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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침신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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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자료 스크랩 그리스/마케도니아 제국/셀레우코스 왕국 /키프로스의 역사
방준식 추천 0 조회 150 14.04.04 18: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란 그리스의 역사 가운데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146년까지의 시대를 일컫는다.

 

기원전 1100년경은 미노스 문명(c. 3650 - c. 1170 BC),

키클라데스 문명(c. 3300 - c. 2000 BC),

미케네 문명(c. 1600 - c. 1100 BC)으로 특징지워지는 에게 문명(c. 3650 - c. 1100 BC)

그리스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 암흑기(c. 1100 - c. 750 BC)가 시작되던 때로,

도리스인의 침입이 있었다고 보는 때이다.

기원전 146년은 코린토스 전투고대 로마그리스를 정복한 때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510-323 BC)를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시대로 본다.

 

보통 고대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기틀을 다지고 서남 아시아북아프리카 전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준 풍부한 문화를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스 문화로마 제국(27 BC - 476/1453 AD)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로마인들은 지중해 지역과 유럽에 그리스 문화를 발전하여 퍼뜨렸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언어, 정치, 교육 제도, 철학, 과학, 예술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고 이 지역들에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이슬람 황금 시대(9세기 - 13/15 세기)와 서유럽 르네상스(14세기 - 16세기 말)를 촉발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다양한 신고전주의 부활 운동에서도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시대 구분

고대 그리스가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났는지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연대 기준은 없다. 일반인들이 보통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라고 할 때는 로마의 그리스 정복(146 BC) 이전의 그리스 역사 전반을 이를 때 쓰지만,

 

역사가들은 이보다는 더 엄밀한 의미로 이 낱말을 사용한다.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150년에 몰락하였는데, 미케네 문명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 본토(Greece proper)에서 일어난 문명이었으나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문화로 대표되는 후대의 그리스 문화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미케네 문명을 고대 그리스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어떤 역사가는 최초의 고대 올림피아 경기가 열린 것으로 기록된 기원전 776년을 고대 그리스의 시작 연대로 잡기도 한다.

 

미케네 문명의 멸망과 제1회 올림피아 경기가 열린 시점까지의 시기를 그리스 암흑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문자 기록이 전혀 없으며 고고학 유물도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시기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 시대의 종식은 전통적인 시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기원전 323년으로 보는데, 이때부터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나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기원전 146년을 고대 그리스 시대가 끝나는 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떤 저자들은 기원후 3세기 그리스도교로마 제국에서 국교로 공인된 때를 고대 그리스 시대가 끝나는 때로 본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이 때까지 중단없이 이어진 문명이라고 보는데, 이는 아주 소수의 시각이다.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 시대는 도기 양식과 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네 시대로 세분한다.

  • 그리스 암흑기(Greek Dark Ages, 기원전 1100년경 ~ 750년경) : 도기에 기하학적 문양을 썼다.
  • 그리스 고졸기(Archaic Greece, 기원전 750년경 ~ 480년경) : 이 시기에는 예술가들이 경직되고 신성한 자세를 취하는 커다란 입상 조각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고졸기 미소'(archaic smile)를 보인다. 고졸기의 종식 연대는 종종 아테나이의 마지막 참주 정권이 전복되고 아테나이 민주주의가 시작된 기원전 510년으로 잡기도 한다.
  •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기원전 500년경 ~ 323년) : 파르테논 신전처럼 모범이 된다고("고전적이라고 · classical") 평가받는 예술 양식이 보인다.
  •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Hellenistic Greece, 기원전 323년 ~ 146년) : 그리스의 문화와 패권이 중동까지 뻗어간 시대. 이 시대의 처음과 끝은 각각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로마의 그리스 정복이 일어난 때에 해당한다.

고대 그리스 세계

 

고대 그리스의 세계는 현대 그리스뿐만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여 헬레니즘을 비롯한 그리스 문화가 퍼진 지역을 포괄한다: 키프로스, 그리고 당시에 이오니아로 알려진 터키에게 해 연안, 마그나 그라이키아(시칠리아이탈리아 남부)와 현재의 알바니아, 불가리아, 이집트, 리비아,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남부, 카탈루냐, 사카르트벨로, 루마니아우크라이나의 그리스 정착지 등이 있다.

 

그리스 인들은 스스로를 헬라스 사람(?λληνε?, '헬레네스')이라고 부르고, 이민족인 '오랑캐'(β?ρβαροι)와 구별하였으며, 헬레네스가 사는 곳을 본토와 식민시를 통틀어 헬라스(Ελλ??)라고 칭하였다.

 

폴리스(도시 국가)들은 델포이아폴론 신전을 중심으로 근린 동맹(Amphictyony)을 맺고, 기타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올림피아제우스 신전에서 기원전 776년부터 4년마다 모든 폴리스가 참여하는 체전을 열고 그 기간 동안은 서로 전쟁을 금지하였다. 이렇듯 그리스 사람들이 동족 의식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결합을 이루었으나, 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성이 강하여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필요시 여러 폴리스들 간에 동맹을 맺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도시 국가 체제는 당시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는 거대한 제국 또는 왕국이 형성되었던 것과는 다른 그리스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리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 중기(대략 기원전 2000년경)[1]부터 발칸 반도에서 나중에 그리스인을 이루게 될 부족들이 몇 차례에 걸쳐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원시 그리스어는 이 시기 이주민들이 오기 직전에 쓰인 언어로, 기원전 3000년대 후반 또는 늦어도 기원전 17세기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원시 그리스의 청동기 문명은 보통 '헬라딕(helladic)' 문명이라고 칭하며, 흔히 말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이전 단계이다.

 

소위 미케네 문명이 이 시기에 흥성하였으며,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 기록되어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50년 갑자기 몰락하였는데, 도시는 약탈당하고 인구가 크게 줄었다.

 

청동기 시대의 붕괴는 그리스 본토에 침입한 마지막 그리스인 집단인 도리스인의 출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두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된다는 견해가 다수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청동기 시대가 종식되면서 그리스는 "암흑기"에 접어든다.

 

 그리스 암흑기

청동기 시대 이후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8세기까지 시대를 그리스 암흑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1차 문헌 사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고고학 유적과 유물만 남아있을 뿐이다.[2]

 

헤로도토스역사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서술',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역사집, 히에로니무스크로니콘(Chronicon) 등 2차 3차 사료는 이 시기의 짤막한 연대기와 임금의 목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실하게 알려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일컫고 있다.

자연 환경

그리스는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여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비가 약간 오며 춥다. 이런 환경 때문에 언제나 물 부족이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후 덕택에 그리스 일대는 포도와 올리브가 가장 중요한 농산품이었으며 소규모의 목축을 수반한 다각적인 농업경 영이 지중해 일대의 농업 특색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리스에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각 골짜기나 평지가 하나의 지리적 단위를 이룬다. 이러한 지리 조건이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들어선 주된 요인이다. 이러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듯 자연 환경이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이 해외무역에 종사하였다. 포도주, 올리브와 공산품은 매우 중요한 물자였다.

 

폴리스의 성립

도리스인이 남하했을 때 미케네 문명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도리스인의 침략으로 일부 그리스 사람들은 에게 해의 섬과 소아시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

 

그리스인들이 이주한 소아시아 해안지대와 인접한 섬들을 이오니아라고 하였는데, 미케네 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있던 이오니아는 오리엔트 문화와도 접촉하기 쉬워서 폴리스도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서 먼저 성립하였다.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는 암흑 시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미케네의 선형 B 문자가 잊혀진 이래 문자가 없었으나,

 

그리스는 페니키아 문자를 도입하고 이를 수정하여 그리스 문자를 만들었다.

기원전 9세기경부터 문자 기록이 등장하게 된다.

 

 

미케네 사회가 붕괴된 뒤 그리스 본토에는 서너 부족으로 이루어진 소왕국이 여기저기 나타났으며, 현실적인 생활 단위는 개별 가족으로 구성된 촌락 공동체였다.

 

그리스의 지형 때문에 각 자치 공동체는 바다나 산맥에 따라 이웃과 단절되어 각 섬과 계곡, 평야에 각자 독자적인 취락을 이루었다.

 

정치는 왕정이었으나 임금의 권력은 미약하였으며 토지 소유에서도 미케네와 달리 공유지와 이에 따른 공동체적 규제가 없고, 촌락공동체의 성원은 저마다 클레로스(κλ?ρο?, 분배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독립성이 강하였다.

 

도리스인남하하여 혼란이 일어난 데다, 다른 나라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ㆍ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었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를 형성하였다는 집주설이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고 있다.

 

대체로 그 시기는 호메로스 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외도 많다. 그렇기는 하나 여러 촌락의 중심시로의 집주로 폴리스가 성립한 게 전형이라 하겠으며, 따라서 이를 도시 국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폴리스의 중심이 되는 도시는 대체로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하였으며, 도시는 폴리스의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중심이었다.

 

도시 안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세워진 아크로폴리스(?κρ?πολι?)가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아고라(αγορ?)라는 광장이 있다. 이곳은 시장인 동시에 정치를 포함한 모든 공공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이자 사교의 장이기도 하였다.

 

렐란토스 전쟁(기원전 710년경 ~ 650년경)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기록에 남은 오랜 전쟁이었다. 이 싸움은 유력한 폴리스(도시 국가)인 칼키스에레트리아에우보이아의 비옥한 렐란토스 평야를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명목상 칼키스가 승자이긴 하나, 오랜 전쟁으로 두 도시 모두 쇠퇴하였다.

 

폴리스가 성립할 당시 중심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주로 귀족과 수공업자 또는 상인들이었으며, 농민은 촌락에 머물었고 귀족들도 그 근거지를 농촌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 성립 이전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파괴되는 일이 없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시민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노예와 여러 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자유인과 외국인(metic)도 완전한 의미의 시민은 아니었고, 오직 폴리스를 형성하는 데 참여한 부족의 성원 내지 그 후손만이 완전한 시민이었다. 즉 폴리스는 종교적ㆍ경제적 유대로 결합하고 법에 따라 규제되며,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 공동체로 볼 수 있다.

 

폴리스는 고전기에는 본토에만 200개가 넘었고, 소아시아에서 에게 해와 지중해 일대에 건설된 식민시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었으나 각 도시의 그 넓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사회 변화

폴리스가 성립한 기원전 8세기에는 호메로스 시대의 왕들은 사라지거나,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존재가 돼버렸고 정치 권력은 귀족에게 넘어갔다. 촌락을 단위로 하는 부족적인 성격이 강한 임정에서 실권을 빼앗은 귀족들이 편의상 중심 도시로 집주하였다. 이것을 폴리스의 성립과 귀족 정치를 연관시키려는 견해도 있다.

 

귀족은 평민보다 많은 토지와 가축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혈통과 가계가 뛰어나거나 빼어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폴리스 방위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시대에는 중무장을 한 1대1의 전투 방식이 있었다. 말의 사육이나 중무장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를 부담할 수 있는 귀족이 폴리스 방위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즉 그들은 신이나 영웅, 또는 왕의 후예들임을 자랑하는 가장 유력한 씨족들의 출신인 것이다.

 

평민 중에는 약간의 수공업자와 상인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대다수는 분배지를 소유한 중ㆍ소농민이었다. "일과 나날"을 쓴 헤시오도스가 귀족의 부정한 재판 등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폴리스의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적인 성격과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영 농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폴리스의 성장

스파르타는 정복을 통해 성장하였다. 도리스인이 남하하였을 때, 원주민 가운데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종속적인 지위를 감수한 자는 운신은 자유롭되 시민권이 없는 페리오이코이가 되고 처음부터 예속신분이었거나 끝끝내 저항한 자는 헤일로타이라는 노예신분이 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스파르타에서는 전쟁을 일으켜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주민을 농노(헤일로타이)로 삼았는데, 이러한 행위는 고대 그리스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스파르타의 예속 관습으로 반란의 위험이 생겼다.[3]

 

스파르타 시민보다 훨씬 수가 많던 '헤일로타이'라는 이들 예속민은 스파르타를 위해 농사를 짓고 일하며 스파르타 시민과 국가가 요구하는 공납을 바쳐야 하였다.

 

메세니아 전쟁 뒤 스파르타는 예속민의 토지를 시민에게 평등한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분배하였다. 그 대신 스파르타의 성인 남성들은 병사가 되어 늘 전쟁에 대비하였다. 상류층도 병사로 훈육받으며 살아야했으므로, 부자와 빈민이 모두 평등하여 시민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은 기원전 9세기에 전설상의 뤼쿠르고스(Λυκο?ργο?)가 제정하였다고 하나, 사실 메세니아 전쟁에 이르는 역사적 발전의 소산으로, 기원전 650년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스파르타의 국제는 두 사람의 왕이 있었으나 실권은 없고 두 왕을 포함하여 30명의 유명 가문 출신으로 구성되는 장로회가 국정의 중요 안건을 마련하지만 이는 20세 이상의 성년남자 시민전체로 구성되는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정운영의 실권은 집정관(?φορο?)이 가졌는데, 이들은 또 왕을 포함한 여러 관직자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스파르타 특유의 생활양식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였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정치구조는 왕정과 귀족정치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성년 남자 전원이 분배지를 가진 동등한 시민으로서 중장보병의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정적인 성격도 있다.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시민은 전 주민의 5%~10%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로 언제나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스파르타는 쇄국주의?군국주의를 채택하였으며, 시민 생활을 전시체제처럼 조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시민은 태어났을 때 심사를 거쳐 불구나 허약한 경우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버림을 받았다.

 

이러한 스파르타 시민에게는 개인적인 사생활이 없었고, 오직 훌륭한 전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적이었다. 일상용품의 생산과 상업도 페리오코이의 부담이었고, 화폐는 사용하기 불편하게 쇠로 되어 있었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아 대외 무역은 가급적 억제하였다.

 

아테나이 귀족정치의 중심은 집정관(?ρχων, 아르콘)과 아레이오파고스(?ρει?παγο?) 회의였다. 집정관은 처음 군사, 종교, 민사의 3명이었으나, 후에 9명으로 증가하고 임기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아레이오파고스 회의의 의원이 되었다.

 

아레이오파고스 회의는 부유한 명문출신의 귀족들로 구성되며 귀족 지배의 가장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일반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가 있고, 집정관도 여기서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기원전 7세기 초에 상인 계급이 성장하였다. 상인 계급이 떠오르면서 여러 폴리스에서 긴장 상태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각 폴리스를 지배하던 귀족 정권들은 새로이 부를 얻어 성장하여 정치적 권력을 얻고자 하던 상인들의 위협을 받았다.

 

기원전 7세기 후반 아테나이는 토지ㆍ농업 위기를 겪어 내분에 빠졌다. 기원전 7세기 말 경 평민은 아테나이의 귀족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621년 집정관 드라콘이 중벌주의에 따른 엄격한 개혁 입법을 내놓았으나, 분쟁을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기원전 594년에 솔론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부채를 말소하고,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하였으며, 상공업을 장려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시민을 재산 소유에 따라 4계층으로 구분하고 정치참여의 비중을 다르게 구분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각 부족으로부터 100명씩을 골라서 400인회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할 안건을 만들게 했다.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종래의 귀족지배를 존속시키면서,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하층시민에게도 불완전하나마나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이렇듯 온건한 개혁으로 솔론은 평민의 권리를 신장하면서도 귀족 정치를 지켜주어 아테나이는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된다.

 

6세기 후반에 아테나이는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아들 히피아스히파르코스의 지배를 받았다. '참주'라는 말은 그리스어 '튀란노스'(τ?ραννο?, "적법하지 않은 통치자")에서 나온 말로, 원래 멸칭은 아니었으나, 선한 통치자건 악한 통치자건 모두에게 쓰였다.[4][5]

 

아테나이는 최초의 대외 전쟁인 살라미스 전쟁승리로 이끌고, 이 전쟁의 지도자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기원전 561년에 평민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참주가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에 반대하는 귀족을 추방하고 그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고 상공업을 장려하고 은광을 개발하여 시민의 세금 부담을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매우 과감한 것으로서 귀족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510년 아테나이의 귀족 클레이스테네스의 선동으로 스파르타 임금 클레오메네스 1세아테나이 사람들을 도와 참주를 전복시켰다.

 

그 뒤 클레오메네스 1세가 親스파르타파의 이사고라스집정관으로 세우자 두 나라는 서로 싸우게 되었다.

 

아테나이가 스파르타의 괴뢰 국가가 되지 않도록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나이 시민에게 모든 시민이 지위에 상관없이 정치적 권력을 공유하는 혁신을 제안하여, 아테나이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사고라스를 물리치고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시행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수이 스파르타가 이사고라스를 다시 세우고자 세 번에 걸쳐 감행한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6] 민주주의가 등장하여 아테나이의 병폐를 고쳤으며, 아테나이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6세기에 아테나이,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바이 등 여러 도시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각 폴리스는 주변 농촌 지역과 소읍을 장악하였으며, 또 아테나이코린토스는 주요 해운ㆍ상업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식민지 건설

폴리스에서 귀족지배에 동요를 가져온 것은 식민운동과 그로 인한 폴리스의 사회 경제적 변화였다. 기원전 7,8세기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여러 그리스인들이 마그나 그라이키아(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소아시아 혹은 더 멀리 갈리아 남부와 에스파냐 해안까지 이주하여 식민지를 세웠다.

 

대표적인 식민시로는 프랑스의 마실리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이탈리아의 네아폴리스, 비잔티온 등이 있다.

 

6세기경에 이르면 그리스 세계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오늘날의 그리스 땅보다 훨씬 넓어지면서 이민 현상이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그리스 식민시는 모도시와 독립되어 정치적 지배를 받지는 않았으나, 출신도시의 방언, 정치제도, 관직명, 종교 등을 거의 그대로 따랐으므로 둘 사이에는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긴밀한 유대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의 식민시를 비롯하여 흑해로부터 서부 지중해에 걸쳐 범그리스 세계가 생겼다.

 

식민시와의 접촉이 잦아짐에 따라 해상무역이 왕성해지고,

 

기원전 7세기에 소아시아의 리디아(Lydia)에서 화폐가 전해지자, 상공업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었다. 화폐경제에 입각한 상공업의 발달은 농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은광은 국가의 소유였으며 개인들에게 임대되기도 하였다. 채굴 방식도 매우 우수하였다. 주민들의 생활 수준도 크게 나아졌다.

 

기원전 800년에서 300년 사이에 인구의 평균 소득이 크게 증가했음을 지적하면서 그리스 가계의 평균 규모가 커졌다고 추산하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그러나 대규모의 과수 재배가 일어나게 되어 이런 경영의 발달은 소농에게 경제적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작농이나 농업노동자 내지 노예가 되는 농민의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농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고, 도시의 평민들은 귀족정치에 도전하게 되었다. 평민세력의 대두에는 전술의 변화 또한 못지않게 작용하였다.

 

중장보병의 밀집대가 전의 귀족을 대신하여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중무장의 비용은 각자 부담이었으므로 유산시민에게 한정되었다. 귀족만이 전투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도시의 유산시민도 국방의 주력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전술의 변화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평민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고전기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스파르타는 거대한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여 동맹을 이루게 된다.

 

이오니아(=터어키)의 그리스 도시들이 일으킨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다리우스 1세(재위 521-486 BC)그리스를 복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침략은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소 밀티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나이 사람들의 영웅적인 승리로 좌절되었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486-466 BC)는 10년 뒤 다시 침략 전쟁을 일으켰으나, 그의 압도적인 대군은 테르모퓔라이(480 BC 8/9월)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살라미스 해전(480 BC 9월)과 플라타이아이 전투(479 BC 8월)에서 패퇴하였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은 기원전 450년까지 이어졌다.

 

이 전쟁은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하는 델로스 연맹에 의해 주도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마케도니아, 트라케, 에게해 제도, 이오니아가 모두 페르시아의 영향권에서 해방되었다.

 

아테나이가 이룩한 해상 '제국'의 패권스파르타와 그리스 본토 도시의 펠로폰네소스 연맹을 위협하였다. 결국 두 세력간에 갈등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431-404 BC)으로 이어졌다.

 

전쟁 상당 기간동안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으나, 아테나이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아테나이는 펠레폰네소스 전쟁 중 기원전 430, 429, 427년에 3차례나 역병이 돌아 큰 피해를 입는다. 아테나이 사람 가운데 1/3이 죽었다고 하며 이 가운데 아테나이의 최전성기(448-429 BC)를 이끈 아테나이의 지도자 페리클레스(c. 495-429 BC)도 있었다.[7]

 

 

그 후 무모하게 시켈리아 원정(Sicilian Expedition: 415-413 BC)에 나섰다가 대패하였는데 이 패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가 몰락하고 스파르타가 그리스 전역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나이의 동맹국 사이에서 반란을 획책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아테나이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켰다. 기원전 405년 스파르타가 아테나이로 가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곡물 공급을 끊으면서 아테나이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이미 약해진 아테나이 함대는 어쩔 수 없이 싸우러 나왔고,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405 BC)에서 뤼산드로스가 지휘하는 스파르타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기원전 404년 아테나이는 화평을 간청하였고, 스파르타는 엄격한 조치를 명령하여, 아테나이는 도시 성벽을 헐었으며, 함대와 모든 해외 영토를 잃었다.

 

 기원전 4세기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에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패권은 처음부터 약했음이 분명하였다. 스파르타가 과도하게 확장하면서 인구 위기가 일어났으며,

 

기원전 395년 아테나이, 아르고스, 테바이, 코린토스는 스파르타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면서 코린토스 전쟁(395-387 BC)이 일어났다. 또 장기전이 벌어졌고, 이때 페르시아의 위협이 커지면서 현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전쟁은 끝나버렸다.


스파르타의 패권은 16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들이 테바이에 자신의 뜻을 강제하려다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테바이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테바이 장수 에파미논다스는 테바이 군대를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시켰으며, 그리하여 스파르타에 종속되어 있던 다른 도시국가들이 해방되었다. 테바이인들은은 메세니아로 진군하여 이 곳 주민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영토와 예속민을 잃은 스파르타는 2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원전 362년 만티네아 전투에서 비록 승리하였으나 병력 상당수를 잃고 중요한 최고 지도자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테바이의 패권도 단명하였다. 사실 만티네아 전투에서 모든 거대 폴리스들이 비슷한 피해를 입어, 이후에는 아무도 전과같은 패권을 잡지 못하였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스 중심부의 세력들이 모두 약해져있던 시기에, 필리포스 2세마케도니아 왕국이 부상하였다. 20년 뒤 필리포스는 자신의 왕국을 통합하였으며, 일리리아인들을 희생시켜 북쪽과 서쪽으로 영토를 넓혔고, 테살리아트라케를 정복하였다.

 

그가 이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마케도니아 군대를 혁신적으로 개선한 덕분이었다.

 

필리포스는 계속 남부 도시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였으며, 기원전 338년에는 직접 침공하게 되었다. 카이로네아 전투(338 BC)에서 테바이와 아테나이 연합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필리포스는 사실상 그리스 전역의 패자로 올라섰다.

 

그는 대다수 폴리스들을 코린토스 연맹에 가입하도록 강요하여, 이들이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는 동시에 자신들끼리 싸우지 않도록 견제하였다. 그런 다음 필리포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하였으나 개전 초에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오레스티스의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되었다.

 

필리포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무찔렀으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550-330 BC) 전역을 정복하고,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리스의 패권과 영향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폴리스의 고전적인 문화와 치열한 독립은 멀어지고, 대신에 헬레니즘 문화가 발달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편집]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이 끝난 시점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146년 로마가 그리스를 병합하면서 끝났다.

 

로마 제국은 헬레니즘 사회와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계속 존속케 하였으며, 그리스도교가 발흥하기 전까지 본질상 변화가 없었으나, 그리스의 정치적 독립은 이때부터 종식된다.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어권 세계에서 "그리스 본토"(현대 그리스의 영토)의 중요성은 크게 떨어졌다.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셀레우코스 시리아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안티오케이아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활동은 그리스 도시 국가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정복은 그리스인의 지평을 크게 넓혔으며, 이민 활동이 일어나 특히 젊고 야망있는 사람들이 동방에 있는 새로운 그리스인들의 제국으로 갔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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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그리스(그리스어: Ελλ?δα 엘라다[*], 통용: 희랍(希臘))는 남유럽 발칸 반도 남쪽 끝에 있는 나라이다. 정식 명칭은 헬라스 공화국(그리스어: Ελληνικ? Δημοκρατ?α 엘리니키 디모크라티아[*])이다.

 

수도는 아테네이며, 주요 도시로는 테살로니키, 파트라, 이라클리오, 라리사, 볼로스, 요안니나, 카발라, 로도스, 세레스가 있다.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불가리아와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쪽에는 터키가 있다.

 

그리스 본토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에게 해가 있으며,

서쪽은 이오니아 해이다.

지중해 동부에 면한 해안에는 수많은 섬과 바위가 흩어져 있다.

 

현대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땅은 민주주의서양 철학, 올림픽, 서양 문학, 역사학, 정치학, 수많은 과학적ㆍ수학적 원리, 희극이나 비극같은 서양 희곡 발상지이다.

 

 

[편집] 역사

[편집]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의 문명은 크레테 문명과 그 뒤를 이은 뮈케나이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도리아 인의 침입으로 인한 암흑 시대를 거친 이후 아테나이, 스파르타 등 일종의 '도시국가'인 폴리스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폴리스 중 하나인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는 민주 정치를 발전시켰으며 경제적으로는 상업과 해상무역에 주력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폴리스 스파르타는 군국주의적 정치 체제를 취했으며 상업보다는 농업에 치중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페르시아 전쟁 때였다.

 

기원전 5세기 초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막아낸 뒤 전쟁 승리의 주역인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써 번영을 누렸다.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스파르타는 역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은 뒤 아테네와 대립했다.

 

마침내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여 기원전 404년까지 약 30여년간 이어졌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고 스파르타는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해 쇠약해진 후였다.

 

스파르타는 결국 테바이에 패권을 내주었고 이후 오랜 전쟁으로 쇠퇴하게 된 그리스는

북방의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당하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폴리스들을 완전히 진압한 뒤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더스 강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뒤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휘하 장군들이 세운 왕조들은 모두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편집] 중세 그리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이 그리스를 통치하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오스만의 지배 직전에 그리스의 지식인들이 서유럽으로 이주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전해주면서 서유럽 르네상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이슬람교 개종은 원칙적으로 자유였으며, 개종을 거부한 그리스도 교도들은 비잔티움 시대의 농민이나 봉건제하의 농노보다 조금 나은 생활을 감수해야 하였다.[1]

 

그렇지만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 덕분에 그리스 정교를 믿는 본토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타지 사람과 섞이지 않고 결속을 유지하며 이후 현대 그리스의 정체성을 창출할 수 있었다.

 

1453년부터 독립할 때까지 그리스는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편집] 근대 그리스

[편집] 근대 국가 형성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그리스 독립 전쟁의 결과 런던 의정서신생 그리스 국가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1827년 이오니아 제도의 그리스 귀족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새 공화국의 통치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가 암살당하자 강대국들은 곧 왕정을 세우고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왕조의 오톤을 국왕으로 옹립하였다.

 

1843년 반란이 일어나 국왕은 헌법과 대의제 의회를 승인해야 했다. 그의 나약한 권위주의 통치로 말미암아 1863년 국왕은 결국 폐위되고 대신 덴마크의 빌헬름 공이 왕위에 오른다.

 

그는 요르요스 1세의 이름을 얻었으며, 영국은 즉위 선물로 1864년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 할양한다. 독립 당시의 영토는 아테네 일대에 국한되었으나, 1881년 테살리아 지방을, 1912년 마케도니아이피로스, 1913년 크리티 섬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1877년, 그리스의 경제 기반이 크게 발전하는 데 공헌한 그리스 정계의 거물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는 왕권을 억누르고 의회에 간섭하여, 장래 총리에 대해 신임 투표를 하는 법을 만들었다.

 

발칸 전쟁의 결과, 그리스는 영토와 인구를 늘리는 데 성공했다.

[편집] 양차 세계 대전 기간

그후,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외교 정책을 놓고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카리스마적인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사이의 갈등으로 정계와 나라가 양분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그리스는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 민족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였고, 로잔 조약으로 두 나라 사이에 대량의 인구 교환이 있었다. 그 뒤 불안정과 쿠데타로 약 150만의 그리스 피난민이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로 밀려들어왔다.

 

1923년부터 12년간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40년 10월 28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그리스의 독재자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거부하여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스는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로 몰아내어 연합국에게 지상에서 추축국에 대한 첫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리스 전투로 이 나라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다. 독일 점령군은 그리스 저항군 때문에 심각한 곤란에 빠졌다.

[편집] 2차 세계 대전 이후

해방 이후 1947년 그리스 북부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게릴라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2년 후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는 30년간 경제적 어려움과 좌우파간의 심각한 사회 갈등을 겪었다. 이후 20년은 좌파 세력이 정계와 사회에서 열세를 보였으며 마셜 계획의 영향으로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1963년부터 파리로 망명했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전 총리가 돌아온 것이 메타폴리테프시의 시작이었다.

 

1967년 4월 21일,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등장한 사회주의 정권을 두려워한 우파 세력을 등에 업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973년 스스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73년 아테네 종합기술학교 시위로 정권은 타격을 입었다.

 

1974년 7월 20일 디미트리오스 요안니디스 장군이 역(逆)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었지만 터키키프로스 섬을 침공하자 정권은 붕괴되었다.

 

1974년 8월 14일, 그리스군은 터키의 북키프로스 점령에 항의하고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통합 군사 기지에서 철수했다.

 

1974년 국민 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되고 1975년에 민주적인 공화국 헌법이 발효되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폐위되었다. 그러는 사이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신민주주의당에 맞서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창당하여 이후 그리스의 양당 정치 구도를 이루었다.

 

그리스는 1980년에 다시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1999년 여름에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를 강타한 지진 이후로 지난 십여 년간 양국 관계도 상당히 호전되었다. 오늘날 그리스 정부는 터키의 유럽 연합 가입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리스는 1981년 1월 1일 유럽 연합에 10번째로 가입했고, 그때부터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유럽 연합의 기금과 늘어나는 관광 수입, 해운업과 성장하는 서비스 부문 덕분에 기업과 인프라에 광범위한 투자가 이루어져 그리스의 생활 수준은 전례없이 높아졌다.

 

2001년 유로화가 도입되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2008년 최근에는 그리스에서는 경찰의 총격으로 시민이 사망한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2]

[편집] 지리

 

그리스는 발칸 반도의 남단에 위치해있다. 그리스 본토 남쪽에는 펠로폰니소스 반도가 있으며 그 사이에 코린토스 지협으로 운하가 있다. 해안에는 에게 해크리티(크레타), 에비아(에우보이아), 레스보스, 키오스, 도데카니사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가 있으며 이오니아 해에도 섬이 많다.

 

그리스는 세계에서 열 번째로 해안선(14,880 km)이 긴 나라이다. 육지 국경선은 1,160km이다.

 

그리스의 4/5는 산지나 구릉으로 되어있어 유럽에서 가장 산지가 많은 나라이다. 유사 이래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장소였던 올림포스 산에서 가장 높은 미티카스 봉은 높이가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2,917m에 이른다. 한때 신들의 옥좌로 여겨지던 이 산은 오늘날 등산가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다.

 

서부 그리스 지역에는 호수와 습지가 많으며 핀도스 산맥이 있다. 핀도스 산맥은 발칸의 디나르 알프스의 연장으로, 가장 높은 스몰리카스 봉은 높이가 2,637m이다.

 

비코스 아오스 협곡은 장대한 모습으로, 스포츠 매니아들의 인기있는 행락지이다.

 
 

산계는 중앙 펠로폰니소스를 지나 에게 해 남서쪽의 키티라 섬안티키티라 섬으로 이어져서 크리티 섬에서 끝난다.

 

에게 해의 섬들은 과거 그리스 본토에 속했던 지금의 해저 산맥의 봉우리들이다.

 

핀도스 산맥는 높고 가파른 봉우리로 유명하며, 협곡과 다양한 카르스트 지형을 보인다. 특히 정교 수도원이 많은 메테오라에는 높고 경사가 급한 바위 지형으로, 해마다 수많은 관관객들에게 놀라운 경험을 안겨준다.

 

그리스 북동부에도 동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 주의 접경으로 로도피 산맥이 있다.

이 지역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자리잡고 있다. 유명한 다디아 숲은 그리스의 북동부 멀리 에브로스에 있다.

 

테살리아, 중부 마케도니아, 트라키에는 넓은 평야가 있다.

이곳은 그리스의 얼마 안되는 경작하기 좋은 농지일 뿐 아니라 중요한 경제 지역이 입지하고 있다.

[편집] 기후

그리스의 기후로는 세 가지가 있다. (지중해성, 고산, 온대) 핀도스 산맥 때문에

그리스 서부 지역은 동부보다 평균적으로 더 침윤(浸潤)하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엔 온난 다습하고 여름엔 고온 건조하다. 키클라데스, 도데카니사, 크리티, 펠로폰니소스 동부, 중부 그리스 일부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스는 산지가 많은 데다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지만 해안 지역에서 기온이 극단적으로 오르내리지 않는다. 도데카니사나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리스 북서부 지역(이피로스, 중부 그리스, 테살리아, 서부 마케도니아)에는 고산 기온이 지배적이다.

 

핀도스 산맥이 지나는 아하이아, 아르카디아, 일부 라코니아 등 펠로폰니소스 중부 지역도 마찬가지 기후를 보인다.

 

마지막으로 온대 기후중부 마케도니아, 동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에 영향을 주는데, 겨울엔 춥고 다습하며 여름엔 덥고 건조하다. 아테네는 지중해성 기후와 온대 기후 사이에 있다. 이 도시 북부 교외 지역에는 온대 기후를 보이지만, 시가지나 남쪽 교외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이다. 아테네는 낮에는 찌는 듯이 더운 반면 저녁은 시원해서 야외생활과 야간생활이 발달되어 있다.

 

1980년 이래 그리스의 도로망과 철도망은 매우 현대화되었다.

 

중요한 사업 중에는 에그나티아 고속도로(Εγνατ?α Οδ??,)가 있는데 이 도로는 북서부 그리스의 이구메니차항에서 그리스-터키 국경이 있는 키피를 잇고 있다.

 

리오 안티리오 다리(유럽에서 가장 긴 사장교. 2,250m)는 펠로폰니소스 서부의 리오(파트라에서 7km)와 그리스 중부 본토의 안티리온을 연결한다.

 

그리고 파트라-아테네간 국도를 2014년까지 펠로폰니소스 서부 피르고스까지 연장하는 계획이 있다. 그리스에서 테살로니키로 가는 고속도로는 이미 완성되었다.

 

수도 아테네의 도시 구역에는 2001년 새 국제 공항이 들어섰고, 같은 해 민간이 운영하는 교외 국도인 아티키 도로도 개설되었으며, 2000년부터 지하철망이 확대되었다.

 

그리스 대부분의 섬과 그리스의 주요 도시는 항공편으로 연결되며, 올림픽 항공에게 항공 두 주요 항공사가 있다.

 

해운 분야에서는 수중익선이나 쌍동선(catamaran) 등 현대적인 고속 선박이 발달했다.

 

철도의 역할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부족한 편인데, 그러나 아테네 주변 새로운 교외 지역 연결이나 아테네-테살로니키간 철도망은 계속 확대되고 있으며, 2,500km의 철도망 중 많은 곳에서 복선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간 철도는 그리스 도시와 발칸, 터키를 이어준다.

[편집] 정치

그리스는 의원 내각제을 채택한 공화국이다.[3] 대통령국가 원수로서 5년 임기로 의회에서 선출된다.[4] 현행 헌법은 제5차 그리스 개헌 의회에서 채택한 것으로, 7년간의 군부 독재(1967-1974)가 무너지고 1975년에 발효되었다. 그 후 1986년과 2001년에 두 번 개정된 바 있다. 120개의 조항으로 된 헌법은 삼권 분립, 시민 자유와 사회권의 광범위한 보장(2001년에 더욱 강화되었다.)을 담고 있다.[5]

 

그리스 헌법에 따르면 행정부의 권력은 대통령과 정부가 행사한다.[6] 1986년 헌법 개정부터 대통령의 직무를 크게 줄여 이제는 주로 상징적인 역할에 그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실건은 총리의 손에 놓이게 된다.[7] 그리스의 정부 수반인 총리직은 정당의 영수가 맡으며, 의회에 신임 투표를 얻을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하며, 총리의 추천에 따라 여타 각료들을 임명하거나 면직한다.[8]

 

입법권은 300명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서 행사한다.[9] 의회에서 통과한 법령은 대통령이 반포한다.[10] 의회 선거는 4년마다 실시되나, 특별히 중요한 국가적인 문제 때문에 내각의 제안이 있으면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게 되어 있다.[11] 야당이 불신임 결의를 통과하려 할 때 대통령은 그 전에 의회 해산을 명할 수 있다.[12] 여성 투표권은 1952년 헌법 개정때 보장되었다.

 

사법권은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독립되어 세 개의 최고법원이 있다. 사법부는 3심제도로서 대법원, 고등법원, 하급법원으로 구성되며, 행정부의 위헌여부 및 행정권 남용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따로 있다.

[편집] 정당

군부독재가 종식된 민정이양 이후 그리스 정치는 자유주의 보수정당 신민주주의당(ND)과 사회민주주의 정당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이 양당제를 이루고 있다. 다른 정당으로는 그리스 공산당(KKE), 급진 좌파 연합(SYRIZA), 대중 정교회 연대(LAOS)가 있다. 지금의 총리는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이며, 2009년 그리스 의회 선거에서 자당이 승리하면서 집권하였다.

[편집] 대외 관계

그리스는 선진국에 속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52),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61), 유럽 연합(EU, 1981년), 서유럽 연합(WEU, 1995), 유럽경제통화동맹(2001), 유럽 우주국(ESA, 2005) 가입국이고, 흑해경제협력기구의 창립 회원국이다.

 

그리스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는 키프로스에게 해를 두고 터키와 갈등을 빚고 있다. 19세기까지 수백 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리스는 터키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지금도 그 감정은 해소되기 어렵다고 한다. 또한 키프로스 공화국의 영토에서 터키계 주민(북 키프로스)들과 그리스계 주민(남 키프로스)들이 대립하고 있다. 또 마케도니아 공화국국호 문제로 이 나라와 다툼이 있다.

 

그리스는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하여 지원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과 공식 수교하였다.

[편집] 군사

그리스 군은 그리스 국방 참모부(Γενικ? Επιτελε?ο Εθνικ?? ?μυνα? - ΓΕΕΘΑ)에서 감독하며, 육해공군으로 구성된다. 그리스 민간 사무는 국방부가 맡는다. 또 그리스에는 그리스 해안 경비대가 있어서 해양 수색 구조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 그리스는 남성에 대해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다. 2006년 현재 그리스는 19세에서 45세 사이의 성인 남성의 군 복무기간을 12개월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군대는 완전 직업군인 제도로 운영해왔으며, 정부는 징병제 완화 혹은 완전 폐지를 약속해왔다. 전략상 민감한 지역에 거주하는 18세에서 60세 사이의 그리스 남성은 국가 경비대에 급료를 받는 일시직으로 근무할 수 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으로서 그리스는 동맹국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 작전과 배치에 참여하고 있다. 1996년부터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고 있다.[13]

[편집] 인구

그리스 정부의 통계 부서는 그리스 국립 통계국(NSSG)이다. 국립 통계국에 따르면 2001년 그리스의 총 인구는 10,964,020명이었다. 여기서 남성은 5,427,682명, 여성은 5,536,338명이다.

 

1971년, 1981년, 2001년 통계를 살펴보면 그리스의 인구는 지난 수십여년간 점차 늙어가고 있다. 그리스의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2004년 현재 (유럽 통계청 추정) 1.29명으로 유럽연합 내에서도 낮은 편이다. (1981년에는 1,000명당 14.5명이었으며, 2003년 출산율은 1,000명당 9.5명이었다.) 또 사망률도 1981년 1,000명당 8.9명에서 2003년 1,000명당 9.6로 약간 올랐다. 2005년 현재 1,000명당 출산율은 9.4명, 1,000명당 사망율은 9.2명으로, 간신히 자연증가 상태에 있다.

 

2001년 인구의 16.71%가 65세 이상이었으며, 68.12%는 15세에서 64세 사이였고, 15.18%는 14세 이하였다. 그리스 사회는 시간에 따라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혼인율은 1981년부터 2002년까지 1,000명당 71명으로 계속 떨어지다가 2003년에 1,000명당 61명으로 약간 늘었다가 2004년에 다시 51명으로 떨어졌다. 이혼율은 계속 늘었는데, 1991년 결혼 1,000건당 191.2건이었다가 2004년에는 1,000건당 239.5건으로 집계되었다.

 

그리스 인구의 거의 2/3은 도시 지역에 산다.

 

2001년 그리스의 큰 도시로는 아테네, 피레아스, 파트라, 이라클리오, 라리사, 볼로스가 있다.

20세기에 수백명의 그리스인들이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독일로 이민 가서 그리스 디아스포라 인구는 오늘날 거의 6백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80년대부터 그리스 경제가 발전하자 오히려 외부에서 이민이 들어오게 되었다.

[편집] 이민

그리스 이민 정책과 실행, 데이터 수집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이민자 인구를 완벽하게 수합하기 곤란하며 상당부분 추측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지중해 이민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 국립 통계국의 2001년 인구조사에서 그리스 시민권 없이 그리스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가 762,19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약 7%이다.

 

또 이들 중 48,560명은 유럽연합이나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국가에서 왔으며, 특별 자격으로 키프로스인 17,426명이 있다고 한다.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이들 발칸 국가에서 온인구가 전체 외국인의 2/3을 차지한다. 구 소련(그루지야, 러시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 출신 이주자도 총 외국인 중 10%를 차지한다.

 

非유럽연합 이주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아테네 지역이다.

 

약 132,000명에 이르며 지역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테살로니키는 두 번째로 외국인이 많은 곳으로 지역 주민의 7%인 27,000여명이 산다.

 

그 다음으로는 대도시 근교나 농업 지대가 있다.

 

알바니아인은 전체 이민자의 56% 정도 되며, 불가리아인(5%), 그루지야인(3%), 루마니아인(3%), 기타(터키인, 아랍인 등)도 있다. 미국, 키프로스, 영국, 독일은 총 외국인 인구에서 각각 2% 정도이다. 나머지 690,000여명은 非유럽연합 이민족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에 거주하는 외국 인구(기록과 추정을 합해)는 그리스 혈통의 이민자까지 포함해서 사실상 8.5% 혹은 10.3%로 집계되며, 대략 1,150,000 여명에 달한다.

[편집] 언어

오늘날 그리스는 언어상 비교적 동질적인 사회이다. 토착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 문자를 쓰는 그리스어를 구사한다. 트라키아에는 터키어, 불가리아어(포막), 루마니아어를 쓰는 소수의 무슬림들이 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0.95%에 불과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집시어도 쓰인다.

 

그리스 여러 지역에서 더욱 소수인 언어도 분포한다. 20세기에 그리스어 사용인구와 동화되면서 이들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수도 아테네 근교 시골 지역에 주로 사는 알바니아어를 쓰는 집단 아르바니테스 그리고 알바니아어와 밀접히 연관된 언어를 쓰며 중부 그리스의 산지 곳곳에 살고 있는 블라크(Vlach)라고도 하는 아로마니아인모글레니테스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런 집단은 인종적으로 그리스인과 동일시되며 오늘날 모두 모국어와 더불어 그리스어를 함께 구사한다. 이제 많은 지역에서 이들의 전통 언어는 늙은 세대가 겨우 유지하고 있으며 사멸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스 북쪽 접경에는 슬라브어를 쓰는 집단이 있는데, 인종적으로는 대개 그리스인에 속한다. 이들의 방언은 언어학적으로 (지역에 따라 슬라보마케도니아어 혹은 슬라브어라고 하는) 마케도니아어 혹은 불가리아어(트라키아의 불가리아어계 무슬림이 쓰는 포막과는 다르다)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스의 유대인 집단은 에스파냐계 유대어인 라디노어를 쓰며, 오늘날 겨우 수천 명만 남아있다.

그리스어 사용 인구 중에는 폰토스 그리스어를 쓰는 집단도 있는데,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박해를 받고 소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꽤 큰 집단을 이룬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는 관광지와 호텔에서 통용된다. 그리스는 2004년에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준회원국이 되었고, 2006년에는 정회원국이 되었다.

[편집] 종교 

[편집] 기독교

그리스 헌법에서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 이 나라의 "우세한"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정교회는 오스만 투르크(터키)의 점령 시절 그리스인들의 의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교회는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리스 정부는 종교에 대해 통계를 작성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 국무부에 따르면 97%의 그리스 시민이 자신을 정교회 신자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유럽 위원회의 통계 부서인 유럽 통계국(Eurostat)에 따르면 2005년 유로바로미터 설문조사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한 그리스 시민은 81%였는데, 몰타, 키프로스와 함께 유럽연합 국가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로마 가톨릭을 믿는 그리스인은 50,000여명이며, 이민자 출신의 로마 가톨릭 교도는 200,000여명이다. 성공회[14]개신교 신자도 있다.[15]

[편집] 이슬람

주로 트라키아에 거주하는 소수 이슬람 공동체의 경우 대략 98,000명에서 140,000명 정도로 나왔는데, 이민자 출신 무슬림의 수는 200,000에서 300,000여명 정도였다. 알바니아 이민자는 대부분 세속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보통 무슬림 신앙과 연관된다.

[편집] 유대교

그리스에서 유대교는 사도행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2,000년 넘게 존재했다.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테살로니키에 상당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그리스인 집단은 대략 5,500명 정도로 집계된다.

[편집] 경제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그리스는 그리스 경제 기적을 이룬다.

1950년에서 1973년 사이 GDP는 평균 7%로 성장했다. 그리스는 유럽 연합기금을 지원 받는 동안 수많은 구조/재무 개혁을 시행했다. 2001년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했다. 그리스의 GDP 연간 성장률은 유럽 연합내 대부분의 국가 수준을 상회한다.

 

오늘날 서비스업은 그리스 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중요 산업이며 다음으로 기타 산업과 농업이 있다. 관광업은 외화 수입의 주요 원천이며, 그리스 총 GDP의 15%를 차지하는데다 총 노동 인구의 16.5%가 직간접적으로 여기에 종사한다.

 

그리스는 발칸 반도 국가 중 선도적인 투자국으로, 2006년 국립 그리스 은행은 터키 피난스뱅크의 46%, 세르비아 Vojvođanska 은행의 99.44%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제조업은 GDP의 13%이며, 이 중 음식 산업이 주도적이다.

 

공공 부문은 GDP의 40%인데, 정부에서는 이 비중을 더 줄이고 있다. 첨단 기술 장비 생산(특히 텔레커뮤니케이션)도 빠르게 성장하는 부문이다. 다른 주요 산업으로는 섬유, 건축 자재, 기계, 운송 장비, 전자 제품 등이 있다. 건설업은 GDP의 10%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으로 건설붐이 일어났으며, 이 나라 경제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GDP 7%의 농업 부문도 중요하다.

 

그리스의 노동 인구는 총 490만 명으로, OECD 국가 중 대한민국 다음으로 많다.

 

그로닝엔 성장 개발 센터는 1995~2005년새 그리스는 유럽 국가 중 시간 대비 노동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스 노동자는 연간 평균 1,900 시간을 일한다. 그 다음은 에스파냐가 있다. (연간 평균 1,800 시간) 2007년 노동시간당 GDP는 20$로 에스파냐와 비슷하며, 미국의 시간당 평균 임금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치이다. 이민자들은 노동력의 거의 1/5을 차지하며 농업과 건설업에 주로 종사한다.

 

그리스의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GDP는 세계 28위이다. 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2008년 그리스의 1인당 평균 임금은 연간 30,661$였으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필적하며, 유럽연합 평균과 거의 같았다.

 

2006년 그리스는 인간개발지수 18위를 차지했으며, 2005년 이코노미스트지의 세계 삶의 질 지수에서 22위를 차지했다.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 따르면 아테네의 생활비는 뉴욕의 비용에 90%에 근접하며, 시골 지역은 이보다 더 낮았다.

[편집] 해운 산업

해운업은 예로부터 그리스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해운업은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GDP의 4.5%를 이루며, 160,000여명을 고용하고 있고(전체 노동력의 4%), 이 나라 무역 적자액의 1/3에 해당한다.

 

1960년대 그리스 선박의 규모는 거의 두배로 늘었는데, 주로 해운 재벌 오나시스니아르코스의 투자 때문이었다. 현대 그리스 해운 산업의 기반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형성되었는데, 이때 그리스 해운업자들은 1940년대 미국의 선박 판매법에 따라 미국 정부가 이들에게 판매한 잉여 선박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미국 교통부 교통통계국(BTS)에 따르면, 그리스 소유의 해운 선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세계 선박 용량(총 141,931,000 dwt)의 18%인 3,079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 선박 종류로 보면, 그리스는 유조선이나 드라이 벌크선에서 1위이고, 컨테이너선은 4위, 다른 배 종류도 4위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박 수는 1970년대 말 최대 5,000척에서 줄어든 것이다.

[편집] 과학 기술 

그리스에서 광대역 인터넷은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일반 인구의 약 13.4%가 광대역으로 인터넷(주로 ADSL2)에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 접속, 사무, 멀티플레이 게임이 가능한 인터넷 카페도 그리스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휴대전화 네트워크상의 모바일 인터넷이나 와이파이 핫스팟도 있으나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

 

그리스의 전략적 위치, 우수한 노동력, 정치적/경제적 안정 덕분에 에릭손, 지멘스, SAP, 모토롤라, 코카콜라 등 여러 다국적 회사가 지역 연구개발(R&D) 본부를 그리스에 두고 있다.

그리스 개발부의 연구기술일반과에서는 국가 연구 기술 정책을 설계, 시행,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2003년 연구 개발에 45,637만 유로의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이는 2002년보다 12.6% 증가한 것이다) 공공과 민간 부문 모두 아울러 GDP 대비 총 연구개발 지출은 1989년에 0.38%에서 2001년에는 0.65%로 지난 십 여년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리스의 연구개발 지출은 아직 유럽 연합 평균치인 1.93%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OECD와 유로스탓 자료에 따르면 1990년에서 1998년 사이 그리스의 총 연구개발 지출은 핀란드아일랜드 다음으로 유럽에서 3위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인큐베이터 시설을 갖춘 그리스의 기술 단지로는 크리티 과학기술 단지(이라클리오), 테살로니키 기술 단지, 라브리오 기술 단지, 파트라 과학 단지 등이 있다. 그리스는 2005년부터 유럽우주국(ESA)의 회원국이다.

 

그리스 국가 우주 위원회는 1990년대 초부터 유럽우주국과 협력을 시작했다. 1994년 그리스와 유럽우주국은 첫 제휴 협약을 맺었다. 2003년 공식적으로 정식 회원에 신청하여, 그리스는 2005년 3월 16일 유럽 우주국의 16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유럽우주국 회원국으로서 그리스는 우주국의 통신, 기술 활동, 세계 환경 및 안보 모니터링에 참여하고 있다.

[편집] 교육

그리스에서 초등학교(Δημοτικ? Σχολε?ο, Dimotik? Scholeio)와 김나지움(Γυμν?σιο)은 의무 교육이다. 탁아소(Παιδικ?? σταθμ??, Paidik?s Stathm?s)는 의무는 아니지만 많이 이용한다. 유치원은 현재 4세 이상 유아에게 의무가 되었다.

 

아이들은 6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6년간 다닌다. 김나지움은 12살에 들어가며 여기서 3년간 공부한다. 그리스의 의무 중등 교육 이후에는 두 가지 학교 유형으로 진로를 정할 수 있다. 상급 중학교(Ενια?ο Λ?κειο, Eniaia Lykeia)와 기술 직업교육 학교(Τεχνικ? και Επαγγελματικ? Εκπαιδευτ?ρια, "TEE")이다. 여기에는 직업 교육 기관(Ινστιτο?τα Επαγγελματικ?? Κατ?ρτιση?, "IEK")도 있는데, 하급 중학교(Gymnasio)와 상급 중학교(Lykeio)를 졸업한 학생들이 여기에 오면 정해진 특정한 교육 단계로 구분되지 않는 교육 방식으로 가르친다.

 

공공 고등 교육으로는 "최고 교육 기관"(Αν?τατα Εκπαιδευτικ? Ιδρ?ματα, An?tata Ekpaideytik? Idr?mata, "ΑΕΙ")과 "최고 기술 교육 기관"(Αν?τατα Τεχνολογικ? Εκπαιδευτικ? Ιδρ?ματα, An?tata Technologik? Ekpaideytik? Idr?mata, "ATEI") 이 두 가지 대학교 유형이 있다.

 

학생들은 상급 중학교(lykeio) 3학년 과정을 수료하고 국가 시험을 쳐서 대학에 입학한다. 22세 이상의 학생들은 추첨 형식으로 그리스 개방 대학에 입학한다. 아테네 대학은 동지중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그리스의 교육 제도는 학습 장애나 다른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 유치원, 초중등 학교도 둔다. 음악, 신학, 체육 분야의 전문 김나지움이나 고등학교도 있다.

[편집] 관광 

관광업은 그리스의 소득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2004년 그리스는 1,650만 여명의 관광객을 맞아들였다. 2005년 중국의 조사에 따르면 그리스는 중국인이 선호하는 관광지로 뽑혔으며,

 

수도 아테네에만 6,088,287명이 방문했다. 2006년 11월 중국과 비슷하게 오스트리아도 그리스를 선호 관광지로 발표했다.

 

2007년 그리스는 1,9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와 세계 관광지 중 상위 10위에 들었다. 로도스 섬은 유럽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로 선정되었다.

 

다른 유명한 명승지로는 아테네, 북부 할키디키 반도, 이오니아 제도케르키라, 미코노스, 산토리니, 파로스, 크리티 등이 있다.

 

<그리스 신화>

 

............

 

마케도니아 (그리스어: Μακεδον?α)

 

 그리스 반도의 최북방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서쪽으로는 에페이로스, 북쪽으로는 파이오니아, 동쪽으로는 트라케(트라키아), 남쪽으로는 테살리아 지방과 접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비롯하여 인더스 강까지 진출하면서, 마케도니아는 짧은 기간 동안 고대 근동에서 헬라스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그리스 역사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된다.

 

'마케도니아'(Μακεδον?α)라는 나라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낱말 '마케드노스'(μακεδν??)와 연관이 있다. 보통 이 낱말은 원래 '높은 것', '고지 사람'을 뜻하는 말로, 아마 이곳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을 것이다.[1][2]

초기 역사와 전설

마케도니아의 첫 도읍이었던 아이가이(Αιγα?) 주변 땅은 여러 민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마케도니아는 '에마티아'(에마티온 왕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라고 불렸으며, 아이가이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 임금의 도읍인 '에데사'로 불렸다. 전설에 따르면, 카라노스가 수많은 그리스인을 데리고 새 터전을 찾아[3] 이곳으로 와 에데사에 정착하여 이 곳 이름을 아이가이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런 다음 카라노스는 미다스와 다른 임금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고 자신의 새 왕국을 세웠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헬렌(?λλην)의 아들인 도로스(Δ?ρο?)가 자신의 백성을 히스타이오티스로 이끌어 이 곳에서 카드메이아 사람들에게 핀도스 산맥으로 쫓겨나 정착하여 마케도니아인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한 갈래 무리가 더 남쪽으로 이주하여 도리아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4]

 

마케도니아의 첫 나라는 처음 기원전 8세기 또는 기원전 7세기아르고스 왕조가 통치하면서 생겼는데, 전설에 따르면 아르고스 왕조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 시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그래서 이름도 아르고스 왕조이다)).[5] 아르고스 왕조의 통치를 받는 마케도니아인 부족도 아르게아다이 사람('아르고스에서 전래한'이란 뜻으로 번역된다)으로 불렸을 것이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할리아크몬 강악시오스 강이 흐르는 비옥한 충적 평야에 자리잡고 있으며, 올륌포스 산의 북쪽으로 '하부 마케도니아'라고 불렸다. 알렉산드로스 1세 시대에 아르게아다이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당시 륀케스타이나 엘미오타이 등 독립적인 마케도니아 부족들이 살던 상부 마케도니아와, 서쪽으로는 악시오스 강을 넘어 여러 트라케 부족이 살던 에오르다이아, 보티아이아, 뮈그도니아, 알모피아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였다.[6] 페르디카스 1세 임금(혹은 그의 아들인 아르가이오스 1세일 공산이 크다)이 오늘날 베리아(베로이아) 시 주변에 자신의 도읍인 아이가이(오늘날의 베르이나 시)를 세웠다.

 

다리우스 1세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잠시 받은 뒤, 이 나라는 알렉산드로스 1세 임금 때 독립을 되찾았다.

 

기나긴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2류 국가로, 스파르타아테나이를 번갈아 지원하였다.[7]

그리스에 개입하다

기원전 4세기 전에 마케도니아 왕국은 근대 그리스마케도니아 관구에 해당하는 지역 대부분을 아울렀다. 아뮌타스 3세 임금이 드디어 마케도니아 통일 왕국을 이루었으나, 왕국에서 가축이 풍부한 해안 평야 지방과 고립된 부족들이 사는 험한 배후지가 서로 융합되지 못하였고 왕과 혼인 관계를 통해 이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은 일리리아에서 북쪽과 북서쪽으로 오랑캐들이 침공하던 산 고개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마케도니아는 점점 아티케화되었는데, 당시 저명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을 야만적인 사람으로 치부하였다.[8]

 

마케도니아는 분명 그리스어의 방언을 썼으나, 남쪽의 도시 국가의 많은 이들이 쓰는 그리스어로는 완전히 인정받지 못했는데, 마케도니아인들이 남쪽 사람들의 정치 형태에 기반한 폴리스와 문화와는 다른 사회였기 때문이었다.[7]

 

4세기에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의 남쪽 도시 국가들의 정치에 점차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나, 마케도니아는 처음의 아이가이(오늘날의 베르이나) 또 나중의 도읍 펠라의 궁전 문화에서 볼 수 있듯 고졸기의 특징을 견지하였으며, 고전기 헬라스 도시 국가보다는 뮈케나이 문화에 더 가까웠고, 그 밖에도 필리포스 임금이 여러 아내를 둔 것처럼 고졸기의 풍습을 지녔다.

 

그 밖에 또 고졸기 문화의 잔재로 마케도니아 왕국이 세습 군주제를 강하게 고집하여 왕이 강력한(때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던 점을 들 수 있는데, 다만 때때로 토지 귀족들의 견제를 받거나 종종 왕가 내부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군주제는 남쪽 그리스 문화와 크게 대조되었다. 그리스에서는 독자적인 도시국가들이 대개 귀족정이나 민주정 체제를 갖추었으며, 사실상 군주인 참주의 경우에도 대개 권력 세습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관습이 아니었고,

 

 스파르타에서는 군사 지휘관과 성직자로서 두 세습 군주를 두던 것은 예외적인 사례였다.

 

마케도니아나 그리스 모두 봉토와 같은 봉건 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을테지만, 마케도니아에서는 봉건 제도가 역사 시대까지 계속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가 발흥하기 전부터 이러한 제도가 도시 국가에서 폐지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솔론세이사크테이아 법(σεισ?χθεια)이다.)

 

아뮌타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알렉산드로스 2세와 차남인 페르디카스 3세는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였다. 페르디카스 3세의 어린 후계자는 아뮌타스의 셋째 아들 필리포스 2세에 폐위당하고, 필리포스 2세는 스스로 왕이 되어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지배하는 시대를 열었다.

그리스 제패

 필리포스 2세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파이오니아인, 트라케인, 일리리아인의 땅까지 영토를 넓혔다. 또 펠라고니아와 남부 파이오니아도 병합하였다.[9]

 

필리포스는 전통적인 호플리테스 군대의 전투력을 제고하고자 여기에 여러 가지 변화를 주어 마케도니아의 군대를 개혁하였다. 그는 중무장 기병대헤타이로이경보병대를 신설하였는데, 둘 다 매우 유연하고 군대와 잘 대응하였다. 또 주력 보병대의 경우 창의 길이를 늘리고, 방패 크기를 줄여 공격 능력을 신장하였다.

 

필리포스는 왕국의 영토를 급속히 넓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북쪽으로 일리리아인 등 非그리스인 종족들을 공격하여, 북부 국경을 확보하고, 전사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 그 다음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에게 해 북쪽 해안의 영토를 얻었다. 이 지방의 가장 중요한 도시는 암피폴리스로, 트라케의 관문을 장악할 수 있는 도시였으모, 귀중한 은광도 가까웠다. 이 지역은 아테나이의 영토였으며, 이들은 여전히 암피폴리스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여겼다.

 

아테나이는 떠오르는 마케도니아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동맹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이들은 필리포스가 군대를 남족으로 돌려 테살리아의 상당 지역을 점령했을 때도 거의 막지 못하였다.

 

테살리아를 장악하면서 필리포스는 그리스 중앙의 정치에 가깝게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56년에 제3차 신성 전쟁으로 포키스테바이와 그 동맹국과 전쟁을 벌였다. 테바이는 마케도니아인을 군대에 끌어들여, 크로코스 평야 전투에서 필리포스는 포키스와 아테나이 동맹국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는 근린 동맹에서 패자(覇者)가 되었고 필리포스퓌티아 경기의 수장이 되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정계 중심의 패권을 다졌다.

 

아테나이와 계속 투쟁하면서, 필리포스는 뷔잔티온보스포로스 해협을 차지하고자 트라케를 따라 동진하여, 아테나이에 식량 상당수를 공급하는 흑해 곡물 공급선을 차단하였다. 뷔잔티온 공성전은 실패하였으나, 아테나이는 마케도니아의 발흥이 심대한 위협이 되었음을 깨달았으며, 데모스테네스의 지도로 마케도니아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주요 국가들의 연대를 창설하였다. 도시 국가가운데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테바이도 이에 동참하였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동맹군은 마케도니아와 맞붙었으나 대패하였고,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군은 확실하게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마케도니아 제국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짧은 시간에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물론이고 이집트를 비롯한 페르시아 제국에다가 동쪽으로 인도 접경까지 진출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당한 땅의 정치 형태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 문화를 퍼뜨렸다. 마케도니아 제국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이내 여러 여러 헬레니즘 정권으로 갈라졌으나, 정복의 영향은 이어졌으며, 헬레니즘 시대를 연 옛 페르시아 제국 서쪽 영토에 새로이 세워진 그리스어권 도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디아도코이(후계자) 사이에 분할되면서, 마케도니아는 수년 뒤인 기원전 294년에 안티파트로스 왕조로 넘어갔다.

헬레니즘 시대

안티파트로스와 아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를 지배하였으나, 기원전 297년에 카산드로스가 죽자 오랫동안 내부 갈등에 휩싸였다. 데메트리오스 1세(기원전 294~288년)가 잠시 안정을 회복하였으나, 다시 내전에 빠졌다.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는 용병 갈라티아인의 침략을 무찌르고, 마케도니아에서 왕가의 위상을 되찾았다. 그는 질서와 번영을 회복하였으나,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의 통제권을 잃고 말았다. 안티고노스는 안티고노스 왕조하의 안정적인 군주정 체제를 세웠다. 안티고노스 3세그리스 지역에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마케도니아 정권은 여타 헬레니즘 군주 국가에서 도입한 방식과 달리, 옛 고졸기의 왕권 개념을 유지한 유일한 후계 국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의 임금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처럼 신격화되지 않았으며, 프로스퀴네시스(προσκ?νησι?, 페르시아식으로 높은 계급 사람 앞에서 엎드려 예를 표하는 관습) 관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다른 디아도코이 나라에서 자신들을 신민으로 여긴 것보다 훨씬 허물없이 임금을 대하였으며, 임금은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여전히 귀족들과 상의하였다.

로마와 충돌하다(기원전 2~1세기)

필리포스 5세와 아들 페르세우스 시대에 마케도니아 왕국은 새로이 떠오르는 강국 로마와 충돌하였다. 기원전 2~1세기에 마케도니아는 로마와 일련의 전쟁을 벌였다.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97년에 필리포스 5세가, 기원전 168년에는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대패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패배로 안티고노스 왕가는 폐위되고, 왕국은 분할되었다. 기원전 149년에 '가짜 필리포스' 안드리스코스가 잠시 왕국을 복원하였으나, 이듬해에 로마에 패배하고,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직접 지배를 받게 되어 마케도니아 속주가 설치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케이아 등 알렉산드로스의 영향으로 세워진 새로운 여러 헬레니즘 도시 뿐 아니라 오늘날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 있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250-125 BC)과 인도-그리스 왕국(180 BC-10 AD)까지도 이주하는 그리스인이 많았는데, 이 두 나라는 기원전 1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제국은 얼마간 분쟁을 겪은 후 그의 장군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305-30 BC, 주로 이집트), 셀레우코스 제국(312-63 BC,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왕국안티고노스 왕조(306-168 BC)로 분할되었다.

 

그 사이에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명목상 마케도니아 왕국에 종속되었으나, 자신들의 자유를 일부 되찾았다. 도시국가들은 아카이아 연맹(c. 300-146 BC, 테바이, 코린토스, 아르고스 등)과 아이톨리아 연맹(290-188 BC, 스파르타, 아테나이)으로 자신들끼리 세력을 양분하였다.

 

로마에 정복당하기까지 헬레니즘 시대 거의 내내 두 연맹은 서로 전쟁을 하거나, 디아도코이(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계국)간의 분쟁에서 어느 한편에 붙기도 하였다.

 

기원전 3세기 말 안티고노스 왕국로마와 전쟁에 휘말렸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승패가 분명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인들은 늘 그랬듯이 계속 전쟁을 일으켜 기원전 149년에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흡수하였다.

 

동방의 거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은 기원전 64년까지 그 잔당이 존속하긴 하였으나 점차 분열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기원전 30년까지 버텼으나, 결국 클레오파트라(재위 51-30 BC)의 때에 로마에 정복당한다.

 

아이톨리아 연맹은 로마가 그리스에 개입하는데 경계하였으며, 로마-시리아 전쟁(192-188 BC) 당시 셀레우코스편에 섰다.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하자 아이톨리아 연맹은 사실상 로마에 흡수되었다.

 

아카이아 연맹(c. 300-146 BC)은 아이톨리아 연맹(290-188 BC)이나 마케도니아(c. 800-149/146 BC)보다 더 오래 존속하였으나, 결국 146년에 로마와 전쟁을 하여 결국 병합되었으며, 이로써 그리스 전역의 독립이 끝났다.

 

 

셀레우코스 왕국 [Seleucid Kingdom (BC 312~64)]

 

이 왕국의 창건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에서 이 지역을 분리시켰다.가장 강성했을 때는 유럽에서 트라키아(트라케) 지방부터 인도 변경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제국(BC 312~64)..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2년 뒤인 BC 321년에 바빌로니아의 총독(Satrap)이 되었다.

 

해체되어가는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들이 지리한 권력투쟁을 벌일 때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로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안티고노스가 자신을 바빌로니아에서 추방했던 일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항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도왔다.

 

BC 312년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내준 병력을 사용하여 가자에서 디미트리오스와 싸워서 이겼다. 그리고 같은 해에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바빌로니아를 장악하고 이곳에 셀레우코스 왕국을 건설했다.

 

BC 305년부터 왕국의 힘을 키운 다음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까지,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서쪽에서는 BC 301년 이프수스에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BC 281년에는 케르소네소스 트라키아를 병합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불만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가 BC 261년까지 통치했으며, 안티오코스 2세(BC 246~225), 셀레우코스 3세(BC 225~223), 안티오코스 3세 대왕(BC 223~187)이 그 뒤를 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 대왕 때에는 철저한 행정개혁이 특징이었다. 그는 문관과 무관 사이의 경쟁으로 늘 긴장되어 있는 2중권력체제를 제거하고 이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체제에서 따온 여러 요소들을 근대화시켰다. 즉 문관과 무관의 권력을 통합한 각지의 지방관(Strat?goi)들이 제국을 다스렸다.

 

서쪽은 사르디스가 동쪽은 셀레우키아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아나톨리아와 그 휘하의 그리스 도시들을 지배함으로써 중동지역 전역에 막대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헬레스폰토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사이를 지나는 전략요충지 타우루스의 통로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의 상업과 무역도 지배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시리아 정착지, 그중에서도 특히 안티오크는 왕국이 군사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중동의 토착문화보다 그리스 풍습과 관습들이 우세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전역사를 통해 보면 지배층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마케도니아의 귀족계급 출신들이었고 도시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그리스 문화의 주도권에 대한 저항은 안티오코스 4세의 통치기간(BC 175~163)중에 절정에 달했다.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 문화 증진책이 도를 넘어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에게 바치는 조각상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행동은 BC 165년에 시작된 마카베인들의 봉기에 불씨를 당겼다.

 

이후 4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마카베인들의 저항으로 마침내 셀레우코스 왕국의 유대교도들에 대한 지배는 팔레스타인에 독립적인 유대 왕국을 창건함으로써 끝이 났다(→ 색인 :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국은 BC 3세기경이 되면서 광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BC 190년 처음으로 로마인들에게 패배한 뒤로 셀레우코스 왕국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에게 해의 그리스 도시들은 이미 셀레우코스의 명예를 벗어던졌으며, 카파도키아아탈리드 페르가몬이 독립했고, 다른 지역들도 켈트인들과 폰투스, 비트니아에게 빼앗겼다.

 

BC 3세기 중반경에는 파르티아·박트리아·소그디아나가 독립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코일레 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BC 200) 일시적이나마 아르메니아를 점령함으로써, 로마에게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어느 정도 확충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4세가 죽고(BC 164) 시리아의 콤마게네와 팔레스타인의 유대 지역을 잃은 후부터 쇠퇴는 가속화했다. BC 141년경에는 유프라테스 강 동편지역 전부를 잃었고 디미트리오스 2세(BC 141)와 안티오코스 7세(BC 130)의 노력도 이 왕국의 급속한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BC 64년 마침내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을 때는 이전의 강력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시리아와 실리시아 동부지방에 한정되었으며, 그나마도 보잘것없는 지배력만 가지고 있었다.

 

 

* 페르가몬[Pergamon] 아탈로스 왕조(BC 241년-BC 133년)

 

에게 해에서 25.6㎞ 떨어진 미시아 지방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 도시.

 

카이코스 강(지금의 바키르 강)의 넓은 유역 북쪽에 외따로 솟아 있는 높은 구릉지에 있었다.

오늘날 이 자리에는 터키 이즈미르 주 베르가마가 있다.

 

페르가몬이 존재했던 때는 BC 5세기부터이지만 헬레니즘 시대(BC 323~330)에 아탈로스 왕조의 왕궁이 세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아탈로스 왕조의 요새와 궁전은 구릉 위에 서 있었고, 도시는 구릉 기슭에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래쪽 평야에 도시가 세워졌다.

 

아탈로스 왕조 치하에서 이 도시는 형식상으로 자치권을 가졌지만, 행정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사사건건 왕의 간섭을 받았다.

 

처음에 아탈로스 일족은 셀레우코스 왕국의 신하로서 페르가몬을 다스렸지만,

에우메네스 1세가 안티오코스 1세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BC 263).

 

BC 241년에 에우메네스 1세가 죽자, 그의 조카인 아탈로스 1세가 왕이 되어 갈라티아인을 물리치고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이 왕조의 이름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페르가몬(미시아)을 중심으로 한 아탈로스 왕조의 영토는 BC 188년에 이르자 원래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였던 리디아(에게 해 연안에 있는 그리스 해안도시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프리기아의 일부, 리카오니아 및 피시디아(BC 183)의 일부를 병합하여 훨씬 넓어졌다.

 

이러한 영토확장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와 다투던 로마와 아탈로스 왕조의 에우메네스 2세가 동맹을 맺은 덕분이었다.

 

에우메네스의 아들이자 2번째 후계자인 아탈로스 3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서 BC 133년 왕국을 로마에 넘겨주었으며, 로마는 그것을 받아서 BC 129년에 아시아 속주를 설치했다.

 

아시아 속주에는 이오니아페르가몬의 영토가 포함되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로마의 신하인 이웃 왕들의 몫으로 남았다.

 

페르가몬 왕국은 아탈로스 왕조의 통치자들과 로마에 농산물과 은 등의 많은 부를 안겨주었다.

아탈로스 왕조의 통치자들은 페르가몬 시를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그리스 도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다. 페르가몬은 그당시의 가장 뛰어난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며, 이곳의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 가는 훌륭한 것이었다.

 

아탈로스 1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은 현지 예술가들에게 주문한 수많은 조각품·그림·장식물과 그리스에서 수집한 많은 예술품으로 도시의 신전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몄다.

 

로마 시대의 인구는 2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1878년 베를린 박물관의 후원으로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수많은 보물들이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자들은 이 발굴 결과를 토대로 헬레니즘 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지역의 시가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극장과 아테나 니케포로스 신전, 헬레니즘 예술의 걸작품인 벽을 화려하게 장식한 거대한 제우스 제단 등이 주요유적이다. 이 제단의 일부와 돋을새김 조각은 정교하게 복원되어 오늘날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서 있다.

 

평민들이 살던 아래쪽 도시에는 시장, 체육관, 헤라 신전, 데메테르 신전이 있었다.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는 원형투기장·극장·경주장 등이 있다.

 

아탈로스 왕조의 초기 통치자들도 위쪽 도시에 건축물들을 세웠지만, 이 도시가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품으로 높은 평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주로 많은 건축물로 짓고 재건한 후기 통치자들(에우메네스 2세와 아탈로스 3세) 덕분이다.

 

로마가 몰락한 뒤 페르가몬은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14세기초 오스만 투르크의 손으로 넘어 갔다.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기원전 146년 그리스 반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마케도니아로마 속주가 되었고, 남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속주 장관의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 폴리스는 부분적으로 독립을 얻었으며 세금도 내지 않았다.

 

에게 해 제도기원전 133년에 로마 영토로 복속되었다.

 

기원전 88년에 아테나이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술라 장군은 그리스를 황폐화하였다. 로마의 내전으로 그리스 땅은 더욱 파괴되었으며,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그리스 반도를 속주로 삼으면서 형편이 나아졌다.

 

로마 문화는 오랫동안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동부 속주였다. 그리스어동방이탈리아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쓰였으며, 갈레노스 등 수많은 그리스 지식인들이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마케도니아공화국

공식명칭 : 마케도니아공화국(Republic of Macedonia)
인구 : 2,041,000
면적 : 25,713
수도 : 스코플레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총리
공식 언어 : 마케도니아어·알바니아어
독립년월일 : 1991. 9. 17
화폐단위 : 데나르(denar/MKD)
국가(國歌) : Denes nad Makedonija se radja novo sonce na slobodata("Today a new sun of liberty appears over Macedonia")

 

공식 이름은 마케도니아 공화국(Republika Makedonija/Republic of Macedonia). 세르보크로아티아어와 마케도니아어로는 Makedonija.

역사적으로 중요한 마케도니아 지방의 북서반부를 이루는 공화국.

 

북쪽으로 코소보와 세르비아, 동쪽으로 불가리아, 남쪽으로 그리스, 서쪽으로 알바니아와 경계를 이룬다. 수도는 스코플례이다.

 

공화국은 전통적으로 마케도니아로 알려진 발칸 반도 남쪽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마케도니아는 남쪽으로 에게 해와 알리악몬 강, 서쪽으로는 프레스파 호수와 오리드 호수, 츠르니드림 강의 서쪽 분계, 그리고 사르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스코프스카츠르나고라 산맥과 모라바 강, 바르다르 강 분지 사이의 분계로 둘러싸여 있다. 피린 산맥이 마케도니아의 동쪽 경계를 이룬다. 1913년 이후 지리적·역사적 지역은 여러 국가들로 나뉘어졌다. 이 지역의 2/5 정도만이 스스로 마케도니아라고 부르는 독립국가가 차지한다.

 

처음의 마케도니아는 1371∼1912년에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보다 큰 마케도니아 지역의 일부였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는 발칸 전쟁(1912~13)으로 종결되었고,

 

마케도니아의 이 부분은 1913년 세르비아에 할양되었으며, 1919년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결성될 때 그 나라의 일부가 되었다(그후 유고슬라비아로 개명).

 

유고슬라비아가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에 추축국들에 의해 분할될 때 불가리아가 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 전역을 차지했다. 전쟁중에 요시프 브로스 티토는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저항운동을 펼친 파르티잔의 마케도니아파를 조직했다. 파르티잔의 활동으로 1944∼45년에 유고슬라비아가 해방된 후 마케도니아는 재편성된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일부가 되었고, 1946년에 이 국가를 구성하는 6개 공화국의 하나가 되었다.

 

그후 동구권 변혁의 열기 속에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면서 1991년 12월 19일 독립을 선언하였고 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을 국가명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고, 새로운 공화국은 마케도니아 구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 국제연합(UN)에 가입했다.

 

마케도니아가 나라의 크기나 인구 규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지정학적 위치는 빈번한 왕래가 이루어졌던 길들의 주요 교차점이라는 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도나우 강에서 에게 해까지의 대(大) 남북횡단길은 모라바 강과 바르다르 강의 계곡을 따라 형성되었고, 고대의 동-서 무역로는 흑해와 이스탄불을 아드리아 해와 연결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동방정교회를 믿는 슬라브족 후손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500년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알바니아계와 터키계를 비롯한 다른 인종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마케도니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문화적 전통들이 복합되어 공존하는 경계 지역이 되었다.

 

마케도니아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인종적으로는 마케도니아인이 전체인구의 2/3 이상을 차지하는데, 그들은 세르보크로아티아어보다 불가리아어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남슬라브어를 사용한다. 알바니아인·터키인·세르비아인이 모여 사는 지역들도 있다. 인구는 서부에 밀집해 있으며, 세르비아 북부와 독일의 산업중심지로 젊은 사람들이 이주하는 바람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마케도니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유고슬라비아 연방해체 이전의 유고슬라비아 전체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밀·보리·옥수수·담배·목화·쌀·해바라기·사탕무를 주로 재배하며 양과 소도 많이 사육한다. 수도인 스코플례에서 강철과 화학제품을 생산하며, 그밖의 제조품으로는 직물·가구·자기·도자기가 있다. 면적 25,713㎢, 인구 2,039,000(2008 추계).

<키프로스>

키프로스(그리스어: Κ?προ? 키프로스[*], 터키어: Kıbrıs 크브르스[*], 문화어: 끼쁘로스)는 동부 지중해에 있는 섬나라로, 북쪽으로는 터키, 동쪽으로는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 서쪽으로는 그리스, 남쪽으로는 이집트가 있다.키프로스는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해마다 240만 관광객이 찾아오는 인기있는 관광지이기도 하다.[6]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1960년에 독립하여[2] 1961년 영국 연방에 가입하였다.

 

 키프로스 공화국은 이 지역에서 매우 선진적인 경제 수준을 보이며,[7] 2004년 5월 1일부로 유럽 연합의 일원이 되었다.

 

1974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터키계 키프로스인 사이에 11년 간의 내부 분쟁(1963?1974)이 끝나고[8] 키프로스 섬을 그리스에 병합하고자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9][10] 그리스계 키프로스 민족주의자[8][9]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섬의 37%를 점령하였다. 터키는 키프로스에 군사 개입을 하면서 미국[11][12]북대서양 조약기구[11]의 지원을 몰래 받았다. 그리하여 수 천 명의 키프로스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키프로스 북부에 터키계 키프로스의 분리 국가가 성립하였다. 이 사건과 이후 정치 상황으로 계속된 분쟁이 이어졌다.

 

국제적으로 국가로 승인받은 키프로스 공화국은 법적으로 키프로스 섬 전체 및 영국에 할당된 일부 군사 기지를 제외한 모든 해역에 주권을 갖고 있다.

 

이 섬은 사실상 네 부분으로 나뉜다.

키프로스 공화국(그리스어: Κυπριακ? Δημοκρατ?α 키프리아키 디모크라티아[*])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남부 지역. 섬 전체 면적의 59%를 차지하고 있다.

[편집] 역사

[편집] 고대

키프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이며, 키뉘라스 왕테우크로스, 퓌그말리온의 고향이기도 하다.[15] 이 곳에서 처음으로 인간 활동 흔적이 남은 곳은 남부 해안의 아이토크렘노스(Aetokremnos)로, 기원전 10,000년경에 이 섬에서 사람들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기원전 8200년경에 마을 공동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첫 인간의 등장은 키프로스 난쟁이 하마키프로스 난쟁이 코끼리의 멸종과 서로 관련이 있다.[16]

 

신석기 시대에 섬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비롯하여, 인구와 정착지의 이동이 몇차례 전개 되었으며, 기원전 3800년경에 지진이 일어나 취락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이 이 섬으로 들어왔는데, 이 시기의 것으로 발견된 유물 가운데는 질 높은 철기가 드물지만, 소아시아에서 온 일부 사람들은 발전된 철기 가공 기술이 있었다.

 

기원전 2400년경 아나톨리아인들이 키프로스에 오면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케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600년경에 키프로스에 처음으로 왔는데, 이 시기 정착지는 섬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다른 그리스인 집단들이 기원전 1100~1050년경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키프로스는 그리스의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오늘날 라르나카와 살라미스 근처의 '콰르트-하다쉬트'("새 도시") 등 일부 페니키아 식민시도 들어섰다.

 

키프로스는 이집트의 지배를 잠시 받다가 기원전 709년아시리아에 정복되었으며, 기원전 545년에는 페르시아 영토가 되었다.

 

오네실로스가 이끄는 키프로스 사람들은 기원전 499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이오니아 도시의 반란에 동참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키프로스 섬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키프로스는 완전히 헬레니즘화되었으나, 기원전 58년 로마에 병합되었다.

 

45년 예수의 제자 파울루스바르나바가 키프로스에 건너와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였다. 키프로스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동맹하여 로마 제국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이 죽고 나머지 유대인은 키프로스에서 추방당하였다.

[편집] 중세

395년 키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17] 649년 아랍인에 섬을 내어주었고 966년에야 다시 섬을 요구하게 된다. 제3차 십자군 당시 1191년에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하여 사라센인에게서 비교적 안전한 주요 보급 기지로 이용하였다. 자신의 왕국을 잃었던 뤼지냥의 기성전 기사단에게서 섬을 매입하였다.

 

카트린느 코르나로 여왕이 퇴위하여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키프로스를 장악하였다. 여왕은 자크 2세의 미망인으로, 키프로스 왕국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상업 중개지로 이용하였으며, 오늘날 키프로스의 수도인 레프코시아를 이내 유명한 베네치아 성벽으로 요새화하였다.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키프로스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1539년 오스만 제국레메소스를 파괴하고 악명을 떨쳤는데, 베네치아는 암모호스토스레프코시아, 키레니아를 요새화하였다.

[편집] 오스만 제국과 대영 제국의 지배

1570년 오스만 제국피얄레 파샤가 이끄는 60,000명의 대규모 군대가 레프코시아암모호스토스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물리치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였다. 레프코시아 사람 20,000명이 처형되었으며, 모든 교회와 공공 건물, 궁궐이 약탈당하였다.[18]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 섬에 밀레트 제도를 시행하여, 종교 기관이 非무슬림 소수집단을 다스리도록 허용하였으며, 동방 정교회을 이들 기관과 그리스도 교도 키프로스인의 중개자로 삼아 정치ㆍ경제상의 권력도 부여하였다. 무거운 세금 때문에 1572년에서 1668년까지 대략 28번의 반란이 일어나 술탄이 개입해야 하였다.

 

1831년 오스만 제국에서 첫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남자의 수만 세었는데, 무슬림은 14,983명, 그리스도교도는 29,190명이었다.[19] 1872년 키프로스의 인구는 144,000명으로 늘었는데, 그 가운데 무슬림은 44,000명이고, 그리스도 교도가 100,000명이었다.[20]

 

터키-러시아 전쟁((1877?1878) 이후 1878년 이 섬의 행정권(주권이 아닌)은 대영제국에 양도되었다. 대영제국에 있어 키프로스는 자국 식민지 통로에 자리잡은 군사 요충지였다.

 

1906년 암모호스토스항이 완공되자 키프로스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를 바라보는 해군 요충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편에 서자 영국은 키프로스를 병합하였다.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신생 터키 공화국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1925년 키프로스는 영국의 왕령식민지(Crown colony)로 선언되었다.

 

1950년 동방 정교회는 터키계 키프로스인 집단이 참가를 거부하는 가운데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90%가 넘는 지지로 '통합(?νωσι?)', 즉 그리스와 통합하는데 찬성하였다. 영국 당국은 헌법을 제정하여 제한적인 자치권을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결국 철회되었다.

 

1955년 키프로스 전사 민족단(Εθνικ? Οργ?νωσι? Κυπρ?ων Αγωνιστ?ν, EOKA)이 창설되어 무장 투쟁으로 독립하여 그리스와 통합하고자 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에 맞서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터키 저항단(T?rk Mukavemet Te?kilatı, TMT)을 조직하여 국가 분할을 요구하였다.[21]

[편집] 독립

1960년 16일 8월 키프로스는 영국, 그리스, 터키가 맺은 취리히 및 런던 협정으로 독립을 얻었다.

영국은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에 두 군사 지역만 보유하고, 정부 공직과 공무는 두 민족에게 할당을 두고, 터키계 소수 집단에 영구 거부권을 부여하며, 의회와 행정부에 30% 비중을 보장하고, 세 국가의 모국 보장권을 부여하였다.

 

1963년 내부 분쟁이 일어났는데, 부분적으로 두 "모국"(그리스와 터키)이 뒤에서 도와주기도 하였다. 일부 지역의 터키계 키프로스인은 보호 구역으로 물러갔으며,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지도자 마카리오스 3세 대주교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국제 연합이 개입하여 급박한 시점에 키프로스 국제연합군(UNICYP)이 파견되었다.

[편집] 분단

1970년대 초에 집권엔 그리스 군사 정권은 마카리오스 3세의 정책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그리스-키프로스 병합에 진전을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까닭도 있고, 또 국내 반대파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군사 정권은 1974년 7월 13일 키프로스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군사 정권은 강제로 니코스 삼손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그는 민족주의자이긴 하였으나,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병합을 선언하지 않았으며, 키프로스가 계속 독립 상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2]

 

그러나 터키 정부는 불안을 느끼고 이에 항의하며 영국의 개입을 구하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터키가 취리히 및 런던 협정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지 7일만에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헌정 질서를 복원하기 위하여 개입한다. 그리스는 새로운 키프로스 전사 민족단 준군사 조직을 조직하여 침략자에 저항하리라 발표하였으나, 이는 역효과를 내어 터키가 점령한 지역의 그리스인 추방을 죄어쳤다. 수적으로 불리한 그리스 군대는 터키의 진격에 저항하지 못하였다.

 

아야 나파 지역만 터키의 점령을 피하였는데, 이 지역은 터키가 신중하게 접근한 영국의 군사 지역 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제 사회는 휴전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당시 키프로스 국토의 37%가 터키 점령지로 떨어지면서 북쪽에 있던 170,000명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과 남족에 있던 50,000명의 터키계 키프로스인이 각각 터전을 잃었다. 1983년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터키 외에는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현재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1,534명[23]과 터키계 키프로스인 502명[24]이 행방불명 상태이다. 1974년 여름의 사건은 그리스-터키 외교 관계 뿐 아니라 키프로스 정치의 중요한 사안이다.

 

 제네바 협약국제연합 결의안을 위반하고 약 100,000여명의 터키인들이 북부 키프로스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터키의 침공으로 터키 군대가 북부 영토를 장악한 이후 키프로스 공화국은 북부 지역의 모든 통관항을 봉쇄한다고 발표하였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남쪽의 그리스계는 2004년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2008년 1월 1일에는 유로존에 가입하였다.

[편집] 최근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키프로스는 분단되어 북부와 남부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키프로스 공화국은 입헌 민주주의 국가이며, 호경기와 훌륭한 인프라로 높은 수준의 번영을 이루고 있다. 또한 국제 연합유럽 연합 등 여러 국제 기구의 회원국이며, 키프로스 섬의 유일하게 적법한 정부로 승인받고 있다.

 

 키프로스 공화국이 실효 지배하지 못하는 지역인 북키프로스는 터키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키프로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아난 계획이 있다. 이 계획은 터키계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리스계는 거부하였다.

 

2006년 7월 키프로스 섬은 이스라엘헤즈볼라 사이의 분쟁으로 피신한 레바논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25]

 

2008년 3월 수십 년간 그리스계 키프로스 통제 지역과 국제 연합 완충 지대 사이 장벽이 철거되었다.[26] 이 장벽은 레프코시아 중심부의 레드라 거리(Ledra Street)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어, 32년간 키프로스 분단의 강력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2008년 4월 3일 레드라 거리가 터키계와 그리스계 공무원이 각각 주재하는 가운데 다시 개방되었다.[27]

[편집] 지리 

 

키프로스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이다. 시칠리아사르데냐 다음으로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세계에서 81번째로 큰 섬이다. 키프로스 섬은 오늘날 터키인 소아시아 반도의 남쪽에 있다.

 

 이 섬은 서아시아[28] 또는 중동[29]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서아시아, 남부 유럽, 북아프리카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잡은 키프로스 섬은 오랫동안 그리스 본토의 지배를 받았으며, 가끔은 아나톨리아, 레반트, 비잔티움 제국, 영국의 영향을 받았다. 키프로스는 유럽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4]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4년 5월 1일부로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키프로스 섬은 위도로는 240km, 경도로는 100km에 이르며, 터키와는 북쪽으로 75km 떨어져 있다. 다른 인접 육지로는 동쪽에 시리아레바논(각각 105km, 108km 떨어져 있음)이 있다. 이스라엘과는 남동쪽으로 200km 떨어져 있고, 이집트와는 남쪽으로 380km, 그리스의 경우 키프로스와 로도스의 거리는 400km, 그리스 본토와는 800km이다.

 

이 섬의 생물 환경은 산지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중앙 평원인 메사오리아로 산맥이 지난다. 트로도스 산맥이 섬 남부와 서부 지역을 지나며, 이 지역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좁은 키레니아 협곡은 북부 해안선을 따라 뻗어 트로도스 산맥보다는 훨씬 좁은 지역을 차지하며, 고도도 낮다. 키프로스의 이 두 산맥은 터키 본토의 타우루스 산맥과 보통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타우루스 산맥은 키프로스 북부에서도 그 능선이 보인다. 섬 주변으로는 폭이 들쭉날쭉한 해안 저지가 둘러싸고 있다.

 

1974년 이후 이 섬은 사실상 국토의 36%를 차지하고 있는 북부의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과 64%를 차지하고 있는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나뉘어 있다.

[편집] 행정 구역

수도니코시아이며 영국의 해외 기지인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가 있다. 키프로스는 6개 구로 구성되어 있다.[30] 레프코시아, 암모호스토스, 키레니아, 라르나카, 레메소스, 파포스가 바로 그러하다.

 

키프로스는 대통령제 공화국이다.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은 대통령으로, 보통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5년간 재임한다. 행정권은 행정부가, 입법권은 의회가 가지며, 사법부는 입법부ㆍ행정부와 독립되어 있다.

 

1960년 키프로스 헌법에서는 3권 분립과 대통령제를 규정하였으며, 터키계 키프로스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권력 분점 비율로 정하여 복잡한 견제와 균형 체제를 구성하였다. 그리스계가 대통령이고 터키계가 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는 각 시군의 선거로 선출하여 임기는 5년이며, 각각 입법부나 행정부의 어떤 결정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입법권은 의회가 가지는데, 의회 역시 선거로 선출된다. 두 집단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뒤 1964년부터 터키계 키프로스인에 할당된 의석은 공석 상태로 남아있다. 터키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키프로스 공화국의 법적인 분단을 시도하기 전까지 터키계 사람들은 국가를 설립하는 데 거부하였다.

 

1974년 키프로스는 사실상 키프로스 남쪽 2/3를 차지하는 그리스계와 나머지 북쪽을 차지한 터키계로 분단되었다. 그리하여 1983년 터키계 사람들은 독립을 선언하여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였으나, 터키 외에 세계 다른 나라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다. 1985년 북키프로스는 헌법을 채택하고 첫 선거를 치렀다. 국제 연합을 비롯한 (터키 외의) 모든 외국 정부들은 키프로스 섬 전체에 대하여 키프로스 공화국의 주권을 승인하였다. 터키는 유럽 연합 가입 회담에서 자국이 실패할 경우 북키프로스를 병합할 의도를 갖고 있다.

키프로스 의회는 현재 59명의 의원이 있으며, 임기는 5년이다. 의원 중 56명은 비례 대표제로 선출되고, 나머지 3명은 마론파, 라틴계, 아르메니아인 소수집단을 대표하는 참관 의원이다. 터키계 키프로스인에 할당된 의석으로 24석이 있으나, 1964년 이래 공석이다. 정계는 공산주의 노동자 진보당(AKEL), 자유 보수주의 민주 연대, 중도[31] 민주당,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운동(EDEK), 그리고 중도 유럽당이 있다.

 

2008년 2월 17일 노동자 진보당의 디미트리스 흐리스토피아스가 키프로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처음으로 광범위한 연정 구성 없이 선거 승리를 이루었다. 덕분에 키프로스는 몰도바네팔과 더불어 현재 세계에서 민주적으로 집권한 공산주의 정권이 되었으며, 현재 유럽 연합 가입국 가운데 유일하게 공산당이 집권한 나라이다. 흐리스토피아스는 2003년 2월에 집권한 민주당의 타소스 파파도풀로스에게서 정권을 넘겨 받았다.

[편집] 인권

키프로스는 분단 문제가 늘 부각되다보니 그 밖에 인권 문제에 관심이 소홀해질 수 있다. 그리스계 지역이건 터키계 지역이건 섬 전체에 매춘이 만연하며, 두 지역 모두 동유럽에서 이어지는 인신 매매 경로의 주요 성매매 지점[32]으로 비판받고 있다.[33] 북키프로스 정권은 신문 편집자에 심하게 개입하여 언론의 자유 문제로 비판받기도 한다.[34]가정폭력에 대한 법규는 거의 시행되지 않으며,[35] 북키프로스에선 관련 입법도 없는 실정이다. 대개 개발도상국 출신 이주 노동자 집안에서 일어나는 가정 학대에 대하여 종종 그리스계 키프로스 언론이 보도하기도 하며,[36] 반인종주의 자선단체인 평등, 원조, 반인종주의를 위한 운동(KISA)의 캠페인 주제가 되기도 한다.

[편집] 주민

그리스계와 터키계는 역사적으로 키프로스 섬 전역에 퍼져 살고 있었으나, 1974년 남북 분단 때 북부에 사는 그리스계 주민 대부분은 터키군의 지배를 싫어하고 남부로 떠났고, 남부에 사는 터키계 주민 대부분 또한 그리스계의 보복을 두려워해서 터키군 지배 지역으로 피신한 결과, 그리스계의 99.5%가 남키프로스에, 터키계의 98.7%가 북키프로스에 산다.

 

그 외 주민은 99.2%가 남키프로스에 거주하고 있다. 덧붙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키프로스에서는 상당수 터키계 주민이 터키유럽으로 돈벌이로 이주하는 한편, 터키에서 많은 터키인이 들어와 살고 있기 때문에 터키계 키프로스인의 정확한 인구는 알기 어렵다.

 

그 외에도 소수의 미국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두호보르파), 아랍인도 거주한다.

[편집] 언어

그리스어터키어(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가 공용어이다. 영어도 사용된다.

키프로스는 2006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프랑코포니 정상회담의 결과 준회원국이 되었다.

[편집] 종교

키프로스는 사도 바울이 선교활동을 한 곳인데, 그 실례로 키프로스 파마구스타(famagusta)는 사도 바울과 동역자 성 바나바가 선교활동을 한 살라미스의 현재지명이다.(사도행전 13.5) 정교회그리스계가 78%, 이슬람교터키계가 18%이다. 그 외 4%에는 단성신학을 지지하는 마론파교회와 아르메니아 정교회그리스도인, 약간의 두호보르파가 있다. 키프로스 정교회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아테네그리스 정교회에도 속하지 않고, 대주교가 중심인 키프로스 정교회로 자치를 실시하고 있다. 그외 교회로는 2006년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일원이 된 성공회 성 마가교회(st.mark's anglican chapalincy in famagusta and kapaz cyprus)가 있다.[37]

징병제를 실시한다.

남북 모두 수교국이다. 한국은 1960년 키프로스를 승인하였으며 1995년에 공식수교하였다.

인류문명사, 다문화의 비극, 키프로스

 

 

이 그림을 보면 책좀 읽거나 눈썰미 좋은 이들은 단번에 알아챌것이다. 

새치라는 생선을 닮은 나라 사이프러스, 혹은 키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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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가여서 한창 시끄러?다. 

우리나라처럼 분단국가여서 상징성을 국토모양에 두고 

이런 생선횟집 깃발같은 걸 국기라고 내걸었다. 

 

이걸 보고서 또 원숭이색기들처럼 뽄따서 하는 집단이 있으니...

 

키프로스는 지중해에 발을 담근 민족들이나 나라치고  

한번 안들어온 민족이나 나라들이 없었다. 

 

그리스, 이집트, 앗시리아, 페르시아, 알랙산더제국, 로마, 사라센, 십자군,베니스공화국,  터키... 

 

영국. 

 

18세기 말에 터키와 러시아가 크림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영국은 터키편에서 참전하면서 

터키로부터, 키프로스를 영국군의 경유지 및 기항지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앗다.

 

전쟁이 끝나도 영국은 키프로스에서 물러가지 않고, 북아프리카를  

겨낭한 군사요충지로 이용하며 터키의 영토를 잠식했다.

 

이때문에 터키는 이집트를 잃게되고, 독일과 가까워지는 이유가 된 것이다.

 

콧수염기른 게이군대 

결국 1차 대전에 터키는 독일편을 든 것이 화가 되어, 나라가 거덜나는 바. 

키프로스도 영국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케말파샤의 터키는 키프로스를 수복할 능력이 없어서 영국에게 영구양도를 했다. 

1925년 키프로스는 영국령이면서도 영국왕가의 소유가 되었다. 

모든 재산 및 조세권이 영국왕가에 있엇다.

 

영국왕가가 비록 권력은 없지만, 이런 뭉태기 재산을 소유하니 

세계부자랭킹에 1위가 되는 리유다. 

홍콩도 왕실재산이었다.

 

그렇게 키프로스는 2차 대전을 보내고, 

2차 대전 이후, 식민지 독립이라는 대세에 발맞춰 

마침내 대영연방국의 하나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나라로 독립은 하였으나, 

나라는 하나가 아니였다.

 

바로 민족분규라는 매우 위험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던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인도, 버마, 이라크 등 영국의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을 하자,

키프로스도 독립의 열기가 뜨거웠고 

그리스계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독립찬반 투표를 해서, 

독립과 동시에 그리스에 귀속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터키계 주민들 또한 반대의견을 내고 있었다. 

 

영국, 그리스, 터키 3개국은 키프로스의 각각의 영향권을 저렇게 나누었다. 

지도의 하늘색은 분쟁 이후에 생긴 완충지역이다.

 

초기에는   분홍, 자짓, 연두 세가지 색깔의 구분만이 존재했다. 

영국은 군사기지 지역을 계속 보유하고  

북동부의 터키계 지역과 남서부의 그리스계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이 분할이 각각 민족의 생활구역과 일치되지는 않앗다. 

 

이글의 맨위에 보면 빨강색 계열이 터키계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고 

푸른색은 그리스계가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현실과 괴리된 국경선은 자연히 충돌을 낳았다. 

 

평행선을 달리던 양측은 결국 1962년부터 무장투쟁에 들어선다. 

약 12년 간 , 그리스계와 터키계는 처절한 전쟁을 했다. 

 

이 내전은 결국 한국처럼 UN군이 파견되어 진정을 시켯다. 

그런데, 그리스에 사회주의 정권을 엎고 군사정권이 들어선다.

 

그리스 군사정권은 집권의 대의명분을 키프로스 회복에서 찾고자 

다시금 키프로스에 긴장 상태를 만들었다.

 

그리스는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괴뢰정권을 세워, 그리스로의 병합을 획책하지만 

괴뢰정부는 그리스와의 통합보다는 독립을 원했다. 

 

이런 와중에 터키계는 터키에 군사행동을 요구했거 터키군은 이에 호응하여 

키프로스에 파병했다. 

키프로스에 진주한 터키군 

 

2차 대전 이후, 서방진영에서 전면전이 벌어진 것이다. 

미제 제트전투기와 미제구축함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그리스 해군의 구축함이 터키공군의 F-100 전투기 4대 편대를

포탄 10발로 격추시켜 버리는 일도 벌어진 전쟁이었다.

 

그러나, 육상에서의 두 민족같의 전쟁은 다른 여느 전쟁과 비교할 바 없이 혹독했다.

살인, 강간... 상대방의 씨를 말리는 잔학한 전쟁이엇다. 

 

1974년 부터 시작된 전면전 같지 않은 전면전은 1984년에 가서야 종전의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키프로스는 분단된 섬나라가 되어버렷다. 

 

그리스계의 키프로스, 터키계의 키프로스. 

70년대 초반 미국과 서방은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분쟁에서 터키계의 편에 서있었다.

 

이유는 당시의 그리스는 사회주의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가 그리스와의 분쟁에 휘말려 군사력이 분산되는 사태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 후에는 터키 지지 일변도에서  탈피하였다. 

 

아울러 군사적 분쟁이 종식된 이후에 미국과 서유럽은 거의 일방적인 그리스계 지지의 성향을 나타내엇다.

 

미국과 서유럽의 승인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는 국가승인과 함꼐, 농업과 관광인프라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져 2004년에는 EU에 가입하는 성장세를 보인 반면.

 

터키계 지역은 터키의 원조에 의존하면서, 레바논 내전으로 생긴 레바논 난민들까지 이슬람교도 인구를 

늘인다는 목적 아래 마구잡이로 받아들여 섬의 치안, 직업, 물가 문제가 심각해졌다. 

 

터키계 지역의 독립은 터키와 그의 혈연적 맹방국가들 이외에는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고,

이에 분개한 터키는 터키계 지역을 합병할 의지를 보엿다. 

 

키프로스라는 섬의 원주인인 그리스계,

그리고 훗날 쳐들어온 터키계의 갈등으로 분단과 분쟁의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햇고, 지금도 여전히 분쟁지역이다.

 

<그리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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