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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날이 오면..... 원문보기 글쓴이: 1221
대순진리회포교방법
대순진리회의 야비한 가정 방문 방법과 길거리 포덕 방법
이 엄청난 가정파괴 만행을 세상에 알립니다.
이제는 포덕 방법이 교묘히 바꾸어졌습니다.
조상천도식은 초기 입도자에게 2~3년전만에도 요란하게 너스레를 떨며 위기의식으로 위협하며
16만원~260만원을 제사비로 요구하다가 사회 문제화되니 슬그머니 도장 간부회의에서
조상천도식은 공식 석상에서 빼 버리고 이상한 다른 행동으로 돈 요구를 합니다.
※ 가정 방문 방법 :
"미륵, 절에서 왔다고 한다. 물이라도 한잔 얻어 먹자며 무조건 들어온다"
"어느 집에서든 똑같은 사주팔자 또는 똑같은 관상을 이야기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들통날까봐 큰일(화)를 당한다고 말을 못하게 한다.)"
"몇 대위 조상이 어떻고 하면서 알 수 없는 조상 이야기를 한다."
"인적사항을 기록해가고 다음에 오는 사람이 그걸로 잘 알아 맞추는 것 처럼한다.
(어느 집에서나 녹음된 듯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어느 정도 방문하고 말을 받아주면 조상을 핑계로 큰돈으로 제사(성)를 지내게 한다.
(온갖 거짓말로 돈을 빌려서라도 빨리하라고 서두른다.)"
"가정 화목을 앞세워 놓고는 자식과 가정을 버려두고 일꾼(포덕)으로 써먹는다.
(대순진리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절대로 대순이라 이야기를 안한다.) "
※ 길거리 포덕 방법 :
“도에 관심이 있습니까?” “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당신에게 조상의 척이 씌었군요.”
“죽은 조상 중에 한이 맺혀 돌아가신 분이 계시군요?”
"공부하는 학생인데요.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가정과 거리에서 이런 말을 하면서 집요하게 따라 붙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도인”이라 부르는 이들은 [대순진리회]의 광적인 초보신도들입니다.
이들에게 걸려들어 가족이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었거나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당하신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를 보십시오.
자식을 잃고 애타게 찾는 부모님을 보십시오.
적금, 전세금까지 가지고 가출한 아내를 찾으며 실의에 빠진 가장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가정, 주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이비성을 감추기 위해 일정기간 다른 사람에게 말을 못하도록 함>
대순진리회"
1. 교조 강증산(강일순)
대순진리회는 '재단법인 대순진리회'로 등록된 종교단체이다. 교조는 강일순이며 호는 증산으로 강증산으로 罐� 알려져 있다. 1871년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유교·불교·도교·유불선의 여러 경전과 음양술수, 풍수지리·점복(占福)에 일찍부터 심취하여 도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동학의 종교적 위력을 실감하고 동학을 대신할 대도(大道)를 창설하겠다는 꿈을 품고 더욱 유·불·선의 교의와 음양풍수·의술·점복 등 다방면의 연구를 하는 한편 도통공부에 몰두하여 1901년에 도통하였다고 한다. 도통한 그는 이듬해 김제부근에서 제자들을 받아들여 자신을 세상에 내려온 구천상제(九天上帝)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특이한 도통공부를 시키면서 일경의 박해와 핍박 속에 포교활동을 하다가 1909년 6월에 39세로 사망했다.
2. 조철제의 무극도(무극대도교)
증산이 사망한 후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 의해 수십 개의 증산계 분파가 형성되었는데 그 중 조철제란 사람에 의해 오늘날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무극도가 창도되었다. 호가 정산인 그는 1895년에 태어나 14세에 입산수도하여 23세에 득도하여 상제(上帝)의 계시를 받고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터득하여 25세때 강증산의 본거지인 김제에서 증산의 교통계승을 위해 수도하면서 개간사업에 손을 대 경제적인 기반을 잡고, 2년 후인 1921년에 전북 정읍군 해인면에 '무극도'를 세우고 교세가 번창하자 1925년에 '무극대도교' 라 개칭하고 교세가 당당해지자 사람들이 보천교의 차천자와 비길 만하다 하여 조천자라 불렀다. 그러나 1941년 일제의 해산명령으로 무극도는 막을 내리고, 해방후 1948년 부산 보수동에 근거지를 두고 '태극도'라 개칭하여 다시 재건되었다. 1955년에는 부산시 서구 감천동으로 본부를 옮기고 활동하다가 1958년 조정산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박한경(78)이 도전(都典)의 자리에 올랐다.
3. 박한경의 태극도(태극진리회), 대순진리회
그러나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신파와 반대하는 구파 신도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한 폭행, 금품탈취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자 1968년 태극도를 떠나 이듬해인 1969년 중곡동의 1천 8백평의 임야에 본부를 둔 태극진리회를 개관하였다. 72년에 대순진리회로 개칭, 현재는 여주에 본부를 두고 중곡동에 도장과 포천과 제주에 수령도장을 운영하며 대진 남·여 고등학교와 대진학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신앙대상은 교조인 강증산을 '구천상제'로 조철제를 '옥황상제'로 받들어 주요 교리는 "해원(解?), 보은(報恩), 상생(相生)을 종지(宗旨)로 하고 안심(安心), 안신(安身), 경천(敬天), 수도(修道)를 신조(信條)의 강령으로 하고 성(誠), 경(敬), 신(信)을 요체(要諦)로 하여 윤리와 도력을 숭상하고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하여 인간개조와 정신개벽(精神開闢)을 통해 포덕천하(布德天下)하고 광제창생(廣濟蒼生)과 지상신선실현(地上神仙實現)의 지상천국을 이룩"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 대순진리회 연혁
대순진리회는 한국 신흥종교의 시초 격인 최수운의 동학에서 영향을 받은 강일순이 창시한 증산교의 한 분파이다. 1871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한 강일순은 호가 증산(甑山)이며 자(子)는 사옥(士玉)이다. 증산교라는 명칭도 강일순의 호에 따른 것.
당시 사회는 외세의 침략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때를 같이하여 횡행한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인하여 백성들은 궁핍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때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는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쳤지만, 한편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인내천 사상을 표방한 최수운의 동학이 많은 백성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동학의 위력을 실감한 강증산은 동학군에 가담하여 추이를 살피다가 동학을 대신할 만한 종교를 꿈꾸며 다양한 사상을 접하고 수도에 정진하여 1901년 성도(成道)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듬해인 1902년 4월 강증산은 '세상에 내려온 구천상제(九天上帝)'라고 자처하면서 제자를 받아들이고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태을주', '시천주', '칠성주', '운장주', '주역' 등을 가르치며 세력을 넓혀나갔다. 주로 일반 천민층을 대상으로 그들의 사고에 맞추어 쉽게 교리를 설파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1909년, 강증산이 사망하자 우후죽순 격으로 분파가 생겨났으며 그 중 직통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조철제에 의해 지금의 대순진리회가 창교되었다.
경남 함안군에서 1895년 출생한 조철제(호 정산)는 15세 때 만주로 떠나 9년간 입산 수도하여 1917년 상제(강증산)의 계시를 받고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터득했다고 한다. 1921년 전북 정읍군에 무극도(無極道)를 세워 교세를 확장시킨 조철제는 1925년 교명을 무극대도교라고 개칭하였고, 1941년 일제의 해산명령에 의거 해산하였다가 해방 후인 1948년 부산 보수동에 다시 재건하여 태극도(太極道)라고 개칭했다. 1958년 4월 24일 조철제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박한경씨가 교단의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도전(都典)의 자리에 올랐다.
1969년 서울 중곡동에 본부도장을 창건한 박한경씨는 교세를 확장시켜 지난 90년 여주 본부도장과 중곡도장을 비롯, 경기도 포천, 제주도에 수련도장을 설립하였다. 96년 1월 박한경씨는 사망했는데, 현재 전국에 3500여개의 회관과 120만명(97년 종단 발표)의 신도가 있다는 것이 대순진리회측의 주장이다.
그런데 같은 증산교 일파로써 직통임을 주장하는 '증산도'에서 펴낸 「개벽」에서는 대순진리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순진리회에서 땅 상제로 떠받들고 있는 조철제는 어려서 부친을 따라 만주 봉천지방에 이주하여 그 곳에서 김혁(보천교 신도)을 만나 상제님 진리를 처음으로 접하고 보천교에 입교하였다. 그후 1916년 귀국하여 충남 안면도에서 이치복 성도를 만나 증산 상제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고, 1918년 김형렬 성도의 미륵불교 교단에 가입하였고, 그후 1925년 전북 구태인에서 독자적으로 '무극대도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해방후 본부를 부산시 보수동으로 옮겨 교명을 태극도라 개명하였다." 1958년 조종산이 세상을 뜨자 박한경와 간부들간의 종권 다툼이 심화되었는데 이때 박한경은 추종자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중곡동에서 '대순진리회'라는 독자적인 판을 차리게 된 것이다. 이상의 간단한 내력으로 보면 태극도와 후신 대순진리회는 일개 교파에 불과하며 조철제는 차경석 성도와 김형렬 성도 밑에서 증산 상제님을 신앙한 일개 신도일 뿐이다."
5. 실 태
그럴듯한 그들의 교리와는 달리 그들이 평신도에게 가르치는 내용과 포교활동은 그들의 육영사업이 하나의 위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구로 가득하고 화목한 가정을 깨뜨려 사회적으로 물의를 야기시키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시한부 개벽설로 그들은 기독교의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맥락으로 신도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그들은 1996년이 육십진법으로 병자(丙子)년이므로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병든 자가 많아 개벽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개벽이 되면 유공을 많이 한 사람은 은행에 돈을 쌓아놓은 사람처럼 복록을 쌓아 도전에게 선택된 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개벽'이 불발로 끝나 버리자 대부분의 시한부종말론자들이 그러하듯, 시기를 연기해가며 신도들로 하여금 포교에 열을 올리게 한다.
지난 89년 "8월 8일 세상이 끝장난다"는 극단적인 종말론에 미혹되어 대순진리회의 분파인 미륵을 믿는 '민족종교'의 신도 74명이 집단 가출한 '회문산 기도회 사건'(현대종교 89년 9월호 보도)으로 대순진리회의 "개벽"사상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후 96년, 98년, 2000년 개벽 등 수차례에 걸쳐 "개벽"의 때를 연기하면서 이로 인한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순진리회는 포교할 때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에게는 "기나 도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십니까?" "민족종교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라며 접근을 하고 부녀자에게는 "미륵절에서 나왔다" "좋은 곳이 있는데 같이 안가보겠냐"면서 자신들의 실체를 감추며 접근하고 교회와는 관계없는 사주·관상·손금 등을 봐주며 접근한다.일단 그들에게 포섭되어 그들 회관에 가면 입도식이라 하여 조상께 제사를 드린 그들은 포섭된 자의 신상을 파악하여 불안감을 조성하여 유공이라는 제사를 지내게 하는데 이때 정해진 액수의 헌금을 유도하고 유공의 횟수가 더할수록 액수가 많아지고 더 나아가 다른 신도가 돈이 없으면 대신 정성을 드린다 하여 '대성'을 드리게 하는데 이때 비용은 수십만에서 기백만원까지 된다. 또한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라고 하여 남편 몰래 많은 돈을 바친 부녀들은 돈을 더 이상 마련할 수 없게 되자 가정도 팽개친 채 다른 사람 포섭에 혈안이 되어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다니게 된다. 남편의 나무람이나 아이들 뒷바라지 때문에 생기는 포교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면 "고난 없이 편하게 도를 닦을 수는 없다"고 말하여 가정에 대한 중요함을 희박하게 하고, 피라미드 판매방식 같은 포교활동은 많은 가정파탄을 야기시키고 있다.
"잼잼, 조막조막, 조강지처 쪽박찬다, 곤지곤지" - 대순진리회에서 마치 교리인양 신도들에게 교육하는 내용의 일부이다. '조막조막-조씨를 알았으면 조씨를 꽉 잡아라, 조강지처 - 조철제와 강증산을 의미한다, 쪽박찬다-세운의 박씨는 박정희 대통령이고 교운의 박씨는 박한경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기 때문에 쪽박이다, 곤지곤지-용마산 중곡동에 있는 대순진리회를 찾아라 중곡동이 곤지(坤地)다. 신축한 여주도장이 있는 여주를 거꾸로 읽으면 '주여!'가 되?쨉? 기독교인들은 이 여주를 모르고 2000년 동안 주여! 주여! 라고 외치고 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유치함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6. 피해사례
가출·재산헌납·공금횡령까지
서울에 사는 C양은 오래 전부터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통원치료를 받으며 그런 대로 공부도 마치고 직장에도 무리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중 C양은 우연히 대순진리회 포교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따라나서게 되었다. 결국 C양은 직장도 그만두고 몰래 가출을 하고야 말았다. 사방으로 딸을 찾던 C양의 부모는 대순진리회에 계속 연락을 취해 보았으나 "잠시 후에 다시 하라" "그런 사람 모른다" "포덕하러 나가서 지금 없다"는 등 매번 다른 대답만을 들었다고 한다. 일주일 후 C양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왔는데 그간의 행적을 캐묻는 부모에게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은 채 기(氣) 수련을 하고 왔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이렇게 정성을 들이면 부모도 잘되고 조상도 잘되는 길이니 막지 말라며 막으면 다시 가출하겠다고 오히려 부모를 협박하기도 했다. C양의 말에 의하면 도를 통하면 모든 것을 내다볼 수 있고,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왔던 많은 고통들로부터 해방되고 앞일의 재앙도 예측해 피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 길만이 자신이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지 상담 후 약 1개월쯤 지나 대순진리회 간부들과 승용차로 수련장에 가던 C양이 그들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C양의 어머니 K씨는 20년 넘게 금쪽같이 키운 딸을 하루아침에 딴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그것이 무슨 종교냐며 부모와 가족을 몰라보는 종교라면 당국에서 왜 그냥 두는지 알 수 없다고 분노했다.
평생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경우
건축 일을 하며 주택마련을 위해 근근히 모은 4천만원과 패물·현금 등 2천만원을 합해 모두 6천여 만원을 K씨의 부인이 K씨도 모르게 대순진리회에 바쳐버린 것이다. 결국 남편의 손에 이끌려 본지와 상담한 후 대순진리회의 허구성과 잘못된 점을 알게 된 K씨의 부인은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만 정신을 잃기도 했다.
K씨의 부인은 어느날 절에서 찾아온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부터 대순진리회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거의 매일 찾아와 세상 모든 것을 다 터득한 듯한 말투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조금 이상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보통 집안에서 있을 법한 우환이나 걱정거리를 짚어가면서 지적하고 그 해결방법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이내 수긍하고 말았다. 즉 지성으로 하늘에 정성을 쌓아야 하는데 특히 손재수(손해볼 운수)가 있으니 아주 큰 정성을 들여야만 한다고 대순진리회 신도들이 부추겼다. 이에 K씨의 부인은 마음이 약해져 남편 몰래 적금이며 보험이며 아기 패물까지 다 줬고, 마침내 현금 4천만 원도 바치게 되었다. K씨는 부인이 너무 순진한 성격 탓에 생긴 일로 충분히 부인을 용서할 수 있지만 선량한 시민들과 평안한 가정을 흔들리게 만드는 대순진리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정면으로 나서게 되었다. 특히 구제사업이니 학교건립이니 하는 사회사업을 예로 들어가며 대순진리회가 진정한 종단인 것처럼 선전하지만 서민의 피를 빨아 자신들을 선전하는데 열을 올린다면 그것이 무슨 구제사업이냐며 K씨는 분개했다.
경기도 수원시에 사는 유모씨(38) 사연
조그마한 IP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유씨는 초혼에 실패하여 전처 소생의 8살난 딸과 재혼한 부인 최모씨와의 사이에서 난 4살 짜리 아들을 둔 가장이다.
1994년, 전처와 이혼 후 힘든 가운데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유씨는 딸에게 각별히 잘 대해 주었던 강사 최씨에게 마음이 끌려 재혼하게 되었다. 둘 다 초혼의 실패라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딛고 새출발하였던 남달리 결혼생활에 기대가 컸었다는 유씨.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1995년 11월 둘째 아들이 태어난지 2개월만에 최씨가 대순진리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최씨는 유씨가 출근하면 집을 나가 유씨가 퇴근하기 바로 전에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하였던 것이었다. 최씨는 유씨에게 대순진리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 왔으며, 유씨 자신은 하루종일 집에 없는 아내를 의아해 하면서도 친구 집에, 놀이터에 갔었다고 둘러대는 아내의 변명에 설마 하면서도 그저 그렇거니 지나쳤다고 한다. 한 번 이혼의 경험이 있는 유씨로서는 부인과 언성을 높인 것이 빌미가 되어 행여 부인이 딸을 구박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딸아이는 못 먹어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으며, 아침에는 유씨가 아내를 깨우는 일이 늘어만 갔다.
딸아이는 유치원에, 둘째 아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이방에 방치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딸아이가 6살 때 대순진리회에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이 사실을 아빠에게 말할까봐 최씨는 아이를 심하게 학대했다. 행주를 입에 물려 벌을 세우고, 좁은 목욕탕에 불을 끈 채 가두어 놓는 등 유씨도 모르는 사이에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든 일들이 자행되었다고. 새엄마가 무서워서 아빠에게 모든 사실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한 딸을 아내는 갈수록 불안하여 더욱더 학대하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숨겨진 채 까닭 없는 의구심만이 쌓여갈 때 유씨에게는 점점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96년 봄, 결혼 전 친구에게 빌린 돈 700만원을 갚아야 한다며 부인이 울며 사정하기에 적금을 해약하고 얼마간의 현금을 마련하여 준 적이 있었다. 그저 친구에게 갚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이미 그 돈은 장모님이 갚아준 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부터 집에 돈 될만한 것은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 아이의 돌반지, 팔찌는 물론이고 암보험을 해약하질 않나, 심지어 후라이팬, 휴지까지 갖다 바쳤다.
그해 8월, 유씨에게는 더욱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13평 주공 아파트에 살고 있던 유씨는 수원의 24평형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하여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려고 등기부 등본을 열람한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저당이 설정되어 1500만원이 대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유씨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주택담보대출은 명의자만이 가능한데 자신이 대출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내를 추궁하니 아내는 딸아이와의 관계를 좋게하기 위해 굿을 했다며 울면서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순간 큰 충격을 받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딸아이가 심한 학대를 받는 줄을 몰랐던 유씨는 딸아이와의 관계만 좋아진다면, 또한 딸아이를 생각하는 부인의 마음에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하고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IMF사태는 유씨에게 대순진리회의 실체를 알려주었다. 매섭게 몰아닥친 경제 한파로 유씨의 사업도 잘 안되었고 이로 인해 분양 받은 아파트 중도금과 가중되는 높은 이자가 부담이 되어 입주시까지 부모님 집에 합치기로 결정하고 준비하던 중 최씨는 올 1월 18일 가출하였다. 애가 타서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던 유씨 앞에 3일 만에 나타난 최씨는 대순진리회의 입교 사실을 털어놓으며 "2000년 5월에 세상 개벽이 되어 '시드니 올림픽'이며, '월드컵'도 열리지 못하니 집을 팔아 같이 입교하자"며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딸아이에게서 그간 학대받았던 사실을 전해 듣고 전율을 느낀 유씨는 그제서야 모든 의혹이 하나하나 풀리는 것 같았다. 최씨가 자신의 주민등록증과 인감을 훔쳐서 대순진리회에 가져다 주었고 유씨와 인상이 비슷한 대순진리회측 사람이 유씨로 가장하여 동사무소에서 어렵지 않게 인감증명서를 발급 받아 은행에서 대출 받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현재 최씨와 이혼한 유씨는 자신의 엇갈리는 운명을 한탄하면서도 허무맹랑한 교리로 가정을 파괴하는 것도 종교냐며 법적 대응도 불사할 각오를 내비친다.
그 외 사건들
지난 95년 6월 3일자 제주신문에는 "살이 끼었으니 치성으로 풀어라" "여성 수백명 상대 돈 뜯어"라는 제하의 사건기사가 났었다. 그 내용은 얼굴에 살이 끼었으니 치성을 들여 풀어야 한다며 20대 여성 1백여 명으로부터 50만원에서 2백만원의 치성금을 받아온 20대 두명이 검찰에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날 제주 KBS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한 바 있다.
94년 5월 24일자 중앙일보에는 축협에 다니며 공금 6천여 만원을 횡령, 대순진리회에 헌금한 어느 신도가 구속되었고 그 헌금을 받은 간부들이 장물취득 혐의로 구속영장을 받았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된 바 있다.
95년 10월 4일 부산매일신문에는 "「대순敎」간부 등 5명 令狀"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심신미약자를 꾀어 가족들 모르게 거액을 빼돌려 헌금케 하고 신병을 숨겨온 대순진리교 간부 등 관계자 5명에게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등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이상 예를 든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하루에도 몇 건씩 상담과 제보가 접수되고 있는데 모두 예를 들기엔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이들의 이러한 파행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또 한두 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 대순진리회 자체가 엄청난 모순과 문제를 안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대부분의 사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치성을 드리고 도를 닦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같은 물의에도 불구하고 대순진리회가 수년간 온실의 화초처럼 성장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내막은 무엇일까? 민주화·세계화를 외치기 전에 국가는 서민들의 그늘진 부분을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건들이 대순진리회 종단차원이 아닌 중간간부 이하의 구속과 처벌로 ?떴ジ?되어졌고 종단측은 그러한 사건마다 잘못을 시인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단의 문제가 아니고 개인들의 문제임을 우겨왔다. 그러나 같은 문제가 전국적으로 되풀이되는 이상 그러한 변명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