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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의 현대시 읽기
시와 아이러니‧1
-아이러니 정신과 유형 분류에 대하여
박대현(문학평론가)
아이러니의 정신
아이러니는 예기치 못한 삶의 복잡성과 모순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말이다. 흔히 인간의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는 말을 한다. 이 세계를 온전히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사실상 없으므로 이 세계에는 인간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예상과 추론을 벗어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게 된다. 따라서 아이러니는 인간이 세계를 향해 펼칠 수밖에 없는 인식론적 방법의 하나다.
아이러니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희극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고대 그리스 희극에는 에이런(eiron)과 알라존(alazon)이라는 두 인물의 시점이 등장한다.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는 에이런은 자신의 지혜로움을 감춘 채 자기 과시의 허풍스럽고 과장된 행동을 하는 알라존과 대화를 이어간다. 에이런은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기지로 결국 알라존에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기록된 문헌을 기준으로 실제 대화법에서 이런 에이런의 전략을 가장 먼저 구사한 이는 소크라테스로 알려져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에이런’을 ‘자기가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을 숫제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낮추어 말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를 언급한다.
그리스 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에이런’의 태도에서 비롯된 ‘에이로네이아’는 발화자의 교육적 의도가 반영된 ‘시치미 떼기’(dissembling)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 희극에서 그렇듯이 교육적 의도의 에이로네이아는 반드시 성공을 거둬야 하고, 에이로네이아의 주체인 에이론 역시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에이런이 승리자가 되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의 명확한 구도다. 이러한 에이런의 승리는 바로 아이러니의 세계관을 암시한다. 알라존의 무지에 바탕한 세계가 무너지고 에이런의 지혜에 바탕한 세계가 재정립되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다. ‘아이러니’라는 용어가 알라존이 아니라 에이런에서 비롯되는 이유를 바로 여기서 이해할 수 있다. 에이런이 알라존의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의 본질이다. 웨인 부스의 다음 진술은 아이러니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아이러니는 모든 도그마의 붕괴에 의해서 또는 세계가 자체로서 지닌 필연적인 무(無) 혹은 부정(否定)을 인식함에 의해서 확고한 것이 지닌 절대성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어떤 것이다. 나아가서 그것은 확고한 것의 절대성을 파괴하고 혼돈에의 문을 열어서 명백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초를 무너뜨리는 어떤 것이다.
아이러니는 도그마를 포함한 절대적 진리까지 부정하고 파괴하는 정신성을 지닌다. 절대성으로부터 벗어나 혼돈의 세계로 진입하여 상대적 진리가 혼재하는 세계의 실상을 드러내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아이러니의 정신이다. 하나의 진리를 고수하고 과신하거나 그것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행위자는 아이러니의 구도에서 자기 과시의 과장되고 허풍스러운 행동을 취하는 알라존의 지위를 획득한다. 에이런은 알라존의 완고하고 경직된 세계를 붕괴시키고 알라존의 세계가 지닌 권위를 추락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에이런의 세계가 부각되지는 않는다. 에이런의 기능은 알라존의 세계가 절대적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의 본질은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무한한 절대적 부정성(negativity)’에 있다.
‘에이런’(eiron)을 어원으로 하는 아이러니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취한다. 완고하고 경직된 세계를 벗어나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아이러니의 기능이다. 특정 이데올로기, 진리, 주체 등을 중심으로 한 도그마적 세계를 허물고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보인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는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이데아의 의도적 파괴” 속에 존재하는 “비평적 행위”에 해당한다.따라서 아이러니의 세계관은 탈주체, 탈중심, 탈진리의 상대주의를 문화적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포스트모던한 오늘날의 세계관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 아이러니 개념의 기원과 변천
아이러니는 어떤 ‘말’이나 ‘상황’에서 발생하는데, 이것이 곧 ‘언어적 아이러니’와 ‘상황적 아이러니’이다. 언어적 아이러니는 말해진 것과 의미하는 것이 서로 반대되는 것을 뜻한다. 흔히 반어(反語)로도 불리는 이 개념은 ‘에이로니아(Εἰρωνεία)’라는 용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부터 사용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사용되는 ‘에이로니아’가 바로 오늘날 의 반어의 의미를 지니며 실제로 ‘반어’로 번역되고 있다. ‘상황적 아이러니’의 개념은 보다 복잡하다. 가장 쉽고도 흔한 예는 남의 불행을 비웃는 자가 자신에게 동일한 불행이 오고 있음을 모를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이다.즉, 상황적 아이러니는 삶의 우연성과 복잡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순에서 비롯된다.
아이러니의 개념적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찾을 수 있다. ‘언어적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의 어원이 되는 ‘에이로니아’라는 용어로 존재했고, ‘상황적 아이러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상황의 급격한 반전을 뜻하는 ‘페리페테이아(peripeteia)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몇몇 번역본에서 ‘페리페테이아’가 ‘irony’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이 경우의 아이러니는 언어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상황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고대 그리스의 극(劇)작법에 대한 내용이므로 ‘극적 아이러니’라는 용어가 ‘상황적 아이러니’라는 용어를 대체하기도 하고 그것과 혼용되기도 한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와서 ‘에이로니아’는 오늘날의 ‘언어적 아이러니’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정립되었으나, ‘상황적 아이러니’는 역사적 변천 과정을 거친 후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그 개념이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상황적 아이러니의 범주에 속하는 아이러니 유형들은 18세기에 들어서야 발견되기 시작한다. 에이로니아가 영어권에 침투하여 ‘아이러니’라는 말로 최초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 16세기 초부터였다.아이러니를 ‘말’의 양상이 아니라 ‘행동’의 양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18세기에 들어서다.그리고 18세기 이후에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다양한 아이러니의 유형이 출현하게 된다.
1970년에 발간된 뮈케의 아이러니는 18세기 이후 서구 문학사에서 등장한 아이러니의 다양한 양상을 소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아이러니를 언어적 아이러니와 상황적 아이러니로 구분하면서, 상황적 아이러니에 포함될 다양한 아이러니를 소개한다. ‘부드러운 아이러니’(샤프츠베리, 1671~1713), ‘비극적 아이러니’‧‘낭만적 아이러니’(F. 슐레겔, 1772~1829), ‘변증법적 아이러니’‧‘실천적 아이러니’(C.설월, 1797~1875) 등을 비롯하여 ‘비개성적 아이러니’, ‘자기 비하의 아이러니’, ‘순진의 아이러니’,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 ‘순수한 부조화의 아이러니’, ‘극적 아이러니’, ‘사건의 아이러니’, ‘일반적 아이러니’ 등이 그렇다. 특히 “인간과 우주의 다른 것들, 삶과 죽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 사이의 근본적인 부조화에 있어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계 아이러니, 우주 아이러니, 또는 철학적 아이러니 등의 명칭 아래서 아이러니의 개념사상(史上) 더욱 더 비중이 큰 위치를 지니게 되어 있었다”라고 하면서 상황적 아이러니로 포괄될 수 있는 아이러니의 다양한 명칭을 소개하고 있다.
3. 아이러니의 유형
한국 시론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이러니의 유형은 뮈케의 아이러니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이러니 유형과 유사하다.
저자 | 김준오 | 이승훈 | 김학동‧조용훈 | 김영철 | 문덕수 | 박현수 |
유형 | 언어적 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 구조적 아이러니 내적 아이러니 | 언어적 아이러니 상황적 아이러니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 우주적 아이러니 | 언어의 아이러니 구조의 아이러니 -극적 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 순진성 아이러니 | 언어적 아이러니 극적 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 우주적 아이러니 순진성 아이러니 냉소적 아이러니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 | 언어의 아이러니 -수사적 방법으로서의 아이러니 -풍자적 아이러니 상황의 아이러니 -극적 아이러니 -일반적 아이러니 -낭만적 아이러니 | 구조적 반어 극적 반어 비극적 반어 희극적 반어 낭만적 반어 |
각 시론가들의 아이러니 유형은 한두 개를 제외하면, 모두 뮈케가 소개한 아이러니 유형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저마다 소개하고 있는 아이러니 유형에 대개 작품 하나씩을 소개하여 분석하는 형식이다. ‘낭만적 아이러니’가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아이러니를 인간의 삶과 이 세계에 내재한 근원적인 모순과 부조화를 드러내는 철학적 개념으로 격상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아이러니는 슐레겔의 ‘낭만적 아이러니’를 통해 비로소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상황적(극적) 아이러니 역시 고대 그리스 비극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통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나머지 유형들은 시론가들 각자의 주관에 따라 취사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상황적 아이러니에서 ‘상황’의 의미는 워낙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으므로, 상황의 개별성과 특이성을 지속적으로 개별화하다 보면 상황적 아이러니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유형의 세분화 역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아이러니의 구조적 본질은 에이런과 알라존의 대립이다. 다시 말해, 드러난 양상(말해진 것)과 감춰진 것(의미된 것) 사이의 긴장과 상충이라는 이 상반적 대립이 핵심적인 요소다. 상황적(극적) 아이러니로 널리 알려진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왕』을 보자. 작가와 독자는 이미 주인공 외디푸스의 운명을 알고 있으나, 오직 외디푸스 자신만이 자신의 운명을 모른다. 『외디푸스왕』과 같은 유형의 아이러니는 상황적(극적) 아이러니, 구조적 아이러니로도 불린다.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 작품의 구조 원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상황적 아이러니에서 아이러니의 구조적 측면을 강조하면 구조적 아이러니, 주인공의 무지에 의한 극의 반전을 강조하면 극적 아이러니가 되는 식이다.
아이러니는 ‘말’과 ‘상황’에 의해 발생한다. ‘말’의 표면적/이면적 의미의 대립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언어적 아이러니라면, ‘상황’에 의해 발생하는 것은 ‘상황적 아이러니’로 통칭하는 것이 혼란을 줄이는 해결책으로 보인다. 아이러니 유형 분류는 다음과 같다.
① 언어적 아이러니
② 상황적(극적, 구조적) 아이러니
: 낭만적 아이러니, 우주적 아이러니,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 순진성 아이러니, 냉소적(풍자적) 아이러니, 희극적 아이러니, 비극적 아이러니, …….
언어적 아이러니는 표면적 의미와 이면적 의미가 상충하는 아이러니다. 흔히 ‘반어’라고 부르기도 하는 언어적 아이러니는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아이러니의 형태다. 상황적 아이러니에는 여러 가지 아이러니가 소개되고 있다. 극적 아이러니, 구조적 아이러니와 같은 형식적 성격을 강조한 아이러니의 명칭은 상황적 아이러니와 유사한 개념이므로 한 가지 용어로 통합하여 이해하는 것이 옳다. 모든 상황에서는 시간적 흐름이 내재해 있고 시간적 흐름에 따라 무지의 폭로가 발생한다. 그것은 이미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극적이면서 구조적인 것이다.
아이러니 이론의 역사 속에서 텍스트가 구성하고 있는 ‘상황’의 주제적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아이러니가 소개되어왔다. 텍스트의 ‘상황’은 다양할 수밖에 없으므로 내용적 관점에 따라 다양한 아이러니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 낭만적, 우주적, 소크라테스적, 순진성, 냉소적(풍자적), 희극적, 비극적 등등의 아이러니는 상황적 아이러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제(내용)적 특징에 따라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적 아이러니의 하위 유형을 굳이 세세히 구분할 필요성이 없는 이유다. 다만 ‘낭만적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슐레겔의 중요한 개념이므로 개별적인 설명이 필요한 정도다. 따라서 크게 언어적 아이러니와 상황적 아이러니 두 유형으로 분류하고,역사적으로 의미 있거나 주제적으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는 하위 유형을 상황적 아이러니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 유형을 세분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아이러니의 정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아이러니는 한 가지 사실에 절대적 진리를 부여하는 완고한 시각의 협소한 틀을 파괴하고 보다 넓은 세계의 숨을 쉬게 하는 유희 공간으로 해방시킨다. 아이러니는 “자기의 규정적 확정을 포기하고, 대신 어떤 개념을 통해서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다의성과 관련을 맺”게 한다. 그리하여 “모순들의 불일치성과 화해 불가능성을 그대로 놓아두고,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도 가능한 다른 것을 파악하”도록 한다.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무한한 절대적 부정성’이 의미하는 바인 동시에 아이러니의 근본정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이러니의 유형은 아이러니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유형 구분을 언어적 아이러니와 상황적 아이러니로 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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