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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이두로 써진 경교의 하나님 표현
(홍천하 태사를 칭송(송시열 [남양유생통문]에서)한 당성/남양 송씨 송시열 宋時烈의 童蒙先習[1617] 동몽선습에서)
"天地之間萬物之中厓 唯人伊 最貴爲尼 所貴乎人者隱 以其有五倫也羅."
천지지간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긔 니 소긔호인자 이기유오륜야라.
(나중 성 프랜시스가 작사한 한국 개신교 및 카톨릭 찬송가[온천하만물 우러러]와 유사)
"此五品者隱 天敍之典而人理之所固有者羅."
이 다섯 가지 일은 하나님이 펼쳐 준 모범이고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도리(이치)이다(동몽선습)
"神農氏作耒耜하며 製醫藥하시고"
"王靈(성령과 유사)이 不振하니라."
"天厭穢德이라 大明이 中天하사 聖繼神承하시니 於(오)千萬年이로다."
하나님이 더러운 덕을 싫어하셨는지라 大明이 하늘 한 가운데로 떠올라 聖人(거룩한 성도들)과 神人(하나님의 아들)이 계승하였으니 아! 천만년을 이어가리로다.
"東方에 初無君長하더니 有神人이 降于太白山檀木下어늘"
동방에 처음에는 君長이 없었는데 神人(하나님의 아들)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자
"天命이 歸于眞主하니"
하나님의 소명이 진실한 임금에게 돌아가니 등등(동몽선습)
설총 '이두'로 써진 하나님 앞에서 맹약 기도문
학사 홍천하와 승사 설총이 살아있던 시절(7세기)의
"임신서기석 壬申誓記石 "이두표현"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七月二二日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나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 충성의 도를 간직하여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일을 잃으면 하나님께 큰 죄를 얻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치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우면 가히/모름지기 이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시경 상서/서경 예기 좌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하였다." (경주의 산 서기석)
마한 소도 蘇塗의 경교 연관 가능성
삼한 때에,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聖地). 여기에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렸는데,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나더라도 잡아가지 못하였으며, 후대 민속의 ‘솟대’가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다.
자세한설명은 아래 일본어 설명을 보라.
설총의 화황계
당나라에서 파송한 홍천하 학사의 제자 설총의 '이두'가 무엇인지를 그림으로 먼저 보자.
통일 신라 이두 공예품
설총의 한국 경교 경전 번역을 위한 이두는 일본 경교를 소개한 가다가나의 기원이었다.
경교의 세존 미시하(메시아)와 삼존/삼위독체 하나님, 복음(타종) 경교의 경도(기도)
죄인의 각성과 책임 정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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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교는 통일신라 '이두' 체계를 받아드려
성경을 일본어 가다가나로 번역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마한의 소도는 경교에서 유래 가능성
馬韓の 「蘇塗」 と 外(ソト)
「蘇塗」に関して民俗学的考証がなされています。長崎県対馬市の厳原町(いづはらまち)に卒土(そと)の浜があります。この地は明治9年まで人の居住が禁じられていました。ここに逃れた罪人は、免罪されたといわれています。
『日本書紀』の「神功皇后即位前紀」の冒頭で、神功皇后が託宣を得る際、審神者(さにわ)、即ち神がかりした皇后の託宣を判じる大役を務めたのが審神者(はんしんしゃ)の中臣烏賊津使主(なかとみいかつおみ)でした。中臣は神と民の間に在って神を祀るのが職掌ですから、烏賊津使主の原義は「厳(いか)つ使主」です。「使主(おみ)」は、「御身 (おみ)」という尊称ですから、「厳(いか)つ」の意味が重要になります。それは「神威が強い」ことを表します。「雷」を「厳(いか)つ霊(ち)」と言い、「宮島」を「厳島(いつくしま)」と呼び、そして「対馬」の「厳原町(いづはらまち)」は、神域の尊称となったのです。
『魏志東夷伝馬韓条』には,大木を竿(さお)として立て、それに小銅鐸と鼓をかけて,神を祀る儀式があったことが伝えられています。蘇塗の祭りは、竿を神木に見立て、小銅鐸、鳥の羽、布を結びつけて天神を降ろし、民がこれをとりまいて歌い踊る祭りのように表現しています。その神木の竿を蘇塗(そと)、あるいは鳥竿(そって)というのだそうです。そこから、鳥形の木製品を竿の上に飾り、ムラの出入り口に立てて、村内に悪霊が入らないように結界とするソッテ信仰と神社の鳥居にまで変化していきます。
朝鮮半島南東部、洛東江(ナクトンガン、らくとうこう)が流れる慶尚南道(キョンサンナムド、けいしょうなんどう)の河東郡(ハドンぐん)で10月中旬から末まで2週間位、青鶴紅葉祭りが開かれています。この期間内に蘇塗祭天とも呼ばれる開天大祭が催されます。蘇塗祭天は、昔は、蘇塗という聖域を立て、天に祭を捧げ、檀君神話に基づく経典とその徳目を教えたそうです。
출처 http://yumiugine.exblog.jp/
일본 '만요가나'에서 유래한 '가다가나' カタカナ 800년경 사용
ア a 아 | イ i 이 | ウ u 우 | エ e 에 | オ o 오 | -ャ ya 야 | -ュ yu 유 | -ョ yo 요 |
カ ka 카 | キ ki 키 | ク ku 쿠 | ケ ke 케 | コ ko 코 | キャ kya 캬 | キュ kyu 큐 | キョ kyo 쿄 |
ガ ga 가 | ギ gi 기 | グ gu 구 | ゲ ge 게 | ゴ go 고 | ギャ gya 갸 | ギュ gyu 규 | ギョ gyo 교 |
サ sa 사 | シ shi 시 | ス su 스 | セ se 세 | ソ so 소 | シャ sha 샤 | シュ shu 슈 | ショ sho 쇼 |
ザ za 자 | ジ ji 지 | ズ zu 즈 | ゼ ze 제 | ゾ zo 조 | ジャ ja 자 | ジュ ju 주 | ジョ jo 조 |
タ ta 타 | チ chi 치 | ツ tsu 쓰 | テ te 테 | ト to 토 | チャ cha 차 | チュ chu 추 | チョ cho 초 |
ダ da 다 | ヂ ji 지 | ヅ zu 즈 | デ de 데 | ド do 도 | ヂャ ja 자 | ヂュ ju 주 | ヂョ jo 조 |
ナ na 나 | ニ ni 니 | ヌ nu 누 | ネ ne 네 | ノ no 노 | ニャ nya 냐 | ニュ nyu 뉴 | ニョ nyo 뇨 |
ハ ha 하 | ヒ hi 히 | フ fu 후 | ヘ he 헤 | ホ ho 호 | ヒャ hya 햐 | ヒュ hyu 휴 | ヒョ hyo 효 |
バ ba 바 | ビ bi 비 | ブ bu 부 | ベ be 베 | ボ bo 보 | ビャ bya 뱌 | ビュ byu 뷰 | ビョ byo 뵤 |
パ pa 파 | ピ pi 피 | プ pu 푸 | ペ pe 페 | ポ po 포 | ピャ pya 퍄 | ピュ pyu 퓨 | ピョ pyo 표 |
マ ma 마 | ミ mi 미 | ム mu 무 | メ me 메 | モ mo 모 | ミャ mya 먀 | ミュ myu 뮤 | ミョ myo 묘 |
ヤ ya 야 | ユ yu 유 | ヨ yo 요 | |||||
ラ ra 라 | リ ri 리 | ル ru 루 | レ re 레 | ロ ro 로 | リャ rya 랴 | リュ ryu 류 | リョ ryo 료 |
ワ wa 와 | ヰ wi 이 | ヱ we 에 | ヲ wo 오 | ||||
ン n/nn -ㄴ | |||||||
아래의 가타카나는 근현대에 들어 추가된 것으로, 주로 외국어 발음을 표기하는 데 사용한다. | |||||||
イェ ye 예 | |||||||
ウィ wi 위 | ウェ we 웨 | ||||||
ヴァ/ヷ va 바 | ヴィ/ヸ vi 비 | ヴ vu 부 | ヴェ/ヹ ve 베 | ヴォ/ヺ vo 보 | |||
シェ she 셰 | |||||||
チェ che 체 | |||||||
ジェ ヂェ je 제 | |||||||
ティ ti 티 | トゥ tu 투 | テャ tya 탸 | テュ tyu 튜 | テョ tyo 툐 | |||
ディ di 디 | ドゥ du 두 | デャ dya 댜 | デュ dyu 듀 | デョ dyo 됴 | |||
ツァ tsa 싸 | ツィ tsi 씨 | ツェ tse 쎄 | ツォ tso 쏘 | ツャ tsya 쌰 | ツュ tsyu 쓔 | ツョ tsyo 쑈 | |
ファ fa 화 | フィ fi 휘 | フェ fe 훼 | フォ fo 호 | フャ fya | フュ fyu | フョ fyo |
일본 경교 마리아 관음상
일본 대진경교비 복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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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원나라 경교 성경 번역은
세종의 한글 창립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세종은 원나라에서 머물며 몽고어와 경교(에리게리온 몽고식 복음파 기독교)를 알았고, 한국 조선에 돌아와 왕이 되었을 때 유교 이름으로 '경교'(경사들과 경중들을)를 발본 색출 멸망시켰다(조선왕조실록). 경교는 시리아 본부에서 처음에는 300여명 선교사들이 동방에 파송되고(시릴/키릴 몽고어), 후에 영국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아이요나'(Iona) 선교본부에서는 더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성경과 찬송과 교리서를 번역할 때 한문중심 권 동양 유라시아 극동언어 공통표기를 가졌다고 보는 것은 상식이다(중국 남쪽 베트남도 한문권이라 표기법은 동일).
몽고/원나라 경교 비문에서 성경번역이 언급돼 있어(가운데 사진)
당나라에서 번진 몽고 성경 구절 번역
몽골 경교 파스파어 구조는 한글과 일치
인용출처 http://www.khaan.net/baikal/language.html
"몽골족과 퉁구스족 그리고 한민족은 본래 같은 부족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서 이를테면 큰집과 작은 집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퉁구스라는 말은 탄군 즉 단군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결국 퉁구스족으로 불리는 만주족은 탄군족에 다름 아닌 것이다.
몽골족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민족을 본래 배달족이라고 부르는 데 그 이유는 바이칼 호수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즉 바이칼에서 바이달로, 바이달에서 다시 배달로 변천을 거쳐 오늘날 배달족, 배달족 하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
역사서들의 증명
"몽골어와 한국어 그리고 만주어가 오랜 옛날에는 같았다는 기록이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어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즉 위서와 북사, 신당서 등이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 때 우리의 부여, 예맥계의 언어가 몽골의 조상인 몽올 실위의 언어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예컨대 두막루국은 옛부여였다. 본래는 예맥의 땅이었다. 실위국은 고막계와 더불어 같은 말을 썼다. 거란 두막루국도 같았다. 실위국은 거란의 무리다. 말은 고막계, 거란, 두막룩국과 더불어 같았다. 달말루는 스스로 북부여 후예라고 한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였다. 등등
이것만 보더라도 몽골, 만주, 한민족은 본래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곁뿌리 관계에 있는 것이다. .다만 몽골과 거란은 지리적으로 가깝게 지낸 데 반해서 만주와 한민족은 몽골, 거란과 오랜 세월 동안 떨어져 사는 바람에 서로 오해속에서 때로 적대시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가 거란에 의해 망했을 때 발해의 유민들은 거란에 대해 줄기차게 발해 부흥운동을 벌인데 비해, 발해의 계승국 금이 건국 되었을 때 발해의 유민들은 금에 대해서는 조금의 저항도 없었다는 점을 볼 때 만주, 한반도는 몽골, 거란과 다소 감정이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언어학적 동질성으로 본 한국말과 몽골말
"몽골어와 한국어의 친족관계를 밝히려면 우선 몽골어와 한국어 사이에 수사, 대명사, 신체어, 친족어 등 기초 어휘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유사성을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또한 음운론적으로 음운대응이 이뤄지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우선 비교 가능한 신체어 목록을 작성하여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제시해 연구 논문(1993)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예컨대, ①눈(眼): ② 코(鼻): ③ 귀(耳): ④ 입(口): ⑤ 혀(舌): ⑥ 궁둥이(臀): 등 많은 신체지칭어가 몽골어와 한국어가 일치하고 있다. 이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음운대응도 고찰하여 비교언어학적 방법에 맞는 연구를 계속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그 외의 수사, 대명사, 친족어, 색채어 등 기초어휘 분야에서 얼마든지 비교 가능한 어휘가 많이 있고, 필자가 검토한 바 있는 <몽골비사>(蒙古秘史), <몽어노걸대> 등 몽학삼서에도 귀중한 비교 어휘 자료가 많이 있다.
그리고, 몽골어와 한국어의 명사의 준굴곡과 동사의 굴곡에서도 공통점이 많음을 밝힌바(최기호;1985) 있다. 이렇게 볼 때 세밀한 연구를 더욱 계속하면 그 계통을 밝힐 수 있는 문법적 요소가 많이 나올 것으로 본다. "
"세종 때 한글 28자가 만들어지고 나서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등(等)이 요동(遼東)으로 귀향 온 명나라 음운학자(音韻學者) 황찬(黃瓚)에게 음운을 13차례나 물었다고 합니다."
[출처] 몽골어와 한글의 관계 |작성자 자유로
파스파(Phags-pa, 八思巴, 1235~1280)
[출처] 몽골어와 한글의 관계
파스파문자 원본
출처 위키사전
"파스파 문자는 공표 이후 100여 년 동안 쓰였지만, 빨리 쓰는 데 어려움이 있는 등 표기가 불편하여 통상 위구르 계통의 문자가 쓰였고(일설에는 외국인만 사용하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결국 14세기에 원(元)의 멸망과 함께 폐기되었지만, 당시 파스파 문자를 사용한 비문·천화·서적 등 공적인 문서가 현재 남아 있으며, 특히 한인(漢人)의 성을 파스파 문자로 쓴 《백가성(百家姓)》, 한자 발음을 파스파 문자로 표기한 《몽고자운(蒙古字韻)》은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당나라와 원나라 기간 몽고 '경교'의 십가와 복음파
미시하 예수 불상
몽고 극동 선교사의 경전번역은 공통표기 있어
[붓다의 십자가]에서 인출
경교 집단 선교지 발해와 선교에서성경번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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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용표 목사의 아내 홍현숙 사모의 소개 글:
“우리는 남녀 사람들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남녀 사람들의 차이점은 행복과 생산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정반대로 화(죄의 벌)와 파괴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결혼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중에서 풀이하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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