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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섭리에 관하여 1-3절
단 4:34-37 섭리(攝理)하시는 하나님 찬송: 39, 67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7) (본문 인용: 믿음의 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입문, 성약출판사)
5장 섭리에 관하여
1절.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행위와 상황을 가장 큰 것에서부터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마 6:26-32; 10:29-31) 븥드시고(느 9:6; 시 145:14-16; 히 1:3) 인도하시고 처분하시고 다스리십니다(단 4:34-35; 시 135:6; 행 17:25-28; 욥 38-41장). 하나님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는(잠 15:3; 대하 16:9; 시 104:24; 145:17) 그의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예지(豫知)와(행 15:18; 사 42:9; 겔 11:5; 시 94:8-11) 그의 뜻의 자유롭고 변함없는 경륜을 따라 이루어집니다(엡 1:11; 시 33:10-11). 이것은 그분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스러움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입니다(사 63:14; 엡 3:10; 롬 9:17; 창 45:7; 시 145:7).
2절. 물론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예지나 작정과 관련하여 보면, 모든 일이 변함없고 착오 없이 일어납니다(행 2:23; 사 14:24, 2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섭리로써 모든 일이 제이 원인(第二原因)의 성질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유로이, 혹은 우연히 일어나도록 배정(配定)하십니다(창 8:22; 렘 31:35; 출 21:13; 사 10:6-7; 신 19:5; 왕상 22:28-34).
3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통상적인 섭리에서 방도를 사용하시지만(행 27:24, 31, 44; 사 55:10-11)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에 따라 그것 없이(호 1:7; 마 4:4; 욥 34:20), 혹은 그것을 초월하거나(롬 4:19-21) 거슬러서(왕하 6:6; 단 3:27) 자유로이 행하십니다.
섭리(攝理)란 단어는 ‘다스리다’, ‘통치하다’의 의미를 가진 한자어로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유일신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고, 또 작정하신 대로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 말한다. 여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후 손을 놓고 계신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간섭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존하시고, 이끌어 주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를 이 피조세계에 계속하여, 끊임없이 베푸신다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우는 믿음의 내용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신데, 이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를 지나 포스트모던 시대가 되면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의 감정과 생각만 소중할 뿐, 다른 사람들의 간섭은 싫어하여 거부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통치까지도 간섭으로 여기면서 거부하게 된 것이다. 세상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성도들까지도 이렇게 하나님의 간섭을 불편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신앙이 바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일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과 일신상의 평안일 뿐, 다른 것은 모두 불편할 뿐이다. 여기에 하나님도 포함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섭리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이라면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섭리를 바르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그때그때 감정적이고, 경박스럽고,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 다스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가를 성경을 통해 늘 배우고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성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나님의 성품이란 당신의 피조세계와 관련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품에는 선하심, 신실하심, 영원하심, 전지전능하심, 자비하심, 거룩하심, 사랑하심 등이 있다. 이런 하나님께서 경박스럽고 변덕스럽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와 선하심을 따라 오직 단번에 모든 일을 완벽하게 계획하시고, 또 계획한 그대로 시행하신다.
마 10:29-31을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다 세워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경영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세상이 완벽하게 운행되도록 보존해 나가신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도 1절에서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행위와 상황을 가장 큰 것에서부터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븥드시고 인도하시고 처분하시고 다스리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는 그분의 “정확무오한 예지와 그의 뜻의 자유롭고 변함없는 경륜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이어 고백한다. 이것은 모든 피조세계의 시작과 지속을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힘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우리의 계속되는 존재는 하나님의 유지시키는 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다스리시고 보존하시는 절대주권이 선포되며, 우리는 이 절대주권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권위와 통제 아래 있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기본이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도록 이끌어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멀리 계시다가 우리를 위로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려준다.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보호하셔서 보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당신의 피조물이 투표를 통해 의견을 내면 하나님은 그 의견을 따라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제도는 대통령을 직선을 뽑는 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대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니다. 세상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독재 아래 있다. 이 단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세상의 독재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백성을 학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지혜와 자비와 긍휼을 따라 모든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따라 당신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유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통치 방식을 따라 하나님을 판단하면 안 되며, 우리의 하나님은 오직 우리를 위하여 섭리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신앙고백서 1절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그분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스러움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왜?’, 아니면 ‘왜 나에게만?’과 같은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이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따라 애굽으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내셨다. 그 결과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요셉 개인에게는 인간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보존하신 것이다. 그래서 계속하여 요셉이 형통하였다고 성경은 말한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이다. 이 유다는 예수님을 판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의 행동이 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예수님을 판 것이고, 하나님은 이 악한 행위를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이 두 가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반응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생각은 앞에서 말한 대로 ‘왜 나에게?' 이런 식의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분이 아니신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그 자리에 있도록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이런 가르침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낼 뿐이다. 결코 하나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은 성품과 지혜의 작정을 따라 그렇게 하신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의 손에서 받는 그 어떤 부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은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내가 잘하나, 못하나를 쳐다보고 계시다가 못할 때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인과응보의 생각이고, 욥기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이다. 우리의 삶은 이미 하나님의 모든 작정과 다스리심 가운데 놓여 있다. 이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마지막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마치 야곱을 애굽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내려 보내신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의 계획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을 뿐이며,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기에 힘겨운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박해가 있으며, 안타까운 일들을 겪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에 따라 즉각적으로 이 땅에서 상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오해를 하게 되면,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만드실 수도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는 자로 만드셔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은 아니냐고 불평할 수 있다. 아니면 우리가 잘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은 나의 공로를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제1원인과 제2원인을 구분해야 하는데, 제1원인은 모든 만물에 대하여 절대 주권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이며, 제2원인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연법칙을 따라 만들어지는 상황과 행동을 의미한다. 요셉과 가룟 유다의 경우를 보라. 요셉은 그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가혹한 상황에 던져졌고, 가룟 유다는 스스로 판단하여 예수님을 팔았고, 또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이 모든 과정은 제2원인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팔렸고, 유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예수님을 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1원인자로서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인간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행동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하셔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작정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연법칙과 같은 통상적인 수단과 이적과 같은 비상적인 수단을 사용하신다. 통상적인 수단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 자연에 넣어 두신 일반 법칙을 말한다. 비상적인 수단은 3절에서 말하는 대로 “그것 없이, 혹은 그것을 초월하거나 거슬러서 자유로이”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여기에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이적이 포함되는데, 예수님께서 폭풍 가운데 고통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물결을 잔잔케 하신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받은 다니엘 본문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비상 수단에 해당한다. 느부갓네살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바벨론 제국을 세우게 하셨지만, 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그로 하여금 일곱 때를 지나게 하신 후 다시금 그에게 총명이 돌아오게 하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37절의 고백을 하게 하심이다.
단 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왜 이렇게 하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피조세계가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이방 족속들로부터도 영광과 찬송을 받으신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작정을 따라 통상적인 수단과 비상적인 수단을 따라 이 세상을 섭리하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한이 없으시며, 우리가 감히 판단할 수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이때 어떤 의문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의문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오늘 무엇을 입을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가운데 담겨 있다. 하지만 또한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판단이 충돌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섭리의 신비라 부른다. 이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도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부당한 것으로 여겨 거부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신앙은 타락하게 되며, 결국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니다. 모든 세상 일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따라 진행된다. 그리고 또한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따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배우고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이다. 신앙고백서 1절 마지막을 다시 들어보자.
“이것은 그분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스러움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보호하며, 위로하며, 붙드시고, 인도하며, 다스리신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은혜와 긍휼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음을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섭리가 나를 인도하고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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