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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된 책과는 편집, 사진, 삽화, 각주 등에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인천이씨 도남 국동 문중 큰 집, ‘남호정사’
프롤로그
세상 모든 사물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가치가 있는 법이다. 문화재도 그렇다. 박물관에 전시된 신라·고려시대 불탑이나 불상을 보노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불탑은 절이 사라지고 없더라도 본래 있었던 자리에 서 있을 때 가치가 있다. 박물관 야외전시장 불탑보다는 텅 빈 절터일망정 본래 있던 사지寺址에 서 있는 불탑이 우리들에게 더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전통마을이나 집성촌, 오래된 고가도 마찬가지다. 특정 성씨, 특정 DNA를 지닌 사람들이 수 백 년 세월 동안 함께 호흡하고 손때를 남긴 공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이가 그 공간을 차지하면, 그 순간부터 그 공간은 과거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새로운 존재로서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 힘은 들지만 옛 것을 지켜낸 곳은 ‘고귀’해지고, 현실을 받아들인 곳은 ‘부귀’해진다.
남호 이병규가 지은 국동 문중 큰집
유화당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도 고가 한 채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94년 전인 1927년 건립된 남호정사南湖精舍다. 이 집은 본래 과거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 문중 종택이었으나, 2000년대 중반 경 경매에 붙여져 타인 소유가 됐다. IMF 여파가 이곳 종택에도 불어 닥친 것. 현재 남호정사는 당시 종택 사랑채에 해당하는 남호정사 본채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최근 남호정사 뒤뜰에 현 소유주가 큰 규모의 한옥 한 동을 더 짓고 있어 이제 옛 남호정사의 흔적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남호南湖라는 이름은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인천이씨 30세 이병규의 호에서 취한 것이다. 이병규는 1916년, 아버지 이해준이 지은 초가 유화당을 기와로 중수하고, 대문형 정려각 정효각을 처음 건립한 인물이다. 1927년 남호정사에 대들보를 올리는 상량식 때 작성된 장윤상의 ‘상량기문’과 1941년 작성된 오헌 김홍락의 ‘남호정사기’ 등은 액자로 제작돼 현재 유화당에서 소장하고 있다.
유화당과 남호정사는 6·25 한국전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근 칠곡군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방어선 전투 때 유화당에는 상주尙州 경찰서, 남호정사에는 육군부대가 주둔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유화당 종부님이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주민 대부분이 피난을 갔지만 유화당 사람들은 피난가지 않고 유화당을 지켰다고 한다. 유화당에 주둔한 상주경찰서장[성씨가 장씨였다고 한다]이 유화당과 인척관계에 있었는데, 피난가지 말고 유화당에 있으면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유화당은 보국대保國隊 출발지가 됐고 유화당 사람들과 몇 몇 주민은 보국대 활동을 했다. 보국대는 6·25 한국전쟁 때 한국군을 도와 탄약수송, 식량보급, 부상자 후송 등의 임무를 수행한 민간인 조직으로 주로 마을 주민들로 구성됐다.
“유화당과 남호정사는 6·25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로 알려진 낙동강방어선 전투를 직접 겪은 집이에요. 우리 집에서 만든 주먹밥을 보국대가 짊어지고 전장까지 날랐거든요. 이런 역사를 이제 누가 알까요?”[유화당 종부님]
옛 국동 문중 종택 남호정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남호정사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300여 평이 넘는 넓은 대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뜰을 가운데 두고 북쪽에 안채, 남쪽에 사랑채가 남향해 나란히 있었다. 뜰 서쪽에 일꾼 방이 딸린 방앗간과 마구간이 있었고 사랑채 남쪽에 대문이 있었다.
대문은 정면 3칸이었는데 가운데 칸은 문이고, 좌우 각 한 칸씩은 뒤주[쌀 따위의 곡식을 담아 두는 곳]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지금과 같이 정면에 사랑채인 남호정사가 있었다. 남호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기와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왼쪽에서부터 2칸 방, 2칸 마루인데, 가장 오른쪽 마루 뒤편으로 한 칸 중사랑채가 돌출되어 있어 하늘에서 보면 전체적인 모양이 ‘┛’형을 하고 있다.
사랑채 뒤쪽에 안채가 있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서부터 1칸 방, 2칸 마루, 2칸 방, 1칸 부엌이었다. 안채는 초가였는데 조상 대대로 내려온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문중원들은 안채를 국동 문중 입향조 때부터 있어온 집이라 생각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서쪽에는 초가지붕을 인 방앗간 채가 있었다. 정면 4칸으로 좌측에서부터 일꾼방, 마구, 고방, 디딜방앗간이었다.
남호정사는 조선시대 양반가옥 건축양식에 충실한 집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성 공간인 사랑채 영역과 여성 공간인 안채 영역을 철저히 분리했다는 점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남자들이 거처하는 사랑채와 담이 있어 여성이 거처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았다. 안채를 출입하려면 사랑채 서쪽에 나있는 중문을 이용해야 했다. 사랑채 동쪽에는 중문은 없었지만 헛담[남·여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쌓은 담]을 쌓아 시각적으로 안채가 보이지 않게 했다.
우물은 집터 동쪽에 있었고 주변에 감나무, 밤나무, 앵두나무 등이 있었는데 현재 감나무, 밤나무는 사라졌고 앵두나무는 유화당으로 옮겨져 지금도 초여름이면 가지마다 빨간 앵두가 열린다. 남호정사에는 화단이 두 곳 있었다. 사랑채 동쪽과 서쪽이었다. 동쪽 화단에는 주로 국화를 심었고, 서쪽 화단에는 소나무, 목단, 앵두 등 여러 꽃나무가 있었다. 안채 뒤뜰에는 각종 채소를 심은 채소밭과 화장실, 땔나무를 쌓아두는 곳이 있었고, 석류나무와 대추나무 등도 몇 그루 있었다. 유화당과 접해 있는 서쪽 담에는 돌배나무와 벽오동나무가 있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국동 문중 종택이었던 남호정사는 현재 사랑채만 남고 모든 것이 다 사라졌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으로 알려진 안채는 1970년대 후반 경에 사라졌고, 나머지 건물과 부속물들은 집이 경매에 넘어간 이후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매로 넘어가기 전에 종부님이 남호정사 편액과 남호정사 관련 유물들을 잘 챙겨두었다는 점이다.
※ 옛 남호정사 전체 모습을 그린 그림 한 장 들어 갑니다
국동 문중 ‘종가’? 국동 문중 ‘주손가’?
국동 문중원들과 마을사람들은 남호정사를 인천이씨 국동 문중 ‘종택[종가]’이라 부른다. 또 영천시 화북면 학지마을에서 이곳 도남동 남호정사로 시집온 권기순 할머니를 국동 문중 ‘종부’라고 칭한다. 그런데 유가문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종가와 주손가, 종손과 주손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이 용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종손과 주손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손과 주손은 사전적 의미로는 비슷하다. 둘 다 ‘큰 집 맏손자’다. 하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종손宗孫은 불천위[바로 뒤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선조를 모시는 종가집의 맏손자를 말하고, 주손胄孫은 불천위 선조는 없지만 오랜 세월 맏이로 대를 이어온 집의 맏손자를 말한다. 결국 집에 불천위 선조의 신주를 모시는 불천위 사당이 있고, 불천위 제사를 모시면 종가, 종손이요, 없으면 주손가, 주손인 것이다. 결국 종손과 주손, 종가와 주손가는 ‘불천위 조상’의 존재여부에 달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불천위 제사를 모시지 않는 남호정사는 국동 문중 ‘주손가’, 권기순 할머니의 아들 이주웅씨는 ‘주손’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는 관습법이란 게 있다. 국동 문중에서는 관습 상 입향조 이후 13대 350년 세월을 맏집으로 이어온 남호정사를 ‘종택’, 그 집 안 주인을 ‘종부’라 칭한 것. 사족을 하나 달면 요즘 현대인들은 2-3대만 맏이로 내려와도 ‘종손’이라 칭하는데 제고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도대체 불천위가 뭘까?
천년만년 제사를 모신다, ‘불천위’
‘불천위不遷位’ 혹은 ‘부조위不祧位’라는 말이 있다. 유가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용어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용어다. 불천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4대봉제사四代奉祭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4대에 걸친 선조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4대라 함은 나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4대를 말한다. 1대조인 부모, 2대조인 조부모, 3대조인 증조부모, 4대조인 고조부모가 그것이다. 그런데 왜 3대, 5대가 아닌 4대봉제사일까? 옛날에는 ‘2대봉제사’도 있었고, 3대, 4대는 물론 정확한 예는 아니지만 5대, 7대봉제사도 있었다. 이런 봉제사 대상범위 변천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고대 중국 예법을 참고해야 한다.
중국 옛 예법에 의하면 천자는 ‘칠묘七廟’라고 해서 시조 이하 6·5·4·3·2·1대조를 모시는 사당 일곱 개를 지어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오묘五廟’라고 해서 시조 이하 4·3·2·1대조를 모시는 사당 다섯 개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기타 대부는 시조 없이 3대조, 선비는 2대조, 평민은 1대조에 한해 사당 없이 정침[안채]에서 제사를 모셨다.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신분에 따라 봉제사 대수를 달리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 주자가례[주자가 쓴 예서]가 정착되면서부터 신분에 따른 차이 없이 4대봉제사가 유행해 현재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4대를 넘긴 제사와 4대를 넘긴 조상 신주는 어떻게 했을까? 바로 여기에서 ‘불천위’와 ‘매주·조매·조천·체천’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4대봉제사를 행하는 사당에는 1대조[부모]부터 4대조[고조부모]까지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새 신주가 사당에 들어가야 할 상황이 벌어진다면, 기존 사당에 있던 신주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답부터 말하면 기존 신주들은 각각 한 대씩 승격한다. 새 신주가 기존의 1대조 자리에, 1대조는 2대조 자리에, 2대조는 3대조 자리에, 3대조는 4대조 자리로. 그럼 기존 4대조 신주는 어떻게 될까?
4대조 신주는 대체로 세 가지 방법에 의해 처리된다. 산소 곁에 신주를 묻는 ‘매주·조매’, 4대손 안에서 가장 항렬이 높고 나이가 많은 이[최장방最長房]의 집으로 신주를 옮기는 ‘체천·조천’, 신주를 사당 안에 그대로 두고 대대손손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부조위’가 그것이다. 이중 불천위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대개는 한 종족의 시조나 중시조 또는 국가에 크나큰 공훈을 세운 경우에만 불천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종가·종손이라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불천위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집과 그 집 맏손자를 이르는 말이다.
조상제사를 지극 정성 받든 까닭
우리는 오래전부터 선조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제사를 모셔왔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지나 유교국가 조선이 들어서면서 모든 제사 법식은 유교식으로 개편됐다. 사람 신에 대한 제사뿐만이 아니라 천신, 지신을 비롯한 자연신과 삼라만상에 대한 모든 제사가 유교식으로 정리됐다. 이처럼 모든 유형의 제사를 유교식으로 개편한 것은 유교적 예법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를 통치한다는 유교 예치禮治에 따른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세월은 물론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제사에 목숨을 걸었다.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바빠도 조상제사에는 꼭 참석했다. 지금도 제사가 많은 집은 명절제사를 제외하고도 일 년에 기제사만 열 번이 넘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왜 우리는 조상제사에 이렇게 열심인 것일까?
우리가 조상제사에 열심인 것은 이유가 있다. 바로 유교의 독특한 ‘내생관’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 세계, 즉 다음 생에 대한 구체적인 교리가 있다. 이른바 지옥이니 천당이니 하는 저승세계다. 그런데 유교에는 이런 저승개념이 없다. 그럼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유교에서는 죽은 조상이 천당·지옥 같은 저승세계로 간다고 보지 않았다. 죽은 조상은 상례를 마치고 나면 다시 자신이 살던 집 사당 혹은 감실로 되돌아온다고 봤다. 다시 말해 죽은 조상은 멀리 저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승에서 후손들과 함께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이 살아간다고 본 것이다. 주자가례를 지은 주자는 사당은 반드시 사람이 주거하는 곳에 세우고, 정침[안채]의 동쪽에 세운다고 했다. 이는 자식이 그 어버이를 죽었다고 여기지 않는 까닭이고, 또 귀신은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불과 한 두 세대 앞만 해도 조상제사를 못 받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아들, 아들 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아들을 두지 못해 제사가 끊어지면 그로써 그 집 조상은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에필로그
도남동 국동에 남아 있는 두 채의 고가, 재실 유화당과 종택 남호정사. 두 건물의 옛 사진을 보면 이 두 건물이 보통 건물이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초가지붕이 대부분이던 시절 흙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골기와집 유화당과 남호정사가 있었다. 둘 다 기둥도 고급기둥인 원기둥을 썼고, 남호정사는 기둥아래 초석도 원형초석을 썼다. 당시 시골마을에서는 여간해서 사용하기 힘든 건축부재요 건축양식이었다.
유화당과 남호정사에는 문이 모두 4개였다. 유화당 대문, 남호정사 대문, 남호정사 안채 중문, 유화당과 남호정사 사이 중문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화당 대문만 남아 있고, 유화당과 남호정사 사이에 있던 중문은 유화당 쪽에만 일부 남아 있다.
국동 문중은 예로부터 아들이 귀했던 모양이다. 족보를 보면 형제·사촌 간에 양자를 주고받는 예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종택에 심은 꽃과 나무 류를 보면 다산을 기원하는 것들이 많았다. 다산의 상징 석류·대추·돌배,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앵두 등이 그렇다. 물론 부귀의 목단, 절개의 소나무, 상서로움의 벽오동 등도 있었다. 아참! 하나 더 있다. 유화당 지붕 용마루 좌우 끝에 세워둔 망와에도 똑같은 기원이 새겨져 있다.
“수부다남壽富多男, 복선여경福善餘慶” [장수, 부귀하며 아들이 많기를, 선과 복을 지으면 경사가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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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상의 ‘상량기문’ 연도를 기준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