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와의 충돌사고 이후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릎통증에 시달렸다.
병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세부적인 검진을 하여도 의학적으로 이상 없다는 말만 들었다. 의사는 마지못해 신경통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거라도 먹으면 통증이 가라앉았다. 노인들이나 처방받는 신경통 약을 열여덟 살에 치료약으로 먹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 무릎에 좋다는 민간요법이라며 돼지족발을 삶아 주셨다. 당시만 해도 고기는 명절이나 아버지 생신 상에나 올라오는 줄로만 알았는데 비록 족발이긴 하나 물리도록 먹었다.
오동통한 족발을 깨끗한 물로 씻는다. 보기 흉한 털은 창칼로 깨끗이 밀어낸 다음 양은솥단지에 물을 붓고 별도 양념 없이 푹 삶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진 나를 따로 불러 족발을 먹게 하셨다. 쫀득한 족발을 왕소금에 찍어 먹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를 먹어보긴 생전 처음이었다. 사나흘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다음부턴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속에서 받아주질 않았다. 족발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으면 대번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참 우습다. 아니 돼지 족발이 어떻게 무릎의 통증을 낫게 한단 말인가. 허긴 도가니탕이 무릎에 좋다는 말은 들었다. 누가 그런 말을 자꾸 하니까 그러더란다. 벽돌 먹으면 집이 나오느냐고 따졌단다. 내가 하도 무릎 아파하니까 동네 어르신이 그러셨다. “괭이(고양이) 고길 먹으면 무릎에 그렇게 좋다는 디.” 인간이 참 똑똑한 것 같은데 이도 저도 안 되면 터무니없는 말에도 금방 넘어간다. 어쨌거나 서너 달 동안 잊을 만하면 아버진 족발을 사들고 오셨다.
고등학교 이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등교하던 날 친구들이 날 자꾸만 쳐다보았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건가 생각하며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담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며 방학동안 못 본 학우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였다. 나를 쳐다보며 하시는 말씀이 “정일권, 너 뭘 먹었기에 그렇게 키가 컸냐” 하신다. 그때까지 내가 자랐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늘 작은 것이 콤플렉스였는데 날 보고 키가 컸다고 물으시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입학 당시 나의 키는 148cm에 불과했다. 기성 교복이 맞는 것이 없어서 한참을 줄여야 했다. ‘高’字가 선명한 모자를 썼지만 머리통이 작아서 정수리 부분이 늘 불룩 솟아올랐다. 친구들은 볼펜심을 동그랗게 연결해서 모자의 테두리에 끼워 경찰 모자처럼 멋을 부렸지만 내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머리보다 큰 모자는 자꾸만 삐딱하게 돌아갔고 모자 채양이 밑으로 쳐지는 바람에 습관적으로 들어 올려야 했다. 그러니 아무리 애를 써도 고등학생의 티가 나질 않았다.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어떤 중학교 여자애들이 날 보고 수근 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재 좀 봐 재가 고등학생이냐”라고 말하며 키득거렸다. 그런데 날더러 갑자기 컸다고 말들을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무릎이 아팠던 것은 교통사고의 후유증도 있었겠지만 ‘성장 통’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름방학 동안 무려 10cm가량 폭풍성장을 하였으니 관절에 무리가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뒤로 몸은 계속 자라다가 172cm에 딱 멈추었다.
학창 시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녀석들이 지금은 나보다 크지 않다. 요즘 고등학생들의 평균키에 비하면 어림없지만 80년대의 172cm는 결코 작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교통사고를 당하게 하신 것도 먹거리가 부실하던 시절에 아픈 무릎에 족발이 좋다고 질리도록 먹게 하신 것도 다 하나님의 계획이셨다고 난 믿는다. 그때의 일기장에 기록한 기도제목 일 순위가 제발 좀 자라게 해 달라는 것이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난 믿고 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무릎에 특효라며 무슨 약을 달여서 마시게 하셨다. 국물이 새카맣다. 맛은 또 어찌나 쓰고 역한 냄새가 나던지 첫 모금을 삼키기도 전에 구역질을 하니까 지켜보던 아버지께서 코를 잡고 한 번에 쭉 들이키라며 호통을 치셨다. 코를 틀어막으니 좀 나았다. 두 눈 딱 감고 약탕기에 고인 약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지막까지 다 마시고 나는 그만 뒤로 자빠질 뻔하였다. 약탕기 바닥에 지네 열두 마리가 일렬로 누운 채 무명실에 묶여 있었다. 맞다 그거 지네 삶은 물이었다. 그 뒤로 빈 약탕기만 봐도 그때의 일이 떠올라 몸서리쳐진다.
무릎 통증은 그 뒤로도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고 며칠 뒤 몸이 아픈 훈련병은 재검신청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난 얼른 신청서를 작성하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재검 받으러 갔다. 군의관 앞에서 그동안 내가 겪은 무릎통증을 호소하였다. 거기서도 엑스레이 찍고 이것저것 검사를 하였다. 결과는 당일 오후에 나왔다. 군의관의 호명에 들어가니 날 더러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자세를 몇 번 시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치며 하는 소리가 “야 인마 너 그렇게 군 생활하기 싫어 아무 이상 없는데 꾀병 부리지 말고 돌아가”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훈련과정을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훈련소를 떠나 경기도 전곡에 위치한 ‘제6군단 소속 공병대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군 생활은 오전 6시에 일석점호를 받고 구보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왕복 8km 거리를 논스톱으로 달렸다. 말이 구보지 이건 군기 잡는 의식이다. 무릎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증명할 길이 없으니 대놓고 말도 못 하겠고 또한 갓 이등병이 무슨 항변을 할 것이며 무슨 핑계를 댈 것인가 그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를 악물고 뛰었다. 고갯길을 뛰어갈 때는 차라리 개 거품이라도 물고 쓰러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였다. 뒤에서 따라오는 선임들이 뒤뚱대는 나를 향해 욕설과 함께 거친 발길질을 하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질 듯 허우적거리면서도 다시 날아오는 발길질을 얻어맞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렸다.
험난한 군 생활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일등병으로 진급을 하였다. 일요일마다 영외에 있는 민간인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 내겐 유일한 위로 처요 낙이었다. 민간인과 함께 드리는 예배시간 내내 난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였다. ‘하나님 난 왜 이리도 못난 인간인가요. 무릎이 이토록 아픈데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늘 오해를 받고 이것 때문에 괴로움을 언제까지 당하고 있어야 합니까, 제발 저의 아픈 무릎을 고쳐주세요‘ 그렇지만 나의 기도는 언제나 요원한 소리에 그쳤다. 점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갔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구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군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무릎이 아픈데도 왜 고쳐주시지 않는 건지 그동안 믿고 의지해왔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내 속에서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추운 동절기를 막사에서 보내던 어느 날 취침소등이 꺼지고 모두가 곤한 잠에 빠져갈 때 불침번에게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보고하고 속옷차림으로 나왔다.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이라고 해야 오 분 안팎이다. 그 시간을 초과하면 탈영을 했거나 다른 쪽으로 의심을 받는다. 사실 화장실 간다는 건 핑계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어서 막사 마당에 지어놓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자갈을 깔았고 하우스의 양측 면 아래는 약 60cm 정도 비닐을 돌돌 말아 올린 상태다. 하우스 안은 그야말로 냉동고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모포를 널어 햇볕에 소독하거나 빨래를 말리는 장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아무도 없는 하우스 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주어진 시간은 오 분 안팎이다. 그러니 무슨 기도를 제대로 하겠는가. 난 그저 ‘주님’ 이름 한 번 부르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만 흘렸다.
토요일 오전은 정비시간이다. 각자 개인사물을 정리하고 옷을 빨거나 군화를 닦으며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었다. 관물 대를 정리하다 집에서 가져온 약봉지를 끄집어냈다. 그걸 주머니에 숨기고 화장실로 갔다. 그때만 해도 화장실은 푸세 식이었다. 뻥 뚫린 변기구멍 안으로 약을 쏟아 부었다. 그때부터 난 하나님과 씨름에 들어갔다. 하나님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당신이 진짜 살아있는 신이라면 난 지금부터 약을 먹지 않을 것이니 내 아픈 무릎을 고쳐주십시오. 난 오직 당신이 고쳐주실 것만 믿고 약도 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매달리는데도 날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지금 것 하나님으로 믿어왔던 당신은 가짜요 헛것이라 여기고 다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찾지 않겠습니다. 교회와도 영영 담을 쌓을 것이고요’ 선임 병의 지시에 순종하는 중에도 난 속으로 하나님에게 계속적으로 말을 아니 항변하였고 매달렸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달렸다. 취침 시간엔 모포를 얼굴까지 덮어쓰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내 속에선 서운함과 억울함이 가시처럼 돋아났고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한 달 가까이 지속되었다.
다시 일요일이 되자 소대장은 종교행사에 참여하라며 내무반을 향해 소릴 질렀다. 군대에서 종교행사는 말이 종교지 종교를 통한 심신안정을 도모하고 군 생활에 잘 적응하게 하려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개중엔 믿는 윗분들도 없지 않았지만 중대까지 그 여파가 실제적으로 미치지는 못하였다. 골치 아픈 선임 병이나 고참 병 눈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고 싶어서 종교도 없으면서 따라가는 사병의 수가 더 많았다. 암튼 불자는 절로 교인은 교회로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영내에 머물며 자유 시간을 가졌다. 그날도 난 선임을 따라 영외에 있는 민간인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나갔다. 목사님은 지루한 설교를 끝내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고개 숙여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귓속말로 내게 속삭이는 것처럼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 “이제 넌 나았다” 난 눈을 떴다. 모두가 고개 숙인 채 기도에 동참하고 있었다. 난 다시 눈을 감았다. 또다시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 “넌 이제 다 나았다” 그때서야 그 소리가 성령님의 음성이란 걸 직감하였다. 순간 내 얼굴은 화끈거렸다. 온몸이 불처럼 뜨거웠다. 목사님의 기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난 좁은 통로로 나와 몇 걸음을 걸어보았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다. 교회로 오는 동안에도 무릎이 시큰거려 괴로웠는데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남들은 군대 가서 신앙이고 뭐고 다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고 하는데 난 군대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났다. 아니 믿게 되었다. 그때의 경험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내게 있어 하나님은 종교가 아닌 사실이며 실존하는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해서 한 번 성스러운 경험을 했다고 지속적으로 열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 흘러 별일 없이 지내면서 신앙은 도로 밑바닥으로 추락하기 일쑤다. 심지어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있으면 보여 달라 억지춘양을 한다. 그게 인간이다. 죽을 것 같으면 하나님 찾고 살만해지니 자기가 다 이룬 줄 알고 기고만장해한다. 나라고 별수 없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서라도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를 쓴다. 조용한 곳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내가 믿는 하나님을 찾는다. 예수님을 찾는다. 성령님을 찾는다. 성삼위일체 되진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자아실체를 본다. 내 속의 교만함과 어리석음과 정욕에 사로잡힌 원흉을 본다. 다시금 죄악을 쏟아내고 그분 앞에서 기독교인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그럼에도 또 고꾸라진다. 인간이란 죽을 때까지 넘어졌다 일어났다 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성화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 세상 떠나는 것이 인간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