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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에서 맺은 인연, 아름다운 사람들끼리 떠나는 이야기와 휴식이 있는 하루나들이
홍유릉, 수종사, 두물머리 그리고 어비계곡 골골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
두물머리에서 바라 본 예봉산과 한강
성 재 2005년 8월 16일
1.코스 서울 - 내부순환도로 - 46번 경춘국도 - 금곡 - 홍유릉 - 매표소에서 나오자마자 좌회전 팔당,덕소 방향 동막경유 약 1.1km 지점 삼거리에서 13번 시군도로 좌회전 - 사리메기 삼거리에서 86번 시군도- 김상용선생묘 앞 - 와부읍(덕소)우회도로 - 덕소중교 - 6번 국도 - 팔당대교 입구 - 6번, 45번 구도로(다산 정약용 유적지 방향) - 팔당댐 - 조안면 - 양수대교 건너기 전 삼거리에서 영화촬영소 방향으로 직진 - 송촌리 - 운길산 수종사 - 45번 국도로 나와 우회전 - 양수대교 - 남한강과 북한강의 개미기도랑이 만나 온전히 한강이 되는 곳, 두물머리 - 6번 국도로 나오자마자 우회전 - 양서면 사무소와 양수리역 방향 1번 국가지방도로 좌회전 - 부용리 정창손 묘 - 동고 김준경 묘 - 목왕리 한음 이덕형 묘와 지장사 - 김사형 신도비와 제각 - 수릉리 - 시인의 마을 - 자연체험학교 숲을 보는 아이들 - 98번 국지도 삼거리에서 서종면 문호리 방향으로 좌회전 하지 말고 곧장 직진 - 카페 고모령 - 도장리 - 정배리에서 통방산, 명달리, 노문리 방향으로 좌회전 하지 말고 곧장 직진 - 중미산 자연휴양림 - 37번 국도에 올라서면 좌회전 할 것 - 서너치 고개 - 유명산 자연휴양림 입구(가정리)로 우회전 하자마자 어비계곡으로 가는 아치형 간판이 있는 길로 좌회전 할 것 - 어비계곡 끝까지 직진 -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어 있는 매표소 건물이 나온다. 곧장 비포장 또는 시멘트길이 나오는 산속으로 계속 직진 - 계곡 중간 쯤에 다리를 건너자마자 민간 산불감시와 음식점을 겸하는 가옥이 나온다. 이 집 닭매운탕과 백숙은 유명해서 신문이나 잡지 또는 방송을 많이 탄 집이다. 바로 이 집 주변이 가장 경관이 좋고 쉬기에도 가장 좋다. 상류로 가면 갈현이라는 마을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만 못하다. 특히 이 집 미처 가기 전 계곡의 큰 바위들이 있는 곳은 물놀이하기에도 그만이다. 이 집에서 식사와 닭을 시켜 먹으면 평상에서 실컷 놀기에도 좋다.계곡물이 죽여준다. 가능한 오전 중에 홍유릉과 수종사 그리고 두물머리를 둘러보고 곧장 어비계곡으로 가서 오후 내내 차고 맑은 계곡물에 탁족하면서 술 한잔 하면 기분 끝내준다.
2.한강
한강은 아득한 구석기, 신석기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과 영욕을 같이 해온 강이며 우리의 삶자리며 역사 그 자체이다. 누가 한강을 지배하는가에 따라 이 땅의 주인과 문화가 바뀌어왔다. 하여 한강은 우리 역사의 현장이고 무덤이며 오늘을 내일로 강물에 끝없이 실어내는 국토의 허리이기도 하다.
● 한강의 시대별 이름
한강의 이름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리어 왔다.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과 임진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帶水)라 불렀다. 고구려 시대는 아리수(阿利水), 백제는 욱리하(郁里河)라 했으며, 신라는 상류를 이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 불렀다. 신라시대에는 또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웠는데 왕봉현(王逢縣)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행주 지역인데 한강을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했다. 여기에서 한산이란 한산주(漢山州)이며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를 가리킨다. 또 독(瀆)이란 바다로 직접 들어가는 강이란 뜻인데 곧 북독이란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 큰 강을 의미한다.
고려 때는 ‘열수또는 모래가 많아 사평도(沙平渡), 혹은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불렀다. 그 이전에 백제가 동진(東晋)가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한수(漢水)라 불렀으며, 그 뒤부터 옛 이름은 차츰 없어지고 마침내 한수 또는 한강(漢江)이라고만 불리어졌다.
한강은 본래 우리말의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한은 크고 넓고 길다는 의미이다. 가람은 강의 고어(古語)이다.
지역에 따른 이름
1486년 조선조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한강은, 한강(漢江)은 도성 남쪽 10리 지점 곧 목멱산(木覓山:남산) 남쪽(漢南洞)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 고려조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의 오대산 우통(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며 원주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섬강)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며 두모포(豆毛浦: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이 되고 용산강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고, 시흥현 북쪽에 이르러서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부 북쪽에서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위와 같이 한강의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한강은 한남동 남쪽 지역의 냇물 이름이지 모든 구간에 걸친 명칭은 아니다.
옛기록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지역에 따른 한강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팔당댐 부근을 도미진(渡迷津), 광장동 앞을 광진(廣津:광나루), 송파 부근을 삼전도(三田渡), 뚝섬과 옥수동 앞을 두모포(豆毛浦) 또는 동호(東湖), 한남동 앞을 한강, 동작동 앞을 동호(銅湖) 또는 동작강(銅雀江), 노량진 앞을 노들강 또는 노강(鷺江), 용산 앞을 용산강, 마포 앞을 삼개 또는 마포강, 서강 앞을 서호(西湖) 또는 서강(西江), 양평동 부근을 양화도(楊花渡), 가양동 앞을 공암진(孔巖津), 고양군 행주 부근을 왕봉하(王逢河), 김포 북쪽은 조강(祖江)이라 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도에서 한강은 발원지 태백시 창죽동 금대산 (고목나무샘과 검룡소)에서부터 하구인 김포군 하성면 보구곶리 앞 유도 산정까지를 말한다. 본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로부터 유도 산정까지이고, 제1지류는 북한강과 남한강 그리고 임진강이 있다. 나머지 하천은 한강의 제2, 제3지류들이다. 남한강은 오대산(오대천), 속리산(달천), 금대산(하장천과 골지천)의 세 곳의 물줄기이며, 북한강은 인제 서화현에서 나오는 물줄기(소양강)와 회양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이고, 임진강은 안변과 영풍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와 철령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한탄강)이다.
한강의 길이와 지류들
한강의 총길이 : 한강 전체의 길이는 한강의 법정 하구인 유도 산정으로부터 남북으로 그은 직선에서 최장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산 계복곡까지는 497.5킬로미터로 조선총독부에서 발표했던 길이 514.4킬로미터보다 16.9킬로미터 짧다.
남한강 : 태백시 창죽동에서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까지 394.25킬로미터 북한강 : 강원도 회양군 주동면 신흥리 옥전봉 북쪽 계곡에서부터 양수리까지 325.5킬로미터 임진강 : 함경남도 덕원군 풍상면 용포리 아호비령 두류산 남쪽 계곡에서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성동리와 개풍군 임한면 정관리 사이 254킬로미터
한탄강(漢灘江) : 평강 이북 철령 일대가 발원지인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이다. 한탄강은 6.25동란 때 이 강으로 인하여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잘못 알려진 강이다. 한탄강의 ‘한은 크다, 넓다, 길다는 뜻과 탄은여울, 강, 개의 뜻이 합한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다.
3.홍유릉 홍유릉은 홍릉과 유릉이 합쳐진 이름이다. 능 안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가면 조선 제26대 왕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홍릉(洪陵)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조선왕조 마지막 왕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가 잠들어 있는 유릉(裕陵)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릉이며, 최초의 황제릉인 셈이다.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 왕을 황제(皇帝)라 부르게 되었으니 그렇다. 홍유릉에 오면 누구나 대번에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왕을 황제라 부르게 된 나라가 되었으니 왕릉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받아 황제릉의 능제를 삼고 능역을 다듬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역은 마치 공원처럼 정성들여 조경한 흔적이 많으나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능과는 이모저모가 사뭇 다르다. 다른 왕릉에 비해 능역이 매우 크고 화려하지만 석물들이 낯선 이국풍이고, 분위기전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체가 침침하고 스산하다.
4.홍릉 홍살문 정면에는다른 능에 있던 정자각은 없고 갑자기 정면 5칸 측면 1칸짜리의 큼지막한 일자형 건물이 놓여 뒤편의 봉분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 고종황제 신위를 봉안하고 평상시의 침상이 놓인 침전(寢殿)이며 제전(祭殿)인 건물이다. 지금까지 조선왕조 어떤 능에도 이런 건물은 없었다. 침전에 오르는 계단은 정면과 양 옆에 마련되어 참도를 구분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침전으로 드는 참도 양 옆에 기립해 줄서 있는 커다란 석물들은 더욱 이색적이고 파격적이어서 도무지 정감이 가지 않는다. 다른 능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동물들이 양쪽에 일곱 마리씩 늘어서 있는데 말과 양, 해태와 호랑이는 특히 구분이 선명치 않고, 뜻밖에도 웬 물주머니를 멘 낙타와 코끼리․기린까지 등장하고 있어 저절로 웃음이 배어나온다. 그러나 망해버린 나라의 운명이 국적불명의 석물까지 탄생시켰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만 씁쓸해지고 만다. 동물들의 옆을 이어 침전 앞에는 머리에 금관을 쓴 무관과 문관이 서있는데, 석인의 형상도 조각솜씨가 매우 도식화되어 있고 경직성이 강해서인지 동양인은 분명하나 이방인의 모습이 완연하다. 게다가 키가 385cm나 되는 기다란 거인이어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그 오른쪽 석상 뒤편에 비와 비각이 있고, 비각 옆으로 곡장이 둘러쳐진 우물이 있다.
홍 릉
곡장 안의 봉분은 화려한 병풍석이 감싸안고 있으며, 화문으로 장식한 난간석이 각을 이루고 있는데, 현종 이후 다시 등장한 병풍석과 난간석이다. 그러나 저 아래 침전 앞 석물에 잔뜩 비중을 둔 탓인지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 양 옆에는 망주석이 있을 뿐 다른 석물이 놓이지 않아 간소하고 조촐한 편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일대기나 시대상황은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이 날로 깊어만 가는 상황에서 1882년의 임오군란, 미․영․독과의 통상조약 체결, 1884년의 갑신정변에 이어 1894년에는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혼돈의 와중에서 일본은 국권침탈을 위해 노골적인 간섭을 거듭했다. 이에 고종은 일본을 경계하고자 친러정책을 폈으나, 일본은 거세게 반발하며 140여 명의 수비대와 낭인들을 사주하여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시해하기에 이른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일어난 을미사변이다.
(1897년 11월 명성황후 장례식)
명성황후는 죽임을 당한 2년만인 1897년 11월 22일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청량리 홍릉(현 홍릉수목원)에 국장으로 치뤄졌다. 하지만 말이 유해지 사실은 시신은 없었다. 시신은 불에 타버리고 겨우 유해의 일부인 손가락 뼈마디 정도만 관에 담겼을 뿐이었다. 1905년 고종은 마침내 일본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당하고, 1907년 이를 무효화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기는 커녕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왕위에서 물러나 순종황제가 즉위하기에 이른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세수 67세로 눈을 감는다. 고종의 죽음에 대해 일인들의 독살설이 강하게 나돌면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이 가속화되었고, 며칠 후 3․1운동이 일어난다. 고종은 3월 4일 이곳 금곡동 서향 언덕에 묻히면서 명성황후릉도 고종 곁으로 천장하였다.
5.유릉
조선 제27대 순종과 순명황후 민씨, 계비 순정황후 윤씨가 하나의 봉분 안에 잠들어 있는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다. 홍살문과 침전을 잇는 참도 양 옆에 늘어선 석물 중엔 홍릉에서와 같이 등에 물주머니가 튀어 올라온 낙타, 방울달린 사자, 귀가 머리를 덮은 해태, 입이 퉁그러진 호랑이, 코끼리 등 색다른 석물과 석인상이 시립해 있는데, 홍릉보다 훨씬 사실적이며 현대감각을 갖춘 솜씨이다. 홍릉이 하나의 시범된 황제릉이었다면 유릉은 실험정신을 거치고 난 다음의 숙련된 매만짐이라 해야 할 듯하다. 순종은 고종11년(1874)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척(拓). 순종은 태어난 이듬해 두 살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21세(1895)에 을미사변을 맞아 어머니 명성황후를 잃는다.
광무 1년(1897)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황태자가 되었으며, 1907년 7월 19일(양력 8월 27일) 일제의 강요로 물러난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다.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고,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귀비 엄씨의 소생인 이은(李垠)을 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한다. 그가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태자다. 순종의 재위기간은 불과 4년이다. 이 짧은 기간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 비운의 먹구름이 조여오는 시기였고, 휘청거리는 민족사에 한 가닥 수호의 빛을 부여잡으려는 저항의 물결이 거세게 파도치던 통한의 시기였다. 일본에게 국정 전반을 간섭받고 차관정치의 빌미를 제공한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순종 즉위년에 강제로 체결당한 것이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곧 군대를 해산시키고,유학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태자를 인질로 잡아갔으며, 사법권마저 박탈했다. 이에 항거하여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왕(李王)으로 강등된 순종은 창덕궁으로 밀려나 망국의 한을 풀 길 없어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로 이승을 하직했다. 순종의 장례식날을 별러 전국에서 6․10만세 사건이 일어났고, 순종은 6월11일 이곳 홍릉 왼쪽 산기슭 아버지 발치에 안장되었다.
6.순정효황후 윤비 순명황후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태어나 1882년(고종19)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순종 즉위 전에 경운궁 강태실에서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1월 29일 양주군 용마산 내동 기슭(현 어린이대공원 경내)에 묻혀 유강원(裕康園)이라 했다가 순종이 승하하자 이곳에 합장했다. 계후(繼后) 순정황후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순명황후가 돌아간 지 2년 뒤인 1906년(광무 10) 계비가 되었다가 다음해에 황태자비로 책봉,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해 불명이 대지월(大地月)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낸 순정황후는 1966년 1월 13일 춘추 72세로 이승을 떠나 유릉에 합장되었다. 순정황후는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을 조인하기 위한 어전회의를 병풍 뒤에서 엿듣고는, 데라우치와 친일파들이 합병조약에 날인할 것을 순종에게 강요하자 급히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춰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가슴을 적신다. 7.양수리 수종사
두 강 어우러져 큰 물 이루는 양수리(경기 양평군). 그 물, 언제 보아도 호수처럼 고요하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붉은 노을 곱게 물드는 저녁, 달빛 어리는 한밤은 또 어떻고. 이런 두물머리 앞 한강의 수채화풍 정경이 한눈에 환히 내려다 보이는 운길산. 수종사(水鐘寺․주지 東山스님․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는 그 산 중턱에 있다.
양수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 양수리에는 물만 두 개가 아니다. 길(국도)도 두 개다. 춘천서부터 북한강을 따라 달려온 45번, 양평부터 남한강을 따라 달리는 6번. 두 물이 양수리에서 만나 하나가 되듯 두 길도 팔당댐에서 만나 두물머리 근방까지 하나되어 달린다.
운길산(해발 610m) 수종사. 해발 400m고지의 가파른 산비탈에 겨우 자리잡은 작은 절. 절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은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오를 정도의 구절양장 시멘트 포장도. 걸어 오르자면 40분쯤 걸린다. 포장도로가 끝나면 멀리 주차장이 보인다. 산길 한구비를 더 돌아 오르면 머리에 무거운 관을 이고 있는 석조불상이 길가에서 손님을 맞는다. 불상 뒤편으로 수종사 당우가 보인다. 길도 끝나고 이어지는 돌계단. 마지막 계단을 힘주어 딛고 오르면 수종사 경내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사천왕문도 없이 당우라고는 자그만 대웅전과 산신각 응진전 그리고 요사채가 고작인 수종사. 그러나 찾는 이는 어느 대찰 못지 않다. 조선초기의 학자 서거정은동방의 사찰 가운데 제일의 전망이라고 표현했다. 법당마당에 서서 내려다 보면, 양수리를 향해 산을 헤집고 흐르는 북한강과 남한강, 두 강 하나되어 한강이 되는 두물머리와 그 강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세개(북한강철교 양수교 양수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비탈에 수종사가 들어선 데는 사연이 있다. 절 지은이는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1411~1468년). 즉위 직후 심한 피부병에 걸린 세조는 오대산상원사에서 요양하다 배를 타고 환궁하던 길이었다. 그러다 두물머리(양수리)쯤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아름다운 종소리를 듣게 됐다. 소리를 좇아 들어선 운길산. 산을 헤멘 끝에 어렵게 찾은 소리의 진원지는 자그만 동굴이었다고 한다. 맑은 물 떨어지던 그 동굴안에는 18나한상이 있었고 신기하게 여긴 세조는 여기에 절을 세웠다. 그후 세조의 피부병은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8.다산-추사-초의선사 숨결
물과 인연이 깊은 이 절. 인연의 고리는 다시 차(茶)로 이어진다. 운길산 아래 능내리 마재에 묻힌 다산 정약용(1762~1836년). 차를 즐겼던 그는 말년 수종사에서 해동명필 추사 김정희(1786~1856년)와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1786~1866년)와 어울려 자주 만나 차를 마셨다. 종소리 울려 퍼졌다던 그 석간수로 차를 다려 마시며 발아래 펼쳐지는 동방가람 최고의 풍치를 감상하면서....
종소리 들려온 동굴은 사라졌지만 그 석간수만은 지금도 산신각 아래 보존돼 있다. 그러나 그 물은 매일 세 차례 예불 때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다게(茶偈)에만 쓰인다.
쪽마루에 놓인 "무료다실" 이라는 작은 표식이 붙은 차실 "삼천헌"으로 들어가 보자. 내실에 들어서면 차실을 지키던 보살이 눈인사를 건넨다. 띄엄띄엄 놓인 나무 찻상 앞에 앉아 잔에 물을 따르면, 더운물이 풀어 올리는 김이 마음을 먼저 덥혀 줄 것이다. 초의선사가, 다산 정 약용과 추사 김 정희가 때때로 들러 차를 마시던 수종사 약수, 바로 그 물이다.
산수유 가지 너머 갈참나무와 소나무 숲 아래 두물머리…통유리창 밖으로 양수리의 전경이 시나브로 내려다 보인다. 유리를 걷어 내고, 대웅전 앞 종루 주위에 서서 양수리를 다시 내려다보면 자연에 동화되지 못하고 이물질처럼 서 있는 아파트들과 여러 인공물들에 의해 옛 정취만큼은 못하다 해도, "동방의 사찰 가운데 으뜸의 경관"이라고 찬탄했던 서 거정의 심경을 가늠할 수는 있으리라.
절 풍경과 더불어 세조가 직접 심은 기념식수인 오백 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를 두루 보면서 쉽게 가버리는 짧은 봄빛을 그리워하자.
9.두물머리 =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는 양수리(兩水里)의 순우리말 이름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비로소 온전한 한강이 되는 첫머리이다. 과학적인 교통수단도 없고 산세가 험한 지형 때문에 육로보다 수로가 발달하였던 옛날에는 나루터들이 많았는데, 한때는 두물머리도 그러한 나루터 가운데 하나였다. 남한강 최상류 물길인 강원도 정선, 충청북도 단양 등지에서 한양의 필수품인 곡류와 땔감들을 가득 실은 범선이나 황포돛배와 같은 돛단배가 마포나루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박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당시 두물머리 나루터에는 뱃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온갖 물품들을 실은 채 며칠을 물길을 따라 내려온 뱃사람들이 지친 몸을 부리고, 탁주 한 사발로 목을 축였다. 경기 일원에서 가장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나루터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1937년 양수교가 세워지고 육로가 열리면서 돛단배나 뗏목을 이용한 물 위의 운송수단이 쇠퇴함에 따라 두물머리의 모습도 달라지기 시작하던 것이, 1973년에 팔당댐이 완공되고 육로가 돌더미(현 양수리 시장쪽)쪽으로 신설되고, 그린벨트지역과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또 다른 모습이 되었다. 곧 한강의 상수원으로서, 어로행위와 선박의 진수가 제재를 받게 되면서 황포돛배가 사라졌고 이와 함께 두물머리의 나루터로서의 구실도 끝이 난 것이다.
이후로 양수리는 지리상으로 서울과 강원도의 중간기점으로서 강원도를 가면서 들르기에 좋은 목가적인 공간의 구실을 했다. 사람 붐비는 곳에 으레 조성되기 마련인 상업지구들이 생겨났고 점차 수도권의 일일 관광지로 변했다. 얼마 전 양수리를 공중으로 통과하는 직선도로인 양수대교가 개통되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으면서 양수리를 지나는 차량들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주말이면 청량리에서 워커힐호텔, 교문리를 달려온 차량들과 미사리 팔당대교를 지나온 서울 시내 강남, 강북의 차량들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듯 6번 국도에서 만나 양수리로 몰려든다. 한때는 뱃사람들이 먹고 자고 쉬어 가던 주막거리로 번성하였던 곳이 이제는 수도권 시민들에게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위락지가 된 것이다.
두물머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영화, CF, 드라마 등의 촬영지로 이용되면서부터이다. 그 중에서도 90년대 중반에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인 '첫사랑'이 이 곳에서 촬영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최수종, 이승연, 배용준 등이 출연했던 드라마로, 주인공인 최수종이 불구가 되어 느티나무가 있는 강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소일할 때 옛 애인이었던 이승연이 최수종을 찾는 장면을 찍은 곳이다. 그 이후로 사람을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해 이제는 주말이면 사람들로 상당히 분비는 유명한 곳이 되었다. 요즘에는 SBS에서 방영하는 ‘그린로즈’의 한 장면으로 촬영되기도 했다. 두물머리에는 추억처럼 두 그루의 당산목인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에 얽힌 사연들도 기구하기는 나루터와 마찬가지.
여느 느티나무들과는 달리 장정 서넛이 팔을 펴고 감싸안기에도 벅찰 만큼 아름드리인 수령 사백 년의 느티나무. 나이 든 동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본래는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 아들나무, 이렇게 세 그루이던 것이 일제시대 "개머리판"을 만들기 위해 일본군에 의해 두 그루가 잘려 나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이 "할머니나무" 하나라 한다. 예전에는 당나무로 쓰일 정도로 신령하게 여겨지던 것이 이제는 두물머리를 찾아든 연인과 가족들의 기념촬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양수리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 나무가 쓰러지면 꼭 꼭지점이 가 맞닿을 만한 곳에서 땅이 끝나고 물이 시작된다. 왼쪽으로 금강산에서 시작하여 거침없이 휴전선을 넘어 춘천을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로 만들고는 다시 강원도의 도계를 넘어 325.5킬로미터를 달려온 북한강이 흘러들고, 오른쪽으로는 태백산 검용소에서 시작하여 치악산에서 흘러든 물줄기를 안아 들이고 속리산 계곡의 물줄기를 끌어들여 단양팔경을 빚고 장장 394.25킬로미터를 달려온 남한강이 흘러든다. 차고 물살이 거세며 물빛이 푸르다 하여 "숫물"이라 불리는 북한강과 순하고 따뜻하며 물빛이 붉다 하여 "암물"이라고 불리는 남한강이 남자와 여자, 붉고 푸른 수채물감이 뒤엉키듯 서로를 얼싸안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울 시민의 젖줄로서, 해마다 장마철이면 서울을 홍수로부터 보호하는 마지막 방파제이자 갈수기에는 서울 시민의 생명수를 모아 두는 팔당호를 지나면서부터 각자의 이름을 버리고 "한강"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다시 흐른다.
양수리의 또 하나의 명물은 새벽녘의 물안개다.
'두물머리'의 새벽 물안개는 마치 소금을 뿌려놓은 듯이 은빛으로 출렁거려 보는 이들마다 탄성이 나오게 한다. 새벽녘이면 두물머리 물안개를 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서쪽으로 북한강 건너 남양주 조안면, 남쪽으로 광주(廣州)시 남종면, 북쪽으로는 가평군과 접해있는 두물머리의 풍광은 먼동이 튼 가운데 안개라도 깔리면 이때 만들어지는 물안개가 일품이다. 두물머리 앞 강 한복판에 잔뜩 웅크린채 떠 있는 크고 작은 몇개의 섬도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원래 두물머리의 매력은 한적함에 있었다.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앉아 잔잔한 강변을 바라보는 느낌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로 붐비니 주말에는 이런 한적함을 느낄 수 없어 아쉽다. 두물머리의 한적함을 맛보려면 평일을 이용하거나 주말이라도 아침 일찍 찾는 것이 좋다. 특히 아침 일찍 두물머리를 찾으면 환상적인 남한강의 물안개를 볼 수 있다. 봄, 가을 일교차가 큰 날 이른 아침이면 호젓하게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CF의 한 장면 같은 멋진 물안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곳 두물머리는 새벽 물안개 말고도 부슬부슬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또 다른 풍광을 연출하는 멋진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