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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Die Verwandlung, 1915; fr. La Métamorphose)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in 카프카 단편집, pp. 27-124.
* 나로서는 한 가정을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다가 지친 맏이인 아들의 심경이 들어 있는 것 같이l 보인다. 어려운 한 가정의 삶을 송두리째 책임지고 꾸려나가다가 지친 또는 자포한 한 삶의 단면 같기도 하다. 예전에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한 인간이 꿈을 꾸다가 악몽을 꾼 것과 같은 정도로 생각하였고, 그런 사태에 대한 묘사로는 참으로 뛰어나다고 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1975)을 읽으면서, 고착적 사회의 단면들(절편들)은 거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층이 표면에 적용하는 방식이라면 어느 곳에서도 고착적이고 강압적이고 게다가 폭력적인 방식이 오래 전부터 당연히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성에 대해 여성에 대해,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 대해 등등, 이런 것들을 총괄해서 표현하여 갑이 을에 대해, 즉 상층이 심층을 개돼지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의 변화 또는 생산관계의 변화가 의식을 지배한다고 한다. 그 변화는 표면적이고 심층은 여전히 리좀이 흘러가듯이 깊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évoluer), 표면은 그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색깔을 달리하나, 상층은 변함없이 (토지 소유든 기계 소유든) 자본을 배경으로 그대로 있다. 어쩌면 상층이라는 상징 또는 허구가 어떠한 색깔도 지니지 않고, 어떤 모습도 없기 때문에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습이 없는 것’을 어떤 모습이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 국가와 종교일 것이고, 이들이 권력과 독단으로 표면에다가 모습을 심어 놓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심어 놓는 모습은 상층의 주변에 맴도는 주구(走狗)들이, 조그만 사적 이익을 빨면서, 뭐가 빨리고 뭐가 먹히는 지도 모르고 열심히 물 뿌리고 살리려 든다는 것이다. 김기춘, 김관진, 우병우 등이 심어 놓은 박정희나 박근혜도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그런데 상층의 상층으로 정윤회 그리고 최순실이 또 있었다고 하니 ..., 실재로는 박근혜도 허수아비란다. 옥상 옥에 또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상층을 올라가서 보면 또 올라가면 갈수록 또 무엇인가 있는 것 같다. 재벌이 있고, 그 위에 또 일본자본과 미국 군수자본이, 결국에는 미국제국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 한다.
카프카는 일차대전이, 레닌이 말하듯,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또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변신(1915) 속에서 가정을 담당하는 아들은 늘 피곤하고, 기차를 타는 반복적인 일을 하더라도 자부심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이 하루아침에 자신이 갑충으로 되어 있음을 직감하게 했을까? 상충에서 표면으로 내려오는 위계적 질서의 권력 강압(?), 강압적 사회가 지닌 관료적 질서의 법률 폭력(?), 자기 종교와 도덕적 관습의 가부장적 부권의 가상적 강박(?) 등은 한 개인의 일생에서 겪어야 할 고난과 고민 정도로 남겨두기에는 과도한 부담이었던가? 카프카에서는 시대적 형성(자본의 기제)에서 오는 제도의 여러 강압, 강제, 독단, 폭력, 강박 등이 구체적으로 마주쳤을 것이고, 그의 개인적으로는 두 번의 약혼과 파혼으로 이어지는 그 자신의 생존 과정이 드러나게 되면서 느껴지고 쓰여진 일부가 아닐까?
일반적으로 작가에게서 몸과 뼈 속에 우러나오는 번민과 고뇌가 느껴지는 가운데, 독자는 그 작가와 작품에 공감과 감동을 하는 것이지, 그런데 작품이 논리와 설명, 해설과 설교로 평가가 이루어지지는 것은 아니리라. (50QMC)
**** ** * * ** 본문 중에서, 변신(Die Verwandlung, 1915; fr. La Métamorphose), in 카프카 단편집(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 pp. 27-124.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 변신(Die Verwandlung, 1915; fr. La Métamorphose)
I.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에서 한 흉측스러운 갑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처드니 활 모양의 여러 각질로 나누어 있는 배가 갈색으로 불룩하게 솟아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 둥그스름한 배 위에 이불이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듯 가까스로 걸쳐져 있었다. 그의 눈 앞에서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다리들이 무력하게 바둥거리고 있었다. /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조금 작기는 하지만 사람이 살기에 손색이 없는 방은 낯익은 벽돌로 사면이 둘러싸인 채 평온하게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29 시작 문장과 다음 문장 일부)
아버지는 오히려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는 듯 더욱 특이한 소리를 질러대며 그레고르를 몰아댔다. 이제 그레고르의 뒤에서 나는 소리는 더 이상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농담하는 소리가 아니었고, 이제 그레고르는 -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되어 - 문을 밀고 나갔다. 몸 한 쪽이 들리는 가 싶더니, 몸 전체가 문 입구에 비스듬히 걸쳐졌다. 그러는 사이 한 쪽 옆구리에 상처가 났고, 하얀 문에 보기 흉한 얼룩이 남았다. 그는 곧 몸을 꽉 끼어 버렸고, 이제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한쪽 다리들은 바르르 떨며 허공에 떠 있었고, 다른 쪽 다리들은 고통스럽게 바닥에 짓눌려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뒤에서 힘껏 그를 걷어찼는데, 그것은 이번에는 정말 구원의 행위였다. 그레고르는 피를 심하게 흘리며 방 안 깊숙이 날아갔다. 이어 아버지는 지팡이로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사방이 조용해졌다. (59, I절의 마지막 문장)
II
어스름이 되어서야 그레고르는 혼수상태와도 같은 무거운 잠에서 깨어났다. 방해하는 소리가 없었더라도 그는 더 늦게 깨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실컷 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아마 휙 스쳐가는 발소리와 현관으로 통하는 문이 조심스럽게 여닫히는 소리가 그를 깨운 듯했다. 창백한 가로등 불빛이 방 천장과 가구의 윗부분을 여기저기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레고르가 누운 아래쪽은 어두컴컴했다. 그는 이제자 진가를 깨닫게 된 더듬이로 아직은 서툴게 더듬으면서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문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의 왼쪽 옆구리는 마치 아직 다 아물지 않아 팽팽하게 당겨지는 길쭉한 형태의 상처처럼 여겨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두 줄의 다리를 절둑거리며 나아가야 했다. 하여튼 다리 하나는 오전의 난리 통에 심하게 손상을 입어 - 다리 하나만 손상은 입은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 힘없이 질질 끌려갔다. (60, II의 첫문단)
... 그때 무엇인가 가볍게 날아와 그의 바로 옆에 떨어지더니 앞쪽으로 데굴데굴 굴러 왔다. 그것은 사과였다. 이어 뒤쪽에서 두 번째 사과가 바로 날아왔다. 그레고르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섰다.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에게 사과로 폭탄 세례를 퍼부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찬장의 과일 접시에서 사과를 집어 주머니에 가득 채워 넣은 다음, 일단은 정확히 겨냥하지도 않고 계속 집어 던졌다. 조그맣고 빨간 사과들은 바닥에 떨어져 구르면서 마치 전류라도 통하는 듯 서로 부딪혀 튕겨 나갔다. 제대로 던져지지 않은 사과 하나가 그레고르 등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지만, 다행히 상처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곧이어 날아온 사과는 그레고르의 등에 명중하면서 그대로 꽂혔다. 그레고르는 불시에 당한 그 엄청난 고통이 자리를 옮기면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듯 몸을 질질 끌며 나아가고 했다. 그러나 마치 그 자리에 못 박히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 없었고, 모든 감각이 극도로 혼란에 빠지면서 결굴 그 자리에 뻗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방문이 열리면서 비명을 지르는 여동생을 뒤로 하고 어머니가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오는 모습이었다. 기절한 어머니가 숨 쉬기 편하도록 여동생이 옷을 벗겨 놓았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달려가는 모습, 도중에 치마의 끈이 풀려 하나씩 흘러내리는 모습, 어머니가 그 치마들에 걸려 비틀거리다가 아버지 품으로 달려들어 아버지를 와락 껴안고 아버지와 일체가 되는 모습을 보았는데 – 그 때 그레고르의 시력은 이미 나빠지고 있었다. - 어머니는 두 손으로 아버지의 뒷머리를 감싸고는 그레고르의 목슴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91, II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부분)
III
그레고르는 상처가 심했고 그것으로 한 달 넘게 고통을 받았다. 그의 등에 박힌 사과는 누구도 빼내 줄 엄두를 내지 못했으므로 계속 박힌 채 기념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입은 상처는 이제 아버지에게도 그레고르가 지금 비참하고 구역질나는 모습을 가졌지만 원수처럼 다루어서는 안 되는 가족의 일원임을 상기시켜 준 듯 했다. 그리고 그렇게 대하는 대신 그에 대한 혐오감을 삼켜 버리고 인내심을 갖고 그저 참아 내야 하는 것이 가족의 의무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93)
그리고 나서 세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는데, 그것은 그들이 몇 달 만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오붓하게 그들 가족들만 앉아 있는 전차 차량에 따스한 햇살이 들어와서 곳곳을 밝게 비추었다. 그들은 등을 좌석에 편안히 기대고는 앞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생각해 보니, 전망이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서로 상세리 물어본 적이 없었지만 세 사람 모두 아주 좋은 일자리를 얻은 데다 앞으로는 특히 전망이 밝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에 그들의 상황을 가장 [좋게] 개선해 주는 것은, 즉시 집을 옮기는 일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레고르가 고른 지금의 집보다 덕 작고 더 싸지만, 위치도 좋고 전반적으로 좀 더 실용적인 집을 얻고 싶었다.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잠자 씨와 잠자 부인은 점점 생기를 띠어 가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두 볼이 창백해질 정ㄷ로 고생했는데도 최근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처녀로 피어났다는 것을 거의 동시에 느꼈다. 잠자 부부는 말 수가 적어지고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는 눈길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제는 딸에게 착실한 신랑감을 구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딸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젊은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을 때, 잠자 부분에게는 그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보증처럼 여겨졌다. (124, III의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부분)
(3:2, 50Q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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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변신으로 아버지의 변모 장면 묘사는 훌륭하다. (변신(Die Verwandlung, 1915) in 카프카 단편집(카프카, 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II pp. 88-89) 아래 있으니 읽어 보시길, ... /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수직적일 때는 아들의 변신에 아버지는 아들을 방기하는 차원일 수 있다. 수평적 차원에서 아들의 변신은 아버지도 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레고르의 변신에 환유적으로 아버지 잠자씨가 변신할 수 없는 경우이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서 또는 기회를 노려서, 또는 아버지가 아들의 의존을 벗어날 때, 아버지는 변모를 하거나 원래의 자기 모습과 은유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부자관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모자 관계인데, 변신에서 어머니는 동양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한없는 자애심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유태인들의 사유에서 어머니와 우리나라의 어머니의 심성은 유사한 것 같아 보인다. 아들의 변신도 보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고 그저 자신이 낳은 아들로서 간직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나로서는 들뢰즈/가타리에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모자 관계에 대한 관점을 찾아 보기가 싶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수직관계(파라노이아) 비판에 중점을 두면, 그 비판으로써 수평관계(스키조)에서도 모자관계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로 여겨진다. (50QMC)]
# 들뢰즈/가타리, 카프카(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1975)
<< 그는 곧장 소파 아래에서 뛰쳐나왔다. 두 여자는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옆방에서 책상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네 번이나 방향을 바꾸어 이리저리 달려보았다. 정말이지 무엇을 먼저 구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는데, 그때 이미 텅 비어 버린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모피로 온몸을 감싼 여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벽을 타고 올라가 액자 유리에 몸을 붙이고는 꽉 눌러 댔다. 차가운 유리는 그의 몸에 찰싹 붙어 뜨거운 배를 기분 좋게 해주었다. 그레고르가 지금 몸을 완전히 덮고 있는 이 그림만은 아무도 결코 빼앗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두 여자가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거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래 휴식을 취하지 않고, 벌써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레테는 한 쪽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안고 거의 부추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자, 이제는 무얼 나를까요?” 그레테는 이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벽에 있는 그레고르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어머니가 옆에 있어서 인지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어머니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어머니 쪽으로 기울였고, 별 생각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요, 우리 잠깐만 거실에 가 있지 않을래요?” 그레고르가 보기에 그레테의 태도는 명백했다. 그녀는 일단 어머니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고 그를 벽에서 내려오게 할 생각이었다. ‘좋아, 어디 해볼테면 해 보라지!’ 그는 그림을 깔고 앉았으며 절대로 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그레테의 얼굴에 뛰어들 생각이다.> (변신(Die Verwandlung, 1915) in 카프카 단편집(카프카, 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II, pp. 84-85)
<... “정말 이럴 거야, 그레고르 오빠!” 여동생이 주먹을 쳐들고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외쳤다. 그레고르의 변신 이래 그녀가 그에게 직접 던진 최초의 말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졸도에서 깨어나게 할 만한 무슨 약물이든 가져오려고 옆방으로 달려갔다. 그레고르도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림을 구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유리에 너무 단단히 붙어 있어서 그는 힘겹게 몸을 떼어 내야 했다. 그는 예전처럼 여동생에게 무슨 충고라도 해 줄 수 있을까 해서 옆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단지 그녀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동생은 이런저런 조그만 병들을 뒤지다가 문득 뒤를 돌아 보더니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 바람에 약병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어졌다. 깨진 조각 하나가 그레고르의 얼굴에 상처를 냈고 무엇인지 코를 찌르는 약물이 그의 주위로 흘러들었다. ...> (변신(Die Verwandlung, 1915) in 카프카 단편집(카프카, 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II. p. 86)
< ... 물론 그레고르는 최근에 새로운 기법으로 기어 다니는 데만 정신 팔려 다른 일이 예전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변화된 상황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 사람이 과연 자기 아버지란 말인가? 그레고르가 출장을 떠날 때면 늘 지친 모습으로 침대에 파묻혀 누워 있던 그 사람,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 저녁이면 여전히 잠옷 바람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인사하던 그 사람, 제대로 일어날 수 없어 반갑다는 표시로 겨우 팔만 들어 보이던 그 사람, 1년에 몇 번 정도 일요일이나 명절에 어쩌다가 함께 산책을 나갈 때면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걷는 그레고르와 어머니 사이에서 낡은 외투에 푹 싸인 채 지팡이를 조심조심 떼어 놓으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늘 조금씩 더 느리게 걷던 그 사람, 무슨 말을 하려면 꼭 걸음을 멈추고는 앞서 걷던 가족을 주위에 불러 모으던 그 사람이 정말 맞는 걸까? 그러나 지금 그의 아버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 있었고, 은행의 사환들이나 입을 것 같은 금색 단추의 팽팽한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빳빳하게 세운 상의의 칼라 위로는 이중 턱이 툭 불거져 나와 있었고, 덤불처럼 생긴 눈썹 아래로는 검은 눈동자가 주도면밀하고 예리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평소에는 헝클어져 있던 백발도 어색할 정도로 정확하게 가르마를 타서 빗어 내린 듯 머리에 착 붙어 윤이 났다. 아버지는 먼저 모자를 벗어 던졌는데, 어느 은행의 마크인 듯 금색 모표가 붙어 있는 모자는 커브를 그리며 방을 가로질러 날아가 소파 위에 떨어졌다. 이어 긴 제복 상의의 양끝자락을 젖히고 양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해 험악한 얼굴을 하고서 그레고르에게 걸어 왔다. ... > (변신(Die Verwandlung, 1915) in 카프카 단편집(카프카, 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II pp.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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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단편소설(nouvelle): 모든 단편 소설에 동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프카의] 단편 소설은 본질적으로 동물적이다. 카프카에 따르면 동물은 무엇보다도 단편 소설의 대상과 부합한다. 출구를 찾는 것.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편지는 이러한 대상[목적]에 충분치 못한데, 왜냐하면 악마, 악마와의 계약은 탈주선을 제공하지 못하고, 그와 반대로 스스로 함정으로 돌진하거나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펠리체와의 서신 교환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선고」나 「변신」 같은 소설을 썼다. 그게 위험을 상상하기 위해서든, 위험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던 간에 말이다. 아니 차라리 단편 소설은 편지의 무한한 흐름보다도 더 닫혀 있고 치명적인 것이다. 편지는 아마도 그것이 실어나르는 피를 통해서 모든 기계를 가종시키는 발동기라고 할 것이다.>(85) .. <요컨대 동물 소설들은 표현기계의 일부로서 편지와는 다른 데, 이는 이것이 외견상의 운동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두 가지 주제의 구별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포착하고 현실 그 자체 속에서 쓰여 지는 한, 동물 소설은 표현 기계의 일부로서 편지와는 다른 데, 이른 그것이 외견상의 운동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두 가지 주체의 구별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포착하고 현실 그 자체 속에서 쓰여지는 한, 동물 소설은 두 가지 극 내지 두 가지 대립적 현실의 긴장 속에 사로잡힌다. 동물-되기는 출구를 유효하게 보여주고 탈주선을 유효하게 그려 주지만 그것을 따라가거나 이용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선고」는 오이디푸스적 이야기로 남아 있는데, 거기서 카프카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즉 {물에 빠져 죽으라는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아들은 동물-되기조차 시도하지 않고 죽으러 가며, ‘친구가 있는’ 러시아를 향해 열린 자신{의 삶}을 전개할 능력도 없다.)> (89-90) (변신(Die Verwandlung, 1915) in 카프카 단편집(카프카, 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II pp. 89-90)(50QLA)
# 들뢰즈/가타리, 카프카(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1975)에서 변신(Die Verwandlung, 1915)의 주인공 “그레고어 잠자”에 대하여
리앵(Antonín Liehm, 1924-)의 “Franz Kafka dix ans après 1973)”, Les Temps Modernes.을 인용하여, 동유럽에서 카프카 평가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원주: 소부르주아적 내면주의와 모든 사회적 비판의 부재는 카프카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비난의 우선적인 중요 주제다. {이를 위해서는} 1946년 주간지 행동(L’Action)에 게재된 설문 “카프카를 태워 버려야 하는가?”가 참고가 될 것이다. 나아가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카프카는 그가 관료제에 대해 그린 초상화를 통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전투를 이끄는 적극적인 반(反)사회주의자로서 점점 더 비난 받게 된다. 한편 사르트르(Sartre, 1905-1980는 196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정치-문화적 관계에 대해, 그리고 특히 카프카에 대한 두 번의 콜로키움이 개최된다(1963년 및 1965년). 참가자들은 거기서 깊은 변화의 징후를 본다. 또한 실재로 골드스튀커(Goldstücker, 1913–2000), 피셔(Fischer, 1899–1972), 카르스트의 중요한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소련 측 참석자들은 없었고, 문학잡지에서 콜로키움의 반향은 거의 없었다. 독일민주공화국(R.D.A., République démocratique allemande ?)만이 그에 관한 지면을 할애했는데, 그것도 비난을 위한 것이었다. 이 콜로키움과 카프카의 영향은 뒤이어 “프라하의 봄”[1968년]의 원인으로 공격받기도 했다. 골드스튀커는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나와 에른스트 피셔를 비난했다. 고전적 작품의 상징인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사회주의적 인간의 정신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풍뎅이로 변해버린 그레고어 잠자라는 카프카의 슬픈 영웅으로 대신하려 했다고” {그 뒤} 골드스튀커는 영국으로 이주해야 했고, 카르스트는 미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동구권의 상이한 정부들의 각각의 입장 및 골드스튀커와 카르스트의 최근의 선언에 관해서는 안토냉 리앵의 훌륭한 글 “Franz Kafka dix ans après”, Les Temps Modernes (n° 323), 1973년 7월호 참조. (112, 제5장 내재성과 욕망) [리앵(Antonín Jaroslav Liehm, 1924-) 체코 작가. 1969년 이래로 부인과 함께 파리거주 번역가.]
(6:27, 50Q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