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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동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성원
1.예안 다래의 월천서당 현재 안동에 있는 서당, 정자 등 여러 건물에는 퇴계선생의 글씨로 알려진 현판이 상당수 걸려있다. 도산서원의 도산서당(陶山書堂)과 암서헌(巖棲軒)·완락재(玩樂齋), 농운정사( 雲精舍)와 관란헌(觀瀾軒)·시습재(時習齋)·지숙료(止宿寮), 역락서재(亦樂書齋)등이 있고, 진성이씨 두루종가의 경류정(慶流亭), 온혜의 노송정(老松亭), 애련정의 송당(松堂)등이 있다.
와룡 군자리에는 후조당(後彫堂)·읍청정( 淸亭)·양정당(養正堂)·설월당(雪月堂)등 네점이 있고 도산면 동부리 부포나루가 다래에는 월천서당(月川書堂)이 있다. 시내에 임청각(臨淸閣)·반구정(伴驅亭)과 송천 백죽당 종가의 임연재(臨淵齋)와 도목촌(桃木村), 서후 교동 송암종가의 관물당(觀物堂), 그리고 예안 부포의 성재(惺齋), 하회의 겸암정(謙巖亭), 천전 백운정의 이락문(二樂門)과 조양문(朝陽門)등이 또한 퇴계 선생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퇴계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기획의 하나로 퇴계선생 글씨 현판을 찾아 현판과 건물을 돌아보고 퇴계선생과의 관계를 더듬어본다. <편집자주> 안동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난 35번 국도를 따라 안막동을 넘어 20여분 달리면 왼쪽으로 우리나라 국학 운동의 미래를 책임질 '한국국학진흥원'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계속해서 5분 남짓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다래'라는 표지석이 서 있는 갈림길이 있다. 갈림길에서 월천서당까지는 약 4km이다. 10분 정도가 소요되는 짧은 거리이지만 언덕이 가파르고 포장이 안 된 부분이 있어 거리에 비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올해는 유난히도 가뭄이 극성인지라 월천(月川)으로 가는 길에서 보이는 안동호는 흉칙하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고, 월천에서 부포로 왕래하는 뱃길도 끊긴지 오래되었다. 그 옛날 퇴계 선생과 월천 선생이 이곳에서 배를 띄우고 뱃놀이하던 장소라고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은 풍광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곳 월천의 내력에 대해서는 『선성지(宣城誌)』에 자세하다. 용두(龍頭)와 영지(靈芝) 두 산이 이어져 내려와 부용봉(芙蓉峯)이 되었다. 그 아래에 마을이 있으니 바로 월천이다. 옛날에는 사는 사람이 없어서 초목이 무성하고 원숭이와 토끼들이 서로 떼 지어 다녔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세속에서 마을 이름을 전하기를 '솔내(率乃)'라고 하였다. 주인 없이 던져진 지 이미 오래 되었을 때 권수익(權受益, 1452∼1544)) 공이 부라촌(浮羅村)에서 태어나 매번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서 옮겨 살려는 생각이 있었다. 홍치(弘治) 갑인년(甲寅年, 1494년)에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터를 닦아서 시거(始居)하여 옛 이름인 '솔내'를 고쳐서 '월천'이라고 하였다. 권수익 공의 외손인 조목 선생이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월천으로 호를 삼았다. 선생은 또한 '대라(帶羅)'라고 하였는데 부라(浮羅)와 짝해서 부른 것이다. 마을 뒤쪽에 부용봉이 있고 앞으로는 낙천(洛川)을 마주보고 있어서 참으로 예안의 특별한 땅이 되었다. 퇴계 선생께서 사람들과 만나 담소하시다가 이야기가 우리 고을 산수의 기이함에 미치면 반드시 월천을 으뜸으로 치시고 곳곳마다 시를 남기셨다. 월천은 권수익 공이 터를 마련하고 외손자인 월천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나 생을 마감했던 곳이다. 형승과 경치가 워낙 뛰어나 월천 선생이 시를 지어 읊기를, "이곳에서 생장한지 팔십 년, 아름다운 봉우리 무수히 창 앞에 늘어섰네. 어여뻐라 산수가 감싸 안은 이곳이여!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여 좋아라. 집을 둘러싼 수많은 나무들, 그 곁 벼랑엔 한 줄기 찬 샘이 솟았네. 비록 이익을 위하여 어리석게도 내달리지만, 한가로이 동쪽 마루를 대하니 달빛은 시내에 가득하다."고 당시의 경치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서당이 위치하고 있는 마을은 부포와 마주하고 있다. 한자로는 월천(月川)이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다래'라고 부른다. 현재 거주하는 주민은 몇 안 된다. 서당에 들어가려면 골목 입구 오른편 첫째 집 어르신께 열쇠를 청해서 가야 한다. 서당 앞에는 어른 몇 사람이 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정도로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안동에서 은행나무하면 첫째로 꼽는 용계 은행나무의 수령이 700여 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 은행나무도 제법 나이를 잡수셨으리라 생각된다. 서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아주 가파르다. 서당의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 4칸의 아담한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중앙 2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양쪽 좌우엔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퇴계 선생이 직접 쓰셨다고 하는 월천서당 현판은 오른편 온돌방 전면에 걸려 있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서 현판이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의 깊게 볼 것은 월천서당이라는 넉 자의 현판 글씨 중 월천(月川) 두 글자의 높낮이가 틀리다는 것이다. 즉, 달 월(月)자는 높고 내 천(川)자는 낮다.
당혹스러웠다. 무슨 이유가 있을 법한데 우둔한 머리로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뒤에 선배로부터 그럴듯한 답을 들었다. 달[月]은 높은 하늘에 매달려 있으니 그 글자가 높고, 내[川]는 낮은 물이니 글자가 낮다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기발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의 주제는 퇴계 선생의 글씨이다. 선생의 글씨에 대해서 필자가 왈가왈부하기에는 솔직히 능력이 모자란다. 그러므로 선생의 글씨와 관련된 자료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퇴계 선생의 제자인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문집 {성재집(惺齋集)}에 수록되어 있는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에 선생의 글씨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도산서당 건립시의 시말(始末)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당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의 규모와 건립 연대 및 부속 건물의 위치와 명칭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또 퇴계 선생께서 도산서당과 부속 건물의 이름을 짓고 직접 글씨를 썼으며, 도옹(陶翁)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필법(筆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선생의 필법은 바르고 굳세며, 아름답고 중후하니 다른 명가들이 기괴함만을 숭상하는 것과는 다르다(先生筆法 端勁雅重 非如他名家 尙奇怪而已)." 단경아중(端勁雅重)한 필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지를 말함인지는 역량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뭐라 말하기 죄송스러우니 독자 여러분들께서 스스로 느끼시기를 바랄 뿐이다. 또 퇴계 선생의 필법에 관해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보물 제548호로 지정되어 있는 『퇴계선생필법부유첩』(退溪先生筆法附遺帖)이 있다. 이것은 선생께서 제자인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에게 준 글씨 체본과 편지글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다. 체본은 대(大)·중(中)·소(小), 해(楷)·행(行)·초(草)의 각기 다른 크기와 서체로 써 준 것이며, 유첩은 송암에게 준 편지글을 모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송하(松下) 권심규(權心揆, 1706∼1779)의 문집인 『송하집(松下集)』에 「서퇴도선생유첩후(書退陶先生遺帖後)」라는 글이 남아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란다. 서당문을 열고 마루에 올라 앞으로 펼쳐진 안동호를 바라보면 탁 트인 광경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물론 월천 선생이 공부하던 당시의 자연 환경과는 많이 바뀌었겠지만 이곳에 앉아 책을 펴서 읽노라면 그냥 머리 속에 마구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퇴계 선생은 아끼는 제자의 서당에 현판을 직접 써 주시고 여름이면 이곳에 와서 피서를 하시고 앞개울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곤 하셨다. 자고로 이 뱃놀이라는 것이 그토록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맹자』(孟子)에 보면 "물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서 돌아옴을 잊음을 유(流)라 이르고, 물길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서 돌아옴을 잊음을 연(連)이라고 한다."는 글이 나온다. 이어서 "백성의 어려운 점을 지극히 생각하는 선왕(先王)들은 이와 같은 유련(流連)의 즐거움이 없으셨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맹자의 요점은 백성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을 좀 바꾸어 뱃놀이를 보자. 그놈의 뱃놀이가 얼마나 재미가 있기에 고대의 임금들이 거기에 집착해서 정사(政事)마저 잊을 정도였을까?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이었는가 보다. 그리고 그 재미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상상해 보라.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일엽편주에 몸을 띄우고 만경창파에 모든 근심과 걱정을 맡기고 있는 자신을! 이 얼마나 멋들어지고 운치 있는 일인가? 퇴계 선생이 1564년에 당시 선성현감(宣城縣監)으로 재직하던 곽황(郭 )이라는 분을 모시고 여러 사람들과 이곳에서 피서를 하시고 풍월담(風月潭)에서 뱃놀이 하면서 읊은 칠언율시 두 수가 현재 월천서당 마루에 게판되어 있다. 잠시 한 수를 감상해보자. 宿雨朝晴洗旱塵 여러 날 내리던 비 개어 티끌 없어지니 靑山邀我出溪濱 푸른 산이 나를 맞아 개울가에 나섰네 水鄕先已雙鳧 물가에는 이미 한 쌍의 오리 날았으니 江檻何辭累爵巡 강가에서 어찌 여러 잔 술을 사양하리 松 滿襟人爽韻 옷깃에 가득한 솔바람 사람의 마음 시원케하고 火雲歸峀月生輪 산으로 돌아가는 저녁 구름에 둥근 달 나오네 更敎扶醉湖船上 취한 몸 부축 받아 배 위에 오르니 萬頃涵空玉鏡新 만 길 물 속에 옥 거울 새롭구나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나니 그동안 가물었던 먼지의 흔적을 깨끗하게 씻어 버렸다. 그리하여 개울가에 나서니 솔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날이 저물어가자 보름달도 떠온다. 이 정도의 상황이면 더할 나위 없건마는, 거기에 보태어 한 잔 술 마시고 배 위에 올라 만경창파(萬頃蒼波)를 감상하니 금상첨화(錦上添花)로다. 퇴계 선생께서 배를 띄운 풍월담은 깊이가 두 길이나 되어 당시의 제현(諸賢)들이 다투어 봄바람 불고 가을달이 뜨면 배를 타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조렸던 곳으로 월천 선생이 이름 지은 곳이다. 함련( 聯)에서의 '물가에는 이미 한 쌍의 오리 날았으니'라는 말은 현감 곽황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막 도착해보니 현감이 먼저 와 있었으므로 소동파(蘇東坡)의 "물구름이 먼저 한 쌍의 오리를 날게 했다(水雲先已 雙鳧)"는 시구를 인용하여 쓴 것이다.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의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이다. 연보(年譜)를 살펴보면 선생은 5세부터 책을 읽어 12세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다. 15세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한 이래 학문에 매진하여 29세 되던 해(155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로는 과거 시험을 그만두고 부용산 아래에서 은거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힘썼다. 마흔다섯 차례나 관리로 추천되었으나 관직을 마치 병처럼 싫어하여 대부분의 벼슬을 사양하고 4년 남짓 벼슬살이에 몸담았을 뿐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동생 및 두 아들과 더불어 곽재우(郭再祐) 공과 함께 합세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뒤 문집의 편간(編刊),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고, 마침내 1613년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1615년에 예천 정산서원(鼎山書院)에 퇴계·월천 두 선생을 배향하였고, 1617년에 이르러 봉화 창해서원(昌海書院)에 두 선생을 모셨다. 묘소는 서당 뒷편 부용산 남쪽 언덕에 있으며, 월천서당과 50여 보 거리에 있다. 월천서당에 온 김에 월천 선생 아우의 정자도 소개하기로 한다. 월천서당에서 불과 20여 보 남짓한 곳에 월천 선생의 아우인 조정(趙禎, 1551∼1633 )선생의 정자 '겸재(謙齋)'가 있다. 가운데 한 칸을 마루로 꾸미고 양쪽에 온돌방을 둔 세 칸짜리 조그마한 건물인데, 방이며 마루가 온전한 곳이 없는데 그나마 현판만은 손상되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의 주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월천 선생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기문(記文)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선생이 지었다. 빠른 시일 내에 복구가 되어 지척에 있는 형의 서당과 나란히 위용을 갖추기를 바란다. 안동 지역에는 다른 어떤 지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수많은 지정 및 비지정 문화 유산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비지정 문화 유산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정된 것조차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물론 어제 오늘은 일은 아니지만 이곳 월천서당도 푸대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구들은 내려앉아 바닥이 훤하고, 어지러이 쌓여 있는 제기(祭器)들이며, 무성한 잡초에 뒤덮인 마당이며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서당을 나오는 발걸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남재주> 2. 수많은 세월 속에 더욱 빛을 발하는 큰선비의 글씨 퇴계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기획으로 마련한 연간시리즈 '퇴계글씨 현판을 찾아서'는 지난호 예안다래의 월천서당에 이어 이번에는 와룡 오천 군자리에 남아있는 퇴계의 글씨 후조당, 읍청정, 양정당, 설월당을 찾아 현판과 건물을 돌아보고 퇴계선생과의 관계를 더듬어본다.<편집자> ***반듯하고 흐트러짐없는 퇴계의 글씨*** 퇴계의 글씨는 그 주종(主宗)이 해서(楷書)가 아니면 조금 흘림체로 된 행서(行書)들이다. 선생의 글씨 가운데 전서(篆書)는 거의 없다. 예서나 초서를 많이 쓰신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은 퇴계선생의 인생해석, 행동철학과 상관된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퇴계선생은 미란스럽지 않게 살기를 기한 분이다. 그런 단면은 그의 생활신조 중심이 경(敬)이나 성(誠)에 놓여 있었던 점으로 보아서 넉넉히 짐작된다. 갖은 자 바른 글자로 쓰이는 해서(楷書)는 이 한자 한자가 반듯하고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선생처럼 방정(方正), 정명(精明)을 기한 어른이 즐겨 쓰신 것이다. 또한 선비도 때로는 관조의 세계에 젖어들고 천지자연의 섭리를 헤아린다. 그런 경우에 선비는 흔히 고전의 격조와 일체가 되며 물외한인(物外閒人), 정관만물개자득(靜觀萬物皆自得)의 흥취에 젖어든다. 이때에 쓰이는 것이 반흘림체로 일컬어지는 행서다. 퇴계선생의 시문과 사정 가운데 지금 전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행서로 되어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탁청정 벽상시*** 퇴계선생의 친필로써 지금 외내·군자리에 판액이 되어 걸려있는 것은 모두 다섯점이다. 그 첫째 것이 탁청정 김유(濯淸亭 金綏)선생이 창건한 탁청정에 걸려있는 벽상시다. 7언율시로 <탁청정 주인인 김유에 부쳐서(寄題 金綏之濯淸亭主人)>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이 시액은 총 글자수가 112자인데 그 가운데 초서인 것은 스무 자 가량이다. 나머지는 해서체가 아니면 행서체다. 산이 감고 시내 돌아 다락 안으니 주인은 시골 고을 서생 아닐네 기름진 밥 800명 노비 시키고 멋진 술 수없이 길러 옴이여 <山擁溪回抱一亭/ 主人非邑冷書生 珍羞八百叱好取/ 美酒十千投轄傾> 이런 구절을 머리에 놓은 탁청정의 게미판을 보고 있으면 그대로 퇴계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탁청정에는 이 판액시 외에도 당대의 여러 명인들 작품이 걸려있다. 그 가운데 황중국(黃中菊)선생의 것은 모두가 초서로 되어 있다. 같은 자리에서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마음껏 붓을 휘두른 것이다. 그에 반해서 퇴계선생은 한결같이 단아한 필치로 해서와 행서체를 썼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정신세계가 유추되고 남는 것이다. 본래 탁청정 김유 선생은 강원 관찰사를 지낸 운암 김연(雲巖 金緣)선생의 아우님이었고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선생과는 사돈 사이였다. 그는 성격이 호렵하고 넉넉한 살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풍류를 즐기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었다. 지나가는 길손이 그의 사랑 앞을 지나면 반드시 불러들이어 글을 이야기하고 청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탁청정을 그는 중종36년 곧 1941년에 세웠다. 그 규모가 웅장하고 모양이 화려하여 오랫동안 인근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낙성연에 초대된 퇴계선생이 <선비의 집으로는 너무 과하다>고 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낳았다. 그러나 탁청정 판상시가 그것이 한갓된 옛말임을 말해준다. 이런 이야기와 함께 탁청정은 앞으로도 길이 퇴계선생의 친필시를 전해갈 것이다. ***후조당과 읍청정*** 외내에는 탁청정의 판상시 이외에도 퇴계의 친필 판액이 네 개가 있다. 옛 외내를 기준으로 하면 아랫마을 후조당(後彫堂)에 걸린 것이 그 하나였다. 그리고 옛 외내에서는 그 서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읍청정( 淸亭)이 있었다. 이 두 정자의 주인은 운암공의 맏 아드님과 둘째 아드님이었는데 다 같이 생전에 다락집을 얽었고 또한 당호 현판을 퇴계선생에게 청해서 그 친필로 받은 것이다. 지금 후조당을 보면 대청이 여섯 칸에 동쪽으로 방이 두 칸이다. 또한 기역자로 되어 있는 이 다락집은 꺽임새 쪽에 마루가 한 칸 있으며 그에 곁들여 방이 한 칸 더 붙어 있다. 사가의 정자 가운데는 규모가 상당히 큰 것이다. 후조당이라고 쓴 퇴계선생의 글씨는 이 건물 규모에 걸맞게 큼직하고 특색이 있다. 즉 퇴계 선생은 작은 글씨와 꼭 같이 대자 판서를 쓸 데도 자획들을 별나게 모나거나 힘주어 꺾지 않았다.
그런데 후조당 판액의 필치는 그와 다르다. 특히 후조당의 가운데 글자인 조(彫)의 빗긴 획은 기필과 수필의 획이 매우 강조되어 있어 퇴계선생이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읍청정은 후조당공과 함께 퇴계선생의 문하인 읍청정 김부의(金富儀)공의 정자다. 두 칸 반의 대청과 좌우 양쪽에 온돌방 두 칸이 붙어 있는 한 일자 모양의 정자다. 이 현판의 필치는 한눈으로 보아도 퇴계선생의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즉 세자 모두가 반듯한 해서체로 쓰여 있고 여러 획이 둥글고 질박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당호 세 글자는 거의 활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반듯반듯하게 쓰여져 있다.
그런 가운데 꼭하나 예외격이 되는 것이 가운데의 글자인 푸를 청(淸)자다. 이 글자의 삼수변 첫 점은 아랫 점 쪽으로 조금 흘러내리게 썼다. 아마도 이것으로 퇴계선생은 이 현판에 다소간의 가락을 넣지 않았나 생각된다. 참고로 밝히면 후조당의 김부필(金富弼)공과 읍청정의 김부의공은 퇴계선생의 고제 가운데도 으뜸가는 제자분이었다. 후조당공은 중종23년에 사마시에 올랐다. 그 길로 태학에 나아가 학문과 수도에 힘쓰던 중 잇따른 친상을 당하자 섶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 그는 사무치게 퇴계선생 아래서 성리학 특히 심학(心學)을 공부할 뿐 어지러운 정계나 세속적인 명리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몇 번인가 나라에서 그의 학행을 높이 산 나머지 벼슬을 하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본 뜻은 도학잠심(道學潛心)에 있었다. 그는 거절로 일관했다. 퇴계선생이 이런 그의 덕성을 높이 사서 7언 절구로 그것을 기린 바 있다. 후조당 주인은 곧은 절개 있어 벼슬 사령 내려와도 달가와 않네 (後彫主人堅素節/ 除書到門心不悅) 이분의 당호인 후조당은 <시절이 추워지고 나서야 송백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라는 《논어》의 한 구절에서 딴 것이다. 훗날 그 학문과 덕행으로 이조판서, 성균관제주로 추증되고 시호로 문순공(文純公)을 제수 받았다. 퇴계 선생도 시호가 문순공이어서 그의 문하에 두 사람의 문순공이 난 것이다. 읍청정공 또한 마음을 다스려 세상의 겉모양에서 벗어나고자 한 분이다. 그는 가난한 가운데 오히려 낙을 찾아 사물의 근본을 파헤치고자 했다. 특히 역리(易理)를 사무치게 궁구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도산서당에는 주역의 이치에 근거를 둔 선기옥형(璇璣玉衡)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설계자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는지 도수가 맞지 않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읍청정공은 이것을 다시 만들도록 명한 퇴계선생의 뜻을 받들어 훌륭하게 고쳤다. 평소 퇴계선생은 그를 깊이 신임했다. 그리하여 그가 주동이 되어 창설한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이룩되자 읍청정공에게 산장(山長)을 맡게 했다. 이 분의 당호인 읍청정 역시 퇴계선생이 지어 준 것이다. 그의 학문과 인품을 엿보게 하는 7언 절구가 있는데 그 첫 두 줄은 다음과 같다. 옛분네 글속에서 성현을 만나뵈니 그분들 심사가 한결같아라 (黃卷中問對聖賢, 聖賢心事尙依然) ***설월당과 양정당*** 옛 외내에서는 외줄기 맑은 시내가 마을 앞을 흘러내렸다. 그 시내를 따라 정북향으로 가면 탁청정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모롱이를 돌면 설월당(雪月堂) 구역이 되었다. 양정당은 그 설월당에서 다시 건너편에 위치한 수정산 자락에 있었다. 본래 설월당공과 양정당공은 산남정(山南亭)의 주인인 김부인(金富仁)공의 아우님들이었다. 그 가운데 산남공이 맏이며, 둘째가 양정당(養正堂)공, 셋째가 설월당공의 순서였다. 이 분들은 퇴계선생 문하였고 한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아 각각 정자를 갖게 된 것이다. 지금 새 외내, 군자리에서 설월당은 읍청정과 산남정 사이에 위치하여 거의 마을 중앙을 차지했다. 본채가 네 칸 겹집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걸린 설월당 세 글자는 퇴계의 친필 가운데도 가장 돋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이 현판은 우선 다른 현판보다 글씨 크기가 더 크다. 단순하게 클 뿐만 아니라 다른 현판을 쓸 때보다 호가 더 크고 많은 붓으로 쓴 듯 그 획들이 듬직한 양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가운데 필치가 부드럽고 푸근하게 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특히 설월(雪月) 두 자는 글자의 의내가 주는 심상이 순결한 것과 아울러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퇴계선생의 글씨가 모두 그렇듯이 전혀 교가 섞여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석자는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그와 아울러 우리 마음을 정화·포용해주는 것이다. 양정당 석자는 설월당보다 더 갖은 글자로 쓰여져 있다. 크기로 보면 설월당보다 다소 작은 편이지만 모든 획이 반듯반듯하게 쓰여 있어 퇴계 선생의 현판 글씨 가운데서도 가장 해서체에 충실한 경우로 생각된다. 지금 양정당은 새 외내 자리에서 제일 서쪽으로 되는 안동호수 물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여정이 바쁜 사람들은 대개 이 현판을 안보고 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설월당이나 읍청정을 본 다음 이 현판을 보면 퇴계선생의 필치가 이렇게 순후하면서 단아한 데 그 본령이 있구나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 외내에 들어선 사람은 양정당 현판도 꼭 보아주었으면 한다.
양정당의 주인인 김부신(金富信)공은 중종때인 1523년에 태어났고 퇴계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글과 조행으로 이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생전에 가르친 제자들이 있어 사당을 세우고 오랫동안 제사지냈다고 한다. 설월당의 주인인 김부륜(金富倫)공은 퇴계선생의 여러 제자 가운데도 스승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분이다. 그는 중종때인 1531년에 태어났다. 자를 돈서(惇敍)라고 했는데 그의 당호 설월당은 퇴계선생이 손수 지은 것이다. 본래 그는 풍월에 취향이 있어서 시사(詩詞)를 짓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16세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송학(宋學)의 높은 봉우리를 이룬 정명도(程明道)가 열여섯에 사물의 본바탕 궁구를 뜻하고 주렴계(周濂溪) 앞으로 나아가 도학을 배우기 시작했음을 알았다. 이때부터 그는 사장(詞章) 공부를 접고 퇴계선생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스승을 따라 지경(持敬)을 생활신조로 삼고 심학(心學)연구에 몰두했다. 설월당공은 명종10년(1555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해 5월에 부친인 탁청정공이 타계하자 곧 벼슬길을 단념하고 외내로 돌아왔다. 그는 큰 슬픔에 잠긴 나머지 그 해 겨울까지 죽만으로 연명했다. 그리하여 그의 스승인 퇴계선생이 복상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타이르기까지 했다. 그는 다음해에 다시 도산서당에 나가 스승을 위해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등을 필사하면서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밝혀 나갔다. 그리하여 퇴계선생이 그의 생각을 참고하는 가운데 이들 성리학 경전의 해석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설월당공은 그 학문과 덕행으로 훗날 벼슬길에도 올랐다. 선조16년(1583) 내섬사주부가 된 것을 비롯하여 동복현감· 봉화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앞서 그는 철저하게 선비이며 유학자로 살기를 기한 분이다. 그는 일상생활을 통해 외곬으로 옛 성현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하고자 했다. 또한 후진을 가르치는데도 그의 신조를 극명하게 밝혔다. 그는 언제나 후학들에게 선비의 필독서로 소학과 주자가례(朱子家禮), 사서오경(四書五經),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 등을 들었고, 여러 사기를 읽는 것을 권장한 바 있다. 그러나 노자와 장자, 불경등과 기타 제자백가(諸子百家)는 가까이 하지 말도록 엄하게 일렀다. ***군자리의 다른 필적들*** 군자리의 퇴계선생 필적 답사는 설월당과 양정당 현판을 살핀 다음 다시 뒤풀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새외내, 군자리를 떠나기에 앞서 우리는 다시 한번 탁청정에 오를 필요가 있다. 탁청정 현판은 퇴계선생의 것이 아니다. 이 현판은 당대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솜씨다. 이 현판은 그 획과 점들이 듬직한 가운데 글자 하나하나가 생동하는 느낌을 준다. 외내에서는 이 현판을 쓸 때의 설화가 전한다.
탁청정의 현판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자 한석봉은 지체없이 하경하여 탁청정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탁청정 현판감을 벽상에 걸어놓으라고 요구했다. 워낙 자신에 찬 글씨 솜씨라 벽상에 걸어놓은 판자에 탁청정(濯淸亭) 석자를 쓰고자 한 것이다. 그는 붓에 먹을 듬뿍 무친 다음 사닥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것을 아니꼽게 본 문중의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 발길로 사닥다리를 걷어찼다. 여느 사람 같으면 그는 마구 바닥에 굴러 떨어져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때 명필 한석봉은 마침 탁(濯)자 둘째 점을 찍는 찰나였다. 그리고 그 점을 찍은 붓이 판상에 박혀 한석봉은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탁(濯)자 둘째 점을 보면 특히 그것이 굵고 힘있게 되어 있다. 이것은 이때 한석봉이 힘을 거기에 싣고 몸을 매단 자취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 일어나 일이 아니었으며 명필 설화의 일종이다. 여기서 이런 설화를 이끌어낸 것은 다른데 뜻이 없다. 탁청정에는 한석봉이 쓴 현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동쪽과 남쪽 벽상에는 농암 이현보선생과 퇴계선생의 판상시가 차례로 걸려있다. 특히 퇴계선생의 시는 외내 광산김씨와 탁청정의 보물 중 보물이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한석봉의 필치를 아울러 살피면 선인들의 숨결이 아득한 세월을 넘어 잡힐 듯 살아난다. 외내·군자리는 퇴계선생의 휘호들과 더불어 그 문화사적 자리를 든든하게 다져온 고장이다. <김용직> 3. 현판과 퇴계 글씨 올해는 퇴계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안동에서 이를 기념하는 유교문화축제가 성대하게 열렸다. 과거와 현재의 우리지역 문화를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는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에서도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여 퇴계선생이 남긴 현판글씨를 몇 회에 걸쳐 다루어 왔다. 5·6월호에서는 다래의 월천서당에 있는 현판을, 7·8월에는 오천 군자리에 있는 현판을, 9·10월호에는 도산서원에 있는 현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퇴계선생이 쓴 현판은 이밖에도 더 있지만, 선생의 현판글씨를 알아보는 데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의 세 글을 마무리하면서 '현판' 혹은 '현판문화'에 대한 것과 '퇴계선생의 글씨'에 대한 것을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사람중심의 '현판문화'*** 퇴계선생의 글씨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우리문화의 중요한 측면이라 할 수 있는 '현판문화'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건물이나 방의 기능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건물의 입구에 글씨로 표시하는 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대체로 서양에서는 건물에 직접 글씨를 새겨 넣는 경우가 더 많고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별도의 판에 글씨를 새겨 거는 경우가 대부분인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글씨를 하나의 예술형태로 발달시킨 데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붓으로 쓰여지는 우리의 글씨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예술양식이므로 건물을 짓는 것과는 별도의 주체와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씨를 건물에 직접 새겨 넣는 경우는 그 건물에 누가 살던지 관계없이 건물 그 자체의 목적을 고정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씨를 현판에 따로 새겨 거는 경우는 건물이나 방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 건물이나 방의 기능이나 역할을 다르게 결정할 수 있는 유동성이 있다. 앞의 경우는 건물 중심적 사고라면, 뒤의 경우는 건물과 사람의 관계가 설정되는 사람 중심적 사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달아서 거는 글씨 판 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의 현판문화는 건물이나 방 등 우리의 주거공간에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공간의미부여'의 독특한 주거관이라 할 수 있다. 제 몇 동 몇 호로 부르는 고층건물의 아파트마다 붙이는 숫자는 위치를 구별하기 위한 것일 뿐 어느 특정한 공간과 그 속에 사는 사람의 관계를 확인해 볼 수는 없다. 여기에 비해 우리의 전통적 현판문화는 공간과 특정한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훌륭한 공간관이자 주거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판을 볼 때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현판이 누구의 글씨인가 혹은 어떻게 해서 잘 쓴 글씨인가 하는 점보다는 그 글씨의 의미가 무엇이고 왜 그러한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그 공간의 주인이 특정한 공간에서 어떤 자세로 살고자 했는가를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현판은 일단 그 시대의 주도적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불교시대에는 불교적 관념들이 현판에 주로 등장하고 유교시대에는 유교적 관념들이 등장한다. 이 지역에 있는 불교사찰을 중심으로 불교시대의 현판을 한번 보자. 불교의 사찰에 있는 각 건물은 불보살을 모시는 전각들과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크게 대별해 볼 수 있다. 불보살을 모시는 전각들에 걸려 있는 현판은 그 건물이 어떤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석가모니부처를 모시면 대웅전, 아미타불을 모시면 극락전이나 아미타전 혹은 무량수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면 적광전 광명전 혹은 비로전, 관세음보살을 모시면 원통전이나 관음전 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스님들이 수행하는 암자와 같은 공간은 불교의 사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을 상징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백련암, 지조암, 보리암, 영산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찰전체를 일컫는 명칭은 반드시 불교적인 데 제한되지 않고 그 사찰의 건립에 관련된 설화나 인물에 관한 설화를 상징하는 수사학적 표현을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부석사, 봉정사, 연미사, 고운사, 개목사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와 같은 현판의 명칭은 기본원리에는 큰 틀을 바꾸지 않지만 유교문화시대인 조선시대에 오면 유교적 관념들로 대체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오면 불교시대의 현판과 달라지는 몇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불교시대에는 거의 없었던 새로운 건물양식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유교사회가 크게 중시하는 제사기능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종묘·문묘·가묘·사당 등의 제사건물이 많이 세워졌고, 또 교육이 일반화하게 되어 향교·서원·서당과 같은 교육건물도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많이 세워졌으며, 나아가 양반사회의 확대에 따라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휴식공간으로서 누정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제사건물의 현판은 제사에 대한 유교적 소박성 때문에 현판명칭이 비교적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교육건물과 휴식공간으로서 누정에 붙는 현판은 불교시대의 현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사실 현판이 특정한 공간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라면 사적인 건물이나 누정에 붙은 현판이라 할 수 있다. 공공성을 가진 건물의 현판이 대개 그 건물용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대비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국가주요정책결정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건물을 근면하게 정사를 돌본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근정전'이라 한 것이라든지, 동대문을 바로 동대문이라 부르지 않고 유교의 근본개념인 '인'을 부흥시키고 또한 방향으로 '인'이 동방에 해당하기 때문에 '흥인지문'이라 한 것이 그러하다. 지방의 관청이나 향교, 혹은 서원과 같은 건물 중에서도 여러 명이 공동으로 활동하거나 공적 목적으로 쓰는 공간은 동헌, 전교당, 명륜당 등과 같이 거의 비슷한 명칭을 쓰지만 그러한 공공건물 중에서도 사적인 공간 예컨대 기숙사 같은 건물은 그 사용주체의 선택에 따라 대단히 가변적으로 드러난다. 아예 사적으로 지은 건물의 명칭은 그 주인공의 생각이 절실히 반영된다. 도산서당의 완락재나 암서헌은 그 작은 공간마다 퇴계선생의 생각이 투명하게 드러난 의미들이다. 누정의 이름은 더욱 자유로운 이름이 붙여진다. 건물주인의 호(號)를 쓰거나 자연환경의 형상을 쓰거나 자연환경에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를 쓰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삶의 자세나 윤리적 결단을 표현하는 등 매우 다채롭다. 특히 사적인 건물은 본인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지인이나 선배 혹은 스승이 써 주는 사례가 많다. 이럴 경우, 그 현판에 부여한 의미와 관련된 글(記)을 써 주기도 한다. 이러한 글은 그 공간의 주인공이 현판의 뜻대로 되기를 북돋아주고 기원해주는 내용이다. 우리의 현판문화는 이처럼 공간을 매개로 삶의 의미를 공유하고 서로의 삶이 흩트러지지 않도록 다져가게 하는 훌륭한 문화장르인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육체적 안락에 초점을 두는 요즈음의 주거관은 전통의 주거관에 비해 오히려 더 천박하게 보여 지기까지 하다. 오늘날 자기 방에 자신의 삶을 추스릴 수 있는 새로운 결단을 자기가 직접 쓰거나 아니면 지인에게 부탁하여 현판으로 걸어두는 것이 그저 시세에 뒤떨어진 문화적 허세이기만 할까? ***마음의 다스림을 글씨로 형상화한 퇴계선생 글씨*** 한국국학진흥원과 예술의 전당에서는 퇴계탄신 500주년을 기념하여 '퇴계 이황전'이라는 이름으로 퇴계 글씨에 대한 전시회를 안동과 서울에서 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전시회를 기획한다는 소리를 듣고 속마음으로 대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위대한 성리학자로서, 실천적 도덕주의자로서 혹은 이상적 선비로서, 그리고 교육자이자 문학가로서 퇴계선생이 워낙 유명하니까 이제 '퇴계'라고 하면 그의 모든 것들이 위대해져야 하니까 마침내 새 메뉴를 개발하여 그의 글씨까지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구나. 어떤 이는 또 이렇게도 생각했을 것이다. 글씨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관점은 그 형태의 예술성보다는 글씨 쓰는 사람의 인격을 더 중하게 여기므로 퇴계선생의 인격이라면 그의 글씨전시회를 연다는 게 일리는 있겠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면, 한 마디로 퇴계선생의 글씨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생의 글씨는 우리의 서예사에 있어서도 전환점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끼친 영향력 면에서 볼 때도 한 흐름을 형성할 만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글씨 그 자체를 두고 볼 때도 독자적 예술성을 성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글씨를 지금에야 되새겨본다는 것은 때늦은 감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의 글씨는 다른 뛰어난 측면에 가려 오히려 빛을 잃고 있었다 할 것이다. 퇴계선생의 글씨가 우리 서예사에서 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조선성리학의 완성에 따른 '조선성리학적 글씨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성리학의 완성이란 무엇을 일컫는가? 인간과 세계를 아우르는 통일적 해석, 즉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인간행동의 원리가 궁극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성리학이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한국 사람의 생활 속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길을 제시하는 게 바로 '조선적' 성리학의 완성인 셈이다. 퇴계는 그 길을 '경(敬)'이라는 실천적 마음의 자세를 지주로 삼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나갔던 것이다. 그가 말한 '경'의 정신이 허울 좋은 사유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았다면 수많은 글을 남긴 그의 글씨에 그 마음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는가. 한 마디로 그의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경'사상이 가장 구체적으로 그리고 가장 일상적으로 반복되어 형상화된 것이 바로 글씨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생의 글씨는 글씨를 쓰면서 흩트려지기 쉽고 꾸미기 좋아하는 우리 마음을 빈틈없이 다지면서도 원만하고 온유하게 주변과의 조화를 꾀하고 있음을 붓끝 하나하나에서 또 붓의 흐름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퇴계선생의 글씨는 마음의 다스림을 글씨로 형상화하는 필법, 즉 '심필'의 새 세계를 열어낸 것이다. 그것은 결코 형태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거나 다스려지지 않는 내면적 예술정취를 쏟아내는 예필(藝筆)이 아닌 것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과도적 시기에 널리 유행하고 있었던 조맹부의 송설체 속에 들어있던 '꾸밈(姸媚之態)'이라는 요소를 걷어내면서도 단순한 왕희지체로의 복고만을 꾀한 것이 아니었다. 서예의 성인이라 불리는 왕희지 글씨를 표준으로 하면서도 세계를 읽고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역동적 과정을 살려내는 선생의 글씨이므로 들여다볼수록 그 맛을 알게 될 것이다. 더 극적으로 표현한다면, 퇴계선생의 '경'공부의 한 방법이 그의 필법을 닦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번잡한 일상생활 속에서 퇴계의 필법을 익힌다는 것은 어쩌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좋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퇴계선생은 미래의 우리도 마음을 닦을 수 있도록 그의 필법을 예비했을 지도 모른다. (끝) 글/이효걸(안동대 교수)
****글은 안동사랑방에서, 그림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가져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