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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범어동(泛魚洞),
물 위에 떠 있는 물고기를 닮은 마을
개관
범어동은 본래 대구부 수북면(守北面)으로 조선시대 때 범어역(泛魚驛)이 있어 ‘범어’ 또는 ‘역촌(驛村)’이라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됐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됐다. 1980년 수성구가 신설되면서 동구에서 수성구가 됐다. 범어동은 한자로 ‘泛魚·凡魚·凡於’ 등으로 사용해 오다 지금은 ‘泛魚洞’으로 사용한다. 법정동인 범어동은 행정동인 범어1-4동으로 나뉘어 있다. 마을명으로만 보면 수성동이 수성구 중심 마을인 것 같지만 사실은 범어동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지금의 범어네거리에 있었던 범어역은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에 딸린 역으로 경주(慶州), 압량(押梁), 설화(舌化)와 연결됐다. 따라서 범어동은 예로부터 대구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1960-70년대 범어동에는 양계장이 많았다고 한다. 대구시사 ‘주거불량지역분포현황(1984년 기준)에 범어1동에 자연부락 417동, 범어3동 다랑뱅이촌 276동, 범어3동 신천시장에 영세민 46세대, 주택 21동이 보인다.111) 삼덕네거리-수성교-범어네거리-남부정류장-고산으로 이어지는 옛 4호 방사선 도로 중 삼덕네거리-남부정류장 구간은 1970-80년대에 지금의 폭 50m 도로로 확장됐으며, 남부정류장-담티 고개 구간은 폭 35m로 확장됐다. 청호로 경동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범어육교는 1988년 준공됐다.
주요 공공건물로는 경신고등학교, 정화여자중고등학교, 경신중학교, 동도중학교, 대구경동초등학교, 대구동산초등학교, 대구범어초등학교, 대구지방법원, 대구지방검찰청, KBS대구방송총국, 범어도서관, 수성국민체육센터, 야시골공원 등이 있다. 주요 유물로는 삼국시대 유물이 있고, 수령 1,000년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 중에 있다. 향토문화유산으로는 ’나야 대령 기념비‘가 있다.
111) 대구시, 대구시사 4권, 1995, 86-87쪽
지명 유래
범어동은 1450년경(세종 32) 철원 부사를 지낸 구수종(具壽宗)이 정착해 일군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지형이 마치 물고기 한 마리가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뜰 범(泛)’, ‘고기 어(魚)’, 범어(泛魚)라고도 하고,112) 범어천에 물고기가 많아 범어(泛魚)라 했다고도 한다.113) 현재 천주교 범어대성당이 자리한 동산은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인데 길이가 400m 정도 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한 마리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는데, 북쪽이 꼬리, 남쪽이 머리에 해당한다.114)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는 옛 지명으로 괘룡산(掛龍山), 달암산(獺巖山·달암바우), 율전등(栗田嶝·밤밧등), 리산(鯉山·잉어더미), 응산(鷹山·매재), 범어제, 상보(上洑), 하보(下洑), 범어 주막 등이 등재되어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범어동에 대해 “예부터 일러오는 명칭이며 야시골, 밤자골, 장촌, 주일골, 관골을 통합하여 범어동이라 불린다. 이 부락 앞에 개천이 있고 개천 하류에 산이 있는데 산의 형상이 마치 개천에 고기가 뜬 것 같으므로 범어동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112) 윤용진 외, 『지명 유래조사』, 대구시행정자료실, 1980, 31쪽.
113)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65쪽.
114)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35쪽.
공수골(公須谷)
범어1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과거 지금의 범어공원 서편 일대(수성구민운동장역 인근)는 200호가 넘는 민가가 모여 있는 범어동 큰 마을이 있었다.115) 이 마을의 중심 마을이 공수골인데 지금의 수성구민운동장-유림노르웨이숲 아파트 일대다. 능성 구씨 집성촌이었으며 문중 재실인 추모재(범어동 908-1)가 남아 있다. 공수골이란 이름은 공수전(公須田)에서 유래됐다. 공수전은 조선시대 지방 관청에서 소요되는 경비를 대기 위해 지방 관청에 지급된 토지다. 범어동 공수전은 인근에 있었던 범어역 운영을 위한 공수전이었다.
115) 1910년 10월 1일 일제는 칙령 제357호로 대구군을 대구부로 바꿨다. 이어 총독부령 제8호 “면(面)에 관한 규정”에 의거 대구를 29개 면으로 개편할 때 범어동(泛魚洞, 228호)은 수북면(守北面)의 소계동(小溪洞 35호), 황청동(黃靑洞 94호), 지계동(支界洞 55호), 만촌동(晩村洞 60호), 검정동(檢汀洞 38호), 효목동(孝睦洞 75호)과 더불어 7개 동의 하나가 됐다.
관골·수통골
관골은 옛날 범어동 주일골에 있었던 마을이다. 주일골은 지금의 KBS방송총국-경남타운-태왕아너스 아파트에 이르는 골짜기이며, 관골 위치는 지금의 경남타운 인근이다. 과거 범어동에는 수통골도 있었다. 수통샘이란 샘이 있어 수통골이라 불렸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수통이란 지명을 놓고 추정해 보면 수통(水筒)은 수로·관을 의미하는 만큼 관골과 연관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관골에 대해 “이 부락 근처의 산 모양이 관을 쓴 것 같으므로 관골(冠谷)이라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주일골’ 사진 참조)
깃대봉
깃대봉은 범어4동에 있는 야산 봉우리로 현재 KBS방송국 뒷산 정상으로 추정된다. 어느 때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신수단으로 봉화를 이용하던 시대에 깃발로 신호를 전했던 곳으로 전한다. 조선시대 때 범어역이 있었던 범어동은 대구는 물론 영남의 관문과도 인접해 있었다. 그래서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고을민과 인근 고을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이 산 정상에서 봉화 대신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깃대봉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구전으로만 범어동 일대 주민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으며, 지금은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116) 1954년 항공사진에는 KBS 뒷산 깃대봉으로 추정되는 산이 보인다. 깃대봉 정상 동쪽 기슭에 10호 정도 민가가 있는데 지금의 경남타운 위치쯤 된다. 이 골짜기를 주일골(注日谷)이라 불렀다.(‘주일골’ 사진 참조)
116)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64쪽.
나야 대령 기념비
나야 대령 기념비(범어동 산156)는 청구가든1단지 아파트 서쪽 야산 기슭에 있다. 나야 대령은 인도인으로 6·25 한국전쟁 때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경북 칠곡군 왜관 근처에서 지뢰 폭발로 전사한 군인이다. 전사 직후 이곳에서 시신을 화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1950.12.7) 이후 나야 대령 부인, 주한 인도 총영사, 주한 인도 대사 등이 다녀갔다. 2003년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됐다. 기념비가 있는 이 지역을 과거에는 주일골(注日谷)이라 불렀다.
돌암뱅이·다람뱅이
돌암뱅이는 범어3동에 있었던 지명이자 자연부락이다. 지금의 한국전력공사 대구전력관리처(옛 조선전업대구변전소) 북동쪽 언덕 아래 지역이다.(범어동 2148) 돌암뱅이란 지명은 지금처럼 범어천이 복개되기 전, 범어천이 이 언덕 아래에서 물길이 돌아 흘러간다는 데서 유래됐다. 다른 말로 다람뱅이라고도 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현 한국전력공사 자리에 옛 조선전업대구변전소가 보인다. 변전소 주변에는 논밭만 보이고 민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돌암뱅이 건너 언덕 위 현 화성파크드림 아파트 자리에 민가 8-9호가 보인다. 1980년을 전후한 지도에서는 돌암뱅이 주변이 이미 주택가로 바뀌었고 동쪽에 한전 아파트, 남쪽에 광명아파트, 한도맨숀 등이 나타난다. 대구시사 ‘주거불량지역분포현황’에 범어3동 다랑뱅이촌이 보인다. 1984년 기준으로 다랑뱅이촌에는 주택 276동이 확인된다.117)
117) 대구시, 대구시사 4권, 1995, 86-87쪽.
두루방산·두루산·두류산
‘두루방산·두류산’은 범어2동 법원 뒷산으로 현 ‘야시골 공원’이 위치한 산이다. 산이 마을을 ‘두루’ 에워싸고 있어 붙은 지명이라 한다. 두류산은 한자로 두류산(頭流山)이라고 쓰지만 주민들은 ‘두루방산·두루산’이라 불렀다고 한다.118) 또 지역민들은 법원 뒷산을 큰 두루방산, 쉬일목(메트로팔레스 아파트 인근) 부근을 작은 두루방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1954년 항공사진에 개발 이전 옛 두루방산이 보인다. 두루방산과 범어천 사이에 논밭이 펼쳐진 야시골이 있고, 두루방산 북동쪽 사면(현 박물관 수 일대)에는 대규모 공동묘지도 보인다. 1954년 항공사진을 참고하면 산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두루 펼쳐져 있고, 골짜기가 잘 발달 되어 있다. 이런 산 모양에서 두루방산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18)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84쪽.
밤자골·율전등(栗田嶝)·밤밧등
밤자골은 범어2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범어초등학교 뒷산 동쪽 골짜기로 범어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박물관 ‘수’ 인근까지다. 밤자골은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며, 마을 뒷산을 ‘밤자산’이라 불렀다. 밤자산 역시 밤나무가 많다는 뜻의 밤나무산(116m)에서 유래됐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남북으로 펼쳐진 밤자골이 보이고 골짜기 남쪽과 북쪽에 각각 10호 정도 민가가 보인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는 ‘율전등(栗田嶝)·밤밧등’으로 나타난다. 1970년대 지도에 밤자골은 밭농사 지대로 표시되어 있다.
배밀
배밀은 범어3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복개되기 전 범어천이 이 일대 언덕(범어동 2148) 아래로 흐를 때 항상 조각배 두어 척이 드나들며 배가 닿았던 물가 언덕이라는 뜻에서 '배밀'이라 불렀다. 지금의 범어 화성파크드림 아파트가 있는 언덕 부근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범어 화성파크드림 자리에 8-9호 정도 민가가 보인다.(‘돌암뱅이’ 사진 참조)
범어동 은행나무
범어동 은행나무는 범어네거리 그랜드호텔 쪽 교통섬 내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1468년(세조 14), 지금의 상동 268번지(상동시장 동쪽)에 처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19) 도시개발로 인해 두 차례 이전 끝에 현 위치에 자리 잡게 됐다. 첫 이전은 1981년 9월 30일, 지금의 상동 상화로 확장 때 주민들의 노력으로 옛 정화여중고(현 정화우방팔레스) 교정으로 옮겨졌다. 두 번째 이전은 2001년 4월 1일, 정화여중고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자 지금 위치로 다시 옮긴 것이다. 현재 이 은행나무는 원 줄기는 완전히 고사 상태이며, 가운데 부분에서 새 움이 나와 새 가지를 뻗고 있다. 높이 15m, 둘레 3m, 수령은 약 560년으로 추정되며(800-1,000년으로 보기도 한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있었던 곳을 따라 ‘상동 은행나무’라고도 한다.
범어동 은행나무에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은행나무가 상동에 있었던 시절, 여름이 되면 마을 노인들은 은행나무 그늘에 멍석을 펴고 윷놀이를 즐겼다. 하루는 지나가던 소년이 멍석에 물을 뿌리고 나서 멍석을 위로 던지니 멍석이 마치 연처럼 나무 위로 훨훨 날아갔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은행나무에 물을 뿌려 주는 사람에게 힘이 생긴다는 전설이 생겼다.
119) 1954년 항공사진에서도 상동 은행나무가 확인된다.
범어역(泛魚驛)
범어역은 조선시대 대구 교통·통신의 중심으로 지금의 범어동 대구여교와 범어네거리 사이에 있었다. 고려와 조선은 국가 교통·통신제도로 ‘역원’과 ‘봉수’를 운영했다. 역원(驛院)은 역과 원을 함께 이르는 말로 행정 중심 교통·통신망이고, 봉수는 군사 통신망이다. 이중 역은 왕명이나 공문서 전달 등 공무로 출장 중인 관원에게 역마와 휴식처 제공, 사신 접대, 공물 운송 등을 담당했던 관공서였다.
조선은 고려시대 ‘역참’ 제도를 계승한 ‘역도(驛道)’ 제도를 시행했다. 역도는 하나의 큰 역 아래 여러 개 작은 역을 묶은 교통체계이자, ‘경상도·전라도’ 하듯 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교통행정 구역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모두 41개 역도에 531개 역이 있었다. 이중 경상도에는 11개 역도가 있었다. 범어역은 청도 성현역을 중심으로 하는 ‘성현도(省峴道)’에 속한 속역으로 성현도에는 모두 17개 속역이 있었다. 한 역도를 관장하는 관리는 찰방(察訪)이다. 찰방은 현감과 같은 종6품이지만 현감보다 서열이 높았으며, 관찰사의 명만 따랐다. 찰방이 머무르는 역은 군현 관아 건물과 거의 유사했다. 찰방 집무소이자 숙소인 동헌과 내동헌, 역리 집무소인 작청(질청)을 비롯해, 사령청·형방청·장청·서청·창고·문루·마단120) 등이 있었다. 일반 역은 역장과 역리 집무소인 역관(驛官), 마구, 마단 등이 있었으며, 누정(樓亭)이 있는 역도 있었다.
범어역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규모가 커졌다. 성현역지(1871)에 의하면 범어역은 역촌에 속한 호구수가 212호, 역리 215명, 역노비 307명, 역마 15필로 성현도 속역 중 규모가 제일 컸다. 이처럼 범어역이 커진 것은 인근에 경상감영이 있어 내왕하는 이와 공문서 출납이 많았기 때문이다. 역을 이용하는 이는 소지한 마패에 따라 역마를 제공받았다. 정1품 대군이나 정승은 상등마 한 필과 하등마 여섯 필을, 7품에서 9품관은 중등마 한 필과 하등마 한 필을 제공받았다.
조선시대 역원제도는 1895년 폐지됐다. 범어역은 지금의 범어네거리 일원에 있었는데 그 터는 완전히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 수성구 역사적 장소 발굴 용역(2020, 수성구청) 자료집에서는 범어역 위치를 현 대구여고와 범어네거리 사이 ‘수성 범어W 아파트 일대’(범어동 195-30번지)로 비정하고 있다.121) 범어역 유물로는 ‘입마시정전방금절목비(立馬時情錢防禁節目碑)’가 남아 있는데 현재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있다. 이 비는 임오년(1762년 혹은 1822년)에 세운 것으로 과거 지금의 수성구청 자리에 있었던 범어못 남쪽에 있던 것을 1970년에 옮겨온 것이다. 비에는 범어역 역마 공급과 관련한 악습을 막기 위한 여러 조치가 사례별로 기록되어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현 범어네거리 위치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들 남쪽에 옛 동도초등학교와 동도초등 남쪽으로 200호가 넘는 범어동 큰 마을이 보이며, 들 동쪽에 큰 저수지 범어못이 보인다. 범어못은 1980년 이전에 매립되어 그 자리에 수성구청, 수성경찰서, 우방 아파트가 들어섰다. 대구부읍지(1899)에는 “범어역은 대구부 동쪽 9리에 있었는데 을미년(1895)에 혁파됐다”는 내용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도 범어역이 등재되어 있다.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네거리는 왕복 10차로 달구벌대로와 왕복 13차로 동대구로가 만나는 범어네거리다. 동대구로는 1974년 제정된 도로명으로 ‘파티마병원-동대구역-범어네거리-수성못’ 구간이다. 동대구역을 지나는 교통중심 도로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120) 마단(馬壇). 마신(馬神)을 모시는 제단, 마당(馬堂)이라고도 한다.
121) 같은 책에 소개된 주민 구술에 의하면 50-60년 전 현 대구여고 인근에 정씨가 운영하는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범어장(泛魚場)
조선 후기까지 범어동에 열렸던 시장이다. 대구부읍지(1899) 장시조(場市條)에 “범어장은 대구부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수북(守北)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는 내용이 보인다. 수성구 역사적 장소 발굴 용역(2020, 수성구청) 자료집에는 본래 범어장이 없었다가 1970년대 초 지금의 달구벌대로와 동도초등학교 사이에 범어장이 생겼다는 구술자료가 있다. 당시 범어동 주민들은 주로 방천시장, 서문시장을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위 내용을 참고하면 범어장은 조선 후기에 이미 사라졌다가, 1970년대 초 다시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범어제(泛魚堤)·범어지·범어못
현 수성구청, 수성경찰서, 우방 아파트 일대에 있었던 큰 못이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범어제는 수북에 있다. 둘레가 1,780척(약 540m)이고 수심이 5척이다”란 내용이 보인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범어제 북쪽과 남쪽에 민가가 일부 보이고 동쪽과 서쪽에는 좌우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범어제는 1980년 이전에 매립되고 1980년 4월 수성구청이 업무를 개시했다.122) 지명조사철(1959)에는 범어못에 대해 “옛날에는 소습지(小濕地)였으나 일제 시에 확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2) 현 수성구청은 처음에는 동구청으로 개청했다가, 1980년 초에 수성구청이 됐다.
삼강촌
삼강촌은 범어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으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부 자료에서는 지금의 범어2동 야시골 공원 남쪽으로 서술하고 있다. 삼강촌은 일제강점기 때 ‘삼강’이란 일본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삼강촌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야시골 공원 남쪽 일대라고도 하고 지금의 그랜드호텔 서쪽이라고도 한다.
야시골
야시골은 범어3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지금의 범어네거리 북서쪽 일대로 동대구로와 범어천로 사이쯤 된다. 옛날 이 골짜기에 야시(여우)가 많아 ‘야시골’로 불렸다고 한다. 야시골은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민가가 거의 없었다가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들어와 판자촌을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1954년 항공사진에는 위 구술자료와는 달리 야시골 일대는 논밭과 민가 몇 채만 보일 뿐 피난민 판자촌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근대 지도를 살펴보면 1970년 이후 야시골 일대에 본격적으로 주택이 들어서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촌(張村)·등넘이골
장촌은 범어3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으로 지금의 대구동천초등학교 인근이다. 장촌은 등 너머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등넘이골’이라고도 불렸다. 처음에는 창녕 조씨인 조국삼 씨가 야산이었던 이곳에 외딴집을 짓고 살았고, 그 후 달성 서씨, 월성 이씨 등 20여 호가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장촌이란 이름은 광복 당시 주로 인동 장씨(仁同張氏)가 촌락을 이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금의 동천초등학교 인근에 약 20호 규모의 장촌이 보인다. 북쪽으로는 옛 MBC 네거리에 있었던 ‘한골못’도 보인다.
주일골(注日谷)·도둑골·주곡지·지실못
주일골은 범어4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주일골은 수성구청 남쪽 뒷산과 경신고등학교 남쪽 뒷산 사이 골짜기다. 이곳은 예전에 지대가 낮고 습했으며 숲이 울창해 산적이 자주 나타나 나그네를 괴롭혔다고 전한다. 주일골이란 이름은 낮에도 산적 출몰이 잦아 이곳을 지날 때는 산적을 주의해야 한다는 뜻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옛날에는 주일골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관골(경남타운 부근)이란 자연부락이 있었고, 더 내려가면 골짜기 끝에 주곡지(지실못)가 있었다. 주곡지 일대에는 한때 덕원고등학교가 있다가 지금은 태왕아너스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 주곡지는 한 개가 아닌 남북 두 개의 못이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주일골에 대해 “옛날 어떤 사람이 죽어 묘터를 구하였던바, 이 고을 한자리에 쓰게 되어 그 묘터의 혈이 ‘쥐혈’이었으므로 이를 따라 쥐혈이 주일로 변한 것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주일골이 현 KBS방송총국-경남타운-태왕아너스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주일골은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쭉한데 주로 논이 많았다. 주일골 중간쯤에 민가 10여 호가 모여 있는 ‘관골’, 제일 남쪽에 ‘주곡지’가 보인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주곡제는 수북에 있다. 둘레가 400척(약 121m)이고 수심이 3척이다”란 내용이 보인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주일못에 대해 “주일골에 소재하는 못으로서 4283년(1950)에 확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주일골 남쪽 끝자락을 ‘도둑골’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곳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이상복 씨123)는 도둑골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옛날에 제가 살았던 도둑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범어못(지금의 수성구청) 옆에서 살다가 달구벌대로 확장으로 주일골의 가장 골짜기로 이사 가게 되었죠. 그 당시 그쪽엔 세 가구가 살고 있었고 저희 아버님께서는 세 가구 제일 뒤쪽에 있는 작은 밭에 그냥 집을 지어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경남타운 상가 삼거리 성당 밑 쯤이였죠. 그 골짜기 제일 끝 집에서 돼지우리를 짓고, 소를 키울 수 있는 움막도 집 뒤에 지어 돼지와 소 1-2마리를 키우며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아버님께서 돼지를 키우시고 저는 힘들게 중학교 다닐 때입니다. 그 골짜기 이름을 ‘도둑골’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도둑 골짜기라 했나 하니, 그 골짜기에 옛날 일본군이 파놓은 U자형 방공호가 5-6개가 있었습니다. 옛날 남의 소를 훔쳐서 그 방공호 속 몰래 잡아두었다고 해서 골짜기 이름을 도둑골이라 했다고 들었습니다. 여름엔 굴속에 들어가면 시원했습니다. 그래서 참 좋은 피서지이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 맘껏 들어가기가 서먹한 것도 사실이어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함께 굴속에서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정화여고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밑은 아파트가 개발되어 굴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기억 속의 옛날 추억이랄까요. 내 맘속의 그리운 골짜기···
123) 1958년생, 영남국악예술단장.
추모재(追慕齋)와 범어동 능성 구씨124)
추모재는 오랜 세월 범어동에 세거한 능성 구씨 도원수파 범어 종중 재실이다. 추모재에서는 음력 10월 15일 묘사를 거행한다. 이외에도 능성 구씨 문중 의례로 매년 음력 1월 5일 신년교례회와 음력 3월 15일 총회를 개최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수성구의 급격한 도시화로 오랜 세월 범어동에 자리 잡고 있었던 능성 구씨 세거지는 해체됐다. 하지만 그로 인해 늘어난 문중 자산과 문중 유산인 추모재, 선산(先山) 등의 문화경관을 통해 활발하게 문중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124) 수성구청,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 2021.
텃만당·리산(鯉山)·잉어더미·잉어덤
텃만당은 범어1동에 있는 나지막한 동산이자 자연부락이다. 텃만당은 현 천주교 범어대성당이 자리한 곳이다. ‘텃만당’의 ‘텃’은 ‘터·장소’를 의미하고 ‘만당’은 꼭대기·정상을 의미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텃만당은 글자 그대로 동산 정상의 넓은 평지다. 이곳은 옛날부터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텃만당에 그들의 신사(神社·수성신사)를 건립했다. 이후 아이들은 놀이터를 잃었고, 주민들은 농토를 잃고 일본인들의 소작농이 됐다. 이때 생겨난 말이 “왜놈 날일 한다.”다. 이 말은 일본인 농사일을 할 때는 일부로 성의 없이 느리게 한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125)
수성 신사는 광복 후 잠시 천주교 ‘범어공소’로 활용됐다. 이후 1948년 2월 신사 자리에 새 범어공소가 건립됐다가 2016년 지금의 범어대성당이 세워졌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서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휘어진 범어천 동쪽에 텃만당이 보이고 옛 범어공소 건물도 보인다. 텃만당 동쪽에는 현재까지 위치를 지키고 있는 옛 동도초등학교도 보인다. 예전에는 텃만당 북쪽에 범어시장이 있었는데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지금은 맛집거리로 변했다.
텃만당은 범어동이란 지명 유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범어(泛魚)란 지명은 ‘뜰 범’, ‘물고기 어’, 물 위에 떠 있는 물고기란 의미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텃만당 모습이 범어천에 떠 있는 물고기를 닮아 붙은 이름이다. 범어대성당이 있는 언덕은 남북으로 약 400m 정도 되는 길쭉한 언덕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남쪽으로 머리를 둔 커다란 물고기를 닮았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 ‘리산(鯉山)·잉어더미’란 산명이 등재되어 있는데 텃만당으로 추정된다. 범어대성당 내에 이러한 내력을 담은 물고기 조형물 범어동 유래비가 서 있다.
125)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제보자: 범어2동, 정희덕, 85세, 남, 채록일자 2009.1.12.
형제 분재(分財) 설화
옛날 범어동에 형제가 살았는데 재물에 욕심이 많은 형수로 인해 동생이 가난하게 살았다. 하루는 형수가 외출하면서 형을 가두어 두고 나갔다. 이때 동생이 형을 찾아오자 형은 동생에게 계교를 알려주면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형은 염소 흉내를 내며 미친 짓을 하고, 동생은 형수에게 형의 병을 치료할 명목으로 약값과 땅문서 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동생은 형이 시키는 대로 해 많은 돈을 모으고 땅문서도 갖게 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형은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왔고 이렇게 해 형제는 모두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수성구 범어1동에 전하는 이야기로 한국구비문학대계 7집 13책 722-730쪽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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