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저수지 아이 (2)
송 순 녀
철딱서니 없던 시절.
‘아지’아줌마는 내 부러움의 대상이자 환상이었다. 동네어귀에 서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밥숟가락을 내던지고 달음질 쳤다. 나를 깡깡 시골에서 도회지로 데려다 키워줄, 유일한 여인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서 빨리, ‘아지’아줌마가 나를 데려가서 리본달린 구두와 꽃무늬 화려한 원피스에 하얀 타이즈를 신은 공주로 변신시켜 주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다 엄마의 구박과 잔소리가 심해지고 내 위로 다섯이나 되는 언니, 오빠들의 신경질과 꿀밤이 있을 때면 연기 나는 굴뚝아래에서 서럽게 울면서 아줌마를 그리워했다. ‘지금의 내 엄마는 사실 진짜 엄마가 아니며, 잘은 모르지만 어른들간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지 아줌마가 잠시 나를 이집에 맡겨 둔 거라고’영악한 상상을 꿈꾸며 잠이 들기도 했다.
‘아지’아줌마가 어쩌다 우리 집을 다녀 갈 때면 다른 집과는 달리 과자며 사탕, 색색의 머리핀과 학용품을 소중히 내밀어 주시곤했다. 그리고 연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해주셨고 때로는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저 어린것이 비린 것을 못 먹어서 저렇게 마르는겨’라시며 잘 거둬 먹이라고 엄마에게 역정을 내셨다.
그런 눈으로 봐서 그런지 엄마와 아줌마를 번갈아 찬찬히 살펴보
면 확실히 나는 아지 아줌마를 더 많이 닮은듯 했다.
무엇보다도 어린 내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돈’! 기르던 소를 내다 팔거나 추곡수매 뒤끝에나 구경할 수
있었던 뭉테기 돈을, ‘아지’아줌마는 아무렇게나 허리에 지니고 다녔다. 물론 다른 게 있다면 우리 집 돈은 빳빳한 새 지폐이며 푸르스름한 빛깔인데 반해, 아줌마는 구겨진 헌 지폐이면서 주로 오백 원짜리를 가지고 다니셨다. 푸르스름하던, 누르스름하던, 상관없이 나는 그 돈에 홀려 백번이라도 아줌마의 딸이 되기를 소망하였다.
재투성이 촌닭을 화려한 깃털을 가진 공작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믿고 싶었던 여자. 어린 나로 하여금 음흉한 반란과 배반과 혼란을 일으키게 했던 그 여자,‘ 아지’아줌마 . 허나, 그 여자는 내가 마냥 꿈꾸고 있었던 것처럼 돈 많은 여자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 여자는 간갈치, 간고등어, 꽁치, 명태를 옴박지에 이고 다니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생선을 팔러 다니는 여자였다. 말 그대로다른 생선들 보다 주로‘아지’를 많이 가지고 다녀서 다들‘아지아줌마’라고 불렀다. 내 엄마와 동갑내기면서 홀몸으로 어린 남매를 키운다던...... 사는 형편이 우리보다 나을 리 없을 것 같은 아지 아줌마. 그렇게 아지 아줌마는, 어린 내게 이율배반적으로 다가 왔으며 슬픈 그림자를 남기고 떠났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시골에서는 생선 값을 돈보다는 잡곡으로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가난을 절절이 실감하던 시절이기도했지만 오히려 가난할수록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훈훈한 정을 나누고 베푸는, 미덕이 살아 있던 아름다운 시절이기도 했다.
점심 때가 되어 아무 집이나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면 누구라도 기꺼이 맞아주며, 먹던 밥상에 수저 하나만 더 얹혀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철 따라 메주콩, 팥, 녹두, 보리쌀, 참깨, 들깨… 등 생선들과 수시로 맞바꿨으며 푸성귀와 앵두, 살구, 고구마, 감자, 옥수수, 갓 낳은 계란 등이 잡곡과는 별도로 아지 아줌마의 옴박지에 얹혀 도시로 둥실 실려 나갔다.
집안에 생선이 좀 남았더라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단 몇 마리라도 갈아줘야 마음이 편해지는 게 시골사람의 정 아니던가. 내가 유독 눈독을 들이던, 아지 아줌마의 전대는 그래서 꼬깃꼬깃한 지폐들로 배가 불룩이 나와 있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애경사에 쓰일 귀한 생선만은 잡곡 대신 반드시 쌀로 셈을 대신했다. 아줌마가 양손을 벌려 광목자루의 좌우를 틀어잡고, 앞어금니로는 한쪽을 앙 물려 잡아 삼각형을 만들어 넓고 크게 자루를 벌리면, 그 속으로 눈부시게 하얀 쌀이 됫박으로 세어지며 들어갔다. 한 되, 두 되, 석 되, 넉 되… 하얀 쌀이 주르르 들어갈 때면 자루 중앙 한쪽을 앙 물고 있던 아줌마의 앞 금니이빨도 덩달아 반짝거렸다.
아침 일찍부터 생선을 팔러 나간 엄마를, 밤 늦도록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에게 어서 빨리 뜨끈뜨끈한 쌀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을 금니 이빨이 알아차린 듯 해보였다. 어느 곳이든 셈이 느리거나 배짱을 튕기는 사람은 있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이 마을 저 마을에 깔린 외상값은 주로 비 오는 날에 찾아 다녔다. 두세 번 발걸음 해야 할 경우도 허다했으며 , 생선을 살 때와는 달리 안면을 싹 바꾸어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과는 삿대질을 하며 악다구니를 쓸경우도 종종 있었다.
집을 비운 주인을 한나절 기다리다 막차를 놓치게 되는 날이면 우리 집에서 새우잠을 자고가곤 하였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배고픔에 떨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어디 밥인들, 잠인들 제대로 편히 먹고 자고 갈수나 있었겠는지. 그런 날이면, 엄마와 마루에 앉아 밤늦도록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와 아줌마는 서로의 삶을 반추하면서, 첫차가 올 때까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어머니의 각별한 인정을 나를 위한 작은 선물들로 대신 갚고자 했던 것이었다.
오랜 세월을 무거운 생선과 잡곡들을 머리에 이고 다닌 까닭에 아줌마의 또아리를 받친 정수리 부분이 닳아서 머리카락이 뭉턱빠져있는 걸, 어느 날 보았다. 정수리 부분이 닳아진 민둥머리는 참으로 많고 많은 말을 하는듯 했다. 버스가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골일수록 생선이 잘 팔린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꼭두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생선을 받아 이고서 오롯이 두 발과‘생선 사이소’ 외치는 목소리에 의지하여 걸어 다니던 아지 아줌마.
갈증과 피로, 사나운 개, 문전박대와 변덕스런 날씨에 쫓기며 살아 온 지난 세월을, 반원을 그린 둥그런 맨살이 대신 말을 해주는 듯 했다.
시골버스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동네사람들의 시장 출입이 잦아 질수록 아지 아줌마의 발걸음은 그와 반대로 차츰 줄어 들어갔다. 여러 가지 합병증과 뇌출혈 현상으로 병원에 입원중이지만 오래 살 것 같진 않다고 어른들끼리 눈물을 찍어내며 수근거렸다. 그소문이 사실이었을까? 그 이후 아지 아줌마를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린 날, 유독 짜디짠 소금 맛으로 밖에는 기억나지 않던‘간생선’을 어른이 되어서는 절대로 입에 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사람의 입은 간사하고 또 간사한지라 얼음무더기에서 펄떡거리는 생선보다 한 귀퉁이로 밀려난‘간생선’에 번번히 손이 가곤 한다. 어머니께서 아궁이 불에다 노릇노릇 구워주던 생선 맛은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게 되었지만‘ 간생선’에서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지 아줌마의 고단한 삶을 가끔 느끼곤 한다.
어쩌면, 어릴 적. 내가 나중 커서 만나게 될 세상이 생선살처럼 부드럽고 고소하고 담백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는 이미 혀끝에 닿은 짜디 짠 소금에서부터 절절히 직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 삼십 여리 길을 생선과 곡식을, 머리숱이 뭉턱 빠지도록 이고서, 노을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아지’아줌마의 모습이 어린 날 슬픈 그림으로 내게 남겨졌다.
그 뒷그림자가 꼭, 지금의 내 모습과 닮은 듯하여 가슴에 굵은 소금이 뿌려진 양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