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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YOUNG SOCCER(영싸커) 원문보기 글쓴이: 상파울로
가난과의 싸움에서 이겼다-설기현 [제1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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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 사상 가난과 역경 속에서 헤매야했던 선수가 한 두 명이 아니지만 이처럼 지독한 가난과 역경을 겪어야 했던 선수는 1979년 1월 8일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난 설기현뿐이었을 것 같다. 4형제 중 둘째였던 설기현은 "축구가 좋아서"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서" 축구부 숙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나 하나의 입이라도 덜어드린다면 어머니의 무거운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 질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갸륵한 효성 때문이었다. 학교재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축구부 숙소에 들어가려면 첫째 축구실력이 뛰어나게 우수해야 했고 둘째 가정형편이 지극히 어려워야만 했다. 설기현이 축구부 숙소에 들어갈 것을 원했을 때 학교 측 축구부장과 감독은 두말없이 승낙했다. 설기현이야말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1학년 때부터 축구부 숙소에서 기거하게 됐던 설기현은 학교의 방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직 축구에만 열중했다. 그렇게 해서 주문진 중학을 졸업할 때는 강원도에서 가장 강한 고교축구팀을 거느리고 있는 강릉 상업고등학교로 스카우트됐다. 강릉상고 때도 역시 키가 크면서도 민첩성이 있어서 기회포착에 능했다. 최전방 공격수로 언제나 뛰었던 설기현은 신체적인 우수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매 경기에서 골을 작열시켰다. 이때 설기현은 광운대학교 1학년이었으며 축구선수로서의 기량은 물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다. 여기서 이미 한국팀은 예선탈락이었으나 그래도 4월 11일 말리팀과의 경기에서는 4-2로 이겼다. 축구라는 것이 특히 나이 어린 청소년축구선수들의 경기는 참으로 예상을 빗나갈 때가 많다. 1년 전에 있었던 아시아 지역예선 겸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한국팀이 결승전에서 일본팀을 꺾으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팀은 준우승팀 자격으로 세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 겨우 출전할 수 있었는데 한국팀은 예선전에서 탈락했고 일본팀은 세련되고 조직적인 플레이로 결승전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설기현은 축구선수로서의 성장은 순탄했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바로 국가대표축구팀에 발탁됐던 것이다. 2000년 10월 12일부터 10월 29일까지 레바논에서 열린 제12회 아시안컵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팀은 같은 해 4월 5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있은 지역 예선전에서 라오스팀을 무려 9대 0으로 깨뜨렸는데 이 경기에서 설기현은 3골을 성공시켰다. 가볍게 지역예선을 통과한 한국팀은 정작 아시안컵 본선에서 중국팀과 1-1, 인도네시아팀에게 3-0승, 쿠웨이트팀에게 0-1패를 기록했다. 다행스럽게도 와일드카드 제도의 혜택으로 8강전에 진출해서 이란팀을 2-1로 눌렀으나 준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팀에게 1-2로 지고 말았다. 인구밀도는 세계 제1위지만 공업과 농업이 고루 발달해서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국가다. 각종 스포츠가 성행하는 유럽의 한복판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벨기에에서도 프로축구리그가 거행되고 있으며 설기현은 2000년 7월 앤트워프팀에 입단했다. 앤트워프팀에서의 설기현은 그 실력이 평균수준 이하였다. 설기현은 아버지의 탄광 사고사와 어머니의 눈물겨웠던 인생을 회상하고 또 회상하면서 벨기에 선수들과 겨뤘다.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설기현은 그 원리대로만 했다. 신체적인 조건에 있어서나 체력에 있어서 벨기에 선수들보다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었던 설기현은 1년 만에 평균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우수선수의 대열에 끼게 됐다. 이때 설기현은 매일 밤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고 한다. 다음날 경기에서 벌어질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자기가 취해야 할 동작 하나하나를 그려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프로바둑기사들이 머릿속으로 혼자 바둑을 두면서 새로운 수를 찾아내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럴 때마다 설기현은 다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는 것이었다. - 저작권자 ⓒ축구공화국.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www.footballrepubli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