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최 성 길
지난 5월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동기생들 몇몇이 전남 고흥으로 유람을 떠나는데 같이 가자고 한다. 이어지는 뒷말은 잘라먹고 ‘무조건 오케이다!’ 해놓고는 한바탕 웃었다. 놀러가자고 할 때 가지 않으면, 다음에는 가고 싶어도 불러주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나서였다.
고흥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고장이다.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나로도 우주센터를 비롯한 볼거리가 여기저기 늘려있고, 음식 또한 맛깔스럽기로 소문난 곳이다. 어디 그뿐인가, 고흥만 방조제에 시설 좋은 리조트가 들어서서 우리 같은 팔순옹(八旬翁)들이 유람과 휴식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게다가 고흥은 우리 고교 동기생 중에 유일한 이곳 출신이며, 서예의 대가인 동암의 고향이기도 하여, 준비에서부터 안내에 이르기까지 그가 도맡아주기로 해서 안성맞춤이었다.
녹음방초가 꽃보다 아름답다더니 과연 그랬다. 팔순옹(八旬翁)들을 한가득 태운 전세봉고가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산야는 온통 초록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만나면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열아홉 시절로 돌아간 팔순옹(八旬翁)들의 재담과 추억담이 끝없이 이어진다.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새 배꼽시계가 점심때를 알린다. 동암이 미리 예약해놓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남도는 과연 음식의 고장이라 할 만 했다. 차려놓은 음식상을 마주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름이지 싶다. 어디 그 뿐인가 형형색색 잘 차려진 음식들이 만들어내는 색깔의 조화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거기에 더하여 어떤 식도락가도 일일이 표현해 낼 수조차 없을 것만 같은 맛과 향은 식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누가 일러 일본 음식은 눈으로 먹고, 중국음식은 맛으로 먹고, 한국음식은 양으로 먹는다고 했던가? 남도 음식을 구경도 못해본 어느 멍청한 덜렁꾼의 말일시 분명하다. 눈으로도, 맛으로도, 양으로도 으뜸인 남도 음식을 맛보고는 도저히 그따위 망언이 나올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양산박이 따로 없다. 게걸스럽게도 먹어댄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동암의 설명을 들으며 굽이굽이 산야를 누비다가 하룻밤 피로를 풀 숙소로 향했다. 이름 하여 썬밸리 리조트다. 이 고장 출신인 천경자 화백의 전시실을 만들려고 계획했다가 여의치 않아 리조트로 바꾸었단다. 방조제를 쌓아 해수와 담수가 마주보고 있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었다. 규모도 웅장하고 시설도 수준급이었다. 바다와 담수호를 조망하며 해수사우나에서 피로를 푸노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튿날 아침 느지막이 리조트 식당에서 시래기 국으로 가벼운 아침식사를 마친 후 소록도로 향했다. 고흥반도 서남단 녹동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다. 녹동을 옛날에는 사슴을 닮았다 하여 녹도라 불렀는데, 그 앞에 있는 작은 섬을 작은 녹도, 소록도라 부르게 되었단다. 일제강점기에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하던 곳으로 고립의 섬이 된 이곳은 국립소록도병원이 있어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소록도는 내가 회원으로 있는 순수민간봉사단체인 한국HELP클럽에서, 41년 전인 1981년 11월 27일 TV 20대를 기증한 곳으로 약간의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아쉬웠다. 그 당시에 소록도에는 3,000여명의 환자와 5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TV가 1대 뿐이라는 말을 듣고 회원들이 1대씩 기증한 것을 모아 오륜대 명상의 집 이석진 신부님을 통해 전달한 일이 있었다. 녹동과 소록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지나니 곧바로 거금대교가 소록도와 거금도를 이어주고 있었다.
거금도, 옛날에 고교 동기생 두 사람과 함께 이곳에 감성돔 낚시를 자주 다녔었다. 자칭 낚시3인방이었다. 서너 시간씩 걸리는 먼 길을 참 많이도 다녔었다. 거금대교가 없던 시절이었다. 녹동 선착장에서, 배에다 승용차를 싣고 거금도에 도착하면 우리 셋은 언제나 거금도 동쪽을 돌아 신평에 도착, 승용차를 파킹해두고 단골 선주를 불러 무인도 포인트로 향했다. 야영낚시를 주로 했으나 때로는 민박집에서 포인트로 오가며 출장 낚시를 하기도 했었다. 낚시를 놓은 지도 십년을 훌쩍 넘겼다. 그 새 셋 중 하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하나는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 한 형편이라 이번 유람에 함께 하지 못했다. 언제나 가슴을 탁 트이게 해 주곤 하던 그 끝없이 넓은 바다를 바라보노라니 왠지 눈앞이 자꾸만 흐려져서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다.
추억의 섬 거금도를 뒤로하고, 나로도 우주센터로 향했다. 나로도 가는 길은 과연 절경이었다. 과거에 여러 번 가 본 곳이기는 해도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이번 나로도 우주센터 방문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감회가 특별했다. 동암의 설명이 곁들여졌기 때문이다. 우주센터가 있는 바로 그 산 이름이 봉래산(蓬萊山)이라 했다.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산으로 영주산(瀛洲山)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삼신산(三神山) 중에 하나라 했다.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 에서 우주로 향한 꿈을 키우고 있는 모습이 팔순옹(八旬翁)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우주센터 홍보전시관이 월요일에는 휴관하기 때문에 관람을 할 수가 없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귀로의 고속도로,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전세봉고 기사, 일흔아홉의 노해병(老海兵), 그는 비록 구닥다리 전세봉고를 모는 노기사(老技士)였으나 승객의 취향을 꿰뚫어보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흘러간 뽕작 CD 하나로 차 안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팔순옹(八旬翁)들이, 열아홉 소년으로 돌아가 열광하며 목이 터져라 떼창을 하게 만들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날 그 떼창의 백미는 아마도 ‘봄날은 간다’가 아니었던가 싶다. 올해의 봄날은 그날 그 떼창과 함께 가버렸다. 봄날이 가는 게 아쉽고, 유람이 끝나는 게 아쉽고, 친구와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아니, 어쩌면 인생의 봄날이 가 버린 게 아쉬워 목이 터져라 떼창을 해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