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살이의 냄새가 나는 소설을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caf.or.kr%2Ffriday%2Fleesunwon.gif) 이야기주제 : 소설과 현실과의 거리 일시 : 2000년 8월 26일 (금) 7시 장소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강당
■ 이 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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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저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나이로는 마흔넷인데, 실제 나이와는 상관없이 제 생각으로는 2백년 전에서부터 온 소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제가 며칠 전에 한수산 선생님의 산문집을 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단어 열 개를 골라 보세요'라는 말로 시작되는 글을 읽었습니다. 한수산 선생님 스스로는 꼽지 않았는데, 카뮈가 고른 말들 열 개를 소개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저도 한번 골라 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자리에 오기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단어 열 개를 꼽아 본 적이 있습니까.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다섯 사람, 내가 좋아하는 음식 다섯 가지, 내가 가고 싶은 곳 다섯 군데는 꼽아본 적이 있지만, 책을 좋아하면서도 좋아하는 단어 열 개를 골라본 적은 사실 많지가 않습니다.
좋아하는 말 열 가지를 골라 보세요 저는 좋아하는 단어 중에 유교적 가치를 듭니다. 유교(儒敎)라고 하면, 지금은 보수 진보의 개념으로만 파악해 유교를 보수로만 치부하고 마는 걸 봅니다. 그래서 보수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언론에서도 '보수(保守)'라는 말을 생각 없이 쓰고 있습니다만, '보수파', '보수 세력'은 기득권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지 진정한 보수파가 아닙니다. 저는 보수라는 말을 어릴 때부터 늘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지금도 대관령 밑에 있는 강릉에 가면 아직까지 4백년 된 대동계가 있습니다. 마을계가 4백년 간 이어져 온 겁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실권을 가진 촌장제를 유지하고 있는 마을인데, 역사상으로는 신라 삼국 초기의 화백제도에서부터 촌장제가 발원하는데 그때부터 이어져 온 것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촌장제가 엄존하는 마을입니다. 제 어릴 때 기억 하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다른 집에서는 3일장을 지냈지만 유가의 풍습으로 그믐을 넘겨 장례를 치르는데, 그러다 보니 19일장을 치르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휴직하신 채 부모를 보낸 죄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외출을 삼가면서, 1년 동안 방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지내셨습니다. 어릴 때는 우물 안의 개구리여서, 저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도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지 한참 뒤인 1975년도에 영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마을에 비로소 전깃불이 밝혀졌습니다. 저희 집에서 강릉까지는 걸어서 20리 정도 됩니다만, 열너넷 살 적에는 새벽에 나갔다가 보충 수업이라도 하고 나면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낮에는 시내에서 반짝이는 전깃불을 보다가 밤이면 어두운 등잔불 아래서 지내야 하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우리 문명사에서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이 등장한 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원숭이가 아닌 사람 꼴을 갖춘 인간, 즉 최초의 인간이 등장한 것은 200만 년 전이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소녀의 화석에 따르면 키는 13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루시 화석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루시 화석으로부터 따지더라도 200만 년 전, 현생 인류로부터 따지면 이삼십 만 년 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문명사 가운데서 우리가 축의 전후반전을 가리듯 큰 문명의 전환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불의 사용입니다. 처음부터 불은 숲 등에서 자연발화 하였습니다만, 바라보기만 하고 사용하지 못하였지요. 지금까지의 인류 문명을 100이라 할 때 불의 사용은 99는 불의 사용에서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을 사용한 다음부터 비로소 문명이라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 다음으로 인류 문명사에 기여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전기의 발명입니다. 실제로 전기가 들어온 마을과 그렇지 않은 마을은 먼저 노는 모습부터 다릅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혼자서 놀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두셋 아니면, 무리를 지어서 놀아야 했고, 이웃과 어울려서 일을 하곤 했는데 이웃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 처음 안 것은 '혼자 놀아도 심심하지 않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스스로 땀 흘려가며 축구 하는 것보다 이회택, 정강진, 김정남 등 유명 선수들이 뛰는 걸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요즈음 아이들은 혼자서 컴퓨터를 갖고 잘 놀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짝을 지어서 놀곤 했는데 놀이 문화가 바뀌고, 밤에도 낮과 마찬가지로 일할 수 있는 등 낮과 밤의 구분이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기 하나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많은 변화가 초래되는 걸 보았습니다. 그 전에는 추석 등의 명절에 즈음하여서는 마을 단위로 모여서 놀곤 하였는데, 전기가 들어온 다음에는 KBS나 MBC에서 하는 추석 특집극을 보
는 걸 더 재미있어 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하는 놀이에서 바라보는 놀이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춘천 강원대학에 들어가서는 경영학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0년 동안 내리 신춘문예에 낙방한 끝에 서른두 살 때 작가로서 등단을 하여, 지금 우리 나이로 마흔네 살이 되었습니다. 작가 생활 10여 년 남짓 됩니다만, 제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참 멀리서도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전후 출신 작가들은 분단을 즐겨 소재로 택하지 않습니다. 저는 57년생이니까 휴전된 다음 4년 후에 태어난 셈인데, 제가 젊은 작가로서는 드물게 분단 문학까지 했던 것은 얼마 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에서 내려온 사람 가운데 제 8촌 형님도 끼어 있는 등 분단의 상처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씨족사회인 좁은 마을에서 '저 집에는 왜 아버지가 없어요?' 하는 물음은 제게 깊은 사색의 우물을 만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아버지는 노동의 주체이고, 농사는 대부분 남자들이 이루어내는 건데, 아버지가 없는 집은 끼니가 부실하고 그늘이 드리워지기 마련이지요. 저는 그런 집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경제적으로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시골 출신으로 공부를 잘해도 신원조회에 걸려 육군사관학교 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공무원 시험에서도 떨어지고 하는 모습들을 어릴 때부터 지켜보았습니다. 인민군과 국군이 맞붙어 싸우는 모습만 지켜보지 않았을 뿐이지, 씨족사회의 일원으로 살다보니 사실 그들이 갖고 있는 상흔은 지금도 함께 겪은 느낌이 듭니다. 조금 나이가 들어서 강릉 시내 학교와 어두운 시골 마을을 날마다 오가면서, 두 문화간의 충돌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저의 졸작 [19세]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비행 청소년이 되어 고등학교 1학년 다니다가 학교를 때려치우고, 한 2년 동안 대관령에 올라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 형편으
로서는 제가 강릉 시내에서 가게를 하겠다고 나섰다면, 아마 차려 주셨을 겁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것은 농사밖에 없어서 대관령에 올라가서 이태 동안 농사를 짓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렇게 농사를 짓고 싶으면 일꾼들 부리면서 집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때려치우고 대관령에 올라가 농사짓다 하지만 그건 집의 농사지 제 농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대관령에 올라가 2년간 농사를 지었던 것도, 지금 돌아보면 중학교 때 겪은 문화 충격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강릉시내에 가면 우추리란 마을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 가운데 뭔가 덜 떨어져 보이면 "너 우추리에서 왔냐?" 하고, 시장 바닥에서 셈을 잘 못하면 "우추리에서 온 아줌마에요?" 하고, 공사판에서 엉뚱한 것을 갖다 주어도 "너 우추리에서 왔냐?"고 하는 등 우추리는 시골의 대명사입니다. 우추리의 초등학교 졸업생 40명 가운데도 20명 정도가 중학교에 갑니다. 게다가 여자는 두세 명밖에 가지 못합니다. 그 우추리에서 강릉 시내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별명은 들창코, 깜둥이가 아니라 나이, 성별 관계없이 우추리입니다. 실제로 이런 것이 너무 싫어서 빨리 도시로 가고 싶다는 등의 생각 때문에 고등학교도 인문계 아닌 상고로 진학했습니다. 인문계로 가면 3년 공부해야 하고, 또 대학 가서 공부해야지 생각하니, 언제 돈 벌어서 우추리를 탈출하느냐 하는 게 아득하게 느껴진 거죠. 그래서 상고에 진학한 다음, 빨리 돈벌어야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버지의 반대로 뜻대로 되지 않아서 1학년을 마치고, 대관령에 올라가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을뿐더러 바닷가에 나가 교복에 석유를 끼얹어 불태우는 아들을 보며, 더 이상 막지 못할 거라는 알고 아버지는 저와 약속을 했습니다. 첫 조건은 원금을 대주되 원금을 까먹거나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면 내려올 것, 그리고 몇 권의 책을 주시며 제대로 안 읽었을 때 내려올 것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책만 덜렁 몇 권 들고 대관령으로 올라갔습니다. 농사꾼들 사이에도 계급이 있어서 아주 밑바닥 농민을 불농이라고 부르는 화전농이 있고, 그 위에 낱농이라고 해서 1년씩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내년에
누구 땅이 될지도 모르는데 풀도 제대로 매지 않고, 겨우 낫으로 베고 맙니다. 제가 낱농으로, 고랭지 채소를 2년 지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시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몸부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낱농으로서 농사를 딱 이태 짓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올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우선 어린 제가 농사라는 걸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제가 농사를 짓기는 짓는데 농사가 아니라 도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농사에 대해 모를 뿐더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자각이 든 거죠. 또 이태 놀다 보니까 두 살 터울의 동생이 같은 학년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요. 한편으로 습작노트들에 시와 소설, 연애편지들을 쓰면서 문학에 대한 열망을 참을 수 없기도 해서 짐을 다시 쌌던 거죠.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올 줄 알았다. 2년 늦게 시작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건강에 신경을 쓰고 인생을 길게 보아라."라고 일러주셨습니다만, 탕자를 꾸짖는 대신 따스하게 맞아주신 말씀은 지금도 제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하여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경영학 쪽에서도 제가 관심 있게 공부한 것은 광고였습니다. 광고를 보면 세상이 보입니다. 70년대 광고의 주된 아이템은 막 쏟아지기 시작한 가전제품들이었습니다. 70년대의 밥통 광고들에 이어 80년대에는 냉장고나 세탁기 등이 주종을 이루었지요. 얼마 전 IMF가 터졌을 때에는 저 텔레비전 광고를 누가 먹여 살리나 했는데, 휴대폰 광고들이 마구 터지기 시작했지 않습니까. 그 다음으로는 인터넷 광고 등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또 돌아보면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미원이나 미풍 등 조미료 광고가 주류를 이루는 등 광고를 보면 세상이 보입니다. 아무튼 저는 경영학 쪽에서도 첨단인 금융과 광고 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가 대학
에 다닐 때에는 교련 과목을 수강하면 6개월씩 군복무 단축 혜택을 주었습니다. 데모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당근이었습니다만, 저는 그 혜택도 받지 않고 만 33개월을 현역으로 복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습니다. 저를 가리켜 흔히 전방위 작가라고 부릅니다. 주제와 소재를 어느 쪽으로든 다 쓸 수 있다는 걸로 받아들이고, 문체에서도 다양하다는 평가로 봅니다. 저 자신이 제 작품을 볼 때에도 순수하고, [압구정동에 비상구가 없다]에서부터 [은비령]에 이르기까지 이순원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붙어 있으니까 이순원이 쓴 거지, 이름을 빼고 나면 어느 작품도 딱히 제 작품이라고 고정 지어 말할 수 없으리라 봅니다. 한 작가로서 저 자신을 전방위 작가로 가져갈 수 있었던 것도 우선 제가 살아온 삶의 시간이 조선 영조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왔고, 즉 유교적 문화에서 광고학에서 보듯 현대까지 이어 왔고, 공부도 다양하게 해왔고,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는 등 다양하게 살아온 것이 제 문학관의 다양함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다양한 삶이 다양한 작품을 낳게 해 누군가 이렇게 묻더군요. 그런 문학의 다양함을 하나로 묶는 것은 무엇이냐고요.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이, 문체도 다르고 소재도 다른데 그것을 하나로 묶는 끈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그 물음에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내 작품이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저는 20대에 작가가 되지 않았기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0대 초반에 작가가 되니까, 데뷔 당시가 80년대 후반이라는 점도 있어서 '세상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초기 작품들 가운데에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데뷔작도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소재로 하여 썼고, 광주민중항쟁이라든가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에서 보듯 90년대 초를 풍미하였던 천민자본주의의 문제 등 소설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파헤쳐 보고자 했습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한마디로 말해 잘난 척했던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링컨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한 나이가 되면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자신이 살아온 흔적이 얼굴에 담긴다는 말입니다. 작가 역시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살아온 글의 얼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30대에는 어느 작가나 풍부한 감수성 따위로 버텨 나간다지만 사십이 되었을 때는 감수성으로 버틸 수도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흔히 30초반의 작가들을 가리켜 신세대 작가라고 부르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 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허락된 길은, 중견으로 도약하느냐, 새롭게 부각되는 뒷세대 작가에게 깔려 죽느냐 하는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저로서는 마흔 이후에도 내가 계속 작가가 되자면 삼십대와 다른 이순원의 작품을 보여주어야 되지 않는가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동의 문제를 얘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의 작가들이 독자들에게 지은 죄가 두 가지 있습니다. 80년대에는 문장을 우습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육칠십년대에 소설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은 대문장가라는 말과 대문호라는 말은 동의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팔십년대 들어서는 문장가라는 말을 좋지 않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라는 말이 들어가서 좋은 말은 별로 없습니다. 문제 아동, 문제 지역, 문제의 집, 바둑에서 사용하는 문제의 수 등. 그런데 팔십년대에는 작품을 잘 씌어진 작품을 가리켜 문제작이라 부르고, 잘 쓰는 작가를 문제 작가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말에서 풍기듯 독재 정권하에서 누가 발언 수위를 높이느냐 하는 것을 경쟁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문학이 거리에 있어야 할 시기여서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90년대 들어와서는 작품의 감동에 대해 얘기하면 촌스럽다,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저는 거기에 대한 반성을 겸하여, 제 작품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화해를 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남의 이야기부터 쓸 것이 아니라, 우선 나부터 벗고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수색, 그 물빛 무늬] 안의 [수색, 어머님 가슴속에 흐르는 물]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는데, 이 작품을 쓰면서 여간 부대낀 게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은 제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로, 아버지와 두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 것이 [수색, 그 물빛 무늬]입니다. 여섯 편으로 된 연작인데, 한편 한편 문예지에 발표하느라 2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편씩 발표될 때마다 형제들 간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민음사에서 이 작품이 출간되던 날에는 마침 아버님이 상경하셔서 우리 집에 들르셨습니다. 책이 나오던 날 양손에 스무 권씩 들고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는데, 경비원이 '어르신 올라갔다'고 귀띔해 주어서 책을 경비실에 놓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또 아버님이 나흘 동안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아내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신문의 문학면을 빼내어 치우느라 부심하기도 했습니다. 출간과 함께 책의 내용이 알려지자 KBS측에서 이산가족 찾기 하자는 반응이 오기도 했고, 작품을 본 형님은 그런 이야기 왜 쓰느냐고 야단을 치시기도 했습니다.
정직하게 자기 자신의 이야기부터 흔히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작가로서 산다는 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그것은 1차 독자, 예컨대 가족과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령 고부간의 갈등을 소재로 글을 쓴다고 합시다. 그러면 글을 쓰는 순간에 딱 전기가 오기 마련입니다. 이걸 읽어볼 남편, 시누이, 읽자 마자 뒤로 넘어질지 모르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좀처럼 쓰고 싶은 대로 써나갈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이야기 아닌,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쓰다 보니까 재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다릅니다. 제 작품 [19세]에서 보듯 어린 나이 무렵의 성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당시의 성의 성장과 비행 들에 대해서 써도, 한국 사회에서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에는 한국 사회에서 작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두세 배 힘듭니다. 여성 작가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집안의 적들입니다. 즉 작품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죠.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도 막상 자기 부인이 작가가 되어 쓰면, 그렇게 쓰지 말라고 주문하기 마련입니다. 제가 [수색, 그 물빛 무늬]를 쓸 때 바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가족사를 쓰면서,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넘어갔을 때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쓴다 해도 내가 겪은 감동처럼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 [수색, 그 물빛 무늬]를 쓰지 않았다면 [은비령]이라든가 [말을 찾아서] 같은 작품은 탄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부장제의 벽에 부딪칠 때 우회하지 말고 용기 있게, 작품을 끌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은희경이나 전경린 같은 작가가 되고 싶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두 사람이 쓴 작품을 여러분이 썼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여건에서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아무튼 그런 것을 뛰어넘는 것도 작가 지망생, 특히 여성들이 발휘
해야 할 용기라고 봅니다. 소설 작법을 담은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1차 독자 뛰어넘기는 작가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저는 제 작품을 쓰고 나면 징크스 비슷하게 따라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작품을 쓰고 나면, 나중에 작중 인물이 꼭 제 앞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추석에 즈음하여 막가파 사건이 사회를 크게 흔들어 놓았을 때 일입니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 모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소주를 나눠 마시고 있는데, 아내가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아내의 전언인즉 서울에서 막가파라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는데, 소설에 나오는 것 그대로 했다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우리의 스승은 뺑끼통과…"라고 했다더군요. "그랜저 타는 놈들은 다 죽여야 해." 하기도 했다는데, 녀석들이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를 보고 모방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뒤에 보니까 다른 소설가의 [뺑끼통]이 모델이었는데, 서울에 올라와 보니까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막가파를 예견한 소설,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하이텔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소설이 바로 막가파처럼 압구정동에 비상구를 읽고서, 테러에 나서는 한 사람의 얘기를 쓴 겁니다. 이것을 쓰는 동안에 똑 같은 상황의 사건이 벌어져 깜짝 놀랐습니다. 그 후 제가 [혜산 가는 길]이란 단편을 썼을 때 일입니다. 저는 연변을 통해 백두산을 다녀오지 않았습니다만 90년대 초에는 연변을 통해 장백교가 있는 곳 즈음에서 이산가족이 만나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얼마 전 가수 현미 씨가 북쪽에 남기고 온 동생을 만나고 온 과정을 그대로 쓴 거죠. 90년대 초반에 이 작품을 발표하자, 그렇게 갔다온 적이 있느냐고 물어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작품을 쓰면서 이런 일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일들이 적잖게 일반화되더군요. 사회 소설을 쓰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데, 제가 정말 놀란 것은 [은비령]을 쓴 다음이었습니다. 그 은비령 안의 의료보험공단 얘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그곳 홍보실에 근무하는 제 친구한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용인즉 자기 회사에 [은비령]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똑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천명이 넘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 '저 여자와 이순원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회자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제 친구한테 '당신이 내 살아온 내력을 이순원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느냐'고 물어와서, 실제로 세 사람이 만나 오해를 푼 적도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민음사 게시판을 통해 한 통의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작품 중에 [그대 정동진에 가면]이 있습니다만, 1966년 무렵에 태어난 광업소장의 딸과 광부 아들간의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정동진이 옛날의 정동진에서 서울 사람들의 이발소 그림이 된 이야기를 쓴 소설입니다. 그런데 당시 광업소장의 딸이 저를 찾는 메일을 올린 거죠. 자유 게시판에 저를 찾는 글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가 보았더니, '이름이 양국희인데 1966년에 태어났고 선생님이 쓴 [그대 정동진에 가면]의 무대가 되는 강릉 광업소장 딸이며, 저희 아버님은 가수 김태곤이 국제가요제에 노래부르던 날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저와 비슷한 설정인데 저의 사연을 아시나요?' 하는 사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답장을 쓴 적도 있습니다만, 둘을 모아 놓으니 하나의 작품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문학과 의식] 가을호에 [그대 정동진에 가면] 후편이라고 하여 싣기도 했습니다.
간절한 상상력은 현실을 넘어 더욱 실감나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은비령]의 경우에도 배경이 된 은비령 안의 풍광을 얘기하면서 잘 알아서 쓴 것이 아닙니다.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의 압구정동, [수색, 그 물빛 무늬]의 수색, [말을 찾아서]의 봉평, [은비령] 중의 은비령과 도암 등은 작품을 쓰기 전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보면 가볼수록 작품을 잘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자주 가본 곳은 대관령뿐인데 제 작품 속에서 산수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눈에 익어서, 아무리 써 보아도 대관령 자체보다 더 잘 쓸 수 없으니까 못 쓰는 거죠. 그래서 저는 가지 않고도 무대든 인물이든 작가가 상상력을 간절하게 가져가면 현실의 것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고 믿는 쪽입니다. [은비령]을 썼을 때에는 적잖은 이들이 제가 은비령 8경 얘기도 늘어놓고 하니까 제가 그곳에 사는 줄 압니다. 서울에서 달려 한계령을 넘어서 5백미터에서 7백미터쯤 가면 다시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산이 있습니다. 그게 군사도로라서 이름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 은비령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작품 안에서 은비 8경에 대해 설명하고 했더니 독자들은 혹시 제가 고시 공부하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안 거죠. 간절한 상상력을 가지면 얼마든지 실감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대를 찾을 때 이런 일은 있습니다. 지도를 펴고 등고선을 보면 손재주가 좋지 않아서 그리지는 못하지만, 이 부근의 산세는 대충 이럴 것이다라는 건 알 수 있습니다. 해는 이렇게 떠서 이렇게 지고, 이쯤에서 보면 산은 어떻게 보이겠는지, 여기에는 어떤 나무들의 군락이 있고 여기 바위에는 나무가 없다 따위는 보입니다. 그런 것 정도는 하면서 살아간다고 자부합니다.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를 쓸 적에는 압구정동에 한번도 간 적이 없습니다. 교통지도를 보면서 제 나름대로 그려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무대가 될 지역을 담기도 하지만, 제 경우에는 제 상상력을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믿는 편입니다. 특히 인물들의 경우에는 이제까지에 비추어, 앞으로는 좀더 긍정적으로 그려야 되지 않나 마음먹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작품 생활을 해온 지는 10여 년밖에 되지 않지만, 저는 제 작품들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아직까지 공부하는 작가고 앞으로 20년 이상 글을 써야 할 테니까, 집장사들이 지은 집처럼 똑같은 작품집들을 써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럴 형편이면 붓을 버리고 대관령 넘어가서 농사 짓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농사 짓기를 포기하고 와서 쓰는 글이니만큼 집장사 짓듯이 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습니다. 한 문장을 읽고서도 바로 누구의 작품이라고 알 수 있는 작가는 얼마나 대가의 반열에 있는 이들이겠습니까. 박상륭이나 이문구 선생 들의 작품은 한 부문만 떼어놓아도 곧바로 어느 분의 작품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대가는 아니더라도, 제가 쓰는 작품 하나하나를 집을 지을 때 공회당도 있고, 살림집도 짓고, 종가집도 짓고, 상여집도 짓고 하듯이 작가 생활 30년쯤이 되어 이순원 문학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을 때 사람 냄새가 나는 마을이었으면 합니다. 하나하나의 작품들을 통해 빈집도 있고, 굴뚝이 없는 집도 있고…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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