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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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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문학 스크랩 2017.07.15 하동 지리산 서산대사길
지리산문학관.한국문학문화재현창회 추천 0 조회 103 18.09.10 10: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번 산행은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짧고 의미있는 곳으로 여행겸 식도락 트레킹지인

   경남 하동의 지리산 옛길 중 서산대사길 트레킹에 나섰습니다.


   이 곳은 하동군에서 조성한 지리산 옛길 중 서산대사길로 경남 하동의 화계장터에서 시작하여

   쌍계사를 거쳐 의신계곡을 지나 지리산 주능선의 벽소령을 넘어가던길 중에서 하동군 화개면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이어지는 옛길 4.2km를 말합니다.


   서산대사 길은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길을 따라 올라가다 쌍계사로 들어가지 말고 직진으로

   진행하다가 다시 칠불암가는 삼거리에서 직진 방향으로 가면, 신흥교라는 교량 직전 좌측으로

   시작되는 길이며, 옛날 신흥사가 있던 신흥마을과 의신사가 있던 의신마을 연결하는 길로

   서산대사가 16세 때 화개동으로 유람하다 출가해 두 차례에 걸쳐 18년 동안이나 지리산에

   머무는 동안 다니던 옛길을 말하기도 합니다.


   화개동은 지리산 계곡 중에서 사찰이 제일 많았던 계곡으로 지금도 사찰터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고, 그런 연유로 서산대사의 출가지임과 동시에 득도지인 원통암은 의신마을에서

   대성마을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서산대사길은 산행내내 우거진 숲너머로 계곡의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그야말로 힐링길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당초 트레킹은 신흥마을에서 시작해서 의신마을을 거쳐 원통암을 지나, 세석산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대성마을까지 갔다가 다시 의신마을로 되돌아 나오는 것으로 약 10km의 거리를

   계획했지만 중간에 많은 비로 인하여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는 의신마을에서 식도락을 즐기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사전에 준비한 삼겹살과 붕장어구이로 의신마을의 산악인의 집에서 운영하는 평상 2개를

   빌려 비오는 날씨에 운치있게 피서다운 피서를 즐겼습니다.


   의신마을에는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과 지리산의 빨치산 행적을 전시해 놓은 지리산 역사관이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산행지로도 추천할 만한 트레킹지였습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약 4시간에 10km의 코스로 진행되었겠지만 우천으로 인한 코스 단축으로

   약2시간에 4.3km의 거리를 즐겼습니다.


   (서산대사?)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휴정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향관(鄕官)을 지낸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마저 죽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옮겼다.

   12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힌 다음 15세 때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청학동(靑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유람하다가

   숭인장로(崇仁長老)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전등록 傳燈錄〉·〈염송 拈頌〉·〈화엄경〉·〈능엄경 楞嚴經〉·〈반야경〉·

   〈원각경 圓覺經〉 등의 교리를 탐구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머리를 깎았으며,

   1540년(중종 35)에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1549년(명종 4) 승과에 합격했으며,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금강산·태백산·오대산·

   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선조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다.

   이때 선조와 휴정이 주고받은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했다.

   자신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했으며,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나가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렸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당시 불교는 조선왕조의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국가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정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했다.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

   (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교학에 대해서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입장에서 그는 종래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중시해온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했다.

   또 휴정은 염불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염불은 사후에 서방극락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아미타불을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차원이었다.

   즉 염불도 선 수행의 일종이었다.

   실천으로서 그가 인정한 경전공부와 선 수행 및 염불은 조선 후기에 불교교단의 공통된

   수행방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유(儒)·불(佛)·도(道)의 3교는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는 3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에 대비되는 불교의 법통관을 새로 제시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교석 禪敎釋〉·〈선교결 禪敎訣〉·

   〈심법요초 心法要抄〉·〈삼가귀감 三家龜鑑〉·〈설선의 說禪儀〉·〈운수단 雲水壇〉

   등이 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워졌으며, 해남 표충사(表忠祠)와

   밀양 표충사 및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서산대사의 스승인 부용 영관?)

   호는 부용·은암·연선도인. 8세 때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면서 고기 다래끼를 맡겼더니,

   산 것을 모두 물에 놓아주었다.

   13세 때 몰래 집을 나와 혼자 덕이산에 가서 고행하는 선사에게 의지하여 3년 동안

   공부하다가 승려가 되었다.

   17세 때 신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위봉에게 선을 배웠다.

   그후 구천동에 가서 혼자 집을 짓고 9년 동안 좌선에 열중했다.

   1509년(중종 4) 용문산으로 들어가서 조우로부터 선을 배우고, 1514년에 청평산에서

   학매에게 현미한 뜻을 물었다.

   1519년 금강산 세존암에서 조운과 함께 2년을 지냈으나 결국 미숙함을 느껴 인연을 끊고,

   미륵봉 내원암에서 9년 동안 묵언좌선했다.

   지리산으로 지엄을 찾아가 20년 동안 가졌던 의심을 풀고, 3년 동안 모시다가 지엄이 죽자

   스승을 대신해서 대중을 인도하여 영남과 호남의 대종사가 되었다.

   그후 40년 동안 황룡산·팔공산·지리산 등지에 살다가 1571년(선조 4)에 입적했다.

   제자로는 휴정·법융·영응 등이 있다.



   (산행개요?)

   1.산행날짜 : 2017.07.15(토)      날씨 : 흐림후 비옴

   2. 산행시간 : 10시52분 ~ 12시43분(1시간50분)

   3. 이동, 도상거리 : 4.25km, 4.20km

   4. 평균속도  휴식포함 : 2.30km/h

                     휴식제외 : 2.30km/h

   5. 고도 : 354m ~ 195m(159m)

   6. 오르막 거리, 속도 : 3.52km, 2.30km/h

   7. 내리막 거리, 속도 : 0.73km, 2.28km/h

   8. 산행코스

      지리산 신흥마을 신흥교 ▷ 서산대사 의자바위 ▷ 약수터 ▷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

      ▷ 출렁다리 ▷ 의신마을 산악인의 집


   ▼ 산행안내지도입니다. 

      좌측 하단 서산대사길 입구에서 출발하여 의자바위,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 이정표까지

      이동후 우천으로 종료하였습니다.

      당초 예정은 이정표에서 원통암을 거쳐 대성마을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코스였습니다.


   ▼ 산행안내의 개략적인 지도입니다. 


   ▼ 서산대사길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니다.

      위쪽 하늘색 선은 백두대간길 중 지리산 주능선길이고,

      지리산 주능선 영신봉에서 아래로 내려온 하늘색 선은 낙동정맥길입니다.


   ▼ 서산대사길은 우측으로 화개천을 끼고 계곡길로 이어지며,

      종료지점에서 우측으로 2.1k표시점이 대성마을 지점입니다.

      이 연결되는 길은 세석산장/거림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 등고선지도에 나타낸 서산대사길 궤적입니다.


   ▼ 이동궤적의 해발고도표로 첫 들머리에서 지속적으로 오르막을 올라가는 지형세입니다.


   ▼ 10:30 아침 7시30분에 부산 서면에서 출발한 버스는 3시간의 이동끝에 하동군의

      벚꽃도로로 접어듭니다.

      벚꽃을 볼 계절은 지났지만 우거진 벚나무는 벚꽃이 폈을 때를 연상케하고도 남습니다.


   ▼ 10:54(00h02) 서면에서 들머리까지는 약 3시간30분이 걸렸습니다.

      보이는 곳이 들머리가 있는 하동군 화개면 신흥마을의 신흥교입니다.

      앞에 보이는 도로는 의신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전경입니다.


   ▼ 10:54(00h02m) 신흥교에서 바라본 신흥마을 쪽 방향이고 우측 들머리가 보입니다.


   ▼ 10:55(00h03m) 좌측 하단부에 현위치가 있습니다.


   ▼ 10:55(00h03m) 우리가 진행해야할 이동길이 현위치에서 대성리 의신마을까지이고,

      추가 산행이 필요하신 분들은 대성골로 접어들엇다가 되돌아 나오게 됩니다.


   ▼ 10:55(00h03m) 서산대사길은 의신마을까지 도상거리 4.2km입니다.


   ▼ 11:00(00h08m) 들머리에서 바라본 신흥마을의 신흥교 전경입니다.


   ▼ 11:00(00h08m) '사철채송화'입니다. '송엽국'이라고도 합니다.


   ▼ 11:01(00h09m) 이동길은 급하지 않은 서서히 올라가는 지세(地勢)로 이어집니다.


   ▼ 11:01(00h09m) 서산대사길은 이동방향으로 우측은 화개천을 끼고,

      우측은 절벽 혹은 평지로 바뀌어가며 연결됩니다.


   ▼ 11:02(00h10m) 지리산 옛길 신흥에서 의신구간의 입구입니다.


   ▼ 11:03(00h11m) 큰 바위 밑을 지나갑니다.


   ▼ 11:05(00h13m) 우측으로는 화개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 11:07(00h15m) 길은 순탄하고 걷기 좋은 길로 이어집니다.

      날씨만 좋다면 울창한 수목으로 그늘이 만들어져 시원한 이동길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 11:09(00h17m) 좌측으로는 낙석주의, 우측으로는 추락주의 경고문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 11:09(00h17m) 서서히고도를 높이는 길이라 약간의 오르막도 나타나곤합니다.


   ▼ 11:11(00h19m) '까치수염'입니다.


   ▼ 11:13(00h21m) 옛길 곳곳에도 고사리 등의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 11:14(00h22m) 이곳은 울창한 수풀을 벗어나 하늘이 열리는 곳입니다.


   ▼ 11:18(00h26m) 위험지역에는 안전철책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 11:19(00h27m) 좌측으로 절벽들이 곳곳에 바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 11:21(00h29m) 의신옛길이 지리산 표식 34번 등로인 것 같습니다.

      들머리에서 1.7km 이동 후 만난 34번 표시목 첫번째 위치 표시목입니다.


   ▼ 11:22(00h30m) 진행길 좌측으로 곳곳에 조그마한 폭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 11:22(00h30m)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중간중간 약간의 오르막을 만납니다.


   ▼ 11:25(00h33m) 약간의 오르막 후에는 평탄한 힐링길이 연결됩니다.


   ▼ 11:27(00h35m) 산행시작 약 35분만에 서산대사의 도술 의자바위에 도착했습니다.


   ▼ 11:27(00h35m) 의자바위 실물인데 자연석인데도 정말 의자와 꼭 같이 생겼습니다.


   ▼ 11:29(00h37m) 의자바위에 앉아보기도 하고 잠시 쉬었다가, 이동하면서 뒤돌아본 의자바위

      쪽의 전경입니다.


   ▼ 11:32(00h40m) 산행 시작후 약 2km를 이동했습니다. 목적지까지 2.4km가 남았습니다.


   ▼ 11:35(00h43m) 걷기 좋은 힐링 산길이 이어집니다.


   ▼ 11:40(00h48m) 서산대사길 가운데 내리막이 가장 긴 데크계단을 지나갑니다.


   ▼ 11:44(00h52m) 내리막을 지나자 좌측으로 옛날 집터 같이 생긴 넓은 공터가 나타납니다.

      위치표시목 세번째인 34-03번 표시목을 지납니다.


   ▼ 11:45(00h53m) 좌측 집터같은 공터를 끼고 이동이 계속됩니다.


   ▼ 11:47(00h55m) 계곡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지는 않았습니다.


   ▼ 11:47(00h55m) 곳곳의 담(潭못담)에는 위험 표식 및 구조용 장비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 11:51(00h59m) 계곡 건너편에 민가도 보입니다.


   ▼ 11:55(01h03m) 들머리인 신흥마을에서 출발한지 한 시간만에 약수터에 도착합니다.


   ▼ 11:55(01h03m) 목적지인 의신마을까지는 약 1.6km가 남았습니다.


   ▼ 11:55(01h03m) 위치표시목 4번째 표시목입니다.

      평균 600m마다 설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11:55(01h03m) 지리산 옛길 중 서산대사길에 대한 설명문입니다.


   ▼ 12:01(01h09m) 위치표시목 다섯번째 표시목으로 이곳에서부터 비가 많이내리기 시작합니다.


   ▼ 12:03(01h11m) 준비해간 비옷들을 꺼내입고 이동합니다.


   ▼ 12:29(01h37m) 계속되는 비로 촬영이 불가했지만 이곳부터는 비의 량이 줄어들어....

      앞에 보이는 마을이 의신 마을입니다. 운무로 덮힌 모습이 정감이 가는 전경입니다.


   ▼ 12:30(01h38m) '원추리꽃'입니다.


   ▼ 12:30(01h38m) 옛길 날머리 상징물을 지나갑니다.


   ▼ 12:30(01h38m) 신흥마을에서 출발하여 안내문의 현위치까지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지나왔던 계곡 건너편으로 계곡을 따라 1023번 지방도로가 지나갑니다.

      쌍계사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가는 1023번 지방도는 화개천과 나란히 의신마을까지

      이어집니다.

      원래 1023번 지방도는 하동군 화개면에서 함양군 함양읍으로 이어지는 도로지만,

      지리산 벽소령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도로는 끊겼지만 벽소령은 예부터 하동군 화개면과 함양군 마천면을 이어주던 교통로였다.


   ▼ 12:31(01h39m) 원통암과 서산대사에 관한 유래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문을 다시 옮기면?)

      지리산 덕평봉의 남쪽 아래 해발 700m고지에 자리한 원통암은 신라말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오며, 옛 의신사(현 의신마을터)의 31개 산내 암자 중 하나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이다.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숭인장노, 추월조능, 원오일진스님 등 많은 고승 대덕들이

      머물던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조계종의 조사(祖師)인 벽송대사(碧松大師, 1464 ~ 1534)가 마천골에

      초막(현 벽송사)을 짓고 수도할 때 많은 제자가 운집(雲集)하여 지리산 일대가 대선림

      (大禪林)을 이루었다.


      운학(雲鶴, 서산대사의 아명))은 15새 때 동학 5 ~ 6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다 원통암에

      들렀는데 숭인장노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출가(出家, 1534), 21세에 삭발득도(1540)했다.

      운학이 숭인장노와 영관대사의 지도 아래 삼철굴, 의신사, 대승암, 원통암, 원적암, 은산암

      등에서 수행하던 어느날, 봉성(鳳城, 현 구례) 성촌마을을 지나가다 대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불조(佛祖)의 심인을 깨달아 부용영관대사의 법맥을 이엇다.

      33세에 승과에 급제한 후 교종판사, 선종판사 그리괴 최고 승직인 선교 양종판사직에 오르고,

      선종의 총본산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그러나 이내 사직하고 지리산으로 돌아와 내은적암, 황령암, 능인암, 칠불암 등에 머물면서

      퇴락된 가람을 중수하고 '삼가귀감'(유가, 도가, 삼가귀감)을 저술했다.


      훗날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조직하고

      도총섭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묘향산 원적암에서 85세에 입적하였다.

      대사는 최초로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였으며, 나아가 유, 불, 선 3교를 회통하여 국론을

      대통합으로 이끌었고, 많은제자를 길러내 조선불교 중흥에 이바지하였다.

 

      원통암은 토굴같이 작은 암자이나 지리산 심장부에 해당되는 곳이다.

      풍수지리설로는 청룡백호가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고, 앞에는 백운산 세 봉우리가 안산으로

      우뚝 솟아 마치 청학이 날갯짓하며 비상을 준비하는 형국이다.

      에로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는 천혜의 명당터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구한말 화재로 폐사된 것을 1997년 7월 인법당과 산신각을 복원하였고, 2011년 11월에

      서산선문(西山禪門)과 청허당(淸虛堂)을 새로 짓고 서산대사 영정을 청허당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불교 중흥조이며 구국(救國)의 승병장인 서산대사의 행화도량 원통암은 온 국민과

      함께 잘 보존해야 유서깊은 문화유산이다.


   ▼ 12:31(01h39m) 지리산 생태복원을 위한 완충지대라고 합니다.


   ▼ 12:31(01h39m) 반달가슴곰 복원을 위한 체험 생태학습장에 설치된 안내판입니다.

      현재 지리산에는 2017.7월현재 47여 마리의 반달곰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 12:31(01h39m) 반달가슴곰의 동면과 출산에 대한 설명입니다.


   ▼ 12:31(01h39m) 반달가슴곰의 생태적 특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 12:31(01h39m) 반달가슴곰의 특징에 대한 글입니다.


      (반달가슴곰?)

      식육목 곰과의 포유류. 아시아흑곰의 일종으로 온몸이 검다.

      앞가슴에 반달처럼 생긴 V자 형 무늬가 하얗게 선명하다.

      이 무늬는 개체마다 크기와 모양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간혹 없는 것도 있다.

      불곰에 비해 작아 몸 길이 약 1.8m, 꼬리 길이 약 8cm, 몸무게 약 150kg 전후이다.

      이마는 넓고 주둥이는 짧다. 귀는 큰 편이며 양옆으로 돌출해 있다.

      발에 비해 발가락은 짧지만 발톱은 날카로워 나무껍질을 벗길 수 있을 정도이다.

 

      잡식성으로 노루나 산양 같은 동물을 잡아먹기도 하지만 주로 도토리, 머루, 산딸기 같은

      나무 열매나 식물의 어린 싹, 잎, 뿌리 등을 캐먹는다.

      곤충의 애벌레나 개미를 핥아먹기도 하는데 벌꿀은 특히 좋아하는 먹이이다.

      계곡의 가재나 개울의 물고기, 조류의 알이나 새끼도 가리지 않고 먹으며 식량이 부족할

      땐 민가로 내려와 농작물을 훼손하기도 한다.

 

      7∼9월에 짝짓기를 해 이듬해 2~3월이면 2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는다.

      임신기간은 210일 전후이다.

      새끼는 성장속도가 빨라 3개월쯤 되면 어미 뒤를 쫓아다닐 정도가 되고 6개월이면 젖을 뗀다.

      수명은 보통 30년 내외이다.

      바위굴이나 큰나무의 구멍을 찾아 들어가 겨울잠을 자고 3월 하순까지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야행성이고 단독생활을 하며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 중국의 북동부, 연해주 등지에 분포한다.

      국내에서는 백두산 일대와 설악산, 지리산 등지에서 채집한 기록이 있으나 1983년 설악산에서

      포획된 것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일제 때 시행한 해수구제사업과 웅담 선호에 따른 남획으로 절멸의 위기에 처하자 1982년

      천연기념물 제329호로 지정하였고, 2004년부터 종 복원사업을 전개하여 지리산에 방사하고

      있다. 2012년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 12:31(01h39m) 생태체험관 앞의 모형입니다.


   ▼ 12:31(01h39m) 베어빌리지로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입니다.


   ▼ 12:32(01h40m) 베어빌리지에서 의신마을로 이동하는 출렁다리에서 바라본 계곡 전경입니다.


   ▼ 12:33(01h41m) 지나온 출렁다리입니다.


   ▼ 12:33(01h41m) 계곡 하류 쪽으로 바라본 전경입니다.


   ▼ 12:34(01h42m) 의신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지나온 출렁다리 전경입니다.


   ▼ 12:34(01h42m) 수입종인 '가우라'라는 꽃입니다.

      이곳을 날머리로 오늘 산행은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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