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 : 8 - 15절
“천사의 얼굴
스데반을 포함해서 일곱 집사들은 구제 사업이나 기타의 등등 일을 하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을 하자는 의미에서 집사를 세웠는데 그렇다고 집사들이 구제하는 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직분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 주어진 명령이었기 때문에 전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런 집사들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9절에 보면 디아스포라라고 해서 외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과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구레네는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다가 쓸어졌을 때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됩니다. 그때 그 사람의 이름이 시몬이었고 출신지가 구레네였습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리비아에 있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알렉산드리아도 아프리카 지역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집트, 성경식으로 표현으로 하면 애굽에 있는 도시였는데 그런 사람들과도 논쟁을 했던 것이고, 길리기아는 수도가 다소인데 다소는 사울의 출생지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태어났던 사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시아는 다 아실 것 같습니다.
여러 곳에서 온 디아스포라들과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스데반이 말하는 것은 진리였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진리를 말하는데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이 전략을 바꾸는데 11절을 보면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증인을 매수해서 거짓 증언을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13, 14절에 보면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예수님을 모함해서 죽였던 그 전략을 그대로 또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진리입니다. 또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도 진리이기 때문에 세상이 그 어떤 주장을 해도 진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주일을 맞이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얼마나 많은 의문 제기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별의 별 주장과 증거로 예수님의 부활은 자작극이고 쇼라고 호도를 했지만 진리를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진리를 믿고, 진리를 말하다 보면 스데반처럼 모함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함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스데반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이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5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큽니다. 우리가 이력서를 낼 때도 증명사진을 붙여서 내는데 얼굴만 찍어서 내지 몸 전체를 다 찍어서 내지는 않습니다. 얼굴 사진 하나를 보고서 그 사람에 대해서 여러 가지 판단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형 수술도 이제는 일반화가 되었고 피부 미용하는 곳도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얼굴 하나 가꾸어 보겠다고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우리 주변을 돌아봐도 그런 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자기의 얼굴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얼굴이 된다면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누구나가 그런 마음을 다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하고, 미용을 해서도 그렇게 만들 수 있겠지만 그 보다 더 뛰어난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을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얼굴에 대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100m 미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00m 밖에서 보면 분명히 미인이었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까 미인이 아닌 사람을 우리는 100m 미인이라고 말을 하는데 스데반의 얼굴은 사람들이 멀리서 대충 본 것이 아닙니다. 주목하여! 봤다는 것인데 영어 성경에서는 “intently”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집중적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뚫어지게! 그렇게 보고나서 내린 결론이 뭐였냐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천사의 얼굴과 같다며 탄식할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형 수술을 한 사람도 아니고, 피부 미용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 오르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했던 사람이고 특별히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당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던 것입니다.
스데반도 사람인지라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속상한 일을 당하고, 재판을 받는 신세 되면 그 얼굴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피부가 거칠어지고 다크 써클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스데반 집사의 얼굴은 천사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면서 평화롭게, 행복하게, 기쁘게 그 상황을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얼굴이었을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을 것 같고 천사의 얼굴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막연하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 올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모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일고 있고, 예수님도 변화산에서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이 표현을 문학적으로, 비유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천사의 얼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을 수 있는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는 바로 사두개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에 대한 표현을 보세요. 사도행전 23장 8절에 보면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천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천사를 부인하면 부활도 부인하는 것이고, 우리의 영혼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절대 극복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천사에 대한 믿음은 함께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부활을 하게 되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는데 천사들이 그런 시스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천사도 영적 존재이고 우리도 부활을 하게 되면 영적 존재가 되기 때문에 장가, 시집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천사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놓고 생각해 보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하면서 살아야 믿음의 생활을 정상적으로 잘 하고 있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살아야 우리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지 걱정과 염려스러운 모습으로 다크 써클이 축 처져서 살면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누가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우리가 다니는 피부 미용실이 잘 관리를 해줘서 우리의 피부가 좋아져야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 피부 미용실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지 우리의 얼굴이 수심의 얼굴이고, 근심의 얼굴이고, 천사와는 동떨어진 얼굴이라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그 사람들은 우리를 따라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
잘 생겼다. 예쁘다.” 이런 이야기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천사의 얼굴 같다는 얘기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 않습니다. 그 어떤 칭찬보다도 뛰어난 칭찬이 바로 천사의 얼굴 같다는 칭찬인데 우리가 그런 칭찬을 듣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근육은 자주 쓰면 활성화가 되지만 안 쓰면 굳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웃을 때 231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자주 웃는 사람은 그 근육이 활성화 되어서 웃는 얼굴상이 만들어 지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죽을상이 되는 것입니다. 말은 행복하다고 하는데 얼굴은 죽을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웃는 훈련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근육이 굳어서 그런 얼굴상을 가지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천사의 얼굴은 죽을상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안 속에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죽을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2009년도 신문에서 봤던 것인데 성형수술을 무려 50번 정도를 했더니 저런 얼굴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형수술을 50번이나 했으니 수술 안 한 사람보다는 더 예뻐야 맞습니다. 그렇다고 천사의 얼굴 같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모습이지 않나 싶습니다. 확실한 것은 앞으로 50번을 더 성형수술을 해서 100번을 채워도 천사의 얼굴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하고 지혜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천사와 같은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천사와 같은 얼굴을 가지려면 꾸준히 노력하고 훈련을 해야 하는데 걱정, 근심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웃음 근육을 자주 사용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부활할 때 그 믿음과 노력을 인정받아서 천사와 같은 영이 되는 것이지 평상시의 삶이 천사와 같은 영적 삶이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천사와 같은 얼굴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절을 지키라고 허락하신 이유는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평소에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이고 부활의 때에 천사와 같은 사람으로 새로워질 것을 믿으면서 이 땅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도 능히 이기면서 기뻐하면서 살라는 의미입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님들이라면 천사들처럼 영의 생각을 가지고 영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여 반드시 천사와 같은 영적인 새로운 피조물이 될 줄 믿으시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천사의 얼굴로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