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야곱의 우물 원고
봉헌금은 얼마를 내야 하나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지폐들이 죽어 하늘나라에 왔는데, 베드로 사도가 천원짜리 지폐는 환영하며 천국으로 가라하고, 오천원과 만원권은 연옥으로 가라고 하셨다. 이윽고 십만원과 백만원권이 죽어 하늘나라에 오자 베드로 사도는 이들에게 지옥으로 갈 것을 명하셨다. 십만원권과 백만원권이 불공평하다고 따지자 베드로 사도가 하시는 말씀: “너희를 성당에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신부님들이 성당에서 가장 하기 싫은 말이 ‘돈’ 이야기라고 한다. 성당 운영과 본당 건축 문제로 돈 이야기를 할라치면 대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은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같이 살기 힘든 시대에 성당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신자들에게 감사할 판국에 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떠맡겨야 하는 신부들의 고충도 여간 적지 않다. 차라리 십일조와 각종 봉헌금을 신자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로 강조하는 대부분의 개신교처럼 “헌금=축복”이란 의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천주교 신자들은 연초에 책정된 교무금을 매달 바치는 일조차 버거워하고, 그나마 교무금 책정도 하지 않는 열심한(?) 신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본당 신부 경험이 없이 신학교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돈 문제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처자식이 없어 내 몸 하나 가꾸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을 별로 느끼지 않는 신부의 삶이다보니 일반 신자들이 겪는 ‘돈’에 대한 고충을 알 리가 없다. 본당 운영과 건축 등의 일을 맡아본 적도 없으니 돈이 궁하다는 것이 뭔지, 돈을 빌리고, 돈을 갚아가는 어려움도 잘 모른다. 천원 한 장이 아쉬워 시장바닥에서 콩나물을 앞에 두고 실갱이를 벌이는 가정주부의 고민과 자녀들의 사교육비로 허리가 휘는 현실의 고충을 몸으로 느끼지는 못한다. 성당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로 천 원 한 장조차 낼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솔직히 과부의 헌금(마르 12, 41-44)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가난하지만 평생을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남모르게 봉헌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가난의 영성 혹은 비움의 영성을 강조해온 가톨릭 교회는 영적 가난의 정신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정작 그 영성을 구체적인 삶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신자들의 애환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조금 억지 같지만 세월이 흘러도 천 원짜리 한 장으로 헌금을 대신하는 신자들을 타박하는 사목자들은 한 가족이 내는 천 원을 모으면 적지 않은 돈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본당 신축금을 모아야하는 신부들은 신자들의 의무와 하느님께 바치는 정성을 호소하지만, 정작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 때문에 평균 5년마다 한 번 이사를 해야 하는 전세살이 신자들의 고충을 잘 모른다. 설령 좋은 마음으로 신축금 신립을 해도 이사를 하고나면 이내 “내 성당”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나, 기껏 건축금 봉헌하고 나니 본당이 분가해서 또 다른 신설 성당을 위해 신립을 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 신자들도 있음을 헤아려야 한다.
대체로 헌금에 관해서는 한국 개신교를 따라가기는 힘들 것 같다. 개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전통에 대해 가톨릭 신자들의 인색함을 탓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교회가 분명히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점은 세상의 재물의 많고 적음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재물을 어떻게 쓰는 것이 정말 행복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일이다.
예수님도 재물에 대한 탐욕을 늘 경계하라고 이르신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가 12 21)에 대해 나무라시면서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 34)고 하신다. 정말로 살다보면 돈 몇 푼에 목숨을 걸고, 서로 다투며 결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부모 자식 간에도, 형제 간에도, 친한 교우들 사이에도 재물을 앞에 두고 죽네 사네 하는 일들이 주변에 허다하다. 도박으로 한탕 인생을 노리는 사람들, 로또에 인생 역전을 꿈꾸는 이들. 투기와 속임수로 자기 이익만을 구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이 계실 자리는 없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점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아니라, “상대적 가난”에 하느님의 자리를 내주는 우리들의 나약함이다. 또한 ‘청빈(淸貧)’의 가치만큼 ‘청부(淸富)’, 즉 양심적으로 부(富)를 쌓고, 재물을 나눔으로써 얻는 ‘내적인 부(富)’와 행복감의 의미를 깨닫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교회에 내는 봉헌금에 대한 생각을 바꿔보는 일이다. 미사 때 봉헌하는 헌금은 한 주일 동안 내려주신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표현이다. 주님의 제단에 각자가 얻은 소출의 일부를 정성껏 봉헌하면 사제가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로 봉헌하는 것이다. 그래서 헌금은 금액의 크기보다는 정성에 달려 있다. 지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폐 한 장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한 주일 동안 살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아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외식 때 맛나게 먹은 밥 한 끼를 예수님께 봉헌하거나, 뜻 밖에 얻은 수익의 일부를 기쁘게 교회에 봉헌할 수도 있다. 힘든 과제나 어려운 고민이 잘 풀렸을 때 감사의 마음을 봉헌할 수 있다. 예쁜 봉투에 정성을 담아 미리 헌금을 준비할 수도 있고, 새 지폐에 마음을 담을 수도 있다.
돈이 우상이 되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가톨릭 신자 역시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돈보다 인생을 더 행복하게 해주는 값진 가치들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신자다운 일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 환자와 냉담자를 방문하고, 어려운 가정의 일을 돕는 시간의 봉헌이나, 남이 싫어하는 교회의 궂은일을 맡아 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남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애덕의 실천 역시 돈보다 더 가치 있는 봉헌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야할 돈에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봉헌을 받아주실 하느님의 얼굴과 미소를 먼저 떠올리는 일이다. 그것이 본래 돌고 돌아야 하는 ‘돈’을 하느님께 다시 돌리는 신자들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첫댓글 하느님에게 심어야 나중에 거둘수 있고 지금도 거둡니다. 진짜로 천원내시는 40대 가장은 생각 해봐야할 문제입니다. 담배값보다 못한가?
받은 은혜가 하느님의 사랑과 보살핌이었기에 이에 대한 답례로 흠숭, 찬양, 경배 등을 물질적으로 드리는 것, "사랑과 희생이 담긴 봉헌"을 주님은 반기실 것입니다.
거져 받았으니 나눔이 아니라,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해야....
감사의 마음을 봉헌하고 각자가 얻은 소출의 일부를 정성껏 봉헌하면 사제가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로 봉헌하는 것. 다시한번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애덕의 실천 " ] 쉬운일은 아니나 앞으로더 노력을 해야할 일인것같습니다. 다시한번 봉헌에 대해서 생각할수 있게 해주신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저도 예비신자들에게 교무금 책정얘기할때 좀 갈등 느끼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모대부 서실때 가능한형편껏 많이 내라고 얘기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원만 해,,,이런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좋은 글 잘 읽고 제 카페로 모셔갑니다.