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욱 고가(고영진)
호는 심강(心剛), 조선왕조가 무너지면서 낙향, 평생 처사로서 은둔하였으며, 고하(古下)송진우의 후견인이며, 평생 궤적을 같이한 동지이다. 古家는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사대부 가옥, 누마루가 있는 남방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한 독일인 교수가 한옥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기도 하다. 고택 안 화단에는 사람 키만큼 큰 영산홍이 자생하고 있는데, 봄이되면 영산홍이 한껏 붉게 피어나서 찾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춘강 고정주 고택 (春崗 高鼎柱 古宅)
호는 춘강(春崗), 구한말 규장각(奎章閣) 직각(直閣)벼슬을 하였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창평으로 낙향한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절실한 과제임을 깨닫고 근대교육 효시가 된 창흥의숙을 사재를 털어 무료로 교육시켰다.
오래된 담장 길을 따라 고가의 소슬 대문과 마주하면 고인의 고준했던 정신세계가 느껴진다. 안채로 들어서면 지난 모진풍파를 견디어낸 고가의 고풍스런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상월정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7호
소 유 자 : 사 유
소재 지 :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 산76
규 모 : 정면 4칸, 측면 2칸
시 대 : 조선시대(1457)
지정연월일 : 1984년 2월 29일
정자라기보다는 절의 느낌을 주는 분위기이다. 정면 4칸의 좌우퇴, 측면 2칸의 전퇴,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4칸의 실(室)중에서 좌우의 실(室)은 방으로 쓰고 중앙 2칸은 마루를 깔아 강당형식으로 쓰고 있다.
원래 이 곳은 고려 경종1년(916)때 창건된 대자암(大慈庵)의 절터인데 후에 폐사(廢寺)가 되었다. 조선 세조3년(1457) 언양인(彦陽人) 추제 김자수(楸齊 金自修)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대자암(大慈庵)터에 상월정(上月亭)을 창건하였다가 손자사위인 성풍이씨(成豊李氏) 덕봉 이경(德峰 李儆)에게 양도하였다. 그 후 이경(李儆)은 사위 학봉 고인후(鶴峰 高因厚)에게 다시 양도하여 줌으로써 김(金), 이(李), 고(高) 삼성(三姓)과 기연을 지니게 된 것이다.
1808년 연재(淵齋), 초정(草亭) 2공(二公)이 이를 중창하였고 1851년 신해년(申亥年)의 수해로 또 다시 고재준(高在俊), 고광조(高光造) 등이 보수하였고, 1858년 월헌장(月軒丈)이 서까래와 보를 수리하는 등 여러차례 개·보수(改·補修)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담양 유종헌 가옥(潭陽 柳宗憲 家屋)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92호
소 유 자 : 사 유
소 재 지 :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 230
규 모 : 일 곽
시 대 : 조선후기
지정연월일 : 1992년 11월 30일
이 가옥은 일명 '와송당의 정침(臥松堂의 正寢)'이라고 불리는 문화유씨의 종가이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문화유씨(文化柳氏) 석헌(石軒) 손녀와 결혼, 신방으로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와송당의 정확한 건립연대에 대한 문헌은 없으나 송강의 4남 정홍명의「維村外家舊業重修上樑文」에 의하면 1647년에 대중수를 하였고 1919년에 와송당 정침구조의 변화가 생겼다.
본래 정침(안채)는 터진 입구자형(□)으로 원래는 대청 8칸(정면4칸, 측면2칸)을 중심으로 양측 횡각(橫角)에 부엌과 방이 있었으나 1919년 정침(正寢)을 5칸으로 개조하고 2칸 대청과 좌우에 방 2칸과 좌편에 부엌 1칸 구조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양횡각이 없고 대청만 남아있는 전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특이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포의사
지 정 별 군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유천리 산26
소 유 자 창평문중장흥고씨
관 리 자 고영준
전화번호 061-382-8171
창평면 관광지 소개
http://www.damyang.go.kr/open_content/etc/country/pop05.html
정보담당자 : 창평면 총괄담당 전화 061)380-3792~3793
슬로시티 마을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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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담당자 : 문화관광과 관광진흥담당 전화 : 061)380-3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