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복(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1903년 생)은 이유업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본적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 597번지이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하다가 다시 교토 신학대학을 졸업, 1943년 평양 출신 길공주를 만나 결혼하였다. 8.15해방을 맞아 아내와 함께 귀국한 후 이재복은 여운형 계통에 있다가 좌익 계통인 인민당에 입당, 경북 도 인민위원회의 보안부장을 거쳐 박헌영의 신임을 받아, 당시 군사부장이었던 이중업이 이북으로 도망간 사이 공석이었던 군사부장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재복은 대구 10.1폭동 이후, 지하로 잠적하여 제주 4.3폭동, 여수 14연대 반란까지 주도하였다. 이재복은 제주도 폭동에 이어서 본토 내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군의 토벌병력을 단절 또는 분산시켜 우선 제주도의 위기를 감소시키려 하였고, 본토 내에서 제 2전선을 형성하여 전군적인 호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국군의 전격적인 토벌작전으로 제 14연대의 반란군은 조기에 진압, 입산 공비화하였고, 전군적인 대숙군이 단행되어 남로당이 3년간에 걸쳐서 대한민국정부를 전복하려던 꿈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1949년 12월 18일 오전 3시경 제 1연대 정보관 김창룡 대위 이하 3명에 의해 서울 성동구 신당동 377에서 체포되었다. 이재복은 이근민(李根民), 박영근(朴永根), 오일서(吳一緖), 이일도(李一道) 등 네 개의 가명을 가지고 있었다(경향신문 1949년 1월 19일자).
국가보안법에 의해 체포된 그는 김창룡 대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일주일간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김창룡이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라고 설득하자 그제야 500명이 넘는 남로당원 명단을 넘겨 주었다고 한다. 특무대 김창룡이 이재복에게 전향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자기가 대한민국 국민을 이렇게 많이 죽였는데 살아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고 하며 전향을 거부하여, 1949년 5월 26일 최남근과 함께 수색에서 총살당했다(경향신문 1949년 5월 28일자).
이중업(남로당 중앙조직부 총책)
이중업은 1928년 서울 경복중학을 졸업하고, 1933년 성균관대 법과 3년 당시 5년 복역 후 박헌영과 손을 잡고 좌익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는 건준위원으로 활약했다.
본명 이중업(38)은 이중영(李重英) 또는 김창선(金昌善)이라는 두 개의 가명을 가졌으며 박헌영 콤그룹 하의 주요 인물로, 박헌영의 월북 후 남로당 중앙조직부 책임자로 남로당 20개 전문부와 산하 23개 단체를 지도하며 남한의 정보를 수집하여 박헌영에게 전했다. 한편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고 산하에 특수 부대를 조직하고, 남로당특수부 책임자 이재복에게 지령하여 여수순천지방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다(동아일보 1949년 4월 10일자).
남로당 중앙당조직부 총책임자 이중업은 남한을 무대로 우익계열의 요인암살과 테러, 방화 그리고 여수순천 사건을 야기하여 동족살상 유혈의 참극을 배후에서 조정하였다.
1949년 2월 25일 새벽 4시경 홍제동에서 체포되었는데, 당시 이중업은 체포 후 공산주의의 비법성과 독재성을 인식하고 공산주의 말살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이중업은 형무소에 수감중에 1949년 7월, 김수임이 시킨 군 프락치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 10월까지 김수임의 집 2층에 머물렀다가 김수임의 도움으로 무사히 38선을 뚫고 월북했다.
이강국(남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은 1930년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거쳐 독일에서 베를린 대학 법학부를 나온 천재로, 풍채로 좋고 지식과 인격을 겸비한 소위 지식인 공산주의자였다. 국제무대에서 활동한 바 있던 그는 비교적 시야가 넓고 또한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능숙하여 박헌영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강국은 위조 지폐 사건 때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애인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했다.
월북한 뒤 북조선 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거쳐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초대 외무부상(外務副相)으로 있다가 다시 “조선상사회사(朝鮮商事會社)” 사장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끝난 후 1953년 8월 3일부터 6일까지 이어진 평양의 최고재판소 특별군사재판에서 미국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그토록 충성했던 김일성의 손에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 의해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었다. 이 재판의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이고 이강국은 사형 및 전재산몰수 판결을 받았다.
김수임 국제여간첩(이강국의 애인)
김수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1세 때에 남의 집 민며느리로 있다가 그 집에서 나와, 어느 선교사의 도움으로 늦게야 여학교를 마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 세브란스병원 영어 통역사로 있었다. 그녀는 남이 따를 수 없는 천재적인 사교술을 지녔고, 영어에 능숙하고 그 기질 또한 서구적이어서 당시 수사기관의 최고 고문으로 있던 미국고관(베어드)의 사랑을 받아 동거 중에 있었다.
이러한 그녀의 환경은 좌익활동을 마음 놓고 전개하는 데 지극히 유리했기 때문에, 무너져가는 남로당의 마지막 등불처럼 이용을 당하게 되었다.
김수임은 어느 파티에서 우연한 기회에 이강국과 알게 되었는데, 서로 호감을 가지고 만나는 가운데 연인 사이가 되었다. 이강국은 위조 지폐 사건 때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애인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했다. 김수임이 1946년 9월 박헌영과 이강국에 대해 미군의 체포령에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아내 북으로 탈출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이강국은 월북한 이후에도 대남공작을 계획하면서 김수임을 적극 이용하였고 김수임은 자신의 집을 남로당 중앙간부 아지트로 내주었다.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그를 통해 빼낸 미 정보를 이강국에게 제공한 간첩죄로, 1950년 3월 19일 체포되어 1950년 6월 16일 오전 9시 30분부터 속개된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동아일보 1950년 6월 16일자).
김수임은 최후 진술에서 “나는 공산주의를 모릅니다. 다만 이강국을 너무 사랑해서 그의 요구를 들어준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국가를 반역한 내가 더 살아 무엇하겠느냐.”며 전향을 거부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정태식(남로당 민족전선 중앙위원)
정태식은 191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1929년 청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수재였다. 해방이후 정태식은 김삼룡, 이승엽과 함께 남로당에서 박헌영의 제 2인자라고 할만큼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던 자이다. 1950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950년 6.25전쟁 때 석방되어 해방일보를 복간하였고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무렵,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으며, 북한 정권 수립때 농림성 기획처 부처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3년 8월 남로당 숙청 때 함께 숙청 당했다. 정태식은 숙청된 후에 출판사에서 심부름하는 말단 직원으로 생애를 마쳤다. 죽음보다 더한 혹독한 세월을 보냈을 정태식의 인생 말로는 참으로 비참했다.
성시백(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 총책)
성시백은 1905년 황해도 평산 태생으로 서울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 겉으로는 장개석 군대의 중령으로 일했지만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프락치로 지하 활동을 하였고, 당시 ‘정향백’ 혹은 ‘정백’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성시백은 지금까지 좌익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전술과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당적을 가졌다는 내색은 하지 않고 때와 장소에 따라 무역업자, 이발소 영업주, 또는 모리배로 변신하여 상대편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하면서 자기 목적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김일성 직계로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남한군사 특급 기밀을 빼돌렸다. 이승만 대통령과 중국 장개석 총통과의 비밀회담, 이승만 대통령과 육군 수뇌부만 아는 원자모의 전략 계획서, 1949년 5월 38선 최전방 국군 배치도 등이다.
성시백의 활동상은 김일성도 감탄할 정도로 무소불위하였으며, 그는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하여 공작을 펼쳤다. 해방 당시 남북은 조선은행권 동일 화폐를 사용하였는데, 북한은 1947년 12월 1일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구 화폐 통용을 금지했다. 이를 몰랐던 남한은 5개월 늦은 1948년 4월 25일에야 과도정부 법령 182호로 구 화폐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 5개월이라는 공백기에 북한에서 회수한 구 화폐가 남한의 경제교란과 남한에 대한 공작금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대북무역상을 하던 북로당의 성시백이 북한 화폐를 남쪽으로 보급할 최적의 위치에 있었기에 무한대의 역량발휘가 가능했던 것이다. 성시백은 이러한 막대한 자금으로 10개의 신문사를 직접 운영하고, 5개월 공백기 중에 있었던 제주 4.3무장폭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1948년 5.10선거 때에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남한의 국회의원 후보들을 돈으로 매수했다. 당시 당선자 198명 중 62명이 성시백으로부터 물질적 후원을 받았다. 앞에서는 5.10선거를 반대하고 뒤에서는 자금을 지원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좌파들의 천국을 만들어 갔다.
1997년 5월 26일 북한 ‘노동신문’ 2면에 게재된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 혁명 렬사’라는 제목으로 성시백(1905-1950)의 활동상을 싣고 있다.
오제도 검사는 홍민표의 협조를 얻어 1950년 5월 15일 성시백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체포, 6.25 발발 후 서울 함락 하루 전인 6월 27일 육군형무소에서 간첩죄로 처형했다.
이주하(남로당 무장분야 총책)
이주하는 1905년 함남 북청의 화전민(火田民) 출신으로, 원산 사립 광성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잡역부 노릇을 하며 야간으로 와세다전문학교에 다녔고, 그때 지방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했다. 1928년 조두원의 천거로 조선공산당에 입당, 1929년엔 원산 시당 책임자가 됐다. 해방 후 원산에서 함남 공산당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이주하는 조공본부의 이름으로 서울에 와 12월 즈음부터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남로당 최고 지도층의 한 사람인 이주하는, 1950년 3월 27일 김삼룡보다 하루 앞서 시내 예지동 모처에서 서울시 경찰국 사찰진의 빈틈없는 수사망에 걸려 들어 6.25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김삼룡과 함께 특무대 김창룡에 의해 총살되었다.
김삼룡(남로당 총책)
김삼룡은 1910년 충주군 엄정면 용산리 470번지 빈농의 집에서 태어나, 일제 시대에는 김대원, 김성수, 김인업 등의 가명으로 투쟁하다가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해방 후 전주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그는 남한의 남로당원 60만 명의 지도자였으며, 제주 4.3폭동과 14연대 반란을 주도한 자다. 김삼룡은 이성희라는 가명으로 살았으며, 제 1비서부터 제 4비서까지도 그의 집을 아는 자가 없었고 김삼룡의 얼굴은 홍민표 단 한 사람만 알았을 정도였다.
절대 불가침의 존재로 알려져 왔던 김삼룡은 1950년 3월 27일 체포되었다. 김삼룡이 체포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50년 3월 27일 오전 9시 30분, 치안국 소속 경찰관이 출근하는데 쓰레기통 뚜껑이 들렸다가 다시 내려져, 이상히 생각하고 들여다보았는데 이마가 넓고 눈썹이 새까맣고 세련되게 생긴 사람이 그 안에 있어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갑을 채웠다.
경찰서에 잡혀 왔음에도 김삼룡은 ‘천하에 내 얼굴을 누가 알겠느냐?’ 생각하고 얼굴을 꼿꼿이 들고 있었는데, 마침 홍민표가 치안본부에 갔다가 수갑에 묶여 있는 김삼룡을 보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김삼룡은 1950년 6월 4일 고등군법회의에서 이주하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씩 체포되었다.
수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사변이 터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을 건너기 전, 김삼룡과 이주하가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김창룡은 “너희가 수없이 많은 대한민국의 민중들 가슴에 총을 겨누고 목숨을 앗아갔는데 양심도 없구나. 왜 너희들을 살려줘야 하느냐?”라고 하면서 그들을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박헌영(남로당 최고 총수)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음력) 충남 예산에서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이학규는 주막을 운영했다. 그는 경성고등 보통학교를 나온 이후 평생을 공산주의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끝내는 평양에서 자신의 동료이기도 한 김일성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처형을 당했다.
1948년 9월 1일 수상 선거 때 김일성은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박헌영을 제치고 동년 9월 10일, 만장일치의 박수로 수상이 되었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부수상 겸 외상이 되었으나 허수아비였고, 남로당에게는 권력이 없는 장관 자리만 주어졌다.
6.25동란 이후 김일성은 자기에게 전쟁 결과에 대해 책임 추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숙청했다. 남로당계의 숙청은 1955년에 투옥 중이던 박헌영을 사형시킴으로서 마무리되었다.
1953년 3월 하순, 김일성은 박헌영을 체포하였다. 1953년 8월 5일-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6차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박헌영은 당에서 제명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조작한 박헌영의 죄상에 관한 서류를 그 앞에 내놓으면서 이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박헌영은 거부했고, 이러한 고군분투는 2년 반이란 긴 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자 김일성 일당은 박헌영의 방에 사나운 셰퍼드를 풀어 넣었고 박헌영은 전신을 물어뜯겨 피투성이가 되어, ‘너희들이 쓴대로 다 인정하마. 빨리 나를 총살하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1955년 12월 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이송운은 박헌영을 ‘미제국주의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기소했다. 1956년 7월 19일, 김일성의 특별지시로 박헌영은 마침내 총살을 당했다. 박헌영은 비참하게도 인근 야산의 잡풀 속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어 버렸다.
※ 박헌영의 최후와 관련 임경석 著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의 462-477쪽 내용을 주로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박헌영은 1949년 3월 스탈린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고 1950년 9월 중순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에 크게 공헌하여 다 죽어가는 김일성을 살려냈던 자이다. 그런 박헌영이 비참하게도 김일성의 손에 죽은 것이다.
최고 지식층을 비롯한 남로당 대다수(약5만) 숙청
우리나라 해방을 전후로 좌익에 가담한 사람들을 보면 최고 지식층이 대다수였다. 조혁환 예비역 장군(육사 3기)의 증언에 의하면 1-10위권 내의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을 생도대장이 포섭해서 남로당에 가입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 당시 최고 지식층들이 대부분 좌익 공산주의에 충성하였고, 끝내는 김일성에 의해서 숙청을 당했다.
박헌영을 비롯한 최고간부급(12명)은 사형 및 재산몰수를 당했고, 박헌영을 따르던 남로당원 약 5만 여명이 김일성에 의해서 철저하게 숙청을 당했다(이선교, ‘6.25 한국전쟁 막을 수 있었다(하))(빛된삶, 2007, 331.). 남한출신 40만이 굶거나 얼어죽었다(박헌영, 313). 대표적인 숙청 사례를 살펴보면 최고지식층이 대부분이었다.
-이강국은 1946년 8월 태제를 작성한 유명한 좌파 최고이론가다. 김일성의 손에 사형을 당했다.
-최승희는 1926년 숙명여고를 나온 불세출의 무용가다. 그녀는 무용수로 각광을 받다가 30-40년대 일본과 유럽과 미국 뉴욕 등 세계적인 무용가로 무대를 휩쓸었다. 해방 이후 월북하여 평양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을 맡았으나 1959년 숙청되었다.
-김두봉은 1898년 부산출생. 한글연구 선구자인 주시경의 제자요 최고 한글학자로 불렸다. 1958년 3월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반혁명 종파분자로 제명, 평남 순안 농장의 노동자로 쫒겨나 1960년 지방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71세)
-소설가 이태준은 1904년 철원출생, 1946년 월북하여 조선중앙당 문화부창작총장을 맡았다가 1969년 숙청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프롤레타리아들의 혼을 담는 순수예술을 한다고 자처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대중 속에 불어 넣었다.
-시인 임화(1908년 10월 13일-1953년 8월 6일)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던 유명한 카프문학가다.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인민항쟁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임화는 헤어졌던 딸을 생각하며 한국 전쟁 중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를 두고 북조선 당국은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성과 투항주의사상을 설교하였다”고 하여 숙청을 당했다.
공산주의는 재산을 똑같이 분배하고, 계급이 없는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혁명과 피의 투쟁을 필연적이라는 이론이다.
정태식, 이승엽과 함께 당 활동을 이끈 최고책임자 박갑동(와세다 대학 졸) 著, ‘통곡의 언덕에서’ 서문에는 당시 최고 지식층들이 공산주의에 매료되었던 이유의 일부가 언급되어 있다. “나 역시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공산주의 사회 건설만이 일제하의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중략) 과거는 이제 환상으로 끝나 버리고 북한의 2500만 동포가 오히려 해방과는 정반대의 이단적인 공산주의 압제에 시달리며 신음하는 현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아픔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 만행을 하나하나 들추어 보면, 사람이 가장 무섭고 사람이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몸서리치게 깨닫게 된다. 역사상 공산주의에 의해 죽임 당한 사람이 약 1억명이 넘는다고 한다. 최고 지성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던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민족의 독립을 꿈꾸며 공산주의를 추종했다. 저들의 비극적 최후는 공산주의가 너무나 허무하고 극악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세계 역사상 공산주의에 의해 죽어간 1억 명의 희생으로 얻어진, 살아있는 교훈을 뼈에 새기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