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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 교지 기획 취재라는 핑계를 대고 돈을 타서 강진과 그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기행 보고서 같은 걸 또 남겨야 하겠기에 도리 없이 사나흘 저녁 매달렸습니다. 그저 제가 간 곳을 한 번 함께 볼까 해서 올립니다. 초(草)한 것이어서 고칠 부분이 있습니다.
기획답사 - 전남 강진 일대를 다녀와서
국어과에서는 한여름(2007.8.16-17)에 전남 강진 일대를 다녀왔다. ‘낙안읍성민속마을 - 영랑생가 - 사의재 - 백련사 - 다산초당 - 다산유물전시관 - 강진고려청자도요지 - 마량항 - 녹우당 - 무위사 -한국가사문학관 - 한국대나무박물관’등을 답사하였다. 답사지를 소개하고 거기서 느낀 것을 간략하게 적어서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첫날 마량항까지의 답사에는 강진 군청 소속의 문화관광해설사 이을미씨가 동행하여 주었다.
답사 첫날, 이른 아침 일곱 시에 학교에서 만나 출발하였다. 구마고속도로에 얹혀서 한참을 달리다가 다시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순천에서 내리니, 낙안읍성민속마을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낙안읍성민속마을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성곽 1,410m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관아와 9동의 중요민속자료 등 민가와 한국 전래의 토속적인 민속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고, 세시풍속과 통과의례 등 전통생활 문화를 지키면서 주민이 직접 살고 있는 민속마을이다. 임경업장군 비각, 낙안객사, 동헌, 중요 민속가옥들, 낙풍루, 낙민루, 석구 등이 볼거리이며, 음력 정월대보름날에는 임경업장군 추모제와 민속놀이 경연대회가 열린다. 매년 4월에는 낙안민속문화축제도 열리고, 민속기능인들이 거주하면서 관광객들에게 시연하거나 각종 체험활동(짚공예, 길쌈, 천연염색, 도예, 대장간, 목공예, 한지공예 등)을 직접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낙안읍성은 마한의 옛터로서 백제 때는 ‘파지성, 분차, 분사’라 불리었고, 고려 현종 때 나주시로 소속되었고, 조선 태조 6년(1397)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의 김빈길이라는 장수가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토벌했다고 한다. 그 후 세종 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였고, 인조 4년(1626년)에 임경업 장군이 이곳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증축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곳 지형이 여인이 거울 앞에서 화장하고 있는 자태여서 미인이 많고 인정도 많다고 한다.(순천시 안내 자료에서 부분 발췌)
낙안읍성은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이었다. 답사팀 일행은 읍성의 성곽을 따라 산책을 하면서 성의 안을 구경하기도 하고, 성 밖의 넓은 들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어느 고가에는 오래된 전통적 농경문화 유적을 고스란히 전시해 두기도 하였고, 관아의 마당에는 곤장을 맞는 죄인이 엉덩이를 내린 채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낮은 성벽을 사이에 두고 왜구와 어떤 형태로 치열한 전투를 하였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한 때 여기가 왜구와의 한 판 전쟁터였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읍성 안에는 3백년에서 5∼6백년으로 추정하는 은행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깨어서나무 같은 노거수(老巨樹)가 그 오래된 역사와 세월의 풍상을 말해 주었다.
답사팀은 여름 햇볕이 강하여 모두 모자를 쓰고 헉헉 거리면서 강진으로 출발하였다.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네비게이션이 우리를 정확하게 이끌어 주었다. 점심은 강진 입구의 ‘청자골 종가집’에서 했다. 강진해산물과 생고기육회, 불고기, 대합탕, 홍어찜 등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어서 맛깔스러웠지만, 특별하진 못했던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해설사를 만났다. 해설사는 오랫동안 강진군청에 근무한 적 있는 멋쟁이 여성이었다. 영랑생가로 갔다.
영랑 생가
영랑생가는 그 오래된 것을 빼고는 부유한 지주의 집답게 마당이 넓고 운치가 있었다. 생가는 영랑이 유학을 가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며, 그가 죽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마당에는 그를 유학 보낸 기념으로 그의 아버지가 심었다는 이국적인 종려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모란이 잎이 무성하게 그의 시비를 덮고 있었다. 집 뒤에는 대나무 숲과 밑동이 한 아름은 됨직한 동백이 깊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한 때 실연한 영랑은 그 동백의 어느 나무에 목을 매기도 했다고 한다.
해설사는 우리 일행에게 영랑의 시와, 그의 사회활동, 그의 사랑과 흔적들을 소상하게 일러주었다. 그의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를 줄줄 외워 주었다. '오-매 단풍 들것네'/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오-매 단풍 들것네'//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오-매 단풍 들것네'
이념이 소용돌이치던 한 때 영랑은 우익의 집회를 이끌면서 그의 영롱하고 순수하던 시편들의 정체성이 어떤 것이었는지, 오늘날까지도 독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지만 그가 갈고 닦았던 언어는 생가에 이르는 길 양쪽에 장식된 돌담에 반짝이고 있음은 분명한 것이다. 생가 주위에는 영랑빌라가 있어서 그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이름에서 운치가 느껴졌다. 시내에는 영랑 피아노 학원, 영랑 미술학원, 영랑 슈퍼 같은 것이 있다고 해설사는 말해 주었다.
일행은 다산의 유적을 둘러볼 차례가 되었다. 잠시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오게 되는 까닭을 더듬어 보자.
다산은 정조가 죽자(1800년) 벼슬을 떠나 은거하였다. 그러나 벽파(辟派)의 음모에 휩쓸려 1801년 2월 10일 새벽 의금부에 체포되어 국문을 받는다. 대대적인 국청이 열리고 다산은 천주교신자와 내통하였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 천주교 박해사건)1) 천주교와 마음을 끊고 관계하지 않았던 증거들이 제시되어 다산은 석방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반대파의 주장에 밀려 경상 장기현으로 유배를 간다.(이 때 셋째형 약종은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고,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를 간다.) 다산은 그해 10월 ‘황사영백서 사건’2)이 일어나자 다시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 갇히게 된다. 유배지에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던 그에게 가해진 혐의는 가혹하였다. 국문 결과 ‘황사영 백서에 참가하거나 간섭한 일이 없음’이 드러났지만, 억울하게도 11월,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다산은 18년간 강진에 유배된 채 나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스스로를 버리지 않고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여 위대한 학자로서 후일 귀감이 되고 있다.
사의재(四宜齊)
다산은 동짓달 하순(11월 23-24일 경)에,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강진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한양에서 걸어서 800리 길이다. 다산의 나이 40이었으며, 강진에서 18년 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묶인 몸이 된다.
다산은 죄인의 몸이었다. 처량하고, 불쌍했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손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아름다운 사람은 있어서 다산을 거두었다. 그의 「상례사전서(喪禮四箋序)」기록에는‘백성들은 유배 온 사람 보기를 마치 큰 해독으로 보아 가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면서 달아나 버렸다. 그런데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머물게 된 곳은 남편도 없이 술과 밥을 파는 주막집이었다. 그는 그 주막집 방에 들어가서 사흘 밤낮은 꼼짝하지 않고 칩거했다고 한다. 해설사가 말하길 어느 날 노파가 다산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노파가 다산에게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은 자식이 잘 되면 그 공을 모두 아비에게 돌리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다산은 ‘아버지는 그 가문의 시조에 닿아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니, 노파가 다시 이르기를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아버지가 씨앗이라고 한다면 어머니는 그 밭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그 공을 모두 아비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니, 다산은 ‘이 궁벽한 시골의 아낙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구나’ 라고 하여 그 노파에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가 명문 사대부의 벼슬아치로서 미천한 술집 아낙과 대화한 것도 그러하지만 당대의 석학이 그러한 아낙의 말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만큼 열린 사고를 가졌었다니 당대적 윤리관으로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러한 열린 마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실학의 꽃이 피워진 것 아니겠는가.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 갖지 않던 시절, 주막집 노파는 그에게 말을 걸어 주고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겨울을 나고 강진 읍내의 하급 신분의 아전 자제들이 글을 배우러 찾아오고, 그들 중 ‘황상’ 같은 이는 쉬지 않고 수학하여 당대의 석학이 되었다. 교육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 죄인처럼 취급하던 편견을 넘은 것이다.
다산은 「사의재기(四宜齊記)」에서 ‘사의재(四宜齊)’에 대한 유례를 설명하였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四宜之齊)이라고 했다. 마땅함이라는 것은 의(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義)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을 둔 사업이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다산은 주막에서 4년을 살았다. 지금의 사의재(四宜齊)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주막집에 표석을 세워 보존하다가 얼마 전에 보수하고 집을 신축한 것이라 한다. 사의제의 밖에는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은 사의재 뒷산 보은산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 눈에 해당하는 명당지라고 하는 설명을 해설사는 곁들였다.
이 시기 1802년에 다산의 넷째 아들 네 살배기 농장(農牂)의 죽음이 있었다. 다산은 생애 ‘모두 6남 3녀를 낳아 살아남은 애는 2남 1녀뿐으로 죽은 애들이 4남 1녀나 되어 죽은 애들은 살아난 애들의 두 배나 된다.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스러우니 어쩐 일인고’ 라고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농아 광지(壙誌:무덤 속에 넣어 주던 간단한 일대기)에는 ‘나의 죽음은 사는 것보다 현명한 일인데도 살아 있고 너의 살아 있음은 죽은 일보다 현명한 일이었지만 죽어버렸으니 나의 능력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라고 하여 유배지에서 잃어버린 자식을 향한 애절한 아비의 정을 기록해 두었다. 널리 회자되어 유명한 그의 시 애절양(哀絶陽)3)이 또 이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縣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복 호소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 아인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三代)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하려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잠실궁형(蠶室宮刑)이 또한 지나친 형벌이고
민(閩) 땅 자식 거세함도 가엾은 일이거든
자식 낳고 사는 일은 하늘이 정한 이치
하늘 땅 어울려서 아들 되고 달 되는 것
말 ․ 돼지 거세함도 가없다 이르는데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부자들은 한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
한 알 쌀, 한 치 베도 바치는 일 없으니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한고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 편을 읊노라
귀양 가서 임금이 불러주기를 학수고대하며, 그 절절함을 여인의 심정에 얹어서 더욱 간절하게 과장하였던 시편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시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관과 민의 첨예한 갈등, 썩어가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억울하여 목숨을 내 던지는 동시대의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시대의 어둠이 걷히기를 열망한 다산의 절규가 이 시 속에 녹아 있음을 본다. 한 때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유교적 질서가 엄존하던 시대에 옥당의 벼슬을 지낸 이가 가진 것이라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진보적 세계관이 이 한 편의 시 속에 녹아 있다고 하면 과장이 될까. 다산이 오늘날에도 추앙되고 살아있는 역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가 외롭고도 쓸쓸하였을 18년간의 유배지에서 학문과 저술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오로지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적 실천을 통해서 당대를 돌파하고자 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의재를 나와서 일행은 강진 읍내 빠져나와 백련사로 향하였다. 다산이 사의재에 4년간 머물다 아암 혜장스님과 교유하게 되면서 사의재의 뒷산에 있던 보은산방(암자 고성사)에서 지냈으며, 한 때 제자 이청의 집에 묵기도 하였다. 다산은 마흔일곱 살인 1808년 봄부터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본격적인 학문연구에 침잠하게 된다. 그야말로 다산학의 산실이 되는 셈이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은 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는데, 다산은 백련사를 오가며 당대 강골의 학승이었던 혜장선사와 6,7년간 어울리면서 함께 유교 경전을 연구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백련사(白蓮社)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이라는 산 이름을 따서 만덕사였다. 이 사찰은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명종 때인 1170년에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특히 요세는 귀족불교에 대한 반발로 민중불교 운동이 한창이었던 1232년(고종 19년)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1236년(고종 23년) 백련결사문을 발표하여 ‘백련결사운동’을 주창함으로써 백련결사가 전국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폐사가 되다시피하였으나, 조선 초기 세종 때 ‘행호’주지가 대규모 중창 불사를 하여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조선후기에는 8대사를 배출하여 전국에서 명실공히 으뜸가는 사찰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후기에도 몇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현재에는 대웅전, 응진당, 명부전, 칠성각, 요사채 등의 건물이 남아 있으며 사적비와 원구형 부도가 있다.(강진군의 안내자료 ‘강진의 문화유적’에서 부분 발췌)
백련사는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유홍준의 답사기에서는 백련사의 ‘거만한 가람배치’와 ‘의젓한 풍모를 과시하는 자태가 때로는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불친절한 인상을 주는 곳’이라 하였지만, 우리 같은 문외한에게 백련사는 그저 소박하고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절 입구에는 천왕문이 없으니 절과 밖의 경계가 없었고, 마당에는 한여름의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터뜨리며 만개해 있었다. 강진만의 구강포를 다 품으려는 듯, 산 속에서 바다를 꿈꾸는 것이 오히려 백련사의 오만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풍광이 빼어났다. 사찰의 앞 뒤 산속으로 수백 살은 먹은 것 같은 후박나무와 동백이 여기가 남도임을 말해 주었다. 한때 사찰이 80여 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산에 기댄 사찰은 적은 규모였다. 백련사는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3,000평 규모의 동백 숲을 가졌다. 고창 선운사 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백련사 동백 숲이 절정을 이루는 때는 ‘동백꽃이 반쯤 져갈 때, 그리하여 탐스런 꽃송이가 목이 부러지듯 쓰러져 나무 밑 풀밭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남은 꽃송이들이 홍채를 잃지 않는 3월 중순께가 좋다’고 하니 다음에 꼭 오야겠다고 다짐을 두었다.
초당에 머무르기 전부터 다산은 10년 연하인,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교유하였다. 혜장선사는 스님이었지만 ‘주역’, ‘논어’ 등 성리학에도 통달한, 나이 스물일곱에 승려들의 위계에서는 최상의 서열에 올라있던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높은 수준의 유학자와 큰선승의 만남에서 유교와 불교의 상호 이해가 가세되어 문화의 질적 고양이 이루어졌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만남으로 다산의 시작(詩作)은 더욱 왕성하여졌고, 그의 다인(茶人) 생활도 시작되었다. 학문을 토론하고 생의 절친한 벗을 만난 다산은 ‘말세의 인심 대부분 비루하고 야박한데/요즘에도 그런 진솔한 사람 있었네(시, 혜장이 찾아오다 부분)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혜장은 마흔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입적하고 말았다.
백련사를 둘러본 일행은 백련사의 남쪽으로 열린 다산초당 가는 오솔길을 걸었다. 오솔길의 초입에는 동백 숲이 대단하였다. 산 속으로 들어가니 야생차 나무가 지천으로 늘려 있었다. 여름의 야생차 끝 잎은 여전히 연녹색이어서 입 안에 그저 넣어도 떫지 않았다. 다산은 이 산의 잎들을 따서 차를 달이고 그 긴 겨울을 넘겼을 것이다. 다산이 200여년 전 걸었던 그 길이다.
윤선생님은 백련사의 입구에 있는 대안학교 ‘늦봄 문익환학교’의 입구 표지를 보고서 한번 들러보고 싶어 하며 다음 날까지 그 마음을 내비치었다. 일행이 백련사 아래로 다시 내려오지 않고 다산초당으로 산길을 걸어 넘어 간데다 다음날의 일정이 또한 빠듯하여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문익환 선생의 민족과 평화, 통일을 향한 열정을 본받고자 이름 붙인 늦봄 문익환학교는 기존의 대안학교가 추구하는 자유, 자율, 생태주의 교육철학에 더하여 민족성과 역사의식을 담는 교육을 하고자 하는 취지로 설립한 대안학교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의 중간쯤의 아래 구릉지에 있는 그 학교에 가보진 않았지만 그 위치가 가히 설립 목적을 이룰 만한 명당이 아닐까 싶다.
다산초당(茶山草堂),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초당은 실학사상의 산실이었다. 다산이 18년의 강진 유배생활 중 10여 년 간의 안식처가 되었고, 목민심서를 집필했던 곳 다산초당. 귤동마을을 들어서 10분 정도 산속 오솔길을 걷다보면 92개의 돌계단을 오르게 되고 계단의 마지막에 다산초당이 자리 잡고 있다. 오솔길 초입에서부터 다산의 강직함을 말해주듯 적송(赤松)숲과 하늘을 찌를 듯한 대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또한 다산에게 세상을 거꾸로 보기를 가르쳐 줬던 민초들의 넋이 살아있는 듯 제멋대로 뒤틀린 고목이며 거칠게 앙상한 뿌리를 드러낸 나무숲길을 걷게 된다.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당의 현판은 추사의 친필을 집자하여 모각한 것이다.
초당 남동쪽으로는 다산 동암이 있는데, 판각된 글씨는 다산의 친필을 집자하여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제자들의 유숙처였다. 동암의 오른 쪽에 있는 천일각은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 형 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이었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다산 사경이 있다. 초당 서편 뒤쪽에는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으로 새긴 ‘丁石’이란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다. 앞마당에는 평평한 바위 ‘다조(茶竈)’가 있다. 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라는 뜻으로 주위에 자생하는 차잎을 따다 그늘에 말린 후,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반석이다. 초당 뒤편에는 ‘약천(藥泉)’이 있는데, 다산이 직접 수맥을 잡아 만든 것으로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 나오고 있다. 초당 옆의 연못은 다산이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 만든 것으로 연못 가운데에 돌로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石假山)’이라 하였고, 연못 속에는 잉어를 길렀다고 전해진다.(강진군의 안내자료 ‘다산 정약용을 찾아서’에서 부분 발췌)
일행은 백련사 산길을 20여분 걸어서 다산초당에 도착하였다. 한여름 다산초당은 우거진 나무숲의 그늘에 가려 어두웠다. 산 속은 습하였고, 모기떼가 극성이었다. 초당 안에서는 체험학습프로그램을 운영하느라 분주하였고, 석가산이 있는 연못에는 한 줄기 낙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해설사는 천일각에서부터 초당의 곳곳을 데리고 다니며 친절하게, 상세하게 다산의 흔적들을 일러 주었다. 초당 뒤의 동백숲과 앞마당을 가린 고목의 울창한 잎들이 다산의 학문의 무성함과 그 역정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초당 뒤의 자그마한 바위에 새겨진 ‘丁石’ 두 글자를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바위에 글을 세기고, 또 정을 들고 세월을 새기듯 바위를 쪼았을 다산을 생각해 보았다. 그에게 주어진 ‘인간의 시간’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파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삶의 절망적 순간들과 마주하면서 그가 쪼았을 세월을 마주하면, 여전히 미명인 우리는 감히 그 외롭고 높고, 또 쓸쓸하였을 당대를 상상하기도 힘들게 된다. 그 세월이 18년이라니, 그의 삶과 그가 지탱해 간 그 삶의 무게가 바위에 음각되어 패인 그 고랑 속에 각인되어 있음을 보았다.
다산은 여기서 해배되기까지 11년간 머문다. 그가 머문 초당으로 배우겠다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이른바 다산초당의 18제자들이 학문을 연마하게 된다. 훌륭한 제자들은 다산학단을 형성하고 다산학을 후세로 연결하게 된다. 그의 학문이 썩은 세상을 바로잡아 깨끗하고 맑은 세상을 만들자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그러한 뜻을 방대한 저서 속에 선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론으로 마무리 하였다. 해배되기 직전에 「목민심서」48권을 완성하고 쉰일곱의 나이에 처자가 기다리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한 가정의 아비여서 아들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였다. 다산으로 옮긴지 한 달 정도 지나 둘째 아들이 찾아 왔다. ‘4월 20일 학포가 왔다’는 시를 보자.
얼굴 생김새야 내 자식 같은데
수염이 자라서 딴 사람 같네
비록 집안 편지 가지고는 왔지만
정말로 내 아들인지 확실치 않네
8년 만에 만난 아들의 모습은 정말 ‘내 아들’ 같지 않아서 확실치 않다고 한 데서 우리는 다산의 비애와 마주하게 된다.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려 800리 먼 길을 수십 일을 걸려 내려왔을 것이고, 그의 품에는 어미의 편지가 또 들려 있었을 것이다. 아비는 그 편지를 읽고서 다시 아들을 보면서 세월의 간극을 실감하기도 하고, 성장한 아들이 정말 내 아들인지 대견해 하면서 어떻게 아들을 대해야 할지 머뭇거리며 잠시 아비의 길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절절하다.
“폐족(廢族)에서 재주 있는 걸출한 선비가 많이 나오는 것은,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폐족에서 태어나게 하여 그 집안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마음이 근본정신을 가리지 않아 깨끗한 마음으로 독서하고 궁리하여 진면목과 바른 뼈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으로 배우지 않으면 못난 사람이 되고 말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도리에 어긋지고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되고 아무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아 결국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되고 혼인할 길마저 막혀 천한 집안과 결혼을 할 것이며,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나는 것이다.…”
한 때 임금을 가르쳤던 다산은 죄인이 되고, 폐족이 되었으니 아들에게 더욱 정진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소상하게 일러 주었다. 또 다른 편지를 보자.
“네 형이 멀리서 왔으니 기쁘기는 하다만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아 보니 옛날에 가르쳐 준 경전의 이론을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우물우물하니 슬픈 일이로구나. 왜 이렇게 되었겠느냐? 어린 날에 화(禍)를 만나 혈기(血氣)를 빼앗기고, 정신을 지키지 않아 놓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때때로 점검하고 지난날 배운 것을 복습했더라면 어찌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한스럽고 한스럽다. 네 형이 이러니 너야 오죽하겠느냐? 문학(文學)이나 사학(史學)에 꽤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네 형이 이렇게 되었을 때는 완전히 손도 못 댄 너야 알 만 하겠구나. 내가 집에 함께 있으면서 너희들을 가르쳤는데도 듣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다른 집안에서도 혹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 나는 멀리 귀양살이 와서 남쪽 풍토병이 심한 변방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서 외롭고 불쌍하게 지내면서 밤낮으로 너희들에게 희망을 걸고 마음속에 담긴 뜨거운 마음을 쏟아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너희들은 이것을 한번 얼핏 읽어 보고는 고리짝에 처넣어버리고는 다시 마음을 두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세상에서 어떤 아버지의 편지가 이 보다 더 절절할 수가 있을까? 엄함과 자애로움이 진솔한 목소리에 실려서 그 아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아비를 부정하지 말고 게으르지 않게 살아주길 바라는 아름다운 글이다. 다산은 아이들의 나태함이 다 자기의 탓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아비의 처지를 아이들이 헤아려 주길 바라고 있으니 또 슬프지 않은가!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숱한 가르침들을 편지로 보냈다. 독서하는 법, 경전의 해석 방법,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길, 시 쓰는 방법, 과일과 채소, 약초를 재배하는 법 등 이루 나열할 수 없을 만큼의 가르침들을 보내 주었다. 심지어 술 마시는 법도까지 상세하게 일러 주었으니, 멀리 있는 아비의 고뇌가 그 편지들 속에 다 녹아 있게 되었다.
다산은 부인 홍씨가 보낸 헌 치마폭을 찢어 4개의 첩을 만들고는 거기에 그림과 시를 써서 외동딸에게 보냈다. 그 매조도(梅鳥圖)에도 얽힌 사연이 있다.
다산의 나이 마흔 아홉, 부인의 나이 쉰 살 때에 아내는 10년을 독수공방한 긴긴 세월의 그리움을 담아 자신의 정표를 인편에 보낸다. 시집올 때 입었던, 장롱 속에 간직하였던 다홍치마였다. 남편이 자신을 잊어버리지나 않았을까,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염려와 그리움을 그 치마에 담았을 것이다. 다산은 그 붉은 치마가 빛바래어 가위로 재단하여 두 사람의 사랑의 열매라 할 만한 자녀들에게 그림을 그리고 시를 적어 보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꽃다운 사랑을 기억하게 하려 했던 아버지이자 남편인 다산의 마음이 거기에 투영되었다.
그의 삶은 헛되지 않아서 그의 아들들이 장성하여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당대의 학자들은 그를 알아보고 말하기를 ‘아득하게 먼 천 년 뒤에 온갖 잡초가 우거진 동쪽 오랑캐 나라에서 이처럼 뛰어나고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으랴’ 하는 찬사를 보내었다. 다산이 운명하고 오래 뒤 어느 날, 큰아들 학연은 친구 추사 김정희를 불러다 아버지의 저서들을 교정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추려 정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마현리 집에 다산이 남긴 수 백 권의 저서를 다 읽어 본 추사는 “그대 아버님의 백세 대업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담긴 저작물에 대해서는 저도 실제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버리고 남기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체 원고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가 뒷날의 양웅(揚雄) 같은 학자를 기다리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지요” 추사 같은 재주와 문장의 까다로운 식별력으로도 다산의 글을 손대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 뒷세상 학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으니 이만한 칭송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그 후 200여년이 지난 지금, 그를 추억한 한 시인의 시를 만나게 된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정일근, 1985)
第 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 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適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第 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 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四宣齋)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며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답사 일행은 다산초당을 내려왔다. 강진고려청자도요지의 폐관 시간 전에 닿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해설사의 채근을 못 이기고 서둘렀다. 내려오는 길은 빽빽한 삼나무와 휘어진 소나무, 왕대 굵은 줄기가 오솔길을 감싸고 있었다. 그 아래의 다산유물전시관에 갔더니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관을 나온 일행은 그 아래로 조성된 두충나무 숲길을 걸어 내려왔다. 차는 들판을 가로질러 탐진강을 건넜다. 강진만에는, 한여름의 석양이 검은 갯벌과 고요한 바다에 쏟아지고 있었다. 해안이 굴곡이 커서 그 풍경이 흔들렸고, 강진만의 그 쓸쓸함과 고요함이 사람의 마음도 쓸쓸하게 하였다.
강진고려청자도요지
대구 고려청자도요지는 9세기경부터 14세기경까지 약 5백 년 동안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9개 마을에 188개소의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으며, 18만평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해서 관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던 곳으로는 이곳 강진과 해남, 전라북도 부안 등을 들 수 있으나,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400여기의 옛 가마터 중 대부분이 이곳 강진에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사당리는 제작기술이 최절정을 이룬 시기에 청자를 생산하던 지역으로, 우리나라의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청자의 80% 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되었을 정도로 그 기법의 천재성ㄱ과 예술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프랑스 루불 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이곳 강진은 해상교통의 발달로 중국청자기술이 유입되었고 다른 지방에 비해 태토, 연료, 해운, 기후 등 여건이 적합하여 우리나라 청자문화를 주도해 왔으나, 고려 말기에 청자기법이 쇠퇴한 후 500여 년 동안 전승되지 못한 채 단절되었다.(강진군의 안내자료 ‘강진의 문화유적’에서 부분 발췌)
고려청자 도요지에는 박물관 폐관시간이 다 되어 도착하였다. 그냥 돌아서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면이 익었었는지 해설사가 관리인들과 얘기를 나누더니, 특별히 일행을 위하여 닫혔던 철문을 열고, 전시관 내부에 조명을 넣어주는 배려를 베풀었다. 전시관 안에는 시가로 수 천 만원을 넘는다는 청자들이 비색을 발하고 있었다. 복원해 둔 가마터를 둘러보고, 박물관의 뒤에 있는 작업장을 둘러 볼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장인들이 조각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구경하였다. 청자는 흙을 만든 후 상형작업, 상형작업, 문양 조각작업, 초벌구이, 유약칠하기, 본벌구이 등 완성하기까지 24단계의 과정을 거치는데, 과거에는 1점의 작품을 생산하는데 70여 일이 소요되었지만, 지금은 50여 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들의 작업을 보며 옛 장인들의 치열했던 삶과 정신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오늘날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면서 수 만장의 그림을 그리고 실명을 하였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청자 굽는 장인의 손놀림이 그토록 섬세한 것인 줄은 알지를 못 하였다. 그리고 그 유약의 비밀은 아직도 다 밝히지 못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누군가 공을 들이고, 그 들인 공이 높고 대단하니 세계가 관심을 두고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이 많다고 하지만, 고려청자 도요지에서만은 저절로 되는 것이 없는 것만 같다.
일행은 도요지에서 나와 마량항으로 향하였다. 저녁을 먹겠다고 찾아간 마량항은 아름다운 항이었다. 정부에서 돈 들여 만든 인공의 구조물도 장관이었지만, 석양이 비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은 수묵화를 연상케 하였다. 포구에서는 청년 두어 명이 바다낚시를 놓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른의 손바닥 보다 큰 돔을 낚아 올렸다. 청정구역이라 물이 맑고 뻘이 깊어 고기맛이 부드럽고 찰지기 때문에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강태공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청년이 낚아 올린 그 돔을 사 보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들은 채도 않고 낚시질만 계속 하였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밤의 정취가 더욱 아름답다고 하였지만 모두 피곤하여 마량항을 더 둘러보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일행은 다산 초당 아래의 두 번째 민박집 ‘다산명가’에서 하루를 잤다. 해설사와는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숙소에서 일행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밤 깊어 가는 줄 몰랐다. 윤선생님은 보길도를 들어가고 싶어 하였으나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계획을 수정하였다. 아쉬웠다.
일찍 일어나 다산초당을 다시 올라갔다. 아직 해 뜨지 않은 초당에는 고요가 적막하였다. 어제 오후의 모기떼도 온데 간데 없고 바람은 서늘하였고, 연지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맑았다. 그의 초당에서 해 뜨는 아침을 맞은 것이 큰 행운이었다.
일행은 차를 몰아 아침 일찍 녹우당으로 갔다.
녹우당(綠雨堂)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의 숨결이 살아 있는 집이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호: 어초은)이 연동에 거처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원래는 소박한 시골집이었으나 고산이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해남으로 귀향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 역시 정치에 뜻을 접고 해남에서 지내게 되자 녹우당은 살림집으로 그 모습을 갖춘다.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증축하고 개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녹우당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고택이 보낸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이 은행나무는 고택을 지을 당시에 심어진 나무로, 시가 문학의 대가 윤선도와 선비화가 윤두서의 생애를 끝까지 지켜보았을 것이다. 대단한 고택이니 대문도 크고 굉장할 것 같은데, 이리 저리 둘러보아야 소박한 대문을 겨우 발견할 수 있다. 대문 뿐만 아니라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모두 정면이 아닌 옆으로 나 있다. 또한 모든 출입구는 남쪽을 향하고 있어 양지바른 곳에서 드나들 수 있다.
은행나무 옆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면 작은 정원과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 현판에 걸려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는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쓴 것이다. 녹우당(綠雨堂)은 ‘초록빛 비가 내리는 곳’이라는 뜻이 아닌가. 녹우당의 뒷산에는 비자나무숲이 있는데, 바람이 불면 비자나무잎이 흔들리며 마치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녹우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녹우당의 사랑채는 효종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지어 주었던 집을 일부 뜯어 옮겨 온 것으로, 앞으로 불쑥 나온 차양이 매우 독특한 건물이었다. 녹우당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이라기보다 우리의 옛집들이 그러하듯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지향하는 소박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녹우당의 오른 편으로 돌아 야트막한 산을 올라가면 ‘어초은’의 묘가 있고, 더 오르면 비자나무 숲이 있다. 제주도의 비자나무 숲만큼 그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윤선도의 선대가 심고 가꾼 정성이 대단하였는지, 오래된 기품이 느껴졌다. 비자나무 술 깊은데서 등성이에서 비추는 아침 햇살이 퍼져오니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비자나무 잎과 열매의 향이 지금도 코를 스치는 것 같다.
녹우당의 오른 편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인터넷에서 보는 것 보다 복사가 조잡하여 별 느낌이 없었다. 일행은 다산의 외증조부 되는 윤두서를 만난다는 기대가 컸는데,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녹우당 진입로의 비닐하우스에서는 키위가 익어가고 있었다.
일행은 도로변의 기사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된장찌개가 부드럽고 맛있었다. 값비싼 음식보다 오히려 든든하였다. 차를 몰고 무위사로 향하였다. 무위사에 도착하기 전에 일행이 달리는 도로를 막고 서 있는 산이 있어서 보니 병풍 같은 월출산이었다. 무위사는 월출산을 오른쪽 어깨쯤에 비스듬히 배경으로 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위사
《사지(寺誌)》에 의하면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946년(고려 정종 1)에는 선각(先覺) 형미(逈微)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하였다가, 1550년(명종 5) 태감(太甘)이 4창하고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렸으므로 《사지》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당우(堂宇)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그 후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당우는 극락전과 명부전 및 요사(寮舍)뿐이었는데, 1974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 ·해탈문(解脫門) ·분향각(焚香閣) ·천불전(千佛殿) ·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중 국보 제13호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naver 백과사전에서)
무위사라는 절 이름은 선각대사의 탑비에 나타난다. 무위지위(無爲之爲)의 약자인 무위는 내(我)가 있다는 생각을 넘어 선 무아와 무욕의 경지에서 성취되는 법(法)이다. 그 법의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 도시적 일상에 길들여진 우리는 가늠하기 힘들다. 자본의 논리가 우리들의 영혼과 일상에 고루 스며있으니 무아와 무욕은 아득히 먼 나라의 얘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무위사는 절 이름만으로도 우리들을 압도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무위사는 어마어마한 느티나무 세 그루를 안고 있었다. 그 나무가 사람을 압도하였다. 나무는 그 사방이 수십 미터의 그늘을 만들 만큼 대단하였지만, 밑동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있었다. 낙안 읍성민속마을의 은행나무가 500여 살의 풍상에 지쳐서 여기저기 콘크리트로 보수한 상처로 기워져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아직 무위사의 느티나무는 청년의 나이에도 이르지 못한 것처럼 체격이 성장을 향하고 있었다.
극락보전은 단아하고 소슬하였다. 마침 한 스님이 염불을 하며 기도 중이라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목탁을 두드리며 알 수 없는 불경을 염불하고 있었다. ‘불경처럼 서러워졌다’고 한 백석의 시 한 줄이 스치고 갔다. 그에게도 한 때의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을 리 있겠는가. 지친 도시인이 늘 산사의 고요함을 꿈꾸는 것과 얼마나 닮아 있을 지 염불의 목소리에 실려 오는 내면을 나는 감히 예단할 수 없어서 지켜보고만 서 있었다. 극락보전의 바깥 기둥은 구멍이 군데군데 뚫리고 보수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구멍이 숭숭한 기둥의 안이 비어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본당 안에는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가 있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 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 한다.
벽화보존관에 가니 무위사가 ‘벽화의 사찰’임을 보여 주려는 듯 떼어낸 벽화들이 보존처리를 한 채 걸려 있었다. 일행은 그 벽화들을 보며 ‘유약은 어떤 것을 사용하였을지, 어떻게 그림을 상하지 않게 떼어 내었는지, 보존처리는 어떻게 하였을까’ 같은 비미술적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이럴 때 안내사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보존각의 음성안내자료에 나오는, 무위사 벽화에 얽힌 설화를 대강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여 보았다.
옛날 극락보전을 완성한 후 벽화를 그릴 화주가 없어서 스님은 백일기도를 시작하였다. 백일 재 되던 날 스님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절로 들어와 스님을 보더니 무슨 걱정이 있는지 물었다. 스님이 벽화를 그릴 화주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노인이 직접 그리겠다고 했다. 꿈을 깬 스님은 다음 날 아침 일주문 앞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노인을 만났다. 꿈에서 본 바로 그 노인이었다. 스님은 노인에게 벽화불사를 부탁하였고, 노인은 승낙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벽화를 그리는 백일 동안 절대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여 불사가 시작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렇게 99일이 지나가고 있었으나 노인은 한 번도 바깥을 나오는 일이 없었다. 벽화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너무도 궁금했던 스님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문창살에 구멍을 뚫어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법당 안에는 노인은 오간데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수월관음도 벽화는 거의 완성되어 마지막 점안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이 법당 안을 들여다 본 그 순간, 그 파랑새는 하늘 높이 날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저 많은 불화의 위대성을 신기(神技)의 경지로 승화시켜서 의미를 부여하고, 영적 생명감을 부여하려 한 이야기다. 불화를 정말 파랑새가 그렸다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파랑새가 그리지 않고서야 저 섬세한 그림들이 어떻게 수 백 년의 세월 동안 퇴색하지 않고 선명하게 보존될 수 있었을까. 그 파랑새는 인간들의 희망의 새라 할 만하다. 일행이 대낮의 햇빛을 받으며 다음에 갔던 곳은 소쇄원이다.
소쇄원(瀟灑園)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현지의 안내 자료에서 발췌)
소쇄원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을 보여주며 도가적 삶을 살다 간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라 평가된다. 조성된 건축물과 조형물은 상징적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탁월하게 이뤄내며 그 안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고 있었다. 입구의 좁은 왕대 숲, 휘어진 소나무, 위태로운 다리,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가을에는 국화가 피어나겠고, 또 긴 겨울의 끝자락에는 이 숲의 어디쯤에서 매화꽃이 흰 눈을 머리에 이고 피어날 것 같았다. 빗방울이 두드리는 파초와 대 숲에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북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하여 소쇄원 중심을 관통해 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일행은 사진을 찍어 댔다. 물이 흘러드는 담장 아래의 돌 위에 앉아서, 서늘한 계곡의 나무 아래에서, 광풍각 정자 마루에서, 붉은 배롱나무 아래에서, 왕대를 등 뒤에 두고서 돌아가며 찍고 또 찍었다. 가급적이면 그 배경에 우리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도록 폼을 잡아 가면서 찍었다. 한번은 사진기 셔터를 누르려는데, 윤선생님의 시선이 사진기를 보지 않고 외면했다. 찍는다고 이리 보시라고 했더니, “사진기 안 보고 찍어도 된다”고 하셔서 일행을 웃겨 주었다. 선생님만의 방식으로 찍으려 했는데, 그걸 모르고.
일행은 소쇄원 아래 주차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한 개씩 사서 목을 식혔다. 숨 막히는 땡볕이었다. 가사문학관으로 갔다.
한국가사문학관, 한국대나무 박물관
송순의 면앙정가, 송강의 성산별곡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서 담양은 흔히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불린다.(담양군의 자료에서 인용) 한국가사문학관은 소쇄원에서 2-3분 거리에 있었다. 외관을 마치 독립기념관처럼 지어서 웅장하게 보이려고 한 흔적이 역력했다. 제1전시실에는 송순과 정철의 교지, 분재기, 표문(과거시험 답안지), 목판 등 관련 유물이 즐비하였다. 제2전시실에는 규방가사,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이 있었고, 제3전시실에는 소쇄원도가 걸려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 양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서 그 전통의 소중함을 보여주려 한 것 같았다. 오래 머물지 않고 대나무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행은 대나무박물관에 가기 전에 시장하여 식당을 찾았다. 유명하여 소문이 나 있다는 담양읍내에 위치한 떡갈비 식당의 원조라고 하는 ‘신식당’에 갔다. 전에 들렀던 적이 있는 선생님은 그 집을 우연히, 쉽게 찾았다. 입구에 식당의 유례를 설명하였는데, 1대(약1909년) 남광주 할머님이 시작하여 2대인 신금례 할머니의 성을 따서 신식당이라고 하였고, 그 때부터 식당의 이름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단다. 떡갈비란 이름이 생겨난 것은 3대인 이화자씨 때 손님들이 갈비모양이 떡처럼 보인다 해서 이름을 붙여 준 데서 유래되었으며, 그 이름이 타지방까지 사용되어지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식당의 홀에는 서너 명의 아주머니들이 내내 갈비들을 손질하여 발라내고 있었다. 한참 기다리니 잘 구워진 떡갈비가 밥상에 올랐다. 다들 시장하였던지 게 눈 감추듯 먹고 말았는데, 맛이 좋았다. 질기지 않아서 입안에서 녹는 듯 했고, 숯불에 구우면서 기름기가 적당히 빠졌고, 냄새도 없었다. 담양 근처에 가면 그 집에 들러 보라고 추천을 하고 싶다. 서비서도 좋고 친절하다. 대나무 술도 푸른빛을 띠어 댓잎이나 대나무에서 우려낸 듯한 느낌과 맛이 난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한국대나무 박물관으로 갔다. 정말 대나무 박물관에는 없는 게 없었다. 우리가 옛날에 보아왔던 대나무 광주리에서부터 온갖 형태의 생활용품, 장신구들을 전시하였다. 대나무에 조각을 넣고 산수화 같은 그림을 넣은 대나무 조각은 예술이 따로 없다는 깨달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인간의 섬세함은 이렇게 또 빛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그 전시실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어머니와 세 자매가 들에 나갔다 오는지, 장에 갔다 오는지, 오면서 티격태격 싸웠는지 큰 누나는 울고 있다. 머리에 이지 않은 남자애는 사진기를 보며 신기한 표정이고, 바지를 입지 않은 한 녀석은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얼굴을 가리고 외면하고 말았다. 억척일 것 같은 그 아이들의 어머니를 보니, 보릿고개 힘들다던 전설 같은 이야기 속의 어머니들을 만나게 된다.
남도 답사 일행의 일정은 다소 빡빡하였다. 태양도 머리 위로 작열하였다. 그러나 깨달음도 그 빡빡함 이상이었다. 우리는 다음의 문학답사 기행(紀行)을 기약하였다.
주1)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주2)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당시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청원이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 백서>는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 조선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맞서고 있다. 황사영은 이 백서가 관변 측에 압수됨으로써 1801년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주3) 이 시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는 내가 계해년(1803) 가을에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갈대 밭 마을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軍保)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 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자기의 양경(陽莖:성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 하였다. 그 아내가 양경을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 버렸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목민심서 권8, 첨정)
* 이 글의 다산초당에 관한 부분은 박석무가 쓴 「다산 정약용을 유배지에서 만나다」(한길사)에서 많은 것을 기대었으며 그 안의 문장을 가져온 것도 있다. 아래의 책도 참고하였다.
박석무, 「다산산문선」, 창작과비평사
송재소, 「다산시선」, 창작과비평사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작과비평사
강만길 외, 「다산의 정치경제 사상」, 창작과비평사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창작과비평사
첫댓글 이제 학기의 시작인데..선생님의 글을 보니..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다음엔 이 코스로 떠나렵니다.^^^
샘, 뉴스를 보셨겠지만 자식이 속한 부산의 우다다 학교에 선생님 한 분과 학생 세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5박6일을 장례식장에 있었습니다. 익사체를 건지지 못하여 하루하루.... 피말리는 시간을 보냈지요. 이제 돌아와보니 샘의 꼼꼼하고 깊이있는 여행기가 올라와 있군요. 반갑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있을 때 대나무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그 코스 그대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적이 있습니다. 새삼 그날들을 떠올리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들이 사진을 박은 그 자리에도 앉아 보았지요. 발자국마다 사색에 잠긴 선생님의 모습을 짐작하게 합니다.
아, 어찌 이런 일이 ...... 어찌 말해야 될지 ....... 저는 아무것도 몰랐네요. 선생님께서 일러주시지 않았더라면 알지도 못하였겠네요.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정말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내셨겠네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 시간이 또 늦고 말았으니 저는 내일이나 ......
당연히.... 우리 학교 학생, 교사, 학부형간의 의 끈끈한 유대가 어느정도 인지 모르시겠군요. 오랫동안 집을 비울 만큼... 상황이 그랬습니다. 출근 문제를 겪는 선생님은 내기 힘든 기간이었으니 제가 직접 겪은 일로 생각하시고 더 놀라신 듯-. 고맙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