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날(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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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이 있는가
내가 서울에 사는 이유는 세월과 함께 변해왔다.
남들의 은퇴이후의 노후 설계 또는 노령기의 희망사항은 낙향, 전원생활 등이 필수처럼
되어있지만 나는 다르다.
늙어갈 수록 최고의 주거지가 서울이다.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전천후 교통 중심지는 서울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팔도강산이 정원(庭園)인 내게 서울보다 더 편한 곳, 서울의 대안이 될 만한
곳이 전국 어디에 있겠는가.
서남동 길에서도 서울에 사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려 한다.
광역 전철 이용이 가능한 곳까지는 출퇴근 방식으로 하겠다는 것.
그러면 배낭이 가볍고 따라서 능률적일 테니까.
비용이 적게 드는 대신 시간의 낭비가 있으나 운행 시간 외의 시간이므로 지장이 없다.
전일 귀로의 역코스로 도착한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버스터미널.
재개된 서남동 길은 남양방조제(南陽)에서 궤도에 올랐다.
화성방조제 이후의 해안길은 쿠니 사격장은 사라졌지만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으로 인해
끊겼기 때문이다.
1973년 12월 20일 완공된 남양방조제는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와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간의 발안천 하구를 막은 2.06km 방조제다.
2.285h의 농토를 얻었으며 방조제가 만든 남양호는 4.000여h의 농토를 해갈하는 농업
용수를 확보하게 되었단다.
장한 일이지만 당시의 대통령(박정희)의 치사라는 글에 경악했다.
"우리는 대자연과의 대결에서......민족의지의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자연까지 적으로 간주했지만 그는 마침내 적이 아닌 최측근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자연을 정복하려는 못된 유전자로 인해 재앙 속에서 살고 있다.
아무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개발독재시대의 공사라 이즘과 달리 일사천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일방적이기는 해도 찬반에는 각기 이유가 있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도 최선은 없다.
다만, 산업화와 수출일변도에 우리의 농토가 날로 축소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에게는
농지 확보가 다다익선이라는 당위 앞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데, 선이 없다면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작은 악을 택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방조제 외에 대안이 있는가.
내가 방조제를 긍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해군의 현주소인가?
방조제 남쪽인 평택시(포승읍)의 해안길은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다.
한국가스공사의 LNG생산기지와 해군제2함대사령부가 해안을 점유했기 때문이다.
77번 해안도로마저 안쪽 남양대교를 건너가 버린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가.
원정리 관리부두 방파제 끝에 있는 등대까지 갔으니.
주변을 살펴보기라도 할 수 있게 나그네의 출입을 막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종합보세구역 터미널이 바다 위에 떠있다.
되돌아 나오는데 SK석유터미널의 정문 관리실 직원이 불러세웠다.
금지구역에 들어가기라도 했는가?
주저하고 있는 내게 그는 차를 마시며 쉬어가란다.
안중읍(평택시) 토박이라는 그는 성공회 신도다.
정읍에서도 목회한 적이 있다는 성공회 신부의 아들이라는 58세 이종일.
내가 바로 자기의 롤 모델(role model)이라며 잠시나마 내게 극진했다.
이종일은 2블록(block)쯤 건너 있는 해군제2함대사령부의 군함들을 가리키며 저중에는
천안함도 있다고 내 관심을 자극했다.
천안함은 재작년(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 백령도 남방 2.5km지점에서 어뢰에 의해
수중 폭침된 것으로 알려진 해군제2함대 소속 초계함이다.
원인에 대한 분분한 이론은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되레
기름이 되어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으며 미결 상태에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인양된 천안함은 안보교육용으로 전시중이며 일반시민의 견학이 가능하다는데 내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내가 비록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안보사상은 천안함과 관계 없이 투철하다.
그래도, 시비의 폭발 가능성이 여전히 높은 잠재적 위험물 천안함의 인력(引力)은 셌다.
그러나 목전에 있지만 출입이 가능한 정문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도 한동안 82번 도로
따라 걸은 후 1km가 넘는 함대사령부 전용도로를 걸어야 나타난다.
안내실에서 확인된 사항은 견학 3일 전까지 신청해야(인터넷 또는 전화) 한다는 것.
늙은 나그네의 사정을 청취한 담당 사병은 고맙게도 견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단다.
다만 오후의 스케줄은 13시, 15시 2회인데 내가 13시 이후에 도착했기 때문에 2시간쯤
대기해야 한단다.
기다리는데 이골이 난 내게 2시간은 즐거운 막간일 뿐이다.
호사다마인가.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군 영내라는 특수지역이기 때문인지 견학자는 예외 없이 승차 입장인데 차가 없는 개인
견학자를 위해 마련된 차량을 돌연한 부대의 사정으로 가동할 수 없게 되었단다.
따라서 견학이 취소될 수 밖에 없으니 날더러 돌아가란다.
견학시간이 임박한 오후 3시 직전에 한 사병이 나타나 이 한마디를 하고 들어가버렸다.
내가 과연 할 일 없는 한가한 늙은이로 보였는가.
시민이 얼마나 만만하게 보이기에 이처럼 무책임하고 일방적일까.
대민 안보교육을 표방한 스케줄을 이렇게 허술하게 운영하는 기강이 없는 군대.
이것이 과연 한국해군의 현주소인가.
천안함 사건이 누구의 소행인가는 차치하고 제2, 제3의 천안함 사건이 일어날 개연성이
충분한 부대라는 생각에 실망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군에 반도(半島)인 나라의 안위를 맏기고 살아가는 국민, 이처럼 나사빠진 조직을
먹여살리는 국민이야 말로 가엽지 않은가.
상명하복의 사병이 무슨 상대가 되겠는가.
책임있는 담당 장교를 상대하여 추궁하려는 내 기세가 대기실 분위기를 경색시켰는가.
사정을 파악한 한 초로 부부가 자기 차에 동승하기를 권함으로서 사건은 미봉으로나마
종결되었으나 군의 무책임 무성의는 여지없이 노정되었다.
책임있는 조직이라면, 내부의 사정이 불가피했다면 극복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천안함의 인력도 증발되어버렸다.
108명중 5분의2가 넘는 46명가족의 목숨을 수장하고 동강난 흉물(천안함)을 보는 순간
다시 분노가 치밀고 일어났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가해자는 과연 누구인가.
적극적으로 공격한 자만이 가해자인가.
저 것이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교육시킨단 말인가.
바람빠진 고무공처럼 말랑말랑 흐느적거리는 군이 누구에게 경각심을 요구한단 말인가.
총알받이가 된 군함도, 두동강난 천안함도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며 무수한 장정의 비극
역시 못되고 못난 책임자 때문이 아닌가.
마(魔)의 목요일 찜질방
고백컨대, 해군제2함대사령부의 견학 3시간(대기2시간포함)은 내게 백해무익이었으며
귀한 시간의 낭비였을 뿐이다.
나는 안보공원, 천안함 보기 전에도 우리의 분단현실에서는 바다의 휴전선에 다름 아닌
NLL(Northern Limit Line/북방한계선)이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으니까.
이 불행한 휴전선을 비롯하여 이데올로기에 따른 온갖 소모적 갈등과 희생을 이 땅에서
평화롭게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이 통일이다.
나는, 우리 민족에게는 서로가 윈윈(win win)하는 건전한 통일만이 선(善)이라고 믿는
통일교(문선명의 통일교가 아님) 신도다.
통일지상주의자(統一至上主義者)라 할까.
이베리아 반도의 사도 야고보 길에서도 내가 한국의 분단 현실에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한국인에게 당면한 선(善)은 통일뿐이라고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무지개를 쫓다가 놓쳐버린 소년의 허탈한 심정이 이럴까.
맥빠진 걸음을 수습하여 다음 해안을 찾아갔으나 이번에는 포승국가산업단지에 막혔다.
평택의 해안선에서 아직 한걸음도 떼어보지 못하고 저녁놀을 맞게 되다니.
화성 땅에서 평택 땅에 와있다는 것 외에는 거의 공친 날이다.
이 시각에는 평택호 또는 아산호 어디쯤, 경기도와 충청남도 경계 어느 쪽에 있는 것이
정상적인 운행이라 할 것인데.
마치 일도 하지 않고 일당 받은 것 같고 집으로 향하기도 민망한 날.
귀가 길에 오르지 않고 공단 안에 있는 찜질방으로 향했다.
내일, 오늘 못한 일까지 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찜질방 정보는 낮에 이종일이 전화로 확인해주었다)
서남동 길 첫 외박이다.
포승읍 도곡리 불가마 한증막은 밤이 깊어가는데도 매우 한가로웠다.
주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그네로서는 아주 편히 쉬어갈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정맞은 생각이었나.
돌연한 왁자지껄에 막 들려는 잠이 달아나버렸다.
바로 이어, 마치 빚받으러 몰려온 떼거리처럼 남녀노소가 들이닥쳤다.
나같은 늙은이는 안중에도 없는 듯 좌충우돌 소란을 피웠다.
불난 호떡집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우리 말과 중국 말이 뒤섞인 난장판이 도무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모두 반 귀머거리들인가.
대판 싸우듯 고래고래 소리지르지 않고 속삭이듯(whispering) 할 수는 없을까.
에티켓(etiquette)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보따리장수 중국 동포들이다.
예절이 밥먹여 주는가.
찌든 삶에 예절 챙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따리장수 길이 열리면서 쏠쏠하게 재미를 보고 있다는데, 그래서 입성도 제법
세련되어 가는데 언행은 왜 구태 그대로 일까.
찜질방 안에서 진행되는 상거래가 새벽 한하고 계속되었다.
한약제가 주를 이루고 있는 듯 한데 거래자 모두가 이 찜질방 단골인 듯 익숙해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이없게도 찜질방 불경기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연방 머리를 조아리는 찜질방 여직원은 목요일 밤마다
북새를 떨게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이 중국발 국제선이 도착하는목요일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 찜질방이 바로 중국 동포 보따리장수들의 아지트(agitpunkt) 겸 블랙 마켓
(black market)인 셈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해군제2함대사령부에서 천안함 처럼 망가진 일정인데 마(魔)의 목요일 찜질방에서 좀
시달린 들 어떠랴.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