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형상이 나타난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통화의 수단인 화폐에는 대개 그 나라 임금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가치를 나타내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서로 소통하며 사는 존재이다. 소통은 형상과 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어느 철인은 갈파한다. 언어는 존재의 현주소요, 존재의 나타난 모양이다. 종이 위에 기록된 글들은 참 형상을 나타내지 못한다. 다만, 참 형상과 글을 나타내고자 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글이 기록되는 용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돌비(플락신 리티나이스)' 와 '심비(카르디아스 리티나이스)' 이다. 종이에 기록된 글은 이 두 종류의 책을 모사(模寫)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종이 위에 기록된 검은 먹글자의 기호를 통해서 그 원전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값어치에 대한 유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 점을 명확히 안 사람이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2-3)
사람은 통화의 존재자이다. 떡을 효율적으로 나누기 위해 통화 가치인 화폐가 교환과 유통이 수단으로 등장했지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법. 육신의 떡을 나누기 위한 효율적 유통 수단이 화폐라면, 떡이 아닌 세계는 무엇을 통화의 가치로 삼고, 유통의 수단으로 삼고 있을까.
두 종류의 유통 수단
땅에 기어다니는 뱀은 그 정신을 흙에 기록한다. 땅에 자신의 형상을 기록한다. 뱀의 양식은 흙이다. 흙에 기록된 가치를 먹고산다는 말이다.
뱀이 터전을 삼고있는 땅은 돌비, 곧 지식의 세계이다. 법의 세계이다. 뱀의 형상을 그려서 그 가치를 유통하는 세계는 지식을 통화 수단으로 삼는다. 가이사의 화폐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자가, 가이사의 세계에서는 추앙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인 세계의 우선되는 가치는 지식이 알파요, 오메가이며, 세계를 유지, 보수, 발전시키는 동력이며 아르케(태초: 처음 시작)이다.
뱀은 그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의 겉 삶을 유혹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정신이 자리잡아 살아야할 우리의 속사람까지도 삼켜서 생명의 세계와 단절시킨다. 에덴의 뱀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다. 현실이며, 우리의 자화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금 여기서의 리얼리티이다.
때문에 뱀의 형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으뜸되는 가치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이 지식의 나무를 통해 선악을 판단한다. 에덴에서 하와와 아담을 꾄 뱀은 그같은 인간의 실상을 설명해 주는 성경의 논법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라고 한다.
이 때, 그것이 기록되는 종이는 기억력이라고 하는 인간의 기억의 창고이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기록하느냐가 힘이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곳은 또한 표면이다. 표면의 기록을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존재들의 세계가 곧 돌비의 세계이다. 가이사의 것으로 존재하는, 가이사의 형상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값어치를 기록하고 자신의 값을 결정한다.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수많은 깨달음과 지식을' 을 수집하려 한다. 정보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아우성친다. 그 지식을 기반으로 타인과 관계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형성하녀 가이사의 질서를 이루어 간다.
그것의 기본적인 토대는 '정과 욕심' 이다. '정과 욕심' 의 세계에 소속된 마음은 온갖 미망이 들끓는다.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마구 채우려 한다.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공멸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질서를 세우게 된다. 또 하나의 타협을 통해 욕심을 충족하려는 지혜가 도덕이며, 윤리요, 종교인 셈이다. 이곳을 일컬어 '세상(코스모스)' 이라고 한다. 코스모스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질서 지우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이 때, 글이란 정과 욕심의 형상에 따라 기억의 창고에 기록된다. 모든 지식은 전쟁의 도구요, 상대를 죽이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뱀의 독이 된다.
이 때의 우주는 자신이 중심이고 우주가 자신의 중심을 맴도는 천동설의 세계관이 주름잡는 때이다. 여기서 부르짖는 이웃 사랑이란 다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글은 형상의 나타난 모양으로 값어치를 이름짓는 결정적 요인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액면가를 높이기 위해 혈안이 된다. 더욱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하고, 더 많은 치부를 하려 하고, 더 많은 힘을 배양시켜 타인을 지배하고 자신을 우위에 두려한다. 이 세계는 가이사의 질서에 편입되어 가이사의 백성으로 사는 가이사이 시민권을 지닌 자요, 가이사의 세계에서 유통되는 가이사의 화폐인 셈이다.
또 하나의 원고지가 있다. 이를 일컬어 표면이 아닌 이면이라고 한다. 마음의 신비라고도 한다. 이곳 이면은 표면을 이루고 있는 두꺼운 쩝질이 벗겨져야 비로소 기록될 수 있는 종이이다. 표면을 형성하고 있는 질료는 '정과 욕심' 이다.
표면을 형성하고 있는 질료는 두꺼운 가죽옷이다. 표면은 작은 욕심에도 출렁인다. 표면의 마음은 믿을 수 없는 마음이다. 온갖 미망이 작동하는곳이며, 스스로 다잡아 제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합리적인 이성이 제 힘을 발휘하려다가도 맥을 못추고 민망하여 발길을 돌리는 세계이다.
한 순간, 모든 것을 불태우고 짓밟을 수 있는 어둠과 무명의 세계이다. 이 어두움의 세계에도 빛은 존재하는데 어두움의 빛 곧 지식이다. 그것은 뱀의 혀요, 율법이며 어두움의 빛, 곧 달 빛(Moon light)이다.
이같은 세계의 종이가 찢어져야 비로소 기록될 수 있는 이면의 종이가 바로 마음 너머의 마음인 심비(心碑, Inner heart paper)의 세계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되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려 한다. '하나님의 형상' 이란 무엇을 일컫는 말일까. 하나님을 형상화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은 형상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을 형상화시키면 이미 우상화 될 터이다. 아무 형상이나 모양을 갖고도 하나님을 형상화시킬 수 없다.
부득불 하나님을 그려보고자 해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 이를 일컬어 "그리스도" 라고 한다. 그리스도란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려본 개념이다.
'기름 부음' 이란, 시간과 공간에 예속된 한시적인 인간을 위한 배려에서 나온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말에 잡히지 말고 그 형상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형상을 분화(分化)시켜 보면 아버지의 형상과, 아들의 형상과, 성령의 형상으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뱀의 형상이 '정과 욕심' 이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형상을 관통하는 개념은 '사랑' 이다.
사랑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마음이다. 물론 '정과 욕심' 의 좌소도 마음이다. 그러나 '정과 욕심' 이 좌소인 표면적마음의 세계가 떠나가고 드러난 곳이 보물이 숨어 있는 또 다른 마음의 숨은 사람, 호 크룹토스 테스 카르디아스 안드로포스(벧전 3:4)의 세계, 마음 너머의 또 다른 마음의 세계이다. 이곳에 기록되는 글이 로고스며, 살리는 숨결이요, 생명체의 세계이다.
마태복음 첫 문장, '비블로스 게네스오스 예수 크리스두'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곳을 일컫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곳은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세계가 아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표면의 마음을 찢어버리고 이면의 마음이 드러난 자를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겉의 사람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속의 사람과 마주한다. 겉의 마음은 정과 욕심, 지식이 지배 원리지만, 속의 사람의 세계는 긍휼의 강이 흐른다. 이 때에야 비로소 사랑이란 말이 추상적인 관념의 말이 아닌 실체의 언어임을 알게 된다.
거듭남이란 바로 겉 사람으로가 아닌 속 사람으로 다시 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글은 이곳에 깃들여 있고 쓰여진다. 확언하면, 하나님이 형상은 사랑이며, 그 기록된 언어는 로고스이다. 심비에 기록된 글은 생명의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형상이 나타난 모양이다.
이때의 글은 에고의 욕심을 부추기고 충족하기 위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전달하는 양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식이란 정과 욕심을 유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담아내는 수단이 된다. 이때 기억의 능력은 자신의 액면가를 확인하기 위한 가치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질 뿐이다.
에고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 기능을 다한다. 기록된 글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기 이해 로고스가 꽃피기 시작할 때 기억의 기능은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기억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전달하는 본래의 기억이라고 하는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좌뇌와 우뇌를 사용하는 주인이 달라지는 것이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자아(ego)나 초자아(super ego-나는 프로이드의 초자아를 가이사의 세계에서 요구하는 보편 개념이나, 양심 정도로 파악한다. 결국 가이사의 질서를 설명하는 두 개의 개념에 다름 아니다)가 아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정신이 좌뇌와 우뇌를 사용한다.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이 정과 욕심을 담아내는 데 종노릇하였다면, 이제 더이상 뱀을 위해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역할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흔히 깨달음(覺)이라는 것은 허깨비요, 낮도깨비에 불과하다. 그것이 주인이 되어 자리잡고 있으면, 뱀이 또아리 틀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깨달음은 단지 방편이요, 생명을 담아내는 배추요 콩과 같은 것으로 잠시 주인을 위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 그것이 주인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종교들이 사람들을 그같은 허깨비에 종노릇하게 한다. 자기의 욕심이라는 놈이 아무리 깨달음을 얻었다한들 혹세무민이나 할 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기가막힌 깨달음이라는 것의 실체는 자신의 욕심의 산물일 뿐,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 온전하게 소진될 때 - 가이사에게 드려질 때 - 비로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다.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과 같이 겉사람의 모든 분깃, 가이사의 재물을 모두 탕진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겉사람의 마음 가죽이 베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의 재화는 어떻게 유통되는가. 긍휼의 마음을 타고 유통된다. 하나님의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 이면의 마음, 곧 심비가 하늘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요, 하나님의 책이요, 글이요, 하나님의 보물이 쌓이는 곳이다. 동록의 해함이 없는 곳, 하늘이 비로소 처음 열리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언약한 땅, 가나안은 자주 기근이 드는 땅이었다. 야곱이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총리가 되었던 요셉으로 인해 애굽에 정착하게 되고 기근을 면하지만, 애굽의 온갖 재화로 애굽의 영화를 누리지만, 결국 애굽의 종이 된다. 애굽의 질서에 편입된 유대 백성에게 가나안 땅의 재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애굽의 재화만 있을 뿐이며, 그곳에서 노예가 될 뿐이라는 이 역사적 현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언약의 땅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후손들에게 줄 약속이 땅을 상기시키고 출애굽케 한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출애굽 한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향해 출애굽하면서 겪는 모든 고난을 애굽의 모든 재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를 뿐만 아니라 은과 금이 풍족한 땅이라 했다.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가나안 땅의 큰 포도송이나 은과 금, 재화, 화폐는 가이사의 그것과 다르다고 하는 점이다. 바로가 있는 애굽 땅의 화폐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읽는 대부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서 얻을 축복의 말씀들을 애굽의 가치로 생각하고 읽으려 한다. 바로의 종이라는 반증일 뿐이다. 애굽의 재화와 보물과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함받는 모든 애굽의 가치는 바로의 것이니 바로에게 바치고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언약한 땅은 하나님의 것이 유통되는 세계지 애굽의 지폐가 통용되는 세계가 아니다. 그곳에서는 상호 환전이 불가능하다.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것이 아니다. 결코 은금에 찌끼가 섞여서 유통될 수 없다.
하나님의 재화, 하나님의 보물은 무엇으로 유통되는가.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다. 정과 욕심으로 오염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화폐, 유통 수단이다. 이곳에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그려놓고 싶어하고, 모든 것을 창조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빛이요, 생명이요, 하나님의 말씀(글)을(요 1:1-6) 기록하고 싶은 것이다.
새 언약이란 아비의 마음(얼)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이블의 웅장한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