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그리스어: Ελλ?δα 엘라다[*], 통용: 희랍(希臘))는 남유럽 발칸 반도 남쪽 끝에 있는 나라이다. 정식 명칭은 헬라스 공화국(그리스어: Ελληνικ? Δημοκρατ?α 엘리니키 디모크라티아[*])이다.
수도는 아테네이며, 주요 도시로는 테살로니키, 파트라, 이라클리오, 라리사, 볼로스, 요안니나, 카발라, 로도스, 세레스가 있다.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불가리아와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쪽에는 터키가 있다.
그리스 본토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에게 해가 있으며,
서쪽은 이오니아 해이다.
지중해 동부에 면한 해안에는 수많은 섬과 바위가 흩어져 있다.
현대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땅은 민주주의와 서양 철학, 올림픽, 서양 문학, 역사학, 정치학, 수많은 과학적ㆍ수학적 원리, 희극이나 비극같은 서양 희곡 발상지이다.
고대 그리스의 문명은 크레테 문명과 그 뒤를 이은 뮈케나이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도리아 인의 침입으로 인한 암흑 시대를 거친 이후 아테나이, 스파르타 등 일종의 '도시국가'인 폴리스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폴리스 중 하나인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는 민주 정치를 발전시켰으며 경제적으로는 상업과 해상무역에 주력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폴리스 스파르타는 군국주의적 정치 체제를 취했으며 상업보다는 농업에 치중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페르시아 전쟁 때였다.
기원전 5세기 초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막아낸 뒤 전쟁 승리의 주역인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써 번영을 누렸다.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스파르타는 역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은 뒤 아테네와 대립했다.
마침내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여 기원전 404년까지 약 30여년간 이어졌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고 스파르타는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해 쇠약해진 후였다.
스파르타는 결국 테바이에 패권을 내주었고 이후 오랜 전쟁으로 쇠퇴하게 된 그리스는
북방의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당하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폴리스들을 완전히 진압한 뒤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더스 강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뒤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휘하 장군들이 세운 왕조들은 모두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이 그리스를 통치하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오스만의 지배 직전에 그리스의 지식인들이 서유럽으로 이주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전해주면서 서유럽 르네상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이슬람교 개종은 원칙적으로 자유였으며, 개종을 거부한 그리스도 교도들은 비잔티움 시대의 농민이나 봉건제하의 농노보다 조금 나은 생활을 감수해야 하였다.[1]
그렇지만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 덕분에 그리스 정교를 믿는 본토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타지 사람과 섞이지 않고 결속을 유지하며 이후 현대 그리스의 정체성을 창출할 수 있었다.
1453년부터 독립할 때까지 그리스는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그리스 독립 전쟁의 결과 런던 의정서로 신생 그리스 국가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1827년 이오니아 제도의 그리스 귀족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새 공화국의 통치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가 암살당하자 강대국들은 곧 왕정을 세우고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왕조의 오톤을 국왕으로 옹립하였다.
1843년 반란이 일어나 국왕은 헌법과 대의제 의회를 승인해야 했다. 그의 나약한 권위주의 통치로 말미암아 1863년 국왕은 결국 폐위되고 대신 덴마크의 빌헬름 공이 왕위에 오른다.
그는 요르요스 1세의 이름을 얻었으며, 영국은 즉위 선물로 1864년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 할양한다. 독립 당시의 영토는 아테네 일대에 국한되었으나, 1881년 테살리아 지방을, 1912년 마케도니아 및 이피로스, 1913년 크리티 섬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1877년, 그리스의 경제 기반이 크게 발전하는 데 공헌한 그리스 정계의 거물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는 왕권을 억누르고 의회에 간섭하여, 장래 총리에 대해 신임 투표를 하는 법을 만들었다.
발칸 전쟁의 결과, 그리스는 영토와 인구를 늘리는 데 성공했다.
그후,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외교 정책을 놓고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카리스마적인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사이의 갈등으로 정계와 나라가 양분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그리스는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 민족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였고, 로잔 조약으로 두 나라 사이에 대량의 인구 교환이 있었다. 그 뒤 불안정과 쿠데타로 약 150만의 그리스 피난민이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로 밀려들어왔다.
1923년부터 12년간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40년 10월 28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그리스의 독재자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거부하여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스는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로 몰아내어 연합국에게 지상에서 추축국에 대한 첫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리스 전투로 이 나라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다. 독일 점령군은 그리스 저항군 때문에 심각한 곤란에 빠졌다.
해방 이후 1947년 그리스 북부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게릴라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2년 후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는 30년간 경제적 어려움과 좌우파간의 심각한 사회 갈등을 겪었다. 이후 20년은 좌파 세력이 정계와 사회에서 열세를 보였으며 마셜 계획의 영향으로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1963년부터 파리로 망명했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전 총리가 돌아온 것이 메타폴리테프시의 시작이었다.
1967년 4월 21일,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등장한 사회주의 정권을 두려워한 우파 세력을 등에 업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973년 스스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73년 아테네 종합기술학교 시위로 정권은 타격을 입었다.
1974년 7월 20일 디미트리오스 요안니디스 장군이 역(逆)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었지만 터키가 키프로스 섬을 침공하자 정권은 붕괴되었다.
1974년 8월 14일, 그리스군은 터키의 북키프로스 점령에 항의하고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통합 군사 기지에서 철수했다.
1974년 국민 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되고 1975년에 민주적인 공화국 헌법이 발효되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폐위되었다. 그러는 사이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신민주주의당에 맞서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창당하여 이후 그리스의 양당 정치 구도를 이루었다.
그리스는 1980년에 다시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1999년 여름에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를 강타한 지진 이후로 지난 십여 년간 양국 관계도 상당히 호전되었다. 오늘날 그리스 정부는 터키의 유럽 연합 가입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리스는 1981년 1월 1일 유럽 연합에 10번째로 가입했고, 그때부터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유럽 연합의 기금과 늘어나는 관광 수입, 해운업과 성장하는 서비스 부문 덕분에 기업과 인프라에 광범위한 투자가 이루어져 그리스의 생활 수준은 전례없이 높아졌다.
2001년 유로화가 도입되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2008년 최근에는 그리스에서는 경찰의 총격으로 시민이 사망한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2]
그리스는 발칸 반도의 남단에 위치해있다. 그리스 본토 남쪽에는 펠로폰니소스 반도가 있으며 그 사이에 코린토스 지협으로 운하가 있다. 해안에는 에게 해의 크리티(크레타), 에비아(에우보이아), 레스보스, 키오스, 도데카니사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가 있으며 이오니아 해에도 섬이 많다.
그리스는 세계에서 열 번째로 해안선(14,880 km)이 긴 나라이다. 육지 국경선은 1,160km이다.
그리스의 4/5는 산지나 구릉으로 되어있어 유럽에서 가장 산지가 많은 나라이다. 유사 이래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장소였던 올림포스 산에서 가장 높은 미티카스 봉은 높이가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2,917m에 이른다. 한때 신들의 옥좌로 여겨지던 이 산은 오늘날 등산가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다.
서부 그리스 지역에는 호수와 습지가 많으며 핀도스 산맥이 있다. 핀도스 산맥은 발칸의 디나르 알프스의 연장으로, 가장 높은 스몰리카스 봉은 높이가 2,637m이다.
비코스 아오스 협곡은 장대한 모습으로, 스포츠 매니아들의 인기있는 행락지이다.
산계는 중앙 펠로폰니소스를 지나 에게 해 남서쪽의 키티라 섬과 안티키티라 섬으로 이어져서 크리티 섬에서 끝난다.
에게 해의 섬들은 과거 그리스 본토에 속했던 지금의 해저 산맥의 봉우리들이다.
핀도스 산맥는 높고 가파른 봉우리로 유명하며, 협곡과 다양한 카르스트 지형을 보인다. 특히 정교 수도원이 많은 메테오라에는 높고 경사가 급한 바위 지형으로, 해마다 수많은 관관객들에게 놀라운 경험을 안겨준다.
그리스 북동부에도 동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 주의 접경으로 로도피 산맥이 있다.
이 지역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자리잡고 있다. 유명한 다디아 숲은 그리스의 북동부 멀리 에브로스에 있다.
테살리아, 중부 마케도니아, 트라키에는 넓은 평야가 있다.
이곳은 그리스의 얼마 안되는 경작하기 좋은 농지일 뿐 아니라 중요한 경제 지역이 입지하고 있다.
그리스의 기후로는 세 가지가 있다. (지중해성, 고산, 온대) 핀도스 산맥 때문에
그리스 서부 지역은 동부보다 평균적으로 더 침윤(浸潤)하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엔 온난 다습하고 여름엔 고온 건조하다. 키클라데스, 도데카니사, 크리티, 펠로폰니소스 동부, 중부 그리스 일부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스는 산지가 많은 데다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지만 해안 지역에서 기온이 극단적으로 오르내리지 않는다. 도데카니사나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리스 북서부 지역(이피로스, 중부 그리스, 테살리아, 서부 마케도니아)에는 고산 기온이 지배적이다.
핀도스 산맥이 지나는 아하이아, 아르카디아, 일부 라코니아 등 펠로폰니소스 중부 지역도 마찬가지 기후를 보인다.
마지막으로 온대 기후는 중부 마케도니아, 동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에 영향을 주는데, 겨울엔 춥고 다습하며 여름엔 덥고 건조하다. 아테네는 지중해성 기후와 온대 기후 사이에 있다. 이 도시 북부 교외 지역에는 온대 기후를 보이지만, 시가지나 남쪽 교외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이다. 아테네는 낮에는 찌는 듯이 더운 반면 저녁은 시원해서 야외생활과 야간생활이 발달되어 있다.
1980년 이래 그리스의 도로망과 철도망은 매우 현대화되었다.
중요한 사업 중에는 에그나티아 고속도로(Εγνατ?α Οδ??,)가 있는데 이 도로는 북서부 그리스의 이구메니차항에서 그리스-터키 국경이 있는 키피를 잇고 있다.
리오 안티리오 다리(유럽에서 가장 긴 사장교. 2,250m)는 펠로폰니소스 서부의 리오(파트라에서 7km)와 그리스 중부 본토의 안티리온을 연결한다.
그리고 파트라-아테네간 국도를 2014년까지 펠로폰니소스 서부 피르고스까지 연장하는 계획이 있다. 그리스에서 테살로니키로 가는 고속도로는 이미 완성되었다.
수도 아테네의 도시 구역에는 2001년 새 국제 공항이 들어섰고, 같은 해 민간이 운영하는 교외 국도인 아티키 도로도 개설되었으며, 2000년부터 지하철망이 확대되었다.
그리스 대부분의 섬과 그리스의 주요 도시는 항공편으로 연결되며, 올림픽 항공과 에게 항공 두 주요 항공사가 있다.
해운 분야에서는 수중익선이나 쌍동선(catamaran) 등 현대적인 고속 선박이 발달했다.
철도의 역할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부족한 편인데, 그러나 아테네 주변 새로운 교외 지역 연결이나 아테네-테살로니키간 철도망은 계속 확대되고 있으며, 2,500km의 철도망 중 많은 곳에서 복선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간 철도는 그리스 도시와 발칸, 터키를 이어준다.
그리스 헌법에 따르면 행정부의 권력은 대통령과 정부가 행사한다.[6] 1986년 헌법 개정부터 대통령의 직무를 크게 줄여 이제는 주로 상징적인 역할에 그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실건은 총리의 손에 놓이게 된다.[7] 그리스의 정부 수반인 총리직은 정당의 영수가 맡으며, 의회에 신임 투표를 얻을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하며, 총리의 추천에 따라 여타 각료들을 임명하거나 면직한다.[8]
입법권은 300명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서 행사한다.[9] 의회에서 통과한 법령은 대통령이 반포한다.[10] 의회 선거는 4년마다 실시되나, 특별히 중요한 국가적인 문제 때문에 내각의 제안이 있으면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게 되어 있다.[11] 야당이 불신임 결의를 통과하려 할 때 대통령은 그 전에 의회 해산을 명할 수 있다.[12] 여성 투표권은 1952년 헌법 개정때 보장되었다.
사법권은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독립되어 세 개의 최고법원이 있다. 사법부는 3심제도로서 대법원, 고등법원, 하급법원으로 구성되며, 행정부의 위헌여부 및 행정권 남용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따로 있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민정이양 이후 그리스 정치는 자유주의 보수정당 신민주주의당(ND)과 사회민주주의 정당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이 양당제를 이루고 있다. 다른 정당으로는 그리스 공산당(KKE), 급진 좌파 연합(SYRIZA), 대중 정교회 연대(LAOS)가 있다. 지금의 총리는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이며, 2009년 그리스 의회 선거에서 자당이 승리하면서 집권하였다.
그리스는 선진국에 속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52),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61), 유럽 연합(EU, 1981년), 서유럽 연합(WEU, 1995), 유럽경제통화동맹(2001), 유럽 우주국(ESA, 2005) 가입국이고, 흑해경제협력기구의 창립 회원국이다.
그리스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는 키프로스와 에게 해를 두고 터키와 갈등을 빚고 있다. 19세기까지 수백 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리스는 터키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지금도 그 감정은 해소되기 어렵다고 한다. 또한 키프로스 공화국의 영토에서 터키계 주민(북 키프로스)들과 그리스계 주민(남 키프로스)들이 대립하고 있다. 또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국호 문제로 이 나라와 다툼이 있다.
그리스는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하여 지원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과 공식 수교하였다.
현재 그리스는 남성에 대해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다. 2006년 현재 그리스는 19세에서 45세 사이의 성인 남성의 군 복무기간을 12개월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군대는 완전 직업군인 제도로 운영해왔으며, 정부는 징병제 완화 혹은 완전 폐지를 약속해왔다. 전략상 민감한 지역에 거주하는 18세에서 60세 사이의 그리스 남성은 국가 경비대에 급료를 받는 일시직으로 근무할 수 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으로서 그리스는 동맹국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 작전과 배치에 참여하고 있다. 1996년부터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고 있다.[13]
그리스 정부의 통계 부서는 그리스 국립 통계국(NSSG)이다. 국립 통계국에 따르면 2001년 그리스의 총 인구는 10,964,020명이었다. 여기서 남성은 5,427,682명, 여성은 5,536,338명이다.
1971년, 1981년, 2001년 통계를 살펴보면 그리스의 인구는 지난 수십여년간 점차 늙어가고 있다. 그리스의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04년 현재 (유럽 통계청 추정) 1.29명으로 유럽연합 내에서도 낮은 편이다. (1981년에는 1,000명당 14.5명이었으며, 2003년 출산율은 1,000명당 9.5명이었다.) 또 사망률도 1981년 1,000명당 8.9명에서 2003년 1,000명당 9.6로 약간 올랐다. 2005년 현재 1,000명당 출산율은 9.4명, 1,000명당 사망율은 9.2명으로, 간신히 자연증가 상태에 있다.
2001년 인구의 16.71%가 65세 이상이었으며, 68.12%는 15세에서 64세 사이였고, 15.18%는 14세 이하였다. 그리스 사회는 시간에 따라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혼인율은 1981년부터 2002년까지 1,000명당 71명으로 계속 떨어지다가 2003년에 1,000명당 61명으로 약간 늘었다가 2004년에 다시 51명으로 떨어졌다. 이혼율은 계속 늘었는데, 1991년 결혼 1,000건당 191.2건이었다가 2004년에는 1,000건당 239.5건으로 집계되었다.
그리스 인구의 거의 2/3은 도시 지역에 산다.
2001년 그리스의 큰 도시로는 아테네, 피레아스, 파트라, 이라클리오, 라리사, 볼로스가 있다.
20세기에 수백명의 그리스인들이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독일로 이민 가서 그리스 디아스포라 인구는 오늘날 거의 6백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80년대부터 그리스 경제가 발전하자 오히려 외부에서 이민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스 이민 정책과 실행, 데이터 수집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이민자 인구를 완벽하게 수합하기 곤란하며 상당부분 추측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지중해 이민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 국립 통계국의 2001년 인구조사에서 그리스 시민권 없이 그리스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가 762,19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약 7%이다.
또 이들 중 48,560명은 유럽연합이나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국가에서 왔으며, 특별 자격으로 키프로스인 17,426명이 있다고 한다.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이들 발칸 국가에서 온인구가 전체 외국인의 2/3을 차지한다. 구 소련(그루지야, 러시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 출신 이주자도 총 외국인 중 10%를 차지한다.
非유럽연합 이주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아테네 지역이다.
약 132,000명에 이르며 지역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테살로니키는 두 번째로 외국인이 많은 곳으로 지역 주민의 7%인 27,000여명이 산다.
그 다음으로는 대도시 근교나 농업 지대가 있다.
또 알바니아인은 전체 이민자의 56% 정도 되며, 불가리아인(5%), 그루지야인(3%), 루마니아인(3%), 기타(터키인, 아랍인 등)도 있다. 미국, 키프로스, 영국, 독일은 총 외국인 인구에서 각각 2% 정도이다. 나머지 690,000여명은 非유럽연합 이민족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에 거주하는 외국 인구(기록과 추정을 합해)는 그리스 혈통의 이민자까지 포함해서 사실상 8.5% 혹은 10.3%로 집계되며, 대략 1,150,000 여명에 달한다.
오늘날 그리스는 언어상 비교적 동질적인 사회이다. 토착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 문자를 쓰는 그리스어를 구사한다. 트라키아에는 터키어, 불가리아어(포막), 루마니아어를 쓰는 소수의 무슬림들이 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0.95%에 불과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집시어도 쓰인다.
그리스 여러 지역에서 더욱 소수인 언어도 분포한다. 20세기에 그리스어 사용인구와 동화되면서 이들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수도 아테네 근교 시골 지역에 주로 사는 알바니아어를 쓰는 집단 아르바니테스 그리고 알바니아어와 밀접히 연관된 언어를 쓰며 중부 그리스의 산지 곳곳에 살고 있는 블라크(Vlach)라고도 하는 아로마니아인과 모글레니테스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런 집단은 인종적으로 그리스인과 동일시되며 오늘날 모두 모국어와 더불어 그리스어를 함께 구사한다. 이제 많은 지역에서 이들의 전통 언어는 늙은 세대가 겨우 유지하고 있으며 사멸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스 북쪽 접경에는 슬라브어를 쓰는 집단이 있는데, 인종적으로는 대개 그리스인에 속한다. 이들의 방언은 언어학적으로 (지역에 따라 슬라보마케도니아어 혹은 슬라브어라고 하는) 마케도니아어 혹은 불가리아어(트라키아의 불가리아어계 무슬림이 쓰는 포막과는 다르다)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스의 유대인 집단은 에스파냐계 유대어인 라디노어를 쓰며, 오늘날 겨우 수천 명만 남아있다.
그리스어 사용 인구 중에는 폰토스 그리스어를 쓰는 집단도 있는데,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박해를 받고 소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꽤 큰 집단을 이룬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는 관광지와 호텔에서 통용된다. 그리스는 2004년에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준회원국이 되었고, 2006년에는 정회원국이 되었다.
그리스 헌법에서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 이 나라의 "우세한"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정교회는 오스만 투르크(터키)의 점령 시절 그리스인들의 의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교회는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리스 정부는 종교에 대해 통계를 작성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 국무부에 따르면 97%의 그리스 시민이 자신을 정교회 신자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유럽 위원회의 통계 부서인 유럽 통계국(Eurostat)에 따르면 2005년 유로바로미터 설문조사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한 그리스 시민은 81%였는데, 몰타, 키프로스와 함께 유럽연합 국가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로마 가톨릭을 믿는 그리스인은 50,000여명이며, 이민자 출신의 로마 가톨릭 교도는 200,000여명이다. 성공회[14]와 개신교 신자도 있다.[15]
주로 트라키아에 거주하는 소수 이슬람 공동체의 경우 대략 98,000명에서 140,000명 정도로 나왔는데, 이민자 출신 무슬림의 수는 200,000에서 300,000여명 정도였다. 알바니아 이민자는 대부분 세속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보통 무슬림 신앙과 연관된다.
그리스에서 유대교는 사도행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2,000년 넘게 존재했다.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테살로니키에 상당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그리스인 집단은 대략 5,500명 정도로 집계된다.
1950년에서 1973년 사이 GDP는 평균 7%로 성장했다. 그리스는 유럽 연합의 기금을 지원 받는 동안 수많은 구조/재무 개혁을 시행했다. 2001년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했다. 그리스의 GDP 연간 성장률은 유럽 연합내 대부분의 국가 수준을 상회한다.
오늘날 서비스업은 그리스 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중요 산업이며 다음으로 기타 산업과 농업이 있다. 관광업은 외화 수입의 주요 원천이며, 그리스 총 GDP의 15%를 차지하는데다 총 노동 인구의 16.5%가 직간접적으로 여기에 종사한다.
그리스는 발칸 반도 국가 중 선도적인 투자국으로, 2006년 국립 그리스 은행은 터키 피난스뱅크의 46%, 세르비아 Vojvođanska 은행의 99.44%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제조업은 GDP의 13%이며, 이 중 음식 산업이 주도적이다.
공공 부문은 GDP의 40%인데, 정부에서는 이 비중을 더 줄이고 있다. 첨단 기술 장비 생산(특히 텔레커뮤니케이션)도 빠르게 성장하는 부문이다. 다른 주요 산업으로는 섬유, 건축 자재, 기계, 운송 장비, 전자 제품 등이 있다. 건설업은 GDP의 10%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으로 건설붐이 일어났으며, 이 나라 경제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GDP 7%의 농업 부문도 중요하다.
그리스의 노동 인구는 총 490만 명으로, OECD 국가 중 대한민국 다음으로 많다.
그로닝엔 성장 개발 센터는 1995~2005년새 그리스는 유럽 국가 중 시간 대비 노동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스 노동자는 연간 평균 1,900 시간을 일한다. 그 다음은 에스파냐가 있다. (연간 평균 1,800 시간) 2007년 노동시간당 GDP는 20$로 에스파냐와 비슷하며, 미국의 시간당 평균 임금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치이다. 이민자들은 노동력의 거의 1/5을 차지하며 농업과 건설업에 주로 종사한다.
그리스의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GDP는 세계 28위이다. 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2008년 그리스의 1인당 평균 임금은 연간 30,661$였으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필적하며, 유럽연합 평균과 거의 같았다.
2006년 그리스는 인간개발지수 18위를 차지했으며, 2005년 이코노미스트지의 세계 삶의 질 지수에서 22위를 차지했다.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 따르면 아테네의 생활비는 뉴욕의 비용에 90%에 근접하며, 시골 지역은 이보다 더 낮았다.
해운업은 예로부터 그리스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해운업은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GDP의 4.5%를 이루며, 160,000여명을 고용하고 있고(전체 노동력의 4%), 이 나라 무역 적자액의 1/3에 해당한다.
1960년대 그리스 선박의 규모는 거의 두배로 늘었는데, 주로 해운 재벌 오나시스와 니아르코스의 투자 때문이었다. 현대 그리스 해운 산업의 기반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형성되었는데, 이때 그리스 해운업자들은 1940년대 미국의 선박 판매법에 따라 미국 정부가 이들에게 판매한 잉여 선박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미국 교통부 교통통계국(BTS)에 따르면, 그리스 소유의 해운 선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세계 선박 용량(총 141,931,000 dwt)의 18%인 3,079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 선박 종류로 보면, 그리스는 유조선이나 드라이 벌크선에서 1위이고, 컨테이너선은 4위, 다른 배 종류도 4위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박 수는 1970년대 말 최대 5,000척에서 줄어든 것이다.
그리스에서 광대역 인터넷은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일반 인구의 약 13.4%가 광대역으로 인터넷(주로 ADSL2)에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 접속, 사무, 멀티플레이 게임이 가능한 인터넷 카페도 그리스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휴대전화 네트워크상의 모바일 인터넷이나 와이파이 핫스팟도 있으나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
그리스의 전략적 위치, 우수한 노동력, 정치적/경제적 안정 덕분에 에릭손, 지멘스, SAP, 모토롤라, 코카콜라 등 여러 다국적 회사가 지역 연구개발(R&D) 본부를 그리스에 두고 있다.
그리스 개발부의 연구기술일반과에서는 국가 연구 기술 정책을 설계, 시행,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2003년 연구 개발에 45,637만 유로의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이는 2002년보다 12.6% 증가한 것이다) 공공과 민간 부문 모두 아울러 GDP 대비 총 연구개발 지출은 1989년에 0.38%에서 2001년에는 0.65%로 지난 십 여년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리스의 연구개발 지출은 아직 유럽 연합 평균치인 1.93%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OECD와 유로스탓 자료에 따르면 1990년에서 1998년 사이 그리스의 총 연구개발 지출은 핀란드와 아일랜드 다음으로 유럽에서 3위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인큐베이터 시설을 갖춘 그리스의 기술 단지로는 크리티 과학기술 단지(이라클리오), 테살로니키 기술 단지, 라브리오 기술 단지, 파트라 과학 단지 등이 있다. 그리스는 2005년부터 유럽우주국(ESA)의 회원국이다.
그리스 국가 우주 위원회는 1990년대 초부터 유럽우주국과 협력을 시작했다. 1994년 그리스와 유럽우주국은 첫 제휴 협약을 맺었다. 2003년 공식적으로 정식 회원에 신청하여, 그리스는 2005년 3월 16일 유럽 우주국의 16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유럽우주국 회원국으로서 그리스는 우주국의 통신, 기술 활동, 세계 환경 및 안보 모니터링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초등학교(Δημοτικ? Σχολε?ο, Dimotik? Scholeio)와 김나지움(Γυμν?σιο)은 의무 교육이다. 탁아소(Παιδικ?? σταθμ??, Paidik?s Stathm?s)는 의무는 아니지만 많이 이용한다. 유치원은 현재 4세 이상 유아에게 의무가 되었다.
아이들은 6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6년간 다닌다. 김나지움은 12살에 들어가며 여기서 3년간 공부한다. 그리스의 의무 중등 교육 이후에는 두 가지 학교 유형으로 진로를 정할 수 있다. 상급 중학교(Ενια?ο Λ?κειο, Eniaia Lykeia)와 기술 직업교육 학교(Τεχνικ? και Επαγγελματικ? Εκπαιδευτ?ρια, "TEE")이다. 여기에는 직업 교육 기관(Ινστιτο?τα Επαγγελματικ?? Κατ?ρτιση?, "IEK")도 있는데, 하급 중학교(Gymnasio)와 상급 중학교(Lykeio)를 졸업한 학생들이 여기에 오면 정해진 특정한 교육 단계로 구분되지 않는 교육 방식으로 가르친다.
공공 고등 교육으로는 "최고 교육 기관"(Αν?τατα Εκπαιδευτικ? Ιδρ?ματα, An?tata Ekpaideytik? Idr?mata, "ΑΕΙ")과 "최고 기술 교육 기관"(Αν?τατα Τεχνολογικ? Εκπαιδευτικ? Ιδρ?ματα, An?tata Technologik? Ekpaideytik? Idr?mata, "ATEI") 이 두 가지 대학교 유형이 있다.
학생들은 상급 중학교(lykeio) 3학년 과정을 수료하고 국가 시험을 쳐서 대학에 입학한다. 22세 이상의 학생들은 추첨 형식으로 그리스 개방 대학에 입학한다. 아테네 대학은 동지중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그리스의 교육 제도는 학습 장애나 다른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 유치원, 초중등 학교도 둔다. 음악, 신학, 체육 분야의 전문 김나지움이나 고등학교도 있다.
관광업은 그리스의 소득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2004년 그리스는 1,650만 여명의 관광객을 맞아들였다. 2005년 중국의 조사에 따르면 그리스는 중국인이 선호하는 관광지로 뽑혔으며,
수도 아테네에만 6,088,287명이 방문했다. 2006년 11월 중국과 비슷하게 오스트리아도 그리스를 선호 관광지로 발표했다.
2007년 그리스는 1,9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와 세계 관광지 중 상위 10위에 들었다. 로도스 섬은 유럽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로 선정되었다.
다른 유명한 명승지로는 아테네, 북부 할키디키 반도, 이오니아 제도의 케르키라, 미코노스, 산토리니, 파로스, 크리티 등이 있다.
<그리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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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그리스어: Μακεδον?α)
그리스 반도의 최북방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서쪽으로는 에페이로스, 북쪽으로는 파이오니아, 동쪽으로는 트라케(트라키아), 남쪽으로는 테살리아 지방과 접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비롯하여 인더스 강까지 진출하면서, 마케도니아는 짧은 기간 동안 고대 근동에서 헬라스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그리스 역사의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된다.
'마케도니아'(Μακεδον?α)라는 나라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낱말 '마케드노스'(μακεδν??)와 연관이 있다. 보통 이 낱말은 원래 '높은 것', '고지 사람'을 뜻하는 말로, 아마 이곳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을 것이다.[1][2]
마케도니아의 첫 도읍이었던 아이가이(Αιγα?) 주변 땅은 여러 민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마케도니아는 '에마티아'(에마티온 왕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라고 불렸으며, 아이가이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 임금의 도읍인 '에데사'로 불렸다. 전설에 따르면, 카라노스가 수많은 그리스인을 데리고 새 터전을 찾아[3] 이곳으로 와 에데사에 정착하여 이 곳 이름을 아이가이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런 다음 카라노스는 미다스와 다른 임금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고 자신의 새 왕국을 세웠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헬렌(?λλην)의 아들인 도로스(Δ?ρο?)가 자신의 백성을 히스타이오티스로 이끌어 이 곳에서 카드메이아 사람들에게 핀도스 산맥으로 쫓겨나 정착하여 마케도니아인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한 갈래 무리가 더 남쪽으로 이주하여 도리아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4]
마케도니아의 첫 나라는 처음 기원전 8세기 또는 기원전 7세기 초 아르고스 왕조가 통치하면서 생겼는데, 전설에 따르면 아르고스 왕조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 시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그래서 이름도 아르고스 왕조이다)).[5] 아르고스 왕조의 통치를 받는 마케도니아인 부족도 아르게아다이 사람('아르고스에서 전래한'이란 뜻으로 번역된다)으로 불렸을 것이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할리아크몬 강과 악시오스 강이 흐르는 비옥한 충적 평야에 자리잡고 있으며, 올륌포스 산의 북쪽으로 '하부 마케도니아'라고 불렸다. 알렉산드로스 1세 시대에 아르게아다이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당시 륀케스타이나 엘미오타이 등 독립적인 마케도니아 부족들이 살던 상부 마케도니아와, 서쪽으로는 악시오스 강을 넘어 여러 트라케 부족이 살던 에오르다이아, 보티아이아, 뮈그도니아, 알모피아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였다.[6] 페르디카스 1세 임금(혹은 그의 아들인 아르가이오스 1세일 공산이 크다)이 오늘날 베리아(베로이아) 시 주변에 자신의 도읍인 아이가이(오늘날의 베르이나 시)를 세웠다.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잠시 받은 뒤, 이 나라는 알렉산드로스 1세 임금 때 독립을 되찾았다.
기나긴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2류 국가로, 스파르타와 아테나이를 번갈아 지원하였다.[7]
기원전 4세기 전에 마케도니아 왕국은 근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관구에 해당하는 지역 대부분을 아울렀다. 아뮌타스 3세 임금이 드디어 마케도니아 통일 왕국을 이루었으나, 왕국에서 가축이 풍부한 해안 평야 지방과 고립된 부족들이 사는 험한 배후지가 서로 융합되지 못하였고 왕과 혼인 관계를 통해 이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은 일리리아에서 북쪽과 북서쪽으로 오랑캐들이 침공하던 산 고개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마케도니아는 점점 아티케화되었는데, 당시 저명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을 야만적인 사람으로 치부하였다.[8]
마케도니아는 분명 그리스어의 방언을 썼으나, 남쪽의 도시 국가의 많은 이들이 쓰는 그리스어로는 완전히 인정받지 못했는데, 마케도니아인들이 남쪽 사람들의 정치 형태에 기반한 폴리스와 문화와는 다른 사회였기 때문이었다.[7]
4세기에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의 남쪽 도시 국가들의 정치에 점차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나, 마케도니아는 처음의 아이가이(오늘날의 베르이나) 또 나중의 도읍 펠라의 궁전 문화에서 볼 수 있듯 고졸기의 특징을 견지하였으며, 고전기 헬라스 도시 국가보다는 뮈케나이 문화에 더 가까웠고, 그 밖에도 필리포스 임금이 여러 아내를 둔 것처럼 고졸기의 풍습을 지녔다.
그 밖에 또 고졸기 문화의 잔재로 마케도니아 왕국이 세습 군주제를 강하게 고집하여 왕이 강력한(때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던 점을 들 수 있는데, 다만 때때로 토지 귀족들의 견제를 받거나 종종 왕가 내부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군주제는 남쪽 그리스 문화와 크게 대조되었다. 그리스에서는 독자적인 도시국가들이 대개 귀족정이나 민주정 체제를 갖추었으며, 사실상 군주인 참주의 경우에도 대개 권력 세습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관습이 아니었고,
스파르타에서는 군사 지휘관과 성직자로서 두 세습 군주를 두던 것은 예외적인 사례였다.
마케도니아나 그리스 모두 봉토와 같은 봉건 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을테지만, 마케도니아에서는 봉건 제도가 역사 시대까지 계속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가 발흥하기 전부터 이러한 제도가 도시 국가에서 폐지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솔론의 세이사크테이아 법(σεισ?χθεια)이다.)
아뮌타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알렉산드로스 2세와 차남인 페르디카스 3세는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였다. 페르디카스 3세의 어린 후계자는 아뮌타스의 셋째 아들 필리포스 2세에 폐위당하고, 필리포스 2세는 스스로 왕이 되어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지배하는 시대를 열었다.
필리포스 2세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파이오니아인, 트라케인, 일리리아인의 땅까지 영토를 넓혔다. 또 펠라고니아와 남부 파이오니아도 병합하였다.[9]
필리포스는 왕국의 영토를 급속히 넓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북쪽으로 일리리아인 등 非그리스인 종족들을 공격하여, 북부 국경을 확보하고, 전사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 그 다음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에게 해 북쪽 해안의 영토를 얻었다. 이 지방의 가장 중요한 도시는 암피폴리스로, 트라케의 관문을 장악할 수 있는 도시였으모, 귀중한 은광도 가까웠다. 이 지역은 아테나이의 영토였으며, 이들은 여전히 암피폴리스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여겼다.
아테나이는 떠오르는 마케도니아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동맹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이들은 필리포스가 군대를 남족으로 돌려 테살리아의 상당 지역을 점령했을 때도 거의 막지 못하였다.
테살리아를 장악하면서 필리포스는 그리스 중앙의 정치에 가깝게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56년에 제3차 신성 전쟁으로 포키스가 테바이와 그 동맹국과 전쟁을 벌였다. 테바이는 마케도니아인을 군대에 끌어들여, 크로코스 평야 전투에서 필리포스는 포키스와 아테나이 동맹국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는 근린 동맹에서 패자(覇者)가 되었고 필리포스는 퓌티아 경기의 수장이 되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정계 중심의 패권을 다졌다.
아테나이와 계속 투쟁하면서, 필리포스는 뷔잔티온과 보스포로스 해협을 차지하고자 트라케를 따라 동진하여, 아테나이에 식량 상당수를 공급하는 흑해 곡물 공급선을 차단하였다. 뷔잔티온 공성전은 실패하였으나, 아테나이는 마케도니아의 발흥이 심대한 위협이 되었음을 깨달았으며, 데모스테네스의 지도로 마케도니아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주요 국가들의 연대를 창설하였다. 도시 국가가운데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테바이도 이에 동참하였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동맹군은 마케도니아와 맞붙었으나 대패하였고,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군은 확실하게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짧은 시간에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물론이고 이집트를 비롯한 페르시아 제국에다가 동쪽으로 인도 접경까지 진출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당한 땅의 정치 형태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 문화를 퍼뜨렸다. 마케도니아 제국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이내 여러 여러 헬레니즘 정권으로 갈라졌으나, 정복의 영향은 이어졌으며, 헬레니즘 시대를 연 옛 페르시아 제국 서쪽 영토에 새로이 세워진 그리스어권 도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디아도코이(후계자) 사이에 분할되면서, 마케도니아는 수년 뒤인 기원전 294년에 안티파트로스 왕조로 넘어갔다.
안티파트로스와 아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를 지배하였으나, 기원전 297년에 카산드로스가 죽자 오랫동안 내부 갈등에 휩싸였다. 데메트리오스 1세(기원전 294~288년)가 잠시 안정을 회복하였으나, 다시 내전에 빠졌다.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는 용병 갈라티아인의 침략을 무찌르고, 마케도니아에서 왕가의 위상을 되찾았다. 그는 질서와 번영을 회복하였으나,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의 통제권을 잃고 말았다. 안티고노스는 안티고노스 왕조하의 안정적인 군주정 체제를 세웠다. 안티고노스 3세는 그리스 지역에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마케도니아 정권은 여타 헬레니즘 군주 국가에서 도입한 방식과 달리, 옛 고졸기의 왕권 개념을 유지한 유일한 후계 국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의 임금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처럼 신격화되지 않았으며, 프로스퀴네시스(προσκ?νησι?, 페르시아식으로 높은 계급 사람 앞에서 엎드려 예를 표하는 관습) 관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다른 디아도코이 나라에서 자신들을 신민으로 여긴 것보다 훨씬 허물없이 임금을 대하였으며, 임금은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여전히 귀족들과 상의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케이아 등 알렉산드로스의 영향으로 세워진 새로운 여러 헬레니즘 도시 뿐 아니라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있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250-125 BC)과 인도-그리스 왕국(180 BC-10 AD)까지도 이주하는 그리스인이 많았는데, 이 두 나라는 기원전 1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제국은 얼마간 분쟁을 겪은 후 그의 장군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305-30 BC, 주로 이집트), 셀레우코스 제국(312-63 BC,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 왕조(306-168 BC)로 분할되었다.
그 사이에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명목상 마케도니아 왕국에 종속되었으나, 자신들의 자유를 일부 되찾았다. 도시국가들은 아카이아 연맹(c. 300-146 BC, 테바이, 코린토스, 아르고스 등)과 아이톨리아 연맹(290-188 BC, 스파르타, 아테나이)으로 자신들끼리 세력을 양분하였다.
로마에 정복당하기까지 헬레니즘 시대 거의 내내 두 연맹은 서로 전쟁을 하거나, 디아도코이(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계국)간의 분쟁에서 어느 한편에 붙기도 하였다.
기원전 3세기 말 안티고노스 왕국은 로마와 전쟁에 휘말렸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승패가 분명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인들은 늘 그랬듯이 계속 전쟁을 일으켜 기원전 149년에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흡수하였다.
동방의 거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은 기원전 64년까지 그 잔당이 존속하긴 하였으나 점차 분열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기원전 30년까지 버텼으나, 결국 클레오파트라(재위 51-30 BC)의 때에 로마에 정복당한다.
아이톨리아 연맹은 로마가 그리스에 개입하는데 경계하였으며, 로마-시리아 전쟁(192-188 BC) 당시 셀레우코스편에 섰다.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하자 아이톨리아 연맹은 사실상 로마에 흡수되었다.
아카이아 연맹(c. 300-146 BC)은 아이톨리아 연맹(290-188 BC)이나 마케도니아(c. 800-149/146 BC)보다 더 오래 존속하였으나, 결국 146년에 로마와 전쟁을 하여 결국 병합되었으며, 이로써 그리스 전역의 독립이 끝났다.
셀레우코스 왕국 [Seleucid Kingdom (BC 312~64)]
이 왕국의 창건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에서 이 지역을 분리시켰다.가장 강성했을 때는 유럽에서 트라키아(트라케) 지방부터 인도 변경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제국(BC 312~64)..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2년 뒤인 BC 321년에 바빌로니아의 총독(Satrap)이 되었다.
해체되어가는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들이 지리한 권력투쟁을 벌일 때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로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안티고노스가 자신을 바빌로니아에서 추방했던 일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항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도왔다.
BC 312년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내준 병력을 사용하여 가자에서 디미트리오스와 싸워서 이겼다. 그리고 같은 해에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바빌로니아를 장악하고 이곳에 셀레우코스 왕국을 건설했다.
BC 305년부터 왕국의 힘을 키운 다음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까지,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서쪽에서는 BC 301년 이프수스에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BC 281년에는 케르소네소스 트라키아를 병합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불만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가 BC 261년까지 통치했으며, 안티오코스 2세(BC 246~225), 셀레우코스 3세(BC 225~223), 안티오코스 3세 대왕(BC 223~187)이 그 뒤를 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 대왕 때에는 철저한 행정개혁이 특징이었다. 그는 문관과 무관 사이의 경쟁으로 늘 긴장되어 있는 2중권력체제를 제거하고 이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체제에서 따온 여러 요소들을 근대화시켰다. 즉 문관과 무관의 권력을 통합한 각지의 지방관(Strat?goi)들이 제국을 다스렸다.
서쪽은 사르디스가 동쪽은 셀레우키아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아나톨리아와 그 휘하의 그리스 도시들을 지배함으로써 중동지역 전역에 막대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헬레스폰토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사이를 지나는 전략요충지 타우루스의 통로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의 상업과 무역도 지배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시리아 정착지, 그중에서도 특히 안티오크는 왕국이 군사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중동의 토착문화보다 그리스 풍습과 관습들이 우세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전역사를 통해 보면 지배층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마케도니아의 귀족계급 출신들이었고 도시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그리스 문화의 주도권에 대한 저항은 안티오코스 4세의 통치기간(BC 175~163)중에 절정에 달했다.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 문화 증진책이 도를 넘어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에게 바치는 조각상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행동은 BC 165년에 시작된 마카베인들의 봉기에 불씨를 당겼다.
이후 4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마카베인들의 저항으로 마침내 셀레우코스 왕국의 유대교도들에 대한 지배는 팔레스타인에 독립적인 유대 왕국을 창건함으로써 끝이 났다(→ 색인 :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국은 BC 3세기경이 되면서 광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BC 190년 처음으로 로마인들에게 패배한 뒤로 셀레우코스 왕국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에게 해의 그리스 도시들은 이미 셀레우코스의 명예를 벗어던졌으며, 카파도키아와 아탈리드 페르가몬이 독립했고, 다른 지역들도 켈트인들과 폰투스, 비트니아에게 빼앗겼다.
또 BC 3세기 중반경에는 파르티아·박트리아·소그디아나가 독립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코일레 시리아(레바논)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BC 200) 일시적이나마 아르메니아를 점령함으로써, 로마에게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어느 정도 확충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4세가 죽고(BC 164) 시리아의 콤마게네와 팔레스타인의 유대 지역을 잃은 후부터 쇠퇴는 가속화했다. BC 141년경에는 유프라테스 강 동편지역 전부를 잃었고 디미트리오스 2세(BC 141)와 안티오코스 7세(BC 130)의 노력도 이 왕국의 급속한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BC 64년 마침내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을 때는 이전의 강력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시리아와 실리시아 동부지방에 한정되었으며, 그나마도 보잘것없는 지배력만 가지고 있었다.
* 페르가몬[Pergamon] 아탈로스 왕조(BC 241년-BC 133년)
에게 해에서 25.6㎞ 떨어진 미시아 지방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 도시.
카이코스 강(지금의 바키르 강)의 넓은 유역 북쪽에 외따로 솟아 있는 높은 구릉지에 있었다.
오늘날 이 자리에는 터키 이즈미르 주 베르가마가 있다.
페르가몬이 존재했던 때는 BC 5세기부터이지만 헬레니즘 시대(BC 323~330)에 아탈로스 왕조의 왕궁이 세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아탈로스 왕조의 요새와 궁전은 구릉 위에 서 있었고, 도시는 구릉 기슭에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래쪽 평야에 도시가 세워졌다.
아탈로스 왕조 치하에서 이 도시는 형식상으로 자치권을 가졌지만, 행정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사사건건 왕의 간섭을 받았다.
처음에 아탈로스 일족은 셀레우코스 왕국의 신하로서 페르가몬을 다스렸지만,
에우메네스 1세가 안티오코스 1세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BC 263).
BC 241년에 에우메네스 1세가 죽자, 그의 조카인 아탈로스 1세가 왕이 되어 갈라티아인을 물리치고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이 왕조의 이름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페르가몬(미시아)을 중심으로 한 아탈로스 왕조의 영토는 BC 188년에 이르자 원래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였던 리디아(에게 해 연안에 있는 그리스 해안도시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프리기아의 일부, 리카오니아 및 피시디아(BC 183)의 일부를 병합하여 훨씬 넓어졌다.
이러한 영토확장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와 다투던 로마와 아탈로스 왕조의 에우메네스 2세가 동맹을 맺은 덕분이었다.
에우메네스의 아들이자 2번째 후계자인 아탈로스 3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서 BC 133년 왕국을 로마에 넘겨주었으며, 로마는 그것을 받아서 BC 129년에 아시아 속주를 설치했다.
아시아 속주에는 이오니아와 페르가몬의 영토가 포함되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로마의 신하인 이웃 왕들의 몫으로 남았다.
페르가몬 왕국은 아탈로스 왕조의 통치자들과 로마에 농산물과 은 등의 많은 부를 안겨주었다.
아탈로스 왕조의 통치자들은 페르가몬 시를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그리스 도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다. 페르가몬은 그당시의 가장 뛰어난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며, 이곳의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 가는 훌륭한 것이었다.
아탈로스 1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은 현지 예술가들에게 주문한 수많은 조각품·그림·장식물과 그리스에서 수집한 많은 예술품으로 도시의 신전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몄다.
로마 시대의 인구는 2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1878년 베를린 박물관의 후원으로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수많은 보물들이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자들은 이 발굴 결과를 토대로 헬레니즘 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지역의 시가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극장과 아테나 니케포로스 신전, 헬레니즘 예술의 걸작품인 벽을 화려하게 장식한 거대한 제우스 제단 등이 주요유적이다. 이 제단의 일부와 돋을새김 조각은 정교하게 복원되어 오늘날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서 있다.
평민들이 살던 아래쪽 도시에는 시장, 체육관, 헤라 신전, 데메테르 신전이 있었다.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는 원형투기장·극장·경주장 등이 있다.
아탈로스 왕조의 초기 통치자들도 위쪽 도시에 건축물들을 세웠지만, 이 도시가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품으로 높은 평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주로 많은 건축물로 짓고 재건한 후기 통치자들(에우메네스 2세와 아탈로스 3세) 덕분이다.
로마가 몰락한 뒤 페르가몬은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14세기초 오스만 투르크의 손으로 넘어 갔다.
마케도니아는 로마 속주가 되었고, 남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속주 장관의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 폴리스는 부분적으로 독립을 얻었으며 세금도 내지 않았다.
에게 해 제도는 기원전 133년에 로마 영토로 복속되었다.
기원전 88년에 아테나이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술라 장군은 그리스를 황폐화하였다. 로마의 내전으로 그리스 땅은 더욱 파괴되었으며,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그리스 반도를 속주로 삼으면서 형편이 나아졌다.
로마 문화는 오랫동안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동부 속주였다. 그리스어는 동방과 이탈리아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쓰였으며, 갈레노스 등 수많은 그리스 지식인들이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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