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영월 호장 엄흥도,
그가 대구 군위로 몸을 숨긴 이유(2)
글·사진 : 대구선비 송선비 송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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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 군위 은거 key-man, 군위 현감 정사종’
멸족의 위험을 감수하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까지 치른 영월 호장 엄흥도. 그는 아들 엄광순과 함께 지금의 대구시 군위군 산성면 화본2리 ‘신남촌 분토골’에 은거한다. 은거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10여 년을 보내고 향년 71세로 졸(卒), 분토골 북쪽 월곡(虫+越谷·가재골)에 묻혔다. 조상 대대로 영월 호장을 세습해 온 영월 토박이 엄흥도. 그는 무슨 연유로 영월에서 600여 리 떨어진 군위로 왔을까? 여기에는 ‘야은(野隱) 정사종(丁嗣宗)’이란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영월군 영월읍 동강변에 자리한 민충사, 금강정, 낙화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군위현감정사종충의비’와 '해설판'이 있다. 비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정사종은 압해·나주 정씨로 호는 야은이다. 세종 때 전의감 부정을 지낸 정거실(丁居實)의 아들이다. 무과 출신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경호원)를 지냈고 이후 군위 현감을 지냈다. 사육신 사건과 순흥부에 유배된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모의 때 가담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후 관직(군위 현감)을 내려놓고, 단종 유배지 영월로 낙향해 밤낮으로 단종의 안위를 걱정했다. 1457년 10월 24일 세조에 의해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엄흥도를 도와 단종 시신을 수습한 후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죽기 전 아들 정중경(丁仲敬)에게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며, 후손들은 나무하고 소 기르며 공명을 구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992년 비를 세운다. 현재 영월문화원 주관으로 충절사(忠節祠)에서 추모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정사종은 압해·나주 정씨 영월 입향조 정거실(丁居實)의 아들로 나주 정씨 11세다. 「정사종충의비문」에는 무과 출신으로 나타나지만, 나주정씨족보 인물편에는 ‘무과 급제’로, 본문에는 무과 급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기타 「정사종충의비문」 내용은 나주정씨족보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정사종충의비문」에서 키워드를 뽑아보면 ‘세자익위사’, ‘사육신 사건’, ‘금성대군 사건’, ‘군위 현감’, ‘영월’, ‘엄흥도를 도움’, ‘투신’ 등이다. 이들 키워드를 따라가면 엄흥도의 군위 은거에 대한 의문의 해답 일부를 찾을 수 있다.
‘세자 경호원 및 수행비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사는 조선시대 왕세자를 호위하고 보좌하던 관청이다. 정사종이 정확히 어느 임금 때 세자익위사를 지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사종이 세종·문종·단종 시기 살았던 인물이란 점을 고려하면, 문종(1421-1450) 혹은 단종(1450-1452)의 세자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둘 중 어느 시기이건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시기에 정사종과 단종이 서로 인연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문종은 왕세자 시절이었던 1441년(세종 23) 단종을 보았고, 이후 10년을 더 왕세자로 있었다. 이때 정사종이 세자익위사로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왕세손인 단종과도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만약 정사종이 단종의 세자 시절 익위사였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정사종은 군위 현감으로 있었을 때 단종이 영월로 유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군위 현감직을 내려놓고 영월로 와 단종의 안위를 걱정했다. 정사종은 무사로서 그것도 다음 왕이 될 왕세자의 호위무사를 지낸 엘리트 무사였다. 한때 자신이 주군으로 모신 이의 안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몰락한 주군을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동서고금 역사에서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인 것도 사실이다.
‘사육신 사건’, ‘금성대군 사건’
1455년(단종 3, 세조 1) 단종 나이 15세.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12세에 임금에 올랐다가 15세에 물러났으니, 단종은 햇수로 4년간 왕위에 있었다. 단종 16세 때(1456년) 사육신에 의한 단종 복위 사건이 있었고, 17세 때(1457년) 순흥에 유배 중이던 다섯 번째 숙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이 있었다. 두 사건 모두 역모 사건이었던 만큼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정사종충의비문」과 나주정씨족보에는 정사종이 이 두 사건에 모두 연루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좀 더 신뢰할 만한 사료적 근거는 아직 부족하다. 여하튼 정사종은 세조가 아닌 단종을 정통성을 지닌 조선의 임금으로 생각했다.
‘군위 현감’
정사종의 마지막 관직은 군위 현감이었다.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정확한 부임 시기는 알 수 없다.(군위읍지에는 조선 후기 고을 수령 자료만 남아있다) 정황상 순흥부로 유배 간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시기(1456-1457)쯤으로 추정된다. 금성대군 단종 복위 사건은 금성대군과 당시 순흥 부사 이보흠이 주도했고, 영남의 여러 고을 수령과 수많은 선비가 동참했다. 순흥은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군위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군위군이다.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가까운 거리다. 「정사종충의비」·나주정씨족보 기록대로라면 당시 군위 현감 정사종은 금성대군 단종 복위 사건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다.
‘영월’, ‘엄흥도를 도움’, ‘투신’
군위 현감 정사종은 1457년 여름, 관직을 내려놓고 영월로 간 것 같다. 이때 가족과 함께 영월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나주 정씨 ‘야은공파’에서는 영월 입향조를 정사종의 아버지 정거실로 설정하고 있다. 그해 가을 단종은 유배 4달 만에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차디찬 겨울 동강에 던져진 단종의 시신. 그 누구도 단종의 옥체에 접근할 수 없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라는 세조의 엄명 때문이었다. 이때 영월 호장 엄흥도가 나섰다.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선을 행하다 화를 입는다면 달게 받겠다) 그런데 이때 엄흥도와 함께 한 의로운 이들이 더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얼마 전까지 군위 현감이었던 정사종이었다. 단종 시신 수습 당시 정사종과 엄흥도 사이에 혹시 이런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을까?
“엄호장! 이제 어쩔 셈이오. 죽을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혹여나 도망가 살 생각이라면 경상도 군위로 가시오. 내가 그곳 수령을 지냈잖소. 그중 화본리는 첩첩산중이라 숨어 살기에 적합하오. 그곳에 믿을만한 선비 한 분도 알고 있으니 내가 소개장을 써 주겠소”
이후 정사종은 동강에 몸을 던졌고, 엄흥도는 영월을 떠났다. 구전·야사에서는 단종 죽음 이후 단종을 모셨던 종인과 시녀들도 모두 동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 것으로 나온다. 그들이 투신한 곳으로 알려진 곳은 낙화암이다. 아마 정사종이 몸을 던진 곳 역시 낙화암이었을 것이다. 현재 낙화암 인근에는 민충사(愍忠祠)란 사우가 있다.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종인과 시녀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앞서 「정사종충의비문」 말미에 나온 ‘충절사’ 역시 영월읍내 있는 사우로 ‘엄흥도·정사종·추익한’ 3인을 제향하는 사우다.
(다음에 계속)
2026년 8월 4일 화요일 오후
대구선비 송선비 송은석 拜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청산님 감사합니다^^
훌륭하신 분을
뵙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네^^
구름따라 흘르님^^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무탈하시고 늘 행운이 함께 하시길..
송은석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