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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교의 추억
다음 세기를 물려주면서!
정 명 호 (제39회 졸업. 총동문회장)
모교(母校)는 1906년(단기4239년 병오년:丙午年)영흥학교로 개교하였고 1911년 남평공립보통학교로 개명이래 남평초등학교 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모교가 개인적으로는, 평생을 교직에 바치셨던 저의 선고이신 정형남 선생님이 13년간을 재직하였던 학교라는 점에서, 제 인생에 누려온 그 어떤 명예나 행복보다도 더욱 값지고 소중하며, 제 생애의 가장 큰 영광이라 할 것입니다.
돌이켜보건데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는 일제침략으로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아래 주권을 빼앗기고 우리글을 배우지 못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동족상잔의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모교의 역사적 흔적 또한 수십 년의 단절이라는 크나큰 아픔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많은 아픔을 딛고 의연히 일어섰습니다. 백년의 세월을 진한 땀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모질고 억척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교 백주년의 행사는 우리 모교만의 행사가 아닌, 우리 남평인 모두의 축제인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세기에는 꿈과 희망을 가득 실어 물려줍시다.
우리 총동문회는 일만 칠천여 동문님들의 뜻을 한데모아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기리는 개교 백주년 기념사업으로 「남평초등학교 백년사」, 「기념탑 건립」, 「빙청각 중건」을 완성하고 지속적인 추진사업으로 「역사자료 수집」, 「학군조정 건의」, 「장학사업」, 「만남의 날 행사」, 「정신문화 전수사업」 등을 계획하여 남평인 모두가 모교의 발전과 지역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정신적인 유산인 효 정신을 물려줄 수 있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연령이 85세이상 되시는, 특히 올해 107세이신 강족개 할머니외 83명을 모시고 기념행사를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둘째, 화합과 단결은 만남이 있어야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에 본 동문회 회칙에 매년 6월 둘째 주 토요일을 ‘만남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셋째, ‘자랑스러운 남평인, 모범스러운 남평인’ 을 회칙으로 정하여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동문을 표창하기로 하였습니다.
넷째, 자질이 우수하고 모범스러운 후배를 매년 5월중에 1명씩 선발하여 미래의 영웅이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장차 지역발전과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인재로 육성하도록 회칙으로 정하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동문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백주년의 행사가 그 자체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새로 시작되는 또 하나의 세기를 준비하는 출발점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백주년 기념행사의 참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동문님께 드리는 제안입니다. 남평인의 부지기수가 학군을 이유로 초등학교를 광주로 전학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후배들이야 말로 곧 우리 총동문회의 내일이요, 우리 고향 남평인의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교 운동장에서 후배들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도록,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학군제도의 완화를 위해 동문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동문회를 이끌다보니 수많은 동문과 지인 모두의 정성과 활약상을 소개드릴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하고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며 몇분을 소개합니다.
- 김장환 전라남도교육감님께서 모교에 방송시설을 제공하여 주신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동문회 제 3대 회장이신 김덕수(제 40회) 동문께서는 동문회를 활성화시키고자 공사(公私)간에 분망하심에도 불구하고 동문회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하시었고 백주년 기념행사를 추진하도록 사무실을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 제 33회 이용술 선배 동문께서는 평소 애향 애교심이 남다르시어, 전화(戰禍)로 사라진 우리 동문의 졸업사진을 복원하여 나주교육장으로부터 1994년에 표창을 수상하시는 등 모교의 사료 보존에 대단한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 제 34회 양봉환 선배 동문께서는 호호방문과 대담을 통하여 전화로 소실된 37회 이상 졸업생 명단을 복원하는데 적극 협조 하여주셨습니다.
- 제 36회 한병기 준비위원장은 백주년 기념사업 준비는 물론, 동문사랑 제자사랑이 남다르시고 항상 겸손하시어 정중한 예절과 사랑으로 저희 준비위원회의 모임을 활성화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 제 36회 김장원 동문께서는 기념사업 취지와 내용을 경청하시고 기념사업이 활발히 추진되도록 단독으로 백주년 기념비를 건립해 주셨습니다.
- 제 39회 김재남 친구는 서울지역 동문회 창립을 위해 가족이신 추춘자 여사와 함께 재경 동문회 창설에 커다란 노력을 하여주신 공로자이십니다.
- 제 40회 최정웅 동문께서는 민족의 수난기에 사장되었고 전란 중에 사라진 남평의 역사를 찾기 위해 우리고장의 수많은 사료들을 찾아서 분석하고 광주·나주의 관련 기관과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 등을 찾아내어 문헌에 의한 확실한 근거를 토대로 잃어버린 남평의 역사를 집필하였고 남평 교육의 백년사를 알기 쉽게 편술하고 ‘남평초등백년사’ 편찬에 봉사하여 남다른 애향심과 애교심을 발휘하였음을 높이 치하 드립니다.
- 제 48회 이영권 동문은 재경동문회 초대회장으로 동문회 발전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셨으며, 빙청각의 건립기금 50%를 헌정하여 동문회의 목적사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도롣 남다른 애향심을 발휘하여 주셨습니다.
- 총동문회 사무실 컴퓨터는 배기운(50회) 전 국회의원이, 기물은 서희열 (54회)사무총장이, 또 박근수 전 남평 읍장이 에어컨을 기증해 주셔서 2005년 4월에 동문회 현판을 내걸었습니다.
- 배성주(54회) 회원은 모교 운영위원장으로서 총동문회의 발전을 위해 총동문회기를 기증해 주셨습니다.
- 제 57회 정 용 회원은 빙청각 건립을 통하여 훌륭한 후배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며 또한 늘 이웃사랑에 사시는 어머님에게 기쁨을 드리려는 마음으로 빙청각 건립기금 50%를 부담해 주셨습니다.
- 정문찬(62회)회원은 현 남평초등학교 전경을 비롯하여 기념비 제막과 빙청각 상량식 전경, 남평북교전경을 촬영 기증하여 주셨습니다.
위 모든 분들의 공로를 오래 오래 기억하도록 이 책에 담았습니다.
경향 각지에서 남평인의 긍지를 지키며 자신과 나라를 위해 보람찬 미래를 힘차게 개척하고 계시는 1만 7천여 동문 여러분이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동문 여러분의 앞날이 날로 희망차시기를 충심으로 기대합니다.
나의 회고
윤 판 현 (제25회 졸업. 전 교장)
우리 모교 남평초등학교가 개교 백주년을 맞게 되어서 참으로 감회가 무량하다. 교명이 네 번이나 바뀌어지도록 온갖 시련과 풍파를 겪어 우리 사회 발전과 국력배양에 기여할 거목을 수없이 배출해 낸 자랑스러운 모교이다.
이 사람은 모교에서 학생으로서 교사로서 교장으로서 초대 총동문회장 등 배우고 가르치고 경영하고 선후배들과 생활하며 모교의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으며 살아왔다.
1934년 9월 서당에 다니다가 윤학석, 이황주, 이근천과 같이 당시 남평면장이셨던 윤우혁 족숙의 주선으로 세 사람은 기부금을 30원씩내고 나는 가난하다고 15원을 내고 3학년 2학기에 편입했다. 첫 등교일부터 촌놈들이 왔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으나 네 사람 다 실력이 월등해지자 달라졌다. 6학년 졸업하고 진학을 못하고 고학차 서울로 떠나야 했다.
서울에서 고학으로 중학교(야간) 4년을 수료하고 하향 도중 6학년 담임이셨던 일본교사인 사이또 선생님의 권유로 모교 교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1년 후 전라남도 시행 교원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훈도로 임명되어 6학년 담임 중 근로동원 청년훈련소 특별연성소, 여자 특별연성소 등 월월금금(月月金金)이라며 하루도 휴일이 없이 혹사를 당했다. 당시 4, 5, 6학년 학생들 참으로 미안했다. 1945년 8월 10일경으로 생각된다. 목포산수소학교(일인학교) 3, 4학년 300여명이 남평교로 피난을 왔다. ‘남평은 영평이다’ 그래서 왔단다. 그 덕으로 우리학교 학생들은 각 지역으로 쫓겨났다. 나만 읍내 사는 6학년 105명을 데리고 학교에 남아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근무하다가 이질이란 진단서를 내고 누워버렸다.
해방이 되었다. 직원들은 다 떠나고 나만 남았다. 혼자 학교를 지키면서 9월 초순부터 학생들을 소집하여 서편 큰 느티나무 밑에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배봉민 교장선생님이 착임하셨다. 배봉민 교장선생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역사연대표를 손수 만드시고 6학년 담임인 오수동 선생님은 국어과를, 나는 산수과의 교과서를 만들었다. 인쇄할 용지와 원고지가 없어서 고생했었다. 당시 전라남도 초대 도지사인 서민호씨가 초도 순시차 방문하여 배봉민 교장선생님이 만드신 국사 연대표를 보고 감탄하여 극찬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48년 5월 20일 전라남도 지정 음악과 연구학교 발표일이었다. 도내 전 지역에서 300여명의 교원들이 참관하였다. 음악과 지정수업자인 배영섭선생님의 지정수업은 대성황을 이루어 그야말로 훌륭한 수업이었다는 장학진의 극찬이 있었다. 나는 산수과 일반수업이었는데 학생들이 자유토론학습을 열심히 전개하므로 도 장학진이 수업시간을 연장시켜가면서 참관자들에게 공개시켰다. 나는 그 10일 후에 승진되어 6월 30일, 35회 졸업생과 같이 모교를 떠나야 했다. 24년 후인 1972년 9월 1일자로 모교 교장으로 돌아왔다. 모교의 경영을 맡아 도 지정 연구학교, 보건환경 시범학교 및 우수학교, 교지 확장 등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45간의 교직생활을 끝내고 정년퇴임한 후 종중사(宗中事)에 종사하던 중 다시 모교의 총동문회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언에 수락한 후 부회장 윤승혁, 김만흥, 김덕수, 김창선, 강인용과 간사 박순호를 중심으로 사무소를 설치하고 친목 행사기금 조성, 회보 발간, 홍보활동 협조 등 열심히 노력하였다. 2년의 임기가 만료되어 차기 회장인 신정채 씨를 추대하여 빙청각 재건축 사업을 재정은 회장에게 건축은 광일토건사장 이사장으로 결정하여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무산되었다. 빙청각 건립자이신 배봉민 교장선생님의 뜻과 교육정신이 간절하게 느껴진다. 우리 모교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한다.
빙 청 각(氷靑閣)
배 영 섭 (제28회 졸업. 전 교장)
학교 동편에 연못이 있고 연못 한 가운데에 동그란 섬이 있었다.
학교 앞에 흐르는 농수로의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가득 채웠다. 이 연못에 다리를 놓고 섬에다 아담한 사각 정자를 지었는데 이 정자를 이름하여 빙청각(氷靑閣)이라 하였다.
빙청각은 1947년 초여름에 건축되었고 당시 교장으로 재직하셨던 배봉민(裵奉旻)교장께서 직접 설계하였다. 빙청각이란 현판 글씨는 강해성(姜海成)어른께서 쓰셨고 나는 그 곁에서 정성껏 먹을 갈았던 기억이 난다. 현판은 양각으로 되어 있는데 배봉민 교장선생님께서 손수 만드셨다. 건축 경비는 34회 졸업생들의 근로봉사 기금으로 지었다. 빙청각은 교직원과 학생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으며 정담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며 오락도 하며 학생들의 어린시절 꿈을 키우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빙청각에 홀로 앉아 빙청각이란 현판을 바라보며 내 정성을 다하여 제자들을 훌륭히 가르치겠다고 다짐도 하고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여기서 빙청각의 뜻을 살펴보자. 氷은 어름 빙자, 靑은 푸를 청자다. 얼음은 물에서 나되 물보다 차고 푸른 빛은 쪽(식물)에서 우러나되 쪽보다 푸르다. 그러므로 제자는 스승에게 배우되 스승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이 어원을 살펴보면 청출어람(靑出於藍), 이청어람(而靑於藍)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준말로 출람(出藍)이라고도 한다. 푸른 빛은 쪽이란 식물에서 얻지만 쪽보다 푸르다는 뜻, 즉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으로 순자 권학편(荀子 勸學篇)에 있는 말이다.
나는 빙청이란 뜻을 되새길 때마다 선배님 한분이 생각난다. 그 분은 본교 교사로부터 교장을 역임하셨고 남평초등학교 초대 총동문회장을 지내셨던 본교 25회 졸업생이신 윤판현(尹判鉉) 선배님이다. 선배님은 일제 말기에서 건국초기까지 본교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셨다. 나의 교육 생애에도 많은 가르침과 큰 영향을 주셨던 분이시다. 선배님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내시겠다는 일념으로 방학 동안에도 자신을 희생하며 아무런 보수도 없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의 부담을 없애기 위해 자기가 학창시절 사용했던 책을 풀어 그 종이 위에 직접 등사를 해서 문제를 풀게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그리하여 선배님은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제자들은 지금도 고희를 훌쩍 넘어 지금도 스승을 생각하며 많은 얘기들을 나누고 있다. 그 제자 중 한사람이 떠오른다면 대법관을 지낸 배만운(裵滿雲) 전 대법관이라 하겠다. 푸른 꿈을 키웠던 빙청각(氷靑閣)이 교실 증축으로 헐리고 연못은 매립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한 정명호 회장을 비롯한 추진위원들의 헌신적인 노고와 많은 동문들의 뜨거운 협조에 감사하며 우리 후배들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해주신 윤한옥 교장선생님과 교직원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남평초등학교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기원하면서 빙청각(氷靑閣)에 대한 글을 맺는다.
유년시절의 그리운 추억들
신 정 채(제35회 졸업. 한국ENG대표이사)
내가 모교인 ‘남평남공립국민학교’에 입학한 때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43년 4월이었다.
이미 60여년이 흘렀건만 내 가슴 속엔 어제인듯 선연하게 몇 가지 추억들이 살아 있다.
입학식이 끝나자 일본 여선생님이신 ‘모리스미(森住)’ 선생님께서 학교생활에 대한 안내를 해주셨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퍽 인상적이었다. 선생님께서는 학교 구석구석을 안내하시고 마지막으로 변소(화장실)에 이르러서는 소변을 보는 자세, ‘노크’를 하고 변소 문을 여닫는 방법 등을 시범을 보이면서까지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일본말을 전혀 할 줄 몰랐던 나는 언어소통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다행히 담임선생님이 한국인(澾城奉旻)이어서 간혹 우리말을 섞어가며 지도해 주셨기에 그런대로 학교생활에 곧 익숙해 갔다. 2학년 담임선생님이셨던 ‘오히라(大原洋鎭)’ 선생님께서는 수업이 끝나면 재미있는 동화나 전쟁이야기 등을 소재로 ‘가미시바이(그림연극)’로 꾸며 무성영화시대의 변사가 말하듯 흥을 돋우어 들려주시기도 했다.
그 해 가을철 운동회 연습을 나로서는 잊을 수가 없다. ‘모리스미’선생님께서 우리 반 무용을 지도해 주셨는데, 나더러 앞으로 나와서 한번 해보라하셨다. 엉겁결에 나가서 배운 대로 하였더니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 뒤로 ‘모리스미’선생님께서 나를 보시면 생긋 웃어주시기도 했다.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그리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3학년이 될 무렵 학교 분위기는 전시 체제로 뒤바꾸어 우리들은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공부보다도 산과 들로 나가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마초를 베기도 하고 산에 올라 송탄유를 짠다고 베어낸 소나무 뿌리를 파기도 했다.
이렇게 힘겨운 근로봉사와 전쟁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암울한 생활을 해오던 우리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가슴 벅찬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 직후의 그 벅찬 감동,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환희에 찬 군중들의 만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싶다. 우리들은 애국가를 배워 불렀고 ‘독립행진곡’, ‘여명의 노래’ 등을 목청껏 부르며 행진하기도 했다. ‘한글 첫걸음’이라는 책자로 한글을 처음으로 배워 익히고 우리말, 우리글을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6학년이 되자 윤판현(尹判鉉) 선생님의 열성어린 지도로 중학교 진학공부를 주야로 합숙하면서까지 열심히 했다.
친구들은 대부분 광주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건축설계사’가 되고자 나는 ‘목포공립공업중학교’ 건축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이어서 대학교, 대학원까지 건축공학을 전공하여 대학교수를 거쳐 지금은 건축사로서 건축설계와 건축감리회사를 현재 운영하고 있다.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과 꿈이 깃든 모교의 개교 100주년을 맞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더욱이 17000여 동문 중 많은 분들이 이 고장은 물론, 국내외의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자로서 눈부신 활동들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랴!
아울러 개교 100주년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 건립을 비롯, 100주년 사지 발간, 빙청각 복원등을 하게 된다니 참으로 뜻 깊고 자랑스럽고 빛나는 사업이 아닐 수 없다.
동문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모교 100주년과 기념사업을 축하하며, 100주년 사업에 정성을 다해 주신 총동문회 임원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신 동문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모교의 무궁한 발전을 충심으로 기원한다.
◦朝鮮大學校工科大學敎授(建築工學科)
◦監査院名譽監査官
◦(株)新韓國ENG代表理事
◦南平初等學校總同門會 第2代會長
百 年 精 進
白綠 김 장 원 (제36회 졸업)
어느 철인은 사람은 네 가지 눈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첫째, 인생을 멀리 보는 역사적인 눈이요.
둘째, 사물을 바라보는 과학적인 눈이요.
셋째는 존재를 깊이 보는 철학적인 눈이요.
넷째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는 예술적인 눈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눈을 慧眼이라고 한다.
그것은 슬기로운 눈이요, 지혜로운 눈이요, 총명한 눈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의 길목에서 많은 문제에 부딪친다.
사랑, 우정, 결혼, 이별, 죽음, 사업, 공부, 신앙, 성공, 실패 등 난제와 난문에 봉착한다. 이럴때 우리는 어떻게 해동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해답을 찾기도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생각의 어머니는 행동을 낳고 행동의 어머니는 습관을 낳고, 습관의 어머니는 성품을 낳는다.
바로 이 성품이 그 사람의 인격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명언을 보면 성상근야(性相近也), 습상원야(習相遠也)라 했다. ‘세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과 같이 습관은 그 사람의 천성 즉 성품이 되어 버린다. 인간의 성품. 즉 천성은 습관에 의해 커다란 차이가 난다.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고의 습관이 생긴 사람은 인생의 매사를 부정적으로 본다. 이와 반대로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는 습관이 생긴 사람은 세상만사를 긍정적으로 본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 시대이고 사이버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지구촌의 글러벌화 되어서 정보가 곧 살아서 움직이고 상부상조하여야 삶에서 승리할 수 있다. 나는 본교 36회 출신으로서 모교 100주년을 맞아 더욱 감회가 깊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일제 36년 말 시기였고 매일같이 학교 나오면 공부는 뒷전이고 말이 먹는 풀베기, 뽕나무 밭에서 일하기 등 노동시간이 하루의 일과를 채웠으며, 그러다 3학년때 해방이 되어 어수선한 가운데 3개년 후 졸업을 하고 광주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내 머리에 남은 것은 대동아전쟁 말기에 일본 사람들이 우리들을 괴롭혔던 일들이 생생히 남아있다.
동문 여러분!
우리 고향 남평은 지리학적으로 보면 지석강 줄기에 인접하여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이 풍부하고 농토가 비옥해서 늘 농사가 풍년을 기록하고, 광주시에 인접한 소도시로써 나주와 목포, 그리고 화순으로 연결된 교통요지요, 산수가 화려해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한 고향이다. 그리고 인심 좋고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고향이기도 하다.
남평 초등학교는 100년간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배출하였으며, 배출된 인재들은 지역사회는 물론 나라발전에 기여하는 기여도가 높은 훌륭한 선후배들이 많이 있음을 자부한다.
옛날부터 남평 출신은 남평인답게 남평인의 기질을 가지고 공동사회에서 화해와 일치의 조화를 이루어왔다. 100주년을 맞은 남평초등학교 출신은 역사적인 눈과 과학적인 눈과 철학적인 눈을 가지고 만사를 합리적이고 민주시민답게 공동체를 일원으로서 협조하고 아름답게 보는 예술적 눈으로 웰빙시대에 맞는 생수의 역할을 했으면 한다.
19○○년 남평북교 교문건립 기증 19○○년 남평북교 교문건립 기증 은석학원 이사장 김장원, 나주교육청 박규현 교육장 준공후 인사말 준공후 인사말
남․평․이․야․기
정 두 진(제36회 졸업, 서예가)
인생은 유수와 같이 흐르는 세월에 두둥실 떠내려가는 작은 나뭇잎이라던가? 역사적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내 어릴적 다녔던 모교가 올해 100살이라 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내 나이부터 다시 헤아려보게 된다. 정든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돌기 어언 60년….
붓 글씨 인생을 살아오면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근본을 잠시도 망각하거나 소홀히 한 적은 없지만 오늘따라 남평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웬 일일까?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에 가지 않고 쏘다니며 뛰 놀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문득 과거속으로 들어가 본다.
송지덤(장터에서 남평교회쪽으로 난 덤둑, 지금은 흔적도 없음)에서 달음박질도 하고 까막당산(현 대교리사무소 뒤편)에 몰려가서 어른들 몰래 당산나무위로 기어올라가 매미 잡던 일, 법수골을 지날때면 한다리목(대교리) 도랑가 수양버들 옆에 서있는 동부대장군 서부여장군의 무서운 얼굴(장승)을 쳐다보며 또래들이 겁을 먹었던 일, 객사몰(동사리) 뒷 도랑에서 피라미와 가재도 잡고 유문등(현 동사, 교촌 사거리)에 세워진 진대를 쳐다보며 제멋대로 귀신이야기를 지껄이기도 하였고, 옥앞에(교촌) 공터에서 술래잡기도 하며 뉘어진 돌판위에서 죄수들을 패는 형리의 흉내를 내기도 하고 둥그몰 행갱이(현 월연대산 모퉁이)로 몰려가 당산나무 아래 남근석의 용마름과 금줄을 걷어버리고 영세암거리(마을 앞 들샘)까지 도망쳐 할딱거리며 목을 축이던 일, 여름이면 국도 1번 새여울 다리(新灘橋) 밑에서 미역을 감으면서 옛날 성탄교(城灘橋-나무다리) 밑기둥까지 헤엄치며 내기하던 일.
이제는 기억속에서만 살아있는 과거의 지명(地名)들과 어울렸던 추억(追憶)들은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오늘따라 남평이야기는 끝이없이 나올 것만 같다.
- 서예가(月亭)
- 경찰종합학교 지도교수
- 대한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 월정연서회 회장
사랑으로 가꾸는 교실
한 병 기 (제36회 졸업, 전 남평초 근무)
내가 남평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62년 8월 31일이다.
사범학교(師範學校)를 졸업하자 첫 발령으로 나주군 관내 변두리의 학교에 근무하다가 모교이며 고향의 중심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어 그 기쁨은 말로서 형용할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광주(光州)근교를 비롯하여 나주군 관내에서도 남평초등학교의 근무에는 까다로운 인사규정 때문에 힘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고향학교에 근무할 교사로서의 태도와 자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여 보고 “충분한 수업연구를 통해 성심성의를 다하여 제자들의 교육에 임할 것이며 학부모들에게 존경받는 교사상(敎師像)을 심도록 노력하자”는 포부와 각오를 새롭게 다지면서 부임하였다.
8월 말일자라 2학기 동안 나는 4학년을 담임하여 학교의 생활에 임하고 반년이 지나 학년이 바뀌면서 우리반은 서로가 친숙하게 익은 얼굴들로 함께 5학년으로 올라갔다. 그 당시 학교는 교실이 부족하여 매우 어려웠었다. 우리반 교실은 교무실을 개조해서 ⅔는 교실로 사용하고 나머지 ⅓은 교장실로 운영하는데 교실과 교장실의 칸막이는 서류함(케비넷)을 가운데로 주욱 세워서 공간만 막고 천장은 그대로 터진 상태라 그 교실에서 얼굴만 보이지 않는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공개 수업을 하는 형태였고 또 손님은 끊임없이 드나들고 선생님들도 교장실에 많이 출입하는 곳이라 수업용어는 아주 낮아야 하고 학생들은 항시 조용히 수업에 임해야 하였기 때문에 우리 반 학생들은 긴장이 계속되어 마음 고생과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당시 제자들은 그 환경을 잘 이해하고 담임교사인 나를 잘 따라주었던 고마움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그 제자들을 다음해 6학년 까지 맡아 함께 생활하고 졸업시켰다.
결국 3년간 계속 같은 선생님이 같은 어린이를 지도한 셈이다. 그 당시 우리고장 남평의 각 가정환경은 어느 농촌지역이나 같았겠지만 생활이 어려운 형편이라 학생들이 공부하는데도 매우 힘들었다. 소재지 지역은 물론이고 주변의 농촌 지역도 농외소득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다만 소재지 지역은 5일시장이 있어 여기서 상업을 하는 가정은 소득이 조금 낳은 편이기도 하지만 변두리 지역은 힘들게 생활하고 사는 가정이 많아서 6학년에 올라 중학교 진학의 대비에 어려움이 컸다. 또 남평초등학교는 예부터 모두 광주시내의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광주에 연고가 없으면 더 힘들었다. 또 지금은 중학교가 평준화되었지만 그 당시는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입학시험을 치르고 꼭 합격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교때부터 참으로 어려운 입시 관문을 뚫고 가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6학년 담임은 “중학교 진학대비”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1년 내내 남다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리였다.
진학반 학생들의 수업에는 참고 자료와 시험지 등 학습비가 특별히 부담스러운 짐이 되던 시절이었다. 얼마정도인지 기억은 없으나 이것은 정말 어려운 가정에서는 아주 힘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학생이 있다. 우리 반 어린이 60여명의 반장 “ㅈ” 이다. 이 어린이가 사는 곳은 변두리 마을이었다. 그러나 착하고 공부도 잘 하여 급우 간에 신망이 있어 반장으로 뽑히었다. 부지런히 봉사활동을 잘하며 또 진학반 수업을 열심히 받아 중학교 입학시험을 볼 시기가 되어 어려운 가정환경으로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따르니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만을 바라고 부모와 상담을 하였지만 장학생으로 입학이 되더라도 3년간의 하숙비며 교육비가 더 걱정되어 결국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다. 담임으로서는 너무도 안타까운 노릇일 수 밖에 없었다.
졸업 후 풍편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진출하여 회사에 입사해서 주경야독의 독학으로 배움의 열정을 태우며 열심히 생활을 하던중 좋은 신랑 만나서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들 부부가 초등학교의 옛날 스승을 찾아 라디오 방송에 나오게 된 것을 우연히 알았다.
지금은 사업차 중국으로 가서 살면서 매년 두 번씩 잊지않고 소식을 보내주는 잊을 수 없는 제자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45년 동안 많은 제자중 그 정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해주거나 찾아주는 일들이 너무도 고마워 교육자로서 큰 보람을 느끼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삶의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의 위상(位相)과 가정(家庭)에 더욱 큰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남평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으면서 추억의 한 단면을 글로 써 본다.
나는 나의 모교를 사랑한다.
윤 승 혁 (제36회 졸업)
모교란 직역하면 어머니 학교이다. 한글 사전을 찾아보면 자기가 졸업한 학교이다. 그렇다면 공부를 가르치는 학교에 왜 어머니 모자를 부쳐 모교라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그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를 낳아준 분, 나를 젖먹여 길러준 분, 따스한 가슴으로 사랑과 정을 심어준 분, 내게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소중한 분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를 가르쳐준 초, 중, 고, 대 등 학교들이 모두 어머니 모자를 붙일 수 있는 모교일까? 아니다. 내가 정의하는 모교는 분명 다는 아니다. 그렇다면 모교는 네단계의 학교 가운데 어느 학교일까?
코 흘리게 나를,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어린 나를 어엿한 소년으로 키워주고 가르쳐준 초등학교, 바로 남평 초등학교가 나의 모교이다.
남평초등, 그는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린 나를 입학시켜 학교라는 사회의 일원으로의 첫걸음을 할 수 있게 하여준 곳, 처음으로 교육을 접할 수 있게 하여 교육의 기초를 놓아준 학교, 내게 오늘이 있게 하는데 내 인격의 기초를 세워주고, 교실이며 뛰놀든 운동장이며, 등하교 길을 통하여 끈끈한 정으로 죽마고우를 맺어준 그가 바로 나의 향수요, 나의 모교이다.
초등 교육은 교육의 기초요, 기본이다. 기본은 매우 중요하다. 기본의 잘잘못에 따라 그 끝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하였고, 또한 올바른 교육은 올바른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따라서 초등 교육에 따라 올바른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된다고 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바로 바른 사람으로의 인격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이 초등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등교육은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시 되지 못하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기본과 기초의 중요함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다. 모래위에 지은 큰 집, 다시 말하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호화로운 집이라는 말이다. 그 집 오래갈 수 있을까? 결코 오래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기초가 견고해야 호화로움을 오래도록 뽐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한다.
그러나 그러한 중요한 기초는 흙 속에 묻혀 보이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는 것처럼 교육의 기본이요, 기초인 초등교육이 크게 부각 되지 못하고 수면아래 숨겨진 게 아닌가하고 느껴지기도 한다. 결코 우리의 교육의 기본이요, 바른 인력을 형성시켜 줘야할 기초인 초등교육이 크게 부각 되지 못하고 수면아래 숨겨진 게 아닌가 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결코 우리의 교육의 기본이요, 바른 인격을 형성시켜 줘야할 기초인 초등교육의 중요성을 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오늘이 있도록 하여준 학교가 나의 모교요 바로 남평초등학교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모교를 사랑한다. 나의 모교인 남평초등학교를 사랑해 왔다.
또한 남평 초등학교가 우리 지역 남평의 미래를 짊어질 유능한 인재, 애향하는 일꾼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으로 우뚝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중요한 모교를 위하여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 몫이 분명히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때에 다행하게도 우리지역인 남평에서 일을 하게 되어 모교를 위하여 적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모교에서 재직하셨던 교장선생님들과 교육발전을 위한 동반자적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교육시설 확충과정에도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때 모교의 숙원이었던 체육관 시설 문제도 해결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모교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게 되고 애정과 소망이 더욱 많아져 왔던 것 아닌가 한다.
어언 우리의 모교는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게 된다. 100년동안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지역사회와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기여해 왔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하여줄 것으로 믿으며 또한 그렇게 되어 주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이와 같이 소중한 우리들의 모교, 나의 모교, 따스하고 포근한 어머니 학교인 남평 초등학교를 나는 언제까지나 사랑할 것이다.
긍정적인 삶을 살라 그러면 당신의 삶은 최고가 될 것이다.
이 동 원 (제40회 졸업)
남평초등학교를 1953년에 졸업했으니 어연 53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으며 고향땅을 떠나온지도 금년으로 47년이 되었다.
세월은 정말 유수와 같이 빠른가 보다. 초등학교 시절 빙청각 연못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놀던 일, 축구공을 갖고 싶어 반 친구들이 교문 앞 담밑에 양배추를 심어 그것을 팔아 축구공을 사주신 봉선생님의 고마움, 6․25를 겪으며 공비들에 의하여 하루저녁에 마을사람 60여명이 죽고, 학교는 모두 불타버려 수리조합 창고 잠사창고를 전전하며 6학년 때 겨우 가건물 초가교실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일, 그런데도 우리 40회 졸업생 중에는 중학교 입학시험(그 당시는 지금 수능시험과 같이 전국에서 동시실시 했음)에서 김산기 친구가 나주군에서 1등을 했으며 서중학교에 2명, 사범학교에 2명이 합격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던 일, 이 모두가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된다.
가끔씩 고향을 찾을 때면 새녀울 다리 밑에서 미역을 감던 일 백사장에서 소꼽장난을 하던 일, 그러나 지금은 그 하얀 모래 백사장은 온데간데 없고 강물은 오염되어 미역감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친구에게 왜 백사장이 없어졌냐고 물었더니 강폭이 좁다고 하여 없앴다고 하니 토목이 전공인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언제나 저강에서 미역을 감을 수 있을까? 언제나 그 햐얀 모래백사장이 복원되어 거닐어 볼수가 있을까? 빙청각이 복원되어 코흘리게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을까? 서울생활이 각박하다 보니 고향친구들과도 소식을 물으며 살지를 못했던 터라, 41회 졸업생들이 ‘빙청각’이란 모임을 만들어 자주 만난다기에 나도 끼워달라고 부탁하여 1년이면 서너번씩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갖을 때면,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이 맨손 쥐고 서울에 와서 저렇게 자리잡고 잘사는 것을 보면서, 삼평중 하나인 남평사람들은 고춧가루를 서말이나 먹고 물 30리길를 헤엄칠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나며,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여 살았기에 성공들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일본 재계의 신으로까지 불리워졌던 마쓰시다 고노스께 회장의 삶이 생각난다.
아주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가난 때문이라고 탓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 덕분에 평생 근검 절약할 줄 알아 일본 제일의 부자가 되었으며, 그분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다닌 때문으로 탓하지 않고 오히려 배우지 못한 덕분에 평생 남보다 열심히 공부하여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으며, 몸이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조심하고 건강을 챙겨 9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분명 그 친구들도 <때문>이라고 탓하지 않고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기에 성공했으리라 믿는다.
건설기술 교육원에서 강의할 때면 언제나 첫 시간 강의 단골 메뉴는, 머리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남의 것을 모방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기술을 창출할 수가 없으며, 오직 가슴으로 그 일에 미치는 자만이 새로운 기술을 창조할 수 있다고 경험담을 들어 강의를 하곤 했다.
세게적인 베스트셀러인 조엠 오스틴 목사가 쓴 ‘긍정의 힘’이란 책속에는 ‘매사에 긍정적인 삶을 살라 그리하면 당신의 삶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외쳤기에 레이크우드 교회는 급속한 성장과 함께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153개국에 전파를 타며 듣는 이들로 하여금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남평 초등학교 후배들에게도 이 말을 전하면서 펜을 놓는다.
◦(주) 동우지오시스템
◦(주) 국도컨설턴트
남평초등 43회 동창님들 보게나
서 영 일 (제43회 졸업)
동창님들 속리산 다녀온 후 집에는 무사히 잘 들어갔는가?
그간 몸 건강히 잘 들있겠지? 나이들면서는 돈 보다는 건강이 최고다네. 어느덧 오십여년이 흐른 지난 6월 6일 현충일 날 TV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벌어지고 말았네 그려. 대전역에서 동창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 제43회 동창회의 글씨 피켓을 들어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웃고 넘기겠나. 여자동창님들 한테는 회를 대표해서 감사의 말씀 올리내. 여자는 모임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서울, 부산, 광주, 제주도, 강원도, 경기도, 전남 곳곳에서 참석하였으니 어찌 힘들지 않았겠나. 그 성의에 감사드리며 조그만 추억이라도 간직하였으면 하네. 나도 드디어 믿어지지 않은 일이 생기고 말았지 오늘도 그럴 수가 하고 생각든다네. 버스에 올라온 여방미가 자리에 않았다가 와서 영일이 이름을 기억하더니 조금 후 다시와서 서영일 이라고 불러서 놀랬지. 난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데 더군다나 여자반도 아니었는데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 상당히 감명 받았다네. 만나서 술도 한잔하고 식사도 하고 노래도 불러보고 잔디에 앉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369.369 게임도 하였으니, 이 어찌 추억이 아니라고 하겠나. 지나간 이야기 하라고 하니 먼저 무슨말을 해야할지 모른다나. 오십여년 만에 만나 무슨말을 하냐고?
여자 동창님들, 혹 남자 회원들의 대접이 좀 소홀하였다면 이해해주기 바라네. 건강할 때 많이 돌아다니고 몸 관리도 잘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에 또 만남의 날을 기약하면서 사진도 동봉하니, 동창들 생각날 때 마다보게.
서영일 올림
나의 자랑거리
박 정 수 (제44회 졸업. 현 광주광역시교육과학연구원장)
사람마다 한 두 가지의 자랑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지칠줄 모르는 건강이 자랑거리가 되고, 또 어떤 이는 미모가 자랑거리일 수 있다.
자랑거리가 많을수록 그는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결국 행복한 人生이라 단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에게도 물론 자랑거리가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남평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이다. 남평초등학교 졸업이 나의 자랑거리가 된 데는 몇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의 모교인 남평초등학교는 시골에 위치한 학교이다. 요즈음 농어촌 인구의 감소와 주민의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취학하는 학생이 급감하여 폐교된 학교가 부지기수 인데 지금까지도 재학생 500여명의 학교로 농어촌 학교로는 보기 드물게 큰 학교로서 그 위용을 보이고 있다. 그러하니 이것이 남평초등학교가 나의 자랑거리라는 첫 번째 이유이다.
나는 남평초등학교 6년을 다니면서 정말로 훌륭한 스승님들을 만날 수가 있었으니, 이 어찌 또한 자랑거리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칠 무렵, 그 때는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중학교를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가 나에겐 전혀 없었다. 그 때도 물론 명문중학교가 있어서 시골에 사는 나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내 실력으로 그 중학교에 갈 수 있는 것인지 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6학년 담임선생님이 제시해 준 중학교에 원서를 냈고 입학 시험을 치룬 결과 다행이 합격이 되었다. 합격은 되었지만 그 중학교가 소위 말하는 일류 명문학교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내가 합격한 그 중학교가 훌륭한 학교이며 나에게 꼭 맞는 중학교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셨는데 그 중학교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주사범대학 부속중학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6학년때의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는 교육자의 길이 적성에 맞을 것이라고 판단하시어 교사 양성기관인 그 중학교에 진학토록 해 주셨던 것으로 이는 내 人生의 진로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교육자 생활을 평생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40년 넘게 봉직하여 왔으며 이제 정년퇴임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나는 교육계에서 한 평생을 보내면서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교육자라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딱 들어 맞는 직업이라고 여기며 만족스럽게 생활해 왔다. 나의 인생의 진로를 결정지어 준 것이 결국 남평초등학교였던 것이니 어찌 나의 자랑거리가 아닐수 있겠는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중학교로 진학했더라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볼 때마다 남평초등학교 졸업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는 수 많은 초등학교가 있다 광주만 하드라도 약 130개 학교, 전남의 경우 약 600여개의 학교(분교장 포함), 그런데 내가 졸업한 남평초등학교는 올해 개교 100주년이라는 뜻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많은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생전에 개교 50주년을 맞이하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인데 우리 동문들은 살아서 100주년을 맞는다고 하는 것은 보통의 행복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어찌 자랑이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이유인 것이다.
혹자는 “우리의 본적이나 원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내가 남평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인데 이를 어떻게 바꿀수 있겠는가? 그러하니 이처럼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남평초등학교를 모교로 둔 나의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17,162명 동문들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나의 모교가 동문 모두의 뜨거운 사랑속에 발전을 거듭하여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인재의 산실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나의 모교 남평초등학교여, 영원하라.
잊혀지지 않을 마음속 지문, 남평초등학교
임 준 선 (남평북교 제10회 졸업(남평46회), 현 전남타임스 사장)
나는 나주 남평초등학교로 통합된 남평 북초등학교(10회 졸업)를 1950년대 한국 전쟁 이후의 시기에 다녔다. 농촌에서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에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안일을 하는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은 더 많았다. 그러니 우리보다 앞서 일제와 해방, 한국전쟁의 시기에 살던 세대들은 기초적인 초등학교 교육마저도 받을 기회가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가난 속에서 배운 가갸거겨
다 가난 때문이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집안의 큰일이라 하더라도, 마음 놓고 자식을 교육시키지 못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그 시절 가난하던 시절 고향 깨복쟁이 친구들에 비하면 나중의 중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진심어린 우정을 나누지 못하였으니, 가난하던 어린 시절의 만남이란 그렇게 중요한 모양이다.
식구가 곧 노동력이었던 시절 아이들은 어린 동생을 업고, 집안일을 거드는 것이 일과였다. 농사일도 물론 집안일의 한 가지였다. 구두닦이나 신문팔이를 해서라도 부모의 생계를 도울 수 있는 것은 혜택 받은 어린이들이었다. 나머지 어린이들은 가난 때문에 공부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야만 하는 천둥벌거숭이 신세였다. 가난해서 얼굴이 언제나 누렇게 뜬 얼굴로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겨야 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다른 어떤 것에 우선하는 생과 사의 경계선이었다.
천막학교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초등학교를 다닌다고는 해도 교육 환경은 지금과는 천차만별이었다. 전쟁 직후라 천막학교에서 엎드려 글을 배웠다. 학교는 먼지투성이의 야전 학교였고, 원조 물품이었던 시커멓게 굳은 우유로 허기를 때워야 했다. 초등학교 교과서 편찬과 보급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국가 재건의 시대 학교 풍경이었다.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이 초등학교 교육의 전부였던 시절, 중학교 입학 지원자에 대한 국가고시제가 실시되어 대부분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중학교에 가지 못했던 현실. 교육 재건이라 해서 이제 막 초등학교 학제가 만들어지고 전쟁의 폐허 속에 학교 교사가 다시 지어지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교육 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때 우리를 가르쳐주시던 5․6학년 때의 선생님(5학년 김동귀 선생님․6학년 한병기 선생님)과 교장선생님(윤판현 선생님)이 아직 생존해 계셔서 가난했지만 따뜻한 정감이 흐르던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기억해줄 분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이제 환갑의 나이에 든 나의 소회를 기쁘게 한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천막 교사 안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던 머릿내 나던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은빛에 해당되는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같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급우들의 눈망울들이 떠오른다. 학교 파하면 지석강에서 물장구 치고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놀던 아이들은 이제 환갑의 나이가 되어 서로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다행히 고향에 아직까지 남은 친구들은 한 달에 한번 있는 동창회를 통해서 만나 그날만큼은 50년 전의 깨복쟁이 시절로 돌아가 즐거운 추억 속에 빠질 수 있다. 그 세월 동안 고향 친구들 몇은 이미 지하 인생을 살고 있기도 하다.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것은 고향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 그리고 부모님들의 얼굴이다.
세월 가도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
우리 나주는 이제 천년 목사골의 위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특히 우리 남평읍은 광주와 인접한 지역으로 전남의 남부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관문이자 지석강과 드넓은 남평 평야라는 천혜의 자연요건을 갖고 있어 발전 잠재력이 무한한 고장이다.
광주의 남쪽 넓은 벌판이라는 뜻으로 남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지석강 주변의 기름진 토양에서 생산되는 남평 평야의 산물이 풍부해 역사, 문화적 유래가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남평읍은 이제 21세기를 맞아 지석강 공원화 사업과 시가지 주거환경개선사업 그리고 소도읍 가꾸기 사업 등을 통해 맑고 푸른 고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살기 좋은 남평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어린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하고 뛰어놀 수 있는 자연형 체험 학교, 대안적 인성교육 학교가 많이 세워져야 한다. 지금은 농어촌 지역의 학교들에 입학생이 없어 학교가 통합되고 폐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지역이 활기를 되찾으려면 가장 먼저 아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학교가 많아져야 한다.
현재는 남평 지역 초등학교가 남평초등학교에 편입․통합된 상태이다. 농촌에서 교육시킬 아이들이 적어졌다는 뜻이다. 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교실에서 떠들며 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우리 남평 지역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거듭나 학교가 새로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처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고향 들녘을 쏘다니며 노는 모습은 얼마나 희망을 주는 풍경인가. 아이들이 희망과 꿈을 고향에서 펼쳐나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우리 지역의 미래가 밝을 것인가. 그런 생각들이 오늘 내 모교인 남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의 날에 떠오르는 단상들이다.
전남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 238번지. 남평초등학교가 있는 남평읍의 주소이다. 1906년 6월 15일 사립영흥학교로 개교한 이래 100년 역사를 갖게 된 남평초등학교는 광주와 다른 전남지역 초등학교와 비교해 보아도 역사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학교다. 졸업한 학생 수만도 17,162명, 지역으로 보면 작은 군 단위 정도의 사람들이 남평초등학교를 졸업하여 모교라는 이름으로 남평초등학교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남평초등학교의 백년 후를 생각하며
간디는 ‘자기 모국어나 자기 모교를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기 어머니를 함부로 하는 사람과도 같다’는 말을 했다. 모교는 어머니이다. 자기 인성과 개성, 인생관이 자란 텃밭이자, 못자리이다. 평생을 따라다닐 마음속의 문신이기도 하다.
남평초등학교는 지나간 100년의 역사보다 앞으로 다가오는 100년 역사가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인구가 줄어 남평초등학교마저 다른 학교에 통폐합되는 현실이 나타나지 말라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반면에 남평초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어린이들이 너무 많아 초등학교가 분교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꿈을 꾸어보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남평초등학교를 졸업하여 경향 각지에 나가 있는 남평 향우, 남평초등학교 졸업생 동문, 남평 지역민들이 힘을 합해 우리 지역을 살기 좋은 남평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그러면 인구가 많아지고 우리 아이들이 남평의 이 수려하고 풍요로운 환경 안에서 교육을 받을 것이다. 학교가 많아지고 남평초등학교를 모교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고향과 고향 학교는 영원히 그 사람들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남평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의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념하면서 졸업 동문으로서 느끼는 소회와 기원을 적어보았다. 우리는 모교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는 모두가 한 식구이자 선후배이며,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