선수행자가 되고자 했지만 인연이 닿지않아 평생 일하는 수행을 해 왔어. 지금 생각해 보면, 도인을 배출하는 도량을 일으키는 것으로 내 금생의 역할에 충실하는 거야. 내 수행길에 대해 단 한번도, 단 한 순간도 후회하거나 회한이 들거나 한 적이 없지. 나는 이 도량을 통해 도인이 나올 것이라고 믿거든.
13살에 지중한 전생의 인연으로 출가를 했어.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살면서도 그저 수도하려는 생각 뿐이었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마음 깊이에 도인(道人) 만나기를 발원했던 것 같아. 어쨌든 동진출가한 것인데 그때는 집을 나서 백두산으로 올라갈 생각이었지.
그런데 금강산 마하연에 발길이 닿는 순간 그 풍광에 반해 눌러 앉았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고 전에 내가 살았던 곳같아, 한마디로 바로 이곳이 내 수행터구나 싶더라구. 게다가 거기에 도력높은 수월스님이 계시다니 얼마나 좋았던지. 그렇지만 수월스님은 영영 뵙지 못하고 스님의 상좌이신 묵언스님을 은사로 그곳에서 출가했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할아버지 스님인 수월스님도 묵묵히 백장스님의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이라는 청규에 엄격하셨고 아버지이신 은사 묵언스님도 무섭게 일하셨어.
수월스님께서는 출가하시기 전에 남의 집 머슴을 사시는데, 몇날 며칠을 물레방아를 찧었나 봐. 밤에 잠도 못주무시고, 아니 안 주무셨겠지, 물레방아를 찧으셨던거야. 그러니 얼마나 졸리셨겠어? 어느날 집 주인이 보았다는데 큰스님께서 한발은 틀어서 방아에 올려놓고 조시는데, 방아공이가 위에서 떨어지질 않고 그대로 허공에 멈춰 있었다는 게야. 주인이 얼마나 놀랐겠냐구. 그후로는 도인을 잘몰라봤다고 늘상 얘기했다더군.
마찬가지로 나도 출가한 이후 그저 일하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 정도로 열심히 일만 했어. 그러니까 어찌보면 수월스님의 한 가풍이다 싶지. 금오 큰스님께 들은 얘긴데 북간도로 수월스님을 친견하러 가셨는데 신도가 많이 와서 방이 꽉 찼는데 수월스님은 그냥 나가 일만하시더래.
내 은사스님은 또 어느 정도이신가 하면, 평생 말이 없으신 분이셨지. 묵묵히 백장청규 정신으로 살아오신 셈이지. 오죽하면 법명이 묵언스님이셨겠냐구. 은사스님은 내게 그저 말없이 일하면서 수행하라고 몸소 실천해 보이시며 가르치셨지. 그 가르침대로 산 것이 지금까지야.
금강산에서 살때는 두루 사찰을 돌아다닌 적도 있었어. 신계사 유점사에서 몇 철씩 나기도 했고, 묘향산 법왕사에서도 지냈지.
마하연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면서 서울로 내려왔어. 당시 하동산스님을 모시고 살았지. 그러다가 몇 달후 동산스님은 범어사로 내려가시고 나는 다시 마하연으로 갔어. 이미 공산화된 절은 사중 땅이고 뭐고 모두 당에서 압수해 빼앗아갔더라구. 그렇게 몇 달을 버티며 수행했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싶더군.
지금만 해도 그래. 뭐 우리가 금강산 유람을 갈수 있다며 떠들고 법석을 부리는 모양인데 이미 내용적으로 폐사가 된 곳에, 그것도 산다면 몰라도 눈으로 잠깐 봐서 뭘하겠냐 싶단 말이지. 살 수 없는 곳이기에 큰 의미가 없는 거야.
해방후 도저히 마하연서 살 수 없어 그길로 남쪽으로 내려와 몇해동안 해인사 범어사 칠불암 강원도 등지로 선방에 다니기도 했지. 그러나 인연이 따로 있어. 바로 여기 태고사에 와 보고는 처음에 깜짝 놀랐지. 여기가 행여 금강산 자락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 우람하고 오밀조밀 이룬 산세는 마하연과 너무 흡사했어.
그래서 정착하게 됐지. 사실 오갈 데도 없었고. 그때는 아직 정화전이라 대처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머슴처럼 일만 하고 살기 시작했어. 일제때 우리 불교정신을 말살시키려고 왜색불교를 강요할 때 스님들을 무리하게 취처하게 했을 때니까. 당시 비구들은 대처승들이 관리하고 있는 사찰에 방부허락을 받을 수 없어 탁발하며 토굴로 전전하는 경우가 많았지. 그나마 나는 여기서 방부들이고 살던 중인데 6·25전쟁이 터진거야. 그때 그 난리통에 사실 죽을 목숨인데… 부처님 덕분에 이렇게 산 것이지.
1·4후퇴때 인민군이 들어와서 당시 그렇게 우람했던 태고사를 죄 태웠어. 본당과 산신각만 덩그라니 남았지. 그후 태고사는 정화됐고 첫 주지로 내가 들어와 지금까지 산거야. 난리통에 죽을 뻔했던 내가 다시 살게된 것은 순전히 부처님 덕분이고 그 은혜를 갚는 일이 제대로 도량을 정비하는 것 아니겠어.
우리가 부처님 같이는 못하더라도 천만분의 일이라도 같이 나누기 위해서는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해. 삿된 것이 많은 세상일수록 정법을 지키고 검약하려는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거든. 어디 그 뿐인가. 마음자리를 살펴야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고 눈이나 귀가 보고 듣는 것은 아니란 거야. 내 마음 가운데 주인공이 있지만 그걸 몰라, 캄캄해. 귀로 들어도 모르니 귀도둑, 음식을 먹으면서도 모르니 혀도둑, 냄새를 맡고도 모르니 코도둑 아니냐구. 그래서 도인이 안나오고 도둑만 많아.
우리가 한마음으로 철저하게 신심있고 원력을 세우면 부처님이 다 도와주시지. 무슨 고통이 따르더라고 바른 생각, 바른 일로 밀고 가면 반드시 그 끝이 있다는 말이지. 고집으로 가면 그 결과는 불보듯 뻔히 나빠지거든. 그리고 기도는 일념으로 해야 해. 한마음으로 해야 성취될 수 있다구.
특히, 지혜있는 사람은 쌀 물 나무로 밥을 짓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모래로 평생을 밥을 지으려 하지만 절대로 밥이 되지 않잖아. 지혜로 바른 일 하게되면 나라도 살고 중생도 다 좋게 된다 이 말이지.
중생사, 나라일 모든 것이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게야. 지금 여러 가지로 어렵다고 아우성들이고 실제 고통속에서 보내는 이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의 공업(共業)이지. 검소하게 살지 못하고 남을 돕지 않아서 오는 과보인 셈이지. 나라든 개인이든 복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는 법이야.
요즘 사람들 일하기 싫어하고 어떻게서든 편하려고 기를 쓰거든. 호강하고 싶은 마음들로 가득차 있는데 그런 마음들이 탐심 진심 치심으로 작용해 나타나고 결국에는 수행과는 전혀 먼 생활을 하게 하는 게야. 열심히 일해 봐. 탐진치 3독심이 눈녹듯 사라지고 온갖 번뇌를 여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구. 많은 잡생각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지. 그저 일에 집중해서 온 정성을 모두어 일해보라는 말이지.
그러다보면 상(相)내는 마음이 사라져, 부지불식간에. 상을 버리는 것이 불교의 처음이요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내가 있다’는 헛된 집착 그것이 상인데 그 상으로 3독심이 생기고 그 3독심으로 무수한 번뇌가 싹트는 거야. 그러니까 하심(下心)하는 것을 비굴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돼. 불자는 부처님을 존경하고 믿고 내 마음을 겸손하게 내려놓는 자세를 지녀야 하지.
상을 가지면 나를 바로 보지 못해. 아심을 버리지 못하면 집착이 있게 되고 다른 큰 것을 볼 수 없다는 거지. 아상을 뗀 사람은 더 큰 세계를 볼수 있지만, 아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며 참다운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거든. 세상을 우습게 보지 말고 남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늘 겸손하고 하심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해야 해.
상을 가진 사람은 자비스러울 수가 없고 남을 위해 행동할 수가 없단 말이야. 여럿이 더불어 살아가는 대중생활에 원만할 수가 없거든. 나를 주장하는 까닭에 모가 나게 마련이지.
그런데 상을 떼는 일이란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세.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물러설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을 두고 화두로 삼으며 정진하고 수행해야 하거든.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 진정한 자신을 봐야 해.
그리고 평생을 공부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사는 보살행을 펴라구. 사람몸 받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젠 다들 알잖아, 세상이 물질이 좋아진만큼 공부여건도 나아진 편이니, 부지런히 공부들 하란 말이지. 말(言)을 앞세우지 말고 행(行)을 우선으로 여겨야 해. 말은 아무리 지껄여도 쓸데 없는 거야. 할 말만 해야지, 공부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 나의 스승이신 묵언스님은 일생토록 말씀이 없으셨지. 금강산 마하연의 암자인 만해암에서 벽장만 쳐다보고 앉아서 묵언하셨거든. 그렇게 금강산 도인으로 알려진 우리 스님을 15년간 시봉했지.
나는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요,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땀흘려 몇푼 모이면 잣나무하나 심고 또 하나 정성들여 심으면서 불사를 하고 있지. 도량짓는 불사도 마찬가지야. 축대 하나 쌓고 나서 다시 축대를 또 올리고 해서 지금까지 온게야. 불사는 지극정성으로 해야 해. 그런데 요즘 보면 절 짓는 불사나 부처님 조성하는 불사나 너무나 급하고 성의없이 하는 거나 아닌지 우려가 많이 돼. 어마어마하게 크게 짓는데 그게 몇년도 채 안 걸려. 외양만 크고 화려하다고 다가 아닌데, 너무 졸속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해. 부처님 일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모아 간절하게 원을 세워 지극정성으로 해야 하는 거야.
도량밖으로 나가면 비싼 택시 안타고 도시락을 싸들고 다녀. 한푼이라도 절약하면 불사에 보탤수 있잖아. 평생 내 몸 안돌보고 살았어도 아프지 않았어. 병원이란 델 가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일하는 것 힘들다거나 회피하려 한 적이 없지. 오히려 잠시라도 안일과 편안함이 오려 하면 용납치 않았거든. 그게 바로 게으름의 시작이니까. 힘이 드니까 수행이 되는 거고, 수행이 되니까 그저 열심히 일하는 거야.
출가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가져온 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