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아연극상에 다녀왔습니다. 46회를 맞는 이 시상식은 아르코대극장에서 열렸습니다.
누가 상을 받는지는 이미 리스트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궁금했던건 수상 축하퍼포먼스와 수상자 몇 명의 수상소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출동했지요.^^ 대체적으로 패기 넘치면서도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관찰력과 담론을 담아낸 작품들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작품상은 극단 <골목길>, <연희단거리패>에게 돌아갔습니다. 극단 <골목길>의 연출가 박근형은 관객에게 버림받지 않는 연극을 만들겠다는 수상소감을 말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전부터 생각해왔지만 연극가에 오르는 작품들 중에는 지나치게 폐쇄적이거나 자조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져 극장에 가는 것이 망설여질 때가 있죠. 그래서인지 박근형 씨의 뼈있는 소감은 반가웠습니다.
▲ <연희단거리패>의 작품상 수상 장면입니다.
연기상은 배우 장영남과 최광일 씨가 수상했습니다. 특히 최광일 배우는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열연했지요. 물빠진 청바지에 갈색 자켓을 입고 단상 위로 올라오는 최 배우의 모습은 멋졌습니다. 블링블링 블랙과 레드 일색이었던 수상자들의 드레스 코드와 확연하게 다른 모습! 곤조 있어보였어요.
희곡상을 수상한 배삼식 작가는 훈훈한 로우톤의 목소리로 장내를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삶이 드라마틱하길 바라지도 않죠." 라는 말로 소감을 말하는 그의 어깨 언저리에는 그간의 고생이 얹혀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그가 드라마를 쓰는 이유는 결국 드라마에는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이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의미도 목적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삶의 여정을 앞으로도 꾸준히 들여다보겠다는 인사로 수상소감을 마무리 지은 그에게는 한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적인 소감이었습니다. ㅎㅎ
▲ 희곡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배삼식 작가
<방바닥 긁는 남자>의 이윤택 감독은 동아연극상 최다수상자라고 하더군요. 이번 시상식에서는 무대미술기술상을 수상했습니다. 원로임을 증명하는 희어진 머리칼과는 다르게 이 감독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말투도 시원해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대디자인상을 수상한 그는 최대한 돈을 안 들이고 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다가 너희들끼리 해봐라 하면서 배우들에게 직접 세트를 맡겼다는 후일담을 들려줬습니다. 무대 제작을 배우들이 함께 한 것이지요. 그는 단상 위로 제작자를 불러 세웠습니다. 4명의 남자 배우들이 쪼롬히 불려나왔습니다. 원로 옆에 선 그들은 굉장히 귀여워 보였습니다. 연기 연습하랴, 뚝딱뚝딱 무대 만들랴 그간 힘들었던 고생을 잠시나마 보상받을 수 있는 자리였기를 바랍니다.^^
▲ 무대미술기술상 수상자 이윤택 감독입니다. 얼굴은 착한 사람에게만 보여요~
수상 퍼포먼스는 작품상을 수상한 <골목길>과 <연희단거리패>의 공연이었습니다.
▲ <연희단거리패> 수상 퍼포먼스 입니다.
▲ 극단 <골목길>의 수상 퍼포먼스 입니다. 짧지만 임팩트 있었습니다.
특별상은 故 한상철 선생님에게 주어졌습니다. 작년 불운의 사고로 명을 달리한 한국 연극의 대 비평가입니다. 한국 연극 이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셨지요. 해외의 좋은 연극이론들을 가져와 한국에 심는 역할도 훌륭하게 하셨던 분입니다. 오늘은 따님이 대리수상을 했습니다. 사고가 생긴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뜻깊게 기리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울음을 꾹 눌러가며 수상소감을 말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글을 쓰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늘 글을 쓰시던 그 책상 위에 상장과 상패를 두겠다는 인사는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짠했습니다.
신인상 부문은 남자 배우, 여자배우, 그리고 연출상 순이었습니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게 하는 희망이 시상식장을 지배했습니다.
특히 신인 여우상을 수상한 이지현 배우는 "이 상(동아연극상)을 정말 받고 싶었는데 이렇게 받게 되어 기쁘다"는 솔직한 소감으로 장내를 훈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배우'에게 주어진 신인상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는 무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후배들과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나이는 한 살씩 더 먹어가고, 뭔가 보여주어야 할 것만 같고. 그 조급함과 막연한 불안감을 뚫고 탄생한 연기에게 주어진 선물이 이지현 씨에게는 정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더 좋은 연기로 무대 위에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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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만 말씀드리면 시상식은 생각보다 아담했고, 그들만의 잔치였습니다. 특정 수상자나 연극에 관한 언급이 나올 때마다 터져나오는 떼거지의 함성이 이를 증명했습니다. 일부에서는 그들을 향해 눈살 찌뿌리며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원로들과 끓는 피를 품은 젊은 연극인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시상식 초반에는 준비가 덜 되어 매우 미숙하고 매끄럽지 못한 진행을 보였습니다. 동아일보와 KT의 지원을 받는다는 말이 무색했지요. 그래서 기분 나빴냐구요? 전혀요. 오히려 짠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리그에서 당당히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한 수상자들의 떨림과 감격을 현장에서 마주했던 것은 관객으로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연극하기 정말 힘듭니다. 연극에서 흘러나온 대사 한 조각이 전국을 뒤흔들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연극인의 꿈을 펼치기엔 너무나 빡빡한 재정, 찾는 사람들만 찾는 극장. 요즘 관객들은 점점 똑똑해지고 개인적 취향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극단 입맛에만 맞는 연극을 할 수도 없습니다. 까다로운 관객들의 취향도 충족시켜야 하니까요.
수많은 시련과 노력, 그리고 순도 높은 열정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과 배우들입니다. 시상식이라는 좋은 명분이 있지만, 굳이 시상식이 아니어도 그들은 충분히 인정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누구도 그들의 노력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길지 않던 시상식이 따뜻했던 이유는, 눈물 어린 고생에 비해 작은 선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마음을 다해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이 뭉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글, 사진 : 균미
첫댓글 살아있는 연극을 볼 수 있는 동네에서 자라서인지 엄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술술나와 반갑기 그지없고 연극의 동네, 예술적 감각을 평소에 익히며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배어나온 듯한 글을 읽으며 일상에서 꾸준하게 대화하며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있음에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얼까 다시 생각하게 해주어서 이 자리를 빌어 더 젊어지는 엄마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고 싶으이.
열정으로 써내려간 균미 글과 엄마의 마음이 담긴 댓글이라..
쉬이 리플을 달 수 없는 저의 마음을 두 분 다 알고 계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