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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順興과 順興安氏 ◈
이 글은 르포작가 조성출(趙誠出)이 <새한국풍토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것이다. 순흥안씨의 내력과 드러난 조상들, 관향지인 순흥의 고사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이어서 자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아는 데 좋은 자료가 되겠기에 옮겨 실었다.
우리나라 유교의 메카
순흥(順興) 순흥은 지금의 경북 영풍군 순흥면이다. 순흥은 고려시대에는 흥주부(興州府)였고, 조선왕조 제3대 태종 때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되어 내려오다가 제7대 세조 3년 이곳에 귀양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단종복위를 도모한 사건이 당시의 기천(基川현재의 풍기) 현감 김효급(金孝給)의 밀고로 고을 전체가 철퇴를 맞고 폐부 처분을 당한 다음 풍기군에 예속되어 설움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순흥은 세조에 의해 철퇴를 맞기까지 순흥안씨(順興安氏)네의 고을이고 안태고향이었다. 그 순
흥안씨 후손 중에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첫째 인물은 회헌(晦軒) 안향(安珦)이다.
공자 출생 2481년이 되는 1930년에 중국 산동성 곡부에 사는 공자의 77대손 공덕성(孔德成)이 순흥안씨 문중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보냈다.
'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 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 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여러 성인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사람은 공자이고, 여러 현인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사람은 주자인데, 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하여 동방의 성학을 연 사람은 안자라는 뜻이다. 회헌 안향을 '안자'라 높여 부른 것이다.
공덕성의 이 글이 아니더라도 회헌 안향이 우리나라 유교의 조종적인 존재라는 것은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왕조 초기에 당시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지칭된 바가 있다. 고려시대의 유교는 회헌 안향에 의해 뿌리를 내린 다음, 그의 문하생인 이재(彛齋) 백이정(白 正), 역동(易東) 우탁(禹卓), 국재(菊齋) 권부(權溥)에 의해 근근히 명맥이 유지되다가 익재(益齋) 이재현(李齊賢)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에 의해 한 번 기지개를 켠 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적극적인 연구로 비로소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포은 정몽주와 나란히 목은 이색의 제자였던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도 유교 진흥을 위해 공헌했고, 목은·포은·양촌의 세 스승에게 배운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고려왕조 최후의 유학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회헌 안향은 순흥에서 태어나 17세까지 순흥에서 공부했다. 그가 공부하고 나서 그 물로 벼루를 씻었다는 샘 가까이에 '회헌선생세연지비(晦軒先生洗硯之碑)'가 서 있다. 그래서 뒷날 조선왕조 제11대 중종37년 당시의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은 순흥 백운동(白雲
洞)에 회헌 안향의 사당을 건립했고, 다음해에는 회헌의 영정을 봉안하는 서원을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이라 불렀다. 이 백운동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데, 7년 뒤 당시의 풍기군수 퇴계 이황의 의해 '소수(紹修)'라는 명종의 사액을 받아 걸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순흥을 우리나라 유교의 메카라 일컫는 것이다.
필자는 본란을 통하여 지난 3년여 동안 전국 각처의 명문세가를 거론하면서 어느 가문이든 고려시대에 산 인물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애당초 조선시대의 명문세가를 쓴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칙을 순흥안씨에 한하여 깨뜨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회헌 안향이 우리나라 유교의 조종이고, 그의 안태고향 순흥이 조선왕조의 국교가 된 유교의 메카라는 이유 때문이다.
회헌 안향은 1289년 고려 제25대 충렬왕 15년 고려조정의 유학제거(儒學提擧)라는 신분으로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간 기회에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와서 역사상 최초의 주자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1304년 충렬왕 30년 벼슬이 정2품 찬성사일 때, 왕에게 건의하여 섬학전(贍學錢)이라는 국학의 육영기금을 설치하고 공자의 초상을 건 대성전을 건립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유교의 묘목을 심었다. 그의 나이 62세 때였는데, 그는 그 2년 후에 사망했다. 그는 대성전을 건립할 당시의 고려의 사회상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곳곳마다 향불 피워 불공드리고, 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퉁소 불며 무당 굿한다. 簫管家家盡祀神
서너 칸 공자의 사당 외롭게 서있는데, 獨有數間夫子廟
뜰에는 봄 풀만 무성하고 인기척이 없구나. 滿庭春草寂無人
고려 제일 명문 順興安氏
순흥안씨는 고려왕조 후기에서 조선왕조 초기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 나라 안에서 첫손
가락을 꼽는 명문 세가였다. 그 사실은 사후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은 회헌 안향의 후
손 가운데 고려 말까지 산 사람으로 '글월문[文]'으로 시작되는 시호를 받은 사람이 9명이나
되고, 조선 초기에 산 사람으로 '문'으로 시작되는 시호를 받은 후손이 2명인데, 그 밖의 시
호를 받은 후손 또한 7,8명이나 되는 사실(史實)이 훌륭히 입증해주고 있다. 더구나 고려시
대에 살고 시호를 받은 회헌 안향의 후손들은 모두 10촌이 넘지 않는 가까운 촌수였다.
잠깐 여담 한 마디를 한다. '글월문'으로 시작되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그의 학문이 당세는 물론 후세까지 사표가 될 만한 석학대유에다 명신이었다. 아무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벼슬이 정1품의 정승에 오른 명신이라 하더라도 학문이 약하면 절대로 '문(文)'으로 시작되
는 시호를 내리지 않고, 예컨대 정민(貞愍), 충정(忠正) 등의 시호를 내렸다는 말이다.
'문'으로 시작되는 시호를 받은 회헌 안향의 후손들을 보다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회헌의 아들 안우기(安于器)가 고려 공민왕 때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사후
'문순(文順)'의 시호를 받았다. 이어서 안우기의 8촌인 안문개(安文凱)가 순흥부원군의 봉작과 사후 '문의(文懿)' 시호를 받았고, 역시 안우기의 8촌이 되는 안석(安碩)이 사후 '문경(文敬)' 시호를 받았다.
다시 한 대를 내려와서, 안우기의 아들 안목(安牧)이 순흥군의 봉작에다 '문숙(文淑)' 시호를 받았고, 안석의 아들인 안축(安軸)이 '문정(文貞)' 시호를, 안축의 동생 안보(安輔)가 '문경
(文敬)' 시호를 받았다. 안목과 안축·안보 형제는 10촌간의 촌수였다. 특히 안축·안보 형제는 고려조의 대과에 급제했을 뿐만 아니라, 원 나라의 대과에까지 나란히 급제하여 세상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에 대해 조선왕조 개국 초 나라 안 전체의 학문을 다 합쳐도 그 한 사람의 학문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희세의 석학 목은 이색은 안보의 비문 속에서, 중국의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고려인으로 형제나 부자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한 예는 안축·안보 형제가 처음이고, 다음이 자기네 부자뿐이라고 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근재(謹齋) 안축의 문하생으로서 근재 사후 그의 비문을 썼으며, 안보는 목은 이색이 과거에 응시했을 때 시험관이라는 연관이 있었다.
또 근재 안축은 경기체가(景幾體歌)의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읊어서 그의 문집인 《근재집(謹齋集)》과 함께 오늘에 전하는 대시인이기도 하다.
다시 한 대를 내려와서 안목의 큰아들 안원숭(安元崇)이 정당문학의 벼슬을 역임하고 사후 '문혜(文惠)'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안목의 둘째 아들 일호(一湖) 안원형(安元衡)은 벼슬이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고 죽성군(竹城君)의 봉작과 사후 '문혜(文惠)' 시호를 받았는데,
특기할 일은 그는 후일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의 시조가 된 사실이다. 또 안목의 셋째 아들 안원린(安元璘)은 벼슬이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에 이르고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져서 사후 '문렬(文烈)' 시호를 받았는데, 그는 뒷날 탐진안씨(耽津安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밖에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안축의 아들인 안종원(安宗源)이 사후 '문간(文簡)' 시호를 받았고, 안종원의 증손자인 안숭선(安崇善)이 사후 '문숙(文肅)' 시호를 받았다. 호를 쌍청당(雙淸堂)이라 한 안종원은 고려왕조에서 흥녕부원군의 봉작과 판문하부사의 벼슬에 오른 명신이었다.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한 다음 1394년 태조 3년에 쌍청당에게 고려조와 동일한 관직을 가지고 명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줄 것을 간청하였다. 개국 초 조정에 쌍청당 만큼 이성계의 등극을 이해해 줄 원로대신이 없었고, 또 쌍청당의 높은 학문과 덕망은 명 나
라 조정에까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쌍청당은 태조가 된 이성계의 간청을 마지못해 수락하여 명 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그해 71세의 향년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증손자인 옹재(雍齋) 안숭선의 약력은 다음 대목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그리고 고려조의 명신으로 사후 '문'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아닌 다른 시호를 받은 인물로는, 안천선(安千善) 시호 '양정(良定)', 안천선의 큰아들 안손주(安孫柱) 시호 '경혜(景惠)', 셋째 아들 안천보(安天保) 시호 '소의(昭懿)' 등이 있으며, 고려에서 조선에 걸쳐 살아서 사후 시호를 받은 인물로는, 안원숭의 큰아들 안원(安瑗) 시호 '경질(景質)', 둘째 아들 안조동(安祖同) 시호 '양공(良恭)', 안손주의 아들 안준(安俊) 시호 '충정(忠靖)', 안천보의 아들 안수산(安壽山) 시호 '소간(昭簡)',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安景恭) 시호 '양도(良度)', 안경공의 아들 안순(安純) 시호 '정숙(靖肅)' 등이 있다.
증언한다면, 문성공 회헌 안향을 최초의 시호 받은 인물로 해서 고려조에서 조선조 초기에 걸쳐 산 그의 직계손과 방손 가운데서 사후 시호를 받은 인물이 20명이 넘고, 그들의 촌수가 멀어서 16촌일진대, 어찌 순흥안씨를 고려 제일의 명문이라 하지 않을 수 가 있으랴.
조선조의 順興安氏들
순흥안씨네는 그들의 문중을 1, 2, 3파로 구분하고 있다. 시조의 아들이 3형제였기 때문이
다. 회헌 안향은 순흥안씨의 4대손으로 시조의 증손자이고, 1파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5대손 되는 순흥부원군 안문개와 아들 안천선 손자 안천보 등은 2파이고, 3대손 되는 근재
안축과 안보 형제와 그 자손들은 3파에 속한다. 이상의 3개파 가운데서 자손들이 제일 많이
현달한 곳은 3파로 알려져 있다.
지면 관계로 순흥안씨 후손으로 조선조에서 벼슬이 2품 이상에 이르고 사후 시호를 받은
인물에 한하여 그 약력을 연대순으로 대충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조에서 제일 먼저 거론해야 할 쌍청당 안종원의 약력은 이미 앞에서 적었다.
두 번째 인물은 안천보이다. 그는 1339년 고려 충숙왕 8년에 출생하여 25세 때인 공민왕
12년에 등과한 다음, 별장·군기시윤·판사복시사를 거쳐 공조전서에 이르러 해직당했다. 그
후 16년 간을 거문고와 글씨로 소일하다가 조선조 제3대 태종 8년 70세 때 검교 한성판윤으
로 임명되고, 이듬해 검교 참찬을 거쳐 검교 찬성이 되었다가, 제 4대 세종이 즉위하자 좌의
정에 올랐다. 그는 세종 즉위 초 영의정이 된 심온(沈溫)의 장인이고, 세종비 소헌왕후(昭憲
王后) 심씨(沈氏)의 외조부였다. 소헌왕후가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태종과 세종이
특별히 공대하였으나, 그는 평생을 충직과 근신으로 일관했다. 1425년 세종 7년 영돈녕부사
때 87세의 향년으로 일생을 마치고, 사후 '소의(昭懿)' 시호를 받았다. 그의 관직 앞에 붙인
'검교'는 실무는 보지 않고 관직만 가질 경우 그 관직 앞에 붙이는 대명사이다.
세 번째 인물은 안원이다. 그는 정당문학 안원숭의 장남이고 회헌 안향의 현손이다. 1346
년 고려 충목왕 2년에 출생하여 공민왕 23년 29세 때에 대과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전서를
거쳐 공양왕 2년 좌부대언일 때 한양으로 천도론이 나오자, 반대 저지했다. 공양왕 4년 지신
사(知申事) 때 지난 옥사에 연루된 혐의로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조선의 개국을 맞았다. 이성
계의 배려로 순흥으로 이배되었으나, 이내 용서되어 우군동지총제의 관직으로 명 나라에 사
은부사로 다녀왔다. 귀국할 때 《대학연의》·《통감집람》 등 서적을 가져와서 태조 이성
계에게 바쳤다. 태종 4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이어 대사헌·판한성부사·개성유후·동서
강등처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태종 11년 65세의 향년으로 죽은 뒤 '경질(景質)' 시호를 받았
다.
네 번째 인물은 안경공이다. 그는 쌍청당 안종원의 셋째 아들로 1347년 고려 충목왕 3년
에 출생하였는데, 앞의 안원보다 한 살 아래의 14촌 동생이 된다. 우왕 2년 30세로 대과 문
과에 급제하여, 좌랑·지평을 거쳐 이성계의 조선 개국 때 밀직사 좌부대언(조선조의 좌부승지)이
었다. 그는 개국공신 3등이 된 후 도승지·관찰사·보문관학사·한성부윤을 역임하고 집현
전 대제학에 올라 조부와 부친에 이어 3대째 흥녕부원군의 봉작을 받았다. 1421년 세종 3년
향년 75세로 타계하여 '양도(良度)' 시호를 받았다. 그의 형 안경온(安景溫)은 벼슬이 고려조
에서 밀직사에 이르렀고, 동생 안경검(安景儉)은 고려조의 집의에서 조선조의 산기상시에 이
르렀다.
다섯 번째 인물은 죽계(竹溪) 안순(安純)이다. 그는 대제학 안경공의 아들로 1371년 고려
공민왕 20년에 출생하여 창왕 1년 약관 19세로 대과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좌습유를 지냈
다. 조선조 개국 후 우대언·우참의·동지총제·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세종 1년 호조참
판으로 명 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와서 호조판서·판중추원사 겸 판호조사·찬성사를 지냈다.
그는 세종 22년 향년 70세로 죽을 때까지 나라의 돈과 곡식을 관장하는 판호조사의 벼슬을
지냈다. 사후 '정숙(靖肅)' 시호를 받았고, 그의 유고가 증조부 근재 안축의 문집 《근재집》
에 수록되어 있다.
여섯 번째 인물로는 옹재 안숭선과 그의 동생 한백당(寒栢堂) 안숭효(安崇孝)를 들 수 있
다. 두 형제는 죽계 안순의 아들인데, 말하자면 옹재 안숭선부터가 조선조에서 출생한 순흥
안씨 후손의 역사적 인물이 되는 셈이다.
안숭선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조를 개국한 해에 태어났다. 그는 세종 2년 29세 때 식년
시 대과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5품의 사헌부 지평에 특임된 후 이조정랑·형조좌랑·지신
사·동부대언·대사헌·경기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 때 명 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와서 집
현전대제학이 되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이듬해에는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고, 세종 30년 병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일 때 인사문제를 정실로 처리한 것
이 문제가 되어 잠시 진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내 풀려나서 좌참찬을 지냈다. 명필이었고, 문
종 2년 61세의 향년으로 죽은 뒤 '문숙(文肅)' 시호를 받았다. 그의 유고가 고조부의 문집인
《근재집》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다음 한백당 안숭효는 죽계 안순의 4남이고 옹재 안숭선의 동생으로 진사시를 거친 뒤 음
보로 장령·호조참의·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 2등이
되고 이듬해 중추원부사로 명 나라에 진향사로 다녀온 뒤 공조참판·전라도관찰사·호조참
판을 역임했다. 세조 6년 충청도에 홍수 피해가 클 때 특명으로 도관찰사로 나가 이재민을
훌륭히 진휼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칭송을 받았으나 그해에 죽었다.
이상이 조선조 초기에 살면서 벼슬이 2품 이상에 오르고 시호를 받은 순흥안씨 문중의 역
사적 인물이다. 편년(編年)의 서술로 해서 그 이후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언급은 다음달로
미루고, 세조에 의해 순흥안씨네가 철퇴를 맞은 사실을 먼저 약술하기로 한다. 1456년 세조
2년 6월 사육신에 의한 단종복위 계획이 배반자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가자, 사육신과 그 가
족은 무참히 피살되고 아울러 70여 명에 달하는 연루자가 처벌을 받았다.
'피끈' 悲史
그 이듬해 6월 세조는 다시 상왕인 단종도 사육신의 모의에 관여했다는 죄를 날조하여 노
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킨 다음 50여 명의 호송군사로 하여금 강원도 영월에 유배토록 하
였다. 그리고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고 자신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을 상왕이 된 단종이 금성
대군 집에 한동안 머물렀다는 죄를 물어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했다. 그런데 당시 순흥도호
부는 북쪽으로 태백산을 사이에 두고 영월과 접경하고 있었다. 산 하나만 넘으면 서로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순흥에 와서 순흥안씨 집안에 우거하고 있던 금성대군은 세조 3년 9월
순흥부사 이보흠과 밀의하여 영월에 있는 노산군을 순흥으로 모셔와서 복위시킬 계획을 세
웠다. 그래서 우선 격문을 작성하여 순흥·안동·상주를 비롯한 영남 일원에 돌려 세조의
군사를 대항할 의병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그 격문은 상금에 눈먼 종이 훔쳐서 기천현감에
게 바치고 큰 공을 탐한 기천현감이 그 격문을 다시 조정에 밀고하는 바람에 금성대군과 이
보흠 부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결과 금성대군은 안동으로 잡혀가서 하옥되었다가 10월에 사약을 받고 죽었고, 노산군
은 일단 서인의 신분으로 처벌되었다가 자결을 강요당한 끝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순흥부사 이보흠은 한성의 금부로 잡혀와서 무수히 곤장을 맞은 뒤
평안북도 박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내 교살 당했다. 그와 아울러 맨 앞 대목에서 잠깐 언급
한 것처럼 순흥도호부 관아는 폐쇄되고, 금성대군 뒷바라지를 해준 순흥안씨 인물은 안동대
도호부의 군사와 한성에서 파견된 의금부 나졸들의 무자비한 살상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
았다. 당시 순흥도호부 앞을 남쪽으로 흐르는 죽계천(竹溪川) 맑은 물이 10리를 흐르는 동안
내내 붉은 핏빛이었다가 현재의 영풍군 안정면(安定面) 동촌(東村)에 이르러 겨우 푸른빛을
되찾았다고 해서 고장에서는 오늘날까지 동촌을 '피끈'이라 부르고 있다. 죽계천에 흐른 핏
물이 순흥안씨네 자손들이 흘린 피였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참혹상이 어느 정도였을
지 이야기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
당시 순흥도호부에는 고려 때부터 수백 년을 세거해 온 순흥안씨네의 고래등같은 기와집
들이 십리를 가도록 처마를 잇대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하 제일의 순흥안씨네 집성대촌이었
다. 그런 대촌이 포악한 나졸과 군사들의 방화와 파괴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만 것이다.
세조 3년의 참변을 겪은 뒤 순흥안씨네는 차츰 순흥 땅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순
흥에는 순흥안씨네가 30여 호 밖에 살지 않는다.
順興의 귀한 民俗
경북 영풍군 순흥면사무소 뜰에 봉서루(鳳棲樓)가 있다. 고려 말엽의 유현이자 대 시인인
근재 안축(安軸)이 쓴 <봉서루중수기>에, 새로 흥주지사로 부임한 채상(蔡祥)이 낡은 누각
을 중수하니 그 웅장 수려함이 영남 제일이었다는 서술이 있다. 이 봉서루에는 고려 공민왕
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는 '흥주도호부아문(興州都護府衙門)'이란 현액도 걸려 있는데, 바로
지난번 '피끈 悲史' 이전의 옛 순흥의 번영의 상징물들이다. 순흥고을의 주인은 순흥안씨네
이고, 순흥안씨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치는 200년 동안 나라 안에서 제일 명문이
었다고 하였는데, 다시 말해서 순흥의 번영은 곧 순흥안씨네의 번영이었던 것이다.
순흥에 가면 한자로 '斗汝'라 표기하는 '두레골'이 있다. 이 두레골에 모든 순흥인이 몇백
년 전부터 지성으로 섬겨오고 있는 성황신을 모신 성황단이 있다. 이 성황신은 친형인 세조
에 의해 살해된 금성대군이다. 순흥에 귀양와서 순흥안씨네 집에 우거하면서 순흥부사 이보
흠과 단종복위 계획을 추진하다가 종의 밀고로 '피끈'의 참극이 벌어진 이야기는 앞에서 언
급한 바 있다.
순흥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을 기해 '두레골 성황신'에게 그 해의 풍년과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옛날 초군청(草軍廳)의 좌상이 주동하여 음력 정월
초사흗날 초군들 가운데서 신상에 부정함이 없는 사람을 골라서 그 해의 제관으로 지명한
다. 제관으로 선출된 사람은 자기 집 대문 또는 사립문에 금줄을 치고 잡인의 출입을 엄히
금하는 한편, 제삿날까지 날마다 목욕재계하여 심신을 정화한다. 그리고 제삿날에 제일 가까
운 풍기 장날을 기해 쇠전에 가서 그 날의 일등 황소 한 마리를 산다. 그때 소 값을 에누리
하지 않고 지불하는 불문율이 있다. 또 그 황소를 순흥까지 몰고 오는 동안 깎듯이 양반으
로 공대하여 존대말을 쓴다. 예컨대, "양반님, 왼쪽 길로 가사이다.", "잠깐 워 하시오." 하면
서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말이다.
순흥에 다다르면 그 황소를 일단 도유사 집 외양간에 모시되, 잡인이 보지 못하도록 외양
간 문을 가리고 여물을 주는 사람도 부정하지 않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도록 한다. 그러다가
제사 전날 밤에 두레골로 몰고 가서 잡아서 성황제의 제물로 쓰는데, 제사를 지낸 다음에는
그 쇠고기를 가지고 면내의 가가호호에 고루 음복을 돌린다. 이른바 순흥 고을의 고유한 오
랜 민속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여담 하나를 적는다.
조선왕조의 27대왕 가운데서 과거를 제일 여러 번 보인 왕은 제7대 세조였다. 그는 재위
14년 동안 거의 매년 과거를 한 번 이상 보여 도합 23회에 달했고, 1466년 세조 12년 병술
년 한 해에 무려 5회나 과거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 이유는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몰
아내어 죽이고 친동생인 안평대군·금성대군을 비롯한 수많은 충신을 마구 학살하여 왕위를
찬탈한 죄를 과거 선심으로 호도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후세 역사에서 끝내 찬탈자로 기록되었고, 그 자신 불치의 병에 걸려 재위
14년에 52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당연한 인과응보였다. 세조의 업보는 그에 그치지 않았
다. 그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이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세조 3년 9월 20세로 백모되는 제
5대 문종비 현덕왕후 권씨의 혼령의 살을 맞고 죽었고, 작은아들인 제8대 예종 또한 재위1
년만에 20세로 죽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조의 찬탈을 도와 1등공신이 된 한명회의 큰딸은
예종비가 되었다가 17세로 죽었고 작은딸은 제9대 성종비가 되었다가 19세로 죽었다. 참으
로 무서운 업보였던 것이다.
순흥안씨를 중흥시킨 인물들
'피끈의 悲史'로 철퇴를 맞은 순흥안씨네는 세조·예종·성종의 3대 40년 동안에는 2품 이
상의 관직에 오른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제10대 연산군과 제 11대 중종 대에 이
르러 안호(安瑚)·안침(安琛) 형제가 나란히 2품 이상의 벼슬에 올라 순흥안씨의 성가를 다
시 세상에 떨쳐주었다. 그런데 그들 형제가 세조 12년 강원도 고성에서 실시된 별시 문과에
서 나란히 장원(壯元)과 아원(亞元) 급제를 했다는 것은 '피끈 비사'로 많은 아까운 인재를
잃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역사의 아이러니인 것만 같다.
안호·안침 형제는 회헌 안향의 8세손이고, 전주부윤과 대사성을 역임한 안지귀(安知歸)의
아들 5형제 중 장남과 3남이었다. 안호는 23세 때 진사가 되고, 세조 12년 30세로 강원도 고
성에서 실시된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7품의 예문관 봉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영의
정 조석문(曺錫文)과 대제학 노사신(盧思愼)이 어명으로 편찬한 《북정록(北征錄)》에 같은
사관인 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북쪽 6진 주변의 자세한 지명과 지도를 여러 문헌에서 찾
아 모아 삽입했다. 《북정록》은 세조 초 북방 6진을 침범한 여진족을 정벌한 기록이다.
안호는 그후 지평·부제학·대사간·병조참지 등을 역임하고, 예조참의 때 관압사(管押使)
로 명 나라를 다녀왔다. 관압사란 여진족 등 야인에게 끌려갔다가 조선으로 도망쳐온 명 나
라 사람들을 명 나라로 데려다 주는 사신이다. 그는 명 나라를 다녀온 후 전주부윤·형조참
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502년 연산군 8년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이듬해 67세의 향년으로
병사했다.
백씨인 안호보다 7세 연하였던 안침은 호를 죽창(竹窓), 또는 죽계(竹溪)라 했고, 송설체
(松雪體) 해서의 당대 명필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 교하에 있는 영의정 방촌 황희의 비
문을 비롯하여 광주에 있는 좌찬성 한계희의 비문, 시흥에 있는 판의금부사 월성군 이철견
(李鐵堅)의 비문 등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죽창 안침은 19세 때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여 세상에 수재로 이름이 나고 23세 때 강
원도 고성에서 실시된 별시문과에서 백씨에 이어 2등급제를 하여 또 한 번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정9품의 홍문관 정자를 시작으로 부수찬·정언·이조정랑·교리·응교·장령
등 줄곧 옥당과 대간의 명예로운 관직만 역임하고 부제학·승지·예조참의를 거쳐 지중추부
사로서 명나라에 천추사로 다녀왔다. 그후 대사성·이조참판을 지내고 동지춘추관사로 《성
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한때 좌천되었다가
다시 한성부우윤·대사헌·호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등을 거쳐 63세 때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서 선정을 베푼 끝에 서북지방에 명망을 떨쳤다.
그해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그는 일단 사직원을 냈으나
반려되었다. 그후 1514년 중종 9년 71세로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녕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72세의 향년으로 타계했다. 사후 '공평(恭平)' 시호를 받았다.
그밖에 죽창 안침보다 7세 연하이고, 5형제의 막내인 안기(安璣)가 45세의 만학으로 연산
군 1년의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정6품의 성균관전적에 이르렀고, 둘째와 넷째
또한 사마시에 합격함으로써 만천하에 5형제 등과라는 우레와 같은 명성을 떨쳤다. 안동군
임하면 천전의 의성김씨 후손인 약봉 김극일과 학봉 김성일 5형제의 등과보다 7,8십 년 전
의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안호의 아들 안처선(安處善)은 연산군 3년의 별시문과에 을과 급제하여 벼
슬이 병조좌랑에 이르렀고, 안침의 아들 안처성(安處誠)은 연산군 10년의 식년시 문과에 병
과 급제하여 벼슬이 정(正)에 이르렀다. 그리고 안기의 아들 안처순(安處順) 또한 중종 9년
의 별시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벼슬이 또한 정에 이르렀다. '정'이란 관직은 비록 정3품 하의
품계이나, 사복시·군기시·내자시·예빈시·군자감·전의감·선공감·사재감 등의 우두머
리 벼슬이다.
증언한다면, 전주부윤과 대사성을 지낸 안지귀의 아들 5형제와 손자들 가운데서 대과 문
과 급제자가 6명이나 배출되고, 더구나 그중 2명이 2품 이상의 높은 벼슬에까지 이르렀는데,
어찌 그들을 순흥안씨를 중흥시킨 인물이라 부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순흥안씨 집안의 두 左議政
순흥안씨의 후손으로서 조선왕조에서 좌의정에 오른 사람이 네 명이 있다. 그중 한 사람
은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의 외조부 되는 안천보(安千保)인데, 그는 세종 초 좌의정의 관작만
받았을 뿐, 실직을 맡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3정승 명단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
래서 실제로 좌의정 자리에 앉아서 경륜을 펼친 인물은 제 11대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영
모당(永慕堂) 안당(安 )과 제 13대 명종 때 좌의정을 지낸 설강(雪江) 안현(安玹) 두 사람
이다. 영모당 안당은 그의 아버지 안돈후(安敦厚)가 평양 별시문과에 급제한 1460년 세조 6
년에 출생했다. 그리고 제9대 성종 11년 21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성종이 친히
시험관이 된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다른 관원에 비해 나이 젊고 용모가 연약하여 성종이 아장자(亞長子)라고 놀렸으나,
주견이 확고했다. 연산군 5년 40세로서 사성일 때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지의금부
사 때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대사간으로 특임되었다. 그리고 중종 2년에는 대사성 이과(李顆)
가 반정공신으로서 전산군(全山君)에만 봉해진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다
미연에 발각된 옥사를 잘 다스린 공으로 정란공신 3등이 되고, 중종 4년 예조참판으로서 명
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왔다. 그후 호조·형조·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중종 1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이조판서가 되자, 우선 정언이었던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士林派)의 신진들을
적극 중용토록 했다. 이어서 중종 13년에 좌찬성에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60세로 좌의정
에 올랐다. 그는 좌의정이 되자, 영의정인 수천(守天)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중종에게 기묘
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와 파직 유배된 김식·김정 등 70여 명의 사림파 신진들의
신원을 상주했다. 그러나 도리어 훈구파에 의하여 파직되고 작위까지 삭탈당하는 결과를 가
져왔다. 그러자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이었던 안처근(安處謹)의 아들 형
제가 훈구파의 영수인 남곤·심정 등을 제거할 모의를 했다. 그러나 그 모의가 서고모(庶姑
母)의 아들인 송사련(宋祀連)의 밀고로 탄로가 나는 통에 그도 두 아들과 함께 사사되고 말
았다. 역사에서 말하는 신사무옥(辛巳誣獄)이다.
영모당 안당은 사후 45년이 지난 명종 21년에 관작이 복구되고 '정민(貞愍)' 시호를 받았
다. 그가 정승으로서 이룩한 큰 공적은 연산군 때 사화로 희생된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
여창의 관작을 추증토록 했고, 배향되었다가 취소된 포은 정몽주를 다시 소릉(昭陵)에 배향
토록 한 일들이다. 소릉은 단종의 생모인 문종비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다음, 설강 안현은 회헌 안향의 11세손으로서 1501년 연산군 7년에 출생하여 중종 16년
21세 때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종9품직인 교서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시작으
로 관로에 올랐다. '권지'는 시체말로 '견습'이란 뜻이다. 이윽고 검열을 거쳐 28세 때 정7품
의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가 좌랑 박광우의 무고로 삭직되어 일시 투옥되었다가 곧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주서보다 낮은 정8품의 예문관대교에서 다시 지평·응교·장령·사간을
거쳐 집의가 되어서는 경차관(敬差官)을 겸했다. 경차관은 임시로 지방에 나가 전곡의 손실
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직책으로 어사와 같은 임무이다.
이어서 부제학이 되었다가 46세 때 경상도관찰사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고 백운동서원을
중수했다.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소수'라는 사액을 받아걸기 4년 전이었다. 이듬해 명종 2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한성부좌윤·한성부판윤을 거쳐 51세 때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리
고 우참찬과 호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좌찬성을 역임하고, 1558년 명종 13년 58세 때
우의정에 올랐다가 이내 좌의정이 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는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의약의 처방에도 정통했다. 또 40년의 관직생활을 청렴
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청백리로 뽑히고, 1560년 명종 15년 60세의 향년으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문희(文僖)' 시호를 받았다.
또 설강 안현보다 10세 연상이었던 그의 형 안위(安瑋)가 그와 같은 해 별시문과에서 병
과 급제하여 후일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밖에 상산(橡山) 안집(安 集)이 있다. 그는
영조 14년에 36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을과 급제하여 지평·정언·장령을 거쳐 영조 22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후 수찬·헌납·승지를 역임하고, 대사간일 때 고
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는 특별히 대사간을 10년이나 역임했는데, 62세로 대사간 10이
되는 해에 차대(次對)에 불참했다가 일조에 정3품 대사간에서 종6품 흥덕현감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은인자중 노력한 끝에 1774년 영조 50년의 등준시에 72세의 고령으로
을과 급제하여 껑충 공조판서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까지 누렸다. 그의 마지막 관
직은 종1품의 판돈녕부사였다.
순흥안씨의 최근세 후손들
순흥안씨네는 조선왕조의 마지막인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역사에 특기되고 전민족이
영원토록 추앙해 마지않는 큰 인물 여럿을 배출했다. 그점 다른 어느 성씨의 후손들도 감히
따르지 못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병찬(安秉瓚)·안중식(安中植)·안중근(安重根)·안명근(安明根)·안창호(安昌浩)·안희
제(安熙濟)·안재홍(安在鴻)·안익태(安益泰) 등이 그들이다. 물론 그들만이 모두가 아니다.
그러나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앞 네 사람의 약력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안병찬은 호를 규당(規堂)이라 하고, 홍주(洪州) 향교의 직원으로 오래 있었다. 1906년 고
종 광무 9년 52세로 법부 주사일 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철폐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뒤 변호사 자격을 따서 1909년 11월 만주
여순에 가서 안중근의사의 공판 때 무료변론을 했다. 3·1운동 후 만주 안동현으로 가서 대
한청년단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 수감되었다가 병보석
되자, 다시 만주로 가서 죽림(竹林) 김승만(金承萬)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 총재가
되어 많은 독립운동원을 양성하였다. 그러다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발족할 때 법무차장으
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21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얻어서 돌아오다 반대파 공산당원
에게 암살되었다.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안중식은 호를 심전(心田)이라 하고,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과 함께 조선왕조 최후의
양대 화가로 일컬어진다. 일찍이 소림 조석진과 함께 관비로 중국에 그림 유학을 다녀왔고,
한때 양천과 통진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근세에서 현대에 걸쳐 이름이 난 화가들, 곧 관재
이도영, 정재 오일영, 무호 이한복, 정재 최석우, 묵로 이용우, 소하 박승무, 춘곡 고희동, 청
전 이상범, 이당 김은호,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 등이 모두 그와 소림 조석진의 제자들이
다. 그는 동양화 뿐만 아니라, 글씨와 시의 재능도 비상했다. 경술국치 이후 소림 조석진과
함께 서화협회를 조직, 초대 회장이 되어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에 59세의 향년으로 타계했다.
안중근의사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약력은 생략한다. 다만
1909년 10월 26일 동지인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과 통역을 맡은 유동하(柳東河) 등
과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10년 2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사형
이 집행될 때까지 5개월 동안 그가 옥중에서 쓴 작품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키로 한다. 안중
근 의사는 천주교인이었고,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이라는
명저술과 함께 200여 점의 휘호를 남겼다. 그 200여 점의 휘호 중에서 20점이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는데, 다음은 그 20점 중의 일부이다.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피는 꽃은 같아도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다."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 "변변찮은 옷과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와는 일을 상의할 것이
못된다."
人無遠慮 難成大業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 사람은 큰 일을 이룩하기 어렵다.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날씨가 추워진 뒤라야 송백이 내내 푸른 것을 알 수 있다.
안명근은 안중근 의사의 종제로서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그는 종형의 감화를 받아서 일
찍부터 항일운동에 투신하여 남강 이승훈, 백범 김구 등과 교유했다. 그는 남만주에 무관학
교를 설립하기 위해 황해도 일원의 부자들에게 자금조달을 하다가 체포되어 몇 달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0년 12월에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선천
역두에서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하여 체포되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년
간 복역후 출옥하여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성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
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끝으로 필자의 소감 하나를 간단히 적기로 한다. 필자는 4년째 본란을 쓰면서 전국 각지
의 옛 명문 세가를 직접 일일이 찾아가서 취재했다. 그 가운데서 위선사업(爲先事業)을 가
장 잘 해놓은 성씨가 순흥안씨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 안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