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 소설 / 골계미 / 농민 소설(農民小說) / 다양한 시상 전개 방식 / 딱지본 / 몽유 형식과 조신 설화 / 묘사(描寫) / 문학 교육과 윤리 / 방각본(坊刻本) / 방언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작품 / 브나로드 운동(Vnarod 運動) / 상징의 종류 / 서사시 / 성장 소설 / 소외 / 시적 허용 / 연암 박지원의 문학과 실학사상 / 예술 지상주의 / 이식 문화론과 전통 단절론 / 자전적 소설 / 전형적(典型的) 인물 / 페미니즘 / 한국 소설사와 소설가 구보 / 한국 시가 문학의 특질
● 농민 소설(農民小說)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농촌 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친 소설을 말한다. 그러나 농민 소설은 전원적이고 향토적인 공간으로서의 농촌을 배경으로 하거나 단순히 농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농촌 소설과는 달리, 당대 농촌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이나 농민 의식의 성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따라서 1930년대 농촌 계몽 운동의 방편으로 쓰여진 소설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환으로서 농민 해방을 목적으로 쓰인 소설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황폐화된 농촌의 현실과 농민 문제를 다룬 소설 등이 모두 농민 소설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문단에서는 조명희, 이광수, 심훈, 이기영 등이 주축을 이루어 문예적 차원에서도 농민을 계몽하여야 한다는 논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한국 비평사에서 농민 소설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23년 1월 1일에 “동아일보”에 실린 ‘신년 문단에 바람’이라는 황석우의 글이다. 이 글에서 황석우는 농민 문학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후 1930년대 “동아일보”가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과 함께 농촌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들이 상당수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농민 소설로는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이무영의 ‘제일과 제일장’, 김정한의 ‘사하촌’, 이근영의 ‘고향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문학비평용어사전”
● 브나로드 운동(Vnarod 運動)
브나로드란 원래 ‘민중 속으로’를 뜻하는 러시아 말로, 공동체 마을을 기초로 하여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지식 계층이 민중 계몽을 위해 농촌으로 파고들었을 때 내세운 슬로건이다.
국내의 계몽 운동은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 단체,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1926년 천도교 계열의 조선 농민사에서 펼친 귀농 운동과 1930년대 수원 고등 농림 학교 한국 학생들의 문맹 퇴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농촌 계몽 운동과 함께 한글 보급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1928년 동아일보사가 창간 8주년 행사의 하나로 문맹 퇴치 운동을 펼치려다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좌절되었고, 이듬해에는 조선일보사가 귀향 남녀 학생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동아일보사가 본격적으로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은 고등 보통학교 4, 5학년 학생으로 이루어진 학생 계몽대와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 강연대, 학생 기자대를 주축으로 행해졌다. 이들은 야학을 열고 음악과 연극, 위생 생활을 가르치면서 계몽 운동과 문화 운동을 병행해 나갔다. 이들과는 별도로 1931년에 새로 조직된 조선어 학회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조선어 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중 계몽 운동은 언론계와 문화 단체, 청년 학생들이 힘을 모아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전개하였던 거국적인 민족 자강 운동으로 평가된다.
-“문학비평용어사전”
● 묘사(描寫)
대상의 형상이나 경험, 추상적인 느낌을 직접 보거나 느끼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듯이 표현하는 방법이다. 대상의 형태, 상태, 감촉, 향기, 소리, 맛 등 감각적인 것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묘사의 목적이다.
•설명적 묘사: 대상에 대해 상세하고 객관적인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전체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대상을 관찰한 바를 명시적으로 표현한다.
사리병(높이 6.45cm, 입 지름 1.5cm, 목 지름 1.8cm)은 심록색 파리제로서 가장 큰 것이며 병안에 사리 46과가 들어 있었다. 거의 원에 가까울 정도로 둥근 몸 위에 약간 짧은 목이 달렸고, 입술은 두껍게 외반되었다. 반투명의 전면에는 곳곳에 반점이 나타나 있고 바닥 면은 약간 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리병은 일시 불국사 극락전에서 다른 장엄구와 함께 전시 중 사찰측의 부주의로 파손되어 지금은 원형을 볼 수 없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암시적 묘사: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인상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적인 언어와 다양한 문학적 비유를 통해 대상에 대한 인상과 느낌을 표현한다.
영월대를 찾았다.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이다. 좋은 전망대이다. 이 산을 강으로 두르고 봉으로 둘렀다. 그 봉들은 천연 꽃봉오리다. 현란한 꽃밭 속이다.
-이병기, ‘부소산 영월대에서’에서
•객관적 묘사: 작가가 현장과 사실을 바탕으로 대상의 객관적 상태를 묘사하는 방법이다.
이지러는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주관적 묘사: 대상의 객관적 상태를 바라본 관찰자의 심리적 반응을 중심으로 묘사하는 방법이다.
이놈이 썩 묘하게 생겼습니다. 우선 부룩 송아지 대가리같이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노랗기까지 한 것이 장관이요, 그런 대가리가 어쩌면 그렇게도 큰지, 남의 것 같습니다. 눈은 사팔이어서 얼굴을 모로 돌려야 똑바로 보이고 코는 비가 오면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나이는 스무 살인데 그것은 이 애한테만 세월에 빨리 갔는지 열 살은 에누리 없이 모자랍니다.
-채만식, ‘태평천하’에서
문학 교육과 윤리
문학 작품의 윤리적 가치 문제는 작품을 보는 학습자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문학 교육은 이같이 차이를 보일 수 있는 작품의 윤리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하여 작품을 바르게 이해하고 감상하는 실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의 문제가 학습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창작의 측면에서도 글쓴이는 어떤 윤리적 가치를 우위에 둘 것인가도 고려하여야 한다. 따라서 문학 작품은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윤리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를 얼마나 잘 실현하느냐에 따라 그 문학적 가치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진다.
문학 교육은 문학 작품에 실현된 윤리적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통하여 문학 향유자의 윤리적 실천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 작품은 윤리적 가치를 실천하는 매재(媒材)이며, 궁극적으로는 윤리적 가치의 실천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분석의 맥락에서는 이 같은 문학의 윤리를 그것이 터전을 두고 있는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의 이해는 그 사회와 인간들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문학 작품의 윤리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런 가치를 평가하여 내면화하는 능력은 문학 능력의 핵심적인 내용의 하나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문학을 통하여 윤리적 또는 도덕적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여 학습자 스스로가 도덕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주체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문학 감상이 이루어질 때 윤리 실천으로서의 문학 교육은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며, 문학의 눈으로 윤리 보기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문학 교육은 개인으로서는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자아를 완성하며, 사회적으로는 교양 있는 민주 시민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전인적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인적인 인간상 수립이 문학 교육만의 목표는 아니다. 교육 일반이 지향하는 바이며, 특히 ‘윤리’나 ‘도덕’ 교과는 이 같은 목표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러나 문학 교육이 도덕이나 윤리 교과와 다른 것은, 교술적이거나 설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 작품을 통해 언어로 형상화된 윤리를 배우고, 이를 학습자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 작품 한 편이 사서삼경(四書三經)보다 더 효과적으로 윤리 교육을 수행하기도 한다.
-김대행 외, “문학 교육 원론”(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상징의 종류
상징 가운데는 인간의 보편적 심성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있다. 가령 하늘은 신성함이나 무한대의 것으로, 태양은 광명이나 희망으로, 별은 이상으로, 벽은 차폐나 질곡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생활 체험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상징이며 일부는 문화적 전통에서 유래된 것도 있다. 동양 문화에서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군자(四君子)가 여타의 식물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며, 서양 문화에서는 올리브 가지를 문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된다. 이런 상징들을 우리는 자연적 상징이라고 한다.
한편 국기나 상표, 학교나 단체의 배지 등도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대신한다. 태극기가 대한민국을, K.S. 마크가 정부의 품질 보증을, 학교의 배지가 그 학교의 건학 이념을 각각 표상하는 것이 그 보기가 될 것이다. 이들 상징은 그 제도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뜻을 가진다. 그러나 그와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거나 외면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컨대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는 일본인들에게는 애국심의 상징일지 몰라도 일본의 침략에 시달린 민족에게는 공포와 적대감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상징들을 우리는 제도적 상징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상징 가운데는 그 주지(主旨)가 막연하거나 암시적이지 않고 한 가지 의미만을 대표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빼앗긴 들’은 일제 치하의 가혹한 수탈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앞에서 말한 자연적·제도적 상징 중에서도 ‘비둘기 -평화’, ‘대나무 -절개’처럼 어느 한 가지 의미로 고착되어 버린 상징들이 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알레고리컬 상징이라고 부른다.
이상에서 열거한 자연적·제도적·알레고리컬 상징들은 시에 쓰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창조적 능력이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 때문에 그리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이런 상징들을 한데 묶어서 관습적 상징(conventional symbol)이라고도 한다.
이에 비하여 실제로 시에 등장하는 상징은 시인 자신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상징을 개인적 상징, 또는 관습적 상징에 대하여 창조적 상징이라고 한다. 그것은 관습적 상징처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뜻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개성이나 창조적 능력에 의하여 생성된 상징이다.
-정한모·김용직, “문학 개설”(박영사, 1990)
● 시적 허용
작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수사적 장치나 방책이 경험적 사실에 대한 충실보다는 일탈을 드러내는 경우는 허다하다. 백발의 길이가 3천 길에 이른다는 이백(李白)의 명구를 놓고 사실과의 불일치를 시비할 사람은 없다.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한시들이 대체로 이러한 과장이나 허풍으로 해서 사람의 입을 타 온 것이다. (중략)
서양에서는 그래서 ‘시적 허용’이라는 일종의 창조적 자유가 시인에게 주어졌다. 산문에서는 보통 용인되지 않는 문법과 말 순서의 무시, 옛말과 새말의 자유로운 사용이 허용된 것이다. ‘시적 허용’은 시어와 구문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고 보다 넓게 역사적·지리적 사실에도 적용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서는 실제 시저 시대에 없었던 괘종시계가 시간을 알리고 있으며, ‘겨울 이야기’에서는 대륙 한가운데 있는 보헤미아 지방에 바닷가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정한 효과를 성공적으로 도출하고 있다면 어법상의 규범 무시나 사실과의 사소한 불일치는 모두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파리 대왕’ 속의 근시 안경도 넓은 의미의 시적 허용의 범주로 집어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작가 자신이 몰라서 그랬다기보다는 시적 허용에 의지하여 근시 안경에 돋보기의 기능을 부여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근대 자연주의의 문학 경험이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 소설 속에서 명백한 불일치를 허용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운문의 경우 음보나 각운을 맞추기 위해서 부득이 사실로부터 일탈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어떤 18세기 영국인은 시인들이 성서에 나오는 재료와 비기독교적인 재료를 혼동해서 쓰는 것을 불평하고 있다. “2음절이 필요할 때는 사탄이 나오고 4음절이 필요하면 티시퍼니가 나온다.” 말할 것도 없이 마귀를 가리키는 사탄은 신에게 항거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은 타락한 천사이며 성서적 세계 구상의 일부이다. 이에 반해서 티시퍼니는 머리에 뱀이 있고 날개가 있는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여신인 처녀 3형제 중의 하나이다. 그녀가 범죄자들을 추적하여 그들을 미치게 하고 명부에서도 그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티시퍼니와 사탄을 음절의 요구에 따라 대체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관습을 종교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허용이라는 관습은 시인의 악의 없는 거짓말에 대해서 부여한 일종의 면책 특권이다. 서양 중세 궁정의 어릿광대가 권력자를 조롱함에 있어서 면책 특권을 누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권력자에 대한 비판이 기성 질서와 체제 속에 수용되었듯이 시적 허용은 일정한 효과 창출을 위해서 사실 그리고 넓은 의미의 진실로부터의 일탈을 작품 속에 수용했던 것이다. 시인을 면허 받은 거짓말쟁이로 파악하면 플라톤이 그랬듯이 굳이 국가로 들어오는 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게 될 것이다. 근대 작가들이 운문을 버리고 산문을 선택하였을 때 그것은 시적 허용과 예외 규정을 필요로 했던 운문의 형식상의 요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유종호, “사회 역사적 상상력”(민음사, 1995)
연암 박지원의 문학과 실학사상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서 성리학의 인성론·예론 등 공리공론을 탈피하여 주로 권도에서 소외된 재야의 선각적 선비들 속에서 부국 안민의 ‘시무책(時務策)’적인 실학이 대두되었다.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시무책은 경제 개혁적 정책에 주안점을 두어 서유럽 자연 과학의 수용, ‘유민 익국(裕民益國)’으로 대변되는 박지원의 농업, 수공업, 상업, 무역 등의 산업화 진흥 등 그 사상운동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사회 변혁의 구조적 전환기에는 기성 질서에 비판을 가하는 유토피아적 미래상이 제시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과 박지원의 ‘공도(空島)’ 개척이다.
연암의 실학사상에서 부국 안민의 개혁안은 몰락 양반 대신 신흥 지배 계층으로 4민 중 사(士) 이외의 농·공·상, 특히 상공업 계층이 주도하는 호민의 새 시대를 예감한 상공업 사회 대망을 담고 있다. 연암의 ‘허생전’은 양반에 대한 해학적 비판과 아울러 기왕에 천시되던 상업과 시장·상인에 대한 발상 전환을 감행하고 있다. 그의 실학에서 ‘이용후생’의 ‘이용(利用)’은 수공업과 ‘상통(商通)’하여 ‘민’의 ‘용(用)’을 이롭게 한다는 정책으로, 거기서는 상공업의 자유로움이 허용되고 진흥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시민 사회의 미래상이 제시되어 있다.
우선, 연암의 ‘허생전’에서 몰락한 양반인 허생은 노동 천시와 금전 천시라는 양반적 에토스를 파격적으로 타파하고 호민 변 씨한테서 장사 밑천으로 만금을 차용하여 장사를 시작한다. 당시 상업의 요지인 안성에서 잔치나 제사용 과일을 모두 매점 매석하여 10배의 이득을 얻고, 다시 제주도로 가서 말총을 몽땅 매점하여 망건 값을 10배로 올려놓고 매석으로 폭리를 취한다. 이 소설에서 허생은 자기처럼 매점 매석의 폭리 행위를 하는 자가 많이 생기면 나라의 시장 질서가 망가진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연암은 허생의 대담한 상행위를 과시하여 시장적 사고를 가진 새로운 사회 계층의 대두를 예시하였다.
왕조 쇠망기의 백성들이 ‘홍길동전’에 나오는 도둑 떼였고, 연암의 ‘허생전’ 속에서도 처자 가산 없는 도둑 떼로 그려지고 있다. 이미 양반 사회의 경제 체제는 몰락 양반을 비롯해 양민들을 도둑 떼로 만드는 단계, 현대적 표현으로 하자면, ‘봉건제 해체기의 대량 실업자’가 만연되는 단계였으며,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서 직업 확대 창출이 실학자들의 주된 시무책이었다. 그 해결은 상공업의 진흥을 통해 도둑 떼가 된 백성들에게 세속적 직업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새 직장을 만들어 내는 신흥 사회 계층인 기업의 생성은 이미 4민 질서를 와해시키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민 질서가 해체된 다음의 주역은 신흥 상공업 발흥에서 생성되는 시민이다.
‘허생전’의 ‘공도’ 개척의 유토피아도 도둑 떼가 된 양민들에게 생업을 마련해 주는 실업 대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공도’ 개척에서는 아직 농본주의에 머물러 있되, 그 무인도 농업 개간을 통해 7년 동안 먹을 식량을 비축하고 나머지를 일본 나가사키로 수출하는 해외 무역의 본보기는 명백히 상업과 무역을 통한 자본주의적 부강의 길을 선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허생전’의 주제인 ‘유민 익국’의 부강 국가 건설 비전은 먼저 민생을 부하게 한 연후에 문자를 만들고 의관을 새롭게 재정하겠다는 경제 개발 우선의 ‘선부론(先富論)’이 눈에 띠는데,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보다 상공업의 산업을 앞세워야 한다는 경제 개혁 위주의 발상 전환이라는 철학이 전제되어 있다. 연암이 이 소설에서 ‘공도’ 유토피아의 보호를 위해 ‘글을 아는 자들’을 떼내어 ‘이 섬의 화근을 없애야 한다.’는 ‘양반 추방론’을 개진한 것은, 조선 왕조의 사대부 지배에 대한 그의 비판이 얼마나 날카로웠는가를 실감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연암은 허생의 상행위와 선부론을 통해 근대 자유 기업과 경제의 신흥 지도층인 기업가상의 모형을 그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일철, ‘자유주의와 한국 사회의 전통 사상’, “자유주의와 한국 사회”(한국경제연구원, 2001)
● 예술 지상주의 :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의 예술 지상주의
보들레르가 사용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 지상주의적인 관점은 세계를 사회적·윤리적인 시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심미적인 시각으로 읽는 것으로 이해된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예술 지상주의는 흔히 예술의 사회적 매개 기능을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예술의 자족성만을 추구하였다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술 지상주의의 입장은 18세기 말엽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이론적 선구자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내세운 ‘세계는 예술이어야만 한다.’는 요청에서, 혹은 이후 ‘세계 예술’을 요청한 폴 발레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요청을 단순히 예술의 자족성에 대한 요청으로 독서하는 입장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세계 및 삶의 예술화(심미화) 현상은, 사회학의 체계 이론적 시각을 빌려서 관찰할 경우, 자족적인 예술이 아니라 자율적인 예술에 대한 요청인 것이다. 그 까닭은 각각의 부분 체계가 자신의 코드로 주변 환경들을 보편적으로 읽어 내려는 과정은 다름 아닌 각 체계의 자율적 생산 과정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 낭만주의 및 세기말까지의 모든 예술에 적용될 수 있다. 예술의 자율성이란 “상상력이 모든 창조물을 부수고 (……)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새로운 것의 센세이션을 창출한다.”는 예술적 행위의 고유성을 뜻한다.
여기서 문학의 자율성은 무절제한 이탈이 아니며, 또한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무비판적이고도 체제 옹호적인 예술 행위의 조장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 예술이 자신의 독특한 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현상은 사회적(특히 경제적) 현상 -물화 현상이나 물신 숭배 -에 의해 문학이 함몰되는 과정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며, 스스로 창출해 낸 ‘새로운 문학적 삶과 세계’는 결코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적 병폐가 사라지고 새로운 ‘유토피아적’ 세계가 현현하는 것에 대한 암시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의 예술 지상주의는 현실 도피적인 예술 같은 낡은 선입견으로 더 이상 파악될 수 없으며, 오히려 ‘목적 합리성’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시민 사회를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만 한다. 보러는 다음과 같이 예술 지상주의적 미학이 지닌 전복성을 간결하게 언급해 주고 있다. “총체적인 합리성에 대항하여 아름다움을 구원하였고 아름다움의 반체제적인 기능을 인정하였던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시도 이후 우리는 예술 지상주의를 데카당스라고 받아들이는 고정 관념들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삶의 세계로부터 이탈된 듯이 보이는 예술 지상주의의 예술적인 삶은 기존 생활 세계에 대한 비판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최문규, “탈 현대성과 문학의 이해”(민음사, 1996)
● 전형적(典型的) 인물 -전형(典型)과 개인(個人)
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 읽고 흥미를 돋우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재미나는 인간을 묘사해야 한다. 이때 성격의 어느 한 특징이 몹시 강조되어 그 특성이 성격을 지배할 때 전형이 창조된다. 수전노, 상사병에 걸린 남자, 고통 받는 여자, 모사꾼, 사기꾼, 방랑자 등 수많은 전형은 보편적이다. 작가에 의해 창조된 전형은 보편적인 까닭에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또한 인간 경험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전형은 비극에서보다 희극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격의 경직화 그 자체가 유머러스하기 때문이다. (중략)
희극이나 관념 소설에서 나아가 보다 발달된 전형으로 우리는 시대에 따른 전형을 들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전형은 인간의 특정한 기질만을 강조하나,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개별적 전형은 현재와 미래, 현실과 이상 사이를 이어 준다. 따라서 전형은 공통된 인간 체험의 결과로서 나타난 보편적 전형과, 시대와 사회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난 개별적 전형으로 구분되는데, 이 둘은 서로 배척하기도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중략)
전형의 강조는 리얼리즘 소설에서 특히 중시되었는데, 이때의 전형이란 사회적 인간으로 대표된다. 리얼리즘 문학 작품에서의 성격은 영웅, 귀족, 덕인이 못되고 철저히 복합적이어서, 그는 사회 속에 살며 그의 운명은 사회에 의해 거의 결정된다. 리얼리즘은 인간의 본성을 신을 떠나서 발견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것은 영웅주의보다는 일상적인 것이 보다 진실하다 — 적어도 보다 대표적인 까닭에 진실하다 — 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때 인물들은 선하거나 악하기보다는 도덕적으로 복합되어 있다. 가장 확고한 현실은 관념이나 상상이 아닌 일상적인 현실이다. 따라서 진실이란 추한 자, 반역자, 하층민의 생활에서 발견된다. 이와 같이 소설이나 극에서 문예 사조에 따른 전형의 차이는 사조에 내재된 전승된 관습, 즉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따른다.
작품에서 성격의 전형성만을 강조할 때, 그 성격은 석화되어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소설에 나타난 성격은 피와 살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이어서 보편적·개별적 전형을 벗어나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실존하는 인물로서의 개인이라 할 수 있다. ‘햄릿’은 보복극의 전형적인 주인공들처럼 복수심이 가득 찬 인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는 선과 악, 진실과 허위,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탐구한다. 사실상 ‘햄릿’ 자신의 크나큰 고민은 그를 전형으로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의 감정이나 문제에 모든 관심을 쏟는 전형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실존적인 개인 경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형성이 성격을 관념적으로 구속하게 되면 소설에는 전형의 가면을 쓴 죽은 인물만이 있게 된다. 그래서 인물은 전형 이전에 개인으로 우선하여 존재해야 한다. 훌륭한 소설은 전형적이면서도 개인적 인물, 즉 그 시대와 사회를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개인으로서 독창성과 특이성을 지닌 인물을 다룬다. 이와 같이 전형과 개인의 이중성은 역설과 마찬가지로 서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치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서의 인물은 개인의 독자적인 특성뿐 아니라 인간의 보편성을 드러낸다. 즉 개성은 작품 속에서 상징적 속성에 의하여 보편화된다.
-정한모·김용직, “문학 개설” (박영사, 1990)
한국 소설사와 소설가 구보
우리의 근대 소설사에는 세 명의 구보가 등장한다. 1934년에 스물여섯이었던 박태원의 구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걸쳐 삼십 대 후반을 보낸 최인훈의 구보, 1990년대 초에 이십 대 후반이었던 주인석의 구보가 그들이다. 세 작가는 각기 작품의 주인공으로 소설가 구보를 내세워 자신들의 시대를 소설 속에 담고자 시도하였는데,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략)
박태원의 구보는 대학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자신이 관찰한 것을 기록하여 그것을 소설이라 내세웠고, 주인석의 구보는 소설가란 실패할 운명을 타고났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술을 위해 바쳐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박태원의 구보가 그의 눈에 들어온 식민지적 근대 도시 경성의 도시적 풍물을 그려 내는 데 집중한 나머지 작가의 시대적 책임감을 소홀히 하였던 데 반해, 1990년대 주인석의 구보는 비록 사잇길로 접어든 역사적 시간이었을지라도 자신이 살아온 시대에 대해 소설가로서의 책임감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중략)
한편 세 명의 구보는 모두가 소설이나 소설가의 존재에 대해서 의미 탐색을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모두 소설가이며, 제목도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인 만큼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첫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1970년대의 구보는 먼저 소설이란 그것이 소설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적으로 객체화되는 물건이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와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이 뒤바뀐다는 사정까지도 드러내야 한다는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 편의 소설 속에 그것을 생산한 소설 노동자의 고통까지도 들어 있어야 하며, 나아가 그 속에서 소설가의 전부가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소설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써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구보는 삶의 도식화에 대해서 끊임없는 해독제와 보완 원리로서 작용해야 하며, 일체의 관료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창작되어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끊임없는 우상 파괴로 요약되기도 하는 이런 문학관은 비평가 이어령의 선언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 전후 세대의 문학관과 흡사하다. 물론 등단 시기로만 따지자면 최인훈 역시 전후 세대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구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런 세대적 감각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소설이 현실의 뒤에 작용하는 어떤 힘을 찾아내어 그것을 형상화하는 리얼리즘적 성과를 이룩하는 것보다 현실을 이끌어 가는 거대한 힘이 던지는 도식에 대해 끊임없이 대항해야만 한다는 점이 더욱 중요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힘을 갖는 문학(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 문학자(예술가)는 어떠해야 하는가. 구보가 그 예로 들고 있는 사람은 샤갈과 이중섭이다. 구보에게 있어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었으며, 외부의 어떠한 혼란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얼빠지지 않고 자신들의 시심을 지킨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모름지기 모든 것을 그의 생애라는 실존을 통해 드러낸 위대한 예술가들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1990년대의 구보는 1970년대의 구보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자신의 삶 자체를 통해 위대한 예술을 창조한 예술가는 자신들의 시심을 지켰다고 했거니와, 위대한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물욕이 아니라 시심으로 모든 세상사를 바라보는 일이다. 모든 물건은 그 자체가 처음부터 예술과 비예술의 재료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습상 그렇게 규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을 시심으로써 대하는 것, 이것이 구보가 생각하는 위대한 예술의 기본 조건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1970년대의 구보에게 있어 소설이란 소설 노동자가 시심을 가지고서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만드는, 자신의 고통까지를 담는 그런 물건이다. 이럴 때 소설은 삶의 도식화를 해독하는 새로운 도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외곤, “한국 현대 소설 탐구”(역락, 2002)
방각본(坊刻本)
방각본은 조선 시대에 민간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간행한 서적이다. 이를 달리 방간본, 목판본, 판본, 판각본이라고도 불린다. 방각본이란 본래 중국의 남송 시대에 영리를 위해 서점에서 출판한 사각본(私刻本)을 일컫던 말이다. 우리나라 방각본이 처음 출간된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로 추정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간행 기록이 분명한 최초의 방각본은 1576년(선조 9년)에 간행된 “고사촬요”이다. 이 서적은 요즘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책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경판 주장록
(Francis Gummere)는 “시론 요람”에서 “서사시는 외부 세계에 속하고, 그 기능은 이야기에 있다. 그것은 아킬레스의 노여움이나 오디세이의 표류, 베어울프의 공포를 노래한다. 그것은 다만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할 뿐이다. 서정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다. 그것은 사건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취급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사시의 일반적인 특색으로서 객관성과 스토리와 서술적인 표현 형식과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란 점과 운문으로 되었다는 이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서사시는 과거적인 스토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운문시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방각본 소설의 등장은 소설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소설을 대량으로 인쇄해 판매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설이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소설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요구가 상당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방각본 소설은 독자의 기호에 영합하는 오락적인 소설의 출판을 가속화했다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일부 계층에 한정되어 읽히던 소설을 서민층까지 널리 즐길 수 있도록 그 저변을 확대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딱지본
대개 그 책들의 표지가 울긋불긋하게 딱지처럼 인쇄되어 있는 데에서 그 별명이 유래되었다. 딱지본은 수백 종이 간행되었는데, 딱지본이라고 하면 대개 구활자본 고전 소설과 신소설, 이 두 문학의 저작물을 뜻한다. 실제 세창서관에서 발행한 “명사십리”의 겉표지 제목 위에는 작은 글씨로 ‘古代小說’이라고 써 놓고, 함께 세창서관에서 발행한 “방화수유정”의 겉표지 제목 위에는 역시 작은 글씨로 ‘新小說’이라고 구분해 놓았으며, 표지 그림 역시 소설의 제목을 금방 떠올릴 수 있도록 작품의 내용과 부합하게 배경과 인물을 적당히 그려 넣고 있다. 딱지본은 위와 같이 신·구소설들을 함께 포괄하고 있는 출판물이며, 그 딱지본 출간이 가장 번성하던 때를 1915년경부터 1926년경까지로 보면 불과 10년 내외 동안이었다. 딱지본은 그 후로 1950년대까지 전국 각지의 시장을 통하여 공급된 바 있다.
● 서사시
서사시(epic poetry)는 객관시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해 가는 시를 일컫는다. 서사시를 뜻하는 epic은 그리스어 epos에서 나왔는데, 이는 ‘이야기’ 혹은 ‘말’을 뜻한다. 그러니까 서사시는 외형적인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한 시라는 점에서 그 특색이 있다. 물론 서사시의 첫 단계는 호머(Homer)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에서 보듯이, 민족적 영웅의 행위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을 서술한 웅대한 구성의 산문시를 뜻했지만, 후대에 오면 신화적인 영웅호걸이나 집단적인 운명의 성쇠를 그리지 않아도 객관적인 사건을 서술한 장시이면 서사시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사시는 흔히 이야기시(narrative poetry)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이야기를 말하는 시라는 뜻으로 에픽과 발라드(ballad)가 그것의 기본적인 유형이다.
굼마(Francis Gummere)는 “시론 요람”에서 “서사시는 외부 세계에 속하고, 그 기능은 이야기에 있다. 그것은 아킬레스의 노여움이나 오디세이의 표류, 베어울프의 공포를 노래한다. 그것은 다만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할 뿐이다. 서정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다. 그것은 사건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취급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사시의 일반적인 특색으로서 객관성과 스토리와 서술적인 표현 형식과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란 점과 운문으로 되었다는 이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서사시는 과거적인 스토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운문시라고 정의할 수 있다.
끝으로, 서사시의 종류로서는 허드슨(Hudson)이 분류한 성장의 서사시와 예술의 서사시가 있으며, 몰톤(Moulton)이 말한 인생의 서사시를 여기에 추가할 수 있다.
(가) 성장의 서사시(epic of growth): 이 시는 고대 및 중세의 서사시로서, 민족적 서사시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호걸이나 집단적 운명을 그린 것이며, 개인의 소작이라기보다 구전되는 중에 형성된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영국의 ‘베어울프’,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 예술의 서사시(epic of art): 이 시는 르네상스 때의 서사시로서, 작가가 있어 예술적으로 창작하였고, 내용도 인간적인 면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단테의 ‘신곡’, 타소의 ‘예루살렘의 해방’, 밀턴의 ‘실락원’과 ‘복락원’ 등이 이에 속한다.
(다) 인생의 서사시(epic of human): 이 시는 근대 소설을 뜻하기 때문에 여기 말하는 시 속에 넣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근대 문학에 있어서도 서사시는 그 명맥이 계속되어 오고 있어, 롱펠로의 ‘에반젤린’이라든지 테니슨의 ‘이노크 어덴’이라든지는 곧 근대의 서사시이다. 발라드라는 장르도 단편 소설처럼 과거 사실을 그리 길지 않게 서술해 가는 서사시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는 서사시의 전통이 거의 없다. 장덕순이 “국문학 통론”에서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영웅 서사시라고 보기도 하고, ‘용비어천가’를 서사시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근대 문학 이후에도 이 방면의 발전은 거의 없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 김용호의 ‘남해찬가’, 신동엽의 ‘금강’ 등으로 겨우 역사적 사실을 노래하는 장시인 이 서사시의 존재를 알릴 정도라 하겠다. 서사시 시대가 지나고 지금은 서정시 중심의 시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 방면의 수확이 없지만, 앞으로는 거시적 장시인 서사시의 개척도 있어야 할 것이다.
- 구인환·구창환, “문학 개론”(삼지원, 1987)
● 페미니즘
- 인식론적 근본 학문으로서의 페미니즘 미학
페미니즘 인식론에 기초하여 새로운 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페미니즘 미학은 전통 미학의 남성 중심성을 거부한다. 근대 미학에서 말하는 객관성·보편성·합리성·리얼리티의 개념 등은 여성 젠더가 배제된 젠더 불균형의 개념이었다. 근대의 출발로 운위되는 데카르트의 이성 개념이 중립적인 객관성으로 설정되는 사유의 남성화를 포함하고 있듯이, 객관성·보편성·합리성 개념은 특정한 위치에서 보는 부분적 시각일 뿐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특권을 지닌, 여성의 ‘관점’을 하나의 ‘입장’으로 수용할 때 인식론적으로 새로운 ‘방법’이 가능하다.
페미니즘 미학은 미학의 기본 개념들에서 배제되어 있는 ‘여성적’인 것을 복귀시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적 경험, 여성적 사고를 복귀시켜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그와 동시에 작용하는 개념을 구성하는 동시에, 기존의 남성 / 여성 대립 구도에 은유되어 있던 합리성 / 비합리성, 이성 / 감정, 주체 / 객체 등의 상징적 이분법이라는 위계적 이항 대립 구도를 해체하고 확장한다. ‘일반화된 타자’였던 여성에서 벗어나 일반적 타자이면서도 계급·민족·인종 등이 중층적으로 개입된 ‘구체적 타자’의 구체적 경험을 복원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페미니즘 인식론의 과제는 학문에서의 남성 중심성 및 배제의 형식을 연구하고 담론 형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페미니즘 미학은 전통 미학의 전 영역과의 대결이지만, 소위 ‘보편’ 미학으로 불리는 근대 미학의 단순한 이항 대립은 아니다. 일자와 타자라는 이분법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여성적 미학의 통속적 분리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보편성·객관성·리얼리티 등의 개념을 새롭게 정초하여 근대 미학의 남성 중심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새로운 미학은 여성적 경험에 바탕한 차이를 온당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천명하는 점에서는 여성 중심주의 미학과 일치하지만, 차이를 특권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새로운 보편성의 범주로 포괄함으로써 미학적 범주의 재구성에 입각한 새로운 ‘보편’ 미학의 가능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다. 따라서 새로운 페미니즘 미학은 여성 중심적 미학이 아니라 여성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미학이다. 페미니즘 미학과 페미니즘 문학 연구 방법론의 과제는 차이를 규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미학의 젠더, 방법의 젠더를 규명하는 것이며, 미학과 문학이 어떤 개념과 방법론을 통해 남성적 지배 권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구성되고 담론화되었는지를 고찰한다.
최근 한계에 부딪혀 답보 상태에 놓인 페미니즘 문학 연구는 미학 이론 및 문학 연구 방법론의 새로운 틀의 정립을 통해서만 그 돌파가 가능하다. 현재 페미니즘 연구는 남성 중심주의 비판 및 해방이라는 애초의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미시적 연구에 머물거나 사료적 해석에 그쳐 제 몫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차이’ 개념은 보편성·객관성·특수성 등의 개념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반영과 젠더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리얼리티의 확보 여부와 전형, 전망의 문제,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의 기준 및 지배 정전의 문제, 문학의 가치 등을 제대로 논의하려면 그간의 남성 중심주의적 이론들을 극복하는 새로운 미학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가능하다.
- 김복순, ‘페미니즘 미학의 기본 개념과 방법’,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한국여성문학학회 편, 소명출판, 2008)
● 다양한 시상 전개 방식
1. 기승전결: ‘시상의 제시 - 시상의 발전 - 시상의 전환 - 시상의 마무리’의 순서로 전개하는 방식
이육사, ‘절정’ / 서정주, ‘국화 옆에서’
2. 수미 상관: 시의 처음과 끝을 동일하거나 유사한 시구로 배치하는 방식
조지훈, ‘승무’ / 김광균, ‘와사등’
3. 선경 후정: 전반부에 대상의 외면을 묘사한 후 후반부에 화자의 정서를 서술하는 방식
조지훈, ‘봉황수’ / 이호우, ‘달밤’
4. 시간적 흐름에 따른 전개
① 순행적(추보식): 사건이 일어난 시간 순서대로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
이육사, ‘광야’ / 신석정, ‘꽃덤불’
② 역순행적: 과거를 회상하거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
윤동주, ‘서시’ / 백석 ‘여승’
5. 공간의 이동에 따른 전개: 공간적 배경(장면)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
김종길, ‘성탄제’ / 이수복, ‘봄비’
6. 시선의 이동에 따른 전개: 아래에서 위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부분에서 전체 등 화자의 시선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
조지훈, ‘고풍 의상’ / 박목월, ‘청노루’
7. 어조의 전환에 따른 시상 전개
한용운, ‘임의 침묵’ / 윤동주, ‘서시’
● 방언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작품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가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라카노 뭐라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 박목월, ‘이별가’에서
➜ 다소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끈끈한 정이 느껴지는 경상도 사투리를 통해 이별의 정한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에서
➜ 전라도 사투리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계절의 변화에 설레는 인물의 심리를 강조하고, 음악적 효과를 높이고 토속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 골계미
골계미, 즉 희극미는 유머를 이루는 미적 가치에 해당한다. 골계는 일반적으로 비극미(비장)의 대립 개념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숭고의 대립 개념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고, 비장과의 대립상을 부정할 뿐 아니라 골계를 그것 자체로서는 미적이지 않은 것이라 하여 미의 범주라고는 보지 않는 입장도 있다. 립스에 의하면 골계라는 것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의외로 왜소한 것이며 그것에 의해서 부여되는 쾌감은 우리들의 내적 행위의 성취 방식에 근거하는 감정이자 논리적 가치에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적 쾌감은 아니라고 한다. 립스에게 있어서는 이 골계가 미적 가치를 획득한 미의 형태가 유머(humour)이므로 그것은 숭고 또는 적극적 가치가 있는 것의 골계적 부정에 의한 미이다.
<골계미와 관련된 용어>
‘유머’는 해학이나 풍자라는 문학적인 용어로 번역되어 쓰이며, 웃음을 목적으로 하는 남을 웃기는 말을 통칭한다. ‘골계’는 익살과 같은 의미인 남을 웃기기 위하여 일부러 하는 재미있고 우스운 말이나 짓으로, 풍자적인 성격이나 유머적인 성격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의된다. ‘해학’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드러냄에 있어 웃음을 자아내는 표현을 통해 극적 환상에의 과도한 몰입과 긴장을 제한하는 정서적 안전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풍자’는 잘못이나 모순 등을 빗대어 비웃으면서 폭로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반어’는 긍정과 부정의 상호 침투적인 성격과 야유적 기분이 결합한 일종의 기지적 표현에 의해서 숨겨진 저의를 암시하여 보여 주는 것이지만, 풍자만큼 예리한 공격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유머와 같은 우월적 애타성이 결여되어 있다.
● 가족사 소설
가족사 소설은 한 가족의 흥망성쇠의 내력을 다룬 소설을 말한다. 한 가족의 상황이나 운명을 역사적 시간의 지속과 변화의 차원에 놓고 그린다는 점에서 가족사 소설은 단순히 가족 구성원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취급한 소설류와는 구별된다.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과 대립이 가족사 소설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족사 소설은 가족 내의 개인보다는 가족이라는 사회 집단의 동태를 중시하며, 더욱이 누대에 걸친 가족의 역사를 추적한다는 변별적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가족사 소설은 기본적으로 연대기 소설의 형태를 취한다.
한국의 경우, 가족사 소설은 1930년대에 이르러 정립을 보았다. 가족사 연대기라는 형식 자체는 조선 시대에 이미 성행했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재현하는 문학 형식으로 향상된 것은 염상섭의 ‘삼대’(1931), 채만식의 ‘태평천하’(1938), 김남천의 ‘대하’(1939) 등의 작품을 통해서이다. 염상섭의 작품은 3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서 세대 간의 대립과 그것의 배후에 놓여 있는 이념적 갈등과 타락한 욕망의 문제를 조명하면서 식민지 한국 사회의 한 축도를 제시하고 있다. 최근의 가족사 소설로서는 박경리의 ‘토지’가 단연 특출한 작품이다. 평사리 양반 지주 최씨 일가의 삶을 4대에 걸쳐 서술하고 있는 ‘토지’는 한말 이후의 고난과 투쟁의 역사 속에 부침하는 무수한 유형의 인물들의 삶을 묘사하는 가운데 근대 한국의 장대하고 입체적인 연대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 한용환, “소설학 사전”(문예출판사, 1999
● 이식 문화론과 전통 단절론
(1) 이식 문화론
임화에 의해 주창된 ‘이식 문화론’의 핵심 내용은 우리의 신문학이 서구적인 문학 장르를 차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 문학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문학사는 이식 문화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식 문화론이란 것이 우리의 신문학의 수용 과정이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급격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린 의견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차용이나 이식 문화 등의 어휘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서구의 제도를 탁월하고 높은 단계의 것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그것의 차용은 아무런 논리적 감정적 비난을 받지 않고 오히려 조장됐다. 더구나 그것은 일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는 미명 아래 민족주의라고까지 불리었다. 이러한 이식 문화론은 전통의 단절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2) 전통 단절론
개화기 후의 한국 문학은 개화기 이전의 한국 문학과 확연히 구분된다. 그 이전의 문학은 근대정신이 없는 과거의 문학이며, 그 이후의 문학은 시민 정신의 구현에 의한 서구 장르를 차용한 새로운 문학이다. 그 둘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전통 단절론’의 내용이다.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듯한 전통 단절론은 1950년대에 이식 문화의 연장선에서 새롭게 제기되었다.
● 한국 시가 문학의 특질
한국 시가 문학의 특질은 율격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의 시가는 정형시라 해도 한 음보를 이루는 음절수가 변할 수 있고, 음보 형성에 모음의 고저, 장단, 강약 같은 것들이 고려되지 않으며, 운(韻)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 고저를 갖춘 한시, 장단을 갖춘 그리스 어나 라틴 어 시, 강약을 갖춘 영어나 독일 시에 비하면 단조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런 요건을 갖추지 않은 단순 율격을 사용하는 프랑스나 일본의 시와는 다르게, 음절수가 가변적이기 때문에 변화의 여유를 누린다.
가령 대표적인 정형시 시조를 보면, 네 토막(음보)씩 세 줄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 줄 첫 토막은 예사 토막보다 짧고, 둘째 토막은 예사 토막보다 길어야 한다는 규칙만 있다. 각 토막이 몇 음절로 이루어지는가는 작품에 따라 달라, 작품마다 특이한 율격을 갖출 수 있는 진폭이 인정된다. 다른 여러 시형에서도 공통된 규칙은 최소한으로 한정하고, 변이의 영역을 보장하며, 그 범위를 확대해서 자유시에 근접하는 시형이 일찍부터 다양하게 나타났다. 시조에서 요구하는 그 정도의 제약을 불편하게 여겨, 한 줄을 이루는 토막 수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사설시조를 만들어 냈다. 판소리에서는 작품 전체에 일관된 율격이 없고, 여러 가지 율격과 그 변이형들을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활용했다.
근대시는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양의 전례에 따라 온통 자유시가 된 것 같지만, 전통적인 율격을 변형시켜 계승한 작품이 적지 않다. 일본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율격의 규칙이 단조롭고 변형을 할 여지가 없으므로, 질서를 파괴하자 바로 무질서가 나타났던 것과 다르게, 한국의 시가 율격에는 원래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고 있었으므로, 무질서의 측면을 두드러지게 하는 자유시를 만들어 내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도 글자 수를 헤아리는 율격론이 일본에서 수입되어, 혼선을 빚어냈다. 일본과 같은 음수율, 영시에서와 같은 강약률을 적용해서 한국 시가의 율격을 잘못 헤아리다가 한국 특유의 음보율을 발견한 것이 최근의 일이다.
- 조동일, ‘총설’, “한국문학강의”(조동일 외 공저, 길벗, 1994)
● 몽유 형식과 조신 설화
조신 이야기는 일연의 작의(作意)가 반영된 것으로 판단되는 세련된 구성을 지니고 있기에 소설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구성의 특성은 불교 사상을 담는 몽자형 이야기라는 점에 있다. 구성은 현실에서 꿈으로, 다시 꿈에서 현실로 설정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현실과 꿈으로의 전환인 입몽(入夢), 각몽(覺夢)이라는 일반 몽유 형태와 함께 비평적 개입 부분이 공존하며, 설화적 서술체와의 구분을 보여 주는 직설적 언급인 찬시의 서정성으로 그 의미를 강화시켜 준다. 또, 몽유를 빌린 서사에서는 시간의 층위, 조신의 정신세계, 사건 지속의 시간이 병렬적으로 처리되고 있다. 조신의 정신세계는 미망(迷妄)으로서의 고(苦)에서, 낙(樂)과 고(苦)의 세계를 거쳐 진각(眞覺)으로서의 낙(樂)으로 진행된다.
이처럼 시간 층위에서는 현실에서 꿈으로 이어지고, 다시 꿈에서 현실로 환원되는 서사적 진행을 보여 준다. 그런데 조신의 정신세계의 축으로 범상한 의식인 미망(迷妄)의 세계에서 여자에게 이끌려 그녀와의 혼인을 관음보살에게 간구한 후,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원망하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꿈에서는 그녀와의 결합이 지닌 현세적인 세계관과 초월적인 세계관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내용을 보여 준다. 첫 번째 꿈과 두 번째 꿈을 겪으면서 초월적 세계관으로 자신의 삶을 조정하게 된다. 즉, 첫 번째 꿈은 만난 후의 삶을 보여 주는 ‘낙(樂)’의 세계이다. 조신은 그가 원하던 김씨 낭자와 결혼을 하게 되고, 다섯 자녀를 두면서 인간사의 기쁨을 누린다. 만일 여기서 꿈이 끝났다면, 일반 환몽 설화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두 번째 꿈은, 만난 후의 삶이 보여 주는 ‘고(苦)’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 세계가 앞의 ‘낙(樂)’의 세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며, 주인공을 결정적인 깨달음의 세계로 이끈다. 이 두 번째 꿈의 세계는 참혹한 인간의 삶을 형상하는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조신 부부는 인간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시련과 비극을 대부분 다 경험한다. 인간사는 즐거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즐거움과 이어져 있는 시련과 고통이 더 큰 분량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인과(因果)의 인연으로 맺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신은 꿈을 통해 이러한 고락(苦樂)과 애환(哀歡)의 상관관계를 철저하게 체험한다. 이것은 인간이 일체의 현상을 이분화하고 그중 하나를 좇음으로써 번뇌가 생겨난다는 관음보살의 가르침을 몽유의 형식을 빌려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 깨달음 이후의 조신의 정신세계는 온전한 낙(樂)이라고 할 수 있는 낙(樂)을 초월한 ‘무락(無樂)의 대락(大樂)’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조신이 꿈을 꾸었다는 것은 표층적인 서술자로서의 이야기이고, 그가 관음보살의 현신인 김씨 부인과 결혼하여 평생을 지내며 고락을 함께 한 몽유의 과정과 그 깨어남이 지닌 심층적 의미는 관음보살의 불법이 조신에게 전달되는 진각(眞覺)과 그로 인한 ‘무락(無樂)의 대락(大樂)’ 또는 ‘고락(苦樂)을 초월한 진경(眞境)’에 이름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일연의 의도 때문에 꿈의 세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전체 이야기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고난 부분인 두 번째 꿈에서 김씨 부인의 대화가 더욱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꿈을 깨고 첫 번째 현실에 이른 조신은 이미 현실의 미망(迷妄)하고 미혹(迷惑)하는 수도승이 아니다. 꿈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그는 장원(莊園)을 맡아 관리하는 책임을 내놓고, 사재를 털어 절을 지어 수도에 전념하는 참된 깨달음의 발판에 서게 된다.
- 설성경, “구운몽 연구”(국학자료원, 1999
● 성장 소설
문학 가운데에서도 미성숙한 자아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정신적 위기나 절망의 극복의 과정을 극복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을 ‘성장 소설’로 구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장 소설은 한 개인이 유약한 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세계로 입문해 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내적 갈등과 정신적 성장,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통찰의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성장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들이 속한 세계에서 결핍과 고난, 아픔 등을 겪어 내고 끊임없는 내면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성숙한 인물로 성장, 발전하는 모습들로 그려진다. 이러한 성장 이야기를 다룬 유형의 소설을 지칭하는 용어는 20여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될 만큼 복잡한 개념인데, 그 가운데서도 김윤식이 1970년 “사상계”를 통해 ‘교양 소설’이라는 용어를 처음 소개한 이후 1990년대부터는 ‘성장 소설’로 거의 통일되어 사용하고 있다. 결국 한 인물의 자아에 대한 인식과 자기 발견의 길 찾기는 제한된 소설의 영역에서 일반 소설과 구분될 필요가 있는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많은 성장 소설은 주로 일인칭 서술 상황에 의존해 서사가 진행되는데, 이때 일인칭 서술이란 화자와 등장인물의 존재 영역이 동일함을 의미하며, 일인칭 소설 역시 ‘나’라는 일인칭 화자가 사건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소설의 사건과 경험을 보고하는 자전적 형태의 서사적 제시 방법의 소설이 된다. 따라서 일인칭 소설의 화자는 대개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경험자의 관점에서 소설을 서술하게 되고 화자의 역할과 태도는 소설의 전개와 스토리, 사건의 핵심에서 중요한 관점에 놓이게 된다.
- 김혜경, ‘존재 탐구와 상승 서사의 성장 담화 고찰’, “구보학보2집”(구보학회, 2008)
● 자전적 소설
자전적 소설이란 작가 개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다. 자전적 소설은 원래 한 개인의 삶을 탐색하는 전기가 허구적 소설 개념과 결합하면서 발생한 소설 유형을 가리킨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은 허구적 서사물이라는 점에서 전기나 자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개인의 구체적인 생활, 즉 체험이 근간이 된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여 소설이란 말이 붙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 체험 위에 허구적인 면이 첨가되었다는 것이 다르다.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자전적 소설은 방대한 양의 내용을 수록한다. 그래서 단편 소설은 비록 자신의 경험을 보고하는 형식을 작가가 취하고 있다고 해도 자전적 소설로 분류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면 단편이 지니는 긴축적인 구성이나 통일된 인상보다는 다소 완만하고 개방된 구성을 통해 한 인물을 둘러싼 물리적·사회적 환경, 그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인물의 일상사 및 작은 생각마저도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장황하게 제시하는 소설을 일컫는다.
- 이규정, “현대 소설의 이론과 기법”(박이정, 1998)
● 소외
개인이 그가 속해 있는 사회와의 관계에서 통합되지 못하거나 거리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소외 현상은 개인이 사회로부터 거의 완전한 감정적 단절을 당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무력(無力)·무의미·무규범·고립·자아 소외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주변적 또는 사회와의 격리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소외의 원인과 형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과 주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소외 현상은 현대 사회의 심각한 사회 문제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급격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사회 변동, 사회 구조의 복잡성, 과학과 기술의 발달, 조직화와 도시화 등에 따른 가치 갈등 현상은 현대인의 현실에 대한 원만한 적응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한국 문학 작품 중 소외 의식을 다루고 있는 대표작>
- 이상, ‘날개’: 이상이 1936년 발표한 단편 소설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식민지 시대의 유곽을 배경으로 하여 그곳 창부인 부인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무기력한 남자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려진 전도된 남녀 관계, 그리고 밤과 낮이 뒤바뀐 주인공의 생활 패턴 등은 모두 식민지 조선 사회의 한 단면으로 해석된다.
- 최인호, ‘타인의 방’: 1971년 3월 “문학적 지성” 3호에 발표한 단편 소설로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겪는 현대인의 소외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가장 확실하다고 믿어 온 것들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무너지는 자신의 삶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내,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옆집 사람들로부터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자기 스스로를 타인으로 느끼는 상황으로 빠져들어 간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현실에서 고립감에 사로잡힐 뿐만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된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집 안의 사물 중 하나가 된다.
-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이 작품은 영달, 정씨, 백화 세 사람이 길 위에서 만나 삼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여로형 소설의 일종으로, 산업화가 본격화된 1970년대의 상황이 삶의 근거를 상실한 민중들에게 얼마나 냉혹한 것이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 준다. 이 소설의 주된 공간인 길은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삶의 근거를 잃은 민중들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고향에서 쫓겨나 어느 한곳에 머무를 수 없는 이들의 처지가 길이라는 공간 속에 상징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