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송계사 골짜기~~
매일 새벽 4시와 저녁 7시에 울리는 송계사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 자리잡은 우리집은 아직 겨울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눈발이 날리고 있다.
잠시 남쪽 나라의 봄소식이 그리운지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이내 한겨울 같은 추위로 밤이면 모든 게 얼어버린다.
산수유와 개나리 중에 어느 꽃이 먼저 꽃망울을 터트릴까 잔뜩 기다리고 있는데
작년에 몇 그루 심은 산수유에서 몇 망울이 터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개나리도 처녀의 젖가슴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다 ㅎㅎ
그래!! 어서 활짝 피어서 황량한 이 골짜기를 찾아오는 우리친구들에게
화사한 웃음을 선사해 주렴!!!
하지만 꽃샘추위도 아니고 이건 거의 초겨울 추위니 피어나던 꽃들이
얼어붙는다.
아! 우리 친구들이 덕유산 봄나들이를 온다는 날에는 온갖 꽃이 만발해 있으면 좋으련만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내 작은 소망마져 외면하는 듯 해서
요즘 며칠 동안 우울하기 그지없다.
사실 친구들을 맞이하기에 우리집은 보잘 것 없다.
명선의 표현에 따르면 "인찬이의 멋진 황토한옥"이라는데
그냥 평범한 살림집에 불과하다.
지난 2003년 부터 짓기 시작한 우리집은 2005년 가을에서야 완성되었다.
내가 전직 일을 그만두고 잠시 정신적인 방황 후에
가장으로서 무언가 경제활동을 해야겠기에.....
그리고 도시에서 살고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시골로 돌아가려고 온갖 수소문을 하면서
직접 내 집은 내 손으로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강원도 삼척의 전통직업전문학교에서 전통한옥 목수양성을 받았다.
사실 40세까지 거의 공부만 하며 살았으니 거의 육체노동은 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어린시절을 지낼 때 둘째 아들로 아버지 농사일을 거들며 했던
노동과 군생활에서 했던 훈련을 빼고는 머리와 입만 가지고 살아왔다.
인생의 전환기였다.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썰매 새총 활 연 등을 만들면서
수없이 손을 다쳤던 기억.....
아버지와 함께 거대한 나무를 밀고 당기면 톱질을 했던 기억.....
중학교 때는 아버지가 자식들 학비 뒷바라지 하시느라
읍내의 땅에 한옥을 짓는 사업을 벌리셨을 때
대산리에 사시는 전 대목수님(인상이 서글 서글하신 대머리셨는데 지금도 살아계신지 모르겠다)
이 오셔서 나무를 다듬어 집을 지으셨는데 .....
나는 학교갔다 오면 그 목수님이 시키는 대로 끌질도 해보고.....
뒷 심부름도 했던 기억.....
이런 기억들이 나로 하여금 한옥을 짓는 목수의 길로 들어서게 해 준 것 같다.
정말 열심히 배웠다! 지금 나도 제자들을 가르치지만 현장교육이기에
야단을 실컫 맞아야 배울 수 있는 일이다. 기둥의 사개통을 따는 과정을 배울 때는
조금 상처를 냈다고 지도교수가 기둥을 잘라버리기까지 .....
직업학교에서 배웠다고 하지만 집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거쳐야 했다. 절짓는 공사현장, 서양식 목조주택 공사현장,
한옥살림집 공사현장 심지어 수해복구 사업의 일환으로 길가 도수로 형틀목수일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우리 세 식구가 깃들어 살 수 있는 집터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집터 찾아 삼만리!
그러다가 인연이 닿아서 이 덕유산 골짜기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넓은 밭 한 귀퉁이에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한겨울의 추위도.....한 여름의 더위도 잊은 채 집짓는 일에 몰두했다.
일손이 필요할 때만 빼고는 나는 거의 혼자 집을 지었다.
워낙 외진 곳이라서 사람구하기도 어렵고.....
사람 부리는 일이 너무 어려워서 시간이 걸려도 혼자 일하는게 마음이 편했다.
우리집에 문짝이 총 150여개가 넘는데
이 문짝만 짜는데 5달이 걸렸다. 하루에 한 개씩!
어느날 강화에서 아버지가 오셔서 보시고는
"얘~~ 집짓다가 늙어죽겠다!!"고 하시며 걱정하시는 소리도 들을 정도로 ㅎㅎ
사실 44세에 짓기 시작해서 집을 다 짓고 나니까 47세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나도 잘 모른다.
울 마눌은 이런 나를 만나서 사는게 너무 힘들어한다.
팔자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나는 우리친구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하기 그지없는 범생이었다.
덩치도 작아서 그렇겠지만 지난번 글에서처럼 나는 의기소침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걸 느꼈다.
무언가 꼭 이루어야 겠다는 신념(좋게 표현하면) 혹은 강박관념(나쁘게 표현하면)으로 가득찼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삶을 마음껏 살 수 있었다.
결혼 대신에 택한 삶 속에서 나는 몸과 마음을 바쳐서 기도하고 일했다.
젊음을 발산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쁨과 희열을 느끼면서.....
하지만 인생이 그리 마음대로 되는게 아닌가 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내 삶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게 두려워져
어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을 때
나는 지금의 마눌을 만났고 아들이 생기자
인생의 책임감을 다시 갖게 되었고
동시에
무언가 희망의 불씨를 볼 수 있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쉽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야 했는데
그 첫번째는 바로 내 일을 찾는 것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고 싶은 일
그러면서 경제적인 활동이 될 수 있는 일!
그게 바로 바로 한옥짓는 목수일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하필이면 왜 그렇게 힘들고 위험한 일을 택했느냐고 지금도 원망한다.
하지만 내 손으로 가족이 살 집을 직접 지을 수 있다는
기쁨은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들은 이곳에서 유치원까지 다니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아이들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외진 곳에서
아내는 아들이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쯤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처분하지 않았던 서울 아파트로 다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정말 황당했다.
나는 또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게 내 팔자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의 시골같지 않은 이곳의 사정을 뻔히 아는 내가
끝까지 반대할 수는 없었다.
드디어 2007년 현우와 아내는 서울로 가고
나만 이 산골짜기에 홀로 남아서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농사를 짓는다고 하지만 우리 식구 먹을 쌀농사 조금하고
텃밭만 일군다. 나는 목수일로 생계를 꾸려간다. 한옥도 지어주고.....가구도 만든다.
대목과 소목을 겸해서 하는 셈이다.
다행히 인터넷을 통해서 일년 내내 일을 끊임없이 할 정도로 주문이 들어온다.
가구를 만들어 전국으로 배달도 해 주며 수많은 사람도 만난다.
또 우리집에는 수많은 손님들이 다녀간다.
길가다 우연히 들러서 집구경왔다는 이들이 가장 많고.....
집을 지어달라는 이들
가구를 만들어달라는 이들
그리고 요즘에는 한옥목수일을 배우겠다는 이들...
아들과 아내는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밖에 못 만나지만
요즘은 쓸쓸하지 않다.
내 이름 석자를 풀이해 보니
인생 초년에는 외롭고
말년에는 좀 나아진다고 되어있다.
나는 내 성명사주를 믿고 싶다.
우리친구들이 덕유산 기슭에 자리잡은 우리집을 방문한다고 하니
너무 마음이 설레인다.
40년을 내 삶의 올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며
떠돌며 살던 무심한 나를 찾아온다니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28일날은 대화도 많이 나눌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내 삶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면
우리집을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이렇게 글로 남겨본다.
혹시 내가 무슨 전원생활을 고즈넉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까봐 ㅎㅎㅎ
그래서 우리집에 오면 좀 실망할까 걱정이다.
멋지게 집주변도 가꾸지도 못했고
마눌이 없어서 집 안도 제대로 정리가 안되었다.
남의 집 가구는 만들어 주면서 내 집에는 제대로 된 가구도 거의 없다.
친구들아!
잔뜩 기대하지 말고
그냥 산골에서 농사짓는 촌놈 찾아간다고 생각해주길 ......
그날 구들장을 데워서 삽겹살 구워주고.....
가마솥에 밥을 해줄께
그럼 덕유산 봄소풍 날 보자!!
첫댓글 인찬아 그져 어렸을때 친구집에 말 가듯이 생각 할 테니 부담 갖지 말아줘.... 초년에 외롭고 쓸쓸하던 삶도 말년에 행복하고 편안한 삶에는 추억이 되잖아... 40년 올무를 떼어버린 친구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낸다... 많은 눈물의 기도가 있었겠지()()()
맞아 아주 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갔으면 좋겠다 나도 앞으로 친구들 집 찾아갈 때 음료수 한 박스도 사지 않고 빈손으로 가고 싶단다 생들처럼 만나서 재잘재잘 거리는 거운 시간이 얼마나 그리운지
엥 ~~ 먼저 글 남겼넹 ~~! 친구야! 어쩜 그리 표현이 순수한지, 당신의 글을 읽을때마다 마음 깊은곳에서 찡 ~~~ 한 그 어떤 느낌을 받곤 한다네 ! 고맙네 ! , 그래 논으로 조용히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도 사람이 돌려 놓지 않으면 바뀌지 않듯, 운명과 팔자도 노력에 의해 조금은 변화 시킬수 있어도 근본은 바꿀수 없나 보더라!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 흘르는 물과 같이 유유히 살아가는것도 현명하다는 걸 느꼈네! 그리고 우리 8회 친구들만의 시간을 가져 본지가 한참 된거 같아 우리들 만의 시간을 갖고자 겸사겸사 덕유산 친구가 있는곳에 가는 것이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지 말게! 토욜날 봄세!
그래 우리 친구들이 오랜만에 긴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도 나누는 계기 된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반세기를 살아왔으니 서로 얼마나 할 이야기들이 많을까 생각해 보네 나도 친구들의 이야기를 한없이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네 무슨 문집같은 거라도 내서 서로 서로의 삶을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고맙다.....선환의 글 속에서 동변상린의 정을 느낄 수 있네.....앞으로의 세월이라도 하늘의 뜻에 따라 순응하면서 살아가야겠지
^^*_()_ 인찬 ^^* 멋지다 ^^* 멋진것은 겉이 아니라..바로 나의 내면... 잘 보여지지 않지만 은근히 내공의 힘으로 나를 버티게 하는 맑음 그 대단한 힘의 근원은 얼른 보여지지 않아서 그렇지...자연스레..아주 조용하면서도 끈기의 빛으로 남는다는것을 다시금 알게하는 당신의 삶 ^^* 바로 이거지 ^^*
지나온 세월을 미소속에 나타난 이마의 잔주름과 눈가의 잔주름이 편안하게 대변해 주누만힘들게 살아가는 세상속에서 대월8회의 대문을 활짝 열어주어 고맙고 그동안 얼어있던 울 친구들의 가슴들을 활짝열어주는 계기가 될것같아 넘 감사한다.
아 내 모습이 편안하게 보인다니 고맙구 울 친구들과 가슴을 열고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여행이 된다면 더할 나위없는 행복이겠지
컴이고장..미투...미투...미투...ㅈ4ㅋ6%...넘 고맙구 감사하다고...
^^말은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은 이미 이곳까지 날라왔다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