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의 찬양시 : 150편
1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3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편은 시편 전체의 사상을 최종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시편을 끝맺는 최종적인 시는 시편 146편에서 150편까지의 다섯 편이다. 이 부분의 특징은 시편 처음을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을 할렐루야로 맺고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란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을 노래하라」는 뜻이다. 할렐루야란 말은 시편 전반에 걸쳐서 자주 나오는 사용빈도가 높은 용어이다. 이는 시편이 기도문이면서 또한 찬양의 노래인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시 150편은 장르를 ‘찬양시’로 구분하는데, 감사의 구속사적 노래를 하고 있는 찬양시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라”에서 '찬양'이란 「아름다움을 기리고 착한 것을 드러냄」을 뜻한다. ‘찬송’이란 말로도 사용되고 있는 이 말은 기독교의 의미로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자가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찬양을 노래하는 말로도 표현했다. 그 즐거움은 자기 속에만 담아두고 간직할 그럴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내어 모든 사람과 함께 기리는 것이다. 이 찬양은 ‘새 노래’를 뜻했다(시 33:3, 40:4)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큰 권능이 나타나심에 따라 감사할 마음이 새로이 일어 나오게 된 노래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심을 인하여,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온 세상에 충만함을 인하여 나오는 노래이다(시 33:4-5) 곧, 구속사적 의미를 가지고서 하는 감사의 노래가 찬양이었다. 이렇게 찬양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나오는 신앙고백적 노래였다. 시편 자체가 그런 노래를 뜻했다. 그래서 시편 각 장 많은 곳에서는 설명을 붙이기를 “다윗의 시, 영장으로(지휘자의 인도를 따라) 한 노래”, “여호와의 종 다윗이~ ~에 따라(하면서) 부른 노래”라고 하였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향하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받은 각 개개의 영혼에게 향하는 말씀이다. 구속받은 각 개개인의 영혼이 하나뿐인 참된 구원자 하나님께 바치는 할렐루야가 시편이다.
시편 기자는 본서 첫 서두에서 “할렐루야” 하고서는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성소에서 찬양하라는 것은 찬양되어지는 지역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속하는 곳, 곧 하나님과 관련되는 천상의 세계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는 것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구원의 능력이 베풀어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행사된 곳에서 찬양되어져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 11:4에서는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는도다”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는 인도와 보호 속에 놓여 있었다. 이스라엘은 성소를 중심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의해서 천상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와의 언약이 관계 속에 놓여 있었으며, 그 나라를 보고 살아가는 것이 되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하는 찬양은 성소에서 하는 찬양이며, 그리고 그 찬양은 성소의 실체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있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을 하는 것이다.
주의 성소에서 부르는 하나님 찬양은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이다. 찬양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고 말하는 것으로서의 노래가 아니라고 한다면 찬양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서의 노래가 아니라고 한다면 찬양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속성,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속의 일에서 나타나지고 있는 위대하심에서 알 수 있다. 찬양은 그것을 아는 자가 감사함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찬양은 그것을 아는 자가 감사함으로 노래하는 것이므로 그 내용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충분히 말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구원론적인 근거를 가지고서 찬양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그래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라고 하였다. 비파는 거문고를, 수금은 가야금을, 소고는 북을 현악은 기타의 현악기를, 제금은 바이올린 및 바라(솥뚜껑 모양의 두 짝을 마주 쳐서 소리를 내는 악기, 징 모양으로 된 악기를 나무틀에 매어 담고서 체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말함)을 말하는데, 이들 악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각종의 현악기와 타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이런 악기 동원과 연주에 의한 찬양을 하라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음악이 구속받은 성도의 기쁨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드러내어 설명하고 표현하는 것으로서 이며, 그에 따라 마음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음악 악기의 동원과 연주가 이러한 의도를 방해하여 가리는 것이 된다고 하면 교회음악, 예배음악으로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시편 기자가 악기를 동원한 찬양을 말하고 있는 것은 찬양하는 자로부터 표출되고 있는 기쁨이 서로 전달되고 느끼며 그래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에서이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을 “호흡이 있는 자마다”하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호흡을 부여받은 자 즉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일반적 관계에서도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찬양이 구속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땅에서 구속받은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그게 찬양이다. 시편을 끝맺으면서 하는 말이다. “할렐루야” - “하나님을 찬양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